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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6화 (6/126)

7화. 황궁에서의 첫날 밤 (2)

2018.04.10.

"전하, 분부하신 책과 차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비케라경은 바로 들여보낼까요?"

"알비케라경? 아, 그래 들여보내."

황궁에 사는 개에게는 경의 칭호가 주어지나 보네. 황태자비의 애완견이다 이건가? 암컷인데... 하긴 여기사도 있으니까 상관없지 뭐.

"어머! 알비!!!"

난 꺄르륵 웃고 말았다. 눈을 덮던 털을 싹둑 자르고 곱게 빗어놓았다. 목에는 예쁜 사파이어가 박힌 목줄이 달렸다. 곱슬거리던 털은 도대체 어떤 향유로 빗어 놓은 것인지 윤기가 줄줄 흘렀다.

관리 받는 애완견은 행복한 삶이구나. 한껏 꾸민 모습에 알비케라도 고개를 들고 도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리와. 이쁜 알비."

알비케라가 내 무릎 위에 자리 잡자 나는 책을 펼쳤다. 눈앞에는 딱 봐도 고급스러운 찻잔에서 향기로운 차가 찰랑거렸다. 한 모금 음미해보니 확실히 내가 들에 핀 허브로 우려먹던 차와는 깊이가 달랐다. 같이 내온 쿠키도 오도독 씹히는 것이 정말 맛있다. 작게 잘라 알비케라에게 주니 알비케라도 잘 받아먹었다.

황제 부부가 고맙게도 내가 피곤할까 봐 만찬은 다음으로 미루어주었다. 그래서 화려하지만 외로워 보이는 황태자비의 삭막한 방 안에서 나는 책을 파고들 수 있었다.

후작부인이 내가 공부하는 것을 워낙 싫어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많은 것을 내 머릿속에 넣기 위해 나는 속독을 터득했다. 후작부인에게 걸리기 전에 책 한 권 독파하기! 내가 자랑하는 능력이었다.

글자는 예전에 케이가 가르쳐 줬었다. 그 사건 전의 일을 상당 부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나에게 글을 가르쳐 준 것은 확실했다. 흐음, 그런데 왜 케이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을까?

내가 왕자님이라 불렀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 잘생기면 다 왕자라 불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잘생겼거나 다른 왕국의 숨겨진 왕자였나 보았다.

그러고보니 북쪽 왕국의 왕족들의 머리카락이 죄다 검은색이라던데 다음에 사절단들이 오면 혹시 케이라는 이를 아는지 물어봐야겠다. 아, 프리케도 검은 머리이긴 했지. 그치만 걔는 왕자님과는 아냐.

도리도리. 잡다한 생각 말고 책에 집중해야지. 황궁 예법은 귀족 예법과 크게 다르진 않구나. 황태자비를 위한 황궁 예법 교육시간이 있다니 그때 실전 연습을 해야겠다.

......설마 아르세이아 지금까지 예법 수업을 한 번도 안 들은 것은 아니겠지? 갑자기 막 열심히 들음 의심하는 거 아냐? 하아...

배가 고프네 이제. 점심도 굶었는데, 으. 허리도 아프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봐. 밥 먹고 일찍 자자. 밖이 많이 어두워졌네.

테이블 위의 마법등 때문에 어두워진 것도 몰랐다.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빨간 머리의 시녀, 유리아 클리페울룸 이라는 영애가 들어왔다. 황태자의 최측근, 황태자 근위대장의 여동생 이랬지?

"전하 부르셨습니까?"

"저녁 간단히 부탁할게. 그리고 저녁 먹고 바로 쉬고 싶으니 목욕 준비도 해줘."

"네, 전하."

으으... 나 혼자 하던 일을 남에게 시키려니깐 막 어색해.

알비케라의 밥이 먼저 나왔다. 좋겠다, 알비케라. 살코기가 잔뜩 붙은 뼈다귀를 받고 알비가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내가 그런 알비를 보고 미소 짓는 사이 내 저녁도 준비됐다.

우와! 이게 간단한 저녁인가? 각종 야채와 상큼한 과일이 가득 들어간 샐러드와 고기가 잔뜩 들어간 스튜, 그리고 따뜻해 보이는 빵이 놓였다. 거기에 손으로 정성껏 짠듯한 오렌지 주스에는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었다. 여름이 곧 시작되는데 황궁에는 얼음도 있구나.

