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22화 (22/126)

23화. 황궁 밖에서의 하루. (2)

2018.04.22.

강바람을 맞으며 강둑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시원한 야외에서 먹는 도시락은 꽤 맛있었다. 쫄깃한 빵이랑 과일잼. 그리고 잘 구워진 소시지는 가볍지만 훌륭한 요리였다.

"우리 궁 요리사들은 진짜 최고인 것 같아요. 요리사들 때문에 황궁 생활이 더 즐겁단 말이야."

왜? 어째서 눈이 가늘어지는데? 설마 요리사들한테 질투하는 거야? 에헤이, 그렇게까지 속 좁으려나?

"표정 푸시죠? 요리가 맛있다는 뜻이니까."

"어, 그래."

뜨끔하신 모양이었다. 풉, 가끔 저렇게 질투하다 걸리면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곤 했다. 저럴 때는 내가 뭘 먹여주면 다 잊어버렸다.

"자요, 아 하세요."

"응! 아!"

진짜 이런 맛에 다들 애완동물을 키우는 건가? 내게 길들여지는 카일이 너무, 내 마음을 간지럽혔다.

알비케라보다 더 순하고 말 잘 듣고 내게 순종적인 카일룸. 그래, 그의 아버지도 대형견 같았는데, 아들도 듬직하니 후작부인으로부터 날 잘 지켜주고 핏줄은 못 속이는구나!!

"이제 점심도 다 먹었겠다 뭐 할 거예요?"

"글쎄? 번화가로 가볼까?"

* * *

"여긴, 귀족들의 거리잖아요. 우리 옷차림이 그다지 귀족스럽지 않은데요?"

"디저트 먹으러 가자."

"네?"

그가 말고삐를 잡더니 어디론가 끌고 갔다. 나는 그가 말을 모는 사이 여유롭게 시가지를 구경했다.

저기는 옷 가게 인가? 저긴 보석 가게고, 꽃가게도 있네? 꽃가게는 대부분 예쁜 꽃다발을 팔고 있었다.

에헤이, 저 집 꽃은 빨리 시들겠네. 물은 깨끗한 걸 써야 하는데. 어머 잎을 벌써 다 뜯어냈네? 저러면 물을 잘 못 먹을 텐데.

저긴 장난감 가게인가? 신기한 것이 많았다. 아, 오르골. 예쁘다. 내가 가진 낡은 오르골보다 예쁘네. 그건 비스 후작님이 내게 처음으로 주셨던 선물이었다.

후작 부인의 손에 몇 번이나 내동댕이 쳐졌지만 용케도 부서지지 않았던 오르골. 차마 아버지께 처음 받은 선물이라 버리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나의 낡아버린 것과 같은 디자인의 크기만 다른 오르골이 진열장에 놓여있었다. 내 시선은 거기서 멈춰버렸다. 누군가가 내 심장을 바늘로 콕콕 쑤시는지 아릿해져왔다.

입궁한 뒤 후작부인은 만났지만 후작님은 아직 만난 적이 없었다. 그분은 날 보내놓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뭘 그렇게 봐?"

내 정수리에 턱을 괴고 있던 카일이 물어왔다.

"아, 오르골이 많아서요."

"사줄까?"

"아니요. 필요 없어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마음과 다른 말. 나는 후작님이 주신 오르골을 혼자 있어야 했던 무서운 밤마다 틀며 의지했던 적이 있었다. 이젠, 필요 없어.

"그리고 카일이 있으니까, 이제 오르골은 필요 없어요."

내가 작게 웅얼거리는 말이 들렸는지 고삐를 잡지 않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맛있어?"

"나는 황태자궁의 요리사들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여기가 디저트는 최고네요."

너무 달지도 않고 샤르르 녹는 생크림 케이크! 진한 홍차랑 먹는데 너무 좋았다. 실내 장식도 고급이었다. 캐노피가 쳐진 테라스 자리는 누가 봐도 최상급 손님을 위한 자리였는데 우리에게 안내되었다.

"여기 주인이 태양궁 출신이거든. 디저트 담당이었지?"

아하, 그래서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온 우리에게 이 자리를 내줬구나. 카일을 알아보고.

"어머, 이런 인재를 놓치다니요!"

"다시 스카우트 할까?"

"황궁이 싫어서 관둔 사람일 텐데 다시 올까요? 음, 그리고 우리 요리사들 충분히 일 잘하고 있으니 일자리 뺏지 마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포크에 생크림과 과일을 잔뜩 올린 뒤 내게 내밀었다. 받아먹을까 말까? 저거 내가 안 먹으면 카일룸 입으로 들어가겠지? 아까운데 그건.

