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황태자가 정령에게 지급하는 대가.
2018.04.12.
"하! 저 이만 들어 갈래요."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싫습니다. 전하랑 잠시도 같이 있기 싫어요!"
진심으로 싫었다. 이렇게 날 가지고 노는 게, 놀리는 게 싫었다.
내가 정말 간절히 필요할 때도 나는 쓰지 못했던 자연을 다스리는 정령력을 함부로 막 가져다 쓰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날 놀리는데 쓰는 사람이 미워지려 했다.
나는 도저히 함께 자리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아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내 험악한 표정을 본 황태자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목을 잡고는 말을 쏟아 냈다.
"미안. 진심으로 사과할게. 원래는 그냥 아까 꺾은 장미만 뿌리내리게 할랬는데, 그대가 웃는 걸 보다 보니까 여러 송이의 장미가 피는 과정을 보면 그대라면 분명 좋아할 것 같아서 욕심낸 거야. 나는 정령왕들과 특별한 약조를 한 게 있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생명력이 아니라 마나를 대가로 지급하거든."
마나를? 마나라는 것은 자연의 힘을 제 몸에 모아두었다가 검기 같은 거나, 마법 같은 것을 쓸 때 쓰는 힘 아닌가? 정령은 억지로 몸에 잡아둔 마나보다는 생명력을 더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다급하게 말하던 그는 내가 답을 하거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작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끝까지 이야기해 주었다.
"보통의 정령술사들은 정령을 이 세계로 소환하고 유지시키는데 마나를 쓰고 정령의 이능을 쓰는데 생명력을 바치지. 현재 지닌 체력을 먼저 대가로 지급하고 그 대가가 모자라면 생명력을 대가로 내야 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뒷부분뿐이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내가 듣고 있자 그는 안심이 되었는지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런데 나와 정령왕들 사이는 다른 소환사들과 달라서. 그들은 내 부름에 언제나 대가 없이 달려와주기에 소환과 유지에 마나를 쓸 일이 없어. 그리고 대신 이능을 보일 때 대가로 마나를 지급해."
"마나의 양에도 한계가 있지 않나요?"
"그대의 남편은 소드마스터이기도 하거든."
아, 맞다. 소드마스터. 마나를 모으고 그것을 검기로 발현 시킬 줄 아는 최강의 검사.
자신이 소드마스터임을 알린 황태자의 얼굴에는 약간의 자부심? 그런 종류의 잘난 척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마치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외치는 듯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일단 마스터에겐 마나 코어가 있어. 거기에 내가 모아둔 마나의 양이 장난 아니거든. 아마 어지간한 마탑주들보다 내 마나량이 많을걸? 게다가 특별계약이라 대가가 음... 남들의 100분의 1 정도 밖에 안돼서. 진짜 타격이 작아. 다시 모으는 것도 금방이고. 아마 정령왕 중 하나의 본체를 소환해서 큰 힘을 쓰지 않는 한 마나는 고갈되지 않을 거야."
특별계약? 신기했다. 황족한테는 계약도 특별히 따로 해주나? 할인까지 하면서? 정령들 차별이 좀 심하네.
"정령의 힘을 쓰려면 정령들이 꼭 이 세계로 건너와야 하나요?"
"응. 그렇지. 대부분의 정령술사는 정령계의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걸? 그러니 정령왕은 꿈도 못 꾸고."
아, 그런 정령을. 내 눈 붓기 가라앉히거나, 식은땀이랑 개털 날려보내고, 내 월경통을 멈추게 하는데 막 썼었군요.
고마운 일이었는데 뭔가 더 찝찝해졌다.
"사소한 일에 그렇게 정령들을 소환하면 정령들이 싫어하지 않나요?"
"아니 좋아해. 그들은 이 세계로 나오는 걸 좋아하거든. 그들이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서. 내가 불러주면 그 짧은 사이 탐색도 하고. 오늘 간만에 놈을 부른 건데 녀석이 좀 흥분한 것 같긴 해. 난 한두 송이만 새로 피울랬는데 오늘따라 힘이 넘친다면서."
그의 말에 새로이 핀 장미를 바라봤다. 크지 않은 장미 줄기에 열 송이가 넘는 장미가 폈다. 줄기가 튼튼해 마구 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작은 화분에 넘칠 정도였다. 어지간한 꽃다발 보다 풍성해 보였다. 내가 주는 생명력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힘.
"놈이라면?"
욕같아. 남자들끼리 서로 지칭할 때 이놈 저놈 하던데, 정령이 남자인가?
