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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9화 (19/126)

20화. 나를 지켜준 사람.

2018.04.21.

내가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주변은 내 불안한 마음만큼이나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침대 옆 마법등 불빛 아래에는 청남색 머리의 남자가 미동도 없이 날 지키고 있었다.

"아르세이아!"

"전하..."

그의 목소리에서 크게 안도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황태자비라고 생각하는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가짜라는 거 당신은 모르는 건가요? 내가 비참하고 하찮은 인지 받지 못한 사생아라는 걸 아직 모르고 있는 건가요?

어째서, 어째서 계속 이렇게 날, 눈앞의 황태자비를 사랑한다는 표정이에요?

"세이, 눈이랑 머리 아프지 않아? 자 물부터 마셔. 저녁 먹어야지"

나를 일으켜주며 건네는 여전한 그의 배려. 그는 여전히 나에게 다정했다. 그가 내 눈을, 얼굴을 살며시 만져주자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나는 볼 수 없는 정령의 빛.

정령을 보지 못해도 그가 날 걱정해주는 마음은 느껴졌다. 그리고 아파왔다. 그가 아르세이아를 위하는 진심을 나는 기만하고 있으니까. 가짜인 내가...

"나 때문에 많이 놀랐지? 가끔 화났을 때 뿌리는 살기에 영애들이 무서워하고 기절했었다고 테일러가 네 앞에서는 절대 살기 내뿜지 말랬는데... 미안. 무섭게 해서."

내가 무서워서 눈물을 터뜨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짜로? 진심으로? 나, 아직 들키지 않은 거 맞아?

"왜 제게 이렇게 잘해주세요?"

"왜라니? 내가 그대에게 푹 빠져있으니까, 내가 살아남은 이유가, 살아갈 이유가 그대니까. 게다가 너는 내 아내이고, 하나뿐인 반려인걸."

그렇게 대답하는 남자의 얼굴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모르는 그와 아르세이아의 과거. 그 과거가 그를 이토록 굳건하게 만드는 것일까? 부러울 만큼...

그가 이렇게 황태자비에 대한 애정을 내게 표현하는 것을 보니 그는 후작부인이 나에게 한 이야기들을 못 들은 것이 확실했다.

안도. 그리고 그 한 켠에 쌓이는 죄책감.

"화나신 거... 아니었나요?"

"응? 아, 그대에게는 화난 거 없어. 후작부인에게 유감이지."

내가 왜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답했다.

"그대에게 준 차. 그것이 여인의 몸에 얼마나 나쁜지 모르는 무지함에 화가 난 거야."

아...! 역시 프레젤리에 대해 알고 있었구나.

"제가, 부탁, 한,걸요."

내가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한 것이라 죄를 뒤집어쓰며 작게 웅얼거리는 내 말에 그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그 차를? 아님 피임약을?"

"피, 피임약을요."

"흐음. 그 소리는 그대가 날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거야?"

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변함없는 그의 미소가 조금은 기분 좋았다.

"꾸, 꿈 깨시죠!"

평소 같은 나의 말투에 그가 빙그레 웃어 주었다. 이젠 그의 미소가 익숙해졌다. 미소를 받자마자 나도 살포시 웃음이 날 정도였으니.

"세이, 그대가 나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면 그 뜻 존중할 거야."

"전하...?"

"꼭, 사랑이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 걸. 나는, 그대가 나를 보고 많이 웃고, 행복해하고, 아프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나는, 그대를 지키고 싶은 거니까. 그래서 황궁으로, 내 곁으로 그대를 부른 거야."

그의 말에 다시 내 눈물이 터졌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그저 나를 지켜주겠다는 말이 너무 고맙고, 미안하고, 기쁘고, 또 죄스러웠다.

내 가족들도 지켜주지 못했던 후작부인의 폭력으로부터 날 지켜준 황태자에게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너무 먹먹한 마음에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늘 가벼워 보이고, 능글맞아만 보였던 황태자가 너무 의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곁에 있는 동안만은 후작부인으로부터 날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 안심이 되고, 이렇게 날 지켜주는 사람을 속이고 있는 나 자신이 용서가 되질 않아 감정이 쉬 삭혀지지 않았다.

그는 또 눈물이 터진 나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저 손을 뻗어 내 등을 토닥여줬다. 그리고 살며시 다시 그의 넓은 품 속으로 안아 주었다. 나는 듬직한 그의 가슴에 의지해 눈물을 쏟아냈다.

한참을 울다 또 부어버린 눈에 이번에는 손이 아닌 그의 입술이 닿았다. 뜨거웠지만 싫지 않은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황궁에 돌아온 첫날밤에 초야를 치르겠다며 싫다는데도 들이댔던 황태자 전하라는 게 믿기지 않는 소리네요."

"끄응. 나 그때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짓을 한거 인정하는데, 그런데 나도 남자라고. 언젠가는 그대가 결국에는 내게 마음을 열고, 나에게 다가올 거라고 믿으니까. 그래서 참는 거야. 세이는 반드시 날 사랑하게 될 거거든. 그때는 마음껏 하고 싶은 짓도 다 할 거라고!!"

하고 싶은 짓이 뭐지? 어쨌든 저건 무슨 자신감이야?

"풉. 카일은 너무 뻔뻔해요."

그의 눈이 놀란 고양이만큼이나 커졌다. 애칭으로 불러줄 것이라고는 기대도 안 했던 모양이었다.

"왜요? 싫어요? 앞으로 애칭으로 부르지 말까요?"

"아니! 다시 불러줘."

"그건 싫은데요?"

"으응? 왜에? 왜?"

