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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한밤의 디저트 (24/24)

외전 3. 한밤의 디저트

프리츠는 한적한 복도를 걸어가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황제의 집무실로 통하는 이 복도는 오늘따라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집무실에 딸린 대기실에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한 청년이 그를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달려 나왔다.

프리츠는 그에게 몸을 돌렸다.

이 청년은 3년 전, 아카데미에서의 뛰어난 성적과 훌륭한 배경을 바탕으로 어린 나이에 황제의 보좌관이 되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거의 10살은 더 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건 몹시 힘든 일일 것이다.

“라니스, 다른 대신들은 어디 있지?”

프리츠가 기억하기로 오늘은 정무 보고가 있는 날이었다.

너무 늦게 온 건가?

평소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라니스가 지친 낯으로 대답했다.

“다른 대신들께서는 갑작스러운 병환 때문에 급한 일정만 끝내고 돌아가셨습니다.”

프리츠는 그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대신들이 전부 다 아프다고?”

그들이 프리츠가 알지 못하게 몰래 모임을 하면서 이상한 음식이라도 나눠 먹은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모두 같은 날 몸의 이상이 생길 리가 있나 싶었다.

지난 삼 년간 프리츠는 황제의 대신들과 꽤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연달아 이어진 사건으로 불만을 가졌던 귀족들이 대거 사라진 덕분이기도 했다.

남아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별다른 세력이 없었으며 황제에게 순종적이었다.

프리츠는 그들과 새롭게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처음에는 황후의 가문을 경계하던 대신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그에게 호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가 약제사인 그레텔과 결혼한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레텔과의 결혼은 프리츠를 그의 아버지와 달리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온건한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가 공작가의 세력을 강화하고 싶었다면 유력한 가문의 레이디를 신부로 원했을 테니까.

귀족들은 그를 미련하게 보는 한편, 젊은 새 공작에 대한 경계심을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라니스는 급히 부정했다.

“아닙니다. 타이로스 백작께선 어린 따님의 급한 병환으로…… 간단한 보고만 마치고 돌아가셨습니다.”

“아아, 그렇군.”

가족들의 병은 황제의 동정심과 이해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대신들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문제가 생겼다거나, 어린 자식이 갑자기 아프다고 하면 황제는 꽤 관대하게 휴가를 허락했다.

반면 당사자가 아프다고 하면 그런 관대함을 기대할 수 없었다.

프리츠는 서류를 들고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시종이 나서기 전에 라니스가 황급히 문을 열어줬다.

그리고 집무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을 때, 프리츠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멈춰 섰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와 찢어진 서류장들이었다.

카이젠은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찻잔과 티포트가 보였다.

황제는 서류 더미를 옆에 밀어놓고 홍차를 술처럼 들이켜고 있었다.

카이젠은 몹시 짜증 나고 분노한 모습이었다.

프리츠는 그가 찻잔에 술을 담아서 먹는 건가 의심스러웠다.

가까이 다가가도 술 냄새가 안 나는 걸 보면 차가 맞는 것 같긴 하지만.

“폐하, 이게 무슨……. 아니, 폐하를 뵙습니다.”

카이젠은 묵묵히 빈 찻잔을 내려놓다가 시선을 들었다.

“아, 자네로군.”

“폐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카이젠은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밀어놓고 대답했다.

“아스텔과 다퉜어.”

“……그러셨군요.”

그럴 것 같긴 했다.

아스텔이 아니면 그를 이렇게 심란하게 만들지 못할 테니까.

프리츠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마 다른 대신들은 다 도망가고 자신만 늦게 와서 도망치지 못한 모양이다.

라니스가 그를 보고 무척 반가워한 것도 이해가 갔다.

황후의 오빠니까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프리츠는 예의상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로 다투셨습니까?”

“별일 아니야.”

카이젠은 짜증스럽게 대답하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얘기를 들어주겠나? 문제에 대해 논의할 사람이 없군.”

프리츠는 여동생 부부의 관계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럼 외조부님께 말씀드려 보시면…….”

“후작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아스텔의 외조부는 종종 카이젠을 위로해 주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언제나 아스텔의 편이었다.

심지어 그 노인은 카이젠이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얘기를 들어줘. 큰 문제는 아니니까.”

“……예, 폐하.”

프리츠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늦게 출근한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린 아들을 황후궁에 보내놓고 그레텔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느라 저택에서 늦게 나오고 말았다.

문제의 시작은 어젯밤이었다.

그날 카이젠은 아스텔이 오래된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치우고 있어요.”

“내가 도와줄까?”

카이젠은 아스텔이 들고 있는 서류 더미를 받아주며 물었다.

“피곤하실 텐데 그러지 마세요. 못하면 내일 다시 하면 돼요.”

카이젠은 다른 한 손으로 아스텔을 끌어안았다.

