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내 사생활은 어디에? (1)
2018.04.15.
사흘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궁의 구조를 익히고 궁인들을 파악하면서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마음도 사그라 들었다.
최대한 내가 기억하는 아르세이아의 모습에 가깝게 도도한 척, 우아한 척하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의외인 것은 아르세이아를 정말로 많이 아끼고 좋아하는 황태자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도 된다고 허락했더니 아주 민망해 죽을 정도였다. 적당히 좀 하지.
이렇게나 내 동생을 좋아하는데, 나와 동생의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의문인 동시에 다행이었다. 에이린의 말에 의하면 간택연 이후로 만난 것은 다섯 손가락 이내고, 국혼 이후에는 황태자가 진짜 바빴다니 아르세이아의 습관 등을 미처 몰랐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 한심하네. 사랑한다는 여인을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당신 눈앞에 있는 여자는 당신이 사랑하는 아르세이아가 아니에요.
그가 내게 잘해 줄수록, 내 양심이 나에게 호된 질책을 했다. 만약... 내가 발각되지 않고 떠나는 날까지 그가 잘해준다면, 그가 했던 모든 구애를 아르세이아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일기를 쓰기로 했다. 돌아오면 그전에 있었던 일들도 알아야 하니까.
아무튼 황태자가 나를 많이 아낀다는 것을 과시한 행동 중 하나는 오늘 내 방에 들어온 이것들이었다.
"전하, 마음에 드십니까?"
"방에 익숙해지려니까 가구의 종류와 위치가 싹 바뀌었구나."
가구들이 바뀐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내 팔에 든 멍. 우연히 내 팔을 잡다가 멍이 든 것을 알게 된 그는 이유를 추궁했다. 그저 가구 배치가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했음에도, 그는 가구의 모서리가 다 모가 난 탓이라고 여겼다.
결국 장인들이 총동원되어 내 방의 가구들은 모서리가 죄다 곡면으로 우아하게 깎아내려진 것들로 전부 바뀌었다.
"내 비의 몸에는 털끝만 한 상처도 나선 안된다. 알겠느냐?"
겨우 멍 때문에 이미 고급진 가구들을, 싹 갈아치우는 스케일이라니. 내 비록 황태자비 명목으로 나온 내탕금들을 마음껏 쓸 예정이었지만, 이것 참. 돈 지랄이다.
내 집무실 가구들도 이미 다 바뀌고 있단다. 수리할 곳이 더 있대서 아직 가보지도 못했는데...
멍 좀 들면 어떤가, 차라리 그 돈으로 빈민 구제에 힘 쓰는게 더 보람 찰 텐데. 황태자는 정령력만 낭비하는 게 아니라 돈도 마구 낭비하는 낭비벽 있는 남자였다.
그가 황태자만 아니었어도, 가난한 귀족 영식이거나 평민이었다면 생활력 빵점인 남자였다. 내 동생을 이런 남자에게 시집보냈다니...
하지만 아르세이아라면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내색할 수 없었다. 대신 내 소유의 내탕금들을 조금 더 보람찬 일에 쓰자고 다짐했다.
이제 나도 황태자비로써 업무가 시작되는 참이었다. 매일 같이 오전에는 여러 가지 수업이 이어졌다.
"그럼, 제국 데피니토르의 황가는 대대로 정령과의 친화력이 좋은 것은 아니었군요."
"그렇습니다. 비 전하, 오히려 나쁜 편이죠. 아무래도 세속적인 권력욕이 강한 황족의 특성상 순수한 정령의 선택을 받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허나, 역대 성황으로 알려지신 폐하들은 모두 정령의 가호를 받으신 것으로 압니다."
"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자연의 힘을 거스를 순 없으나 그를 잘 활용하여 풍요를 가져다주셨지요. 그래서 지금의 황태자 전하께 다들 기대가 크답니다. 심지어 정령왕을 다루시는 분이니까요. 이미 여러 자연재해를 잘 다스려 기적을 만드셨답니다. 덕분에 빈민들의 목숨을 여럿 구하기로 하셨구요."
