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황궁 생활에 익숙해지기. (3)
2018.04.11.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런.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르세이아의 편지 때문에라도 친하게 지내야 했지만 어젯밤 일 때문에 도저히 얼굴이 펴지지 않을 목소리였다.
"창공을 비추는 두 번째로 높은 태양,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에이린이랑 모처럼 즐겁게 티타임을 가지려는데 이 방해꾼아. 그냥 좀 가지.
에이린이 일어난 자리를 기어이 차지한 황태자는 턱을 괴고 생글생글 웃으며 날 보았다. 에이린이 황태자의 차와 다과를 새로 세팅하는 동안 나는 그를 무시하고 조용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린이 차를 부어주고 뒤로 물러났다. 왜 내 사람 쫓아내놓고는 차도 안 먹고 나만 보고 있냐. 빨리 먹고 꺼져주세요.
아이씨, 계속 쳐다봐서 저 이쁜 케이크들에게 손도 못 대겠잖아. 부담스러워!!
꺼지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후우, 후! 세이렌 마인드 컨트롤을 하자. 아르세이아를 생각해. 후작부인이 숨겨둔 내 어머니도 기억해야지. 불편하고 싫어도 한동안은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남자야.
그래도 이 시선을 견디기에는 너무 시선이 뜨겁잖아. 으으~ 따끔따끔해!
탁! 결국 나는 책을 덮었다.
"안 드실 거면 돌아가시죠. 지키고 계시지 않아도 이제 도망가지 않을 테니."
"아르세이아."
"말씀하세요."
"햇살이 그대의 머릿결보다 밝지 않나 봐. 그대가 더 반짝반짝 빛나는 거 보니."
아악!!! 내 손가락이랑 발가락을 구해줘!! 뭐라는 거야 진짜.
"눈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눈에 좋은 차라도 올리라 명하겠습니다."
"우와. 나 걱정해주는 거야? 감동인데?"
마이페이스가 확실한 사람이구나. 어째서 저런 답이 돌아오냐고! 계속 말 걸다가는 나만 바보 되겠지?
으... 먼저 일어나고 싶은데 예법서에, 특별한 사유 없이 티타임이나 식사 자리에서 아랫사람이 먼저 일어나면 안 된다고 적혀있었다. 나 황태자보다 아래인 거지? 계급사회의 부당함이었다.
아니 애초에 초대받지도 않은 티 테이블에 앉아도 되는 거야?
"차를 마실 것도 아니면서 왜 오신 겁니까?"
"나의 비께서 맑게 웃는 소리가 들려서, 세이가 웃는 모습이 보고파서 달려왔는데 늦어버렸어. 하, 루카스 녀석. 그 자식이 결재 끝내고 나가라 성화만 안 했어도!"
에? 겨우 그거야? 나 웃는 거 보겠다고? 이해가 안 됐다.
왜지? 집무실이 목장 위라고 했던가? 그래서 웃는 소리가... 그래도 꽤 높은데... 다른 시녀들이랑 같이 웃었는데 어떻게 내 웃음소리를 알아 들었지?
의문이 가득한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그가 말을 덧붙였다.
"예전처럼 그대가 햇살 가득히 웃던 모습이 다시 보고 싶었어. 지금 그대는 날 보고 제대로 웃질 않으니까."
조금 시무룩해졌다. 또 꼬리를 마셨네.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황태자를 보고 웃을 여유가 없는 걸. 고민거리가 많은 것도 있지만, 그쪽이 계속 다가오는 것이 조금...
어젯밤에 날 유혹한다며 나선 것이 떠올라 버렸다. 내가 케이 말고 아는 남자라고는 견습기사 프리케랑 목장 관리인인 토미뿐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남자의 접근이 달갑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내 정체를 숨겨야 하는데 계속 이렇게 다가오니까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가 키 차이도, 귓불에 점도 눈치챘는데 이러다가 걸리면 어쩌나 계속 심장이 조마조마 해졌다.
아르세이아가 저 남자 마음잡아달랬는데, 너무 튕기면 그런가? 적당히 튕기면서, 적당히 그의 관심을 끄는 것.
아니!! 남자랑 사귀어 본적도 없는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고 간 아르세이아는 무슨 생각인 거냐고!! 아 머리아파.
어쨌든 내 눈앞에서 날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는 이 남자는 밤새 내가 월경통으로 고생할 때 날 위해 정령의 힘을 쓴 사람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정령의 힘을 빌리려면 대가가 있다고 했다. 주로 체력과 생명력. 큰 힘을 쓸수록 생명력을 고갈시킨 댔지? 온기를 불어 놓는 정도이니 체력만 약간 썼겠지만, 어쨌든 날 위해 고생한 거잖아.
아르세이아의 부탁을 들어줄 겸, 고생한 사람을 향해 조금의 친절은 베풀어도 되겠지?
"누가 들으면 전하께서 제게 목을 매고 열열히 구애하는 줄 알겠습니다."
"구애하는 거 맞는데?"
"구애를 말로만 한답니까?"
"아, 하긴 그렇지? 잠깐만."
그가 급히 근처에 있던 장미 한 송이를 꺾어왔다.
야 이 자식아! 내가 애써 생명력을 늘려준 내 소중한 장미에게 무슨 짓이야? 말만 이쁘게 하면 살짝 웃어줄랬더니!
내가 싸한 눈빛으로 그의 손에 들린 장미 한 송이를 쳐다보자 그가 화들짝 놀랬다.