아이들은 이미 저녁을 먹고 자러 갔고 두 사람만의 시간이었다.

따뜻한 애정이 감도는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그 서류가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카이젠은 그게 뭔지 한눈에 알아봤다.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작성했던 계약서였다.

서랍장에서 나온 서류 더미 속에 그가 직접 서명했던 그 계약서가 끼어 있었다.

“아, 그게 거기 있었군요.”

아스텔은 무심한 태도로 그 서류를 꺼냈다.

카이젠은 기가 막혀서 다시 물었다.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잊어버렸어요.”

아스텔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 서류를 꺼내서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그녀는 카이젠의 불쾌한 표정을 보고 뒤늦게 사과했다.

“진작에 없애버린 줄 알았는데 이건 복사본인 것 같기도 하네요. 이제라도 발견했으니 그냥 태워버릴게요.”

“……그래.”

복사본까지 만들어뒀다니 철저하기도 하군.

카이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는 아스텔이 그걸 없애버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틀렸다. 아스텔은 아직도 그걸 갖고 있었고 계약서에는 이혼까지 명시된 날짜가 아직 남아 있었다.

물론 아스텔이 이제 와서 이혼을 원할 리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그때까지만 해도 카이젠은 불쾌감을 억누르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아스텔이 바빠서 서류를 없애는 걸 잊었을 테니까.

그러나 불쾌한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직접적인 다툼은 오늘 아침에 찾아왔다.

문제의 원인은 황녀였다.

이제 두 살 된 그의 딸 에스텔라.

어린 황녀 에스텔라는 천사 같았다.

젖살로 부푼 통통한 우윳빛 뺨, 루비 같은 붉은 눈,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미소.

특히 외모는 어느 모로 보나 아스텔의 복제품이었다.

붉은 눈만 제외하면 아스텔과 똑같았다.

황녀는 어린 시절의 아스텔을 생각나게 했다.

어리석게도 그가 놓쳐버린 귀여운 소녀 시절의 아스텔을.

그런 마음이 황녀에 대한 그의 애정을 더욱 증폭시켰다.

“폐하께서는 황녀와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십니다.”

아스텔은 담담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내 딸과 시간을 보내는 게 뭐가 문제야?”

“해 질 무렵까지 떨어지지 않으시니니까 문제죠.”

카이젠은 그게 뭐가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낮에는 황녀와 시간을 보내고 저녁 이후엔 온전히 아스텔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황녀를 너무 응석받이로 만들고 계시잖아요.”

“…….”

카이젠도 그 얘기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얼마 전, 어린 황녀는 동화책에 나오는 배를 보면서 그에게 칭얼거렸다.

“아빠, 나도 바다에 가서 배를 타고 싶어.”

“안 된다. 너무 위험해.”

단호한 대답에 황녀는 슬픈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히잉…… 배…….”

조그만 분홍색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커다란 눈에 물기가 가득 고였다.

카이젠은 어린 딸의 눈물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대신 여기서 배를 타게 해주마. 그러면 되겠지?”

카이젠은 빈 정원에 큰 호수를 만들게 했다.

전전대 황제의 장미 정원은 순식간에 호수로 변했다.

카이젠은 그 호수를 아주 얕은 깊이로 만들었다.

만에 하나 물에 빠지더라도 위험하지 않도록.

그리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작은 나룻배를 만들어줬다.

“배 예뻐!”

에스텔라는 조그만 손으로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라니스는 완성된 호수와 배를 보면서 해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 제국이…… 부유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광산도 많고…….”

물론 감히 황제의 행동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이젠은 딸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늘, 에스텔라는 아침부터 정원에서 지크와 놀고 있었다.

지크, 지크프리트 폰 레스턴은 프리츠와 그레텔의 아들이었다.

에스텔라는 동갑내기 사촌을 무척 좋아했다.

둘은 종종 황후궁에서 밤늦도록 함께 놀았다.

아스텔은 어제 지크프리트를 황후궁에 재웠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황제궁으로 돌아가려던 카이젠은 어린 딸에게 다가갔다.

에스텔라는 시녀들과 함께 정원의 꽃으로 꽃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는 에스텔라는 천사같이 귀여웠다.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에스텔라의 옆에 있던 지크가 꽃목걸이를 들고 아장아장 걸어왔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꽃 목걸이를 에스텔라에게 씌워주었다.

“갸아! 예뻐!”

에스텔라는 두 팔로 지크를 끌어안았다.

“지크 좋아!”

그 순간 카이젠은 성큼성큼 걸어가서 두 손으로 황녀를 들어 올렸다.

“아빠?”

황녀를 빼앗긴 지크는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카이젠을 올려다보다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으앙!”

아스텔은 조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러고는 카이젠에게 화를 냈다.

“왜 아이를 괴롭히시는 거예요?”

“괴롭힌 게 아냐.”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아직도 울고 있었다.