이거 내 생일 상보다도 화려한데? 묽은 스프와 식어서 굳은 빵이 주식인 나에게는 문화 충격이었다. 과일이야 다람쥐랑 작은 새들이 물어다 준 높은 나무의 제일 신선하고 잘 익은 과일들로 많이 먹어 봤지만 고기는 거의 먹어 보지 못했다.

일단 내 친구들을 내 손으로 잡을 순... 약육강식은 어쩔 수 없기에 인간이 동물들을 잡아먹는 걸 욕할 순 없고 욕할 생각도 없다.

나도 뭐 채식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가난하고 본가의 지원이 없는 가난한 사생아인 나로서는 비싼 식재료인 고기를 즐겨먹을 수 없었다.

친구들은 내가 굶주릴 때면 잡아먹어도 좋다고 말했지만 차마... 그래서 가끔 늑대 친구들이 남겨준 사슴고기를 얻어먹는 정도였다.

황궁으로 돌아오는 여정에는 질은 좋았지만 그래도 간단한 음식들이었다. 샌드위치나 스프 뭐 그 정도였다. 식당이 있는 곳에서나 고기 쫌 썰었었는데...

그런데 여긴 스튜에 고기가 뭐 알감자만 하게 크게 들어있냐.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자 고소한 버터와 상큼한 토마토 향이 가득 퍼졌다. 우왕 맛있다.

샐러드는 상큼했고, 빵은 고소하고 쫄깃했다. 빵 위에 스튜를 올려 씹었다. 넘 조화롭다. 뭔데 뭔데. 이 천상의 맛은 뭐냐고!

"입에 맞으신가요?"

내가 너무 막 얼굴을 파묻고 먹었나? 아 쫌 부끄러워. 최대한 배운 예법을 기억하고 했는데 아니었나 봐.

"점심을 굶었더니... 스튜를 만든 요리사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은데 어떤 상이 좋을까?"

"칼이나 조리도구들이 어떨까요?"

흠. 그건 자기 손에 익숙하지 않음 별로지 않을까?

"요리사에게 새 모자를 주는 건 어때?"

"영민하신 생각입니다. 전하."

"금사로 그의 이름과 소속을 새겨서 내려줘."

이 정도면 되겠지? 배부르니 이제 피로가 몰려왔다. 목욕물이 준비되는 동안 창밖을 내다봤다. 황성의 크고 작은 궁에 걸린 마법등이 예쁘게 반짝였다. 당분간은 이곳이 내 집이어야 했다.

오늘은 짧지만 긴 하루였다. 제도에 입성 후 들은 환청과 황후와의 신경전에 피로도가 쌓였다. 몸은 많이 안 힘든데 마음이 너무 지쳤어. 얼른 쉬자.

시중을 받으며 침실을 지나 들어간 욕실은 매우 컸다. 다행히도 욕실 가는 길은 시녀들의 이동경로를 보며 티 안 나게 옮길 수 있었다. 다행이야. 처음 온 티 안내서...

욕실 안의 욕조에는 뜨거운 물과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매워졌다. 헉. 호화스러워. 대리석 욕조만으로도 사치스러운데 저 꽃들은 뭐야? 왜 죄 없는 꽃을 저리도 마구 꺾어서 피지도 못하게 하고 죽인 거야?

사실 나는 꽃을 꺾어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행사 때 하루 장식했다 버려지는 꽃을 보면 속상했다. 더 오랫동안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을 텐데...

예쁜 장미야, 네 몸을 희생해서 내게 아름다운 향기를 빌려주어서 고마워.

내 마음 속 인사에 화답하듯 장미향이 더 짙어졌다.

"오늘 화원에서 갓 피어난 장미를 따온 것입니다. 황태자비 전하의 귀환을 반기듯 평소보다 더 향이 진하네요."

뜨끔. 나는 답 없이 그냥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꽃향기가 평소보다 짙은 것은 내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다. 저주받은 마녀라 손가락질 받게 한 능력 때문에 제대로 써보지 못한 능력...

절대 들키면 안 된다. 다신 손가락질 받을 수 없어. 황태자비를 대신하고 있는 내가 이 능력을 다른 이들에게 들키는 날엔 후작부인의 손에 내 어머니가 죽임을 당하리라. 저주받은 나로 인해 아르세이아에게 나쁜 소문이라도 나면 날 죽이려 하겠지.

후작부인을 떠올리다 살짝 부르르 떨자 시녀들이 호들갑이다.

"전하, 온도가 맞지 않나요?"

