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황궁에서의 첫날 밤 (4)
2018.04.10.
아 쪽팔려. 오늘 처음 본 시녀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 황궁의의 진단은 간단했다.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기 출혈입니다."
보름 만에 달거리를 한 게 스트레스로 인한 울혈 때문이란다.
저기요. 제 주기는 3일 정도 밖에 안당겨졌거든요. 제 달거리 정확히 한 달 전에 했습니다만. 어쩐지 이상하게 허리가 계속 뻐근하더라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긴 했지.
가출한 것은 3주 정도 됐지만 에이린에 의해 아르세이아의 몸 상태는 상세하게 전달되고 있었단다. 걔랑 나랑 주기가 다르니깐. 이런 오해 땡큐다 차라리.
"괜찮은 것인가?”
"네, 그저 힘들어서 달거리가 당겨지신 것뿐입니다. 푹 쉬고 마음을 편히 가지시면 됩니다. 주기가 불규칙해지신 터라, 다음 합방 일은 건강 상태를 보고 다시 잡겠습니다."
의사 양반. 당신의 마지막 말 덕분에 마음이 다시 편치 않네요.
"뭐, 출혈만 멎으면 관계를 맺는데 몸에 부담은 없으실 겁니다. 합방 일은 회임 확률을 높이는 것일 뿐이니까요."
그런 쓸데없는 말은 왜 해? 아하, 황태자가 막 눈에서 불꽃을 쏘아대니 부담스러워 그러는구나. 불쌍하네. 갑질의 전형.
그러나 난, 이제 너 안 부른다. 다른 황궁의만 부를 거야.
황궁의는 물러가고, 내 피가 묻은 침대 시트와 이불은 하녀들이 부지런히 갈았다.
시중을 받으며 침의를 더 단정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데 시녀들이 내 쇄골을 보고 계속 부끄러워했다.
황태자!!! 도대체 내 쇄골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돌아왔는데 황태자가 아직 안 가고 있었다. 좀 허탈해 보이네.
"미안해. 아픈 줄도 모르고."
"아셨으면 됐습니다."
내가 인상을 쓰자 그가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어디가 불편한 건가?"
"네."
네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해요. 좀 가라, 꿈자리도 사나웠는데 에효.
"전하. 제가 싫다는데도 계속 저를 탐하셨지요?"
일단 이런 일이 다시 안 생기게 잘 막아야 했다. 미안해하는 지금이 기회였다.
"저, 그게, 드디어 네가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어... 그러니까 그게. 기다리던 초야를 치른다고 생각하니 흥분이 돼서 그만."
그답지 않게 꼬리만 강아지처럼 불쌍하게 말했다.
"왜요?"
"응? 그야. 드디어 그날이니 설레서."
"왜 설렙니까? 국혼 날, 첫날밤에도 절 소박 맞히셨고, 제가 황궁에 머문 3개월 동안 절 찾지 않았지 않습니까? 왜 이제 와서 동하신 겁니까?"
아르세이아에게 들었던 정보로 차갑게 내뱉었다. 황태자의 눈이 커졌다. 당황했나 보군. 흥이다.
"그건, 그니까, 어... 내가 너무 바빠서..."
"신부에게 첫날밤을 소박 맞힐 만큼 바쁘셨다고요?"
"그때 황성 외곽에 괴수가 나타났는데 그걸 물리칠 수 있는 게 나뿐이었거든. 녀석이 하도 재빨라 다음날 아침까지 잡으러 다니느라 바빴어."
그런 정보가 왜 아르세이아에게 전해지지 않았지? 그 정도의 큰일이면 소박맞은 이유가 전해질만도 한데... 혹시 시녀들이 숨긴 건가?
"전혀 듣지 못한 일이군요.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안 오셨지요."
"직후, 황실 직할령에 소요가 있어 부황께서 내게 사태의 정리를 맡기셨어. 내가 돌아왔을 땐 그대가 달거리 중이라 초야를 못 치른거고, 그런 일이 계속 우연히 연달아 일어난 것 뿐이야."
