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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13화 (13/126)

14화. 황태자비가 된다는 것은...

2018.04.12.

"그냥요... 예전에는 이렇게 예쁜 곳이 있으면 마구 뛰어놀았는데 이제 당분간은 그러면 안 되니까."

아, 실수였다, 당분간이 아니라 앞으로는이라고 해야 하는데. 눈치 못 챘겠지?

"뛰어놀면 되지."

"어떻게요? 후작가에 있을 때보다도 비싸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꽃밭을 뛰어다닐 수 있을리가요. 그것도 황태자비가."

"옷이야 더러워지면 내가 깨끗하게 만들면 되고, 황태자가 황태자비랑 뛰어노는 것은 아무도 뭐라 못할걸?"

그러고는 그는 먼저 뛰어나갔다. 그는 알비케라를 뒤쫓으며 수국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숨바꼭질을 하자는 그의 제안에 나도 웃으며 동의했다. 그의 파란 머리는 눈에 띄기 때문에 풀숲의 그를 쉽게 찾아냈다. 알비케라의 하얀 털뭉치는 흙색과 대비되어 금세 발각되었다.

이번에는 황태자가 술래가 되었다. 이 변태 황태자는 나에게 내기를 걸었다. 그의 언변에 휘둘려 모래시계를 돌려 시간 안에 그가 날 찾으면 키스를 해주게 되어버렸다. 대신 내가 이기면 그의 내 침실 출입을 제한하기로 했다.

나는 숨바꼭질을 하면 들키지 않고 숨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이 내기에 응한 것이었다. 식물들이 날 숨겨주니까.

"말도 안 돼!"

"자, 모래시계가 아직 절반도 넘게 남았지? 훗. 이제 상을 내려주시죠? 비 전하."

으... 식물들이 날 배신한 거야? 너네, 이러기야??

잔뜩 울상이 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내밀고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청남색의 머리가 이마를 살짝 덮고 있었다.

그리고 노란빛 보석을 숨긴 눈 아래에는 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덥지도 차갑지도 않은 바람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이길 승부라 생각하고 응한 내기였다. 이를 어쩐다. 그때 내 눈에 알비케라가 띄었다.

미안해. 알비케라. 부탁한다.

알비케라가 혀로 그의 입술을 핥는 짧은 순간. 나는 잽싸게 뒤로 돌아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수국 더미 뒤로 뛰어가 버렸다.

알비케라, 티 안 나게 살짝 닿은 거 맞지? 설마 사람의 그것과 촉감이 확연히 다르거나 하진 않겠지? 들키면 안 되는데.

알비케라를 놓고 숨어서 그를 숨어서 지켜보자 그가 제 입술을 손으로 만지면서 벌게진 얼굴로 멍하게 서 있었다. 아... 미안해요. 그렇지만, 당신은 내 동생의 남편인걸요.

양심이 콕콕 찔렸다. 그래도 다신 저 인간과 내기를 하지 말라는 교훈을 얻었으니 만족해야지.

그리고 애꿎은 식물들을 노려보며 다짐했다. 세상에 믿을 식물 없다!!!

한참 뒤 우리는 서로 어색한 채로 미로정원과 연못 등을 둘러 본 뒤 만월궁으로 돌아왔다. 물론 돌아오기 전 엉망이 된 드레스는 정령들이 깨끗한 상태로 돌려줬다. 머리는 에이린이 대충 정리해줬고.

"세이, 싫지 않다면 내일도 음, 같이 산책할까? 부황께서 계신 태양궁의 정원도 소개해줄게."

"네. 전하의 배려로 모레까진 쉴 수 있으니 시간 내겠습니다."

내 대답에 어느 때보다 환한 표정의 그는 자신을 찾으러 온 보좌관의 뿔난 얼굴을 보고 급격히 어두워진 안색으로 집무실로 끌려갔다.