"아니야. 괜찮으니 어서 시작하렴."

목욕 시중 전문 하녀들의 정성 어린 손길은 에이린 혼자 시중들 때랑 달리 전문적이었다. 우와 피로가 막 달아날듯한 마사지 솜씨.

아르세이아. 나 첨으로, 아니 저녁밥에 이어 두 번째로 너 대신 여기 온 게 즐거워!

향유를 잔뜩 머리에도 바르고, 향이 베인 소금으로 마사지도 하고 나니 몸이 가뿐해졌다. 아 개운해라. 허리는 아직 좀 뻐근하긴 했다.

욕조에서 일어나자마자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가운을 입고, 머리를 말렸다. 음. 자는데 뭘 이리 덕지덕지 바르니? 머리는 왜 이쁘고 청순하게 빗어 넘기는 거지?

"전하, 침의로 갈아 입으십시오."

그러고 보니 얘들 왜 이리 들떴지? 황태자비 시중 오랜만에 들어서 그래? 일하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구나. 신기했다.

"침의가 쫌. 얇은데?"

"오늘 같은 날엔 적당합니다. 매우 아름다우십니다."

시녀장이 갈아입힌 슬립 위로 슬립만큼 얇은 가운을 걸쳐 주었다. 뭐 자는데 옷이 뭐가 중요하겠어? 자는데 걸리적거리지만 않음 되는 거지 뭐.

시녀장은 큰 잔에 차를 한 잔 가져왔다.

"여성의 몸을 보호하고 양기를 받아들이기 위한 차입니다."

우와 황족은 자기 전에 보양차를 마시는구나. 그런데 이거 너무 쓴데?

"시녀장. 이거 너무 쓴데?"

"그래도 다 드셔야합니다. 황제폐하께서 오늘을 위해 특별히 하사하신 차입니다."

아, 그래. 그 대형견 아저씨께서 주신 거라면 어쩔 수 없었다. 황제께서는 아르세이아를 많이 아끼시나 보네. 여행 갔다 왔다고 챙겨주시다니. 흠. 시아버지의 사랑은 든든한 보호막이다. 특히나 권력자라면 더욱 더!

억지로 한 잔을 다 마시고 내 침실로 향했다. 내 방은 이곳 만월궁의 3층의 서쪽 끝이었다. 황태자의 방은 반대쪽 동쪽 끝에 있었다.

환궁 후 얼굴은 코빼기도 안 보이네. 많이 바쁜가 보았다. 이 궁에 그래도 얼굴 알고 유일하게 친근하게 지내는, 아니 친한 건 아니고 그나마 대화 많이 나눈 이가 황태자라 좀 섭섭했다. 홀대하는 건가? 에이린도 집에 가고 없는데.

"어? 알비는?"

"알비케라경은 머물 거처를 3층에 마련하여 그곳에 모셨습니다. 좋아하실만한 인형과 장난감으로 방을 꾸며드렸습니다."

우리 알비 호강하는구나. 그치만 걔가 없음 나 밤에 무서운데... 하지만 귀족들은 애완동물과 잠을 같이 자지 않는다. 일단 당분간은 혼자 자야하나?

멀리서도 내 목소리를 들으니 여차하면 날 찾아와 줄 거야. 후읍. 괜찮겠지.

일단 나는 시녀들을 물리고 내 침실로 가서 누웠다. 내 방 탐사는 내일마저 해야지.

폭신한 매트리스와 부들부들한 이불의 감촉이 좋았다. 확실히 황궁의 물건의 질은 좋구나. 침대는 왜 이리 광활한지 한 네 명은 눕겠다. 침대 끝에서 반대쪽으로 구르는데도 한참일 것만 같았다.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간 뒤 이불을 휘감았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구나. 아르세이아가 돌아왔을 때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의 호사!

그나저나 알비케라가 내게로 온 뒤로는 악몽을 꾸지 않았는데, 이젠 설마, 안 꾸겠지? 그래도 나름 긴 여행에 몸이 지쳤을 테니 푹 잘 수 있을 거야.

눈을 감으니 스르륵 눈이 감겨왔다. 하긴, 어제 잠도 설친 데다가 정신은 더 피곤한 하루였으니까. 자자. 에이린도 내일은 입궁할 거고, 다 괜찮을 거야. 아르세이아를 모시던 시녀들도 다 알아채지 못했잖아. 초조해하지 말아야지.

결국 나는 내게 찾아온 잠을 거부하지 않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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