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만월의 유혹. (1)
2018.04.22.
황궁 생활이 많이 익숙해진 상태로 또 한 달이 지났다. 이젠 무더위가 시작될 참이었다. 곧 이제 여름비도 시작될 것이다.
지난 티타임 이후 나는 내게 우호적인 귀부인들만 알현을 종종 받았고, 대신 내가 주최하는 사교모임은 그 이후로 열지 않았다.
첫 티타임의 별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었다. 연회나 티타임 초대장은 많이 왔으나 그냥 도도하게 거절했다.
사교계야 가을에 열릴 큰 연회가 있으니 차라리 황궁 적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 것이 나았다.
카일룸과의 다정한 관계는 이미 사교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고 시녀들이 전해주었다. 가끔씩 황궁을 빠져나가서 데이트하는 광경을 많이 들키긴 했지.
다들 그 차가운 황태자가 이렇게나 열렬히 사랑에 빠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특히 그가 내게 케이크를 먹여주는 광경에 다들 놀랬다고 한다.
... 왜지?
생각해보면 아르세이아는 약혼도 없이 6개월 만에 혼인을 했는데 말이야. 간택연에서 황태자의 모습이 화제가 된 것에 비해 두 사람이 직접 만난 횟수가 작긴 했지. 그래서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지지 않았다.
국혼을 치르고 5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야 황태자의 선택이 정략적인 것이 아닌 순수한 애정이라는 것이 인정된 느낌이었다. 뭐, 그것이 날 향한 사랑은 아니겠지만. 아닌가? 그가 좋아하는 모습에 내 모습도 포함일까?
어쨌든 티타임 사건 이후, 나는 황태자가 준 약으로 피임을 하고 있다고 후작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뭐, 그렇다고 우리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의 진척은 햄스터의 눈물만큼도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제법 많이 친해졌다. 내가 그의 애칭을 마음껏 부르고 있기도 했고, 같이 밥을 먹거나, 산책하는 것이 불편해지지 않았으니까.
그것과 비례해 내 마음은... 음... 모르겠다. 가끔 그가 내 정체를 아는 것 같아 뜨끔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긴장을 놓아서는 안되는 시기였지만 확실한 것은 그와의 친밀함이 높아질수록 나의 경계가 옅어졌다는 것이다.
오늘은 황제 부부와 만찬을 갖는 시간이었다. 가족끼리 얼굴이라도 보고 살아야 한다며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만찬을 하자는 황제의 청을 받아 황태자와 함께했다.
어색한 황제 내외와 황태자 사이에 끼여서 제일 불편한 것은 나였다. 황후랑 사이가 나쁜 것이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랑 황제도 사이가...
"아르세이아."
"예, 폐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느냐?"
"아니오. 훌륭한 음식인지라 천천히 음미하는 중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그리 못 드시나요? 혹시 어디 미령하신 겁니까?"
"이제 늙어가서 소화가 잘 안돼서 고기 요리는 부담스럽지."
황제는 내게만 말을 걸었다. 카일룸도 아무 말하지 않고 칼질만 했다.
"요리사에게 앞으로 소화가 잘되는 요리로만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말 없는 그를 대신해 내가 황제에게 답했다. 평소엔 말이 많은 사람이 왜 이리 조용한 건지, 내가 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황후랑 가끔 눈을 마주치면 서릿발에 이미 삼킨 고기도 얼 지경이라 힘든데.
고기는 왜 이리 질겨? 태양궁 요리사가 만월궁 우리 요리사 보다 못하네. 쯧, 카일룸한테 황제가 되면 요리사 바꾸라고 일러둬야지. 난 맛있는 것만 먹을 테다!
"세이, 자. 이걸로 먹어. 칼질하기 힘들어 보이네."
"고마워요, 카일"
내가 웃어 보이자 그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황제가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이리 웃는 것을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어머, 폐하, 카일이오?"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황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푸근한 미소. 아들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졌다. 하지만.
