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황궁에서의 첫날 밤 (3)
2018.04.10.
"내 아들을 살려내!"
"네가 죽인 거잖아! 네 욕한다고 네가 화내는 거 모두가 봤어."
화냈다고 내가 죽인 거야?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욕하는데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거야? 그리고 얼어 죽은 사람이 왜 내 탓인데? 번개 맞아 죽은 건 천벌이지 왜 내탓이야?
"괴물!"
"저주 받은 마녀!"
아니야. 난 괴물도 마녀도 아니야!!!! 아니라고!!!!!! 억울해, 내가 뭘 했는데 나한테 그래? 미워한 게 죄야? 죽어버리라고 말한 게 죄인 거야?? 아비도 모르는 애라고 돌을 던진 건 니들이 먼저인데, 그런 말 한 것도 죄야??
그저 미웠을 뿐이야. 죽으라고 했지만 진짜 죽을지 몰랐어. 5살짜리 애가 뭘 알고 말해? 5살짜리가 무슨 힘이 있어 사람을 죽여?
엄마, 엄마는 날 믿죠?
"네가 태어나면 네 아버지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단다."
"너 때문에 후작님이 힘들어 보이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널 낳지 말걸."
"내 딸... 널 어찌해야 할까?"
엄마, 왜, 왜 그렇게 날 봐요.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과의 결실이잖아요. 엄마마저 날 버리면 나는, 나는...
하염없는 어둠이 내게 내려앉았다. 내 곁엔 아무것도 없어. 난 혼자야. 가족도, 친구도 다 날 봐주질 않잖아.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아. 그냥,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어.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세이, 나 왔어. 이런, 벌써 자는 거야?"
누구지? 따뜻한 손길, 따뜻한 목소리. 내게 향하는 호의. 아... 이 빛은?
어둠 속에 내게 비추어주는 단 한줄기의 빛. 놓치고 싶지 않아. 다시는... 가지 마. 내 소중한 친구. 내 곁에 있어줘.
"케... 이? 나... 구해주러 온거야…?"
아 눈이 부시다. 내 방이 이렇게나 밝았나?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못 뜨겠어.
그래 나의 케이가 날 구하러 온 거야. 그치? 케이. 어딨어 만지고 싶어.
"내 왕자... 님."
내가 뻗은 손이 그의 뺨에 닿는다. 따뜻해. 보고 싶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날 반겨줄 거야. 칠흑보다 어둡지만, 내 눈에는 세상 어느 빛보다 밝게 나를 반겨 줄 사람.
"어...?"
왜 푸른빛이...? 청남색 머리카락?
나른하게 나를 감쌌던 잠이 한순간에 달아나 버렸다.
"뭐, 뭐예요??? 왜 내 침대 위에 당신이?"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는 그의 노란 눈빛에서 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 무슨 짓을 한 거지? 오랜만에 악몽을 꿨는데... 악몽 속에서 케이가 날 불러내 주어 깬 건데...!
이런!!!! 케이!!!
설마 나 잠꼬대로 케이 이름 말한 거야?
"케이가 누구지?"
낮고 서늘하게 떨리는 음성. 들었구나. 황태자비가 황태자 앞에서 외간 남자의 이름을 말해버렸어. 어떡해?
"치... 친구예요. 어린 시절 친구."
"꿈결에 찾을 정도면 아주 가까운 사이였나 봐. 그대의 옛정인 이라도 되는 건가?"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의 목소리에서는 무엇인가 억누르는 감정이 새어 나왔다. 어떡하지??
"아니에요!! 그런 거!!! 그는, 그는...! 단지 내 은인이라고요.!!!"
"단지?"
그의 노란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의미인 것인지 모르겠는 얼굴. 딴 남자 이야기를 하는 아내에게 실망이 대단히 큰 것 같았다.
"서로의 은인이었을 걸...요? 아마도..."
"아마도?"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어떤 인연이었는지."
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어쩔 줄 몰라 나는 꼼지락거리는 내 손끝만 보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이름 불러서 화난 것 같기도하고 서운해하는 것도 같고. 어떡하지?
여기서 황태자가 역정내면 아르세이아나 비스 후작부인이 내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겁이 나기 시작했다.
"왕자라던데? 그 케이가 그대의 왕자라고..."
"제, 제가요? 아... 어릴 땐 나보다 키크고 잘생기면 다 왕자님인 거죠 뭐."
"잘생겼어...?"
황태자의 눈썹이 한쪽만 올라갔다. 묘하게 웃는 것처럼 입꼬리가 오르락내리락하네. 비웃는거 참고 있는 거 맞지?
그래, 잘생긴 사람한테 왕자님이라니. 참. 유치하긴 하겠다.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쳐다 볼 필요는 없잖아.
"아니, 잘생겼을 거라고요. 얼굴 기억도 안 나요.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기억도 안 나는 사람이 정인일 리가 없잖아요. 이제 얽힐 일 없는 기억도 안 날 만큼 짧게 지나간 인연일 뿐이에요."
그런데 왜 계속 눈썹을 찡그려? 그렇게나 기분 나쁜가? 하긴, 아르세이아를 진짜 사랑하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이 나쁠 테지. 자신의 아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침대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불렀으니... 그래, 기분 나쁠... 침대?!