“공자님. 쿠키를 드릴게요. 울지 마세요.”

한나가 담담한 얼굴로 그 애를 달랬다.

“저 애와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 같아. 우리 딸에게 다른 친구를 만들어주는 게 좋겠어.”

카이젠의 말을 듣고 아스텔은 어이없다는 듯이 반박했다.

“에스텔라는 지크를 좋아해요. 지크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요? 둘은 좋은 친구인데.”

“아무리 친구여도 적절한 선은 지켜야지.”

“지크프리트는 그냥 친구도 아니고 사촌이구요.”

제국에서는 사촌 간에도 혼인할 수 있다.

과거의 명문 귀족들은 대부분 가까운 친인척끼리 결혼했다.

사실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에스텔라와 지크는 아직 둘 다 어렸으니까.

아스텔은 언제나 그에게 잔소리를 했고 카이젠은 그걸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때는 유독 기분이 나빴다.

그래, 분명 그 바보 같은 서류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내게 비판적이지.”

카이젠은 무뚝뚝한 어조로 그렇게 반박했다.

아스텔은 당황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되받아쳤다.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시니까요.”

결국 그게 도화선이 되어 사소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 * *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프리츠는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결국…… 저희 지크 때문에 다투셨단 말씀이십니까?”

열심히 들어줬지만 정말 쓸데없는 얘기였다.

카이젠이 왜 외조부에게 상담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소리를 해봤자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은 카이젠을 한심하게 보기만 할 것이다.

제대로 된 조언도 안 해줄 테고.

“요점이 그게 아니잖아.”

카이젠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아스텔은 내가 뭘 하든 비판적이야.”

그건 언제나 이상한 짓만 하니까 그런 게 아닌가.

하지만 프리츠는 그런 말을 입밖에 낼 만큼 무례하진 않았다.

목숨도 하나밖에 없었고.

물론 프리츠는 아스텔의 하나뿐인 친오빠였기 때문에 카이젠은 어지간해서는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나면 그런 친족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검부터 휘두를 가능성도 있었다.

“다툴 만한 일이잖아. 자네 같으면 화가 안 나겠어?”

“……글쎄요.”

프리츠는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

카이젠은 뒤늦게 프리츠를 올려다봤다.

프리츠는 이런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카이젠은 공작가에 자주 방문하지 않았지만 황녀가 지크프리트의 방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한번 데려가 준 적이 있었다.

그날 카이젠은 그레텔의 온실에서 프리츠를 만났다.

그는 흙투성이가 된 바지를 입은 채 이상한 풀을 양손에 들고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휴일이라 제 아내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왜……?’

카이젠이 멍하니 묻자 프리츠는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을 닦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덕분에 그의 단정한 얼굴에도 흙이 묻었다.

‘그레텔이 도와달라고 해서요.’

프리츠는 분명히 공작 부인과 다툰 적이 없을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녀의 의견에 반박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프리츠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나신 겁니까?”

“그 서류.”

카이젠은 솔직하게 털어놨다.

“아스텔은 왜 아직도 그걸 가지고 있었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아, 결국 제일 중요한 문제는 그거였군요.”

카이젠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프리츠는 그게 긍정의 표시라는 걸 알고 있었다.

프리츠는 두 사람이 아직도 이런 소소한 일로 다툰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와 그레텔은 다투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가지 않았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폐하. 황후께서는 폐하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셨습니다.”

그것보다 더한 애정의 증거가 있냐고 프리츠는 조용히 반박했다.

“그건 그렇지.”

둘이 함께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돌아보면 아스텔의 애정을 의심할 수 없었다.

아스텔은 황태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그의 목숨을 구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카이젠을 구해준 것이다.

“황후께서는 아마 그 서류가 남아 있다는 것도 잊으셨겠지요.”

그 정도로 아스텔에게 그 일은 잊혀진 과거가 된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카이젠의 얼굴에도 후회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카이젠은 프리츠의 말을 듣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프리츠의 침착하고 나직한 목소리는 아스텔의 차분한 목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아스텔과의 과거를 기억하는 순간, 그의 분노와 짜증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불꽃이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식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굴었군.”

프리츠는 속으로 동의했다.

예, 언제나 그렇지요.

“신경과민이었던 것 같아.”

프리츠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사과를 해야겠지.”

이번에는 프리츠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젠은 다시 복잡한 시선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어린 조카를 울리고 짜증을 내다가 나가버렸으니 아스텔은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속이 탔다.

카이젠은 다시 티포트로 손을 옮겼다.

하지만 찻주전자는 텅 비어 있었다.

“차가 다 떨어졌군.”

“폐하, 왜 차를 마시고 계십니까?”

프리츠는 처음에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카이젠이 왜 홍차를 술처럼 마시고 있는지 의아했다.

