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1)
2018.04.06.
"늦으셨습니다. 황태자비 전하."
황태자도 가만히 있는데 그 옆에 근위 기사단장이 타박했다. 미안하게 됐네요. 여자들이 추억을 회상하다 그만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오랜만에 환궁하는 길이라 긴장이 되어."
"괜찮습니다. 덕분에 평소보다 더 아름다운 부인을 에스코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영광이지요."
황태자는 대단한 멘탈의 소유자인가 보았다. 저런 낯 뜨거운 말을 마구 뱉다니. 봐, 네 친우이자 수하인 근위대장조차 표정관리가 안 되잖아. 우와, 대역인 걸 모르겠지만 명색이 황태자비인데 저리도 노골적으로 적의를 내뿜냐.
사실 근위대장은 뼛속까지 황제파인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황태자파겠지. 황제파였던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귀족파 수장의 딸이었던 현 후작부인과 혼인하고 귀족파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그러니 근위대장의 적의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귀족파의 수장을 외가로 둔 여인을 반쪽으로 데려온 황태자라... 겉보기엔 진심으로 아르세이아를 흠모하는 것 같긴 한데, 그런데 왜 3개월이나 소박 맞춘거지?
역시 귀족파의 인질로 삼으려 아르세이아와 혼인한 건가? 그런 거면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을 참 잘 연기하는 거네.
역시 무서운 남자야. 조심해야 돼. 진짜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내가 바뀐 것을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죄송하지만 전하. 제 품에 이 작고 여린 생명이 의지하고 있어 아쉽게도 전하의 에스코트는 받지 못할 것 같네요. 다행히 사지가 멀쩡하니 혼자 마차에 오르겠습니다."
황태자의 금안이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내 손에서 갑자기 알비케라를 뺏어 들었다.
"켕!"
"뭐 하는 짓이에요? 알비가 아파하잖아요."
"아, 미안, 근위대장, 이 작고 여린 생명은 네 주군의 사랑하는 이가 가장 아끼는 애완견이니 황궁에까지 잘 데려오게. 날 가로막는 방해물들을 누구보다 잘 치워 주는 그대라면 잘 보살필 거라 믿네."
뭐야. 우리 알비케라가 방해물이라는 거야? 저 귀여운 아이한테 저 울끈불끈 한 근육쟁이 손에 들려가라면 우리 알비케라가 싫어한다고!
"알비가 싫어할 거예요!"
"좋아하는데?"
알비케라는 커다란 근위 대장의 손 위에서 배를 내밀며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저 배신자!!!! 근데 왜 저 모습마저 귀엽냐고? 사교성이 많구나. 오구오구 내 새끼.
"자, 그러면 나의 비. 이제 가실까요?"
"후우..."
그가 내민 손을 외면하고 알비케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데 황태자가 먼저 내 손을 잡아 제 팔 위에 턱 얹어버렸다.
"저기...!"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적당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무표정한 얼굴을 내 귓가에 들이대며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내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가, 가요."
그러자 그는 정중히, 소중한 보물 다루 듯 나를 이끌었다. 태도 변화가 너무 빨랐다. 방금 그 표정이 아르세이아를 향한 그의 진심인 걸까? 역시 사랑에 빠진 척 비스 가문과 귀족파를 안심시키고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인 거야?
조금 두려웠다. 내가 지금껏 아르세이아를 대신했던 대역과는 달랐다. 언제든 내가 잘못해서 들키거나 그가 날 내치고 싶어지면,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다칠 것이다.
후작가가 망하는 건 상관하지 않지만, 그러면 내 외가인 소노르 자작가도 타격을 받겠지. 기사 아카데미의 프리케도, 가문 소속의 목장에 있는 내 동물 친구들도 변란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나 암울한 과거를 가지고도 이렇게나 밝게 살 수 있게 도와준 에이린과 알비케라까지 죽음을 면치 못 할지도 몰랐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들은 절대 나로 인해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반반이었다. 어쩌면 들켜서 날 지옥에 가뒀던 후작가문이 망하길 바라는 마음과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
내 아버지인 비스 후작님. 나를 학대하는 후작부인을 말리진 못하지만 언제나 나를 슬픈 눈으로 보던 단단한 중년의 미남 기사님. 그분이 곤란한 건 싫었다. 그분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내 어머니가 슬퍼할 거니깐. 후작님이 다치거나 곤란을 겪는 건, 역시, 안되겠지?
"앗!”
딴 생각을 하다 돌부리를 밟았다. 마차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비틀거리다니. 아이씨. 쪽팔려.
그때 훅 들어오는 감촉이 있었다.
"괜찮아?"
"저, 저기 손은 좀 치우시죠?"
허리 부근에 닿은 굳은살 가득한 커다란 남자의 손에 내가 얼굴을 굳히며 말하자 청남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던 남자는 또 내게 빙그레 웃으며 거절했다.
"나의 비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하얀 털 뭉치까지 치우고 애써 에스코트를 하는 의미가 없잖아."
아 진짜. 말이라도 못하면. 그런데 이 남자 왜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데? 내 정수리는 왜 살펴?
"그런데 나의 비. 그 사이 키가 좀 큰 것 같은데?"