"전하의 이름이 닳음 안되잖아요."

"그대에게라면 닳도록 불려도 돼!"

나는 안 들리는 척 그냥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가 가련한 사슴의 눈빛으로 애절하게, 간절하게 나를 바라봤다. 차마 더 이상 말은 못하고 낑낑대는 게 제법 귀여웠다.

"오늘은 이만 잘래요."

내가 반응을 하지 않자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침대 옆에 있는 마법등만 남기고 방을 밝히는 마법등을 다 끈 뒤 내 옆에 누웠다.

"카일두 잘자요."

그러자 그의 입술이 다시 광대까지 끌려올라갔다. 그는 다시 나를 그의 품에 쏘옥 가두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품이 오늘따라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다시는 빠져나가고 싶지 않을 만큼 따뜻한 온기가 내게 닿았다.

그리고 그 온기가 다시 한 번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가짜라는 것을 몰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만 더 날 지켜주는 이 남자의 울타리 안에 안전하게 살고 싶다.

이 사람이 주는 사랑을 계속 받고 싶다는 욕망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만 같았다.

다음 날 나는 에이린을 불러 어제의 상황을 자세히 물었다. 그가 혹시, 알면서도 나에 대해 숨겨준 것은 아닌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의 정체를 파악하고도 나에 대해서 모르는 척해주는 것은 아닌가, 나에 대한 호감이 더 큰 것은 아닌가 살짝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문 앞에 올 때는 웃고 있었고, 문을 여는 순간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고? 게다가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 연 거고?"

"네, 전하."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 훔쳐듣는 것도 범위 제한이 있겠지. 내 응접실은 꽤 크니까. 게다가 문도 제법 두껍고 방음이 잘 되긴 해.

그런데 뭘까? 이 아쉬운 감정은?

어쩌면 그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고도 모른 척해주길 바라고 있었나 보다. 내가 신분을 속이고 들어왔음에도 날 좋아해서 봐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아주 작은 기대가 있었구나.

뭐야 바보같이. 설령 알아냈더라도 나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파장이 염려스러웠으니 숨긴 걸 수도 있는데.

어쨌든 문 앞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문 열고 들어왔댔고,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니 걱정 안 해도 되겠지.

"하아, 어제 네 얼굴이 사색이라서 나 다 들킨 건 줄 알았어."

"전하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후작부인 무서워하는걸요. 게다가 황태자 전하, 어제 후작부인 쫓아내며 문 열 때, 우와. 진짜 서리가 내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하긴 에이린도 나 때문에 후작부인한테 머리채 많이 잡혔었다. 미안하게도 많이 당했었지. 이렇게 내 곁에서 같이 머리채 잡혀 준 친구 덕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나 보다.

흐음, 그런데 어제 정황으로 봐선 응접실 너머로는 우리말 안 들릴 텐데, 우리끼리만 있을 땐 반말하면 안 되나? 하고 싶은 말도 다하고!

"저기 에이린, 우리끼리 있을 때만 예전처럼 지냄 안돼?"

"안됩니다. 습관 돼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수로라도 제가 전하께 말 놓으면 저만 죽는다고요."

"칫, 카일이 루카스 보좌관이랑 친하게 지내는 게 부러워서 그랬더니."

에이린의 눈에 궁금함이 가득 찼다.

"두 분이요? 우와 상상이 안 가요. 제국에서 가장 차가운 피와 이성적인 뇌를 가지신 두 분이 부러울 만큼 친하게 지낸다고요?"

"응, 둘이 막 서로 올라타기랑 누르기 하는 새끼 강이지들 같아. 얼마나 개구쟁이들 같은지. 가끔 귀여울 지경이야."

에이린의 눈에서 경악이 떠올랐다.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눈빛이었다.

"왜, 안 믿겨?"

"두 분다. 제게는 사무적인 말 외에는 그냥 얼음, 이거든요."

얼음이라는 게 더 안 믿기는데 내 입장에서는. 둘이 말다툼 할때는 바보형제 같아 보이기도 하는걸?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데?

"그런데, 전하. 이제 황태자 전하의 애칭을 부르시네요? 흐으으응?"

"어? 그니까, 그게 하도, 불러달라고 애원하니까, 어,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야."

"누가 뭐래요?"

아, 진짜. 에이린을 모르겠다. 쟤가 내 편이 맞나 의심이 갈 지경이다. 나랑 황태자랑 잘 되길 바라나?

"너, 수상해."

"뭐가요?"

"너, 내 편아니고, 카일룸 편 같아."

"네에? 에이 설마요. 전, 비 전하의 편입니다."

그런데 왜 나랑 눈을 못 마주치니? 너, 수상한데? 내 집요한 시선에 에이린은 할 일이 있다며 알비케라를 내 방에 집어 놓어 버리고는 사라져 버렸다.

"알비이! 너어!! 진짜 나 지켜주는 거 맞아? 요즘 나 위험할 때마다 내 곁에 없더라?"

예전에는 후작부인이 내 곁에 오면 마구 짖고 덤벼들려고 하더니 어제도 없었다 그거지? 내가 완전 쫄아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이러기야?

아쭈 별로 미안해 보이지도 않는다? 평소 카일룸이 가지고 놀아 주던 공으로 걸어가는 흰 뭉치가 보였다.

"왜, 너도 이제 나보다 고기 주는 황태자가 더 좋냐?"

응? 왜 너까지 내 시선 피하는데?? 우와 배신감!!!! 야, 너 진짜 나 대신 황태자한테 배 보여준 거냐? 너한테 황태자가 서열 1위인 거냐? 그런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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