카이젠은 잔뜩 취한 취객처럼 티포트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정무를 보는 시간에 술을 마실 수는 없잖아.”

원한다면 술이든 뭐든 마실 수 있지만 아스텔이 몹시 싫어할 것이다.

일하던 중에 술을 먹었다는 걸 알면 아스텔은 그를 염려할 것이다.

정무 시간인 걸 제외하고도 아스텔은 그가 술에 취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린 에스텔라도 술 냄새를 몹시 싫어했다.

덕분에 카이젠은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사과하는 게 좋을까? 자네는 어떤 방식으로 사과하지?”

프리츠는 그가 사과할 필요가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아스텔은 아마 카이젠이 이렇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아스텔의 시선에서 보면 카이젠은 갑자기 어린애한테 짜증을 내다가 그냥 나가버렸을 뿐이다.

아스텔은 ‘왜 저런대?’ 하고 한심하게 보다가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리츠는 열심히 고민하는 척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저는 아내가 좋아하는 꽃이나 보석을 선물할 것 같습니다.”

카이젠은 이미 아스텔을 위해 보석으로 온실을 만들고 꽃을 채워 넣었다.

그는 황후궁의 옆에 새 온실을 지을 곳이 있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황후께서는 그런 것보다 다른 방식을 더 좋아하실지도 모르겠군요.”

“다른 방식이라고?”

“폐하께서는 언제나 값비싼 보석이나 건축물…… 을 선물하셨으니까요. 매번 그런 것을 받다 보면 감흥이 사라지는 법이지요.”

“그렇겠지.”

그는 이미 아스텔을 위해 황후궁을 증축하고, 황녀의 궁을 새로 짓고, 보석으로 온실을 만들었다.

이제 아스텔을 감동시키려면 수도 옆에 새 황궁을 지어주는 길밖에 없을 듯했다.

“어떤 사람들은…….”

프리츠는 자신을 열렬하게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값비싼 선물보다 정성을 담아서 손수 만든 선물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직접 만든 선물을 주라고?”

카이젠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뭔가를 직접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테오르와 눈으로 공을 만들거나 눈사람을 만든 적이 있긴 한데, 아스텔한테 그런 걸 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여름이었다.

프리츠는 순수하고 동정심 가득한 얼굴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그는 지극히 무해한 모습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심술궂은 속셈을 갖고 있었다.

프리츠는 지크프리트의 아버지였고, 아들을 울린 황제에게 가볍게나마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보석으로 공예품을 만들거나 종이로 뭔가를 만드는 것도 좋겠지요.”

* * *

하루 종일 시끌벅적한 황궁은 밤이 되자 고요한 적막에 잠겼다.

아이들은 모두 자러 갔지만 아스텔은 잠을 자지 않았고 드레스도 벗지 못했다.

카이젠이 한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였다.

‘또 화가 난 거겠지.’

카이젠은 낮에 있었던 짧은 언쟁 이후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그 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보내지 않았다.

시녀들은 아스텔의 눈치를 보며 평소보다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당혹스러웠다.

아스텔은 오후에 그레텔에게 직접 사과했다.

아이를 데리러 온 그레텔은 아스텔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며 물었다.

“우리 지크가 황녀님께 버릇없이 굴었나요?”

그녀는 아스텔이 지크를 감싸주려고 앞뒤 장면을 생략한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아뇨. 지크는 정말 착하고 얌전했어요. 다만…….”

카이젠이 버릇없이 굴었을 뿐이지.

아스텔은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아이를 울린 것에 대해서만 사과했다.

그레텔은 활달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신경 쓰지 마세요. 별로 큰일도 아니네요. 지크는 그냥 황녀님이 사라져서 슬펐던 것뿐이잖아요. 애들은 금방 잊어버려요.”

소탈한 성격의 그레텔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빠인 프리츠도 그렇게 이해해 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가 이 사실을 알면 당분간 지크를 황후궁에 보내지 않을 것 같았다.

저녁 무렵 그녀를 찾아온 테오르도 황제와의 언쟁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크 때문에 화를 내셨다면서요?”

8살이 된 테오르는 몰라보게 의젓해졌다.

어른들 앞에서도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고, 검술도 공부도 그 나이대의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아스텔은 아들이 또래에 비해 꽤 조숙하고 생각이 깊다는 걸 느꼈다.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은 매일같이 테오르가 아스텔을 닮아서 그런 거라고 주장했다.

아스텔은 대놓고 동의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테오르는 어린 시절의 카이젠과는 많이 달랐다.

테오르는 어린 여동생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끌어안았다.

에스텔라는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었다.

“아버지가 왜 화를 내셨을까요? 에스텔라는 지크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아요.”

에스텔라는 흥얼거리며 아직도 혼자 꽃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다.

테오르는 그런 여동생을 꼭 끌어안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스텔라는 지크보다 저를 더 좋아하죠.”

