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한여름 밤의 꿈
창문에 걸린 커튼 사이로 밝은 아침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아스텔은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방 안에서 눈을 떴다.
환한 빛이 유리창에 가득했다. 아무래도 늦잠을 잔 모양이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나른한 감각을 씻어내고 있는데 뒤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옆에 누워 있던 카이젠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스텔은 익숙한 온기를 느끼며 물었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조금 전에.”
“늦었는데 깨워주시지 그러셨어요.”
카이젠은 아스텔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곤히 잠들어 있길래 깨우고 싶지 않았어.”
카이젠은 언제나 아스텔을 소중하게 대했지만 지금은 전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그의 손이 천천히 아랫배로 내려갔다.
“아기는?”
이제 겨우 임신 한 달째였다.
아직 아기라고 할 만한 형체도 갖추지 못했을 것 같지만.
카이젠은 매일 아침 아기의 안부를 물었다.
배에 닿는 손에서 다정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스텔은 그의 품 안에 얼굴을 기대며 답했다.
“아직 자고 있겠죠.”
“그럼 조용히 해야겠군.”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목덜미에 닿는다.
카이젠은 다시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
아스텔은 가벼운 손길로 그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만하시고 일어나세요. 식사 준비가 끝났을 거예요. 곧 있으면 테오르도 올 테고요.”
테오르라는 말에 카이젠은 군말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아스텔은 익숙하게 무시하고 시녀들을 불렀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몸을 씻고 드레스를 갈아입자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테오르는?”
한나가 웃으며 말했다.
“황자님께서는 두 분 폐하와 함께 식사하시겠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런.”
아스텔은 서둘러서 카이젠과 함께 식당으로 갔다.
식당을 향해 걸어가는데 정원 쪽으로 통하는 복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궁 옆에 새로운 궁전을 짓는 소리였다.
“공사가 시작됐나 보네.”
카이젠은 아스텔을 위해 황후궁을 증축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새로 태어날 황손을 위해 궁전을 건축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겸사겸사 황후궁도 증축하면서 새로 연못도 만들고 호화롭게 단장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새로 생기는 궁전은 황후궁과 이어질 예정이었다만.
카이젠은 새로 온 비서관에게 여름 안에 황후궁을 증축하는 대신, 궁 안에 소음이 들리지 않게 하라고 엄중하게 명령했다.
임신 중인 아스텔이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피곤함을 느끼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최단기간 안에 증축 공사를 하면서 소음을 내지 말라니.
인간의 능력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소음에 카이젠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생각보다 시끄럽군.”
“낮에만 들리는 건데요. 뭐.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또 새 보좌관을 불러서 화를 낼까 봐 아스텔은 얼른 말했다.
벨리안 대신 새로 임명된 보좌관은 카이젠이 아스텔의 일로 매일 들볶아내서 몹시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벨리안은 카이젠의 성격을 잘 맞추긴 했지.’
아스텔은 벌써 임신을 이유로 소란을 떨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이미 카이젠이 충분히 소란스럽게 굴고 있었으니까.
아스텔은 함께 걸어가는 카이젠을 힐끔 돌아봤다.
‘그렇게 좋은 걸까?’
임신 소식을 들으면 기뻐하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다.
문득 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던 날이 떠오른다.
‘아이가 생긴 것 같아요.’
아스텔은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시의의 진찰을 받기 전에 그레텔에게 먼저 검사를 받았어요. 임신이 확실하다고 해요.’
‘…….’
카이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붉은 눈동자가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하니 굳어졌다.
왜 저러지? 기쁘지 않은 건가?
슬그머니 불안감이 피어나려던 찰나였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카이젠이 두 팔로 아스텔을 와락 끌어안았다.
‘폐, 폐하?’
당황한 아스텔이 그를 밀어내기 전에 낮은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고마워.’
미사여구로 가득한 기나긴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절절한 애정과 감동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입 밖에 내서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
아스텔은 그의 품 안에 안긴 채 따뜻한 행복을 공유했다.
그날의 일은 두 사람의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더니만.’
카이젠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완전히 돌변했다.
그는 갑자기 아스텔이 조금이라도 잘못될까 봐 매일 애지중지하며 조심조심 대하기 시작했다.
아스텔은 솜사탕으로 만든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가 녹아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전전긍긍하는 카이젠을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엄마!”
식당 문을 열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테오르가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테오르도 그새 많이 자랐다.
전보다 키가 많이 커서 옷을 전부 새로 맞춰야 했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니. 레빈이랑 놀고 있었어요.”
테오르는 개의치 말라는 듯이 웃으며 의자에 놓인 곰 인형을 가리켰다.
성장한 만큼 말하는 것도 좀 더 의젓해졌다니까.
세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서 아침을 들었다.
고소한 수프와 팬케이크, 다채로운 파이와 머핀이 가득했지만 아스텔은 깨작거리기만 하고 잘 먹지 못했다.
반쯤 남긴 수프를 밀어놓고 고개를 들자 똑같이 붉은색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 오늘도 입맛이 없어서 그래?”
“아침이라 그런지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안 드네요.”
아스텔은 얼마 전부터 이상할 만큼 입맛이 없었다.
시의에게 진찰을 받고 그레텔에게도 물어봤지만 딱히 이상은 없다고 했다.
아직 입덧이 시작될 시기도 아니고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제저녁에도 수프만 간신히 먹었잖아. 그 전날에도 입맛이 없다며 제대로 못 먹었고.”
카이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다니.
“이건 어때? 당신이 좋아하는 감자 팬케이크야.”
“괜찮습…….”
“그럼 이 오믈렛을 먹어봐. 아주 맛있어.”
카이젠은 직접 노릇노릇한 프리타타를 잘라서 접시에 담아 아스텔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만 제 손으로 들겠습니다. 폐하.”
시종들도 보는데 뭘 하는 거냐는 말이 목끝까지 나왔지만 아스텔은 꾹 참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시종들은 이미 익숙한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덤덤하게 서 있었다.
둘을 지켜보던 테오르가 작은 접시에 브리오슈를 하나 덜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아스텔에게 내밀었다.
“엄마, 이거 드세요. 맛있어요.”
여전히 속이 좋지 않았지만, 꽃잎 같은 작은 손으로 내미는 브리오슈를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고맙구나. 잘 먹을게.”
아스텔은 브리오슈를 포크로 집어 먹었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입맛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먹을 만했다.
아스텔이 작은 접시를 깨끗이 비우는 걸 보고 테오르는 신이 나서 새로운 접시에 다시 브리오슈를 차곡차곡 쌓았다.
‘…….’
아니. 계속 줄 필요는 없는데.
“엄마, 여기 있어요.”
순식간에 층층이 쌓인 브리오슈와 파이, 머핀이 눈앞에 놓였다.
“……그래.”
아스텔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포크를 들었다.
카이젠은 흡족한 눈빛으로 테오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
앞으로는 입맛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어야겠다.
안 그러면 두 사람이 매번 이렇게 유난을 떨 테니까.
“테오르도 많이 먹어야지.”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달콤한 자두 파이를 덜어줬다.
환한 아침 햇살이 식당 안을 밝은 빛으로 채웠다.
테이블에 앉아 얇은 크레페를 잘라 먹는 테오르가 있고, 그 옆에는 테오르에게 자두 파이를 잘라주는 카이젠이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임신 중인 아스텔이 있었다.
따스하고 평온한 아침이었다.
아스텔은 따스한 빛이 감도는 식당 안을 바라보며 새삼 감회에 젖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의 일이었지.’
아스텔은 작년 봄에 카이젠과 재회해서 여름이 시작될 무렵 수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6년 동안 숨겨왔던 테오르의 정체를 들켰다.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면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스텔은 평온한 기쁨을 느끼며 작은 체리 파이를 잘라 먹었다.
카이젠은 여전히 음식을 조금씩 입에 넣는 아스텔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봤다.
“더위 때문에 입맛이 없는 걸 수도 있어. 이참에 여름 별궁에 잠시 다녀오자니까.”
북서쪽에 있는 여름 별궁은 황가의 피서지였다.
날이 더워지면서 아스텔이 입맛을 잃자 카이젠은 계속 그곳으로 가자고 우겼다.
“그렇지만 무도회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데요.”
아스텔은 한여름의 가면무도회 행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황궁의 가면무도회는 무더운 여름날에 즐기는 독특한 사교 행사였다.
가면무도회는 다른 무도회와 달리 여름이 한창일 무렵 황궁의 중앙 정원에서 열린다.
황궁의 중앙 정원에는 화려한 분수대와 커다란 테라스, 파빌리온과 공연장까지 있었다.
초대된 사람들은 넓은 정원에서 시원한 음료를 맛보면서 밤새 가면을 쓰고 야외무도회를 즐겼다.
“당신 피곤한 것 같은데 가면무도회는 취소하는 게 어때?”
카이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가면무도회 같은 걸 좋아하지도 않았잖아.”
“아직 배가 부른 것도 아닌데 벌써 쉴 수는 없어요.”
어차피 6개월을 넘기면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한다.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배가 부르면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침실 안에 머무른다.
그때부터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외부인도 만나지 않는 게 황궁의 관습이었다.
아스텔은 6개월이 되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놓고, 출산 직전까지 마음 편히 쉬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목적도 있고.’
아스텔은 가면무도회의 예산안에 힐끔 시선을 줬다.
그녀는 이참에 프리츠에게 짝을 구해주고 싶었다.
‘오빠는 도통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라도 기회를 만들어서 짝을 구해주고 싶었다.
가면무도회는 연인이 생기는 좋은 기회였다.
공녀 시절의 아스텔이 가면무도회에 무심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황태자의 약혼녀가 가면무도회에 열을 올리면 다들 그녀가 정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작년에는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어서 가면무도회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스텔은 이참에 자신의 곁에 있는 나엔에게도,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한나에게도 혼처가 될 만한 짝을 찾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카이젠에게 그런 사정까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속뜻을 털어놓으면 임신 중에 쓸데없는 데 신경 쓴다며 화를 내겠지.’
아스텔은 그냥 에둘러서 말했다.
“오랜만에 열리는 행사라 다들 기대가 큽니다. 갑자기 취소해 버리면 참여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크게 실망할 거예요.”
“당신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카이젠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순순히 뜻을 굽혔다.
둘의 대화를 듣던 테오르가 뒤늦게 끼어들었다.
“나는 여름 별궁에 가고 싶은데. 거기엔 큰 호수가 있대요.”
아스텔은 미안한 듯이 테오르를 달랬다.
“별궁에는 내년에도 갈 수 있어.”
“여름에 가보고 싶은데.”
테오르가 풀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많이 실망한 것 같아서 마음이 쓰였다.
‘안 그래도 동생이 생기면 테오르가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는데.’
아스텔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무도회가 끝나고 한가해지면 가을이 되기 전에 잠시 다녀오자. 그러면 되겠지?”
“……응.”
테오르는 여전히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젠은 다정한 미소와 함께 손을 뻗었다.
“지금은 당신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 무리하지 마.”
카이젠은 조심스럽게 아스텔의 손을 감싸 쥐면서 부탁했다.
깊은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아스텔은 다정한 미소를 보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네, 폐하.”
카이젠은 식사를 마치고 황제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실망감이 감돌았다.
‘오늘도 실패했군.’
카이젠은 지난 며칠 동안 무도회를 취소하고 별궁에 가서 쉬자고 아스텔을 꾸준히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설득해도 아스텔은 매번 그럴 수 없다고 우겼다.
아스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이해가 되었다.
황후가 된 지 아직 1년밖에 안 됐고 작년에 그런 엄청난 일들이 있었으니.
남들에게 책잡히지 않게 무슨 일이든 정성껏 완수하려는 거겠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인가.’
카이젠은 답답해도 아스텔에게 우길 수 없었다.
괜히 언쟁을 벌여서 아스텔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스텔에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마르고 있는데.’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뻤지만 카이젠은 곧바로 현실을 자각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아스텔의 어머니인 공작 부인도 산후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고,
카이젠의 어머니인 선대 황후도 그를 낳은 뒤 건강이 악화되어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카이젠은 혹시라도 아스텔이 잘못될까 봐 두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편안하고 안락한 궁전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쉬라고 강요하고 싶었다.
테오르가 카이젠을 쫄래쫄래 따라오면서 기운 없이 물었다.
“아버지, 우리 그냥 지금 다 같이 여름 별궁에 가면 안 돼요?”
“뭐?”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여름 궁전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곳인지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새파란 호수 정 가운데에 아담하고 화려한 궁전이 있고 하늘 높이 솟은 성탑도 있다.
그곳에 가면 하루 종일 맑은 호수에서 배를 타고 놀 수 있다고.
사실 테오르의 도움을 받아서 아스텔을 설득하려는 심산이었다만.
‘괜히 어린 아들에게 기대감만 안겨주고 실망시킨 것 같군.’
카이젠은 뒤늦게 미안함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고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여름 별궁에 가고 싶으냐?”
“응.”
테오르는 레빈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고 싶어요. 엄마랑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카이젠에게 별궁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테오르는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동생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테오르도 기뻤다.
테오르는 예전부터 함께 놀 수 있는 동생이 있기를 바랐다.
동생을 만들려면 엄마가 힘들고 아프다는 말을 듣고 단념했을 뿐이었다.
‘동생이 생긴 건 좋은데…….’
문제는 동생이 생긴 뒤부터 엄마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임신 사실을 알린 뒤부터 엄마는 음식을 잘 먹지도 못하고 정원에 자주 나가지도 않았다.
제일 눈에 띄는 변화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였다.
한나와 시녀들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황제까지 모두들 엄마를 걱정하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대했다.
정확히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다들 엄마를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
‘동생 때문에 엄마가 아픈 걸까?’
조금 전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별궁에 가면 엄마가 좀 더 편안해질 수 있는 건가 보다.
테오르는 다시 한번 카이젠에게 부탁했다.
“별궁에 가면 엄마가 건강해지는 거예요? 그럼 기다리지 말고 지금 다 같이 별궁에 가면 안 돼요?”
“뭐?”
테오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맑은 눈망울에 수심이 가득했다.
“엄마는 별궁에 가서 쉬는 게 좋을 거라고 했잖아요.”
카이젠은 테오르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이제 보니 테오르도 아스텔의 상태를 많이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식당에서 두 사람이 나눈 얘기를 주의 깊게 들었던 거겠지.
카이젠은 무릎을 굽히고 테오르와 눈높이를 맞췄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여기 있어도 네 엄마는 괜찮을 거야.”
“정말?”
“그럼. 시의가 곁에서 정성껏 돌보고 있고 그레텔도…….”
카이젠은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약제사. 약초. 정원.
머릿속에 몇 가지 단어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구상이 떠올랐다.
그래. 그런 방법이 있군.
“그래. 그럼 내가 다시 아스텔을 설득해 보겠다.”
“정말요?”