"아, 땅의 정령의 이름이야. 바람의 정령은 실프, 물의 정령 운디네, 불의 정령은 살리맨더. 따로 불리는 이름이 있는 것 같던데 나한테는 알려주지 않더라고. 누가 붙여준 이름인데 나한테는 알려주기 싫대."
정령에 대한 이야기는 신기했다. 아르세이아를 대신해서 들었던 수업에는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에도 이런 이야기는 들어 본적 없었다.
"더, 듣고 싶은 것 있어?"
"네?"
"그대가 최근에 나랑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고, 관심 갖는 것은 처음인지라. 묻는 것은 뭐든 답해주려고. 그대의 눈빛이 이렇게 초롱초롱 빛이나니 나까지 설레서 말이야."
또 능글맞게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윽... 말리면 안 되는데... 궁금하긴 했다.
핫. 그런데 우리 왜 이리 가까운 거야?? 언제 내 앞에 이리 얼굴을 드리 밀고 있었어?
내가 갑자기 자리에 털썩 앉아버리자 그가 아쉬운 듯 입을 쩝거리더니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와중에도 또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보기 시작했다.
민망함에 목이라도 축이려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식어버린 찻잔을 보고 그가 찡긋 웃으며 마시지 말라고 말린다.
다시 따뜻한 차를 내어달라고 에이린을 부르려는데 그가 웃으며 찻잔을 손가락으로 튕긴다. 아마도 또 정령을 부른 듯했다. 차에서 순식간에 열기가 올라왔으니까.
"아무리 봐도 내가 정령왕이면 이딴 취급 못 견디고 계약 파기하자 할 것 같은데요."
차를 데우는 티 워머 취급을 받는 정령왕이라니 자존심도 없나?
"괜찮아. 어차피 정령왕의 분신들이 오는 데다가 그들은 내가 내 반려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거든. 당신을 궁금해하기도 하고."
확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내가 아닌 아르세이아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내 얼굴이 붉어졌다.
내, 동생에 대한 말이라서, 내가 기분이 좋은 거야. 그래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깐, 설렘 따위 가지면 안 돼. 내가 사람에 대한 정이 고파서, 내 짧은 인간관계에 이렇게 많은 배려와 관심 처음 받아봐서 그래서 두근댄 거야.
잊지 마 세이렌, 저 남자는 너의 단 하나뿐인 여동생의 남편이라는걸.
날 아낀다는 말이 아님을 다시 되새기며 태연한 척 말했다.
"흠흠. 정령도 계약자를 닮아서 쓸데없는 데 관심이 많네요."
내가 따뜻해진 차 한 모금을 삼키자 기다렸다는 듯이 치즈케이크가 잔뜩 올라간 포크가 내 입 앞에 다가왔다.
"자, 아 해야지."
"내, 내가 애에요?"
내 포크를 들고 직접 케이크를 떠서 입에 넣자 황태자가 서운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으로 자기 포크를 가져갔다.
내가 아는 예법에는 맞지 않는 자세로 비딱하게 앉아서는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리며 다과를 먹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내가 피식거리며 말해줬다.
"전하, 그렇게 계시니 불량한 다람쥐 같으시네요."
"다람쥐?"
"네, 귀여운 다람쥐요."
이런, 불경스럽게도 다람쥐라니, 동물로 비교한 것도 기분 나쁠 텐데. 쬐끔한 다람쥐라니. 내 입이 순간 원망스러워졌다.
"흠. 다들 날 보면 사나운 늑대나, 드래곤쯤으로 비교하던데. 내가 나의 비 눈에는 귀엽게 보인다 그거지? 혹시 나의 비의 취향이 귀여운 남자야?"
"콜록콜록!"
내가 차를 마시다 뿜을 뻔했다. 어떻게 저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이야기하지?
"사나운 동물보다는 귀여운 동물이 좋은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동물 말고 사람은?"
"없... 어요. 그런 취향 같은 거."
"흐음. 그대의 취향이 나 같은 힘 세고 멋진 백마 탄 왕자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저거, 알고 보면 어제 케이 이야기에 강조하는 거지? 왕자님이란 단어에 왜 힘주는 건데?
그리고 아르세이아의 취향은, 아마도...
"기사들은 가문의 기사 아카데미에서 많이 봐서 뭐, 그래도 좋고, 안 그래도 좋아요. 차라리 이지적인 쪽이던가...?"
