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여름비가 스며들 때. (1)
2018.04.23.
며칠 동안 여름비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알비케라는 산책을 하지 못해 실내에만 갇혀있었다. 비가 들치지 않는 궁 입구에서만 배변활동을 하게 된 알비케라는 밖에 나가지 못해서인지 영 기운이 없었다.
"알비, 심심해?"
"끼웅."
"조금만 참으렴, 곧 해가 날 거야."
그리고 비가 그치면 무더운 한 여름이 한 달 정도 이어질 것이다. 그 시기에는 늘 전염병이 극성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비를 황태자비의 역할을 하고 있는 내가 해야 했다.
물론 수로 정비와 위생 등 전반적인 전염병 관리는 황태자인 카일룸이 하고 있었다. 황제는 건강 상의 문제와 후계자인 황태자의 교육을 명분으로 실무처리를 그에게 맡겼다.
그래서 바쁜 그를 보려면 집무실로 가야 했다. 그마저도 회의나 외근으로 만나기 힘들었지만. 아무리 바빠도 그는 꼬박 황태자궁으로 돌아와서 잤다. 정확히는 내 방으로 와서 잠을 청했다.
여전히 손만 잡거나 꼭 껴안고 잠만 자는데도 꼭 돌아왔다. 비둘기처럼 귀소본능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였다.
아무튼 바쁜 그이기에 전염병이 발생했을 시의 구제 대책을 미리 준비하는 일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흐음. 식량 비축분은 충분한 것 같고."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깨끗한 식수와 약이었다. 식수는 황태자를 닦달하여 매일 일정량의 정수된 물을 오크통에 저장하여 서늘한 지하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정령이 만든 물이라 썩지도, 병들지도 않는단다.
대신 내 입술을 허락해주고 있다. 아니 아니, 오해하면 안 되는데, 딱 버드키스까지다. 뽀뽀하는 순간 가끔 그가 장난을 치려하긴 하지만 내가 정색하면 알비케라에게 하소연하는 게 귀여워 혼은 안 내고 있다.
"알비, 너도 카일 보고 싶지?"
"멍!"
어느새 둘이 너무 친해졌어. 저번에도 느낀 건데 네 1순위가 이제 내가 아닌 것 같다? 뭐 네가 먹는 고기가 카일룸에게서 나오는 거고, 이 만월궁의 서열 1위가 그인 것을 알아본 거겠지만, 서운해!!
"흠, 대부분의 여름철 빈민들에게 도는 전염병은 식중독이니까, 식중독에 좋은 비리디스랑 생강을 일단 준비시키자."
흐음. 그런데, 이미 닥치고 나서 보다는 예방하는 게 좋은데. 내일 카일룸이랑 루카스에게 물어봐야지.
오늘 밤은 빗줄기가 굵어졌다. 곧 천둥 번개라도 치겠는데? 카일의 귀한이 늦어졌다. 아직 궁 밖 이랬는데 걱정되네.
"모일라, 황태자께서 환궁하셨다는 전갈이 아직 없어?"
"예."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카일룸은 늦어서 새벽에 돌아오더라도 꼭 내 방에서 잤다. 혹시 본인이 늦어질 것 같은 날엔 꼭 알비케라랑 있으라고 했다.
그의 배려에 나는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돌아오면 알비케라는 내실에 있는 작은 개집으로 쫓겨났지만.
그러고 보니, 그와 잘 때면 어린 시절부터 나와 함께 한 악몽이 사라졌다. 진짜 내가 그를 많이 믿고 의지하는구나가 여실히 느껴졌다.
"모일라. 내가 이 시간에 전하를 마중 나가면, 궁인들에게 민폐일까?"
"아닙니다. 이 궁의 안주인이시니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셔도 됩니다."
"흐음."
민폐란 소리네. 걱정되는데. 하긴 내가 나가 봤자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망설여지네.
"저희는 괜찮으나, 비가 심하니 만월궁 입구에서 기다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 까?"