카이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라오는 시종에게 명령했다.
“정원사를 불러라.”
* * *
한나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아스텔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곁에서 돌봐드릴게요.”
아스텔이 테오르를 낳을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을 내내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나는 카이젠 못지않게 아스텔을 애지중지하면서 살뜰하게 보살펴줬다.
유난히 식욕이 없는 아스텔을 위해 온갖 종류의 음식을 조금씩 만들어왔다.
“뭐든 한 입씩만 드시면 됩니다. 그러시다 보면 충분히 한 끼를 채우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식탁에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수많은 요리를 가져왔다.
다들 나를 너무 과보호하는 것 같은데…….
아스텔은 한나의 기세에 눌려서 잘 익은 사슴 고기를 한 조각 집어 먹었다.
담백한 고기가 풍미 가득한 소스와 함께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흠잡을 데 없는 맛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테오르를 가졌을 때는 이렇게 식욕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때는 첫 임신이라서 그런가.
아스텔은 어머니 없이 자랐고, 주변에서 임산부를 본 적도 없었지만, 임신과 출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유모에게 아이를 가진 여자가 어떤 것들을 조심해야 하는지 귀가 닳도록 배운 덕이었다.
아스텔은 태어나면서부터 황후가 될 거라는 기대를 받았으니, 그것도 일종의 예비 황후 교육이었으리라.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테오르를 가졌을 때는 두렵고 혼란스러웠지만 이번엔 순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유독 특이한 증상이 있어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왜 이렇게 식욕이 없는지 모르겠네.”
한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스텔은 여전히 입맛이 없었다.
가면 갈수록 식욕도 줄고 기운도 줄어들었다.
시의에게 몇 번이자 진찰을 받았지만 아스텔과 배 속의 아기 모두 정상이었다.
시의는 어쩌면 입덧의 전조증상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쯤 되자 아스텔도 당황스러웠다.
무도회날까지 겨우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카이젠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무도회 따위 취소하고 쉬러 가자고 채근했지만 아스텔은 동의하지 않았다.
‘아픈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무도회를 취소하기도 그렇고.’
식욕이 없을 뿐 식사를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무도회를 취소해 버리는 건 좀…….
“황후 폐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종이 무도회 일로 알현을 청해왔다.
“무슨 일이지?”
시종은 울상을 지으며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무도회의 일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
시종이 납작한 상자를 가져왔다.
“정원에 갑자기 이런 것들이 생겨서…….”
나무로 된 상자 안에는 작은 꽃들이 가득했다.
아스텔은 그게 뭔지 한눈에 알아봤다.
“레인리프네.”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보기 드문 꽃이었다.
이 꽃은 주변에 있는 화초를 죽인다.
그 때문에 정원이나 농장에서는 보이는 족족 뽑아서 없애버린다.
“중앙 정원에 있는 분수대에 생겨난 걸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많이?”
상자 안에는 레인리프가 가득했다.
어림잡아도 50송이는 될 듯했다.
“이건 반의반도 안 됩니다.”
“그 정도로 많다고……?”
순식간에 그렇게 많이 생겼다니 의아한 노릇이었다.
레인리프는 사람한테는 크게 위험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피부에 계속 닿으면 발진이 일어나고 더 심해지면 물집도 생긴다.
‘그 정도까지 되려면 꽃을 몸에 대고 있어야 되겠지만.’
그냥 피부에 스치는 정도로는 아무 일도 없다.
사람에게는 크게 해가 없지만 문제는 정원이었다.
이 꽃이 많이 생기면 정원에 있는 다른 화초들이 다 죽어버린다.
성장 속도도 어마어마하게 빨라서 그냥 놔두면 한 달 사이에 정원을 다 점령해 버릴 정도였다.
“정확히 어디까지 퍼졌나요?”
“현재는 중앙 정원의 분수대 근처에만 있습니다.”
시종과 함께 온 정원사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싹이 난 것까지 살피려면 더 자세히 수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씨앗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모르니까 며칠간 두고 보면서 살펴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곧 조만간 있을 무도회의 일정을 뒤로 미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지요.”
아스텔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꽃은 수도에선 보기 드문 것인데 어디서 들어왔을까?’
게다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많이 퍼지다니.
아무리 봐도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꽃이 들어온 경로를 조사해 봐야겠어. 혹시라도 식재료나 시녀들에게서 딸려왔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중앙 정원 외에도 다른 곳까지 퍼져 나갈 염려도 있었다.
다행히 해답은 금방 찾아냈다.
아스텔이 씨앗의 출처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황제의 새 보좌관이 직접 찾아와서 사죄했다.
“소,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전부 제 불찰입니다.”
새로운 보좌관은 순해 보이는 얼굴의 앳된 청년이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증축 공사에 쓰려고 들여온 자재에서 씨앗이 묻어온 모양입니다. 제대로 살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조사 결과 공사에 쓰이는 목재에 레인리프의 씨앗이 묻어 있었다고 말했다.
아스텔은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건축 자재는 이쪽으로 왔을 텐데요. 왜 중앙 정원에 꽃이 핀 거죠?”
보좌관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그, 그게…… 황궁 안에 사람이 많다 보니 씨앗이 다른 데로 옮겨졌을 수도…….”
“…….”
보좌관의 행동은 누가 봐도 몹시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아스텔은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황제의 보좌관이 황궁의 정원을 망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다행히 이번에도 해답은 쉽게 나타났다.
여름의 가면무도회 행사가 뒤로 미뤄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카이젠은 아스텔을 찾아왔다.
“행사도 취소된 김에 날이 더우니까 여름 별궁으로 옮기는 게 좋겠군.”
“…….”
아스텔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그냥 우연한 일인가 했는데.
정해진 듯이 맞물려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카이젠의 잘생긴 얼굴이 가장 분명한 증거였다.
‘하여간…….’
마음 같아서는 정원에 이상한 꽃을 심은 범인을 더 명확히 밝혀내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황제를 범인으로 체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잠시 다녀오는 게 좋겠네요.”
아스텔이 담담하게 동의하자 카이젠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서렸다.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만족하는 듯한 웃음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아스텔은 그를 살짝 쏘아본 뒤 무심하게 선언했다.
“가면무도회는 정원이 정리되면 그때 하는 것으로 해둘게요.”
“그래.”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지 카이젠도 쉽게 동의했다.
결국 휴가를 갈 것인지, 무도회를 열 것인지 하는 논쟁은 휴가 먼저 가고 그다음에 무도회를 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름대로 타협된 건가.’
아스텔은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시종들을 보내서 별궁을 정리하라고 말해야겠네요.”
아무리 황가의 여름 별궁이지만, 황제가 가지 않을 때는 시종들 몇 명이 관리한다.
부족한 게 많을 테니 황제 일행이 방문하기 전에 일손을 더 보내서 준비시켜야 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언제든 갈 수 있게 준비해 놨어.”
“…….”
아스텔은 카이젠의 뻔뻔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이제는 속일 마음도 없는지.
아스텔은 알면서도 그냥 속아주기로 했다.
카이젠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아스텔을 쉬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입맛이 조금 없을 뿐인데.
쓸데없이 자상한 배려긴 하다만.
“미리 다 준비하셨다니 안심이네요.”
아스텔이 무심하게 중얼거리자 카이젠이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 위에 입술을 댔다.
아스텔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 * *
황가의 여름 별궁은 제국의 북서쪽에 있었다. 대부분의 고성이 그러하듯 이곳에도 지명을 딴 이름이 존재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여름 별궁을 그냥 ‘물의 성’이라고 불렸다. 의심할 바 없이 성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호수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성은 마을 하나가 들어찰 만큼 넓은 호수의 중간에 있었다. 정확히는 호수의 가운데에 있던 작은 섬에 성을 쌓아 올린 것이었다. 섬의 경계선 끝까지 돌벽을 둘러친 덕에 멀리서 보면 성이 호수 위에 동동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스텔은 창문을 열고 멀리 보이는 하얀 성벽을 확인했다.
“도착했네요.”
순백의 석조로 만든 성이 새파란 호수 위에 비쳤다.
그 모습은 물 위에 떠다니는 새하얀 배를 연상시켰다.
“정말 예뻐요. 동화에 나오는 성 같아!”
아스텔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던 테오르가 일어나 창문가에 매달린 채 탄성을 내뱉었다.
아스텔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화사한 햇빛이 마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저 앞에는 푸른 호수가 맑은 햇살을 머금고 잔잔히 물결치고 있었다.
일행을 태운 마차가 느릿한 오후의 열기가 감도는 흙길을 따라 호수를 향해 달려갔다.
테오르는 호수와 성을 구경하느라 창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아스텔도 햇빛에 감싸인 아름다운 정경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
어릴 때 몇 번 와보긴 했지만 오랜만에 보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계획에 없던 일인데, 그래도 이곳에 오기로 결정한 건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스텔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맞은편에 앉은 카이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왜 웃으세요?”
아스텔이 슬쩍 핀잔을 담아서 묻자 그가 눈가를 접으며 딴청을 피웠다.
“여기 오니까 당신이 편안해 보여서.”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요.”
물론 몇 분 뒤면 성안에 들어갈 것 같지만.
카이젠은 낮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황궁 안에서는 그렇게 편안한 미소를 볼 수가 없었거든.”
“…….”
그랬나.
황궁에서는 좀 피곤하긴 했다.
해야 할 일도 있고 보는 눈도 많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가 도개교를 지나 성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성벽을 통과하자 녹음으로 뒤덮인 성의 앞마당이 나왔다.
일행은 보름 정도 이 성에 머물기로 했다.
원래는 카이젠과 아스텔, 테오르. 세 가족이 함께 가는 휴가였다.
휴가를 가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자마자 카이젠이 먼저 말했다.
“후작도 함께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가 말한 사람은 아스텔의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이었다.
테오르도 후작을 잘 따르고 아스텔도 외조부인 후작을 두고 가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을 테니까.
예상대로 아스텔은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제가 할아버님께 말씀드릴게요.”
카이젠은 출발 준비를 하기도 전에 한 사람을 더 추가했다.
“그레텔도 데려가지. 그간 여러모로 고생했는데 이렇게라도 보상해 주고 싶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레텔을 데려가는 건 아스텔을 위해서였다.
황궁의 시의를 비롯해 많은 의사를 데려갈 예정이었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약제사도 한 명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레텔이라면 아스텔도 마음 놓고 몸 상태를 상담할 수 있을 테니까.
아스텔은 이번에는 조금 머뭇거렸다.
“글쎄요. 약초 학교를 준비하는 일로 바빠서 함께 가겠다고 할지…… 일단 제가 물어볼게요.”
다행히 그레텔은 흔쾌히 승낙했다.
오히려 황가의 별궁에 갈 수 있다니 영광이라고 기뻐했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공작님은 안 가시나요? 그분은 일 때문에 여름 내내 수도에 계시려나요.”
“글쎄요.”
그 말을 듣던 테오르가 아스텔을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 프리츠 삼촌도 같이 가면 안 돼?”
아스텔은 조금 고민하다가 카이젠에게 물었다.
“프리츠 오빠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굳이 안 된다고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예전에도 친한 귀족들을 황가의 휴가에 초대하는 일은 흔했다.
카이젠은 고민 없이 허락했다.
오히려 아스텔이 괜히 눈치를 보면서 일일이 허락을 받는 게 불편할까 봐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당신 뜻대로 해. 당신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데려가도 좋아.”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날의 기억을 돌이키면서 카이젠은 조금 후회했다.
얼마 후 아스텔은 세르벨을 접견하다가 그가 여름 내내 수도에 있을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별궁에 초대했다.
거기에 근위기사단 때문에 함께 포함된 린든과 아스텔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한나까지 일행에 포함되었다.
결국 황가의 여름 휴가는 아스텔과 테오르, 카이젠, 칼렌베르크 후작과 한나, 프리츠, 그레텔과 린든, 세르벨까지 모두 함께 가는 여행이 되어 버렸다.
‘살아 있었으면 공작도 데려왔을 것 같군.’
마차에서 내리는 인원들을 바라보면서 카이젠은 슬쩍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세 가족이 오붓하게 보내고 싶었는데.
올해가 세 명이 함께 보내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여름이니까.
작년에는 정신없이 지나가느라 계절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다행히 올해는 평온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스텔이 기운이 없는 것만 제외하면 걱정거리가 없을 정도였다.
‘괜찮아져야 할 텐데.’
아스텔은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도 내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황궁에 있을 때보다는 편안해 보였지만 점점 더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부디 이곳에서 편히 쉬면서 회복하면 좋으련만.’
카이젠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아스텔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성안에 들어서자 밖에서 볼 때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백조 같은 백색의 외관과 어울리게 성안도 크림색과 연청색의 화사하고 아기자기한 가구들이 가득했다.
“성을 구경해도 돼요?”
테오르는 짐을 내려놓자마자 성안을 둘러보고 싶어 했다.
“그럼 일단 구경부터 할까?”
다른 일행은 짐을 푸르고 쉬라고 하고 아스텔은 카이젠과 함께 테오르를 데리고 성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나이 든 시종이 성안을 안내했다.
황가의 별궁이었디만 성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3층 규모에 몇 개의 성탑으로 구성된 작고 아담한 곳이었다.
테오르는 동화에 나오는 성 같다고 오히려 좋아했다.
“이쪽으로 가시면 호수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성벽 뒤쪽에는 호숫가를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었다.
세 사람은 성을 둘러보고 물가로 나갔다.
날씨는 눈이 부실만큼 밝았다.
아스텔은 시녀가 가져다준 양산을 받쳐 들고 호숫가를 걸었다.
테오르는 성벽을 따라 걸으며 호숫가의 자갈들을 구경했다.
맑은 물 안에 알록달록한 조약돌이 가득했다.
투명한 물이 잔잔하게 물결칠 때마다 색색의 조약돌이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호수 안에서 수영하셔도 됩니다.”
“정말요?”
시종의 설명에 테오르가 반색하며 물었다.
당장에라도 블린과 함께 호수 안으로 뛰어들 것처럼 보였다.
아스텔은 황급히 테오르를 달랬다.
“오늘은 도착한 첫날이니까 물가에서 놀고 저녁에 배를 타자.”
테오르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예의 바르게 대답하더니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
늙은 시종은 어린 황자님이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봤지만 아스텔은 조금 황당한 기분이었다.
‘한 살 더 먹었다고 저렇게 말을 잘 듣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빨리 철이 드는 거 아닌가.
아스텔의 당혹스러운 기분을 눈치챘는지 카이젠이 곁으로 다가왔다.
“저 녀석이 당신을 걱정해서 그래.”
“네?”
카이젠이 호숫가에서 놀고 있는 테오르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다들 당신을 걱정하는 걸 눈치챈 모양이야. 당신이 식사도 제대로 못 하니까 많이 힘든 건지 걱정하고 있더군.”