황녀는 작은 손으로 만들고 있던 꽃목걸이를 주섬주섬 묶었다.

그러고는 그걸 테오르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응, 나는 테오 오빠가 좋아!”

“컹컹.”

블린이 어린 에스텔라를 보고 낮게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황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시녀들과 함께 만든 작은 꽃목걸이를 가져다가 블린의 목에도 걸어줬다.

“블린도 좋아!”

블린이 꼬리를 빠르게 흔들며 에스텔라의 뺨을 핥았다.

에스텔라는 까르르 웃으며 블린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확실히 에스텔라의 좋아한다는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게 분명했다.

블린과 노는 황녀를 보고 있는데 테오르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테오르는 예전처럼 부드럽게 그녀의 품에 안겼다.

아스텔은 아들을 끌어안았다.

테오르의 작은 몸에서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익숙한 온기와 체향이 느껴졌다.

이제 의젓해진 테오르는 아스텔과 외조부에게만 어리광을 부렸다.

언젠가는 그것도 사라지겠지.

아이가 의젓하게 자라는 건 기쁜 일인데도 한편으로는 너무 빨리 자라는 게 서운하기도 했다.

“기운 내세요, 어머니.”

테오르는 아스텔을 위로했다.

“고맙구나. 하지만 우리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괜히 아이가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서 아스텔은 심란해졌다.

하지만 테오르는 작게 웃으며 아스텔의 목을 끌어안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니. 평소처럼 아버지가 먼저 사과하시겠죠.”

“…….”

아스텔은 어린 아들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테오르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공부하러 가버렸지만, 아스텔은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차갑게 말한 건가.’

카이젠은 어제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서류를 발견한 게 문제였다.

‘그걸 진작에 없애버린 줄 알았는데.’

독살 사건과 반역을 수습하는 동안 너무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없애버렸다고 생각한 서류가 그대로 남아 있고.

사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스텔은 만약을 대비해서 계약서의 사본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없앴다고 생각한 건 사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걸 카이젠이 발견하게 만든 건 아스텔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테오르의 말은 아스텔이 지난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확실히…… 언제나 그가 먼저 사과했지.’

다시 애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 뒤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똑같았다.

늘 카이젠이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뭔가를 선물하고, 먼저 사과하고, 먼저 용서를 빌었다.

재혼한 초기에는 카이젠이 먼저 화를 내고 성급하게 굴다가 사과하곤 했지만.

아스텔은 문득 자신이 그를 너무 냉정하게 대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크의 일은 명백히 카이젠의 과민반응이었지만, 서류는 그가 서운할 만한 일이었다.

그녀가 언제나 비판만 한다고 말하던 카이젠의 말도 기억났다.

분명 아스텔은 대부분 그가 하는 일에 비판적이었다.

과도한 선물을 주거나 사치스러운 건축물을 짓는 것을 매번 환영할 수는 없지만.

카이젠이 그런 짓을 하는 건 언제나 아스텔을 위해서였다.

좀 더…… 다정하게 대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이번에는 먼저 사과할까?’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어떻게 사과하지?’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할 사람을 찾았다.

외조부는 사정을 대충 듣고 무심하게 말했다.

“글쎄, 내가 보기엔 그냥 미안하다고 말만 해도 될 것 같구나. 한마디만 해도 황제는 몹시 감격할 거다.”

아스텔은 침묵했다.

가벼운 사과만으로도 카이젠이 감동할 만큼 자신이 언제나 그에게 쌀쌀맞게 굴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스텔과 함께 온 어린 황녀가 꽃으로 만든 긴 목걸이를 들고 아장아장 걸어갔다.

황녀는 두 손을 높이 들고 꽃목걸이를 할아버지에게 걸어주었다.

에스텔라가 목걸이를 너무 길게 만들어서 두 번, 세 번 감아줘야 할 정도였다.

“나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

후작은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어린 황녀를 안아줬다.

아스텔은 카이젠이 이걸 못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조부는 에스텔라를 다정하게 어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냥 뭐라도 준비해서 줘. 황제는 네가 만든 샌드위치만 줘도 기뻐할 게야.”

“샌드위치요?”

아스텔은 동부의 시골에서 카이젠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서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은 세 사람의 즐거운 추억이었다.

당시 카이젠은 아스텔이 만들어주는 거라면 뭐든 소중하게 먹을 거라고 했었다.

‘음식이라.’

외조부는 그냥 아무 말이나 대충 해준 것 같았지만 아스텔은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그녀는 카이젠에게 선물을 줄 수 없었다.

카이젠은 제국의 황제였고 필요한 건 뭐든지 다 갖고 있었다.

아스텔이 돈을 들여서 선물을 산다고 해도 카이젠은 언제나 그녀가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걸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면 직접 뭔가를 만들어주는 건 확실히 좋은 생각인 듯했다.