뒷말은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웅얼거렸다. 그런데도 그의 귀에는 그게 들렸나 보았다. 소드마스터라 이거지?
"훗, 이래 보여도 행정처리도 어지간한 행정관들보다 낫다고. 제국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한 아이디어도 이 몸에게서 나왔고. 제국의 학자들과 토론을 해도 지지 않는단 말이지."
"아, 네, 네. 그러시군요. 전하는 못하시는 게 없나봐요."
아이씨. 또 좋다고 웃는다. 그래, 이 인간이랑 말을 섞지 말자. 계속 말리는구나. 그래. 그래야 내 미래가 보장될 거야.
하, 그런데 황태자가 조금만 못생겼어도 좋았을 것을. 하필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웃어대다니... 귀찮은 거 싫어하는 아르세이아가 굳이 황태자비가 되겠다고 홀리만 했네. 했어. 그럼 끝까지 저 얼굴 뜯어 먹고살아야지 가출을 왜 했냐고!! 가출을 했음 찾으러 와줬을 때 화해하고 잘 지내야지 왜 날 대타로 보낸 거야!!
"먹을 만큼 먹었으면 이제 후원 산책이나 해볼까? 세이, 아직 전부 다 못 봤지? 내가 소개해줄게. 나의 집을."
아르세이아가 못 본 곳이 많은가 보았다. 얼마나 이곳에 머무르게 될진 모르겠지만 황궁 구석구석을 알아두는 게 낫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정중한 태도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올릴까 그냥 혼자 걸을까 망설이자 그가 제발 손잡아달라는 가련하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어왔다. 결국 나는 한숨을 쉬고 내 손을 그의 단단한 손 위에 얹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내 손을 자신의 단단한 팔 위에 얹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알비케라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쟤 어째서 우리가 가는 길 아는 것처럼 하냐. 너도 여기 처음이잖아.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옆길로 새자 놀래서 달려왔다. 다리가 짧아서 불쌍한 내 강아지. 힘들어 보이네.
내가 거닐던 장미 화원은 황태자궁의 후원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을 지나자 아름다운 수국들로 둘러싸인 분수대가 있었다.
분홍, 하늘, 연보라로 가득 찬 꽃 송이는 꽃송이 하나만으로도 꽃다발이 연상될 정도로 풍성했다.
"와, 아직 수국이 필 시기가 아닐텐데..."
따사롭긴 했지만 수국이 피기에는 아직 온도가 낮았다. 그렇다고 나처럼 생명에게 생명력을 퍼부을 수 있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저것도 혹시?
"설마, 저 보여주시겠다고 정령력 낭비하신 건 아니겠죠?"
"그대에게 보여 주려고 어떤 짓을 하긴 했지만 정령력은 아니야. 유리온실에서 키우다 꽃이 필 때 되어서 조금 일찍 밖으로 옮겨 심은 거지. 마음에 드나?"
"네, 예뻐요. 진심으로."
아름다운 꽃의 모습에 나는 진심으로 경탄했다. 숲이나 들판에서 피는 꽃들이나, 영지 목장의 작은 정원에서 본 꽃들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인간의 손이 닿아 더 잘 가꾸어진 광경은 충분히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해 주었다.
예쁘다. 나도 숲을 이렇게 예쁘게 만들고 싶다. 누가 봐도 설레게, 누가 봐도 향긋하게,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숲과 들판을 만들고 싶어.
언젠가 아르세이아가 돌아와서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된다면, 고생한 나에게 제국 구석의 작은 숲이라도 내어달라 청하면 안 될까? 후작부인도 그 정도는 허락하겠지?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려나?
살면서 나는 한 번도 내 것을 가져 본 적 없었다. 목장도 후작 가문의 것인데, 내가 목장을 돌보면서 우유 생산량이 늘어서 잠시 맡긴 것이었다.
낡은 드레스조차도 내 것이 아니었다. 후작부인이 선심 쓰듯 주긴 했지만 내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의 것임을 강조했었지.
알비케라는 우연히 버려진 아이를 내가 거둬 길렀지만, 내 친구이지 내 소유가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후작님이 주셨을 거라고 생각한 드레스와 장신구도 걸리자마자 후작부인에게 결국 뺐겼었지...
그러니 나중에라도 내게 숲을 줄리가... 없잖아.
기분 좋은 마음과 기대를 뒤로하고 씁쓸한 마음이 자리 잡았다. 그 짥은 순간을 내 옆에 선 남자가 눈치챘다.
"왜, 슬픈 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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