"카일, 이렇게 가족끼리만 있을 때는 좀 웃는다고 위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웃어요."
내 말에 카일룸은 망설이다 아주 표도 안 나게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이 인간이 그게 웃는 거냐.
그럼에도 황제는 만족한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망언을 하셨다.
"내가 며느리 하나는 잘 얻었구나. 이제 손주만 안으면 소원이 없겠어."
헉, 하마터면 포크 떨어뜨릴뻔했어. 저번에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아주 씩씩하게 예라고 했든가. 내가 왜 그랬을까.
"폐하, 저는 제 아이의 안전과 미래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 치워지기 전엔 생각이 없습니다. 전 그 아이를 티끌도 다치지 않게 하지 않을 생각이거든요."
카일룸의 표정에 한기가 그득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황후가 있었다. 에효 겨우 굳은 얼굴 살짝 풀었더니 더 단단하게 얼어버렸잖아.
저번에 비스 후작부인에게 한 말보단 이쪽이 더 진심에 가까운 듯했다. 그러니 내가 육체관계가 싫다 해도 넘어가 주는 것이겠지.
황후도 힘들겠다. 매번 전처의 아들이 이렇게나 자신에게 날을 세우니 원. 황제 폐하는 제 아들에게 마냥 미안한 표정이고.
이 가족, 문제가 많구나. 비스 후작가만큼이나 콩가루야. 가장 높고, 호화스럽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에 위치 한 이 가족은 호적상으로나 가족으로 묶여 있는 사이였다.
동질감. 안쓰러움. 이해.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들어왔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한숨을 푹 쉬더니 얼굴을 살짝 풀었다. 그런데... 황후 앞에서 날 막 아끼는 티 내면 그 후환이 나한테 쏟아지는 거 아냐?? 응? 살짝 불안한데?
뭐, 지켜준 댔으니까 믿어봐야지.
힘들고 긴 만찬 시간의 마무리는 침묵이었다. 이럴 거면 우리 한 달에 한 번만 만나도 되지 않을까요? 고급 요리 먹다 체하겠네. 아하하하하.
태양궁에서 만월궁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 나는 그의 말 없는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황권 다툼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울 것 같진 않지만 울고 싶은 얼굴. 오늘따라 지쳐 보였다. 내가 힘들었을 때 날 달래주고 지켜 준 사람인데. 감히 내가 그를 위로해도 될까?
나는 살며시 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자리로 갔다. 그가 깜짝 놀란 표정을 급히 지우고 내게 미소 지었다.
"내 어깨, 빌려 줄게요."
"사양하지 않을게, 그런데 기왕이면 무릎을 빌려주면 안 돼?"
하아, 이 남자가! 오늘따라 비 맞은 강아지 마냥 불쌍해 보이니까, 한 번만 봐준다.
나의 허락에 그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나는 피식 미소 지으며 그의 눈 위로 손을 올렸다.
"이럴 땐 눈을 감고 쉬는 거예요. 20분이면 도착하겠지만."
"싫어, 나는 세이 얼굴 보는 게 쉬는 거야."
그가 단단하고 큰 손으로 내 손을 가볍게 치워 냈다. 으이구. 내 얼굴이 그렇게 좋아요?
아르세이아, 어쩌면 너 돌아오면 이 남자가 부담스러워서 다시 가출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내가 노력은 하겠지만 이 남자 이 병 못 고칠 것 같아.
"흐음. 그나저나, 황궁도 콩가루 집안이네요."
"크큭, 그렇지. 완전 콩가루지. 계모는 전처의 큰 아들을 죽였고, 둘째도 죽이려다 실패하고는 대신 제 아들을 잃었지.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제 후처의 만행을 방치했고."