아스텔은 실제로도 음식을 만들어본 경험이 많았다. 간단한 메뉴는 언제든지 능숙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한나, 잠시 부엌을 비워줘.”

다행히 황후궁에는 공식적인 주방 외에도 작은 주방이 딸려 있었다.

잡일을 하는 하녀들의 식사를 만드는 곳이었다.

아스텔은 시녀들을 물리고 그곳으로 가서 재빨리 몇 가지 간단한 음식을 만들었다.

‘어차피 저녁은 먹을 테니까.’

간단한 디저트류를 준비하기로 했다.

과일 타르트와 간단한 쿠키, 와인을 넣고 졸인 배였다.

고맙게도 중요한 재료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조린 과일이나 잼, 타르트지도 쓰다 남은 게 있어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다 만들어놓고 보니까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디저트 트레이가 되었다.

황금빛 시럽이 감도는 달달한 딸기 타르트.

버터향이 고소하게 풍기는 쿠키.

달콤한 과즙을 머금은 새콤달콤한 배 절임.

디저트와 어울리는 향긋한 와인도 곁들였다.

“이걸 다 만드시려면 힘드셨을 텐데…… 미리 말씀하셨으면 제가 도와드렸을 텐데요.”

한나는 아스텔이 완성한 디저트를 그릇에 옮겨 담으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직접 하고 싶었어.”

“…….”

한나는 다소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굳이 카이젠에 대해 안 좋게 말하지는 않았다.

아스텔은 아이들과 저녁 식사를 끝낸 뒤 침실의 테이블 안에 디저트를 차려놓았다.

아기자기한 디저트는 예쁜 그릇에 담아 준비하고 와인잔과 향긋한 꽃이 담긴 작은 화병도 준비했다.

그렇게 준비해놓고 기다렸지만 카이젠은 오지 않았다.

날이 저물고 잠잘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안 왔다.

‘설마 안 올 생각인가?’

평소에는 방문하지 않을 거면 미리 시종을 보내곤 했는데.

아스텔이 인내심을 잃고 황제궁에 연락을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한나가 문을 열고 카이젠의 도착을 알렸다.

그녀의 뒤로 카이젠이 보였다.

“아스텔.”

“폐하.”

한참 동안 그를 기다리던 아스텔은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카이젠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한나는 그의 등을 힐끔 보고는 담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았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지금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아스텔은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종이 상자를 발견했다.

“낮에 일은 미안해. 내가 괜히 화를 냈어.”

“네?”

카이젠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중에 공작 부인과 지크에게도 사과할게.”

아침에는 그렇게 화를 내고 가버리더니.

그동안 마음을 바꾸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 모양이다.

‘이번에도 그가 먼저 사과하는군.’

아스텔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서류는 태워 버렸어요.”

카이젠은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던 거죠? 죄송해요. 진작에 없애버릴 걸 그랬어요.”

“아냐.”

카이젠은 두 사람이 그걸 작성했던 순간을 기억했다.

당시엔 아스텔이 그런 계약을 요구할 만도 했다.

자신은 테오르를 빌미로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있었으니까.

그때의 일들을 생각하면 아스텔이 그의 곁에 머물러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했다.

아스텔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했다.

카이젠은 테이블에 있는 음식과 와인잔을 보고 놀랐다.

“술을 마시고 있었어?”

“아뇨, 폐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스텔은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녀는 귓가가 조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오시면 드리려고요.”

카이젠이 놀란 눈으로 테이블을 바라봤다.

거기엔 알록달록한 작은 타르트와 쿠키, 과일 절임이 있었다.

“당신이 만들었다고?”

“네.”

“왜?”

“…….”

아스텔은 그의 멍청한 물음에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왜겠어요?”

카이젠은 그녀가 낮에 있었던 일을 풀려고 이런 정성을 들였다는 걸 깨달았다.

“고마워. 진작에 올 걸 그랬군.”

카이젠의 얼굴에 후회하는 기색이 스쳐 갔다.

아스텔이 그를 보며 오늘따라 일이 많았던 건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이게 뭔가요?”

“……당신에게 주려고 내가 만들었는데.”

굉장히 자신 없는 어조였다.

아스텔은 의문 어린 눈으로 상자를 받아 들고 빠르게 포장을 풀었다.

아스텔은 뭔가 보석이나 장신구나 그런 게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상자 안에서 나온 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이거…… 종이인가요?”

아스텔은 상자 안에 있던 유리병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평범한 화병 크기쯤 되는 유리병 안에 색색의 작은 꽃들이 들어 있었다.

반짝이는 종이로 만들어진 작은 꽃이었다.

적어도 수십 송이는 되어 보이는 손톱만 한 꽃송이가 유리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스텔은 이런 걸 본 적이 있었다.

