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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6화 (16/126)

17화. 내 사생활은 어디에? (2)

2018.04.17.

"비 전하, 저 좀 살려주신다 치고 같이 쓰시면 안 되겠습니까?"

보좌관이 내 미간을 보고 깜짝 놀라 애원했다. 황태자는 듣고만 있었다. 빙글빙글 웃으면서 능청맞게도 뻔뻔한 표정을 짓는 꼴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보좌관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훤히 보였다.

"후우, 뭐 저는 이곳에서 오래 일하진 않으니 상관없겠지요. 페르데우스 소백작께서는 심려 놓으세요."

"역시 전하의 말대로 햇살보다 반짝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비 전하! 그리고 루카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으악, 낯간지러운 비유는 적당히 하라고!

"아, 네, 루카스님."

"세이! 내 이름은 안 불러 주면서 루카스 이름은 그리 쉽게 불러주고 너무해!"

"비 전하께서 오자마자 그리 쓰레기같이 굴어놓고 이름 불러주길 바라다니 욕심이 많으신 거 아닙니까?"

쓰레기?? 지금 황태자한테 쓰레기라고 한 거야? 이 사람 목숨이 몇 개야?

"그, 그땐, 내가 좀, 많이 참다 보니 그리된 거지! 내가 너한테까지 쓰레기 소리 들어야 하는 거야?"

"비 전하께서 싫다는데도 계속 질척대시니 뒷골목 불한당들이랑 뭐가 다릅니까?"

"세이가 저리도 예쁜 데다가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내가 행복해서 이성을 잃고 좀 그랬다고 네 상관에게 이러기야? 그것도 세이 앞에서 막말해야 해?"

"소중한 분일수록 조심히 접근하셨어야죠. 비 전하께선 아무것도 모르고 오셔서 긴장하고 있었을 텐데."

"윽,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러게 처음에 잘 찾으셨어야죠. 턱하니 눈앞에 두고 왜 멍청하게 헤매신 겁니까?"

"네가 정보를 잘못 제공한 탓이잖아!"

"애초에 전하가 잘못 알려주신 탓입니다!"

저기, 여기 나 있는대서 니들끼리 싸울 거면 나 여기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시끄러우니 일 하실 거 아니면 두 분 다 나가시죠? 정보 탓 그만하시고."

도대체가 냉혈한인 황태자는 누구고 이성적인 보좌관이라 불리던 이는 누구란 말이야? 그냥 바보 둘이 유치하게 말싸움하는 것 같은데?

"흠흠, 죄송합니다."

둘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아르세이아가 가출했을 때 그녀를 찾아 정보를 전달하던 게 보좌관이었구나. 실력이 별론가 봐?

"아무튼 루카스, 세이에게 황태자비 예산에 대해서 알려줘. 예산 확인하는 것도 처음이고, 회계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많이 도와줘야 할 거야."

"아, 예 그러지요."

어째 수상하다? 갑자기 말을 돌리는 것도 아니고 왜 내 눈치를 봐?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황태자는 급히 보고서를 읽는 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하는 저와의 사생활을 보좌관과 나누시나 봅니다?"

두 남자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그게 아니야! 세이, 오해하지 마!"

"네, 비 전하. 그저 전하께서는 제게 딱 한 번 고민을 토로하셨을 뿐입니다. 비 전하께서 전하를 싫어하시는 것 같다며 힘들어하셨을 때 딱 한 번입니다."

하아, 그래 친구끼리니까 고민도 나눌 수 있지 뭐. 그래도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지 않자 루카스가 급히 뭔가 서류더미를 가져왔다. 동시에 황태자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서류더미를 보고 있었다.

뭐야? 이 인간들이!!

"비 전하. 이것은 황태자비에게 주어진 품위 유지비입니다."

루카스의 말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서류에 적힌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일 년 치인데도 많군요."