"카일룸 전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모일라가 기분 좋게 웃어줬다. 알고 보니 모일라는 카일의 심복이나 다름없었다. 그와 친해지고 나서야 그가 모일라를 황태자궁의 시녀장으로 삼은 이유를 알려줬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고, 자신만큼이나 황후에게 원한이 깊은 사람이라 했다. 아마 초기에 그녀가 월권을 행사했던 것은 나를 위해서였을 거란다.
위험한 곳에 황태자가 가는 것을 내가 알면 걱정할까 봐, 황궁 예법이나 규율에 어두운 내가 고생할 까봐 도와주려다 그랬을 것이라고 이야기해줬다.
그래서 내가 초반에 기강을 잡는다고 나서서 똑 부러지게 행동하자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전적으로 날 믿고 따르겠다고 했단다.
내가 진짜 황태자비가 아닌 것을 알면 이 사람 좋은 시녀장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까?
첫인상처럼 우직한 소 같은 그녀는 진심으로 황태자를 아꼈다. 그래서 그가 사랑하는 황태자비를 딸처럼, 진짜 며느리처럼 소중하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모일라가 내게 충성을 다하자 다른 시녀들도 자연스레 모두 내 편이 되었다.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시녀들은 날 잘 따라주었기에 황궁 생활은 더욱더 편해졌다.
있는 동안은 그도, 모일라에게도 잘해주자. 그리고 떠날 땐 눈치채지 못하게 완벽하게 내 흔적을 지우고 떠나야 하리라.
"시녀장은 나보다 카일룸을 더 좋아해. 흥."
"비 전하도 좋아합니다."
꺄르륵 웃은 나는 가볍게 치장하고 1층 입구로 내려갔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몰라 테이블과 의자를 준비해 앉았다. 호위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쉬라며 돌려보내고 모일라와 에이린만 남았다. 물론 알비케라도 함께 기다렸다.
셋이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기다리는데 그가 황궁 입구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르릉.
"흠, 천둥이 치네. 비가 얼마나 더 오려나?"
"비 전하께서는 천둥소리가 무섭지 않나요?"
"실내인데 뭐, 벼락에 대비해서 성에 피뢰침도 있잖아."
태연한 모일라와는 달리 에이린은 번쩍할 때마다 움찔했다.
"흐음. 에이린. 아직도 번개 무서워해?"
"여, 연약한 레이디는 이런거 무서워해도 흠이 아니라고요."
"그건 그렇지. 카일은 연약한 레이디를 좋아하려나? 꺅꺅 거리며 놀려볼까? 복수도 할 겸."
식수 확보로 버드키스를 요구하는 그에게 맺힌 게 많았다. 내가 키득거리며 그를 놀릴 생각을 하자 모일라 시녀장이 말을 꺼냈다.
"황태자께서는 무서워하십니다."
"네?"
"진짜?"
에이린과 내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갸웃대자 모일라가 슬픈 눈으로 말을 이었다.
"전하의 모후이신 전 황후 폐하께서 이런 날씨에 돌아가셨거든요."
아... 음... 나쁜 짓 하지 말아야지.
모일라의 말과 달리 그는 뇌성을 뚫고 멀쩡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니,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이었다.
"세이? 늦은 시간까지 안 자고 나 기다려준 거야?"
"비가 많이 와서 걱정돼서요."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나를 안고 싶지만 말을 타고 와 비에 젖은 몸이라 자제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대신 알비케라를 안아들었다. 아니 저기요. 개털도 젖는데요?
"네 주인을 잘 지켰겠지 알비?"
"멍!"
그러고는 반갑다고 그의 입술을 할짝이는 알비케라와 묘한 표정의 그. 뜨끔. 예전의 감촉을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카일, 여름 비지만 감기들 지도 몰라요. 얼른 옷 갈아입고 쉬어요."
일단, 신경을 돌려야 해!!
"흐으음. 나의 비가 얼른 나와 단둘이 있고 싶은가 보군."
으이고, 그래 이래야 카일룸이지. 천둥소리 따위 무서워하지 않는 뻔뻔한 나의 황태자님.
