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하얀 눈송이와 푸른 별 (23/24)

외전 2. 하얀 눈송이와 푸른 별

그 후로는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었다.

가을에 접어들 무렵, 아스텔은 공작가에서 열린 프리츠와 그레텔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단풍이 물든 아름다운 정원에서 소박하게 치러졌다.

참석자들은 황제 부부를 비롯해서 친인 몇 명뿐이었다.

프리츠는 그레텔을 위해 성대한 결혼식을 하고 싶어 했지만 그레텔은 조용하고 단출한 결혼을 원했다고 한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레텔의 이름은 지난 몇 주 동안 수도의 사교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충격적인 일이긴 했다.

평민 약제사가 황후의 친오빠인 공작과 결혼했으니까.

심지어 그레텔은 임신한 상태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아스텔이 수도에 귀환했을 때만큼이나 큰 충격을 불러왔다.

황제가 직접 그레텔에게 귀족 작위를 내리고 영지도 내려줬지만 그래도 시끄러운 소란은 피할 수 없었다.

아스텔은 공작가의 저택에서 그레텔을 만났다.

“축하해요, 그레텔.”

밖에서 들리는 온갖 소문에도 불구하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레텔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우리가 가족이 돼서 정말 기뻐요. 행복하길 빌게요.”

아스텔은 진심이었다.

프리츠가 명문가의 레이디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그텔로서는 그레텔이 올케가 되는 게 더 좋았다.

그레텔은 아스텔의 절친한 친구였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레텔은 아스텔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스텔은 그레텔을 황후궁으로 초대해서 사교계의 귀부인들과 어울릴 수 있게 돕고 싶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저택에서의 생활도 벅찰 것 같아서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괜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이를 낳고 차츰 적응하면 되겠지.’

후계자가 태어나면 누가 뭐라고 해도 확고한 공작 부인이 되는 거니까.

그때쯤이면 사람들의 소문도 가라앉을 테니 조금씩 사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결혼식은 정원에 있는 파빌리온 안에서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조용한 결혼식인 만큼 초대객도 친지들만 추렸다고 들었는데, 초대된 사람은 정말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아스텔과 카이젠, 테오르.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 한나와 세르벨, 린든, 그 외 프리츠의 친구인 서너 명 정도의 청년들과 그레텔의 약초학교 직원 두세 명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린든은 카이젠이 참석하니까 같이 온 것뿐이었다.

“정말 간소한 결혼식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옆자리에 앉은 칼렌베르크 후작은 파빌리온에 마련된 결혼식장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아비가 살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스텔이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돌리자 후작이 말을 이었다.

“이 결혼을 보고 네 아비가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하구나. 볼만한 광경일 텐데. 그걸 볼 수 없다니 아쉬워서하는 말이다.”

“…….”

아스텔은 외조부의 심술궂은 말에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살아 계셨어도 이걸 보셨으면 돌아가셨을 거예요.”

아버지인 공작은 하나뿐인 아들이 평민 약제사와 결혼하는 걸 보고 화병으로 쓰러졌으리라.

잔뜩 긴장한 얼굴의 테오르가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엄마, 나 이제 준비하러 갈게!”

테오르는 두 손으로 작은 하얀색 바구니를 소중하게 들고 있었다.

테오르는 이번 결혼식의 화동이 되었다.

사실 여자아이에게 부탁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테오르가 화동의 역할을 듣고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다행히 그레텔은 오히려 좋아했다만.

“그래.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하렴.”

“응. 잘할 수 있어. 오늘 아침에도 연습했는걸.”

테오르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황궁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몇 번이나 연습했다.

테오르가 꽃잎을 뿌리면서 앞서 걸어가면 신부가 부케를 들고 뒤따라오는 연습이었다.

신부 역할은 한나와 시녀들이 돌아가면서 해줬다.

너무 번거롭지 않나 싶었지만. 모두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아서 그냥 놔뒀다.

“몸은 좀 괜찮으냐?”

테오르가 달려간 뒤 후작은 아스텔에게 다시 물었다.

“괜찮아요. 이번에는 입덧도 없고 아주 편한걸요.”

임신 초기의 힘들었던 증상이 사라진 뒤부터 아스텔은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입맛도 나날이 좋아졌고 순탄하게 배가 불러가고 있었다.

이제는 옷으로 가려도 티가 날 만큼 배가 불렀다.

“편하니까 다행이긴 한데.”

후작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테오르를 가졌을 때하고는 많이 다른 것 같구나. 혹시 이번에는 황녀인 걸까?”

“그건 모르죠.”

아스텔은 가볍게 웃으며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황녀여도 좋을 것 같아요. 테오르는 실망하겠지만요. 남동생이 생길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서요.”

그때 시종이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

아스텔은 대화를 중단하고 고개를 돌렸다.

테오르가 제일 먼저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서 프리츠와 그레텔이 함께 걸어왔다.

“아름답네요.”

하얀 드레스를 입고 프리츠와 함께 서 있는 그레텔은 꽃의 정령처럼 아름다웠다.

“그래. 둘이 잘 어울리는구나.”

아스텔은 행복한 감정을 느끼며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했다.

하지만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카이젠이었다.

그는 결혼식을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프리츠가 그레텔을 위해 공작가의 저택을 개조하고 약초를 기를 유리온실도 새로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카이젠은 공작가의 일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자꾸 신경이 쓰였다.

‘프리츠 녀석은 왜 저렇게 난리를 치는 거야?’

카이젠 자신은 아스텔과 새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궁전을 증축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엔 그런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정석대로 관계를 쌓고 행복한 부부가 된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순탄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가 떠올라서 더욱 기분이 미묘해졌다.

그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보좌관을 불렀다.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재무대신을 불러라.”

젊은 보좌관은 난감한 눈빛이었지만, 황제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 * *

그해 가을은 편안하면서도 빠르게 지나갔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그레텔과 프리츠는 서부의 영지로 허니문 겸 여행을 떠났다.

