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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26화 (26/126)

27화. 여름비가 스며들 때. (2)

2018.04.24.

"비 전하. 그러니까 미리 전염병에 면역을 키울만한 식자재를 미리 공급하자는 것이지요?"

"네, 루카스님. 여름 우기 동안 습하고 차가운 기운에 약해진 몸이 갑작스러운 기온 상승으로 리듬을 잃으면 쉽게 병에 걸리지요. 그리고 위생에 신경을 쓰더라도 약해진 면역은 작은 병기운에도 크게 몸을 상하게 만드니까요."

"일리 있으십니다."

집무실에서 루카스 보좌관에게 내 의견을 들려주었다.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 와중에 황태자는 멍했다. 저기요? 일 안 해요?

"카일?"

"응?"

"카일의 의견은 말 안 해줄 거예요?"

내 부름에도 멍한 그가 못마땅했다. 내가, 황태자비로 일 쫌 해보겠다는데! 이러기냐?

멍하게 내 얼굴을, 응? 아닌가? 살짝 밑, 어딜 보는 거야! 저 변태 황태자가!! 어젯 밤에 안아 재워 주는 게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는 이 거리면 확실히 들릴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루카스는 안 들리게 작게 웅얼거렸다.

"당장 그 시선 안 치우면 각방 쓸거예요!"

화들짝! 놀란 표정에서 그의 당혹감이 느껴졌다.

"세, 세이! 너무해!"

흥이다. 진짜 오늘 각방 쓸까 보다. 카일과 나를 번갈아가며 잠시 돌아보는 루카스에게 나는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루카스님. 그래서 말인데 오로스타키스를 대량으로 구할 수 있나요?."

"그게 뭐죠?"

"아, 바위틈이나 지붕 등에서 자라는 풀인데 장복하면 면역이 좋아지는 풀이에요. 여름철 지나치게 오르는 체온을 낮춰주는 효능도 있어서 평민들이 많이 먹는다고 하더군요."

음. 식물들의 효과를 다 아는 나지만 학자들처럼 유식하게 말을 풀어 낼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그래서 민간의 말을 꺼냈는데 날 믿어주지 않으면 어쩌지?

"흠. 그렇군요."

"벽돌로 지은 집에서는 흔히 자라서 평민들도 쉽게 구하는데, 빈민가의 흙집에서는 못 자란다고 하더라고요. 황궁이나 귀족가의 집에서 채취하면 좋을 듯한데..."

"효과만 확실하다면 추진 할 만 하지요. 비 전하께서 어찌 그런 풀을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그게 그러니까요."

그래. 귀족 영애 출신이 민간요법으로 쓰이는 풀을, 그것도 효능까지 알고 있으면 이상해 보이긴 하지. 근거도 없어 보이고. 간과했다.

"자, 여기."

그때 카일룸이 책장에서 꺼내 온 책 한 권을 펼쳐서 내밀었다. 그는 내 눈치를 살살 살피고 있었다. 얼굴에 칭찬해 주세요가 새겨져 있었다. 윽, 역시 대형견의 아들. 닮았네. 어쩌냐.

책에는 오로스타키스의 효능이 적혀있었다.

수분이 많고, 청명한 기운으로 몸을 보호하고 병의 침입을 막아낸다. 운디네와 실프의 가호가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오, 황태자님 나이스! 내가 슬쩍 그를 향해 빙그레 웃어주자 그가 안도한 듯 내게 칭찬해 달라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각방은 안돼. 절대로!"

루카스 앞에서 진짜!! 못 말려!!

황태자비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구제를 맡은 구역이 적어서 다행이었다. 내 구역을 감당할 만큼의 오로스타키스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능한 루카스!! 최고예요!! 카일룸의 지원으로 나의 첫 빈민 구제 정책이 잘 치러질 것 같다.

루카스와 그 외에 지원 품목을 미리 의논하고 결정했다. 내가 아는 식물의 지식을 이용해서 가을에 파종할 구황작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자 루카스와 카일룸이 박식하다며 칭찬해 주었다.

조금 부끄럽기도, 입꼬리가 씰룩이기도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올해 괜찮은 결과를 얻으면 내년에는... 아니다. 그땐 내가 없을지도 모르니 아르세이아를 위해 일기에 써 놔야겠다. 다시 급격히 우울해졌지만 날 보고 웃고 있는 카일룸을 위해 티 내지 않았다.