헉. 뒤에서 따르던 에이린도 몸이 굳은 것 같았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구, 구두 굽이 높아서 그, 그래요."
"흠. 너무 높은 건 발목에 무리가 가니깐 자제하도록."
"네."
내일부터는 무조건 낮은 굽만 신어야겠다.
어느새 도착한 마차 앞에 서자 마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 황실 소속이라 그런지 아주 정중했다. 문을 열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중년 아저씨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허리가 숙여지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억지로 버텨내느라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겨우 도도한 자태로 고개만 살짝 까딱해 인사를 표했다.
황태자의 에스코트로 내가 마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자 그도 바로 마차에 올랐다.
"왜 타요?"
내 눈이 동그래진 것 같다. 지금껏 황태자는 말을 타고 나는 따로 마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왜 갑자기 같이 타는 거야?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옷도 검은색에 금사로 수를 넣은 멀끔한 예복이었다. 내 눈에 비친 의문에 황태자가 답을 줬다.
"게이트에서 내리면 황도를 지나치거든. 다정한 황태자 부부의 모습을 보여줘야 제국민들이 좋아한다고."
화려한 마차의 커튼이 어쩐지 예쁘게 묶여 걷어져 있더라. 에이린은 뒤의 마차로 가는 게 보였다. 그럼 나 눈앞의 이 남자랑 단 둘이 가야하는 건가?
"알비케라! 알비도 태워갈 거예요."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개를 싫어하나? 하긴 검은 옷에 흰 털이 들러붙음 싫긴 하겠다.
우리 알비케라는 얼핏 보면 더러운 똥깨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털에 윤기도 없고, 털이 얼굴도 거의 다 가리고, 누가봐도 혈통 없는 유기견같이 생기긴 했지. 그렇지만 내가 목욕도 자주 시켜주고 양치도 시키고 얼마나 깨끗한데!!
"안 돼요?"
나는 그를 향해 눈꼬리를 내리고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나와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이때다! 내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자 살짝 멍한 표정이던 황태자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려 손짓을 했다. 내 자리 옆에 금색의 폭신한 쿠션이 놓였고 그 위에 알비케라가 올려졌다.
알비케라는 내 곁으로 돌아온 기념으로 꼬리를 마구 흔들며 헥헥 거렸다. 그래 남자 손도 좋지만 이 언니 곁이 더 좋지? 오구오구 이쁜 내 새끼.
문이 닫히고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비, 손."
앙증맞은 발이 내손 위에 올라왔다. 역시 똑똑한 내 이쁘니!
"우리 알비케라 잘했어요."
황태자랑은 어색해서 계속 알비케라에게 말을 걸고 놀아주고 있었다. 알비케라는 슬금슬금 쿠션에서 벗어나 내 곁으로 다가오고 싶어 했다. 쿠션보다는 이 언니 품이 좋긴 하지.
"안 돼."
알비케라가 근엄한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발을 올리다 멈칫했다. 왜 내 새끼 기를 죽이고 놀래켜?
나와 알비가 그를 돌아보자 황태자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갑자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왜? 왜요?"
설마 그쪽이 알비케라 대신 내 무릎에 앉으려는 건 아닐거고 왜 오는 거죠? 내 동공이 마구 떨리는 게 나까지 느껴졌다.
품에 손은 왜 넣어? 나 들킨 건가? 검이라도 꺼내는 거야?
어? 손수건? 그리고 내 손이 그에게 딸려갔다. 내 손을 정성껏 닦는 그의 손길이 간지러웠다.
"결혼반지가 없군."
무심한 듯 흘리는 말이었지만 내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그게, 영지에서 소풍 나갈 때 끼고 갔다가 잃어버렸어요. 아마, 가, 가문에서 사람을 동원해 샅샅이 뒤지고 있을 거예요."
그는 말없이 계속 내 손을 닦았다. 화가 난 걸까? 가출로 부족해서 신성한 결혼반지도 잃어버렸다니 화난 거겠지?
"죄송해요."
절로 내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없이 계속 손수건만 움직였다. 그리고 내 손을 닦고 나자 알비케라에게로 손길이 옮아갔다.
"알비케라 발!"
발 아닌데 손인데! 그는 알비케라가 내민 발을 닦았다. 그리고 반대쪽과 뒷발까지 닦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는 것이 보였다.
나와 알비케라가 뭐한 거냐는 눈빛을 보내자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
"고귀한 나의 황태자비의 몸에 더러운 흙을 묻힐 순 없잖아? 알비케라, 앞으로 황태자비의 무릎에 앉고 싶으면 언제나 발부터 닦아라."
"멍!"
알비케라가 대답하자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저 개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하는군."
꿀꺽. 나와 알비케라 둘 다 잠깐 멈칫했다.
"알비케라가 똑똑하긴 하죠. 다른 개들과는 달리."
"흠... 수컷인가?"
"아뇨. 암컷이에요."
알비케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그의 표정이 사르륵 풀리는 게 보였다. 다행히 동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닌가 보았다.
대화를 끝내고 내가 알비케라의 발을 잡고 까꿍 해주는 모습을 눈앞의 남자는 비스듬히 앉아 웃으며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느껴져 나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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