겉으로는 영지를 구경시켜 주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수도의 시끄러운 이목을 피해 그레텔을 조용히 지내게 해주려는 프리츠의 배려였다.

두 사람이 떠난 뒤부터 아스텔도 관례에 따라 황후의 업무를 중단하고 궁전 안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 음식과 약을 챙겨 먹고 의사의 진찰을 받으며 편안하게 지내는 여유로운 생활이 이어졌다.

황가의 임산부는 배가 불러오면 황궁 안에만 머무는 게 원칙이라 바깥출입도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지루할 만큼 평온하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첫눈이 내리고 겨울이 되어 있었다.

편안하긴 했지만 아스텔은 매일 놀고먹는 일상에 답답증을 느꼈다.

그때쯤 카이젠이 외출을 제안했다.

“밖에는 신년 시장이 한창인데 구경을 가볼까?”

번화한 수도에는 연말연시를 앞두고 내내 커다란 시장이 열린다.

여름에 열리는 야시장과 겨울 시장은 달리 환한 낮에만 열리는 대규모 시장이었다.

“나가봐도 될까요?”

“오늘은 날씨가 따뜻해. 든든하게 껴입고 가면 안 추울 거야.”

그 말대로 이번 겨울은 무척 따뜻했다.

며칠간 내리던 눈도 그쳐서 바깥은 새하얀 설경이었다.

“나도 시장에 가고 싶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테오르도 밖에 나가자고 칭얼거렸다.

아스텔이 황궁 안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테오르도 그간 자기 거처에서 공부만 하고 무료하게 지냈다.

“그럼 같이 나갈까?”

아스텔은 만삭에 가깝게 부풀어 오른 배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잠시 다녀오는 건 괜찮겠죠.”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셋이서 보내는 추억을 더 만들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세 사람은 함께 마차를 타고 황궁 밖으로 나갔다.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따뜻하게 껴입어야 해.”

마차에 오르기 전에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따뜻한 털옷을 껴입혔다.

푹신한 털이 달린 옷을 껴 입힌 덕에 테오르는 통통한 아기곰처럼 보였다.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옷을 껴입히는 아스텔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따뜻하게 입어야지.”

그는 하얀 모피로 만든 펠리스(망토처럼 늘어지는 긴 겉옷)를 가져오게 해서 아스텔에게 입혔다.

안에는 모피를 덧댄 남색 벨벳 드레스를 입었다.

‘따뜻하다 못해 조금 더운 것 같은데.’

하지만 밖으로 나간 뒤에는 껴입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을 에는 추위는 없었지만, 눈이 내린 직후라 차가운 한기가 감돌았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눈 덮인 지붕과 도로가 보였다.

“이렇게 함께 나온 것도 오랜만이네요.”

정말 오랜만에 함께 나온 외출인 것 같았다.

시장은 광장 근처에서 열렸다.

거리에는 눈이 쌓인 곳이 많았지만, 시장 근처에는 전부 녹아서 보이지 않았다.

구석구석 눈의 잔재가 흰 그림자처럼 서려 있긴 했다만.

낮에 열리는 시장이라서인지 시장 안에는 가족 단위로 구경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조그만 아이들이 장난감과 간식을 손에 든 채 웃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스텔은 시장에 들어선 뒤 테오르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자, 돈을 줄 테니 사고 싶은 걸 사보렴.”

“정말?”

“그래. 돈을 써보는 것도 경험이니까.”

테오르는 직접 돈을 주고 물건을 사본 적이 없다.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한 번쯤은 물건을 사고파는 걸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나 어떻게 사는 건지 알아. 수업 시간에 배웠어.”

테오르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받아 들더니 인형을 파는 노점으로 달려갔다.

“인형 살 거야!”

인형은 이미 충분하지 않나 싶었지만. 사고 싶은 걸 사라고 했으니 그냥 놔두기로 했다.

옆에 있던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저 녀석이 동물을 사겠다고 하기 전에 돈을 다 쓰게 하는 게 나을 거야.”

작은 거북이와 애완용으로 파는 알록달록한 물고기가 있었다.

확실히 거북이를 사는 것보다는 인형을 잔뜩 사라고 놔두는 게 낫겠다.

테오르에겐 이미 개와 조랑말이 있으니 동물을 더 늘리는 건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았다.

다행히 테오르는 폭신폭신한 솜 인형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잠시 후, 테오르는 베이지색 양털로 만든 커다란 토끼 인형을 골랐다.

“이걸로 해야지.”

“3데니에입니다.”

테오르는 주머니에 든 동전을 유심히 골라서 내밀었다.

자신 있게 말한 것처럼 열심히 배우긴 했는지 틀리지 않고 갈색 동전을 제대로 고르긴 했다.

테오르는 돈을 내려다 말고 하얀색 토끼 인형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이것도.”

“두 개나 살 거니?”

“응.”

두툼한 털옷을 입은 테오르는 양팔로 커다란 토끼 인형을 안아 들었다.

“이건 동생 거예요.”

“뭐?”

테오르는 양쪽에 노랗고 하얀 인형을 하나씩 끌어안고 말했다.

“기다렸다가 동생이 태어나면 선물로 줄 거야.”

6살밖에 안 된 테오르가 벌써부터 동생을 챙기는 걸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아스텔은 따뜻한 애정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그래. 아기도 고마워할 거야.”

하지만 돈을 내려던 테오르는 다시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새로운 인형을 하나 더 골라잡았다.

“아, 이것도.”

그건 연한 하늘색 토끼였다.

“이건 작은 동생한테 줘야지.”

테오르가 말하는 작은 동생은 그레텔과 프리츠의 아이였다.

테오르는 순식간에 큰 토끼 인형을 세 개나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었다.

아스텔은 웃음이 나왔지만 말리지 못하고 허락했다.

“그래, 사고 싶은 대로 사렴.”

결국 인형은 카이젠이 한 개, 아스텔이 한 개씩 들어주게 되었다.

세 사람은 토끼 인형을 하나씩 들고 다시 시장 거리를 걸어갔다.

