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2화 (2/126)

2화. 아르세이아의 당부

2018.04.05.

"이제야 내가 보이나 보군."

으악!!!!! 뭐 뭐야?

아니 왜 날 이렇게 꽉 안고 있는데?? 왜 지 무릎 위에 날 앉혀놓냐고? 다리 안 저려??

"버둥거리지 말고 얌전히 있으시죠. 나의 비."

"내, 내려주세요."

"아직 덜덜 떠는 것으로 보아 다리에 힘이 풀려 걷기 힘들 테니 내게 의지하시오."

"아, 아니에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남청색 머리카락이 갑자기 내 얼굴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짙은 노란색의 눈동자가 내 코앞에 멈췄다.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 많이 걱정했었나 보네.

그리고 갑자기... 뺨에 닿는 따뜻하고 말캉한...

"뭐, 뭐예요?!"

둥그렇게 휘어지는 예쁜 눈동자. 그리고 맑게 울리는 청량한 웃음소리.

"온기는 돌아온 것 같군."

"그러니까 이만 내려줘요."

내가 고집을 피우자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 귓가에 작게 속살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의 비는 예전부터 고집이 세었지. 그렇지만 오늘은 안돼. 내가 바래다 주지."

갑자기 내 시야가 확 높아졌다.

"꺅!"

"발버둥 친다 해서 놓치진 않겠지만 무섭지 않으려면 단단히 잡아야 할 거야."

날 안아든 남자가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하자 속이 울렁였다.

"제발 내, 내려줘요."

"싫은데? 드디어 내 비를 안고 처음으로 체온을 나눌 기회인데 놓치기 싫단 말이야."

사람들 앞에서 예를 갖추던 공손한 사람은 어디 가고 반말이야? 게다가 체온을 나누다니? 뭐래? 미친!

"왈! 왈! 왈!"

알비케라가 쫓아오며 사납게 짖었다. 황태자는 잠시 미간을 찡그리다가 에이린을 불러 알비케라를 데려가게 했다.

아, 안 돼! 왜 보내는 건데?

그리고는 날 보고 다시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 표정에서 꿀이 막 떨어졌다.

아 왜?? 아르세이아!!

이 남자 너한테 푹 빠져있잖아!! 분명!! 분명 결혼 후 초야는커녕 석 달 내내 소박맞았다면서 나한테 푸념해 놓고는!!!!!!!

안돼! 위험해! 설마 안은 채로 이대로 내 막사로 가는 건 아니겠지? 안 돼! 절대로!!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자 갑자기 등 쪽이 허전해졌다. 그리고 뒤로 기울어 지려 했다.

"꺄악!!!!"

본능적으로 근처에 있는 걸 양팔로 감아 잡았는데!!

"훨씬 좋군."

아, 지금 내가 잡을 건 황태자의 목뿐이었다. 아이씨. 치사하게 손을 빼다니, 더 추해졌어. 차라리 얌전히 있을걸.

막사의 천막을 걷어주는 호위 기사를 뒤로하고 황태자는 나를 내 막사의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아직도 떠는군."

그거야! 그쪽이 내가 내려가려고 할 때마다 떨어뜨리는 척 위협하며 왔으니까, 아... 아닌가? 아까부터 계속 떨었나?

아까 거기서 그러니깐, 빛을 찾아 돌아서자 내코앞에 횃불이 보였고. 그리고 난 패닉상태가 됐었지.

"곱게 키운 비스 후작가의 여식이라 기름냄새가 싫어서 마법등을 고집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후, 분명 주의를 줬거늘."

내 귀에 약간의 비꼼이 들렸다. 입꼬리도 살짝 비틀려 보였다. 하긴, 오해할만했다.

나는 사실 기름 냄새도 싫어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니까. 이젠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떠오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갑자기 황태자의 손이 내 머리를 향했다.

"하마터면 이 고운 머릿결이 죄다 뜯겨 나갈뻔했어."

흠칫 움츠러드는 날 보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멈칫했다. 하지만 다시 천천히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리하며 작게 토닥였다.

"고, 고마워요."

"말로만?"