‘이런…….’
어린 테오르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니 안쓰러웠다.
아픈 게 아니라 입맛이 없을 뿐인데 괜히 걱정만 시켰네.
앞으로는 테오르가 보는 앞에서 억지로라도 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테오르는 이곳에 와서 무척 즐거워 보였다.
“생각보다 더 좋아하네요.”
아스텔은 몇 걸음 앞에 있는 테오르를 보며 말했다.
테오르는 블린과 함께 호숫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가를 걷던 카이젠은 맑은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아스텔을 돌아봤다.
답답하고 무거운 드레스 대신 가벼운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아스텔은 오랜만에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당신도 즐거워 보이는군.”
아스텔은 조금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한가롭게 보내는 것도 오랜만이라서요.”
그의 말대로 오랜만에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다.
황궁에서는 언제나 위엄을 지키느라 피곤했다.
순행을 나갔을 때도 황후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처럼 편히 쉴 수는 없었다.
이곳은 휴양지인 데다 소수의 시종과 친인들뿐이라서 그런지 저절로 긴장이 풀렸다.
이래서 사람들이 휴가를 오는 건가.
뜨거운 햇빛이 호숫가의 풀잎을 환하게 비췄다.
햇빛에 달아오른 성벽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열기가 피어올랐다.
길을 걷던 아스텔은 문득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주변이 흔들렸다.
눈앞이 크게 흔들린다 싶더니 천천히 세상이 기울어졌다.
“아스텔!”
뒤에서 카이젠의 비명이 들렸다.
* * *
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날은 첫째 날과 둘째 날이라고 하던가.
아직 첫날이 지나가지도 않았다.
즐거움은커녕 여행을 시작도 못 했는데 왜 벌써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스텔은 침대에 기대앉은 채 그런 허망한 생각을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곁에서는 카이젠이 시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소, 송구합니다, 폐하.”
늙은 시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폐하, 저는 괜찮습니다.”
침대에 누운 아스텔은 카이젠을 안심시키려고 말했다.
“괜찮기는 당신 쓰러질 뻔했잖아.”
한참 시의에게 화를 내던 카이젠이 아스텔을 돌아봤다.
아스텔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햇빛이 비치는 호숫가를 둘러보다가 현기증을 느꼈다.
호숫가를 둘러봤을 뿐인데 갑자기 어지러워서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카이젠이 놀라서 붙잡아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하필이면 도착하자마자 어지러워서 쓰러질 뻔하다니.
유난히 입맛이 없더니 이제는 기운도 없는 건가.
시의는 아스텔을 면밀히 진찰한 뒤 말했다.
“약한 몸살 기운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몸살이라고? 몸살인데 사람이 왜 쓰러져?”
“쓰러진 게 아닙니다. 잠깐 어지러워서…….”
반박하던 아스텔은 카이젠의 눈빛을 받고 말끝을 흐렸다.
놀란 카이젠은 아스텔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그대로 끌어안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 후 아스텔은 침대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지만 카이젠이 허락하지 않아서 얌전히 누워 있어야 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요. 푹 쉬면 나아질 거예요.”
아스텔은 그렇게 카이젠을 달랬다. 아픈 사람은 자신인데 그를 달래야 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다만.
그래도 카이젠의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 정말 괜찮아?”
테오르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아스텔의 품안에 안겼다.
“그래. 잠깐 더워서 어지러웠던 것 뿐이야.”
카이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성 안에서 푹 쉬어.”
이런 일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쉴 수 있게 나가자.”
카이젠은 테오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테오르는 카이젠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오자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후작과 프리츠, 그레텔이었다.
“별일 아니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말에 휴식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아스텔의 곁에 있던 한나가 밖으로 나와서 테오르를 데려갔다.
“황자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얼른 식사부터 하셔야지요.”
테오르는 기운 없는 얼굴로 한나의 손을 잡고 따라갔다.
별로 먹고 싶지 않지만 상황이 안 좋으니 얌전히 말을 들어주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저녁도 못 들었겠군.”
“저희는 괜찮습니다, 폐하.”
카이젠의 말에 프리츠가 위로하듯 말했다.
“왜 저렇게 힘들어하는지 모르겠군.”
카이젠은 시종이 가져온 음료를 단번에 들이켜며 한탄했다.
“체질이라서 그런 듯합니다.”
한쪽에 있던 후작이 조용히 말했다. 카이젠이 그에게 시선을 주자 후작은 설명을 이었다.
“제 아내도 그랬고. 저 애의 어미도 그랬지요.”
“어머니가요?”
프리츠가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듯 놀라며 물었다.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너를 가졌을 때는 멀쩡했는데 아스텔을 임신했을 때는 많이 힘들어했다.”
그레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하게 두 번째 임신 때 더 힘들어하는 여자들이 있다고 듣기는 했어요.”
“그게 특이한 겁니까?”
“대부분은 첫 임신이 힘들고 두 번째는 수월하거든요.”
같은 병도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가졌을 때 몸에서 나타나는 변화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그레텔은 자신이 만나본 임산부들을 언급하며 그렇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우선 황후 폐하도 아기님도 무사하시니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날 밤은 무척 조용히 지나갔다.
황후가 병환으로 몸져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뒤이어 황제가 시의에게 몹시 분노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예정되었던 소박한 환영식도 취소되었다.
시종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성안을 걸어 다녔다.
호수 근처를 지키는 병사들도 괜한 잡음을 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밤을 보냈다.
일행의 도착으로 시끌벅적했던 작은 성은 금세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쉬세요.”
아스텔은 다 괜찮다며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식사로 들어온 수프와 생선 요리도 깨끗이 비웠다.
“낮에 조금 어지럽긴 했지만 식사하는 덴 지장이 없네요. 몸은 오히려 괜찮은 것 같아요.”
그걸 보고서야 카이젠은 조금 안도했다.
아스텔이 그렇게 잘 먹는 걸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물론 그를 안심시키려고 더 열심히 먹은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저녁을 들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드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시의를 내보냈다.
아스텔은 피곤한지 금방 깊이 잠들어버렸다.
그러나 카이젠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의에게서 몇 번이나 다시 확답을 받았고, 그레텔의 위로도 들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침실 안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곤히 잠든 아스텔을 깨울까 봐 밖으로 나왔다.
“폐하?”
밖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놀라서 다가왔다.
“잠이 안 와서 나왔을 뿐이다. 신경 쓰지 마라.”
그는 바람이나 쐴 겸 복도를 걸어갔다.
테오르는 한나가 저녁을 먹이고 일찌감치 재웠다.
다른 일행도 모두 잠든 모양이었다.
이곳은 워낙 작은 성이라 다른 일행이 머무는 거처도 다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복도 끝에 다다르자 호수 쪽으로 난 테라스에 불빛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카이젠은 유리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테라스 안에는 후작과 프리츠가 함께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잠이 안 와서 잠시 시간을 때우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3층의 중앙에 있는 테라스였다.
테라스 너머로는 호수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하얀 달빛을 머금고 있는 호수의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물가에서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여름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괜찮다면 나도 동석하고 싶군.”
카이젠은 두 사람이 물 한잔 없이 앉아 있는 걸 보고 시종에게 손짓했다.
“마실 걸 가져와라.”
눈치 빠른 시종이 시원한 백포도주와 아기자기한 작은 디저트가 종류별로 가득 담긴 그릇을 내왔다.
후작과 프리츠는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카이젠은 둘에게 직접 술을 따라줬다.
카이젠은 이 두 사람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프리츠는 몹시 공손했지만 그에게 약간 거리를 뒀다.
죽은 공작 때문일까.
그 일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카이젠은 공작을 죽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변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공작이 아니라 아스텔 때문이라면…… 변명하고 싶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프리츠와 달리 늙은 후작이 그를 싫어하는 건 부정할 바 없이 아스텔 때문이었다.
술잔을 들고 함께 자리에 앉았지만 딱히 할 얘기가 없었다.
테라스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었나?”
“그. 그게…….”
카이젠의 물음에 프리츠가 헛기침하며 후작에게 눈길을 돌렸다.
후작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스텔이 제게 찾아온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카이젠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프리츠는 얼른 달래듯이 덧붙였다.
“황후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임신하셨을 때는 어떠셨는지 여쭤보고 있었습니다.”
“그건 나도 궁금하군.”
아까 후작은 아스텔이 테오르를 가졌을 때는 지금보다 순탄했다고 말했지만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보면 좋을 듯했다.
이제 곧 입덧도 할 텐데 테오르를 가졌을 때는 상태가 어땠고 뭘 즐겨 먹었는지 낱낱이 알아두고 싶었다.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나?”
그의 열렬한 눈빛을 보고 후작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보였다.
“글쎄요. 뭐,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후작은 천천히 옛 기억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 * *
7년 전의 그날은 지독하게 평범한 날이었다.
흐린 하늘에선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잿빛으로 흐려진 정원에는 옅은 물안개가 감돌았다.
이상할 만큼 평온해서 오히려 불길한 기분이 드는 날이었다.
칼렌베르크 후작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열어놓은 유리창을 닫았다.
눅눅한 습기가 서재 안으로 들어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작은 오래전에 영지를 잃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영지 근처의 작은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현 황제의 조부인 길베르트 황제는 후작가의 영지를 빼앗았지만, 그 땅을 다른 귀족에게 내주지는 않았다.
후작가의 영지는 황가의 직할지로 남았다.
작은 저택 안에는 쓸쓸한 물안개처럼 슬픔이 감돌았다.
얼마 전, 가문의 후계자였던 손자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고, 후작 부인도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저택 안에는 늙은 후작만 외롭게 남아 있었다.
그 해는 후작가에 불운이 겹치는 해였다.
손자가 죽기 전에는 외손녀인 아스텔이 하루 만에 황후 자리에서 쫓겨났다.
후작은 사랑하는 외손녀의 불행에 가슴이 아팠다.
‘가엾은 것.’
후작을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든 건 아스텔이 이혼 후에 행방을 감췄다는 점이었다.
사위인 공작이 아스텔을 찾고 있다고 했지만 조금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 녀석을 믿느니 차라리 아스텔을 내쫓은 젊은 황제를 믿는 게 낫지.’
후작은 오래전부터 사위인 공작을 몹시 증오했다.
이제는 젊은 새 황제도 비슷하게 증오스러웠지만.
“저…… 후작님.”
눅눅한 회색 안개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데, 늙은 하인이 창백한 표정으로 문을 두드렸다.
“왜 그러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시종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했다.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후작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스텔이 왔다고?”
하인은 변명하듯 더듬더듬 설명을 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제가 공녀님이신 줄 몰라뵙고 내보내려고 하다가 그만…….”
후작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서 있었다.
“아스텔?”
그를 보고 여자가 후드를 벗었다.
밝은 백금색 머리카락과 수척한 얼굴이 드러났다.
의심할 바 없는 아스텔이었다.
“할아버지.”
“네가……. 아니, 이게 대체…….”
하인이 왜 아스텔을 내쫓으려 했는지 이해가 갔다.
얼핏 봤을 땐 후작도 아스텔을 못 알아볼 뻔했다.
아스텔은 무늬 없는 뻣뻣한 모직 드레스를 입고 낡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풀어놓고 화장기 없는 얼굴을 창백하고 까칠해 보였다.
비를 맞았는지 옷은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스텔은 지친 얼굴로 울먹이며 후작에게 걸어왔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가 있느냐. 무사하게 돌아왔으니 됐다.”
어디에 가서 뭘 했는지는 몰라도 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하긴 힘들었겠지.’
황태자의 약혼녀로 자라면서 일찍부터 철이 들긴 했지만, 아스텔은 공작가의 저택 안에서 애지중지 귀하게 자란 공녀님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공녀가 집을 떠나 혼자 지내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
후작은 외손녀가 안쓰러워서 가슴이 아팠다.
“우선 이리 들어와라.”
후작은 그녀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그보다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아스텔이 그에게 몸을 기울이고 작게 속삭였다.
“무슨 일인데?”
“여기서는 안 돼요. 정말 급한 일이에요.”
후작은 아스텔의 불안한 목소리를 듣고 상황을 짐작했다.
분명 새 황제. 그리고 아비인 공작과 관련된 극비 사안이겠지.
후작은 아스텔의 손을 잡고 작은 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딸린 작은 협실은 원래 침실 주인의 기도실로 쓰이는 공간이었다.
신앙심이 없는 후작은 이 작은 방을 귀찮은 짐을 넣어두는 창고로 사용했다.
다행히 지금은 집을 정리하느라 텅 비어 있었다.
한 평이 겨우 넘는 방은 둘이 들어가기에도 비좁았다.
후작은 문을 닫아걸고 아스텔과 마주 보고 섰다.
“여기는 안전하다.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봐라.”
후작이 채근하는데도 아스텔은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조용한 그늘이 드리웠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후작의 불안감도 증폭되었다.
‘무슨 말인데 이렇게 뜸을 들이나.’
후작이 초조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잠시 후 아스텔이 고개를 들었다.
하얗고 수척한 낯빛임에도 연녹색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 아이를 가졌어요.”
* * *
“…….”
프리츠는 말없이 외조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인이었던 후작은 꽤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이야기를 전할 때도 언제나 미사여구 없이 솔직하게 본론만 말했다.
지금도 외조부는 중요한 사실만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걸 듣는 프리츠는 죄책감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그때 아스텔을 붙잡았어야 했는데.’
그 당시 프리츠는 아스텔이 황후 자리를 포기하지 말고 가문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멍청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힘겹게 황후 자리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 아스텔을 감싸주고 보호해 줬어야 했는데.
자신이 돌봐주고 보호해 줬다면 아스텔과 외조부가 6년 동안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 번이나 곱씹었던 후회지만 외조부의 회상을 듣고 나니 더욱더 사무치게 후회가 밀려왔다.
프리츠는 회한이 가득한 표정으로 외조부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카이젠을 돌아보고 헛기침을 했다.
카이젠은 처참한 표정으로 후작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카이젠은 당장에라도 아스텔에게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통곡할 것 같은 침통한 눈빛이었다.
반면 후작은 유유히 와인을 들이켰다.
“임신 얘기를 듣고 정말 기절할 만큼 놀랐지요.”
앞에 있는 두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후작은 카이젠에게 시선을 줬다.
몇 번을 다시 봐도 테오르와 똑 닮은 얼굴이다.
오늘따라 예전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가 더 얄밉게 느껴졌다.
‘아이를 포기하길 바랐는데.’
그는 어린 손녀가 황제의 아이를 포기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스텔의 뜻은 확고했다.
후작은 난감했지만 아스텔의 마음을 듣고 손녀를 돕기로 했다.
“임신을 숨기는 일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후작은 아스텔을 위해 저택에서 가까운 숲에 작은 오두막을 구했다.