테오르는 뒤이어 나타난 물고기들을 보고 다시 정신이 팔려서 그쪽으로 가버렸다.

그 근처로 다가가는데 조잡한 공예품을 늘어놓고 팔던 노부인이 아스텔의 배를 보고 그녀를 불러세웠다.

“부인. 이건 임산부를 위한 부적이에요.”

아스텔은 괜찮다고 하고 지나쳤지만 카이젠은 걸음을 멈췄다.

앞서가던 아스텔은 그가 따라오지 않는 걸 느끼고 몸을 돌렸다.

작은 부적을 받아 들고 노부인에게 돈을 주고 있는 카이젠이 보였다.

아스텔은 그가 가져온 부적을 구경했다.

푸른 실로 여러 개의 매듭을 만들고 색실로 장식한 조잡한 물건이었다.

남서부의 산맥에는 이런 매듭 공예품을 잘 만드는 지역이 있다던데 거기서 온 물건인가 싶었다.

“제게 선물로 주시는 건가요?”

“아니.”

카이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챙겨 넣었다.

“이건 따로 쓸데가 있어.”

아스텔은 그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임산부에게 주는 부적을 어디다 쓰려고 그러지?

하지만 곧 답을 찾았다. 간단한 답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

“그레텔에게 주시려는 건가요? 그런 거면 저도 하나 사야겠네요.”

“뭐?”

카이젠은 황당하다는 듯이 아스텔을 돌아봤다.

“그레텔한테 왜? 공작이 알아서 하겠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되묻는 말에 아스텔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누구에게 주려고 하는 걸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주변에 임산부는 아스텔과 그레텔뿐이었다.

근위 기사들이나 신하 중에도 임신한 아내를 둔 사람은 없었다.

아스텔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카이젠은 그녀를 힐끔 돌아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어디에 쓸지 궁금해?”

아스텔이 궁금해서 계속 물어보길 바라는 표정이었다.

몹시 궁금했지만 아스텔은 일부러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별로 궁금하지 않네요. 폐하께서 알아서 쓰시겠죠.”

아스텔은 무심한 표정으로 앞서 걸어갔다.

옆으로 따라온 카이젠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챙길 사람이 당신 말고 누가 있겠어?”

그럼 안 준다고 한 말은 뭐지?

아스텔은 진짜 궁금해져서 그를 돌아봤다.

“그럼 왜……”

그 순간 아랫배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윽…….”

“아스텔!”

놀란 카이젠이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아스텔, 왜 그래?”

아스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눈앞이 흐릿할 만큼 강한 아픔이 들었지만 갑작스러운 통증은 순식간에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괜찮아요. 그냥 조금 통증이 있어서요. 오래 걸어서 그런가 봐요.”

그간 통증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많이 걸어서 그런 건가.

아스텔은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카이젠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했다.

“황궁으로 돌아가지.”

“이제 괜찮아졌어요.”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될 것 같았지만 카이젠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냐, 오늘은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어. 괜찮아지면 내일 다시 나오지.”

그는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기사에게 손짓했다.

“마차를 불러와라.”

아스텔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테오르를 부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찰나의 순간, 또다시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악!”

아스텔은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스텔!”

이제는 주변에 돌아다니던 사람들도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평복을 입은 기사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끌어안은 채 그들에게 소리쳤다.

“마차를 가져와! 지금 당장!”

일행은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빠르게 마차로 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마차 안이었다.

아스텔은 카이젠의 품에 안겨서 마차 안으로 옮겨졌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의자에 앉힌 뒤 모포를 덮어주었다.

“금방 도착할 테니 잠시만 참아.”

마차는 전속력으로 수도의 도로를 달렸다.

“엄마, 많이 아파?”

맞은편에 앉은 테오르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오르의 옆에는 세 개의 토끼 인형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인형들과 함께 앉아 있는 테오르는 겁에 질린 얼굴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테오르. 엄마는 괜찮아.”

아스텔은 얼른 아이를 안심시켰다.

“정말 괜찮아?”

“응. 갑자기 많이 걸어서 아기가 힘들었나 봐.”

마차에 탄 뒤에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그냥 많이 걸어서 그런 게 아닐까?

사실 많이 걸은 것도 아니다만.

시장에 들어가서 인형만 사고 좀 걸었을 뿐인데.

“윽!”

그때 또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배에 손을 댄 아스텔은 문득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출산할 때가 안 됐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카이젠은 불안에 떠는 아스텔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시의가 대기하고 있을 테니 조금만 참아.”

아스텔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런 와중에도 그의 품 안에 있으니 안심이 된다.

“네. 괜찮을 거예요.”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황후궁은 폭풍이 밀려든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카이젠과 함께 처음으로 테오르를 데리고 야시장에 나갔을 때도 세 사람은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경험했다.

‘함께 외출하는 건 피하는 게 좋겠어.’

함께 나가서 편안하게 놀고 온 적이 없었다.

아스텔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마차를 타고 있을 때만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황궁에 들어온 뒤에는 얕은 희망마저 사라졌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주기적으로 아픔이 이어졌다. 통증의 간격이 점점 빨라졌다.

아스텔을 진찰한 시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조산사를 불러와야 할 것 같습니다.”

황후가 출산을 앞두고 있을 때는 원래 출산을 도울 조산사가 곁에서 대기한다.

하지만 아스텔은 아직 조산사를 황후궁에 들이지 않았다. 산달에 접어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8개월은 완전히 채운 다음에 부르려고 했었는데.

카이젠이 시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종에게 명령했다.

“당장 조산사를 불러와라.”

아스텔은 다시 한번 엄습하는 고통을 참으며 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나. 테오르를 돌봐줘.”

테오르는 자신의 거처로 돌려보냈다.

괜찮다고 셀 수 없이 말해주긴 했지만, 테오르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시녀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출산이 끝날 때까지 누군가가 곁에서 잘 돌봐줘야 할 텐데.

한나가 창백한 얼굴로 아스텔을 안심시켰다.

“황태자 전하는 걱정 마십시오, 황후 폐하.”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베개에 힘없이 머리를 떨궜다.