흠. 그렇구나, 정령의 힘은 기적도 만들어 내는구나. 왜 부럽다는 생각 밖에 안 들까? 그때, 그날에, 나도 운디네를 부를 수만 있었어도.
"전하께서는 황태자 전하께서 정령력을 쓰시는 것을 본적 있으신가요?"
"아, 네. 몇 번 있습니다."
"정령들이 소환되어 아름다운 빛을 내면서 흩어지는 모습이 경이롭지 않습니까? 전하의 초상화가 기대됩니다."
두가지 다 이해되지 않았다.
"초상화요?"
"네. 정령을 부리시던 황제 폐하들은 모두 정령과 함께 하신 모습을 남겼습니다. 전하께서는 정령왕의 모습을 남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걸작이 남겠지요."
그러니까 정령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거야? 힘을 쓸 때? 빛과 함께? 정령의 힘을 느끼긴 했지만 본 적은 없었다. 빛은 물론이고. 물어볼까? 하지만 아르세이아는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물었다가 못 보는 것을 들키면 안 되는데.
"그나저나 비 전하, 본가에 다녀오시더니 열정이 생기셨나 봅니다. 오늘처럼 질문을 많이 하신다면 지혜로움을 갖추신 미래의 황후가 되실 것입니다."
"아, 네... 하하."
평소랑 다른 것을 느끼는 사람에게 차마 정령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지 못했다.
황태자비는 미래의 황후가 될 것이기에 내정을 집행하는 교육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시작된 장부 보는 법과 궁내부의 구성과 관리 등의 수업은 어려웠다.
아르세이아가 후작가에서 듣던 수업은 대부분 레이디로서의 교양과 예법이었으니까, 대타로 가서 배운 것도 그런 것뿐이었다. 게다가 지난 3개월 치를 내가 다 따라잡아야 하니 양이 장난 아니었다.
이거... 아르세이아가 돌아왔을 때 잘 해낼까? 조금 걱정되지만 내가 떠나고 나서의 일은 모른척해도 되겠지. 이건 너무 완벽하게 해내진 말자.
"후아, 힘들어. 황태자비로의 교육은 얼마나 더 해야 해?"
점심이 도저히 입에 안 들어 갔다. 날도 좋고 숨도 쉴 겸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간단한 샌드위치를 눈앞에 뒀지만 입맛이 뚝 떨어졌다. 힘들다아!! 아르세이아가 도망가려고 한 이유를 조금, 많이 이해가 됐다.
"너무 완벽해지려고 할 필요 없어."
황태자가 어느새 다가와 내 말에 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이렇게 잘 찾을까? 감시라도 붙였나?
그의 예쁜 골든 베릴을 닮은 맑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그의 눈을 마주하자 역사를 가르쳐주는 딜라이트 백작이 한 말이 떠올랐다. 기적을 일으키는 황태자.
"완벽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에게 해주는 위로라 와닿지 않네요."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힘을 가진 이에 대한 열등감. 못된 말이 튀어나왔다.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나의 비께서 오늘은 왜 이리 예민하실까? 혹시 누가 그대를 무시하거나 건방지게 입을 놀린 것인가?"
당장 고해바치라는 듯 형형한 눈빛을 쏘자 주변의 시녀들이 놀라서 떠는 게 느껴졌다. 저기요, 나 시녀들 잡을 생각 없거든요? 요즘 얼마나 나한테 잘하는데.
"그저 공부를 하다 보니 황태자께서 얼마나 위대하신지, 그에 비해 저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인간인지 뼈져리게 느꼈을 뿐이니깐 제 시녀들 노려보지 마시죠?"
그 말에 그가 짐짓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위대한 나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 그대인데 어찌 보잘 것 없다는 거야?"
"네? 바보요?"
푸핫. 하긴, 내 앞에만 서면 앞뒤 재지 않는 바보처럼 굴긴 하지.
"그래, 그대만 보면 예쁜 그대의 미소가 보고 싶어서 물불 가리지 않는 내가 바보가 아니면 무엇이겠어?"