부슬비가 그치고 잠깐 드러난 하늘에 뜬 무지개가 예뻤다. 당신과 나 사이에도 무지개가 연결되면 좋겠다. 영원히 우리 사이를 이어줄 무지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세이, 각방 안 쓰는 거 맞지? 그치?"

... 아니다. 취소.

루카스님도 결국 민망한지 제 수하들을 보러 간다며 나가 버렸다.

"일주일 각방 할까 보다."

"그건 안돼!! 제발."

"그렇게 싫으시면 1미터 이내 접근 금지로 바꿔드리죠."

절망한 그의 표정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날 밤 또 뇌성과 함께 비가 찾아왔다. 그는 침대 끝에 누워서 울 것 같은 사슴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신 업무 시간에 한 눈 팔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서야 그는 내 옆으로 올 수 있었다.

"세이, 말 잘 들을 테니까 다신 떨어져 있으라는 말 하지 마."

"카일이 하는 거 봐서요."

시무룩하기는!

으유. 불쌍해서 내가...

안아 준다. 진짜. 일루와 카일.

꼬물꼬물 기어 와 안기는 게 마치 아기 원숭이 같아. 귀여워.

오늘도 우리는 서로 나약한 마음을 침범하려는 악몽을 막아주며 서로의 안락한 밤을 지켰다.

* * *

이 주일 가까이 오락가락하던 비의 횟수가 줄어들며 점차 무더위가 찾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데피니토르의 한 여름은 길지 않다. 대신 짧고 굵다.

어릴 때에는 이런 더위가 찾아오면 숨겨진 시원한 동굴을 찾았었다. 목장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었는데...

에이린 말로는 후작님이 직접 목장 관리인을 보내서 한 마리도 다치지 않게 잘 보살핀다고 했으니 다들 잘 지내겠지?

"덥지? 얘들아."

무더위에 지친 양의 털을 깎아주라고 지시한 나는 그 모습을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지만 카일룸 불러다가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는 밤마다 날 끌어안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정령력을 마구 쏟아부어 날 밤새 시원하게, 약간은 서늘할 정도로 만들어주었다.

그를 껴안지 않음 이 한여름에 감기에 걸릴지도 모를 만큼 차갑게 만들었다. 지능적인 데다가 실행력까지 갖춘 변태.

도대체가 정령왕들은 이렇게 음흉한 영혼과 왜 특별계약까지 맺어가며 대가도 거의 안 받고 돕는 거지?

그렇지만 내게 서로 꽉 껴안고 자거나, 가벼운 키스 외에 요구하는 것이 없어서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그의 품이, 음, 꽤나 따뜻하고 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의 품에 안겨있으면 내 안의 어둠이 밀려날 만큼 든든하니까.

흠흠.

"전하. 털은 어찌할까요?"

"으음. 카일룸을 위한 부츠랑 장갑의 안감으로 쓰면 좋겠지? 제국의 겨울은 매서우니까."

미리미리 준비하는 거지. 양털은 매우 따뜻한걸. 그래서 겨울엔 종종 양 친구들 품에 안겨 자고는 했다.

"전하께서 좋아하시겠네요. 그래도 털이 남을 것 같은데 비 전하의 것까지 커플로 만들겠습니다."

"응."

커플 소리에 왜 내 뺨이 붉어지는 거지? 흠흠.

"동물들이 더위 타지 않게 물도 자주 뿌려주고 신선한 야채 많이 챙겨먹여줘."

나의 당부에 목장 담당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돌아갈 준비를 하자 동물들이 내 곁으로 몰려왔다. 내가 한 마리 한 마리 다 머릴 쓰다듬어주자 그제서야 떠났다.

"어쩜 저리 주인을 잘 알아볼까요? 알비케라경처럼 다들 똑똑하네요."

"으응. 그러네."

똑똑하다기보단, 음. 본능이랄까?

"비 전하, 마담 레이아와 스튜어트 남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달, 가을이 시작되는 달의 마지막 날은 카일의 탄생연이 있는 날이었다. 그의 생일 파티.

그의 탄생연이 끝나고 나면 예전에는 황태자비의 간택연이었지만 이제는 다시 평범한 귀족 소년, 소녀들이 성인이 됨을 알리는 데뷔탕트다. 데뷔탕트는 황후가 주최하기로 했지만 탄생연은 내가 주최해야 했다.

잘 해내고 싶었다. 국혼을 치르고 첫 공식 연회를 내가 하는 것이니, 그를 망신시키지 않도록 잘해야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내 드레스를 담당할 마담 레이아와, 보석상인 스튜어트남작이 그 시작이었다.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들 나시게."