갑작스럽게 출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쭉 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산사가 오기 전에 천과 소독제와 따뜻한 물을 준비해. 너는 습포와 약차를…….”

한나는 출산을 준비하기 위해 시녀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밖으로 나갔다.

시녀들이 바쁘게 오가고 시의도 뭔가를 준비하기 위해 어딘가로 가버렸다.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스텔을 지켜보며 주변에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시선을 들자 차갑게 굳어진 얼굴과 어둡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아스텔은 불안한 눈빛으로 서 있는 카이젠을 위로했다.

“괜찮을 거예요.”

카이젠은 말없이 걸어와서 아스텔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에서 불안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자명했다.

사실 아스텔 자신도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출산이 시작되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카이젠은 자신의 불안을 아스텔에게 전하지 않으려고 그녀의 손을 굳게 잡았다.

미약하게 전해지던 심장의 떨림이 굳은 온기로 가려졌다.

카이젠은 품 안에 넣어뒀던 작은 매듭을 꺼냈다. 시장에서 산 그 매듭 부적이었다. 임산부에게 주는 부작이라는.

“당신에게 줄게.”

아스텔은 손안에 있는 작은 매듭 부적을 보면서 웃었다.

자세히 보니 매듭의 모양이 별 모양을 닮아 있었다.

“결국 제게 주려고 하셨던 거예요?”

“그래. 이렇게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럼 어떻게 줄 생각이었던 걸까. 아스텔은 카이젠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마도 뭔가 깜짝 선물을 만들어주려고 했던 모양이지.

그게 뭔지 궁금하긴 했지만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괜찮을 거예요.”

아스텔은 그에게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만일, 만일의 사태가 생기면 산모와 아이를 중에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할 사람은 그였다.

하지만 아스텔은 그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못했다.

그런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면 어떤 선택을 하든 카이젠은 괴로울 것이다. 그리고 아스텔은 카이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전하든 그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도.

“저는 괜찮으니까 테오르를 잘 돌봐주세요. 아셨죠?”

아스텔은 최대한 편안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테오르를 데리고 정원에 나가는 카이젠을 보며 ‘아이를 저녁 식사 전에 데려오세요’ 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맞잡은 손에 악력이 더해진다.

그 순간엔 아스텔도 그의 손을 힘껏 잡아줬다.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아스텔은 잠시 눈을 감았다.

* * *

아이의 탄생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다.

적어도 카이젠의 상상 속에서는 그랬다.

카이젠은 자신과 아스텔이 두 번째 아이를 얻게 되는 순간을 수차례 생상했었다.

아스텔이 힘든 출산을 끝내고 함께 아기를 안은 채 미소 짓는 순간을.

하지만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처참했다.

“아악!”

닫힌 문 너머로 아스텔의 비명이 들려왔다.

억눌린 비명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산실로 꾸며진 방 안에서는 조산사와 시녀들이 출산을 거들고 있었다.

카이젠은 끝없이 이어지는 비명을 들으며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출산이 상상과 달리 힘든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끔찍한 기다림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조산사의 설명을 듣고 나온 시의가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이젠은 시의의 말을 듣고도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그는 이미 확실한 명령을 내려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스텔을 구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폐하, 괜찮을 겁니다.”

맞은편에 앉은 칼렌베르크 후작이 카이젠을 위로했다.

후작은 테오르를 달래주고 대기실로 들어온 참이었다.

“두 번째니 첫 번째보다 수월하게 끝날 겁니다. 너무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후작도 방 안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초조하게 문가를 돌아봤다.

카이젠은 노후작을 보는 게 괴로웠다.

그를 볼 때마다 아스텔의 어머니인 공작 부인이 출산의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존재가 고마웠다.

“고맙네.”

후작이 이런 상황에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확실히 지금 할만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카이젠은 그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이곳에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아스텔도 그대가 있어서 큰 위안이 되었을 거야.”

외조부를 깊이 사랑하는 아스텔은 후작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카이젠은 후작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확실히 이런 상황에 할 만한 얘기는 아니군.”

카이젠은 후작의 시선을 피했다.

후작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보듯이 그를 보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후작은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카이젠은 무심코 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조금 놀랐다.

후작의 푸른 눈에 다정한 온기가 감돌았기 때문이다.

카이젠이 기억하기로 그가 자신에게 이런 따스한 시선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했다.

“황후께서는 폐하께서 곁에 계시기 때문에 이미 충분히 위안을 받으실 겁니다.”

“…….”

문득 출산 전에 자신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짓던 아스텔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은 부적을 손에 쥐고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스텔.

그 순간엔 아스텔도 자신을 사랑하고 의지한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후작의 말도 그런 의미였다.

‘황후께서는 폐하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고……’ 하는 등의 대단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후작의 위로를 들으며 깊은 감동을 느꼈다.

“고맙네. 정말로.”

그러나 감동의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 순간 방 안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전보다 훨씬 다급하고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단말마의 비명에 카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그는 그대로 달려가서 문을 열어젖혔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부서지듯이 벌컥 열렸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피 냄새가 섞인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끼쳤다.

부산하게 일하던 시녀들이 놀라서 허리를 숙였다.

카이젠의 눈에는 침대에 있는 아스텔만 보였다.

아스텔은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로 붉게 젖은 하얀 시트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다급히 침대로 향했다.

“아스텔!”

소리치며 불러도 아스텔은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아스텔 주변으로 얼룩진 핏자국이 가득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대체…….” 

그가 조산사들을 돌아보며 호통을 치려는 찰나였다.

“응애…… 응애…….”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젠은 멍하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산사의 품에 하얀 모포로 뒤덮인 조그만 아기가 있었다.

침대 곁에 서 있던 한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났다.

“폐하, 아기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카이젠은 그제야 자신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오기 직전에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아스텔의 비명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문을 열어버렸지만.

바로 그 비명을 끝으로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아스텔은…….”

늙은 조산사가 얼른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잠시 정신을 잃으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카이젠은 정신을 차리고 아스텔을 살폈다.