누가 알지 못하게 모든 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처리했다. 하지만 거처를 구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얼마 후 입덧이 시작되자 진짜 고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입덧이 심해서 식사도 못 하고 기운 없이 누워서 앓기만 했습니다. 아픈데 의사를 불러볼 수도 없어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정도였다고요……?”
첫 출산을 지나고 두 번째로 생긴 아이라서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하시더니.
그런 말을 해서 테오르를 가졌을 때는 수월하게 넘어간 줄 알았다.
후작은 프리츠를 타박했다.
“그럼 스무 살 된 아이가 첫 임신을 했는데 임신 과정이 쉬울 줄 알았느냐?”
카이젠의 표정은 점점 더 침통해졌다.
후작은 일부러 둘이 죄책감을 느끼고 더 잘해주라고 과장해서 말했지만 아스텔의 임신 기간은 정말 힘들었다.
입덧이 심하고 초산이라 나날이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소박하고 즐거운 기간이기도 했다.
그 당시 후작은 나름대로 부유했다.
모아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아스텔을 위해 뭐든 구해줄 수 있었다.
애지중지하던 외손녀가 아이를 가진 채 숲속에 숨어 있었다.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손녀를 위해 썼을 것이다.
후작은 모아둔 재산을 털어서 아스텔의 은신처를 아기자기하게 꾸며주고 온갖 진귀한 음식과 임산부에게 좋다는 약재를 다 사들였다.
아스텔이 조금도 불편을 느끼지 않게 집 안을 고급스러운 가구로 꾸미고 식기부터 침구까지 전부 최고급으로 구해왔다.
식사도 좋은 것만 주기 위해 각 지역의 상단에 연락을 보내서 최고급 식재료와 몸을 보양하는 약재들을 전부 가져오게 했다.
물론 전부 후작 자신이 먹을 거라고 말하고 사 왔다.
자신이 먹는 것처럼 하인들에게 요리를 시킨 뒤, 그걸 몰래 아스텔에게 가져다주는 식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운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다행히 워낙 조심스럽게 처리해서 눈치채는 사람들은 없었다.
지켜보던 하인들은 의심하는 대신 걱정스럽게 수군거렸다.
‘연로하신 후작님께서 손자분의 일로 충격을 받아 잘못되신 게 아일까?’
이러다 큰일이라도 나는 게 아니냐며 몹시 걱정스러워했다.
후작은 하인들이 수군대는 걸 들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이 맞다는 걸 확인시켜 주듯이 집안에 칩거하고 앉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돈만 써댔다.
‘하나뿐인 후계자를 잃고 슬픔에 빠져서 재산을 마구 써대는 노 귀족’을 연기하면 갑자기 돈을 물 쓰듯 하는 걸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매일매일 상단에 연락해서 약재와 고급 식재료를 사 오게 했다.
아스텔도 외조부가 지나치게 물건을 사들이는 걸 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돈을 너무 많이 쓰시는 거 아니에요?”
후작은 가벼운 웃음으로 외손녀의 걱정을 묵살했다.
“어차피 다 늙은 처지에 재산을 쌓아놓고 있으면 뭘 하겠느냐.”
그리고 믿는 구석도 있었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연금도 나올 텐데.
수차례 훈장을 받고 한때 군무대신까지 지냈던 덕에 그의 연금은 액수가 꽤 컸다.
가만히 듣던 카이젠이 잠시 눈길을 피했다.
사람은 원래 잃고 나서야 후회한다고 하던가.
후작은 연금이 끊긴 뒤에야 돈을 더 모아놓지 않은 걸 몹시 후회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축을 더 많이 해놓지 않을 것에 대한 후회였지 하나뿐인 외손녀를 위해 돈을 쓴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보양을 시켜놔서 다행이었지.’
임신 기간은 수월하게 지나갔지만, 가장 힘든 고비는 출산 때 찾아왔다.
초산이라 그런지 아스텔의 출산은 10시간 가까이 되는 난산이었다.
끝없이 비명을 지르고 피를 쏟은 뒤에야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건강한 아드님입니다.”
늙은 산파가 아기를 안고 나와서 그렇게 말했다.
10시간 넘게 사투를 벌인 직후라 산파도 기진맥진한 얼굴이었다.
“산모는?”
“걱정 마세요. 부인께서도 건강하십니다.”
산파는 아스텔의 신분을 몰라서 그냥 부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후작은 산파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아기는 피부가 불그스름하고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뜬 상태였다.
하지만 척 봐도 아비 쪽을 닮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간 이 아이 때문에 그토록 전전긍긍했고, 수도 없이 황제를 원망했지만.
정작 아이를 받아 안고 나자 고생스러웠던 기억들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수고했네.”
“뭘요, 아기님이 정말 건강하시네요. 튼튼한 기사님으로 자라시겠어요.”
후작은 지친 낯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산파에게 슬쩍 눈길을 줬다.
그 순간 산파를 죽여야 하나 잠시 고민이 들었다.
‘비밀을 유지하려면 죽이는 게 좋겠지.’
늙은 산파를 죽이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영지를 잃긴 했지만 그는 아직 후작이었고, 이 지역의 감찰관하고도 친분이 있었다.
게다가 이 산파는 비밀리에 이곳으로 데려왔으니 갑자기 사라져도 그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하지만 그는 늙은 산파를 죽이지 못했다.
어린 증손자의 탄생일에 피를 봤다가 아이의 삶에 불운이 드리울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군인이었던 후작은 일평생 그런 하찮은 미신을 경멸했다.
하지만 어린 증손자를 품에 안고서야 비로소 깨닫고 말았다.
근거 없는 미신일지언정 자신의 손으로 좌우할 수 없는 운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그는 산파에게 무거운 돈주머니를 건네고 아기를 받아 안았다.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하게.”
산파는 걱정 말라며 돈을 받아 들고 떠났다.
아기를 안고 침실로 들어서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스텔이 보였다.
침실 안에는 아직도 피 냄새가 감돌았다.
아스텔은 기운이 다 빠져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아스텔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기는요?”
“걱정 마라. 아기는 건강하다.”
후작은 아스텔에게 아기를 보여줬다.
기운 없이 누워 있던 아스텔은 조그만 아기를 눈에 담고서야 미소를 지었다.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옅은 행복감이 피어났다.
그 순간엔 후작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 * *
카이젠은 말없이 후작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감정을 꺼내놓지는 않았지만 어둡게 가라앉은 눈에는 고통스러운 아픔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잠시 테라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똑똑.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가 테라스의 정적을 깨뜨렸다.
“폐하.”
노크소리와 함께 시종이 유리문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잠옷을 입은 테오르가 세 사람이 있는 테라스로 들어왔다.
옆에는 커다란 사냥개, 블린도 함께 있었다.
테오르는 눈을 부비며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잠이 안 와요.”
시종이 난감한 낯으로 설명했다.
“폐하께서 어디 계신지 찾으셔서 모셔왔습니다.”
테오르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세 사람을 훑어보더니 후작에게 먼저 가서 안겼다.
“할아버지.”
후작은 두 팔로 테오르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오래전 갓 태어난 아기를 받아 안았던 기억이 선연하게 되살아났다.
“더 자야지. 피곤하지 않느냐?”
“안 피곤해요. 이제 졸리지도 않아요.”
이곳에 오는 동안 잠이 깨버린 모양이었다.
테오르가 바닥에 내려서자 조금 섭섭한 눈길을 보내고 있던 카이젠이 아이를 불렀다.
“이쪽으로 오렴.”
카이젠은 익숙하게 빈 의자에 테오르를 앉히고 작은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건네줬다.
그동안 아이를 다루는 게 몹시 능숙해졌다.
후작은 여전히 카이젠이 탐탁지 않았지만 그가 테오르에게 지극정성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약을 먹고 잠들었다.”
“엄마 이제 안 아파요?”
“그래. 좀 피곤하긴 하지만 괜찮아.”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그릇에 담긴 작은 버터 쿠키를 집어줬지만, 테오르는 그걸 받아 들기만 하고 먹지 않았다.
“엄마는 동생 때문에 아픈 거죠?”
카이젠 대신 프리츠가 테오르를 달랬다.
“아이를 가지면 원래 힘든 법입니다. 그래도 두 분 모두 건강하시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듣고도 테오르는 별로 기분이 나아지지 않은 듯했다.
의자에 앉은 테오르는 불만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엄마가 힘들어하는데 동생은 왜 갑자기 생긴 건지 모르겠어요.”
시원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던 프리츠가 그 순간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는 민망한 듯 카이젠의 시선을 피했다.
카이젠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꺼냈다.
“아스텔은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아기는…….”
카이젠은 테오르를 달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아스텔이 힘들어하는 걸 보니까 사실 카이젠도 죄책감이 들었다.
이렇게 힘겨워할 줄 알았으면 아이가 생기지 않게 조심할 것을.
몇 번이나 깨달은 사실이었지만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매번 후회만 하는구나.’
그런 한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카이젠은 한숨 끝에 자기도 모르게 질문을 내뱉었다.
“동생이 생긴 게 싫은 거냐?”
테오르는 잠시 고민하듯 먼 호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엄마가 동생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요.”
카이젠은 쓰게 웃으며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귀여운 녀석.”
그의 품에 안긴 테오르가 답답하다는 듯이 바르작거렸다.
“아버지, 더워요.”
테오르를 끌어안은 카이젠의 눈가에 깊은 회한과 애정이 차올랐다.
후작은 두 부자를 보면서 조용히 혀를 찼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호수 위로 차가운 달빛이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찰랑거리는 물결을 따라 반짝이는 빛 조각들이 흩어졌다.
시원한 밤의 호수를 내려다보며 후작은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무겁게 간직하고 있던 기억을 꺼내서 풀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후작은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어디 가서 이런 얘기를 할 일은 없을 테니,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꺼내놓는 기억이었다.
‘이젠 아스텔이 무사히 아이를 낳기만 하면 좋으련만.’
테오르 때보다 더 힘들어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직 입덧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기운이 없는지.’
후작은 자신의 아내와 딸이 출산 후 또다시 아이를 가졌을 때 힘들어했으니 아스텔도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 말고도 공통점이 있었다.
아내인 후작 부인과 딸 제클린은 모두 딸을 가졌을 때 더 힘들어했었다.
사실 제클린은 남들에게 공개하지 않았을 뿐 프리츠를 낳기 전에 유산한 경험도 있었다.
그때는 그리 힘들어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얼핏 듣기로 유산된 아이는 아들이었다고 했다.
‘혹시 아스텔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인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황제는 사내아이를 바랄 것 같아서였다.
‘황가에 자손이 귀하니 당연히 황자가 한 명 더 태어나기를 원하겠지.’
그러나 테오르를 안고 있는 카이젠을 보는 순간 후작은 자신의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이 젊은 황제는 아스텔이 낳은 아이가 아들이든 딸이든 사랑해 줄 것 같다고.
‘하지만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가 없으니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어쨌거나 황제가 아스텔을 애지중지하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왕이면 아스텔은 건강하게 출산을 끝내고, 황제는 그동안 계속 노심초사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후작은 그런 심술궂은 생각을 하며 시원한 와인을 들이켰다.
* * *
눈부신 햇살이 푸른 호수 위로 쏟아져 내렸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맑은 날이었다.
일행이 도착한 뒤 이틀 내리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테라스에 앉은 아스텔은 해맑은 연청색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밖에 못 나가는 게 한스러울 만큼 쾌청했다.
“엄마!”
흠뻑 젖은 테오르가 아스텔을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테오르는 테라스 아래에 있는 호숫가에서 블린과 함께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스텔도 테오르를 내려다보면서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깊은 곳에 가면 안 돼.”
테오르는 못 들은 건지 다시 호숫가로 달려갔다.
‘혼자 있는 게 아니니 괜찮겠지.‘
테오르가 점점 더 호수 안으로 들어가자 호숫가에서 지켜보던 카이젠이 아이를 불렀다.
카이젠도 아스텔과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잘 돌보고 있네.’
물놀이를 하는 건 처음일 텐데.
카이젠은 테오르를 지켜보면서 어설프게나마 같이 놀아주고 있었다.
반면 아스텔은 테라스 안에서 구경만 하는 처지였다.
첫날 어지러워서 쓰러질 뻔했던 사건 이후로 아스텔은 성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문제는 첫날 이후로 이상할 만큼 몸이 좋아졌다는 점이었다.
첫날엔 도착하자마자 어지러워서 소란을 일으켰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직후부터 기운이 좋아지고 입맛도 살아났다.
이제 겨우 이틀째지만 체력이 좋아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여기 온 덕에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이곳의 시원한 공기와 맑은 풍경 덕에 기운을 차린 모양이다.
몸이 멀쩡해지니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 심심하네.’
차라리 계속 축 늘어져 있으면 심심할 겨를도 없으련만.
무료함을 느끼고 있는데 테라스의 유리문 너머로 누군가가 보였다.
프리츠와 세르벨이었다.
“황후 폐하.”
“프리츠 오빠, 세르벨 경.”
아스텔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분 모두 호숫가에 나가신 줄 알았는데요.”
“아침에 근처 호숫가에 나갔다가 더워서 돌아왔습니다.”
아스텔은 아침부터 두 사람을 못 봤다.
이곳에 온 뒤로 일행은 자연스럽게 둘로 나누어졌다.
한편엔 아스텔과 카이젠. 그리고 아스텔의 시중을 드는 한나가 함께 지냈고, 다른 편엔 외조부와 프리츠. 세르벨이 함께 돌아다녔다.
테오르만 양쪽을 다 자연스럽게 오가며 놀았다.
‘왜 이렇게 나눠진 거지?’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곧 해답을 찾았다.
아스텔의 몸 상태 때문이었다.
아스텔이 첫날부터 성안에만 머물고 카이젠이 언제나 아스텔의 곁을 맴돌았기 때문에, 심심해진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주변을 구경하면서 놀러 다니고 있었다.
“지금 후작님께 가려고 하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래요.”
아스텔은 오래간만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조부인 후작은 성의 반대편에 있는 테라스에 있었다.
“황후 폐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테이블 위에는 시원한 음료와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스텔은 상큼한 멜론 셔벗을 떠먹었다.
이곳에 온 뒤로 입맛이 돌아와서 음식을 잘 먹고 있었다.
임신 때문인지 이런 새콤한 과일이 당겼다.
“건강을 회복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군요.”
아스텔이 셔벗을 열심히 먹는 걸 보고 후작은 조금 안도한 듯 말했다.
프리츠가 아스텔을 보며 물었다.
“저녁에 예배당에 가보려고 하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예배당이요?”
“예, 근처 숲에 오래된 예배당이 있다고 합니다.”
“아, 예전에 왔을 때 들은 적이 있어요. 가본 적은 없지만요.”
그 말에 세르벨이 조금 놀라며 물었다.
“이곳에 방문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네, 어릴 때 몇 번 황태후 전하를 모시고 왔었답니다.”
