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애정 표현은 해도 좋아요. 단지...
2018.04.14.
"후아, 힘들다. 역시 몸쓰는 것보단 사람 상대하는 게 더 힘들구나."
이런 삶을 무기한으로 해야 할 것이다. 끝이라도 정해져 있으면 좋을 텐데. 비스 후작가에서 아르세이아를 찾고 있긴 한 거겠지? 왜 믿음이 안 가지? 얼른 좀 찾아주세요.
"전하, 오늘 완전 멋졌어요."
"나 힘들어."
"이 정도 가지고 뭐 그래요. 앞으로 황후 폐하나 릴리아나 공녀 등등 사교계에서 싸워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을 건데요."
"으앙. 안 할래."
에이린은 곧 테이블 위에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우와. 많다. 혼자 다 먹으라고?"
"다 먹고 살이 좀 올라도 예쁘겠지만, 절반은 내 몫이야, 세이."
"아..."
젠장. 나 그냥 굶을까? 얼굴 보고 있으니 계속 남자의 입술에 눈길이 갔다. 낮에 저지른 짓이 있어 한쪽 심장이 뜨끔한다. 찔. 린. 다.
"오, 오셨나요?"
시녀들을 상대로 서열 싸움 중이니 네가 와서 힘 실어주는 건 고맙긴 한데, 체할 것 같다? 왔음 그냥 앉지 왜 또 얼굴부터 들이밀어?
내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추고 의자를 내 옆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이마에 입을 맞춰 오는데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쨌든 옆에 앉으니 마주 보는 것보단 낫긴 하네.
에이린은 또 입꼬리가 춤추는 걸 참고 있었다. 너 비웃는 거야?
에이린! 너! 나가지 마!! 옆에서 시중 들어줘. 나 진짜 체할지도 몰라!
"에이린이라고 했나? 시중은 필요 없으니 너도 저녁을 먹고 오너라. 다른 이들에게도 내가 나의 비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니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전하고."
안돼!! 에이린을 보내지 않으려고 핑곗거리를 찾는데 에이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저거! 분명 문 닫을 때 웃은 것 같은데?
오늘 한 번 더 교훈을 얻었다. 식물도 사람도 믿지 말 것!!
"세이, 내가 덜어 줄게."
황송하옵게도 황태자가 직접 내게 음식을 덜어줬다. 하하. 너 같음 이거 부담스러워서 먹겠니?
"일은 다 끝내셨어요?"
"물론, 루카스가 만족할 만큼 끝냈어. 한 무더기 일거리를 쌓아 놓고 안 끝내면 안 보내 준다고 해서 점심도 굶고 일했다구."
"식사는 대충이라도 챙기셨어야죠. 시종장이 일을 제대로 안 하나 보군요. 시녀장도 그렇고 만월궁의 기강이 이래서야."
내가 포크를 들고 그가 덜어 준 샐러드를 휘젓고 있자 황태자가 내 포크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양상추와 견과류를 찍어서 내밀었다.
"그대가 내조를 시작했단 소식은 들었어. 너무 무리하진마. 자, 일단 먹어."
나는 그가 내민 포크를 다시 뺏어들고 아르세이아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다시 찍어서 입에 넣었다. 이런 내 모습에 그가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몸은 괜찮아?"
내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 그래 첫날밤부터 내 달거리를 튼 남자지.
"아직 아프면 내가 오늘 밤도 곁에서..."
"또 제 방에서 주무실 거예요?"
이 변태 황태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제 매일 밤 그대 곁을 지키려고. 게다가, 그대를 안고 자면서 나도 간만에 숙면을 취했거든."
"밤새 못 주무시고 웅얼거리는 소리 다 들었습니다만. 서로 불편한데 따로 주무시죠?"
"아, 들었어? 초반에만 그랬고, 그대가 나중엔 날 끌어안아 줘서 푹 잤는데?"
무슨 헛소리야? 아 말도 안 돼!! 내가 왜!! 설마 알비케라인 줄 알고 그랬나? 평소에 내가 걜 끌어안고 자긴 하지만... 나 습관처럼 그런 거야? 미쳤어 미쳤어!!
거짓말이 아닐까? 슬쩍 표정을 보니 약간 상기돼서 들뜬 게 진짜인가 보았다.
"전하이신 줄 알았으면 끌어안지 않았을 거예요. 알비케라인 줄 알고 그런 거라구요."
"... 그대의 애완견이 암컷이라 다행이야..."
응? 살짝 늑대가 자기 아내 노리는 다른 수컷한테 보이던 눈빛을 본 것 같은 이 착각은 뭐죠? 알비 괴롭히기만 해봐랏!
그는 식사 시간 동안 내 곁에 붙어서 루카스가 자신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밀린 업무 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한데 근위대장이 와서 대련 좀 하자고 보채서 힘들었는지를 내게 투덜거렸다.
국혼을 치르고 바로 외부로 나돌아 바빴다더니 그 때문에 밀린 일을 이제야 처리 중이라 했다. 업무가 밀린 이유 중에 아르세이아의 가출도 포함됐으리라. 돌아오는 내내 밤마다 막사를 떠나 어딘가로 나갔던 것도 바빠서였겠지. 내 죄는 아닌데 내가 미안했다.
그나저나 계속 쫑알대는 것이 엄마에게 제 형제들이 괴롭힌 걸 이르는 아기 참새 같아서 좀... 우리 제부 귀엽네. 하하하.
"그니까, 하루 종일 힘든 나한테 자주 쫌 웃어주고 토닥여줘. 응 세이?"
"제가 웃으면 전하께 힘이 돼요?"
