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내가 황태자비가 되어야 한다고?
2018.04.03.
내 이름은 세이렌, 비스 후작가의 숨겨진 장녀이자 서녀였다. 그제까지는.
"황태자비 전하, 긴장하지 마셔요."
나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황태자비의 시녀로 입궁한 에이린이 옆에서 작게 속삭여 주었다. 에이린의 눈에는 나보다 더한 긴장이 어려있었다.
하지만 차갑게 떨리다 종내 굳어버린 내 손을 잡아주는 것은 에이린이었다. 살짝 힘을 주는 손에서 온기가 전달되었다. 늘 내 편이었던 에이린의 손길에 내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직, 세이에게는 연락이 없는 거야? 내일이면 황궁에 도착할 텐데, 어떡하지?"
떨리는 내 목소리에 에이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여리고 착한 내 친구의 입에서 처음 듣는 막말이 작게 읊조려졌다.
"아르세이아 이 망할 년. 대책 없이 이게 무슨 짓이야 진짜!"
에이린의 눈에 진심으로 짜증이 비쳤다. 그래놓고 네가 왜 놀라?
"근처에 아무도 없어. 우리 마음껏 욕하자."
불쌍한 에이린, 싫다는 거 억지로 황궁으로 끌려가더니 고생이 심했구나.
아르세이아 비스, 아니 이제는 아르세이아 스텔라 데피니토르. 대륙의 동쪽을 차지한 태양의 제국, 데피니토르의 고귀한 황태자비이자 나의 이복동생이 만든 이 어마 무시한 사건에 나의 심장은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었다.
아르세이아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후작 부부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대신 내세웠는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으아아아! 내 꿈은 그저. 그저 지금처럼 영지 소유의 별장에 딸린 목장에서 순하고 귀여운 동물들과 함께 텃밭을 가꾸며 조용히 사는 것이었는데...
사생아인 것을 들키지 말고 끝까지 숨어 살았어야 했었다. 그래. 내 인생은 그날 이후부터 이렇게 뒤틀린 거겠지.
"만약 네가 아르세이아가 아닌 것을 들켜 고귀한 내 따님께 해를 입힌다면 네 어미와 네 친척들도 해를 입을 것이다!!"
나를 후작의 자녀로 인지해주지도 않는 무서운 후작부인의 협박에 항의할 틈도 없이 끌려왔다. 항의해 봤자 결과가 바뀌진 않았겠지만.
진짜 아르세이아는 무슨 생각으로 황궁으로 시집간 지 겨우 석달도 못 채우고 가출한 거야?!
하긴 걔는 어릴 때부터 후작성에서 도망쳐 내가 살던 저택으로 날 보러 왔었다. 겨우 반년 차이 밖에 안 나는데도 불구하고 언니라고 부르며 어릴 땐 졸졸 따라다녔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순수하게 빙긋 웃으며 나 좋다고 하더니 이렇게 내 뒤통수를 후려질 줄이야!
"비 전하, 힘드신 건 알지만 최선을 다해 찾고 있으니 조금만 버티세요. 아셨죠?"
"응, 에이린."
그래도 에이린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르세이아가 황궁에 에이린을 시녀로 데려가겠다 할 때는 무지 밉고 속상했었다. 걔는 내게서 아버지도, 친구도 다 가져가버렸지. 그리고...
에잇!!!!!! 그랬으면 잘 살아야 할 거 아냐!!! 하아 답답해. 내일 아침이면 게이트를 통과해 황궁에 입성할 텐데 그때까지 못 찾음 어쩌지??
"끼잉."
앗!!
"알비, 미안해. 산책 가야 하는데."
똑똑한 내 애완견 알비케라는 배변 훈련이 잘 돼서 꼭 밖에서만 볼일을 보는데 마차로 이동하느라 미처 못 나갔다. 날, 아니 내 동생을 찾으러 직접 온 황태자는 알비케라의 동행을 다행히 막지 않았다. 그래서 데려왔는데 얘도 고생이네.
"에이린, 알비케라랑 산책 가도 될까?"