흰 눈처럼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미약하게 숨소리가 들렸다.

한편으로는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아스텔은 잠시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카이젠은 식은땀으로 젖은 아스텔의 이마를 손으로 닦아준 뒤 일어섰다.

열린 문 너머로 칼렌베르크 후작이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카이젠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카이젠과 달리 이성이 남아 있는 후작은 외손녀의 산실에 차마 발길을 들이지 못하고 문밖에서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젠은 아기를 안고 있는 산파에게 다가갔다.

하얀 모포에 감싸인 백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달수를 못 채워서인지 아기는 무적 작았다.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칭얼거리는 울음소리와 색색이는 숨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아기가…….”

조산사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건강한 황녀님이십니다.”

약초를 우려낸 물에 몸을 담그자 아기는 느낌이 이상한지 손을 곰지락거리며 칭얼거렸다.

아기의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자 아스텔을 닮은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가 드러났다.

산파는 따듯한 물에 아기를 씻기고 포근한 모포로 정성껏 싸맸다.

카이젠은 그 모든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산파의 손에 안겨 있는 아기를 보면서도 아직도 지금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저 솜인형처럼 작고 귀여운 아기가 자신과 아스텔의 딸이라는 것이. 아기의 탄생을 처음 목도하는 카이젠에겐 이 모든 것이 기적같이 느껴졌다.

“다 된 건가?”

카이젠은 늙은 산파가 아기를 닦아서 포대기에 감싸는 걸 보고 정신을 차렸다.

산파를 돕는 젊은 하녀는 조금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힐끔거렸지만, 늙은 산파는 능숙하게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그에게 다가왔다.

초보 아버지들이 아기와의 첫 만남에 넋을 놓는 걸 자주 경험한 모양이었다.

“폐하, 안아보시겠습니까?”

카이젠은 조심스럽게 아기를 받았다.

따뜻한 모포의 감촉, 그리고 푹신한 솜이불에 감싸인 작은 무게가 느껴졌다.

카이젠은 조심조심 손을 옮겨서 아기를 더욱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포근한 이불 안에서 미약한 온기와 함께 작은 움직임이 손안에 전해져 왔다.

끊어질 듯 연약하게 들리는 숨소리에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의 어린 딸을 처음으로 품에 안은 날을.

아기는 아스텔을 꼭 빼닮은 새벽빛 같은 백금발을 갖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너무 일찍 태어났는데.”

아기는 달수를 못 채우고 태어나서인지 보통의 갓난아기들보다 작았다.

모포 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조그만 손가락도 눈송이로 빚어놓은 것처럼 작고 연약해 보였다.

아기는 서리꽃처럼 연약하게 태어난 것 같았다.

갓난아기를 안아본 건 처음이었지만, 그런 카이젠이 느끼기에도 아기 황녀는 보통의 아기들보다 가벼웠다.

“달을 채우지 못하신 것치고는 무척 건강하십니다. 황녀님은 원래 건강한 체질을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달수를 못 채웠지만 다행히 생명에 문제는 없다며 산파가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당분간은 특별히 조제된 영양제를 드시고 따뜻한 방 안에만 머무셔야 합니다.”

카이젠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 문제는 그레텔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님들은 달수를 채워서 태어난 아기님들보다 연약해서 질병에 취약하지요. 하필 겨울이라…… 황녀님이 한기에 닿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산파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유의 사항을 한나에게 전했다.

카이젠도 옆에서 그녀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

그러는 동안 시녀들이 아스텔의 침상을 채우고 그녀의 몸을 닦아준 뒤 옷을 갈아입혔다.

아스텔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다시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린 아스텔은 카이젠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던 일이 무색할 만큼 멀쩡해 보였다.

“출혈이 좀 있으셨지만 큰 문제는 없으십니다. 편안히 휴식을 취하시면 회복하실 겁니다.”

출산 과정도 이 정도면 순탄하게 지나간 거라고 했다.

실제로 아스텔이 산실에 들어간 지 세 시간도 채 안 돼서 아기가 태어났다.

출산 과정에 참여한 경험이 전무한 카이젠에겐 일분일초가 한 시간같이 느껴졌지만.

“아스텔, 정신이 들어?”

“폐하?”

정신을 차린 아스텔은 그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눈에 서서히 이지가 돌아왔다.

“아기는요? 무사한가요?”

카이젠은 품 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아스텔에게 보여줬다.

“자, 아기를 봐봐. 예쁜 황녀야.”

아스텔은 그의 말을 듣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한나가 옆에서 아스텔을 부축했다.

아스텔은 침대 등받이에 쿠션을 대고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아기를 안겨준 뒤 그녀가 힘들지 않게 아기의 몸을 받쳐주었다.

아기를 안아 든 아스텔은 애정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딸이군요.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카이젠은 진심 어린 행복을 느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아스텔을 보자 행복감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그리고 그는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기의 눈코입이 아스텔과 판박이라는 것을.

“아이가 당신을 빼닮았어.”

“그런가요?”

아스텔은 기운 없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폐하를 닮았어도 좋았을 텐데요. 성격만 빼고요.”

아스텔은 아직도 조금 멍한 얼굴로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카이젠은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을 지었지만 반박하진 않았다.

그도 아스텔의 말에 공감해서였다.

그때 아기가 조금씩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 눈을 뜨려나 봐요.”

아기는 서서히 힘겹게 눈을 떴다.

두 사람은 그제야 처음으로 아기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아스텔의 백금발을 닮은 조그만 아기는 카이젠과 똑같은 붉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 * *

다행히 아기는 하루하루 건강하게 자라났다.

시녀들이 워낙 지극정성으로 돌봐준 덕이었다.

물론 제일 정성을 다하는 건 카이젠이었다.

카이젠은 아스텔과 아기를 위해 솜을 넣은 모포로 창문을 전부 가리고 따뜻한 화로로 방 안을 하루 종일 훈훈하게 덮여 놓게 했다.

아기는 매일 유모의 젖과 함께 영양제와 약을 먹었다.