황태후는 이곳에 올 때마다 아스텔이 동행하길 원했다.
하지만 성 근처에서만 놀았을 뿐 멀리까지 나가본 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유리문이 열리자 자리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아스텔.”
카이젠이 테라스 안으로 들어왔다.
아스텔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테오르는요?”
“엄마!”
뒤늦게 달려온 테오르가 아스텔의 품에 안겼다.
머리카락은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있었지만,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 신발을 신고 있었다.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느라 늦게 온 모양이다.
“잠시 쉬면서 간식이라도 먹으라고 성안으로 데려왔어. 아침부터 물에 들어가서 놀았잖아.”
확실히 점심을 먹을 때가 되긴 했다.
“당신 몸은 괜찮은 거야?”
“네, 저는 이제 괜찮아요. 오늘은 어지럽지도 않은걸요.”
‘식사도 잘했다’라고 말하려다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편식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황후가 식사량을 확인받는다는 게 너무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젠은 민망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확실히 음식을 먹는 것도 전보다 나아진 것 같긴 해.”
카이젠은 몹시 안도한 표정이었다.
아스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말했다.
“세르벨 경이 근처에 있는 예배당에 간다던데 저도 함께 가도 될까요? 성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질문하면서도 아스텔은 허락받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첫날 쓰러질 뻔한 뒤부터 카이젠은 아스텔을 더욱 애지중지했다.
테오르를 돌봐줄 때 말고는 아스텔의 곁을 떠나지도 않았다.
카이젠이 슬쩍 세르벨을 돌아봤다.
그의 눈빛이 약간 날카로워 보였다.
하지만 다시 아스텔을 돌아보는 눈빛엔 다정함이 가득했다.
“아직 멀리 나가는 건 위험해. 그리고 그 예배당은 낡아서 별로 구경할 것도 없어.”
저런 말이 나올 줄 알았지.
아스텔은 그의 말을 듣고 금세 포기했다.
“나도 가고 싶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테오르가 카이젠의 소매를 붙잡으며 물었다.
“나도 가면 안 돼요? 예배당에 가보고 싶어.”
카이젠은 표정이 조금 굳어졌지만 테오르가 가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황태자도 함께 가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동행해 주신다면 영광이지요.”
세르벨이 지극히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카이젠의 불쾌한 기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냥 산책이나 가자는 거였는데 갑자기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돼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프리츠는 그가 안쓰러워서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괜찮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예전에 이 성에 와본 적은 있지만, 근처에 나가본 적은 없어서요. 할아버님께서도 함께 가시죠?”
“그래. 그러지 뭐.”
후작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배고프지 않느냐?”
“조금.”
그가 이번에는 아스텔을 돌아봤다.
“당신 방에 테오르의 점심을 준비하게 했어. 같이 가지.”
아스텔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밖으로 나갔다.
“나중에 다시 올게요.”
말없이 이 상황을 지켜보던 프리츠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프리츠는 카이젠이 싫지 않았다.
예전에는 아스텔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아스텔이 다시 황후가 되고 행복해진 모습을 보니 더는 카이젠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간 카이젠이 아스텔과 테오르를 극진하게 보살피는 걸 보면서 섭섭한 마음도 눈 녹듯 사라졌다.
아버지인 죽은 공작의 일을 생각하면 프리츠 자신은 오히려 카이젠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다만…… 저렇게 아스텔과 관련해서 지나친 행동을 할 때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특히 프리츠는 카이젠이 세르벨을 불쾌하게 볼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카이젠은 세르벨이 아스텔과 가깝게 지낼 때마다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처음에는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혹시 두 사람을 의심하는 건가?’
세르벨은 어린 황태자의 스승이었고 아스텔에게도 많은 도움을 줬던 사람이었다.
황후가 그런 사람을 푸대접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아스텔은 프리츠와 가까웠지만 카이젠을 제외하고는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왜 저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세르벨까지 자기 방으로 돌아간 뒤, 프리츠는 그런 생각을 후작에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이 후작이 혀를 찼다.
“자격지심이지.”
후작은 찻잔을 들며 혀를 찼다.
프리츠는 외조부의 말을 들으며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이를테면 황제는 자신보다 젊고 다정한 남자가 아스텔과 가까우니까 싫어하는 모양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프리츠는 카이젠을 위로해 줄까 하다가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기로 했다.
괜히 자신이 끼어들었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으니까.
* * *
저녁 무렵에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으려니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예배당에 나갔던 일행은 해가 질 무렵에 성으로 돌아왔다.
“듣던 것보다 더 낡았더군요.”
프리츠는 예배당의 모습에 실망했는지 조금 지친 얼굴이었다.
반면 테오르는 새로운 곳에 갔다 와서 마냥 즐거워했다.
“엄마, 나 숲에서 토끼를 봤어!”
“토끼가 있었어?”
“응. 숲에 사는 토끼들인데 길목마다 많이 있었어.”
테오르는 예배당보다 그곳에서 본 토끼들이 더 감명 깊었는지 토끼 얘기만 했다.
“블린이 잡으려고 했는데 토끼가 다칠까 봐 내가 말렸어. 토끼가 보일 때마다 블린이 달려가려고 해서 프리츠 삼촌이 블린을 잡아줬어.”
“잘했네.”
잘못했으면 어린 테오르가 끔찍한 장면을 볼 뻔했네.
프리츠가 유독 피곤해 보이더니 블린을 잡고 있느라 지쳤나 보다.
“저녁은 할아버지 방에서 먹을 거야. 저녁 먹고 다 같이 체커를 하기로 했어.”
테오르는 그렇게 말하며 외조부의 거처로 달려가 버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곳에 와서 제일 즐거운 사람은 테오르 같았다.
하지만 테오르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노니까 아스텔은 정말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괜히 섭섭한 기분이 드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방 안에 앉아 있는데 카이젠이 문을 두드렸다.
“아스텔.”
그는 편안한 외출복 차림으로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저녁 준비를 했는데 잠시 나가겠어?”
“저녁이요? 밖에요?”
“답답할 것 같아서 밖에 차리게 했어. 테오르는 후작에게 가버렸으니까.”
이 성에는 1층에도 테라스가 있었다.
테라스 쪽에 차려놓은 건가.
식사라도 밖에서 하면 좋은 것 같긴 했다.
아스텔은 그와 함께 성벽 쪽으로 나갔다.
어느새 하늘은 남청색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맑은 푸른빛이던 호수도 어둠이 내려앉아 깜깜했다.
“저건……?”
호숫가에 나갔던 아스텔은 작은 선착장 쪽에 있는 불빛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호숫가에 등불을 밝힌 작은 배가 서 있었다.
“이곳에 있는 배야.”
“그건 저도 아는데요…….”
저건 호수를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유람선이었다.
지금은 그 위에 작은 유리 등이 가득 장식되어 현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이젠은 그녀를 배 위로 이끌었다.
작은 배 위에는 네 개의 기둥이 받치는 차양이 있었다.
기둥 사이로 얇은 천이 커튼처럼 늘어져 있다.
그 사이사이에도 작은 유리 등이 걸렸다.
등불에서 스며 나온 따스한 빛이 얇은 커튼과 갑판 위에 노란 빛무리를 그렸다.
그 빛은 갑판을 넘어 고요한 호수까지 넘쳐흘렀다.
“여기서 저녁을 먹자고요?”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아스텔이 멋쩍은 듯이 바라보기만 하자 카이젠은 배를 출발시켰다.
등불을 밝힌 배가 허수 안쪽으로 서서히 이동했다.
호수 위에는 배에서 흘러나온 노란빛이 잔잔한 물결을 타고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남색의 밤하늘과 어둠이 내려앉은 호수.
그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그리고 주변을 비추는 따스한 등불까지.
화려하고 낭만적인 광경이었다.
아스텔이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자 카이젠은 조금 긴장한 듯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마음에 들어?”
아스텔은 카이젠을 돌아봤다.
등불의 따스한 빛이 그의 잘생긴 얼굴에도 나른한 그늘을 드리웠다.
“정말 근사하네요.”
카이젠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아스텔의 손을 잡고 배 안쪽으로 이끌었다.
“여기 식사를 준비해 놨어.”
불빛이 빛나는 차양 안에는 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늘진 호수의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한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이걸 다 준비하느라 시종들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내뱉는 감상에 카이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성안에만 갇혀 있으니 답답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름대로 이벤트를 준비한 건가.
배 위에서 즐기는 저녁이라니 나름대로 운치 있고 낭만적이긴 했다.
준비된 식사도 양은 적지만 화려하고 근사했다.
꿀을 발라서 바삭바삭하게 구운 닭고기와 새콤한 과일 소스를 넣고 조린 양갈비.
신선한 채소를 넣은 샐러드와 다채로운 과일과 견과류를 넣은 파이도 있었다.
아스텔은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조금씩 맛봤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먹는 걸 보며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 입맛이 돌아와서 다행이야.”
* * *
식사를 끝내고 시원한 디저트까지 끝내고 난 뒤, 카이젠은 배를 돌리게 했다.
이제 성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아스텔은 선선한 바람은 쐬려고 밖으로 나갔다.
뱃전에 다가서는데 또다시 눈앞이 빙빙 돌았다.
카이젠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괜찮아?”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네……. 괜찮아요. 그냥 좀 어지럽네요.”
“또 피곤해서 그러는 모양이군.”
그 말과 함께 몸이 떠올랐다.
카이젠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아스텔을 두 팔로 들어 올렸다.
놀란 아스텔이 내려달라고 버둥거렸다.
“제가 걸을게요. 그냥 부축만 해주세요.”
“그러다가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카이젠이 시커먼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앉아 있을 테니 호수에 내린 다음에 안고 가면 될 텐데.
아직 배가 호숫가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아스텔을 끌어안고 있었다.
배는 시커먼 수면을 가르며 호숫가를 향해 나아갔다.
아스텔은 배가 흔들리는 감각을 느끼며 몸에 힘을 뺐다.
내려달라고 했다가 또 비틀거릴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었다.
“무겁지 않으세요?”
“너무 가벼워서 걱정인걸.”
거짓말.
자신이 테오르만큼 작은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카이젠은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겉보기엔 테오르를 안고 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익숙한 체향과 온기에 서서히 졸음이 밀려왔다.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취한 것도 아닌데 눈이 감기다니.
확실히 몸 상태가 멀쩡하지는 않구나.
입맛이 돌아와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지금 자버리면 안 돼.’
성에 돌아가서 씻고 침대에 눕기 전까지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스텔은 그런 마음으로 졸음을 참았다.
카이젠은 품 안에 있는 아스텔이 꾸벅꾸벅 조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그 뜬금없는 소리에 잠이 조금 사라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이 임신 때문에 힘들어 보여서.”
“이렇게 잘 챙겨주고 계시잖아요.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그래도 첫 임신 때는…… 챙겨주지 못했으니까.”
아스텔은 문득 테오르를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
숲에 숨어 있느라 힘들긴 했지만 외조부가 살뜰하게 보살펴줘서 크게 고생하지 않았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잘 돌봐주셨어요.”
“알아. 후작에게 들었어.”
“할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카이젠은 대답 없이 호숫가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렇게 어두운 눈빛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미안해하고 있구나.’
물론 그때는 아스텔도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이젠을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제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스텔은 미소를 지으며 카이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미약한 숨소리와 함께 조용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지금 이렇게 행복하니까요.”
카이젠은 순간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끌어안았다.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아스텔의 가녀린 몸과 온기가 느껴졌다.
가슴속 깊이 행복감이 차올랐다.
“몇 번을 말했지만 고마워.”
당신이 내 곁에 남아줘서.
어느새 호수의 끝에 도착해 있었다.
카이젠은 배에서 내려서서 호숫가를 걸어갔다.
찰랑거리는 물살이 호숫가를 적셨다.
잔잔한 물결을 밟을 때마다 반질거리는 조약돌이 발에 밟혔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 * *
여름 별궁에 며칠 머물면서 아스텔은 완전히 기운을 회복했다.
별궁의 유유자적한 생활 덕분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상태가 안정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열흘쯤 지나자 어지러운 것도 없고 입맛도 좋아졌다.
아스텔은 오히려 임신 전보다 훨씬 잘 먹고 있었다.
짧았던 휴가가 끝난 뒤, 일행은 정해놓은 일정대로 황궁으로 돌아왔다.
카이젠은 며칠 더 있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아스텔은 계획한 날수만 채우고 돌아가기로 했다.
카이젠은 그까짓 무도회 따위 관두자고 몇 번씩 말했지만 아스텔은 번번이 그의 말을 묵살했다.
의외로 테오르는 별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제 엄마는 안 아프니까.”
황궁으로 돌아가도 된다며 테오르는 순순히 납득했다.
“황궁에 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조약돌을 나눠줄 거야.”
그렇게 말하며 특이한 색을 띤 예쁜 조약돌을 작은 상자에 가득 채웠다.
나름대로 기념품인 모양이다.
테오르마저 돌아가겠다고 하니까 카이젠은 더 이상 휴가를 연장하자고 우기지 못했다.
하긴 어린 아들도 황궁으로 돌아가겠다는데 아버지인 황제가 더 놀자고 우길 수는 없겠지.
어차피 가긴 가야 했다.
카이젠은 황제니까 마음대로 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리츠와 세르벨은 휴가를 연장한다는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는 먼저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업무가 많이 밀려 있어서요.”
그러고 보니 이 두 사람은 업무를 미뤄두고 휴가에 따라온 것이었다.
조금 더 쉬고 싶다는 이유로 둘을 먼저 보낼 수는 없었다.
결국 일행은 아스텔의 주장대로 정해진 일수를 채우고 빠르게 황궁으로 돌아왔다.
* * *
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하루하루가 수월하게 지나갔다.
아스텔은 더 이상 힘들지 않았다. 입맛도 전보다 좋아졌고 어지러운 증상도 사라졌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입덧이 전혀 없어요.”
분명 입덧이 시작될 만한 시기인데 아스텔은 입덧 증상이 전혀 없었다.
“입덧이 없는 분들도 있어요.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레텔은 아스텔을 면밀히 진찰한 뒤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런가요?”
아스텔은 아랫배를 매만졌다.
두 달째에 접어들었지만 배는 아직 평평했다.
“테오르 때는 입덧이 심했거든요.”
“두 번째니까 첫 임신 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죠.”
아스텔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르때는 입덧으로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입덧 전에 고생한 대신 입덧이 없나 보다.
“그레텔은 좀 괜찮은가요?”
아스텔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함께 여름 별궁으로 가긴 했지만 그레텔은 첫날 이후로 피곤하다며 방에서 잠만 잤다.
휴가 내내 거의 잠들어 있어서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그간 피로가 많이 쌓인 탓이겠지 싶어서 깨우지 못하게 했다.
“네. 저도 이제 괜찮아요. 휴가가서 실컷 자고 왔더니 피로가 풀렸나 봐요.”
