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24화 (24/126)

25화. 만월의 유혹. (2)

2018.04.22.

"세이, 어쩌면 나는 내 동생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어. 방치한 내가 나쁜 놈이 아닐까?, 혹시 내가 혐오스럽지는 않아? 혈육을 죽게 내버려 뒀는데, 무섭지 않아?"

그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마차가 만월궁에 도착하였다는 시종의 알림이 들려왔다. 천천히 마차가 멈춰 서자 카일룸은 내 답을 듣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의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이마에 닿는 입술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슬픈 감촉에 내 마음까지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나보다 더 침울해 보였다.

"이만 내릴까?"

어마어마한 이야기였다. 풍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복잡한 이야기. 그리고 그의 아픔. 그가 1황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스친 그리움과 절망이 나의 마음을 절절히 아프게 했다.

그리고 이 모든 다툼을 방치한 황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의 얼굴에 어린 감정은 단순한 원망은 아니었다. 황후에 대한 감정 못지않은 증오심이 그에게 느껴졌다.

내 머릿속으로 그의 시선과 황제가 그를 보던 눈빛이 교차되어 흘러갔다. 더불어 떠오른 내 아버지, 비스 후작.

우리는 둘 다 낳아 준 아버지로부터 외면을 받았었구나. 이렇게나 밝고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도 나와 같은 아픔이 있었다. 둘 다 아버지의 아내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까지 닮아 있었다.

토닥여주고 싶어. 저 쳐진 어깨를 다시 펴게 해주고 싶다. 비스 후작부인의 괴롭힘을 막아줬던 이 사람에게 이번에는 내가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싶었다.

잠시만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 해도 될까?

"카일, 우리 달빛 보면서 산책할래요?"

"세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나는 한창 여름 꽃들에 둘러싸인 분수대로 갔다. 그는 아무 말없이 그런 나를 따라왔다. 단지 내 손에 깍지를 낀 커다란 손에 힘을 주고 따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한 힘이 느껴졌다.

분수대는 가운데 멋진 태양 장식과 이를 둘러싼 크고 얕은 대리석 수로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구두를 벗었다.

"나 젖으면 정령으로 말려줄 거죠?"

"가능은 한데, 날 자극할 만큼은 젖지 말아줄래?"

"으이구, 맨날 그쪽으로만 생각하죠? 하여간에 뻔뻔해."

나는 그대로 수로에 뛰어들어 차가운 물에 발을 담갔다. 그리고 웃으면서 발로 카일룸에게 물을 뿌렸다. 나의 과감한 발길질에 의해 날아간 물방울들은 처참하게 그의 그림자에도 닿지 않았다.

"에잇, 멀어서 안 닿잖아."

이 기회에 평소에 귀찮게 군거 복수도 할랬는데 한 방울도 안 닿냐. 쳇! 내가 입을 삐죽이자 그도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는 분수대로 들어왔다.

"우와, 카일, 나 좋아한다더니 이렇게 무지막지해도 되는 거에요?"

"아, 내가 승부에서 지는 건 싫어해서. 지난번에 진 것 만회도 해야지."

"나 좋다는 거 다 사기였네. 거짓말쟁이. 쳇."

치잇. 너무하는구먼!! 내 꼴이 이게 뭐야.

불만을 내뱉은 나는 젖은 드레스를 쥐어짜서 물기를 빼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완전 물에 빠진 햄스터 꼴로 만들어 놓다니!! 이 비싼 드레스 물에 젖어도 되는 거겠지? 망가지면 어쩌나?

아니, 알고 보면 내 옷이 젖어서 드러난 몸매 보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속으로 피식 웃으며 일단 신중한 손길로 머리카락부터 꾹꾹 눌러 물을 짰다.

그때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작은 떨림으로 가득한 그림자는 나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응? 카일? 왜 그래요?"

"어떻게 하면 그대를 향한 내 진심을 믿어 줄 거지?"

"카일, 노, 농담이었어요."

슬퍼 보이는 그의 얼굴에, 간절한 그의 눈빛에 내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나를 향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간절함.

별빛보다 더 밝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갑자기 가슴께가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연이어 찾아오는 멈추지 않는 두근거림.

그의 깊은 표정에 내 심장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열심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심장 소리가 내게 나의 진심을 알려줬다.

그가 날 지켜주고 싶어 하는 만큼, 나도 그가 아프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아파하는 모습보다는 조금은 뻔뻔해도 밝은 모습의 그가 더 좋았다.

나는 젖은 손을 그에게 뻗어 뺨에 살짝 손을 대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물론, 이 미소는 하나의 가식도 없는, 그의 마음을 붙잡아야 한다는 복잡한 계산 따위는 없는, 오로지 진심만으로 가득 찬 미소였다.

"카일, 나. 있잖아요."