하지만 진짜 감기가 걸림 안되니깐 얼른 올라가기로 했다. 내 몸에는 정령력을 마구 쓰면서 왜 자신에게는 낭비하지 않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좀 소중히 여기지.
하긴, 이렇게 비가 오는데 계속해서 정령력을 쓸 순 없었겠지. 말려봤자 다시 젖었을 거야.
... 방어막 같은 것은 못 치나? 나같음 내 몸에 빗방울 하나도 안 닿게 하겠구먼.
같이 3층까지 올라온 뒤 그는 자신의 주인 잃은 방으로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방은 요즘 그저 드레스룸인 듯했다.
잠시 후 어찌나 빨리 내 방으로 들어왔는지 머리도 안 말린 그가 조금 우스웠다. 급했던 모양이었다. 그사이 많이 번쩍대긴 했는데. 진짜 무서워하나?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밖에서 더 직접적으로 뇌우를 맞닥뜨릴 때에는 황태자이기에 무서운 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랫사람들 앞이니까 미래의 황제인 그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법이다.
지금은 내 앞이니까 저렇게 당황한 것임에 틀림없고.
우르르르 콰과과쾅!!!!
벼락이 근처에 떨어졌는지 큰 소리가 났다.
"카일?"
굳어버린 그의 표정이 느껴졌다. 호오오, 진짜 무서워하는구나. 살짝 놀리고 싶었지만 무서워하는 이유가 떠올라 참았다.
"카일, 이리 와요. 내가 머리 말려줄게."
내가 다정하게 청하며 그의 손을 잡고 침실 한쪽의 의자로 그를 끌고 갔다. 조금 멍한 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황태자라는 위치 때문에 태연하게 버텨냈던 남자의 약한 모습에 코 끝이 찡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수건을 그의 청남색 머리 위에 올리고 톡톡 두피를 두드렸다. 계속해서 창밖이 번쩍이는 와중에도 나는 침착하게 머리를 말려줬다. 카일은 실프를 부를 정신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말랐을 때 빗을 가져와 살짝 빗어 주었다. 빗질을 따라 넘어가는 그의 머릿결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빗질을 해주는데 다시 한번 근처에 벼락이 떨어졌다.
"카일. 나 아파요."
그가 내 손목을 아플 정도로 꽉 잡았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내 손을 놓았다.
"미, 미안."
무서워하는 것을 아는 척하면 민망해하겠지? 모른 척할까? 나는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그저 내 손길에 따라 움직였다. 침대 앞까지 가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생각해요?"
내가 손바닥을 살짝 꼬집자 그가 당황한 듯 웃었다. 피식. 나도 웃어주고는 먼저 침대 위 내 자리로 찾아들어갔다. 그러자 그도 조금 뻣뻣하게 자리에 누웠다.
"자!"
내가 크게 인심 쓴다는 듯이 팔을 내밀고 팔베개를 하는 자세를 잡았다. 키득키득 웃던 그는 내 팔 위에 제 목의 파인 부분을 딱 맞춰 올려놓았다. 그래야 팔이 덜 저릴 거라며.
벼락은 한동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뇌성이 울릴 때마다 그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그의 목을 살포시 양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등을 토닥토닥 거렸다.
큰 벼락이 다시 한 번 내려쳤을 때 그는 어느새 내 품을 파고들어 날 꼭 끌어안고 있었다. 얼굴은 내 가슴에 파묻은 채였다.
"카일, 내가 곁에 있는 거 알죠? 괜찮아요."
토닥토닥, 다시 한 번 그의 등을 살며시 토닥여주었다.
한참 후 점차 벼락이 줄어들며 잦아들자 불안했던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그의 숨결이 내 심장 위에 규칙적으로 닿았다가 멀어졌다. 그 간질간질하고 뜨거운 공기에 조금 뺨이 붉어지려 했다. 다행히도 더 뺨이 불타오르기 전 그의 편안해진 숨소리에 맞춰 나도 스르륵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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