그레텔은 그렇게 말하며 아스텔을 위해 즉석에서 약을 만들었다.
그때 시녀가 들어와서 작은 선물 상자를 전했다.
“황후 폐하. 로든 백작 부인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백작 부인이?”
선물 상자 안에는 찻잎이 든 세 개의 유리병이 있었다.
동봉된 편지에는 임신에 도움이 되는 차라고 설명도 적혀 있었다.
황궁에 돌아온 직후부터 귀부인들은 아스텔을 찾아와서 특별히 잘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프리츠 오빠 때문이에요.”
아스텔은 백작 부인이 보낸 선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텔이 조금 멈칫하며 물었다.
“공작님이요?”
“가면무도회에서 프리츠 오빠의 짝을 찾는다고 하니까 다들 선물을 보내네요.”
아스텔은 가면무도회에 대해 말하고 프리츠 오빠의 결혼 상대를 찾는 얘기를 말했다.
그때 쨍그랑거리는 가벼운 소음이 들렸다.
돌아봤더니 그레텔이 테이블에 엎지른 약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레텔, 괜찮아요?”
“네, 네, 괜찮습니다. 손이 미끄러졌어요.”
아스텔은 그레텔이 약을 닦는 걸 도와주며 말했다.
“그레텔도 참석하는 게 어때요? 재미있을 거예요.”
“네?”
그레텔이 당혹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아, 아뇨. 저는 그런 데는 가본 적도 없고……. 춤을 추는 법도 몰라서요.”
“그냥 구경 삼아 가도 괜찮아요. 그레텔은 황제 폐하를 구한 은인이니 어느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할 거예요.”
물론 카이젠의 목숨을 구한 건 공식적으로 발표된 일은 아니지만 지금도 그레텔은 황후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었다.
어차피 신분을 감추고 노는 곳이라 그레텔이 참석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레텔은 한사코 거부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요.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네요. 신경 쓰지 말아요.”
아스텔은 괜히 그녀를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했다.
“아니에요. 황후 폐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춤을 추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에요.”
그레텔은 구김살 없는 태도로 그렇게 웃으며 말했다.
그레텔과의 대화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아스텔은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초청하기 시작했다.
“프리츠 오빠와 세르벨 경은 두 사람 다 참석할 거죠?”
“물론입니다. 황후 폐하.”
프리츠와 세르벨은 그렇게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 날, 세르벨은 미안한 표정으로 아스텔을 찾아왔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제가 잠시 북부에 파견을 나가게 돼서요.”
아스텔은 몹시 아쉬웠지만 일 때문에 못 온다는데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왜 갑자기 파견 임무가 생겼는지 의아했으나 그것까지 캐물을 수는 없었다.
“한나. 그리고 나엔 양. 둘 다 손님으로 참석해줘.”
특히 나엔은 혼자 친척 집에 다녀온다고 휴가를 받아서 나가는 바람에 별궁에도 같이 가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다행히 둘 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걸 몹시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셋은 확보가 됐네.
아스텔은 만족스럽게 무도회날을 기다렸다.
* * *
가면무도회는 정해진 관습대로 황궁의 중앙정원에서 오후 늦게 열렸다.
원래는 여름의 초입에 열리지만 이번에는 황가의 휴가 때문에 여름이 다 지나갈 무렵 열렸다.
저녁에 야외에서 열리는 무도회는 특별한 정취를 자아냈다.
무도회장은 물론 커다란 테라스와 정원의 나무와 화단에도 아름다운 등불이 걸렸다.
정원을 가득 채운 작은 유리 등이 우아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곳곳엔 작은 디저트와 시원한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초대된 귀족들을 모두들 오랜만에 열린 가면무도회에 만족하고 감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스텔은 만족하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한나가 지독한 여름 감기에 걸려서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엔도 마찬가지였다.
“한나 님하고 함께 밖에 나갔었는데 그때 걸렸나 봐요.”
알고 보니 둘이 드레스를 사러 황궁 밖으로 나갔다 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같이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어린 나엔은 아직 결혼 상대를 구할 때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즐겁게 놀고 친구도 사귀길 바랐는데.
한나는 이번에 결혼 상대를 구해주고 싶었고.
아스텔로서는 몹시 아쉬운 일이었다.
아쉬운 점은 또 있었다.
“프리츠 오빠는요?”
외궁에 갔던 시종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공작님께서 어디 계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
프리츠는 무도회의 시작부터 자취를 감췄다.
‘참석한다고 했으면서.’
프리츠 오빠가 쉽게 약속을 어기는 사람도 아닌데.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혹시 집에 일이 있나 하고 공작가에 연락해 봤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럼 대체 어딜 간 거야?’
결국 프리츠와 세르벨, 한나, 나엔까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원하던 참석자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무도회는 순탄하게 시작되었다.
다양한 가면을 쓴 젊은 귀족들이 무도회장을 가득 채웠다.
평범한 가면을 쓴 아스텔은 어린 레이디들과 귀족 청년들의 춤을 구경하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린 레이디들은 아스텔에게 잘 보이려고 인사를 건넨 뒤 각자 짝을 찾아 무도회를 즐겼다.
아스텔과 어울릴 만한 귀부인들은 무도회장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프리츠 오빠도 한나도 없고, 나엔 양도 없고, 심지어 세르벨 경도 없고.’
그녀가 맺어주려 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니.
이렇게 실망스러울 데가 있나.
아스텔이 바깥에 모여 있는 귀부인들에게 가볼까 하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레이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검은 머리 남자가 그녀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얼굴에는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제게 첫 춤의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검은 빌로드로 만든 가면 아래로 그늘에 가려진 붉은 눈동자가 보인다.
그 아래엔 날렵한 선을 자아내는 콧날과 턱선이 아름다운 조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단정한 예복을 차려입은 전신에서 단호한 위엄과 품격이 느껴졌다.
아스텔은 대답 없이 눈만 깜빡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폐하, 여기서 뭘 하시나요?”
“…….”
가면 안에서 붉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그저 레이디께 춤을 청하러 온 기사입니다.”
……저기, 누구신지 다 아는데요.
“가면은 어디서 구하셨어요?”
카이젠이 쓰고 있는 건 작은 다이아몬드와 흑요석이 박힌 아주 고급스러운 가면이었다.
꽤 값비싼 수제품으로 보이는데 어디서 구했을까.
카이젠은 잠시 침묵하다가 내뱉었다.
“라니스가 가져온 걸 뺏었어.”
라니스는 그의 새 보좌관 이름이었다.
성년을 넘긴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청년인데.
그 사람도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려고 했었구나.
이렇게 멋진 가면을 구해온 걸 보면 나름대로 연인을 구해보려고 벼르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걸 뺏어오다니.
아스텔은 젊은 보좌관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며 혀를 찼다.
“왜 보좌관의 가면을 뺏어오셨어요? 돌려주고 오세요.”
아스텔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카이젠은 슬쩍 헛기침하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저의 레이디께서 제게 첫 댄스의 영광을 주신다면 더 이상 가면도 필요 없겠지요.”
한 곡만 추고 나면 돌려주겠다는 소리였다.
“누구신지 다 아는데 지금도 필요 없지 않을까요?”
심지어 아스텔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알아본 젊은 귀족들이 저쪽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황제가 다른 사람인 척 황후와 노닥거리고 있으니 다가와서 인사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같이 모르는 척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알겠어요.”
아스텔은 못 이기는 척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더 시선을 모으는 것보다는 그냥 한 곡 추고 같이 나가서 쉬는 게 나을 듯싶었다.
마침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달콤하고 우아한 선율이 야외 무도회장을 가득 채웠다.
아스텔은 카이젠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가면무도회에서 춤을 춘 적은 없다.
아스텔은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부터 이미 카이젠의 약혼녀여서 짝이 없는 남녀로 댄스 플로어를 서성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 스텝의 시작과 함께 카이젠의 손이 그녀를 강하게 이끌었다.
카이젠은 의외로 춤을 능숙하게 췄다.
제국의 황제다운 위엄과 기품이 느껴지는 실력이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잘하는 줄 몰랐는데 말이지.
아스텔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검은색 가면 아래로 달콤한 미소가 스며 나왔다.
“함께 춤을 추는 것도 오랜만이군.”
“그러게요.”
그간 황궁에서 무도회를 주최한 적은 많지만 두 사람이 춤을 춘 적은 별로 없었다.
황제와 황후가 함께 춤을 추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문득 예전에 덴츠 성의 무도회에서 춤을 추던 게 생각난다.
그때는 테오르를 돌려보내기 위해 억지로 카이젠과 춤을 췄다.
한 곡만 겨우 채우고 뒤도 안 돌아보고 플로어를 떠났지.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아스텔은 정말 오랜만에 카이젠과 즐겁게 스텝을 맞출 수 있었다.
마지막 스텝과 함께 잔잔한 선율이 서서히 사라졌다.
카이젠은 춤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무도회장 밖으로 이끌었다.
“정원으로 갈까?”
아스텔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잠깐만이에요.”
몸을 움직였더니 더워서 시원한 공기가 필요하긴 했다.
잠시 바람을 쐬고 오는 것도 괜찮겠지.
‘어차피 프리츠 오빠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으니.’
두 사람은 무도회장에서 나와 정원길을 걸었다.
하지만 한적한 정원에서 잠시 쉬겠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정원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둘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누구나 둘의 정체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걸 보니 새삼 가면을 왜 쓴 건지 회의가 들었다.
“밖에 나온 사람들이 많네요.”
정원에서 떠드는 사람들은 굳이 파트너를 구하고 싶지 않은 중년의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자녀들이나 젊은 조카들의 샤프롱으로 무도회에 참석했지만, 기혼자들이라 춤을 출 생각은 없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분수대가 있는 휴식처나 음료가 준비된 작은 호수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반면 수풀이 우거진 으슥한 곳에는 빠짐없이 젊은 연인들이 숨을 죽이고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결국 둘은 갈 데가 없었다.
주변을 빙 둘러보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인사를 받고 난 뒤, 카이젠은 조금 지친 낯으로 중앙정원의 담 너머를 가리켰다.
“우리는 저쪽으로 가볼까?”
“너무 멀리 나가는 게 아닐까요?”
저쪽은 중앙정원의 경계 너머였다.
저쪽에 뭐가 있더라?
담을 넘어가면 어떤 소궁이 있었던 것 같다.
카이젠이 얄미울 만큼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스텔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는 온통 사람들뿐이라 둘이 있을 곳이 없잖아.”
잠시 바람이나 쐬러 나왔을 뿐인데 왜 둘이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스텔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힘없이 카이젠을 따라갔다.
아스텔 자신도 프리츠도, 한나도, 세르벨도, 심지어 그레텔도 없는 가면무도회장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카이젠은 아스텔을 한적한 정원 구석으로 데려갔다.
한적하다고 해도 황궁의 중앙정원이라 어딜 가나 아름답고 화려했다.
두 사람이 간 곳은 작은 연못을 끼고 아담한 파빌리온이 있는 곳이었다.
중앙에서 남쪽으로 동떨어진 곳이라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저 앞에 팔각형의 기둥이 늘어선 작은 파빌리온이 보였다.
창문이 없는 단순한 구조였지만, 지금은 그늘에 그려져서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는 걸 보면 아무도 없는 듯했다.
“저쪽으로 가볼까?”
아스텔은 굳이 거부하지 않고 카이젠과 함께 파빌리온으로 갔다.
몇 걸음 걸어가던 카이젠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아스텔은 의아한 눈길을 보내다가 파빌리온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음?’
기둥 뒤에 누군가가 있었다. 자세히 보이 두 사람이었다.
자세히 보니 젊은 남녀가 끌어안은 채 키스하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이런.’
밀회 중인 사람들이 있었구나.
이렇게 외진 곳까지 오다니, 참 대단하네.
아스텔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카이젠도 돌아서서 그녀를 따라왔다.
돌아서려는 순간 구두에 작은 나뭇가지가 밟혔다.
순간 뒤에서 수선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서도 인기척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런.
민망한 장면을 피하고자 얼른 달아나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
아스텔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레텔?”
가면을 쓴 여자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의심할 바 없는 그레텔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사람은…….
“프리츠 오빠?”
아스텔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스텔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작은 파빌리온 안에 두 남녀가 끌어안고 있었다. 가면을 쓴 남자는 분명히 그녀의 친오빠인 프리츠였고, 함께 있는 여자는 그레텔이었다.
아스텔은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프리츠 오빠하고 그레텔이 왜……?’
둘이 언제 저런 사이가 됐지? 설마 오늘 무도회 때문에 즉흥적으로 벌어진 일인가?
그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당황한 건 마찬가지인지 반대편의 두 사람도 아스텔과 카이젠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네 사람 사이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충격과 경악이 감도는 침묵이었지만, 그중 유일하게 별로 놀라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카이젠이었다.
그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아스텔은 그 담담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했다.
처음에는 기절할 만큼 놀랐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사태는 자신이 친오빠의 밀회에 난입한 상황이었다.
아스텔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겼다.
비슷하게 정신을 차린 그레텔이 황급히 프리츠에게서 떨어졌다.
프리츠는 그레텔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스텔은 그 순간 오빠의 연녹색 눈에 스쳐 가는 씁쓸한 감정을 분명히 봤다.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프리츠는 아스텔과 카이젠을 향해 사죄했다.
“오히려 우리가 그쪽을 놀라게 한 것 같은데.”
카이젠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스텔을 돌아봤지만 아스텔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프리츠와 그레텔만 바라봤다.
아스텔은 두 사람이 뭔가를 말해주길 기다렸다.
그냥 무도회날이라 잠시 어울렸을 뿐이라든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든가.
둘이 이 당황스러운 장면을 웃어넘기려는 기색을 보였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프리츠는 물론이고 소탈한 그레텔까지 뻣뻣하게 굳어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숨겨온 깊은 관계를 들킨 사람들처럼.
카이젠은 말없이 서 있는 아스텔과 프리츠를 넘겨보다가 덤덤하게 물었다.
“괜찮으면 잠시 후에 황후궁에서 만나는 게 어떤가? 이미 시간도 늦었는데.”
무도회는 원래 휴식과 대화로 끝난다.
춤을 추는 동안에는 담소를 나눌 수가 없으니 춤이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뒤풀이 겸 간식을 먹고 헤어지는 것이다.
주로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수다를 떠는 게 주목적이긴 했다만.
카이젠의 말은 정신을 차리고 잠시 후에 만나서 다시 얘기하자는 뜻이었다.
프리츠는 조금 당황하면서 그레텔을 돌아봤다.
그녀가 괜찮을지 걱정해 주는 듯했다.
그레텔이 고개를 끄덕이자 프리츠도 순순히 수락했다.
“예, 폐하.”
아스텔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는 게 좋겠네요.”