그런 정성 덕분인지 아기 황녀는 허약하긴 해도 무사히 하루하루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아기는 날이 갈수록 귀여워졌다.

젖살이 오른 통통한 하얀 뺨과 오똑하게 솟은 조그만 코, 아몬드 모양의 붉은 눈까지 천사같이 귀여운 생김새였다.

아기가 방긋방긋 웃을 때면 시녀들도 귀엽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뒤늦게 황궁으로 들어온 프리츠와 그레텔도 아기를 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 예뻐요. 아기님이 아스텔 님을 꼭 빼닮으셨네요.”

곁에 있던 외조부도 그레텔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 정말 다행이다.”

그 말에 반대편에 있던 프리츠가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표정을 바로 했다.

외조부의 말을 끝으로 카이젠이 방 안에 들어왔기 때문인 듯했다.

“공작 부인에게 또 부탁을 해야겠군.”

그는 미안한 낯으로 그레텔에게 말을 꺼냈다.

그레텔도 6개월이 지나 배가 많이 불러 있었기 때문에 약을 부탁하기 미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레텔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걱정 마세요. 제가 미리 소식을 듣고 준비해 왔어요.”

그레텔은 미숙아에게 먹이는 영양제와 약들을 잔뜩 꺼내놓았다.

출산 소식을 듣자마자 저택에서 미리 준비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실망한 사람은 테오르였다.

“남동생이 생기는 줄 알았는데…….”

테오르는 황녀라는 말을 듣고 깊이 실망했지만 아기를 보더니 마음을 바꿨다.

“아기가 예뻐요. 요정 같아.”

그러고는 한시도 아기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공부 시간이나 식사 시간이 되면 아스텔이 그만 가라고 억지로 내보내야 했다.

그건 카이젠도 마찬가지였다만.

“선물이야.”

테오르는 시장에서 산 하얀 토끼 인형과 하늘색 토끼 인형을 아기의 양옆에 갖다 놓았다.

“두 개 다 주는 거니?”

하나는 프리츠와 그레텔의 아기에게 준다고 하지 않았나?

“작은 동생에겐 내 인형을 줄 거예요.”

그러고 보니 테오르가 산 베이지색 인형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럼 네 인형은?”

“음…….”

테오르는 곤히 잠든 아기를 보면서 의젓하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요. 이제 동생이 있으니까.”

아스텔은 흐뭇하게 웃으며 테오르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아기는 테오르 같은 오빠가 있어서 행복할 거야.”

* * *

아스텔은 그 후 석 달간 방 안에서 몸조리만 했다.

하루하루 먹고 자고 하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황후가 몸조리하는 기간엔 방문자도 제한되어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그레텔과 프리츠가 전부였다.

석 달이 딱 맞게 지났을 때, 카이젠이 그녀를 불러냈다.

“당신에게 보여줄 게 있어.”

그때쯤엔 아스텔도 충분히 걸어 다니고 전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또 밖에 나가실 건 아니죠?”

외출했다가 생긴 사건들을 생각하면서 묻자 카이젠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녀도 같이 데려갈 건데 밖에 나갈 수는 없지.”

어딜 가는 건데 황녀까지 데려가려는 건지 궁금했다.

“또 뭘 만드셨나요?”

아스텔은 알 만하다는 얼굴로 무덤덤하게 물었다.

카이젠이 출산 선물로 뭔가 준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다.

문득 시장에서 샀던 부적이 떠올랐다.

그때도 분명 뭔가 다른 방식으로 선물을 주고 싶다고 했었지.

카이젠은 순순히 고백했다.

“온실을 만들었어.”

“황후궁에는 이미 온실이 있는데요.”

아스텔이 지내는 황후궁에는 이미 커다란 온실이 있었다.

작은 정원 겸 다실로도 사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유리온실이었다.

황후궁에 농장을 만들 것도 아닌데 온실이 왜 자꾸 필요한가.

아스텔은 몹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카이젠은 실망하지 않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건 달라.”

카이젠은 직접 아기를 안고 앞장섰다.

아스텔은 편안한 실내용 드레스 위에 가벼운 코트를 걸치고 그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걸어간 곳은 황후궁 옆에 딸린 새 궁전이었다.

카이젠은 새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이 작은 궁전을 만들게 했다.

임신 초기부터 만들기 시작한 궁전은 공사가 끝나고 가구까지 전부 준비되어 있었다.

“이쪽이야.”

카이젠은 새 궁전의 맨 끝으로 아스텔을 이끌었다.

복도 끝에 커다란 나무문이 있었다.

두 사람이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문을 열었다.

천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눈부신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스텔은 반짝이는 빛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눈을 뜨자 맑고 푸른 빛과 화려한 꽃들이 나타났다.

“이건…….”

눈앞에 나타난 것은 푸른빛으로 감싸인 작은 온실이었다.

아스텔은 멍하니 온실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곳은 원형의 온실이었다.

푸른 벽옥으로 벽을 세우고 그 사이에 빠짐없이 유리를 끼워 넣었다.

유리창을 감싼 창틀도, 바닥을 장식한 아름다운 모자이크도 전부 푸른 보석이었다.

고개를 들자 높이 솟은 천장이 보였다.

천장은 반투명한 푸른 보석으로 된 커다란 돔이었다.

맑은 빛을 내는 푸른 천장 너머로 하늘에 떠 있는 솜털 같은 구름이 보였다.

“이게 대체…….”

아스텔은 온실을 돌아볼수록 말문이 막혔다.

온실 안에는 갖가지 색의 화분과 화려하게 피어난 꽃들이 가득했다.

신선한 풀냄새와 꽃향기가 사방에 은은하게 감돌았다.

“마음에 들어?”

그녀가 넋을 잃은 걸 보고 카이젠은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아스텔은 온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놀랄 만큼 아름다운 온실이었지만 너무 대단하다 보니 감탄보다 걱정부터 앞섰다.

“정말 아름답고…… 굉장히 비쌀 것 같네요.”

보석으로 만든 온실이라니 이게 무슨 사치인가.