어릴 때 친구들이 종이로 새나 별을 만들어서 유리병에 담아서 주는 걸 몇 번 봤었다.

아스텔도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카이젠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관뒀었다.

그런데 지금 카이젠이 종이꽃이 가득 담긴 유리병을 들고 나타났다.

아스텔은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다시 물었다.

“이걸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래.”

카이젠은 겸연쩍은 듯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스텔의 놀란 얼굴을 보니 귓가가 붉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처음 아스텔의 선물을 만들기로 했을 때, 프리츠는 그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어떤 걸 만들고 싶으십니까?’

카이젠은 문득 꽃목걸이를 만들던 에스텔라와 지크가 떠올랐다.

당시엔 에스텔라의 귀여움과 더불어 지크에 대한 질투심만 느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장면에 마음이 쓰였다.

정확히는 과거의 일을 되새기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과거.

카이젠에게 과거는 언제나 무겁고 고통스러운 족쇄였다.

자신과 아스텔도 함께 자랐지만 그렇게 다정하고 친근한 추억은 없었다.

아스텔은 언제나 정원이나 온실에서 그와 함께 놀고 싶어 했지만, 카이젠은 어린애 같은 놀이가 싫다며 매번 그녀의 요청을 거부했었다.

그는 씁쓸한 후회를 곱씹으며 말했다.

‘꽃처럼 생긴 걸 만들고 싶군.’

‘꽃이요?’

‘그래. 여자들은 꽃을 좋아하잖아.’

어쩐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카이젠은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다.

꽃을…… 어떻게 만들지?

그는 정원에서 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원에 나가서 꽃목걸이를 만들 수는 없다.

황제가 황궁의 정원에서 처남인 공작과 함께 꽃목걸이를 만든다니 정말 괴상한 장면이 아닌가.

그리고 꽃으로 만든 목걸이는 하루만 지나도 시들어버릴 것이다.

카이젠이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고 프리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흠…… 예전에 레이디들이 백분으로 꽃을 만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한 건 분가루에 장미수를 섞어서 반죽하고 그걸로 꽃을 만든 뒤, 붉은색 연지분으로 색까지 입히는, 엄청난 고난도의 공예였다.

그렇게 만들면 진한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꽃이 완성된다.

카이젠은 그런 어려운 수공예를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비슷하게 찰흙으로 뭔가를 만들어 본 적도 없었다.

비록 경험은 없었지만 카이젠은 자신감을 가졌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보좌관에게 명령해서 백분을 비롯한 재료를 구해오게 했다.

보좌관은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황급히 재료를 가져왔다.

하지만 카이젠은 반죽으로 모양을 만드는 데 놀랄 만큼 소질이 없었다.

예상과 달리 부드러운 분가루 반죽으로 꽃을 만드는 건 엄청나게 어려웠다.

가까스로 반죽을 주물러서 꽃잎을 만들어도, 그걸 하나하나 붙이다가 힘을 잘못 주면 순식간에 꽃잎이 찌그러져 버렸다.

기적적으로 몇 개의 꽃잎을 이어붙여도 마무리로 꽃대에 붙이다가 한쪽 귀퉁이를 뭉개버렸다.

카이젠은 반죽으로 뭔가를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에스텔라나 테오르는 언제나 찰흙으로 동물이나 꽃을 만들었는데.

수십여 차례 꽃잎을 찌그러뜨린 뒤, 카이젠은 결국 분가루 공예를 포기했다.

그렇게 포기하기까지 3시간이 걸렸다.

이쯤이 되자 프리츠도 후회스러운 표정이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제가 내무부에 일이 있어서 이만…….’

‘안 돼.’

카이젠은 52번째로 만든 꽃잎을 뭉개버리면서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는 프리츠가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이런 제안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흘러갔다.

카이젠은 오기로라도 이 ‘정성 들인 선물’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안에 다른 선물을 만들려면 반드시 프리츠가 필요했다.

‘이건 도저히 안 되겠어. 다른 건 없나?’

카이젠은 가루 반죽을 내던지며 그에게 대안을 요구했다.

프리츠는 한숨을 쉬면서 시간이 없으니 종이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종이꽃을 작게 접어서 유리병에 담아서 주면 좋아할 겁니다. 아마도요…….’

그는 사춘기 무렵에 친구들이 그런 선물을 주는 걸 봤다고 말했다.

프리츠는 자신 없는 어조였지만 카이젠은 그 의견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반죽을 치우고 화려한 종이를 가져다가 꽃을 접는 걸 시도했다.

종이로 꽃을 접는 것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가루 반죽보다는 나았다.

최소한 귀퉁이를 잘못 건드린다고 순식간에 꽃잎이 찌그러지지는 않았으니까.

카이젠은 수차례의 실패 끝에 겨우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여태까지 종이꽃을 만들었다.

중간중간 다급한 일거리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다.