와. 치사하네. 토닥여 준 것 가지고 대가를 바라다니!

내가 동그랗게 눈을 뜨자 그가 피식 웃었다. 잘생겼긴 하네. 왜 사교계의 영애들이 황태자비를 뽑기 위한 지난 2년간의 간택 연회에서 다들 그 난리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뭐, 고운 내 부인의 보드라운 입을 맞출 수 있었으니 그 보답은 받은 셈으로 칠게."

뭐라고? 아까 그, 그, 내 입에 닿은 게? 내... 첫키스를? 도, 동생의 남편한테 뺏긴 거야? 어떡해? 아르세이아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면 날 죽이려 할 거야.

그, 그런데 왜 내 얼굴은 막 화끈해지고 난린데? 제부랑 키스하고 파렴치하게 얼굴이 붉어지냐고!

"우리 오늘 처음으로 입 맞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

"뭐! 뭐라는 거예요?"

아이씨, 이 인간 나 놀리는 게 재밌나? 아이씨 짜증, 왜 웃는데? 얄밉다.

"이제 그럼 대가도 다 받으셨으니 나가 주시죠. 쉬고 싶어요."

평소 아르세이아의 말투와 억양을 최대한 따라 하려 애쓰며 도도하게 턱을 들며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모습을 묘한 눈으로 보던 황태자가 내게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뭐예요? 나가지 않고?"

"부인이 힘들까 봐 안고 막사까지 온 보답은 안 해줄 거야?"

"이잇!!!"

"푸하하하. 발끈하는 것도 귀여워. 여전해."

남청색 머리가 그의 웃음과 함께 떨렸다. 그는 곧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많이 놀란 듯한데 잠이 들 때까지 곁에서 지킬 테니까 이만 누워."

저기 저 아직 옷도 안 갈아입었거든요? 내 눈썹이 절로 올라가는게 느껴졌다.

"아, 아직 옷이 그대로구나. 자 일어나 봐. 내가 갈아입혀줄 테니."

"당장 내 막사에서 나가요!!!!!!!!"

* * *

"에이린, 하아... 나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안 돼?"

아까 패닉에 빠졌을 때 있었던 일들을 듣고 난 다시 공황상태였다. 낯선 남자한테 내 입술을 빼앗겼어. 덕분에 살아나긴 했지만, 미친년처럼 머리 쥐어뜯고 발작하는 걸 다 보였네. 하하하. 그때 혀 깨물고 그냥 콱 죽을걸. 그럼 뒷일은 내가 책임 안 져도 됐을 건데.

"안 돼. 너 혼자 힘으로 호위 기사들 어찌 따돌리려구?"

"일단 날 황태자비로 아니깐, 죽이진 않을 거 아냐? 지금이라도 근처에 있는 맹수들의 도움을 받으면...!"

에이린이 나를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짜증도 섞였어.

"그, 그야. 기사들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하아, 세이렌. 너 아무리 영지에서 동물이나 보면서 사교계랑 담쌓고 살았었다지만, 소문도 안 듣고 살았니? 심지어 네 목장 옆에 기사 아카데미의 승마훈련장도 있었는데, 그 기사들이 찬양하는 차가운 피를 가진 창공의 성웅, 카일룸 헬리오스 데피니토르 황태자를 몰랐단 말이야?"

"그 남자 차갑지는 않던데...? 아무튼 그게 왜?"

음. 황태자가 그렇게나 유명한 사람이었어? 그리고 차가운 피? 냉혈한은 무슨, 실없는 파렴치한이더구먼. 아무튼 나랑 친한 견습기사 프리케는 그런 말 안 해줬는데. 하긴 황태자니까 유명하겠지.

"어휴, 전하께선 소드마스터이자, 4대 정령왕들이랑 계약한 이 시대 최고의 정령사라구."

"아하, 그렇구나. 대단하네. 그래도 맹수들이 시간을 끌어주면 나 하나 도망갈 시간 정도는..."

"이 바보야!"

윽! 에이린, 너무해. 아무리 내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여기에 늑대 가족들이랑 표범이랑 곰도 주변에 많고, 에 또..."

"너, 친구들을 다 죽일 셈이야?”