"그, 그런데 왜 내 방에 있는 거예요! 당신 방은 반대쪽이잖아요."
"아르세이아. 서운하네. 오늘 밤에 중요한 일정이 있댔잖아. 잊었어? 오늘이 황궁의가 잡아 준 우리의 공식 합방일인 거?"
"뭐?? 뭐라고요?"
에이린!! 너 이 중요한 정보를 말 안 하고 집에 가버린 거냐?? 대책도 없이!!
"그, 그건!!!"
황태자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우리의 후계 생산을 위한 날짜지."
후계 생산??? 그, 그, 우리 목장의 아이들이 하는 그, 그거?
"짝짓기를 날 받아놓고 한다고요???"
"푸하하하하하. 짝짓기라니. 우리가 동물도 아닌데 짝짓기라는 표현을 쓰긴 그렇지 않아??"
아, 부끄럽다. 얼굴이 화끈하네. 그렇지만 목적은 같잖아. 짝짓기나 남녀 간의 관계나 다 아기 가지려고 하는 그... 낯부끄러운 짓!
"아바마마께서 손주를 얼른 보게 해 달라니 씩씩하게 네라고 대답했다며? 내 앞에서는 불러주지 않던 애칭도 불러주고."
헉, 뭐야, 황궁에는 모든 곳에 귀가 있다더니 벌써 들은 거야?? 헐!! 내가 입을 삐쭉이기만 하고 부정을 못하자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유혹적이라고 해야 하나? 뇌쇄적이라고 해야 하나?? 뭐야 가까이 오지 마!
다행히 여기 침대는 넓었다. 내가 슬금슬금 뒤로 도망칠 준비를 하는데 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 잘생기긴 했네. 참 불공평한 신이었다.
"아르세이아, 인간은 단지 아이를 갖기 위해 관계를 갖는 게 아니야."
꿀꺽. 그의 표정이 너무나 매혹적이라 아무 말도 못하겠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왜 남녀가 관계를 갖는지 오늘 밤에 알려줄게."
귓가를 가르는 숨결에 내가 멈칫한 사이 그의 얼굴이 내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내 얼굴을 단단히 부여잡더니 그가 살며시 눈을 감으며 내 입술 위에 그의 입술을 겹쳐왔다.
"아, 안, 읍!"
그의 숨결이 내 입술에 깊게 내려앉았다. 어젯밤의 다정하고 포근한 숨결과는 종류가 다른 뜨거운 바람이 내 입가를 맴돌았다. 아래입술을 달래는 그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알비케라가 핥아주던 것과는 다른 뭔가 짜릿한 느낌.
"으응."
이상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자 그의 입술이 다급해졌다. 좀 더 거칠어진 숨결이 느껴졌다.
안돼, 이러다가 큰일 치르겠어. 이 남자는 내 동생의 남편이야. 저항해야 해.
"앗!"
입술에서 느껴지는 작은 아픔에 입을 벌리자 뜨거운 것이 내 입을 덥쳤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나의 얇은 침의 위를 스쳤다. 슬립 위로 닿는 그의 손이 너무 뜨거웠다.
이건, 이건 아니야. 싫어, 이런 식으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안기는 것은.
문제는 나에게는 저 남자가 외간 남자이지만, 저 남자에게 나는 아내라는 것이었다.
아르세이아는 심지어 아직 초야도 치르지 못했다고 했다. 혼인 후 3개월 동안 치르지 못한 초야를 치르려는 남자의 의지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단지 법적인 부부였다면, 이제 진정한 부부가 되겠다는 의지는 너무 강렬했다.
무서웠다. 동시에 아르세이아의 편지가 떠올랐다.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달라던 그녀의 부탁이 떠오르자 아주 짧은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이, 이러지 마요! 싫어요."
내가 힘껏 밀어내자 의외로 쉽게 그는 뒤로 밀려났다. 그의 살짝 탁해진 눈빛이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동물인지 알려주고 있다.
"나, 나 너무 피곤해요. 도, 도저히 오늘은 안되겠어요."
"아르세이아, 정령의 힘으로 피곤한 건 치료해줄게."
윽, 나른한 목소리는 귓가에서 나는데 왜 가슴까지 울리는 거야? 정령이라니, 안되는데. 다른 핑계가 뭐 없나?
내가 아무 말 못하자 그가 다시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내 위에 올라타더니 점점 아래로 그의 입술을 가져갔다. 그러면서 커다란 손을 내 이마에 가져댔다.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며 피곤함이란 티끌도 남겨놓지 않고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이, 이러지 말라니까요!"
이거 진짜 위험해. 다른 방법. 뭐 없나? 으, 휘말리고 있다. 안돼. 정신 차려, 상대가 누군지 잊음 안돼!
으윽, 그때 내 아랫배가 뜨끔했다. 그리고 황태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내 눈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비쳤다.
왜 그래? 무슨 꿍꿍인데? 내가 다시 힘껏 밀자 그가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가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피비린내? 세이! 어디 다친 거야?"
갑자기 그가 호들갑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날 살폈다. 그러더니 경악한 눈으로 날 봤다. 그리고 설렁줄을 잡아당겨 시녀들을 불렀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어서! 황궁의를 데려와.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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