우와 스케일이 장난 아니었다. 내가 아는 일반 평민 가정의 3년 치 생활비는 될 것 같은데?

"한 달 치입니다."

어. 그렇구나. 내 스케일은 진짜 소박했구나. 하하하. 내가 이 큰 금액을 탕진할 거라 다짐했던가?? 어떻게 쓰면 이걸 다 쓰지?

"이게, 한 달 치라구요?"

"네, 그래도 황후 폐하의 3분의 2수준입니다."

"아, 네에... 그렇군요."

아르세이아의 용돈은 한 달에 얼마였지? 전혀 감이 안왔다. 혹시 나 방금 금전 감각없어 보여서 의심 산 건 아니겠지??

다들 태연한 거 보면 단순히 내가 경제관념이 없어 보인 것 뿐이려나? 드레스 한 벌에 가격이 얼마더라? 여기서 시녀들 월급도 나가나? 이건 순순히 내 몫인가?

나는 아는 게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아는 척도 모르는 척도 못하겠다. 입을 떼는 순간 내가 후작가의 여식이 아닌 게 들통날까 봐 무서웠다.

"만월궁의 유지를 위한 인건비를 포함한 모든 비용은 카일룸 전하께서 집행하십니다. 그러나 결정은 두 분께서 함께하시게 될 것입니다. 황후가 되시고 나면 내궁에 대한 관리는 온전히 넘겨받으실 것이구요. 만월궁에 대해 비 전하께서 따로 요청하시고 싶은 일은 카일룸 전하께 말씀드리거나, 이 특별예산 항목에서 사용 가능하십니다."

"아, 네."

"그리고 이 항목은, 황태자비 전하만을 위한 사업비입니다."

"사업비요?"

"네, 고아원이나, 신전 지원 등 백성들을 위해 쓰시고 싶은 사업이 있다면 요청하시면 내어드릴 것입니다."

우와, 그러니깐 내 용돈 외에도 궁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게 있음 써도 되는 거고, 하고 싶은 일 있음 그것도 돈 준다는 거네? 대박.

황실은 진짜 말도 못하게 부자구나. 나 같은 서민은 이거 평생 가도 다 못 쓸 돈이야.

"저기, 혹시요."

내가 망설이자 루카스가 친절하게 뭐든 물어도 좋다고 용기를 줬다.

"품위 유지비를 한 달 안에 다 못쓰면 이월이 되나요? 혹시 다른 곳에 쓰면 안 되나요?"

"지급된 품위 유지비는 비 전하의 개인 재산입니다. 황태자비 전하의 재산으로 영구 귀속되니 어디에 쓰든 그것은 비 전하의 결정입니다."

아싸! 그럼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도 되는 거지? 조금씩만 빼돌려서 비자금 모아도 티 안 나겠지? 나중에 아르세이아가 돌아와서 황궁을 나가게 되면 땅도 사고, 밭도 사고, 목장도 사서 친구들이랑 즐겁게 보내야지.

"세이, 뭐 특별히 하고 싶은 거 있어? 예산이 부족하면 언제든 말해. 지원해줄 테니까."

"아직은요. 생각해볼게요."

나는 루카스님에게 여러 가지를 더 배웠다. 실무를 다루는 이에게 듣는 것이 수업시간에 배우는 것보다 빠른 습득이 되었다. 역시 이론보다는 실전.

황태자비는 황후가 되기 위한 훈련 과정이기에 예산의 규모가 큰 것이 아니라 했다. 도대체 황후는 얼마나 큰 돈을 주무르는 걸까?

어쨌든 나는 내탕금 탕진이라는 원대한 꿈은 깔끔히 접기로 다짐했다. 불가능한 꿈은 꾸지 말랬어.

아 난, 소심해. 눈물 난다. 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쓰질 못하겠니.

에이린에게 선물은 뭘 해주나? 드레스를 사줄까? 머릿속에 온갖 선물 목록이 스쳐지나 갔다.