다정하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아왔다. 그리고 질척댔다. 왜 매번 꼬물딱 거리냐고! 아 간지러!
"전 웃지 않아도 예쁘니까 그냥 안 웃기셔도 돼요."
"하핫, 그건 그래. 그댄 화를 내도 예쁘지."
아, 괜히 나만 또 민망해졌다. 말하지 말걸.
"그리고, 내가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그대도 완벽하지 않아도 돼. 부족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채워가면 되니까."
사실 아르세이아가 돌아 올 때를 위해 잘하고 싶었다. 그 아이가 내게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그 아이를 위해 황태자의 사랑을 주고 싶었고, 인정받는 황태자비 자리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 아이는 멋대로이긴 해도 제 어미와 달랐으니까.
"도움 주는 사람에 전하도 포함이에요?"
"물론, 나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대의 편이니까."
"믿어도 되는 거죠?"
그는 대답 대신 나의 오른손을 잡고 손등에 길게,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제발 그 마음 변치 않길. 그 어떤 순간에도.
잘 속여야 한다는 부담감, 그러면서도 잘 해내야 한다는 욕심으로 열흘을 버텼다. 정신적으로 피로했지만, 그럭저럭 해낼만했다.
아르세이아가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잘하던 것을 찾아 구별해서 행동하다 보니 점점 아르세이아와 닮아가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자 대역으로써의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점차 즐거움을 느껴 황궁 생활이 조금 재밌어졌다.
입궁하기 전의 두려움은 어느새 많이 흐려졌다. 처음에는 불편하기만 했던 황태자도 익숙해졌다. 그는 처음의 능글맞고 뻔뻔했던 모습과는 달리 나를 계속 배려해주고, 조금씩 황궁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의 나에 대한 관심은 과했다.
"왜, 내 집무실이 전하의 집무실과 같이 있는 거죠?"
내 집무실은 가구를 바꾸는 김에 공사 중이라고 하여 이용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입궁 한 뒤 계속 응접실에서 일을 했었다.
업무 파악 정도라 응접실에서 일하는 것이 불편하진 않았지만 내 공간이 생긴다는 기대에 설렜었다. 내 방은 어느새 황태자랑 공동 영역이었기에 독립을 잔뜩 기대했는데!
내 개인 공간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커다란 집무실에는 크고 화려한 두 개의 책상이 마주 보고 있었다. 두 책상 사이에는 소파와 작은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집무실 밖에는 보좌관의 사무실이 이어져 있었다.
나의 황망해 하는 목소리에 황태자의 보좌관이 대신 답했다.
"죄송합니다. 비 전하. 카일룸께서 하도, 비 전하를 찾으러 심심하면 집무실을 뛰쳐나가서 그냥 한 공간에 계시면 일을 열심히 하실 듯하여 제가 청을 드렸습니다. 정확히는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을, 저 능청맞은 황태자께서 덥석 물었지만요."
하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공부할 때 빼고는 시도 때도 없이 붙어 있어야 하는구나. 그냥 수업 시간을 세배로 늘릴까?
루카스 보좌관은 얌전히 내 눈치를 살폈다. 페르데우스 가문의 장자인 그는 황태자의 심복이자 어린 시절 친우 중 하나라 했다. 차가운 이성을 지닌 보좌관이라 불리며 아주 유능한 이랬는데, 친구라서 그런지 말도 서슴없이 하고 거침이 없는 사람이었다.
휴우, 안 그래도 아르세이아의 필체를 따라 신중히 서명해야 해서 신경 쓰이는 판에, 이 인간들이 진짜.
그러고 보니 내 책상에 올려진 서류에 적힌 아르세이아가 황실에서 쓰던 필체가 내 기억과 달랐다. 그녀의 글씨들은 좀 더 우아하고 둥글둥글했는데, 조금은 거침없어졌다. 마치 내 것처럼?
이거...
첨부터 나한테 황태자비 떠넘기고 도망갈 생각이었던 게 틀림이... 내 미간이 파르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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