"얌!"

헤헤헷, 맛있다. 맛있는 것은 버림 안돼. 나오길 잘했다. 이렇게 입이 또 호강하는구나.

한 번 받아먹자 그가 계속 포크를 내밀었다. 이런. 멈출 수도 없고.

이제서야 주변이 보였는데, 다들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테라스 아래에서도, 테라스의 안쪽 홀에서도 다 우리만 봤다.

정확히는 카일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내 입에 포크를 내미는 것을 경악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아니 남녀가 서로 디저트 먹여주는 것 처음 본 사람들인가,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건데?

저 구경꾼들 다 귀족이겠지? 우리가 누군지 알아보는 것 같은데.

"저기 카일, 사람들이 쳐다보는데요."

"무슨 상관이야?"

"부담스럽잖아요."

"그래?"

카일이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쭈욱 훑었다.

흐익!! 이 남자가!! 살기를 뿜으면서 사람들 위협하면 나쁜 사람이죠!!

덕분에 구경꾼들이 사라진 것은 좋은데, 하하. 이거 좋은 것 맞지? 과거에 사람들 앞에서 애정표현을 해도 된다고 했던 나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카일은 내가 좋아하니까 몇몇 디저트를 더 주문해서 내 입에 밀어 넣어줬다. 맛있으니까 다 용서해야지.

너무 많이 먹어서 살찌는 거 아니겠지? 아니야, 즐거운 마음으로 먹으면 살 안 찐댔어. 즐겁게 끝까지 먹자.

"전하. 앞으로 여기 단골 합시다!"

다 먹고 나서는 작은 극장으로 갔다. 연극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결국 다른 곳으로 옮겨서 마술쇼도 보고, 옷 가게에 들려서 맘에 드는 모자와 숄도 샀다.

"즐거웠어?"

"네. 너무너무요."

"자주는 힘들고 한 번씩 나올까?"

"약속한 거예요?"

"응. 네가 이렇게 밝게 웃을 줄 알았으면 진작 나올 것을 내가 잘못 했네."

잠시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카일은 스르륵 간지럼을 태우며 내 손에 깍지를 껴왔다. 보는 시선도 있고 해서 차마 손을 빼지 못하고 그와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며 거리 구경을 한참이나 더 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몰리지 않았다.

좀 몰릴까 하면 카일이 고개를 돌렸는데, 그러면 거리가 다시 한산해졌다. 무슨 짓을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차마 뭐라도 못하겠고...

끙. 그래도 평화롭긴 하네. 내가 언제 이렇게 번화한 거리를 다른 사람 눈치도 안 보고 구경할 수 있었겠어?

이제 해가 넘어가기 시작해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온다고 약속해줬으니까, 약속은 꼭 지키는 남자니까, 아쉬움은 접어두기로 했다.

"세이, 이제 해가 지면 너는 위험할 수 있으니까 내가 말을 몰게. 옆으로 탈래?"

"싫어요. 그건. 당신 껴안고 타야 하잖아요. 그냥 앞 보고 탈거에요."

"쩝."

못내 아쉬워하는 것 같은 표정에 웃음이 났다. 그런 얕은 수에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벌써 해가 넘어가는데."

어두운 것도 싫고, 어둠을 밝히는 불이 갑자기 나타날까 봐 무서워졌다. 그런데 이 남자 계속 이상한 데로 가잖아. 이 음흉한 인간. 왜 으슥한 숲 쪽으로 가냐고!!

"잠시만, 꼭 보여줄게 있어. 무서우면 나한테 기대. 넌 꼭 내가 지켜줄 거니까, 걱정 말고."

무서움에 눈을 꼭 감았다. 같은 무서움이라면 그냥 내가 만든 어둠이 덜 무서웠다.

"자, 도착했어."

약간은 습하고, 밤이지만 따뜻한 곳. 이끼 냄새도 나고... 동굴인가? 아, 동굴 입구구나.

"자, 내려와."

낯설지 않은 공간이었다. 아주 어릴 때는 자주 동굴에서 놀았으니까. 하지만 화재사건 이후로는 잘 찾지 않던 곳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그의 말이 끝나자 곧 작고 푸른, 초록 별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어둠을 걷어주고, 길을 밝혀주는 길잡이. 반짝반짝 깜박이는 숲속의 별빛. 반딧불이들의 춤이 시작됐다.

내 손에도 내려앉은 반딧불이의 불빛은 뜨겁지 않았다. 차가운 빛이라 무섭지 않은,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불빛. 불꽃을 무서워하는 내가 그믐날 밤에도 외출할 수 있게 돕는 친구들이었다.