아스텔이 멍하니 중얼거린 말에 카이젠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게 당신의 감상인가?”

“솔직한 감탄이에요. 이걸 만드는 데 얼마나 들었죠?”

카이젠은 잠시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았어.”

엄청난 돈이 들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어차피 황가의 재산으로 쓴 건데. 뭐.”

그는 국고로 쓴 것도 아니라며 무뚝뚝하게 항변했다.

카이젠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아스텔은 ‘황가의 재산’이라는 말에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이건.”

아스텔은 사방의 벽을 빠짐없이 채운 푸른 보석을 손으로 만졌다.

벽에는 색채와 농도가 조금씩 다른 푸른 보석이 모자이크처럼 박혀 있었다.

아스텔은 뒤늦게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제국의 황후가 받는 황가의 보물, ‘푸른 달빛’이었다.

“세상에, 이걸 다 여기다 쓰셨어요?”

푸른 보석은 황가의 소유인 광산에서 나온다.

황후를 상징하는 보석이라 역대 황후들이 약혼이나 결혼 선물로 받는 예물이기도 했다.

생산량이 많지 않아서 반지나 목걸이로만 한두 개씩 받는 건데.

“광산에 있는 걸 다 긁어오라고 했지.”

카이젠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스텔은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이걸 이렇게 많이 쓰시면 어떡해요?”

“문제 될 게 있어?”

그러나 카이젠은 아스텔을 바라보며 얄미울 만큼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게 황후는 당신뿐이니 이건 전부 당신 것이 되는 게 맞아.”

푸른 보석을 둘러보는 카이젠의 눈빛에 깊은 감회가 깃들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작게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이걸 쓸 일이 없을 테니까.”

“…….”

카이젠과 아스텔은 두 번 결혼했다.

두 번 모두 그는 아스텔에게 이 보석을 선물했었다.

그의 말은 두 사람이 이제 이혼과 결혼을 반복할 일이 없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대로 순탄하게 평생을 함께할 테니까.

가슴이 포근해질 만큼 낭만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깊이 공감하는 한편 지극히 현실적인 의문을 느꼈다.

“그럼 테오르와 그 애의 아내는요?”

“…….”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못했는지 카이젠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무책임하게 대답했다.

“그건……. 테오르가 알아서 하겠지.”

아스텔은 작게 혀를 차며 자신이 갖고 있는 푸른 보석을 테오르에게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아름답긴 하네요.”

아스텔은 맑은 햇살이 스며들어오는 온실 안을 쭉 둘러보며 솔직한 감탄을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온실은 정말 아름다웠다.

연한 푸른 빛의 보석이 향긋한 꽃들을 은은한 빛으로 감쌌다.

마치 푸른 보석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선한 꽃이 가득한 화려한 보석 안에서 정원을 감상하는 것 같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감탄에 기뻐하며 되물었다.

“역시 그렇지?”

“네, 비록 굉장히 불필요할 만큼 사치스럽지만요.”

아스텔의 말에 카이젠은 다시 실망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아스텔은 그의 풀죽은 모습에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온실을 만드신 거예요?”

그냥 다실도 아니고, 휴식실도 아니고, 서재도 아니고, 왜 하필 온실인 걸까?

카이젠은 대답 없이 창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품에 안긴 아기 황녀가 창문 아래에 핀 꽃송이를 보면서 손을 뻗었다.

“아우…….”

“이런, 아직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

카이젠은 아기가 꽃을 잡지 못하게 손을 거두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공작저에 온실을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어.”

아스텔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프리츠가 그레텔에게 결혼 선물로 저택 안에 커다란 온실을 만들어줬다는 것은 아스텔도 들었다.

그레텔은 언제나 약초 연구를 해야 하니까, 어디든 약초밭과 온실이 늘어나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치만 저는 약초를 기르는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당신에게 새 온실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지금 있는 온실은 부인들과 차를 마시는 용도로 쓰고 있잖아. 거기는 온종일 손님들이 드나들고.”

황후궁의 온실은 온실이라기보다 아름답게 꾸며진 응접실 겸 다실로 쓰이고 있었다.

아스텔은 그곳에 화려한 꽃을 장식해놓고 손님들과 차를 마셨다.

당연히 꽃을 가꾸는 정원사와 하인들이 따로 있었다.

“당신이 혼자서 황녀와 조용히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 이곳이라면 당신이 기르고 싶은 허브나 꽃을 길러도 좋을 테니까.”

여기는 황녀의 궁에서도 제일 끝에 있는 곳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조용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니 평온함을 즐기고 취미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라고 카이젠은 설명했다.

“그래도 굳이 이 보석으로 만드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

카이젠은 대답하지 않고 황녀를 안고 옆으로 가버렸다.

아스텔은 너무 과분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목적만은 나쁘지 않았다.

사적인 공간을 갖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황후궁에서는 어딜 가나 시녀들이 있고 언제나 손님들이 찾아와서 바빴으니까. 머리를 식힐 공간을 갖는 것도 좋겠지.

황녀의 궁에 딸린 작은 온실이라면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카이젠이 그런 세심한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아스텔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두 사람을 따라갔다.

카이젠의 품에 안긴 황녀가 창문 아래로 보이는 하얀 꽃을 보면서 조그만 손을 뻗었다.

“우으…… 아바…….”

“지금 아빠라고 한 거냐?”

아기가 바둥거리며 웅얼거리는 소리에 카이젠이 놀란 얼굴로 아기를 들여다봤다.

아스텔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옹알이한 거예요.”

“아니야, 아빠라고 했잖아.”

카이젠은 아스텔의 말을 듣지 않고 열렬한 눈빛으로 아기를 들여다봤다.

“다시 해봐라. 아빠라고 해봐.”

아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만 쪽쪽 빨았다.

“웅……?”

“분명히 아빠라고 했는데…….”

아스텔은 그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기는 어제도 저런 비슷한 소리를 계속했었다.

한나를 보고도 ‘아바아바!’ 하면서 바둥거렸는데.