"어? 에이, 소드마스터에 최강자라고 죄 없는 동물들을 다 죽이겠어? 게다가 걔들은 사나운데 그가 아무리 잘났어도..."

"죽여, 그것도 단 칼에! 전부!"

에이린이 내 말을 끊고 진지한 표정으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꿀꺽.

"휴우, 렌. 전하께서는 손속이 잔인하신 분이야. 지금껏 수많은 암살 위협에서 살아남아 그 자리에 오른 분인 걸. 자신의 갈 길을 막는다면 뭐든 없앨 거야."

"거, 거짓말. 그렇게 잔인한데 어떻게 순수한 생명체인 정령이랑 계약을 해?"

정령들은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계약자로 찾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비록, 뭐, 살짝 위협을 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죄 없는 동물들을 다 죽일 거라니!! 그런 사람이 정령사라니, 너무하네 정령들도!!

차별하냐! 외모, 돈, 권력도 넘쳐 나는데 힘까지 막 퍼줬네!

아니, 그런데 나 아까 그런 무시무시한 사람한테 개기고 소리 지르고 쫓아낸 거야?

"딸꾹!"

"괜찮아? 지금까지 걸리지 않았으니 끝까지 안 걸릴 거야. 걱정 마."

"으, 응. 딸꾹. 나, 어떡해? 내가 아르세이아가 아닌 거 걸리면 변명도 하기 전에 황태자 손에 죽는 거 아냐? 딸꾹! 지금이라도 늦기 전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도망가야 하는 거 아냐? 나 죽기 싫어."

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자 에이린이 등을 두드리며 물을 주었다.

"이미 늦었어. 도망 못 가니깐 그냥 황태자비 대역에 충실하면서 진짜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네가 걸리면 나도 같이 죽어."

"딸꾹! 딸꾹!"

내 인생 이제 망한 거야? 오늘 밤 안에 아르세이아가 돌아 올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데... 내일 이대로 황궁으로 끌려가는 건가? 나 귀족예 법도 서툰대 황실 예법은 어쩌라고! 안 걸릴 리가 없잖아!!!!!!

내 눈에 어린 공포를 보며 한숨을 쉬던 에이린이 내게 책과 함께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황실이랑 귀족 계보도야. 미리 읽어두자. 그리고 이거. 책 사이에 꽂혀 있더라. 황태자비 전하의 편지 같아."

편지라고? 혹시 언제 이 장난이 끝나는지 적혀있는 것 아닐까? 후다닥 편지를 잡아들어 펼쳤다.

- 내 사랑하는 하나뿐인 언니 세이렌.

황궁에는 무사히 도착했니?

나 황궁이 너무 답답해서 그러는데 몇 달만 자유를 누리다 들어갈게. 그러니까 나 없는 동안 대신 잘 부탁해.

특히, 나의 반려이자 하늘 아래 두 번째로 높으신 태양, 카일룸 전하를 잘 보살펴줘. 따뜻한 사랑이 필요하신 분이야.

그런데 나한테 관심이 없더라고. 내가 돌아갈 때까지 언니의 그 착한 성정으로 그분의 마음을 좀 잡아 줘.

그래서 내가 돌아갈 때 그분이 나만 바라볼 수 있도록, 한 눈 안 팔도록, 황태자비한테 푹 빠지도록 꼬셔줘.

돌아왔을 때 여전히 냉담하면 나도 어찌할지 모르니깐. 알지? 내가 지금껏 언니를 위해 해준 게 얼만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그리고 나 없는 동안 언니도 호사를 좀 누리면서 화려한 사교계에서 마음껏 놀아. 기왕이면 콘스탄트가의 그 릴리아나 공녀 그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사교계의 꽃이 되어주렴. 호호.

잘 부탁해.

언니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해주고 싶은게 너무 많은 동생으로 부터

P.S. 참, 황태자가 하도 열받게 해서 결혼반지를 잘라버렸어. 어쩌지? 그래서말인데 그냥 그거 팔아서 내 도피자금으로 쫌 쓸게. -

이, 이, 이, 이게 무슨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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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차가운 피를 가진 황태자의 물수건.