그나저나 아르세이아는 이거 루카스님한테는 배우지 않았던 걸까?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대하듯 아주 친절하시네. 내 입장에서야 고맙긴 한데.

지금까지 걔가 처리한 예산들을 한번 확인 해 봐야겠어. 막 제멋대로 대충 넘긴 거 아냐? 도피자금 마련한다고 빼돌리고 그런 거 티 낸 거 아니겠지?

나는 기왕 배우는 김에 장부 읽는 법을 루카스 보좌관에게 이것저것 다 물었다. 장부에서 잘못된 예산을 짚어내는 법도 물어보고, 황태자비로써 하면 좋을만한 것들도 물어 배웠다.

아르세이아가 실수 한게 있음 내가 다 메꿔야 해. 잘 배우자!! 황태자비가 자기 재산으로 횡령죄에 걸리진 않겠지만, 걔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어!!

그래도 어렵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생각 때문에 즐거웠다. 내 얼굴이 저절로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린 쬐끔 아푸네.

"루카스."

"예. 전하."

"세이한테서 좀 떨어져. 너무 들러붙는 거 아니야?"

"저도 아름다운 분 곁에서 일하면 안 됩니까? 맨날 시커먼 남자들이랑만 일하는데."

"죽는다."

하아, 집무실에서도 온전한 내 정신건강 따위는 보장받지 못할 것 같았다.

루카스 보좌관은 황태자의 말에 입이 툭 튀어나오더니 살짝 떨어졌다. 그러더니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내게 속삭였다. 안 그래도 계속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보이더니...

"사실 본인 입으로 쓰레기라고 자학하셨었습니다. 그러니 좀 봐주십시오. 그리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비 전하 덕분에 이제야 전하께서 많이 웃으십니다."

저기, 그쪽 상관. 소드마스터라서 그쪽이 하는 말 다 들어요. 저봐요. 입꼬리 씰룩하는 거.

"그냥 크게 말해요. 전하께서는 다 들리시는 모양인데."

"그건 그렇죠? 하하하. 진심으로 황궁으로 와주신 것 감사합니다. 아르세이아님."

황궁으로 시집온 것은 내가 아니라 아르세이아였지만, 나는 대신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나의 비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이름이 좀 부른다고 닳습니까?"

"어. 자주 부름 닳어. 네가 부르다 소중한 비의 이름이 닳음 안되니까 나만 부를 거야."

"치사하십니다."

하아, 한심하구나 이 두 남자. 유치해. 이 바보들이 제국의 미래라니. 쯧쯧.

그런데 신분에 관계없이 사이좋은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도 에이린이랑 더 사이좋게 지내야지.

아주 어릴 때는 가져보지 못했던 우정이기에 지금 내게 더 소중한 에이린,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어두운 곳에 숨어 사는 비참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렇게 밝아진 것도 에이린 덕분이니까, 내 돈으로 에이린 선물이나 준비해야지. 좋다. 선물할 수 있는 돈이 생겨서. 나 한동안은 부자임. 우헤헤.

"무슨 생각하기에 그렇게 기분이 좋아?"

"전하 생각은 아니니 기대하지 마십시오."

내 단호한 말에 왜 같이 시무룩해지는 거죠? 황태자야 그렇다 치고 보좌관은 도대체 왜? 황태자를 동정하는 눈으로 보는 건데? 와, 나 완전 나쁜, 못된 년이 된 느낌적인 느낌.

"다음에, 전하 생각을 하게 되면, 그, 그때, 말해줄게요."

둘 다 얼굴이 환해졌다. 이거 내가 말 한마디 잘 못하면 둘이 같이 우울증 걸리는 거 아냐?? 하하.

숨. 막. 힌. 다.

예상한 것보다 집무실이 더 불편해질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 황궁에는 나의 개인적인 공간도 없고, 사생활도 보장받지 못할 것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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