카이젠은 보좌관인 라니스와 프리츠의 도움을 받아 가며 간신히 꽃을 완성했다.

프리츠는 후회가 막심한 표정을 지었고, 라니스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지만, 둘 다 열심히 종이를 잘랐다.

그들 사이에 앉은 카이젠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서 종이꽃을 접었다.

“푸흡-!”

이야기를 다 들은 아스텔은 당장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입을 가린 채 허리까지 접어가면서 폭소했다.

“웃지 마.”

카이젠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프리츠도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과 이 이야기를 하면서 한참 동안 웃겠지.

아스텔은 유리병을 들여다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직접 만드셨다니 감동적이네요.”

아스텔은 유리병을 소중하게 들고 그를 테이블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았다.

카이젠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켠 뒤 딸기 타르트를 조금 맛봤다. 달콤한 크림과 섞인 신선한 딸기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맛있는걸.”

“식사부터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스텔은 그가 저녁은 먹은 건지 궁금했다.

설마 이걸 만드느라 저녁도 굶은 건 아니겠지?

“괜찮아.”

카이젠은 괜찮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타르트를 잘라 먹었다.

역시 저녁도 굶은 모양이다.

카이젠은 새콤달콤한 배 절임을 천천히 맛보더니 조금 감동한 듯 말했다.

“정말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디저트는 처음이야.”

“저녁을 안 드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니야. 진짜 맛있다고.”

카이젠은 배 절임을 남김없이 비우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만든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하긴 이렇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나눠 먹은 건 동부의 시골에 갔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카이젠은 와인잔을 들며 그녀를 향해 매력적인 미소를 보냈다.

“말했잖아. 당신이 주는 건 다 좋다고.”

“다음엔 소금만 잔뜩 넣어서 드릴 수도 있어요.”

아스텔은 담담하게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자주 이런 시간을 가질 걸 그랬네.

자신이 그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황녀를 돌보고 황궁 일을 하느라 바쁘긴 했다만.

카이젠이 가져온 유리병은 테이블 옆에 올려두었다. 벽난로의 불빛이 유리병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 그림자를 그렸다.

아스텔은 유리병을 들고 안에 있는 꽃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다시 보니까 꽃을 만든 종이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스텔은 그 종이가 뭔지 뒤늦게 깨달았다. 이 빛나는 종이는 보석을 가루로 만들어서 겉에 바른 것이었다.

특별한 선물에 장식으로만 쓰이는 비싼 종이였다.

이 비싼 색종이로 꽃을 만들다니.

“굉장히 비싼 꽃이네요.”

이렇게 많은 꽃을 만들기 위해 카이젠이 얼마나 많은 종이를 낭비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해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타르트를 먹던 카이젠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진짜 보석으로 만든 것도 아닌데 뭘.”

아스텔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웃으며 부정했다.

“보석으로 만든 것보다 더 근사한데요.”

황제가 만든 종이꽃이라니.

이런 건 제국 역사상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마음에 들어?”

“그럼요. 이런 선물은 처음 받아봐요.”

아스텔은 애정 어린 눈길로 유리병을 들여다봤다. 어설픈 솜씨이긴 해도 나름대로 그럴싸하게 만든 꽃이었다.

카이젠이 고군분투하면서 이걸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확실히 꽃잎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어릴 때는 이런 작은 선물을 주고받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워했었다.

다시 결혼하고 관계가 회복된 뒤엔 카이젠에게서 온갖 보석과 장식품, 심지어 온실과 궁전까지 선물로 받았지만.

설마 이런 선물을 받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이젠은 포크를 내려놓고 아스텔을 바라봤다.

아스텔은 유리병을 들여다보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촛대의 은은한 불빛이 아스텔의 행복한 얼굴에 따스한 빛을 드리웠다.

문득 정원에서 함께 꽃목걸이를 만들던 에스텔라와 지크가 다시 떠올랐다.

자신과 아스텔도 그렇게 자랄 수 있었을까.

허망한 공상에 불과하지만 카이젠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어린 아스텔과 함께 정원에서 뛰어놀며 풀꽃을 꺾어 목걸이를 만드는 상상을.

하지만 그것은 허상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의 카이젠은 아스텔과 행복한 추억을 쌓을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렸다.

‘…….’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카이젠은 어린 아스텔에게 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주고, 이런 색종이로 수없이 많은 선물을 줬을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가 놓쳐버린 그 모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 더 만들어줄게.”

하지만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아스텔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채색하는 것뿐이었다.

아스텔의 연녹색 눈이 그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는 종이꽃 대신 타르트와 과자를 만들어 드릴게요. 매일 만들어 드릴 자신은 없지만요.”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고개를 기울이고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겹치고 따뜻한 키스를 나눴다.

반짝이는 종이꽃과 디저트처럼 감미롭고 달콤한 키스였다.

“이걸로 충분해.”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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