흠, 상관에게 저리 대놓고 정색해도 혼내지 않다니 황태자는 참 너그러운 사람이구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대충 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때운 나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쉬었다. 다들 연약한 레이디인 내가 산책을 오래 해서 쉬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연약은 어디가 아프면 먹는 약이죠? 매일 하루의 반을 목장이 있는 언덕을 뛰어다니며 동물들과 살았던 나의 체력을 뭘로 보는 건지. 멘탈이 좀 약해서 그렇지 체력은 좋았다. 어쩔 수 없이 침실에 묶인 나는 남은 하루엔 뭘 할지 곰곰이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나는 나를 보좌하는 시녀들을 모았다. 어제 시녀장을 한번 잡긴 했지만, 아르세이아가 돌아왔을 때를 생각하면 좀 더 확실히 서열을 잡아 두는 것이 낫겠지.

에이린에게 지난 3개월간의 일을 물었었다. 우선 황태자의 일정이 새로 입궁한 황태자비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또 시녀들의 휴가나 결근이 황태자비인 아르세이아가 아닌 시녀장 선에서 처리되었다고 한다.

에이린을 제외한 시녀와 하녀들의 인사권도 그녀가 독점했다고 했다. 아, 물론 하녀들까지야 황태자비가 직접 관여하긴 그렇지만 내 시녀들은 내 소속 사람이 아닌가?

웃전의 신뢰를 받는 시녀장이야 윗사람의 위임 하에 독단적으로 인사권을 발휘할 수 있다지만, 아르세이아는 시녀장에게 위임한 적 없었다고 한다.

이게 다, 그놈의 황태자가 다 아르세이아를 소박 맞힌 탓이었다. 현재 귀족파 출신의 후궁이 황실에 전무하며, 시녀들조차 황제파로 가득한 이 황궁에서, 귀족파 수장의 외손녀가 견제 받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럼 지아비의 사랑이 권력이 돼야 하는데, 이 인간이 방치했잖아.

식물들도 서로 햇빛을 더 받겠다고 서로를 견제하며 힘 있는 식물이 어린 식물들을 시들어 죽게 만든다. 또 어린 동물들도 제 형제와 어릴 때부터 서열 싸움을 하며 자신의 세력을 다진다. 지면 모든 것을 빼앗기니까. 힘없는 황태자비의 위치도 결국 마찬가지일 것이다.

뭐 솔직히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동생을 위해 이리 수고롭게 일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 상태로 아르세이아가 돌아왔다가 무시당하고 핍박받으면 분명 후작부인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다 내 탓을 하겠지. 그러니 어느 정도 선에서는 정리해야겠지?

본받고 싶은 맘은 없지만 뼛속까지 우아하시고 고명하신 후작부인께서 아랫사람들을 다루는 솜씨를 흉내 낼 필요는 있을 것이었다. 초반에만, 기강을 잡을 때까지만 따라 하자.

"시녀장. 모두 모인것인가?"

"예. 전하."

나는 오만해보이는 표정을 최대한 지었다. 눈은 최대한 매서우나 치겨뜨지 않은, 자신만만함. 그리고 입술을 적당히 과하지 않게 비틀어 올리기. 아 어색하다. 이거 후작부인은 어찌 매일 하는거지?

타고난 귀족이란, 나 같은 반쪽짜리에겐 참 어려운 일인 것을 느꼈다. 역시 송충이에겐 솔잎만 주자.

"내 그대들에게 물을 것이 있다."

내가 시녀들을 한번 훑었다. 사자가 무서운 이유를 알아? 눈빛으로 먼저 기선제압을 하거든. 이 구역 내꺼라 이거야.

"이 제국을 다스리는 이는 누구신가?"

"유스티오 헬리오스 데피니토르 황제 폐하이십니다."

"그럼 이 황궁의 내정을 다스리는 주인은?"

"바이올렛 스텔라 데피니토르 황후 폐하이십니다."

시녀들은 당연한 질문에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답을 했다. 그래 너무 쉬운 질문이지?

"그래 잘 아는구나. 그러면 만월궁의 내궁을 다스리는 주인은 누구인가?"

