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황궁에서의 첫날 밤 (1)
2018.04.09.
황궁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황제와 황후를 알현해야 했다. 황태자는 궁을 비운 동안 밀린 업무를 보고 따로 문안 드린다며 자릴 비워 혼자 가야만 했다.
실수하면 안 돼. 남편도 못 알아보는데 시부모가 알아볼 리 없어. 겁먹지 말고, 긴장하지 말자.
"창공에서 제국을 비추어주시는 유일한 빛이자 태양이신 황제 폐하와 그 반려, 밤하늘을 밝혀주시는 별, 황후 폐하께 작은 별 아르세이아가 인사 올립니다."
우와, 그래도 에이린과 미리 열심히 연습해서 인사는 어찌어찌 넘겼다. 무슨 황제랑 황후한테 인사하는 말이 이리도 길단 말인가?
저 긴 말을 하는 동안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히면서 허리는 꼿꼿하게 펴서 몸을 숙이라니. 황실 예법 참 힘들구나.
황제가 내 인사에 기분 좋게 허허거리며 일어나라 손짓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사돈 어른.
"그래, 몸은 좋아졌느냐?"
"예, 폐하, 송구하옵니다. 황궁으로 시집온 지 석 달이 겨우 지났는데 몸이 좋지 않다며 친정에서 요양하다니 부끄럽습니다."
"아니다. 비스 후작이 애지중지하던 고명딸아니더냐. 황태자 때문에 사교계에 데뷔하고 6개월도 안되어 낯선 황궁으로 들어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안다."
고명딸이라, 그래 아르세이아는 후작가의 하나뿐인 딸이었지.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직접 듣는 것은 내 입안을 떫게 만들었다.
"황태자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아니면 안된다고 나이를 먹도록 장가를 가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헌데 이렇게 제 짝을 데리러 직접 그 먼 길을 갔다 오다니 애처가가 다 되었습니다."
황후의 높고 간들 어진 목소리가 울렸다.
황태자의 계모. 그녀가 내 동생의 남편을 얼마나 미워하는지는 제국민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시골 촌구석에 박혀 살던 나도 아는 소문이었다.
그녀가 제 소생의 아들을 황태자로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모르면 제국민이 아니지.
황태자를 괴롭힌 천벌로 제 아들이 괴질에 걸려 일찍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사니 더 황태자가 밉고 싫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 일을 황후의 악행의 결과라고들 말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의 형이었던 1황자의 죽음의 배후가 황후였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같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귀족파를 등에 업은 황태자비가 얼마나 꼴보기 싫을까? 얼핏 보면 황태자는 제 입지를 위해 반목하던 귀족파를 규합한 셈이니까. 황후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에이린에 따르면 황태자를 제외한 황자가 더 이상 없는 상황에 황후는 그동안 숨죽여 지냈다고 한다. 대신 황태자비를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려 했다지?
권력이라는 게 그리 좋은가? 아들을 잃어놓고 또 그렇게 달려들다니, 나라면 진작 다 관뒀을 텐데...
그녀의 뱀 같은 시선이 내게 들러붙었다. 아 싫어. 소름 돋았어.
"카일께서 저를 귀히 여겨 주시어, 제 부모님과 가신들이 모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절 집으로 보내 쉬게 해주신 두 분 폐하께 무한한 감사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일부러 황후 앞에서 그를 애칭으로 칭했다. 황후의 눈에는 내가 데뷔탕트를 치르고 6개월 만에 황태자와 결혼한 애송이로 보이겠지.
그러니 더 황태자랑 돈독해 보여야 할 필요가 있겠어. 근처에서 대기 중인 시녀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역시나 애칭으로 그를 칭하자 황후의 표정이 짧은 시간 날카로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치적인 선택이 아닌 친밀함을 어필하자 불쾌해 하는군.
"그래. 남자의 마음이란 언제 바뀔지 모르니 지금처럼 사랑받으려면 황태자비의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게야."
"예, 폐하. 안 그래도 이번 여행길에 계속 예쁘다 칭찬해주시고, 지켜주신다 하여 사랑받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카일께서 제게 보여주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노력하겠습니다."
에이린이 그러는데 냉혈한, 얼음 황태자, 설원의 소드마스터 등등의 별명이 있다더라. 그런 황태자가 그랬다니깐 못 미더운 가 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네. 그가 정치적인 목적으로만 혼인했다 믿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황후의 저 눈빛. 참 낯익었다. 후작부인이 날 볼 때의 표정이네. 참 소름 끼치는 적의와 악의.
에효. 뭐 난 익숙해서 생각보다 충격이 크지 않았다. 아마 평범하고 곱게 자란 귀족 영애들이었다면 떨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난 전혀 쫄지 않았다는 사실.
솔직히 나는 후작부인의 눈빛은 감당하지 못했다. 그녀가 어째서 날 증오하는지,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황후의 눈빛은 단순히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황태자가 미운데 그걸 내게 푸는 것 같아서 무섭진 않았다. 나를 향한 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황후를 볼 수 있었다.
대신 그런 황후를 보다 보니 그저 황태자가 살짝 불쌍해졌다. 계모에게 구박받는다는 소문은 얼핏 들어 알았지만, 나한테도 이 정도면 황태자에겐 얼마나 더 심했을지 알 만했다.
내가 후작부인에게 겪은 만큼의 미움을 받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나저나 이 시선은 뭐지??
황제 폐하? 뭐, 뭐야? 저 귀여운 대형견이 꼬리치는 것 같은 표정은? 날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나이도 많으신데 왜 그렇게 순하게 귀엽게 보시는데?
"우리 며느리가 벌써 황태자랑 친해진 듯 하여 기쁘구나. 내 아들이지만 상처가 많은 아이이니 따뜻하게 잘 품어 잘 내조하거라."