2018.04.05.

갑자기 부들거리던 내 손에서 편지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편지는 에이린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숯으로만 채운 화로에 들어갔다. 에이린은 내가 갑자기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지 못하게 화로 앞을 막아주었다.

차라리 불꽃을 보고 패닉에 빠지는 게 내 정신건강에 이로울... 아니다. 그건 너무 극단적이야.

하아, 그나저나 어떡하지? 단순히 대역만 하는 게 아니라 황태자의 마음을 잡아놓으라고? 그런 개소리를?

그냥 남녀 지간도 아니고 부부간에 마음을 잡아두려면. 그, 그, 그 밤에 하는 그, 신성하지만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그 짓을 해야 하는 거 아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까 하는 짓 보니까 정말 능글맞던데, 아니. 이미 아르세이아를 보는 눈에서 꿀이 막 떨어지던데 뭘 더 어쩌라고!!! 오히려 다가오는 거 막고 냉랭하게 굴어서 정체를 숨겨야 할 판에 어쩌라는 거야?

"에, 에이린. 너 편지 봤어?"

"힘내! 황태자 전하의 사랑을 받아내야지."

"저, 저기. 이게 말이야, 둘은 미혼남녀도 아닌데 사랑을 받으려면 나더러 뭘 하라는 건데?"

저기 친구님. 왜 외면해? 거기 아까 이미 정리했잖아. 왜 또 정리하니?

"게다가 이미 전하는 간택을 겸한 데뷔탕트 연회 때 첫눈에 반해서 아르세이아에게 청혼한 거잖아. 그런데 왜 관심을 못 받는다는 거야?"

"일단, 네가 걱정할 일은 내일부터 황궁에 가서 적응하는 거야. 내가 늘 곁에서 시중을 들겠지만. 어쨌든 도망치는건 안되니까 다른 고민하지 말고 자. 얼른."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방법이 없잖아 렌, 이대로면 너도, 나도, 후작가도, 후작부인이 숨겨둔 네 어머니도 위태로워져."

그건 맞지만, 그래도, 나는... 준비가 안됐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도망치는 게 제일 나은 것 같은데...

"황태자 전하는 또 막사를 떠나서 일 보고 계신가 보더라. 전하가 아니라 근위 기사단들도 맹수들 때려 잡을 무위가 출중하니 죄 없는 네 친구들 죽일 생각 마. 내일 아침에 전하가 돌아오시자마자 게이트로 출발한다니 푹 쉬어."

에이린. 나쁜 친구. 황태자 없단 소리에 내 눈빛 변하는 거 보고 바로 잔인한 소리를 하다니.

"불끄고 갈게요. 황태자비 전하 푹 주무세요."

날 두고 가지마. 제발.

"멍."

"알비케라, 일루와."

나의 귀여운 복슬강아지가 내 손길을 받자 머리를 비벼왔다. 알비케라야, 나 어떡하지?

내가 성인이 되던 생일날 홀연히 나타난 이 강아지는 언제나 내 곁을 어둠으로부터 지켜줬다.

"알비. 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멍!"

"고마워. 응원해줘서."

알비케라가 괜찮다고 토닥여줬다. 알비는 언제든 위험해지면 날 도와주겠다고 약속해주었다.

나의 진정한 친구. 말을 하지 않아도 날 이해하고 믿어주는 고마운 존재.

"하아아, 이제야 살고 싶어졌는데, 사는 게 재밌어졌는데...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불행해질 일 따위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난 또... 역시 난 저주받은 아이인가 봐.

"끼이잉."

"미안, 미안, 다신 그런 생각 안 하기로 했는데. 그런데..."

눈물이 쏟아졌다. 서럽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억울했다. 난 왜 계속 이런 불행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하는 거냐구.

또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 걸까? 도망치고 싶다. 자연이라면 날 충분히 숨겨줄 텐데...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허울뿐이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쳐준 소노르 자작가의 등을 칠 수 없기에, 나는 또 내 발로 불행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뎌야 했다.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는데 참아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원망해선 안 돼. 미워해도 안 돼. 알잖아 세이렌. 네게는 그런 감정이 허락되지 않는 것을. 그랬다간 또 나는...