"아, 맞다. 미안, 세이. 내가 맘이 급해서."
그가 급하게 일어나 시종을 부르려 했다. 아 뭐임. 날 뭘로 보고? 겨우 꽃 한 송이라서 내가 표정 싸한 거라 생각하는 거야? 한송이도 꺾는 거 싫지만, 더 꺾어서 만들어 오는 꽃다발은 더 사양이라고!
"괜찮으니 그냥 주세요."
"그래도."
"음. 대신 무리가 안되시면 물의 정령과 땅의 정령의 힘으로 꺾은 이 꽃을 화분에 뿌리내리게 해서 제 방으로 보내주세요."
"응, 어?"
"전 꽃 한 송이라도 꺾어서 금방 시들어 버릴 것을 감상하는 것보다, 내년에도 다시 핀 꽃을 볼 수 있는 온전한 상태가 좋아요."
내 말에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의 뒤편에 보이는 파란 하늘을 닮은 싱그러운 미소. 정말 기분 좋나 보네. 그렇게나 전전긍긍하더니 약간 귀여운 듯도 하고...
아르세이아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이 남자.
"세이!! 우와, 방금 나 보고 웃어준 거야? 바로 화분 만들어 줄게 기다려 봐."
그는 급히 시종에게 화분을 가져오게 했다. 시종이 가져온 화려한 흰색 화분에 황태자는 손을 가져대며 뭐라 말했다. 그러자 화분에 질 좋아 보이는 흑갈색 흙이 가득 찼다.
오오!! 마법 같아!!!
그리고 장미를 꽂고 다시 손을 대자 갑자기 장미의 줄기가 굵어지고 옆으로 새로운 가지가 나더니 잎들과 함께 새로운 꽃봉오리가 맺혔다. 꽃봉오리는 점차 크기를 키우더니 향긋한 향을 내뿜으며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우와. 대단해요."
나는 이 신기한 힘에 절로 감탄하며 미소 지었다.
내가 가진 힘은 살아 있는 식물들이 더욱 잘 자라도록 생명력을 더 주는 것 정도였다. 더 싱싱하게, 더 푸르르게, 더 풍요롭게 만드는 힘. 식물들을 위한 축복 정도이려나? 가끔 시든 꽃을 되살리거나, 곧 피어날 꽃봉오리를 터뜨릴 수 있긴 했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런 이능을 보일 순 없었다.
아니 시도해보면 나도 할 수 있을까? 해보고 싶어졌어.
저주받은 능력과는 상반되는 능력이지만 내 저주받은 능력 때문에 행여나 더 큰 미움과 오해를 받을까 차마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힘.
그것에 비하여 이건 정말 경이로웠다. 정령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풍요롭게 다스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것을 실제로 보는 것은 달랐다. 부러울 정도였다.
정령왕과 계약했다더니 그래서인가? 아 부러워. 나는 정령이랑 만나본 적도 없는데.
이 정도로 순식간에 생명체를 자라나게 했다면 그 힘의 크기가 어느 정도일까? 정령에게 지급하는 대가도 크겠지?
앗, 설마... 부여된 생명력에 상응되는 체력이나 생명력을 대가로 지불한 것은 아니겠지? 진짜 황태자비도 아닌데, 진짜 사랑하는 여인도 아닌데. 그는 모르겠지만 가짜인 날 위해서?
새로운 장미 송이가 여러 개 가지에 더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장미꽃들이 피어오르는 순간, 아,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설마 진짜 큰 대가를 치른 거야? 내가 벌떡 일어나 물었다.
"저기, 전하. 정령에게 지급한 대가가…?"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힘없이 웃었다.
"웃음이 나오세요? 고작 저따위의 바람 때문에 정령의 힘을 남발하고 대가를 지급하신 거예요?"
내가 버럭 화내자 그가 희미하게 지었던 웃음을 지웠다.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한테 화가 났다. 정령에게 지급해야 될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저런 부탁을 했다.
장미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시들기 마련인데... 꺾으면 그것이 조금 앞당겨지는 것뿐인데. 날 웃게 해주려고 꽃을 꺾은 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니 세이렌. 넌...
괴물이고 마녀인 거야. 또 상대에게 해를 끼쳤잖아. 내 탓이야. 내 동생의 남편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한심해서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었다. 눈앞이 흐려져.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세이. 나 괜찮아."
그가 내 앞으로 왔다. 내 눈에서 툭 떨어진 눈물이 내 드레스로 떨어져 내렸다. 심각한 분위기에 알비케라도 내 다리 근처에서 눈치를 살폈다.
"나, 나 때문에, 생명력을, 체력을 대가로 치렀잖아요.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대가가 작을 리가 없는데, 아무 생각 없이 말한 나 때문에..."
내 양쪽 뺨에 그의 온기가 닿았다.
"진짜로 괜찮아. 내가 정령에게 치르는 대가는 생명력이 아니야. 그러니깐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분명 아까 기운이 없고 손이 떨렸잖아요."
"미안. 그게, 네가 걱정해주니까 놀리고 관심받고 싶어져서..."
"이봐요!! 카일룸!!"
내가 고개를 들고 그를 노려봤다. 잠깐 놀란 눈을 하던 그는 눈가를 기분 좋게 휘었다.
"앗! 처음으로 나의 비가 내 이름 불러줬다."
이 상황에서도 저러는 저 사람이 미웠다. 남은 실컷 걱정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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