"예쁘네요. 여전히, 반딧불이의 춤은 황홀해요."

목이 잠시 매였다.

"내게 저 반딧불이의 빛은 희망이었어. 네가 내게 보내준 별빛. 어둠을 물리쳐 준 길잡이였거든."

아르세이아와의 이야기인가? 작년 가을 즈음 아르세이아가 부탁해서 유리병에 잔뜩 가을에만 볼 수 있는 늦반딧불이를 넣어 준 적 있었다. 그때가 간택연 직후였던가?

그렇구나...

"그 이후에 여길 발견했어.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왔었어."

나는 조금 쓸쓸해진 얼굴로 반딧불이들을 내 손에 모았다. 왜 이러지? 동생 남편이 동생이랑 행복했던 추억을 이야기해주는데 왜 씁쓸해지는 거야.

그래, 결국엔 내가 해준 것으로 생색낸 아르세이아 탓이다. 내가 한 건데, 내가 그에게 희망의 빛을 선물 한 것인데.

그리고 내가 아르세이아보다 훨씬 더 크고, 예쁜 반딧불이 무리를 보여 줄 수 있었다.

"내가 보고 싶음 날 보러 와야지 반딧불을 왜 봐요? 그리고 가을 되면 더 큰 반딧불이들도 많아요. 가을에 다시 와요. 내가 더 큰 반딧불이 찾아줄게요."

조금은 투정이 담겨버린 내 말에 카일이 피식 웃었다. 비웃는 거야? 쳇 괜한 승부욕이 생겨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내 손을 잡아왔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지긋이 훑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애써모은 반딧불이가 날아가잖아. 그런데 큰일인 게, 이제 이런 접촉이 너무 익숙해져서 내가 놀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여기고 있잖아!!

이러면 큰일 난다, 세이렌. 정신 차려!!

"그러게, 네가 보고 싶음 이제 너한테 달려가면 되네. 앞으로 여긴 혼자 오지 말고 너랑 함께 와야겠다. 큰 반딧불이 찾으러도 함께하자."

조용한 동굴 속에 그의 말만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는 함께하자는 말, 그 말은 내 심장박동과 함께 내 온몸과 마음을 맴돌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반딧불이들이 우리 곁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우리는 같은 시간을 함께 했다.

* * *

"즐거우셨어요?"

"응!! 너무!! 행복했어. 카일이 있잖아. 야시장도 데리고 가줬어."

"네? 거긴 비전하가..."

에이린에게 우리의 외출을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에이린은 내가 들려주는 나의 첫 황도 입성기를 즐겁게 들어 주었다.

"카일이 글쎄, 내가 불꽃 무서워하는 거 때문에 야시장 상인들에게 무상으로 마법등을 나눠줬더라고?"

사치의 끝판왕. 마누라 데리고 야시장 가겠다고 비싼 마법등을 마구 뿌리는 스케일!!

뭐, 예산 명목은, 횃불로 인한 야시장 화재 가능성에 대한 안전 조치였다나? 덕분에 야시장에서 구운 옥수수도 먹어보고, 불량해 보이는 설탕과자도 사 먹었다.

이상한 주사위 놀이도 있었는데 카일이 속임수를 밝혀내고 사기꾼을 응징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원 없이 노셨네요."

"어, 말 타는 것도 너무 즐거웠어."

"황태자 전하께 감사드려야겠어요. 우리 비전하가 이렇게나 행복한 웃음을 짓게 만들다니..."

에, 에이린 우는 거야? 내가 그렇게 행복하게 웃었나?

"누구는 집에도 못 가고 죽어라 일하는데...!"

아하, 그거였어? 집에 안 보내 준게 서운해서 우는 거였어??

"자, 이거, 선물."

"어머!!"

"고마워, 에이린. 내가 전하랑 나가서 아무 걱정 없이 놀 수 있는 거, 다 네 덕인 거 알아. 내가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웃으며 살 수 있게 해준 거, 늘 감사하게 생각해."

"비 전하."

카일이랑 장난감 가게에서 에이린에게 줄 스노우볼을 샀었다. 거기에는 두 꼬마 소녀가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우리의 어린 시절처럼.

"에이, 전 보석 팔찌인 줄 알았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빠직. 저 감동 파괴자 같으니라고!! 옜다! 저럴 줄 알고 챙겨 놓은 브로치를 주자 에이린이 웃기 시작했다.

그래도 카일 덕분에, 좋은 구경도 많이 했고, 친구 선물도 사줄 수 있어서 대만족이었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황태자비의 대역이 끝나더라도 나는 오늘 하루를 잊지 못 할 것이었다.

고마워요. 나의 황태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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