"알비케라, 케이는 언제쯤 날 구해주러 오는 걸까? 날 구해준다고 약속해 놓고는. 왜 안 와? 보고 싶...어."

이젠 케이의 얼굴은 까만 머리색 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대부분이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선명히 기억나는 한마디.

"꼭, 내가 널 구하러 올게. 조금만 더 버텨."

그래서 지난 7년간 그를 기다렸다. 나를 비스 후작가에서, 이 지옥에서 날 구해줄 거라고 믿고, 기다렸는데. 왜 안오는 거야? 너마저 날 버린 거야?

나는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진 낡은 오르골의 태엽을 감았다. 작고 예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오르골에 달린 작은 서랍을 열자 시커멓게 그을린 나무를 깎아 만든 반지가 나왔다. 조심스레 그 반지를 꽉 쥐었다.

왜 눈물이 멈추지 않는지 모르겠다.

* * *

"밤새 얼마나 울었길래 눈이 이래요?"

"미안해 에이린."

게이트를 통과하면 반나절이면 황궁에 도착할 것이다. 그런데 얼굴이 엉망이었다.

아르세이아 황태자비는 공식적으로 요양차 영지의 별장을 다녀온 것으로 황태자가 손을 썼다. 그래서 황제랑 황후에게 혼날일은 없댔다.

"그냥, 아픈 걸로 하고 며칠 더 늦게 가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어. 그래."

황태자가 근처에 있을 땐 혹시나 들을까 에이린은 내게 존대를 했다. 소드마스터면 청각이 예민해진다나? 줸장 뒤에선 황제 욕도 한다던데, 말도 마음껏 못하냐!!

황태자가 아침에 팅팅 부은 내 꼴을 보고 피곤하냐고 걱정해 주길래 냅다 늦게 가자고 말했는데, 꼭 오늘 안에 환궁해야 한다고 했다. 오늘 밤에 정말 중요한 일정이 잡혀 있다나 뭐라나. 가서 그 일정만 끝내면 푹 자게 해주겠다며 조금만 참으라며 달랬다. 그러더니 제 손을 막 내 눈앞에 대었다.

내가 그의 손에 질겁해서 몸을 뒤로 빼자 황태자는 민망해했다. 그러게 왜 외간 여자의 얼굴에 막 손을 대냐고!! 안 그래도 들킬까 걱정되는데, 저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 들은 것 플러스 꼬시라는 소리까지 들어서 내 멘탈이 아그작 무너지고 있구먼!

아, 근데 쟤 무서운 애라 했는데 막 정색하면 안 되는 건가? 나한테 불의 정령으로 불꽃을 쏘면 어쩌지? 그래, 그냥 이참에 죽자.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눈앞의 남자도 뻘쭘해 했다. 결국 황태자는 뻗었던 손을 거둬 근처에 놓인 수건으로 방향을 바꿔 버렸다. 뭔데? 생각해보니 내 몸에 손 댄 게 찝찝했나? 왜 수건을 만져대는 건데?

"뀨우?"

쿠션에 앉아 있던 알비케라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뭐라는 건지 못 알아들었다.

한참이나 수건만 잡고 나가지 않는 불청객 때문에 내가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난감해 하는 순간 고맙게도 근위대장이 불러서 황태자는 나갔다.

"전하께 물의 정령의 가호라도 부탁하시지 그랬어요."

"왜?"

"물의 힘에 치유력 있는 거 몰라요?"

아~ 그래서 끝 스쳤을 때 시원했구나. 그렇구나. 그럼 설명을 하고 손을 대야지. 막 그 큰 손을 갖다 대니깐, 냉정하신 황태자 전하가 내 꼬라지 보기 싫다고 때리는 줄... 오해했구나. 아주 크게도 했네.

정색한 거 괜히 미안해졌다.

"이리 된 거 그냥 차가운 수건으로 가라앉혀봐요."

어? 저건 아까 황태자가 꼼지락거리던 건데, 더러워! 다른 수건 가져와. 내가 피곤함에 지쳐 눈짓으로 말하는데 에이린은 못 알아듣는다. 에효.