"응. 운디네가 회복시켜주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정령보다 내가 더 그의 피로회복제라며 웃는 그의 미소가 무척 밝고 예뻤다. 노란 눈동자가 순수하게 반짝이는 것이 한 점의 거짓도 담겨있지 않다.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진심, 사랑이 느껴졌다.
나는 살면서 받아보지 못한 애정 어린 눈빛. 친구인 에이린과 프리케가 보내주던 우정과는 다른, 깊이를 알 수 없는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제가... 그리도 좋아요?"
"아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건데?"
눈을 휘며 말하는 그의 미소가 묘하게 아릿했다. 처음 받아 본 나만을 향한 사랑이 가득한 저 미소는 내 것이 아니었다. 아르세이아를 향한 것. 그의 진짜 황태자비. 내 동생을 향한 것이다. 나는 그저 그녀를 대신해 앞에 있는 것뿐인데.
부러움일까? 질투일까? 세이렌. 저 시선은 주인이 따로 있는 거야. 지금 너는 이곳에서 네가 대역인 것을 들키지 않고 살아남는 것에 집중해야지.
"세이, 혹시... 내가 너무 부담스러워...? 내가 막 애정표현하고 들이대는 거 싫어? 하지 말까?"
내 표정이 그렇게도 별로였나? 그가 시무룩하게 물어왔다. 누가 이 남자를 창공의 냉혈한이라고 했지? 그냥 우리 알비케라랑 똑같은데, 혼날까 봐 눈치 보는게 완전 같잖아. 불쌍하니깐 조금은 풀어줄까?
"하셔도 돼요."
"진짜?"
"네, 대신 사람들 앞에서만요. 둘만 있을 땐 하지 말고."
"응? 진짜 그래도 돼?"
"네."
내가 빙긋 웃어주자 그도 따라 웃는다. 그런데 그가 갸웃거린다.
"뭔가 반대인 것 같은데...?"
그가 웅얼거리는 소리는 사뿐히 무시했다. 그리고 토 달지 못 하게 아르세이아가 싫어하는 토마토를 콕 찍어 그의 입에 밀어 넣어 줬다. 의문도 잊고 좋댄다. 몇 번 더 아르세이아가 싫어하는 것들을 골라 입에 넣어 줬더니 너무 행복해해서 괜스레 양심에 찔렸다.
일단, 남들에게 황태자가 황태자비에게 푹 빠져있음을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 민망한 걸 좀 참고 견디면 황태자비의 지위가 더 탄탄해질 테니 손해 보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 동안이나 티격태격하던 식사를 끝 낸 뒤 나는 책을 꺼내 읽었고, 그는 못 읽은 보고서를 꺼내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중간중간 내 눈치를 살피며, 이건 어떤 어떤 이유 때문에 되니 안되니 읊었다. 내가 대꾸해주지 않는데도 아주 진지하게 혼잣말을 했다.
뭐지? 왜 저러지?
밖에서는 우리가 내외하고 있는 것을 모르니 다정해 보이겠지. 뭐 시간도 때우고 좋네. 최소한 귀찮게 굴진 않잖아.
중간중간 책을 읽는 내 모습을 흘끔거리는 것 같지만 그 정도의 시선은 불편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 에이린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이제 주무실 시간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목욕 준비도 끝내 놓았다고 시종장께서 전하셨습니다."
그래그래, 어서 가서 씻고 주무세요.
"같이 씻..."
"당장 나가시죠, 전하."
시무룩한 표정인 황태자가 나가고 나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아직 어색했지만 다른 이들의 시중을 받는 것에 익숙해 지려 노력했다. 뭐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 거라 힘들진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할 일이 없어 뻘쭘한 게 문제지.
씻고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각종 화장수들을 펴 바르고 침의로 갈아입었다. 내 요구로 침의는 무조건 다 가려지고 적당한 두께감이 있는 튜닉 스타일로 바뀌었다. 길이도 길게 길게!
침실로 돌아가자 아니나 다를까 그가 벌써 내 침대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내가 들어가자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침실까지 따라오며 마지막으로 머리를 말려주던 시녀들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일제히 물러갔다. 에이린, 왜 너까지 웃으면서 가는데?? 이 나쁜 배신자. 날 또 이 사지에 혼자 남겨뒀다. 쟤 수상해 진짜!!
"본인 방은 어쩌시고요? 그 방은 주인이 찾지 않아 쓸모가 없이 버려졌겠군요."
"그럼 같이 그 방으로 옮겨갈까?"
됐다. 말을 말자. 한숨을 푹 쉬고 그의 옆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내가 이불 속에 들어가자마자 뱀이 이동하듯 샤샤삭 내 곁으로 붙어 앉는다.
흐익!! 그러고는 팔을 괴고 옆으로 돌아눕는다. 날 유혹이라도 하겠다는 듯 요염하게 웃었다. 위험한 남자... 저기 저 아직 달거리 중인데요. 워이 저리 가!
"얼른 누워. 자자."
"그렇게 지켜보고 계신데 잠이 오겠습니까?"
"하지만, 이래야 네 얼굴이 잘 보이는걸. 오랫동안 못 봤던 거 보상받을 때까지 계속 계속 봐 둘거야. 이젠 절대 얼굴 잊어버리지 않게."
아기도 아니고, 25살짜리 남자가 무슨 투정이 심한 건지... 게다가 아까의 그 도발적이던 남자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결국 나는 그에게 지고 말았다. 얌전히 그의 곁에 누웠다. 그러자 오늘도 내 손을 잡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둘 다 잠의 신의 방문을 받았다. 오늘도 나는 알비케라가 곁에 없는데도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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