이대로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런 상황을 눈앞에서 마주해 버렸으니 뭔가 말이라도 해봐야 했다.
여기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으니 잠시 머리를 식힌 뒤에 다시 만나는 게 좋을 듯했다.
네 사람은 그렇게 합의하고 헤어졌다.
주최자가 빠진 무도회장은 어느새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시간 뒤, 가면무도회는 화려하게 끝이 났다.
모두들 오래간만에 즐긴 호사스러운 야회에 만족하며 돌아갔다.
주최자인 아스텔만 빼고 모두가 만족한 무도회였다.
* * *
“황후 폐하, 차를 가져왔습니다.”
찻잔을 가져온 시녀가 조심스럽게 응접실로 들어왔다.
프리츠와 그레텔은 무도회가 끝나고 약속대로 황후궁으로 왔다.
무도회의 뒷마무리를 끝낸 아스텔이 뒤늦게 자리에 합류했다.
네 사람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채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시녀는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걸 느꼈는지 찻잔과 간단한 디저트를 놓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테이블 위엔 여전히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유일하게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은 카이젠뿐이었다.
그는 가벼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둘이 친한 건 알고 있었지만…….”
“알고 계셨다고요?”
아스텔이 놀라서 돌아보자 카이젠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당혹감이 감돌았다.
“둘이 자주 어울려 다녔잖아.”
아스텔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스텔은 둘이 함께 있는 걸 별로 본 적이 없었다.
그레텔이 있을 땐 프리츠가 없고 프리츠가 있을 땐 그레텔이 없었다
“저는 전혀 몰랐어요.”
“나는 당신이 몰랐다는 게 더 놀라운걸.”
작게 대답하던 카이젠은 아스텔의 눈총을 받고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아, 저…….”
그레텔은 난처한 얼굴로 아스텔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그레텔?”
“갑자기 놀라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진작에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게…….”
그레텔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금 고개를 수그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자책감이 가득했다.
그레텔이 그렇게 당황하고 미안해하는 걸 보니 아스텔은 이런 불편한 상황을 초래한 게 오히려 미안해졌다.
처음에는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예고도 없이 파빌리온에 난입한 사람은 아스텔 자신이었다.
물론 황궁 정원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었던 것도 문제긴 하지만.
오늘은 가면무도회날이니 그건 무례한 행동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젊은 연인들이 어울려서 놀라고 자리를 마련해 준 건 아스텔 자신이었다.
프리츠는 그레텔의 손을 감싸 쥐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고는 아스텔을 향했다.
“그레텔 양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번 일은 전부 제 잘못입니다.”
“아니에요. 제가 비밀로 하자고 부탁드린 거잖아요.”
그레텔이 허둥지둥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아스텔은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꽤 오래전부터 이런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비밀로 하고 있었다는 뜻이군.
아스텔은 그레텔에게는 화가 나지 않았다.
프리츠는 친오빠지만 그레텔은 자신을 도와주고 카이젠의 목숨까지 구해준 은인이었다.
프리츠와 그레텔 중에 어느 쪽에 더 고마운 마음이 드냐고 물으면 당연히 그레텔이었다.
그레텔에겐 화가 나지 않았지만 프리츠에게는 조금 화가 났다.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말은 왜 하셨나요?”
연인이 있으면 연인이 있다고 할 것이지.
아스텔 자신이 무슨 의도로 무도회 참석을 종용했는지 뻔히 알면서.
프리츠는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나 말고도 세르벨 경과 한나에게 연인을 찾아주려고 했잖아. 그 나엔 양도. 그래서 무도회에 데려가려고 했던 거 아냐?”
아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긴 했지만 프리츠 오빠를 제외하고 다른 세 사람은 이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는 걸 굳이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카이젠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런 의도로 무도회를 연 거였어?”
“…….”
카이젠에게 무도회의 정확한 의도를 말하지 않았던 게 기억이 났다.
임신 중에 쓸데없는 일을 신경 쓴다고 화를 낼 것 같아서였다.
카이젠은 대답 없는 아스텔은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깊은 낭패감이 어린 목소리였다.
“그런 건 줄 알았으면 괜히 보냈군.”
“네?”
“아무것도 아냐.”
아스텔은 그를 쏘아보다가 다시 반대편에 있는 두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나한테 미안할 건 없어요. 두 사람 모두 성인인데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죠. 미리 말을 해줬으면 좋았겠지만.”
생각해 보니 비밀로 한 것도 이해는 갔다.
둘의 신분 차이가 심하니 공개적으로 사귈 수는 없었겠지.
“얼마나 됐어요? 대체 언제부터…….”
프리츠 오빠와 그레텔이라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답답할 만큼 예의 바르고 성실한 프리츠와 소탈하고 자유로운 그레텔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레텔은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다가 프리츠를 슬쩍 보고 말을 꺼냈다.
“겨울에 함께 남부에 있을 때부터였어요.”
* * *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 건 지난 겨울부터였다.
그레텔은 겨울이 시작되자마자 남부 산맥으로 향했다.
아스텔은 남부 산맥에 온실을 만들고 약초를 기르는 재배소를 짓기로 했다.
그레텔은 그녀와 구상한 대로 차근차근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일 자체는 무척 쉬웠다.
이미 이 지역의 영주가 기본적인 준비를 끝내 놓은 데다가 다른 관리들도 몹시 성실하고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레텔이 도착했을 땐 온실도 거의 완성된 단계였다.
아스텔의 명령을 받고 왔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
‘황후 폐하의 권력이 좋긴 하네.’
그녀의 신분을 듣고 나서 조금 뻣뻣하게 대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마저 얼마 후엔 과할 만큼 공손하게 변했다.
진행 상황을 살피기 위해 프리츠가 산맥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레텔은 처음 봤을 때부터 프리츠에게 호감을 느꼈다.
‘수도에는 이렇게 잘생긴 남자도 있구나.’
물론 황제 폐하도 황홀할 만큼 잘생긴 미남이긴 했지만 그분은 너무 위압적이고 무서워서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미남이 아스텔의 친오빠라니.’
아스텔의 사정을 얼핏 듣고 난 뒤부터 그레텔은 아스텔의 아버지와 오빠가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당연히 둘 다 거만하고 오만방자한 귀족님들일 거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프리츠는 정중하고 예의 바른 미남이었다.
‘아스텔하고 닮은 것 같네. 성격은 많이 다른 것 같지만.’
그때는 그냥 취향인 미남에 대한 호감 정도였다.
둘이 가까워진 계기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아스텔에게 알렸을 때부터였다.
그 일 이후로 프리츠는 그레텔을 종종 방문했고, 자신의 집에 그녀를 초대하기도 했다.
그레텔은 수도에 머물던 몇 달 동안 그레텔은 점점 더 그와 친밀해졌다.
산맥에서도 프리츠는 그레텔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며 그녀를 도와주려고 했다.
“공작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새로운 침구나 가구가 들어왔고, 시도 때도 없이 맛있는 음식들이 생겨났다.
“산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을 위한 보답입니다.”
프리츠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리 봐도 단순한 복지 혜택하고 하기엔 좀 과했다.
어느 날은 그녀에게 뻣뻣하게 굴던 하급 관리가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갔냐고 묻자 공작님이 농장의 관리인으로 차출해 버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농장에요?”
그 사람은 산 아래 영지의 서기관이었는데 농장 관리인이 되는 건 꽤 심한 좌천이었다.
“공작님께 무례를 범한 모양입니다.”
이유를 묻자 하인은 그렇게만 말하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 일 이후로 주변의 관리와 하인들은 그레텔을 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대했다.
이곳 영주는 그녀가 마치 황녀라도 되는 것처럼 쩔쩔맸다.
“…….”
그레텔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프리츠가 자신에게 과도하게 잘해준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산맥에 있는 성에 머물 때는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니 그런대로 거리감이 있었다.
그 경계가 허물어진 것은 산맥 아래에 내려갔을 때였다.
남부 산맥은 동서남북으로 길게 뻗은 험준한 지형이었다.
산맥의 능선이 끝나는 서쪽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그해의 마지막 날, 그레텔은 간단한 짐을 챙겨 들고 산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신년 시장에 가려고요.”
“이 근처에 시장이 있습니까?”
프리츠는 들어본 적이 없는지 의아한 눈빛을 했다.
“평소에는 없는데 이맘때면 호숫가에 시장이 생겨요.”
산맥 아래에 있는 호수는 세 도시의 경계에 걸쳐 있는 커다란 호수였다.
각 도시에서 매일 호수를 통해 배가 드나들고 상인들이 오갔다.
특히 이 아래에 있는 마을은 호수의 선착장이 있는 곳이라 특별한 날마다 작은 시장이 열렸다.
그레텔은 한참 전부터 그곳에서 열리는 신년 시장을 기다렸다.
“제가 함께 가도 괜찮겠습니까?”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레텔은 놀라서 허둥대며 물었다.
“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제가 사다 드릴까요?”
자신이 내뱉고도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인 그가 이런 동네 시장에서 필요한 게 있을 리가 없을뿐더러, 살 게 있었으면 진작에 하인들을 보냈겠지.
프리츠는 약간 난처하면서도 씁쓸한 기색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레텔 양을 혼자 보내는 건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요.”
그레텔은 프리츠의 제안을 듣고 놀라서 더듬거렸다.
“그, 저는 괜찮은데요…….”
“산 아래로 내려가려면 산길을 한참 지나가야 하니까요. 허락하신다면 제가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레텔은 그가 이런 기사도적인 예의를 발휘할 때마다 뭔가 오글거리면서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대놓고 거절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걱정해 주는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그와 함께 가는 게 기대되기도 했다.
‘뭐, 괜찮겠지.’
프리츠도 그간 산에만 갇혀 있었으니 좀 답답할 것이다.
산길이 위험한 것도 사실이고.
혼자 움직일 때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는데 공작님과 함께라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네, 좋아요. 함께 가주시면 좋죠.”
그레텔은 그렇게 흔쾌히 수락했지만, 잠시 후 혼자 나온 프리츠를 보자 당황하고 말았다.
“혼자 가시는 건가요?”
말 옆에 서 있던 프리츠는 그레텔을 돌아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산맥 아래에 다녀오는 것뿐이니 호위나 시종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일행을 주렁주렁 데리고 가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만, 그래도 뭔가 단둘이 놀러 나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미묘했다.
그레텔이 머뭇거리고 있자, 프리츠는 다정한 미소를 내보이며 그녀에게 정중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레텔 양.”
붉은빛으로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단정한 이목구비와 선량하고 다정해 보이는 연녹색 눈동자.
은은한 빛을 머금은 백금발은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따스한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녁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프리츠는 황홀할 만큼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그레텔은 잠시 주저하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 * *
호숫가에는 선착장을 중심으로 야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물건을 실은 나룻배가 끝없이 선착장 근처를 오가고 있었다.
환한 불빛과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레텔은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알아뒀던 가게에 들어갔다.
호수 건너 먼 지역에서 온 물건이 있는 노점이었다.
노점에 앉아있던 주인이 그녀를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전에 오셨던 분이군요.”
“부탁드렸던 물건은 들어왔나요?”
“예, 여기 있습니다.”
그가 꺼내준 건 책 몇 개가 들어갈 만한 나무 상자였다.
그레텔은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뒤 품 안에 끌어안고 돈을 건넸다.
뒤에 있던 프리츠는 그녀가 뭘 선건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보여드릴까요?”
“제게 보여주셔도 되는 물건입니까?”
그레텔은 상자를 안고 노점이 즐비한 거리를 벗어났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한적한 호숫가로 나갔다.
호수 주변에는 나무로 만든 산책로가 있었다.
그레텔은 깨끗한 자리를 골라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내놓았다.
뒤따라온 프리츠는 그녀가 꺼내 든 걸 보고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형?”
“곰 인형이에요.”
상자에서 나온 건 목에 리본을 달고 있는 폭신폭신한 갈색 곰 인형이었다.
그레텔은 곰 인형의 등에 있는 작은 태엽을 빠르게 감았다.
태엽을 감고 바닥에 내려놓자, 곰 인형은 춤추듯이 두 팔을 휘저으며 둥글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곰 인형 안에서 달콤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마치 인형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웃긴지 프리츠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서렸다.
“오르골과 태엽 인형을 하나로 합친 건가. 특이하군요.”
너무 특이해서 괴상해 보인다는 말투였다.
그레텔은 입술을 내밀며 곰 인형을 끌어안았다.
푹신한 인형이 그레텔의 품 안에서 여전히 뒤뚱뒤뚱 움직였다.
“황태자 전하께선 좋아하실 거예요. 곰을 정말 좋아하시거든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테오르의 생일이었다.
그레텔은 그날을 위해서 미리 이 인형을 사두려고 수개월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
“이걸 구하려고 여기 오신 겁니까?”
“그럼요. 몇 달 전부터 연락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이건 저 멀리 있는 지역에서 나오는 수공예품이었다.
“확실히 황태자 전하께서 좋아하시겠군요.”
프리츠는 그레텔이 안고 있는 곰 인형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그레텔 양은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보살펴주신 은인이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부끄럽네요. 사실은 저도 두 분 덕분에 즐거웠는걸요.”
그레텔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둘이 살았고 어른이 된 뒤에는 혼자서만 살아왔다.
우연히 아스텔과 만나게 되면서 테오르하고도 친해지고 가족처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오히려 눈 색을 바꾸는 약을 개발하는 건 아스텔 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걸요.”
그 약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책에 나온 염색법을 응용한 것이었는데, 아스텔이 직접 실험체 역할을 자처한 덕분에 빨리 개발할 수 있었다.
그레텔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덕분에 비전의 책에도 제가 만든 새 조제법을 적어 넣을 수 있었죠.”
가문의 비법이 담긴 그 책은 대대로 이어온 가보였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받았고 외할머니는 증조할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책을 받은 사람은 그 안에 직접 개발한 약을 적어넣었다.
이야기를 듣던 프리츠는 솔직하게 감탄을 내비쳤다.
“대단하군요.”
“대단한 일인가요?”
“대대로 집안의 전통을 지키며 약제사로 일하셨다니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대단하거나 훌륭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도 비슷하다.
프리츠의 아버지는 한때 제국의 재상이었는데,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재상이었다고 들었다.
‘언젠가 이 사람도 그 정도의 위치에 오를까?’
그레텔은 눈앞에 있는 이 얌전한 남자가 그런 중책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따님에게만 기술을 전수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에요.”
원래는 아들들에게도 기술을 전수해 줬다.
하지만 아들들은 약초학을 배워도 도시에 나가서 의사로 일하곤 했다.
아카데미에서 정식 의사가 되면 수입도 좋고 혜택도 많았으니까.
반면 여성은 제국에서 의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평생 약제사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에게 가르쳐 봤자 의사가 되겠다고 나갈 뿐이다.