흐음 꽤나 성실하게 변명하는구나. 의외네? 솔직히 그냥 정략적인 혼인이었기 때문에 내 몸에서 후계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고, 이번에는 내가 또 가출이라도 할까 봐 안는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오해야. 정말. 난 그대를 소홀하게 생각하고 방치한 적이 없어."
"하지만 전 이미 3개월이나 소박을 맞았고, 궁인들은 이런 저를 무시하여 오늘 제가 폐하 내외분을 뵙는 사이 제 허락도 받지 않고 시녀를 퇴궁시키기까지 했지요."
"감히, 누가 그대를 무시한단 말인가?"
짐짓 화내는 척하는 모습이 조금 웃기네. 됐거든. 넌 이미 늦었어. 아웃이야.
"그 일은 이미 제가 기강을 잡았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래. 잘했어. 이제 화 풀어. 응? 아르세이아."
"아니요. 비스 후작가의 가장 사랑받는 딸인 저를 황태자께서는 무시하셨고 제 자존심을 짓밟으셨습니다. 아무리 부부지간이라 하여도 상대에 대한 배려도 없이 싫다는데도 안으려 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좀 심했나? 입까지 벌리고 안절부절못하네. 아 좀 많이 고소했다. 그렇게 능글맞게 굴더니 꼴좋구나. 이런, 웃음이 나오려 했다. 참아야 해. 입꼬리야 내려가라 얼른. 나는 결국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려야 했다.
"아르세이아. 그, 그런 게 아니라고. 폭력이라니, 아니야. 나는... 나는, 그대도 당연히 나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그러니 그만 화 풀어."
"하! 아니오. 그런 말뿐인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그럼 내가 어찌하면 그대의 맘이 풀리겠어?"
생각보다 빨리 걸려들었군. 하지만 더 튕기며 타이밍을 봐야 해. 사냥은 타이밍이라고!
내 침묵이 길어지자 그가 결국 먼저 말을 내뱉었다.
"아르세이아. 원하는 것을 말해줘. 그대의 말이라면 뭐든 들을게."
"진심이십니까?"
"어! 그래, 무엇이든!"
나는 고민하는 척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담담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전하를 원하기 전까지 초야를 치르지 않겠습니다."
"아르세이아 그건!"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미래의 지존께서 허언을 내뱉은 것은 아니시지요? 저는 전하께서 제가 느낀 상처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 그럼 그대가 기다린 만큼 3개월만 참으면 되는 거야?"
어딜 3개월이야? 됐거든?
"제 자존심이 겨우 3개월짜리로 보이십니까? 그게 싫으시면 저는 그냥 본가로 돌아가겠습니다. 전하께서 진짜 반성하실 때까지요."
"그건 안돼! 내가 그대를 어찌 찾았는데 잃어버릴 순 없어.”
아, 참. 그랬지. 아르세이아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후작가도 그에게 아르세이아의 위치를 알려주지 못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숨겼었지. 생각보다 열심히 아르세이아를 찾아다닌 모양이네.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으음... 단서가, 그대가 스스로 원할 때까지 맞지?"
"네."
노란 눈동자가 깊게 침잠했다. 많은 생각이 교차되는 모양이다. 종족 번식 본능은 안되면 후궁을 들여서 풀면 되는 거 아닌가?
이 제국 데피니토르는 황제와 황태자에게 후궁을 들이는 것을 허락했다. 황제는 황후 외에 후궁을 3명까지, 황태자는 1명까지.
사실 지금껏 황태자는 후궁은커녕 다른 여인과의 흔한 염문설조차 없었다. 1황자가 사고로 죽은 뒤 한동안 방황했던 그는 황궁으로 돌아온 뒤부터 18살 성인이 되어 황태자 위에 정식으로 책봉될 때까지 스캔들이라고는 담을 쌓고 제 위치를 안정화 시키는데 힘썼다고 했다.
제 곁의 여자를 먼지 털듯 털어 냈다지?
그 이후 25살이 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고. 오죽하면 황제가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황실 주최 데뷔탕트 연회를 황태자비 간택 연회로 만들었을까? 오늘의 반응을 보면 그때 아르세이아에게 반했다는 게 진짜인 것도 같고 알쏭달쏭했다.