마담 레이아는 내게 준비된 드레스의 초안들을 보여줬다. 하나같이 우아하고 예뻤다.

"전하의 적금발과 어울리도록 수를 붉은색 실에 금가루를 먹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흠. 이 수의 중심에 비 전하의 눈을 닮은 푸른 사파이어로 브로치를 만들면 좋겠군요."

그들이 나를 향해 내 외모에 대한 찬사와 함께 이것저것을 추천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브로치가 따로 있다네."

"하명하십시오."

"골든 베릴, 아니면 옐로 다이아몬드."

내 말 한마디에 그들은 아! 하고 창작열을 불태웠다. 나는 딱 한마디만 덧붙였다.

"음, 그러니까, 커플로. 하나는 카일룸께 선물할 거니깐."

두 장인의 눈빛이 아주 불타올랐다. 나는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 시간 그들과 원하는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 주고받은 뒤, 내가 원할만 한 디자인을 그려 보여 준 뒤 그들은 돌아갔다.

"후아, 이게 시작이라니!!!"

그 외에도 준비할 것이 많았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면 될 것이다. 힘들면...

"세이, 내가 도와줄까? 처음이라 어렵잖아."

"이봐요, 카일. 이래 봬도 나 황태자비거든요? 나 잘할 거예요!"

말만으로도 든든하니까.

"그런데, 왜 일하다 말고 또 여기로 온 거예요?"

"그대가 낯선 남자를 만난대서..."

윽, 아 스튜어트 남작은 아직 미혼 이랬나? 보석상 이랬으니 부유하겠지만 황태자보다는 안 많을 거고, 외모도 준수한 편이었지만 내 눈앞의 남자보다는 모자라고. 무력은 네가 더 잘났잖아요. 전부 자신이 더 나은데 어찌하여 이렇게 제 아내에게 자신이 없는지.

"마담 레이아가 있었어요. 그리고 내 남편이 이 데피니토르에서 제일 잘난 남자인데 도대체 뭐가 걱정이에요?"

"응응. 알았어 혼내지 마. 응? 남편? 어엇? 제일? 헤헤헷."

이 바보 같은 남자를 어쩔까? 후훗.

"자, 그럼 이만 일하러 가시죠. 황태자 전하."

가기 싫어서 칭얼거리는 그를 내가 에스코트하듯 내 팔 위에 그의 손을 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친절하게 그를 모시고 집무실로 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비 전하."

"아, 클리페울룸 경. 오랜만이에요."

카일룸의 황태자 근위대장 테일러 클리페울룸. 첫 만남에서의 적의는 많이 흐려졌다. 아니 이제는 완전한 호감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황궁으로 돌아가던 날 밤, 불을 보고 놀랐던 일로 그날 밤 카일이 기사들을 많이 굴렸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원인이 되어 기사단이 굴려진 일에 조금 삐졌었다고.

"야, 네 주군은 나거든. 나는 눈에 안 보이냐?"

"주군의 주인이 비 전하라서 비 전하께 먼저 인사드린 겁니다."

"어. 그래. 잘했어."

왜 서로 납득하는데?

내가 카일의 집무실에서 알게 된 것은 그가 현재 황제파의 손도, 귀족파의 손도 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령왕들의 힘 때문에 온 제국민의 칭송을 받는 힘 있는 황태자인지라 다른 세력의 지지 따위는 필요 없다 여겼다. 어차피 그를 대신할 황자는 없으니까. 차라리 자신과 제국을 위해 헌신할 새로운 세력을 키우길 원했다.

그 중심이 루카스 페르데우스와 테일러 클리페울룸이었다. 황태자의 친우들이자, 그의 든든한 지지자.

"저기, 저는 카일의 동반자이지 주인이 아닌데요."

"아닙니다. 냉정하다 못해 얼음장 같은 우리 전하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 인간답게 만드신 분은 비 전하뿐입니다."

도대체, 카일의 예전 모습이 어느 정도였기에? 어느새 옆에서 루카스도 거들었다.

"전하를 웃게 만드는 분은 비 전하뿐입니다. 계속 전하를 웃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래야 저희 숨통이 트입니다."

"네에..."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카일을 힐끔 보자 그가 어깨만 으쓱했다. 흐음. 좀 능글맞긴 해도 내 앞에선 늘 웃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왜들 이런데?

어쨌든 적의를 받는 것보다야 호의가 좋으니까.

"그런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훈련시간 아니야?"

"아, 드디어 전령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근위대장이 직접 올 정도의 소식이면.

"몬테 공작령의 전염병 발생 소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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