“당연히 황태자비 전하이십니다.”

"아, 그런가? 나는 모일라 시녀장인 줄 알았지 뭔가?"

내 차가운 목소리에 다들 당혹스러운 낯이 되었다. 특히 모일라 시녀장은 얼굴이 난리가 났다.

내가 마냥 논 것 같겠지만 열심히 귀족 계보를 팠지. 그녀는 현 황제파의 수장인 콘스탄트 공작가의 먼 방계였다. 그리고 죽은 1황자와 황태자의 유모였다. 뭐 친척이라고 다 같은 편은 아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사교계의 소문에 어두운 나로서는 일단 의심 가는 것은 다 조심해야 했다.

"전하.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이 만월궁의 안주인은 전하이십니다."

"그래? 난 내 시녀들의 휴가와 근무 일정도 모르고, 이 궁내의 시녀들의 이동사항도 보고받지 못했다. 아 물론, 자애로운 황후 폐하께서 만월궁까지 친히 보살펴 주시는 것이라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지만, 내가 알기로는 폐하께선 각 궁의 시녀들의 인사는 각 궁의 안주인에게 맡긴 것으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나?"

"바로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나는 새 시녀가 어느 집안의 몇째 영애인지, 누가 휴가를 받았는지를 뒤늦게야 알게 되는 것이지?"

모일라 시녀장은 지금의 황태자가 만월궁의 주인이 된 이후 5년째 만월궁의 시녀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했다. 사자가 없으면 하이에나가 백수의 왕인척한다더니 딱 그 짝이군.

"그것이 예전부터 관례적으로..."

"그것은 내가 입궁하기 전에 그대가 가진 권한이었겠지. 그리고 말이야, 왜 내가 나의 반려께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보고받지 못하는 거지? 그분께서 위험한 곳에서 목숨을 걸고 괴수와 싸울 때, 황태자비인 나는 정말 편안하게 황궁 생활을 누렸더군."

내가 최대한 냉정한 척 날카롭게 말했다. 니들 때문에 지아비가 사지에서 싸우는 동안 혼자 사치하면서 신나게 놀고 지내는 악처가 됐잖아. 다 니들 탓이다.

이 뜻이 잘 전달됐는지 다들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뭐, 내가 그냥 이렇게 말로만 하면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어제오늘 황태자 버프를 얻었었다.

"황태자께서 내게 직접 지난 시간 동안 있었던 힘들었던 시간들을 말씀하시는데, 내 응원을 받지 못했음을 어찌나 서운해하시던지... 분명 알리고 갔다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내 얼굴을 들지 못하겠더구나. 그럼에도 그분은 날 원망하지 않으셨다."

너네 황태자, 너네가 그거 전해주지 않아서 내 오해받고 초야 거부당하고 지금 완전 마음 상했어. 내 원망은 안 해도 너네 원망은 할걸?

"오죽하면 내 몸이 전하를 모실 수 없는 상황인데도 내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셨을까?"

그만큼 너네 황태자가 나 애타게 원한다고. 니들 아까 창문으로 후원에서 우리 노는 거 훔쳐보는 것 다 봤거든. 우리 이제 제법 친하다고, 니들이 한 짓 고자질 할정도는 된단 말이지.

내 연기가 먹혔는지 다들 파랗게 질렸다. 그 와중에 에이린만 입이 씰룩거렸다. 너 후작부인이 떠올랐구나. 나 넘 똑같았니?

웃음이 전염되기 전에 급 시선을 모일라에게 돌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위엄있게 명했다.

"내가 이 만월궁의 안주인이고, 내 지아비가 황태자 전하임을 잊지 말게."

"예, 전하."

어, 그런데 저 시녀장... 날 보는 눈빛이 왜 달라졌지? 첫 수영에 성공한 새끼를 보는 수달 엄마의 표정과 닮았는데?

나름 성공적으로 시녀들을 정리한 나는 에이린에게 저녁식사를 내 방으로 올리라 명하고 시녀들을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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