뭐 내가 안 받아줘서 욕구를 못 이기고 후궁을 들인다면 어쩔 수 없지. 미안해 아르세이아. 황태자의 사랑을 지켜줄 순 없을 것 같아. 나도 내 순결은 지켜야지. 족보도 꼬이면 안 되잖아. 덜컥, 내가 임신이라도 하면 후작부인이 날 죽이려 할 테니 내 몸은 내가 좀 지키자.
그가 한참이나 침묵한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의 입술에 걸린 미소가 좀 위험해 보였다.
"좋아.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초야를 치르지 않겠어."
생각보다 순순히 오케이 해서 놀랐다. 휴우 일단 다행이다.
"그대가 날 원하게 하면 되는 거잖아. 쉽네."
응? 뭐지 저 덧붙임은?? 불길했다. 아주 많이...
그런데 왜 웃어? 나는 곧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 * *
하아. 이건 신종 괴롭힘인가? 나 잠 안 재우기?
"세이, 왜 안자? 우리 예쁜 비께서 충분히 자야 내일도 아름다움을 뽐내지."
"전하께서 옆에서 계속 얼굴을 들이 미는데 제가 어찌 불안해서 잡니까?"
"손만 잡고 자자는데 왜 싫어? 초야만 치르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대가 오늘 아파서 힘들까 봐 여기저기 만지고 싶은 거 다 꾹 참고 다른 곳에는 손 안대는 건데."
이 미친 변태 황태자가!!!!! 아 진짜 싫어.
내가 홱 돌아눕자 그가 날 뒤에서 껴안듯 내 손을 잡았다.
"손만 잡는다면서 왜 안으십니까?"
"안은 게 아니라 그대의 손이 그쪽에 있으니까."
"왜 이렇게 꼬물딱거려요?"
"말캉말캉 부드러워서. 굳은살 박힌 내 손이랑은 다른게 신기하잖아."
하아, 말이 안 통했다. 초야 치러줄 때까지 이딴 식으로 치근댈 것 같은데.
바보 같은 세이렌, 더 정확히 말했어야지. 몸에 손도 대지말라고. 아아악.
"더워서 못 자겠어요. 좀 떨어져요."
"그럼 실프를 부를게."
"실프요?"
"응. 바람의 정령. 시원하게 해줄 거야."
무슨 정령이 만능이야? 게다가 지 욕구 채우는데 쓰려고 정령이랑 계약한 거야?
"정령의 힘을 쓸데없는 곳에 마구 낭비하시네요."
"나의 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됐어요."
후우. 그냥 자자... 하아, 또 악몽 꿀까 봐 무서운데... 그냥 밤샐까? 아씨... 불편해. 차라리 책이라도 읽고 싶은데 너무 꽉 끌어안아서 빠져나갈 틈이 없잖아.
그러고 보니... 내가 누군가의 품에 이렇게 안 긴거 처음인가? 가을밤 숲속에 혼자 버려졌을 때 불곰 아줌마가 나 추울까 봐 안아서 재워준 이후로 처음이네.
엄마가 안아주시던 것은 너무 오래되서 기억도 잘 나지않았다. 알비케라는 내가 안고 자는 거고...
생각보다 편한 것 같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나른해졌다. 긴장을 놓치면 안 되는 데.
"그런데 세이, 원래 귓불에 점이 있었구나."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갑자기 내 귓불을 어루만졌다. 아, 안돼!
난 급히 몸을 돌렸다. 안 보이게 숨겨야지. 관심 못 갖게해야 돼!
"화장으로 숨겼었어요. 거슬려서! 그만 만지고 좀 자요!"
"흠. 그대는 점도 이쁜데 왜 가리고 그래?"
으익, 다시 돌아누우면 또 끌어안고 귀를 들여다볼 것 같은데. 그냥 자는 척 눈 감아버리자!
내가 그를 무시하고 눈을 감자 그가 다시 내 손을 잡아 왔다. 그리고는 날 또 품 속으로 끌어 가뒀다. 아, 진짜, 그만 좀.
차라리 자는 척하자.
음... 눈 감고 있으려니 졸렸다. 아까 정령의 힘으로 치료받은 건 체력이지 정신력이 아니구나. 정령 약발 떨어지면 배가 아프려나? 나... 월경통... 무지 심한... 데... 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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