카일은 평소와는 다른 많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지금의 황제는 돌아가신 황후와 지금의 황후 말고도 후비가 셋이나 있었다. 하지만 아들들은 정실부인들에게만 얻었고, 제국은 적통이 아닌 자녀에게는 계승권이 없었다. 이 대의 제국 황위 다툼은 적통 황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고 했다. 사실 지금의 황후는 선대 황후의 사촌 자매였다. 황제는 어미가 먼저 떠나 힘들 아들들을 위해 아들들의 어미와 같은 가문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황제파의 여인을 후처로 맞이했다.
어머니가 일찍 죽어 동복형제이자 자신의 우상이었던 1황자만을 의지했던 카일룸은 처음에 새 황후에게 애정을 갈구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사랑해 주었던 황후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 뒤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가 18살이 되던 해. 강한 기사이기도 했던 두 형제는 제국의 변방에 나타난 괴수를 해치우기 위해 나란히 출궁했다. 황위 계승권 1, 2위였지만 괴수의 위험도가 컸고 어느 기사들 보다 강한 형제였기에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도착하고 보니 괴수는 별것이 아니었고 형제는 가뿐히 해치우고 환궁을 준비했다. 그때였다. 그의 형제가 그를 위해 희생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은.
괴수를 해치운 날 밤 형제를 덮친 정체 불명의 마법사들의 습격. 형제는 목숨의 위협을 당하며 믿었던 이들에게 버림받았다. 그들을 수행했던 기사단의 대부분이 그들을 배신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였던 1황자는 사랑하는 동생을 도망시키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형을 잃은 분노와 그를 암살하려는 끈질긴 추격은 결국 카일룸을 소드마스터로 만들었다. 하지만 추격자를 모두 해치운 그 역시 부상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볼 지경이었다.
그리고 제국에는 1황자의 죽음과 2황자의 실종이 널리 알려졌다. 소문에 둔했던 나는 그 시절 이런 일이 일어난 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실종되자마자 황후와 그녀의 가문은 황후의 어린 5살 난 아들을 황태자로 올려 제국이 흔들리지 않음을 보여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황제는 실종된 2황자에 대한 수색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곧 3황자가 황태자가 될 것이란 소문이 제국에 퍼졌다. 그 습격의 배후가 누구일지 뻔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은 없었다.
석 달 후, 3황자의 황태자 등극이 이루어지기 일주일 전, 홍수로 산사태가 발생한 지역에 커다란 바위가 솟아나 산사태 피해를 막은 기적이 전해졌다. 홍수로 흘러넘친 물은 제자리를 찾았고, 산불이 난 지역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진화되었다고 했다. 전염병이 나은 환자들이 그들을 고쳐 준 이에게 절을 하며 칭송을 하는 일들도 벌어졌다. 강도들도 소탕이 되었다.
그것은 다 황도로 이어지는 길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카일룸이 정령왕과 계약까지 하고 소드마스터가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황태자 책봉식 전날 황궁에 도착하자, 백성들도, 귀족들도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이들이 제국의 기적인 2황자가 황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였고. 결국 황태자의 자리에는 카일룸이 올랐다.
황태자가 된 그가 자신의 형을 죽인 배후를 밝히고자 노력했지만 황후의 꼬리는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황태자가 된 이후에도 그에게는 암살 시도가 끊이질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 3황자가 괴질에 걸렸을 때, 그는 황궁에 없었다. 황후가 조작해 만든 국경분쟁을 해결하러 나갔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도 한 차례 암살시도를 물리친 그는 황후가 급히 그의 귀환을 요청했으나 국경 분쟁을 핑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서 정령왕의 가호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결국 3황자가 죽었고, 황후와 그 사이는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 일에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았다. 카일룸은 그런 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1황자가 죽은 과정과 3황자의 죽음에 얽힌 자세한 사연은 제국민들이 모르는 이야기였다. 형이 동생을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하고, 그 동생은 다른 동생의 죽음을 막지 않았다.
말을 끝낸 카일의 얼굴에는 자기혐오가 걸려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손을 잡아 줄 수밖에 없었다. 잘게 떨리는 그의 진동이 내 무릎을 타고 올라왔다.
"카일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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