솔직히 전혀 상처 많은 사람으로는 안 보였습니다만?
"널 보니 어지간한 일에는 끄떡도 없는 심성을 지닌 듯 하구나. 언제든 황궁 생활이 힘들면 내게 말하고."
황후의 시선에 주눅 들지 않아서 좋게 보신 건가? 흠흠, 버릇 없어 보이진 않았겠지? 뭐, 손해 볼 것은 없었다.
"폐하의 태양보다 높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쉬거라. 그리고 얼른 손주를 안겨다오."
"예! 폐하."
응? 에? 예? 뭐요? 손주?? 순식간에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뒤에는 어찌 나왔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큰 실수는 힌지 않은 것 같은데 모르겠어.
으아아! 그 커다란 강아지 같은 황제 폐하는 왜 나한테 부끄러운 말한 거야? 난 거기에 왜 예라고 대답 했는데?? 그것도 씩씩하게!! 황제가 좋다고 껄껄대던 게 떠올랐다. 나 미친 거 아냐???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기거하는 만월궁으로 돌아가자마자 무거운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처음 보는 시녀들의 도움으로 편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시녀들의 인사를 받았다.
"돌아오셨습니까 황태자비 전하."
"그래. 다들 잘 지냈지?"
처음 보는 사이의 인사인데 서로 참 다정도 하구나. 그런데 에이린이 보이질 않았다.
"에이린은?"
중년의 선한 평범한 동네 소 같은 모습의 시녀가 대답했다. 아마 저 여자가 황태자궁의 시녀장 모일라 브리튼 남작부인이었지?
"유베르 영애는 전하를 모시고 오랜 시간 쉬지 못하고 근무하여 오늘 밤은 집에서 쉬라고 퇴궁시켰습니다."
"뭐? 누구 마음대로?"
뭐라고? 나, 아니 아르세이아가 이 궁의 최고 책임자 아냐? 왜 네 맘대로 쉬라고 함? 최소한 내 허락은 받고 휴가 줘야 하는 거 아님???
내가 귀족, 아니 황궁의 법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이 들고나는 건 바로바로 보고해야 하는 거 아냐?
"지금껏 연속 근무시 항상 주어진 휴가입니다."
"그래, 휴가가 필요하면 줘야지. 그런데 시녀장. 그녀는 내가 사가에서부터 데리고 온 시녀이고 이번에도 내 수발을 들며 고생한 것은 맞지."
나는 그녀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기로 했다. 이런 일에 밀리면 안 돼.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내가 그 공을 치하하기도 전에 그대가 집으로 보내면 어떻게 하지? 아, 물론 복귀하면 상을 내리겠지만 그전에 내가 내 사람을 챙기고 치하하는 게 내가 할 일인데 말이야. 그대가 내 자리를 대신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 초면에 너무 심했나?? 피곤해 죽겠는데 쉬지도 못하고 황제 부부 만나서 황후랑 신경전이나 하고 오니 가뜩이나 예민한데, 짜증 나네.
아르세이아는 뭐한거야? 아랫사람 기강도 안 잡고 제 멋대로 설치게 둔 거야? 그리고 이런 것마저 내가 잡아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에이린은 또 뭐니? 나 혼자 황궁에 놔두고 좋아라 집에 가다니!! 너무해!!
하아, 그런데 이거, 너무 후작부인처럼 행동한 것 같은데? 나한테 하는 것과 달리 아랫사람에겐 상당히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대하셨지.
"죄송합니다. 전하."
당황한 듯 허리를 숙이는 브리튼 남작 부인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나보다 직급 높은 사람인데 뭐라 하려니 양심이 콕콕 쑤신다. 내가 비록 자작 영애지만, 황태자궁의 시녀장의 발 아래지 아무렴.
절대 내가 황태자비가 아닌 것을 들키지 말아야겠다.
"앞으로는 내 궁안에서 날 직접 수발드는 시녀들의 신변은 모두 자네가 아닌 내 허락을 받도록 할 것이야. 다른 이들에 대한 권한은 그대에게 맡기지. 피곤하니 다들 물러가. 아, 혹시 황궁 예법서가 있으면 차랑 함께 갖다 줬으면 좋겠군. 아, 제국 역사에 대한 책도 있으면 주고."
어제 새벽에 잠이 도저히 안 와서 황족 계보랑 귀족 계보는 울면서도 다 읽고 외웠다. 그나마 다행인 게 나 머리가 나쁘지는 않아서 배운 건 잘 기억했다. 쉬는 동안 예법 공부 좀 해야지.
그리고 에이린도 없는데 이렇게 낯선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아르세이아의 수업을 대신 들으면서 제법 공부를 하긴 했었지만 황태자비로 살기엔 부족했다. 내궁은 황후가 장악하고 있으니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을 테지만 공부는 어느 정도 해둬야 버틸 테니 아르세이아가 올 때까진 어찌하든 해보자.
단단히 다짐한 나는 일단 사람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내가 부탁한 것들을 가지고 오는 동안 나는 당분간 내가 지내게 될 방을 둘러보기로 했다.
아르세이아가 3개월간 지낸 방이었다. 방의 구조를 에이린에게 대충 듣긴 했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다르기에 파악했어야 했다.
예전에 쓰던 것과 비교도 안되게 크고 넓은 방과 그 방을 적절히 돋보이게 하는 화려한 가구들. 침실에 딸린 내실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를 비롯해 진짜 고풍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화장실이랑 욕실은 어디지? 아까 옷 갈아입은 드레스 룸 근처인가?"
내가 혼잣말을 하며 넓은 방의 탐색을 시작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나는 다시 내 자리로 후다닥 돌아가 앉으며 들어오라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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