"네. 비 전하, 준비시킬게요."
되도록이면 황태자도 다른 사람도 접촉하지 않으려 내 막사 안에서 칩거했지만, 알비케라의 산책은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었다. 내 귀여운 하얀 복슬강아지는 내 꽁무니만 따라다니니까.
다행히 지금은 황태자는 없었다. 그는 이동 중 밤마다 어딜 간다고 했다. 제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니깐 이해했다. 아니 정말 대환영이었다. 안 마주치는게 상책이야.
괜히 만났다가 내 정체를 들키면 곤란했다.
"알비. 가자!"
"멍멍"
자식, 그리 좋은가? 꼬리 흔드는 것 봐. 진짜 귀여워. 이쁜 내 새끼.
막사 주변은 근위 기사들로 가득했다. 황태자비가 또 도망칠까 철통 경계였다. 에효. 황궁에 가면 혼나는 거 아닌가 몰라. 제국 역사상 황궁에서 도망친 황태자비는 아르세이아가 처음일 것이다.
나가기 전에 에이린은 전신 거울을 보며 나를 다시 점검했다.
평소 입던 소박한 옷과 다른 화려한 자수가 놓인 드레스 자락. 촘촘하게 박힌 에메랄드 몇 개만 떼서 팔아도 내 새끼들 건초랑 신선한 야채를 몇 달 치는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없어도 토미가 아이들을 잘 돌보겠지?
에이린은 탄력 있게 웨이브 진 내 머리를 단정하게 땋아 차분히 묶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완벽한 황태자비 아르세이아였다.
새끼손가락 한마디 정도 차이나는 키. 귓불에 점. 약간 더 푸른 눈동자, 조금 더 밝은 적금발. 미세한 차이가 아니라면 아르세이아와 나는 쌍둥이라 할 만큼 닮았다.
아르세이아의 쌍둥이 혈육은 따로 있었지만.
이렇게 닮은 외모 때문에 이미 그녀의 대역은 수도 없이 해보았다. 가기 싫은 연회나 행사 때마다 그녀는 날 내보냈다. 가정교육으로 받는 수업도 나로 바꿔치기 한 적이 많았다.
물론 후작부인이 눈치챈 날에는 나를 쥐잡듯이 잡았지. 그... 무지막지한 채찍으로.
한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거울 속의 나를 보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일단 내 동생을 위해 나는 아직은 황태자비인 척해야 하니까. 다행히 아르세이아를 대신한 수업들을 통해 어느 정도는 예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알비케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에이린이 마법등을 들고 내 뒤를 따랐다. 내 막사와 주변 막사는 대부분 마법등이 켜져 있었다.
평소의 나라면 생각도 못했을 일이었다. 나에게 밤 산책은 만월의 밤에나 가능하던 일이었다. 고마운 마법등.
"에이린 고마워."
"별말씀을."
나에 대한 대부분을 알고 있는 에이린이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이런 배려는 에이린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행렬에 포함된 이들 중 날 시중드는 것은 에이린 뿐이었다. 에이린은 언제나처럼 내 편이라는 신뢰 가득한 눈빛을 다정히 보내주었다.
알비케라와 셋이서 나가자 건장한 기사들이 내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씁. 부담스러워.
황태자의 근위 기사면 다들 작위도 있을 텐데... 소노르 자작가의 수치라 불리는 내게 고개 숙이는 모습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좋은 밤이에요. 경들."
우아하고 고상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자 저 근육 덩어리들이 얼굴을 붉혔다. 나도 우아한 척하는 거 힘든데 니들이 얼굴까지 붉히면 내가 더 부담스럽다고!!
들판으로 난 오솔길로 향하자 내 옆으로 에이린이 붙어 섰다. 뒤로 간격을 두고 호위 기사들이 넷이나 따라붙었다.
강아지 응가 하러 가는데 사람이 나 포함 6명이나 따라가야 할 일인가? 끙.