아스텔은 그 사실을 지적해 줄까 하다가 관뒀다.

황녀는 카이젠이 하는 말에 관심을 잃고 다시 창문가의 꽃으로 손을 뻗었다.

당장 꽃을 잡고 싶은 것처럼 손가락을 오물거렸다.

“이걸 갖고 싶으냐? 하지만 진짜 꽃은 안 돼. 입에 넣을 수도 있으니까.”

카이젠은 아기를 달래면서 반대편 창가로 걸어갔다.

“대신 이걸 주마.”

그가 창가 아래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아스텔은 거기에 상자가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름다운 문양이 그려진 푸른색 상자가 꽃이 담긴 화분 사이에 가려져 있었다.

수십 권의 책을 넣을 수 있을 만큼 큰 상자였다.

카이젠이 한 손으로 뚜껑을 열어젖히자 그 안에 수북하게 쌓인 액세서리가 나왔다.

“이게 다 뭔가요?”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아스텔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황녀를 위해 모아둔 거야.”

“황녀가 쓸 보석을 벌써 사들이셨다고요?”

황녀는 이제 겨우 3개월인데?

카이젠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 3개월 동안 생각날 때마다 하나둘씩 샀는데 어쩌다 보니 좀 많이 모았군.”

그 말대로 조그만 목걸이와 반지, 머리핀들 사이엔 아기자기한 인형들과 조그만 장난감도 있었다.

보석과 인형과 장난감이 상자 안을 가득 채웠다.

이건 조금이 아닌데.

아스텔이 어이없는 눈길로 쳐다보는 가운데 카이젠은 작은 꽃 모양으로 만들어진 하얀 진주 머리핀을 집어서 아기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모서리가 둥글게 생겨서 다칠 위험이 없는 것을 고른 모양이었다.

황녀는 고사리 같은 하얀 손으로 꽃 모양 핀을 들고 유심히 살폈다.

아스텔도 아기가 들고 있는 머리핀을 봤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하얀 진주 위에 아침 햇살 같은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아기의 머리 색하고 잘 어울리겠네요.”

차마 잘 샀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잘 샀다고 칭찬하면 분명 내일부터 황녀의 보석을 두 배, 세 배로 사들일 게 뻔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우리 황녀는 당신을 닮았으니까. 뭐든지 잘 어울리지.”

또 아기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네.

아스텔은 그의 말을 일축하려다가 그냥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들 앞에서는 저런 민망한 소리를 하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황녀는 3개월 된 아기라 부모가 하는 말엔 관심이 없었고 손에 든 진주 꽃만 가지고 놀았다.

“갸아- 갸아-!”

“마음에 드나 본데.”

카이젠은 아기를 다루는 데 아주 능숙해졌다.

그간 테오르를 돌보면서 경험을 많이 해서 그런지.

예전의 카이젠이었다면 아기 황녀에게 꽃을 뜯어서 물려주고도 남았을 텐데.

아스텔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카이젠이 온실 문에서 중앙으로 보이는 창문 앞에서 멈춰 섰다.

“당신에게 줬던 그 부적.”

그가 창문 위에 있는 하얀 커튼을 매만지며 말했다.

“여기에 걸어서 주려고 했었지.”

황녀가 너무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며 카이젠은 몹시 아쉬운 듯 말했다.

아스텔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렇게 주려고 하셨던 거였군요.”

예상대로 출산 전에 선물로 이곳을 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기가 너무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계획을 맞추지 못한 것이겠지.

“이게 더 좋네요.”

아스텔의 목소리에 카이젠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스텔은 그와 아기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황녀와 함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에요.”

아기가 자라서 이곳에서 뛰어놀 미래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 옆엔 테오르와 사촌인 그레텔의 아기도 함께 있겠지.

아스텔은 품 안에 넣어뒀던 걸 꺼냈다.

“그럼 계획대로 여기 걸어둘게요.”

그건 카이젠이 준 부적이었다.

푸른 색실로 만든 별 모양의 부적.

카이젠은 그녀가 꺼낸 걸 보고 조금 놀랐다.

“그걸 가지고 다녔어?”

“아뇨. 폐하께서 뭔가 보여주신다고 하시길래 뭔지 몰라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챙겨왔죠.”

아스텔은 창가에 작은 부적을 걸어두었다.

푸른 보석으로 된 벽과 유리창, 그 위에 걸린 하얀 커튼과 조잡한 끈 장식의 특이한 조합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카이젠은 창가의 커튼과 그 위에 걸린 부적을 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기 이름을 생각했어.”

황녀는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았다.

황족들은 원래 석 달쯤 지난 뒤에 영지와 함께 이름을 정하는 게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뭔데요?”

카이젠의 시선이 아스텔과 벽에 걸린 부적을 차례로 향했다.

그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스텔라.”

에스텔에는 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에스텔라 황녀.

괜찮은 이름이었다.

“미리 생각해 두신 건 아니죠?”

“그냥 이걸 보는 순간 떠올랐지.”

아스텔은 꽃가지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좋은 이름이네요. 에스텔라.”

아스텔은 만족스러워하는 카이젠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기를 안고 있던 카이젠은 뒤늦게 아스텔에게 몸을 돌렸다.

아스텔은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그러고는 카이젠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카이젠은 아기를 안은 채로 멍하니 굳어졌다.

아스텔은 넋 나간 얼굴로 서 있는 카이젠을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선물 감사합니다.”

둘 사이에 있는 아기 황녀가 부모를 돌아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스텔이 웃으며 뒤로 물러나려는데 카이젠이 그녀의 팔을 잡고 다시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잇새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에스텔라가 보고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

정말 아기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려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로막혔다.

카이젠이 아스텔의 팔을 붙잡고 입술을 겹쳐왔다.

두 사람은 따스한 햇살이 비쳐드는 온실 안에서 아기를 사이에 둔 채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다.

* * *

다음 날, 새로 태어난 황녀는 공식적으로 에스텔라라는 이름을 받고 황녀의 영지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레스턴 공작가에도 새로운 후계자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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