"그 수건 아까 황태자가 막 만진거야."

"어머! 다정도 하셔라."

아니 도대체 왜 다정이랑 연결 됨? 응? 에이린? 아 씨! 드럽게 그걸 왜 내 눈에 대는 건데!!!!!!!

"어랏?"

"정령의 힘으로 차갑게 얼린 수건이네요. 시원하시죠? 금방 부기가 가라앉을 거예요."

"어? 응. 우와, 정령으로 이런 게 가능한 거야?"

전혀 몰랐다. 정령의 모습도 못 봤는걸. 정령의 힘을 썼으면 그 뭔가 신비한 빛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내 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정령도 자연력일 텐데 왜 난 못느꼈던 거지?

"그러게요. 신기하죠?"

잠깐의 냉찜질로 원래의 청명한 눈을 되찾은 나는 무거운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로 환복했다. 옷이 날개랬는데... 왜 무겁냐. 날개는 뭔가 가벼운 거 아님?

그래도 예쁘네. 조금 작은가?

"끙. 나 갑갑해."

"흠. 전하의 가슴이 생각보다 크네요."

이동 중에는 외출복이라 여유가 있고 편한 옷이었는데 이건, 왜, 내가 가진 연회복보다 화려한 걸까? 그런데다가 심지어 코르셋까지 해야 하다니! 가슴 쪽은 위는 훤히 드러내놓고 바로 아래를 마구 조이니 숨 막혀 죽겠다.

"흠. 보기엔 훨씬 좋긴 하네요."

"보기 좋으려다 사람 잡겠어."

에이린은 왠지 신나 보였다. 뭐랄까? 인형놀이하느라 푹 빠진 듯? 나 꾸미는 게 그리 좋냐? 하긴 옛날에는 무지 좋아했었던 것 같았다.

에이린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내 치장에 힘썼다. 오랜만이긴 했다. 이렇게 함께 웃으며 있는 거. 3개월이란 시간이 짧은 듯했는데 길었구나.

에이린은 익숙한 솜씨로 굽슬거리는 굵은 적금발의 머릿결에 향유를 바르고 빗어 내리더니 우아하게 묶어 한쪽 옆으로 내렸다.

"낯설다. 금발 머리."

내 웅얼거림에 에이린도 멈칫했다. 후작부인이 내게 했던 짓들을 다 아는 유일한 친구. 에이린의 눈에 순식간에 슬픔이 차올랐다.

"렌의 머릿결은... 누구보다 탐스러운데... 그걸 숨겨야..."

"에이린, 울지 마. 나 괜찮아. 그건 나도 동의했던 일인걸."

에이린이 화려한 머리꽂이로 내 머리를 고정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젠 마음껏 네 매력을 드러낼 거야."

"그걸 왜 네가 결정해?"

"그야, 제가 아르세이아님의 직속 시녀니까요."

"피~ 그게 뭐야?"

솔직히 아침부터 초조하고 답답했다. 새벽에 일어나 황태자가 돌아오기 전 거대 독수리에게 납치되는 게 나을까, 물소 떼가 마구 정신없이 날뛰는 틈에 등에 실려가는게 좋을까 고민했었다. 결국 고민만 하고 아무것도 실행하지 못했지만...

들키지 않고 아르세이아가 돌아올 때, 그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아이의 자리를 잘 지켜낼 수 있을지, 그를 통해 죄 없는 내 가족들을 보호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런저런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황태자가 아침부터 나타나 더 정신이 사나웠었다.

하지만 앞으로 헤어졌던 내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러면 조금은 낫겠지 싶었다. 날 이해해주고, 걱정해주는 내 소중한 벗.

"에이린, 너까지 고생시켜 미안해. 그리고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에이린의 눈에 눈물이 살짝 차올랐다.

"안 돼!!! 울지 마! 수건에 냉기 남은 거 아님 울지 마! 네가 울면 나도 울 거니깐!"

결국 우리는 수건에 남은 냉기가 사라질 때까지 번갈아가며 눈물을 터뜨렸다. 차가운 황태자가 남겨준 고마운 물수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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