그의 골든 베릴보다 짙고 맑은 황금빛 눈동자가 힘없이 나를 응시했다. 눈동자 속에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소중한 사람이라 믿은 이에게 배신을 당하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 모든 것을 가지고 모두에게 한없이 칭송받는 기적을 일으키는 황태자. 그럼에도 홀로 외로운 사람.

나 역시 그의 진짜 반려가 아니고, 그를 속여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의 진심을 결국 배신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의 진심이 내가 아니라 진짜 아르세이아를 위한 것일테지만.

오늘만큼은 그에게 작은 내 진심을 비추어도 좋지 않을까? 내가 황태자비로 있는 동안만큼은 그의 위로가 되어도 좋지 않을까?

그를 속이고 있다는 현실에 내 양심이 계속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여름밤의 만월이 내게 속살거렸다.

진심을 전해봐. 저 가련한 남자에게 빛을 주고 위로해 주렴. 그러면 저 남자가 다시 네게 웃어 줄 거야. 누구보다도 환하게, 빛나게, 단 한 사람을 위한 미소를 네게 보내 주겠지.

"카일이 슬픈 표정 짓는 거 싫어요. 나도 당신이 웃는 모습만 보고 싶은걸. 늘 곁에서 함께하며 웃게해주고 싶단 말이에요."

달의 유혹에 져 전해진 내 진심에 그의 얼굴 한가득 미소가 피어났다. 보름달보다 환한 그의 눈빛에 내 얼굴에도 다시 미소가 번졌다.

"카일이 날 얼마나 소중히 여겨주는지 알아요. 너무나도 잘. 그러니까, 다신, 의심하는 말 농담으로도 안 할 테니 마음 풀어요."

까치발을 들고 그의 이마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쪽, 내 입술이 닿은 곳부터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품으로 날 꼭 껴안았다. 젖은 몸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카일, 당신 옷까지 젖어요."

"실프."

아, 실프님 미안. 또 이런 일에 불려왔네요. 순식간에 보송해진 내 드레스 너머로 여전한 그의 열기가 전해졌다. 발끝을 흐르는 차가운 물이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혈육을 죽이고, 날 키워준 계모와 싸우는 내가 혐오스럽지 않아? 무섭지 않아?"

나는 솔직히 그를 이해했다. 나는 더 했는걸. 내 의도가 아니었고,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니었지만 내 가족을 모욕한 이들의 죽음을 잠시나마 속으로 기분 좋게 웃었던 나였다. 그런 괴물인 내가 어찌 그를 비난할 것인가?

심지어 그는 가장 소중했던 형을 잃기까지 하지 않았나?

"아뇨, 당신의 절망과 배신감에 비하면 약과죠. 그분은 더 심한 벌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했든 나는 당신 편들 거에요."

나를 안은 그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무조건 내 옆에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아르세이아. 다시는 헤어지기 싫어. 그땐 내가 어리석었어.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힘들었는데,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앞으로는 절대 떨어지지 말자."

에... 아르세이아의 가출이 그렇게나 큰 충격이었나? 이미 한참이나 지난 이야기인데. 아니면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일이 또 있었을까?

"안 가요. 나 지금 당신 옆에 있잖아요. 앞으로도 있을게요. 게다가 우리 늦반딧불이를 찾으러 함께 가기로 했었잖아요."

미안해요,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진짜 아르세이아가 돌아오면, 그땐 내가 떠나야 해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아르세이아와 내가 바뀐 것을 모르는 것처럼 그때도 바뀐 우리를 모르겠죠? 그건 좀 아플 것도 같네요.

내가 등을 토닥여주자 그의 조금은 거칠었던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이젠, 날 두고 가면, 황태자 위고 뭐고 다 버리고서라도 널 쫓아갈 거야."

에엣? 제국민들은 어쩌고, 유일한 황위계승자께서.

"안 간다니까요. 이젠 계속 당신 옆자리에, 지금처럼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늘. 언제나. 그대의 곁에.

"진짜?"

"네."

"진심이지?"

"그럼요, 진심이에요."

"내 곁에 있어주면 꼭 널 행복하게 해줄게. 다신 울지 않게, 다신 외롭지 않게 지켜줄 거야. 너는, 내 유일한 빛인걸."

조금, 아주 조금, 슬퍼졌다. 계속 그가 해주는 다정한 말을 내가 아닌 아르세이아에게 대입하는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자신의 어머니를 싫어해서 더 반항하고 날 찾으면서 비스가에서 겉돌던 내 여동생의 외로움을 아는구나...

바보같이,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아는데, 계속 그가 내 것이 아님을 자각하는 내가 미워지려고 했다.

"고마워요. 카일."

나의 부름에 날 더 꼭 끌어안는 황태자의 품이 더 따뜻해졌다. 그리고 그 따뜻한 온기가 내 마음도 조금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쳐놓은 벽을 조금 만 더 허물고 이 온기에 취해도 될까?

이 뜨거운 마음을 달래주는 여름밤의 청량한 바람이 조금은 고맙기도, 원망스럽기도 한 만월의 밤이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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