알비케라가 주변을 탐색하듯 킁킁거렸다. 그리고 뭔가를 발견했는지 으르렁거리며 앞발로 툭 치더니 그걸 멀리 차버렸다.
역시 내 새끼. 주인이 벌레를 싫어한다고 멀리 쫓아냈다. 내가 원치 않는데도 벌레들한테까지 사랑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보니 알비가 날 위해 움직여줄 때가 많았다.
곧 알비케라는 자리를 잡고 기합을 넣더니 작고 길쭉한 그것을 내보냈다. 갓 나온 그것은 뜨끈하게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으이구, 우리 알비케라 잘했어요!"
뒤에서 호위들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즈은하. 그른 말투는 쪼옴!"
에이린이 이 악물고 내뱉는 말에 그저 웃었다.
힝. 미안해, 에이린. 조심할게. 그런데 네 인광이 마법등보다 더 밝은 것 같아.
팟!
그런데 갑자기 마법등이 꺼졌다.
"어머! 마력석에 이상이 있나?"
에이린이 어둠 속에서 마구 마법등을 두드렸는데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아, 에이린. 기사님들도 등을 가져왔네. 그분들께...!"
불!!!!
"그... 그러니까..."
'이 저주받은 년, 괴물!'
'내가 널... 낳는 게 아니었어!'
'너 같은 것은 우리 비스 가문의 수치다!"
싫어. 싫어!!!! 뜨거워.
"으아악!!!!!!"
나도 태어나기 싫었어. 이런 삶 따위 바란 적도 없다고!! 왜 멋대로 낳고, 멋대로 숨겨놓고 왜!!
'넌 마녀의 자식이야.'
'괴물이니까 죽여야 해'
'네가 싫어. 넌 내 불행의 원인이야.'
"싫어. 듣기 싫어."
내 귀를 막으면 안 들릴 거야! 아니 내가 싫다잖아. 그냥 나 같은 거 없어지면 되잖아. 나 같은 거 없어지면 돼!
"흐..흑."
매캐한 냄새, 숨을... 못 쉬겠어. 싫어. 무서워. 사실은 무섭다고. 누가 나 좀. 제발. 살려줘. 뜨거워. 불에 타 죽기 싫어. 연기가 입에 들어오잖아. 숨을... 숨을.
내 입을 틀어 막으려고 손을 들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질 않았다. 뭐지? 왜 안 움직여?
"세이, 괜찮아. 자. 쉬이. 나처럼 해봐."
누구? 누구야? 누가 내 등을 토닥이는 거야?
내 팔을 움직이지 않도록 꽉 끌어 안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따뜻한 온기.
아... 넌... 내... 왕자님?
기억의 한켠에 숨겨두었던 내 유일한 온기. 나의 첫 사람 친구. 검은 머리의. 너야? 진짜로 다시 날 찾아와 준거야? 나 구하러 온 거야?
보고 싶었어. 왜 이제야 온 거야. 허... 헉... 수... 숨을 못 쉬겠어.
"안되겠군. 위험해. 실례할게."
다정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지며 내 입에 말캉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리고 내 입안으로 청량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흐읍."
"자자, 얌전히 나랑 같이 숨 쉬어 보는 거야."
두 번째로 들어온 바람은 뜨거움에 몸서리쳤던 내 몸을 시원히 적셔줬다.
세 번째에는 차갑게 굳어버린 내 손발이 느낄만큼 따뜻하고 다정했다.
마지막 네 번째에는 단단하고 의지가 되었다. 그리고 점점 내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하아, 하아."
아... 여긴... 어디였더라? 손바닥이 간질간질해.
"알비케라 고마워. 네가... 구해준 거야?"
겨우 눈을 떠서 내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작고 하얀 생명체를 보며 미소 지어줬다. 힘이 없네.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아이고야.
"내 비는, 그댈 구해준 나는 안 보이나 보군."
응? 누구지? 내가 어디에 기대앉은 거지?? 이 청남색 대걸레, 아니 대걸레로 쓰기엔 바단결 같은 이 털은 뭐야? 비가 뭐...?
"화... 황태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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