계속 그렇게 하다가는 약제사로서의 전통이 흐려진다고 딸들에게만 가르치는 걸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은 어머니도 할머니도 아들을 낳은 적이 없으니 선택의 여지도 없긴 했다만.
‘이 책은 언젠가 네 딸에게 물려줘야 해.’
어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레텔은 딱히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아이를 기를 자신도 없었다.
뭐 늘그막에 제자를 들여서 전수해 주면 되겠지. 하고 편안하게 생각했다.
사실 그레텔은 아스텔을 제자로 들이려고 했었다.
아스텔의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녀는 약초를 다루는 데 소질도 있었다.
아스텔을 제자로 삼아서 약초학을 전수해 주고 함께 일하면 좋을 듯했다.
혹시라도 테오르가 약초학에 관심을 보이면 비전의 책은 테오르에게 전수해 주면 된다.
테오르가 다른 직업을 선택하면 테오르의 아내나 아이들이나…….
그중에 한 명쯤은 약초학에 관심을 갖는 아이가 있지 않을까?
그레텔은 할머니가 된 자신이 테오르의 어린 딸과 함께 약초를 기르고 있는 평화로운 풍경을 상상했었다.
옆에는 함께 늙은 아스텔이 두 사람에게 옷을 더럽히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고 있고.
행복한 상상이었다.
집안의 전통을 지키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약초책을 전수해 주려고 억지로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일이지.
문득 차를 마시고 있는 프리츠에게 시선이 갔다.
‘이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귀족님이니까.’
지금은 저렇게 말해도 더 나이를 먹으면 가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적당한 상대를 찾아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졌다.
‘쓸데없는 생각이야.’
그레텔은 애써 우울한 감정을 밀어버렸다.
두 사람은 잠시 산책로를 걸었다.
물론 조용히 걷기만 한 건 아니었다.
몇 분 정도 걸었을 때 그레텔은 산책로에 주저앉아 호수의 바위틈에 난 풀을 뜯고 있었다.
“그건……?”
“네케메스 풀이에요. 원래 물속에서 자라는 거라서 구하기 어려운 건데.”
그레텔이 가리킨 물풀은 산책로 아래에 있는 호수 안에 큰 돌들 사이에 있었다.
위에서 볼 때는 아주 가까워 보였는데 손을 넣어보니 생각보다 물이 깊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닳지 않았다.
“윽…….”
그레텔이 물속에 손을 넣고 손을 휘젓는 걸 보고 프리츠가 한숨을 내쉬듯 웃으며 다가왔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프리츠는 아무렇지도 않게 산책로 아래로 내려섰다.
그는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넣어서 풀을 잡아 뽑았다.
“이렇게 채집하면 되는 겁니까?”
“네, 네. 그대로 뽑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프리츠는 그 풀을 손수건으로 잘 감싸서 그레텔에게 건네줬다.
그레텔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수건으로 곱게 감싼 약초를 받았다.
상대는 단순히 숙녀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뿐인데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높은 귀족님과 가깝게 지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이렇게 멋진 남자에게서 숙녀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숙녀 취급은커녕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위험한 일만 겪었다.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레이디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이상한 거겠지.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 그녀도 내심 깨닫고 있었다.
똑같은 공작이어도 프리츠의 아버지에게 이런 대접을 받았다면 눈곱만큼도 두근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소름만 끼쳤겠지.
‘세르벨 경이나 린든 같은 다른 젊은 귀족이었다고 해도……. 분명 이런 기분은 아니었겠지.’
두 사람은 다시 호숫가를 따라 산책로를 걸어갔다.
잔물결이 흐르는 호수는 조용한 밤 그늘을 덮고 있었다.
진청색 하늘에는 새하얀 빛을 내뿜는 보름달이 보였다.
하얀 달빛이 어두운 호수를 잔잔한 빛으로 물들였다.
물건을 실은 나룻배들이 검푸른 물결을 가르며 끝없이 호수 안을 오갔다.
나룻배 위에 걸린 등불이 깊은 어둠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호수와 물 위로 쏟아지는 하얀 달빛. 작은 등불을 밝힌 조각배들.
그림 속에 나올 것 같은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그레텔은 조용한 산책로를 걸으며 호수의 야경을 구경했다.
“그레텔 양.”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달빛이 비치는 호수만큼이나 깊게 가라앉은 연녹색 눈이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고민한 끝에 제 마음을 솔직하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답을 주셔도 괜찮습니다.”
“무슨…….”
그레텔은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프리츠의 눈빛에도 뻣뻣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저는 그레텔 양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하게 흐려졌다.
시야도 조금 어지러워졌다.
문득 발을 헛디뎌서 물속에 빠진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레텔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목소리를 냈다.
“어…… 언제부터요?”
그녀의 어색한 물음에 프리츠는 약간 쓸쓸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동안은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간 그레텔 양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제 감정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
진지한 어조에는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레텔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라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프리츠가 자신에게 보이던 조심스러운 호감에는 분명 단순한 호의 이상의 것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이곳에서 함께 지내면서 물결이 퍼져나가듯이 점점 더 크게 번지고 있었다.
그레텔은 뒤늦게 정신을 다잡았다.
그녀는 이 상황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은 없고…….’
하지만 프리츠의 간절한 눈빛을 마주하자 차마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솔직한 고백에 가슴이 설렜다.
그레텔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녀 자신도 처음 봤을 때부터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레텔은 프리츠의 고백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도 지난 몇 달간 이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그레텔이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프리츠의 긴장된 얼굴이 실망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그레텔의 침묵을 거절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레텔은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예?”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실 저도 좋아해요?
‘좋아한다’는 말을 떠올리자마자 귀부터 양 볼까지 불에 덴 듯이 뜨겁게 화끈거렸다.
연애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레텔은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연녹색 눈동자를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저도…….”
둘 다 미혼이니 잠시 연애 정도는 해도 되잖아.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저 나이까지 연애 한 번 안 해 봤을 리는 없다.
무려 공작가의 후계자인데.
아스텔의 친오빠라는 게 찜찜하긴 했지만 잠깐의 일탈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저도…… 비슷한 감정인 것 같아요.”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프리츠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레텔.”
그가 천천히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깝게 밀착되었다.
두 팔로 끌어안고 있던 곰 인형이 가슴에 푹신하게 닿았다.
그레텔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연녹색 눈동자를 마주하다 가볍게 눈을 감았다.
첫 키스는 짧지만 강렬했고 달콤했다.
두근거리는 와중에도 그레텔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 괜찮을 거야.’
짧은 낭만일 뿐이니까.
겨울이 지나면 저절로 눈이 녹듯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끝을 맺을 짧은 연애였다.
그때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남부에서의 일은 두 사람만의 밀월 여행이 되어버렸다.
둘은 자신들의 관계를 하인들이나 일꾼들에게 철저히 숨겼다.
밀월 여행이기 전에 비밀 연애였다.
주변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자는 얘기는 그레텔이 먼저 말했다.
그녀는 평민 약제사지만 상대는 공작님이고 황후의 친오빠였다.
이런 일이 소문이 나면 자신보다도 프리츠에게 큰 피해가 갈 것이다.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 관계인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그녀가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프리츠는 어두운 호수처럼 깊은 눈길로 그녀를 주시하다가 묵묵히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우리 관계는 모두에게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는 약속을 굳게 지켰다.
산에 있던 사람들은 둘의 관계를 얼핏 눈치챈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레텔이 보는 데서 수군거리거나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의 관계를 언급하거나 암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도 프리츠가 어느 정도 입막음을 해둔 모양이었다.
수도에 와서도 두 사람은 남들의 눈길을 피해서 종종 만났다.
그래도 수도에 온 이후엔 만나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프리츠는 산맥에서 오래 머문 대가로 매일매일 고된 업무에 시달렸다.
그레텔도 약초 학교의 일이 바빠져서 두 사람은 전처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어쩌다 한 번쯤 만나서 얼굴이나 보는 게 다였다.
피로가 쌓였는지 최근엔 그레텔 자신도 몸이 좋지 않아서 외출도 피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프리츠는 간혹 시간이 날 때마다 그레텔에게 충실하고 다정한 연인이 되어주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때로는 선물을 가득 보냈다.
그레텔도 그를 만나는 게 좋았다.
프리츠의 점잖은 성격도 좋았고, 다정하고 세심한 배려도 좋았다.
그레텔은 점점 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은 남들의 눈을 피해서 조용히 이루어졌다.
금세 끝날 것 같았던 짧은 일탈은 행복한 비밀 연애가 되었다.
이쯤 되자 그레텔은 당혹감을 느꼈다.
‘이러다 들키면 어쩌지?’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수 있을 리 없다.
계속 이렇게 지내다간 프리츠의 신분 때문에라도 결국은 소문이 날 것이다.
아스텔이 알면 충격을 받지 않을까.
‘내심 싫어하면 어쩌지?’
아스텔은 당연히 프리츠가 좋은 가문의 신부와 결혼하길 원할 것이다.
친오빠인데다 명문가의 수장인 공작님이니 평범한 귀족 영애도 성에 차지 않을 텐데.
그런 불안한 생각이 들 무렵, 그레텔은 아스텔의 제안을 받았다.
“그레텔, 괜찮으면 여름 별궁에 함께 가지 않겠어요?”
그레텔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밤낮없이 일에 매달리고 있는 프리츠를 떠올렸다.
“혹시 공작님도 함께 가시나요?”
매일 격무에 시달리는 프리츠가 생각나서 즉흥적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하필 그 말을 들은 테오르가 프리츠도 함께 가자고 아스텔을 졸랐다.
그 덕에 프리츠도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레텔은 혹여 의심을 살까 봐 불안했다.
‘나랑 공작님의 관계를 의심하면 어쩌지?’
하지만 다행히 아스텔은 그레텔이 프리츠를 언급한 걸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스텔은 무도회 준비와 그녀의 임신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황제 폐하를 달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덕분에 그레텔의 말 한마디를 세세하게 살필 겨를이 없었다.
* * *
여름 별궁으로의 여행은 좋았다.
적어도 출발할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레텔은 오랜만에 나온 여유로운 휴가에 마음이 풀어졌다.
수도 밖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마주하자 기분이 들뜨고 피로도 풀어졌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질수록 몸은 점점 더 나른해져 갔다.
그레텔은 수도에서 출발한 첫날부터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말을 하다가도, 걸어가다가도, 심지어 밥을 먹다가도 졸음이 밀려왔다.
‘왜 이러는 거지?’
혹시 병이 걸린 건가 싶어서 몇 가지 검사를 해봤다.
그러나 어떤 검사에도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함을 눈치채고 나자 그 외에 몇 가지 사소한 증상도 눈에 띄었다.
그간 자신의 몸 상태를 세세하게 되짚어보던 그레텔은 한 가지 의심 가는 이유를 찾아냈다.
‘설마…….’
임산부를 많이 봐왔던 그레텔은 그게 임신의 증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매번 가지고 다니던 약으로 검사를 해봤다.
설마설마했지만 결과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문을 걸어 잠근 방 안에서 검사 시약을 들여다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왜…….’
그레텔은 프리츠와 교제하게 된 첫날부터 매일 빠짐없이 약을 복용했다.
약제사로 일하면서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경험하는 커플을 수없이 봐왔기에 더욱 철저하게 준비했다.
물론 아무리 철저하게 약을 챙겨도 피임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테오르가 바로 그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황제 폐하는 세심함과는 거리가 먼 분이니까 그렇다 쳐도 자신은 약제사였다.
이건 자신의 전문 분야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절망감과 불안감.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싶은 걱정까지 겹쳤다.
안 그래도 나른했던 몸은 천근만근 늘어졌다.
이제는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다가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레텔은 별궁 안에서 하루 종일 잠만 자게 되었다.
“그레텔 이모, 많이 아파?”
침대의 머리맡에 다가온 테오르가 앙증맞은 작은 손으로 그녀의 이불을 꼭 붙잡고 물었다.
“아, 아뇨, 황태자 전하. 아픈 건 아닌데 그냥…… 졸려서요.”
테오르와 함께 찾아온 아스텔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면 의사를 불러보는 게 어떨까요?”
‘의사’라는 말에 그레텔은 다급히 아스텔을 만류했다.
“아니에요! 저, 저는 괜찮아요. 제가 이미 검사를 해봤는데 딱히 질병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왜…….”
“그, 그동안 일 때문에 너무 무리했나 봐요. 피로가 겹치면 이런 증상이 나타나기도 해요. 정말이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레텔의 열렬한 설명에 아스텔은 억지로 수긍했다.
“그래도 계속 몸이 안 좋으면 몸을 보하는 약이라도 만들어서 드세요. 제가 곁에서 약 만드는 걸 도와줄게요. 부족한 약재가 있으면 가져다 드리라고 시의에게도 말해둘게요.”
“고, 고마워요.”
아스텔의 과분한 친절에 심장이 콕콕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아스텔은 진심 어린 미소와 함께 말했다.
“뭘요. 그레텔은 저와 폐하의 은인이니 당연한 일이죠.”
“…….”
이렇게 친절한 아스텔을 속이고 있다는 게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진실을 털어놓을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이걸 프리츠에게 먼저 말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지? 얼마나 당황할까?
프리츠는 제국의 유일한 공작님인데 평민 약제사와 아이가 생기다니.
새삼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현실감이 느껴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눈앞이 캄캄하기만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도망칠 수도 없고.’
아스텔은 그렇게 했지만. 그건 폐하가 아스텔과 테오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자신은 상황이 달랐다.
‘프리츠는 그렇게 싫어하진 않겠지.’
그의 성격을 감안하면 책임지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쉽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프리츠에게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다 보니 자연히 그를 피하게 되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문병을 왔지만 그레텔은 피곤하다고 하고 대화를 짧게 끝내기만 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이제 괜찮아요.”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프리츠가 찾아왔다.
그는 그레텔의 상태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호수 근처에 수도원이 있는데 경치가 아주 좋더군요. 그레텔 양에게도 보여주고 싶은데 괜찮다면 함께 가시죠.”
“수도원이요?”
의외의 제안에 그레텔이 눈을 깜빡이자 프리츠는 약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어제 그곳에서 약초를 봤습니다. 흥미가 있으실 것 같아서요.”
“아.”
이곳에 온 뒤로 외출하지 못해서 그런 데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레텔은 프리츠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그럼 우리 둘이 같이 가요.”
어차피 언젠가는 말을 해야 한다.
그간 방 안에 있으면서 마음도 좀 가라앉았으니 이참에 밖에 나가서 기회를 보다가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성을 빠져나가 호수 근처 숲에 있는 수도원으로 향했다.
수도원은 작은 숲을 배경으로 조용히 서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건물 자체는 낡아서 볼품없었지만, 숲과 호수를 아우르는 주변의 경치가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프리츠의 말대로 약초로 쓰일 만한 식물이 여기저기 보였다.
“특이한 게 많네요.”
“그렇죠?”
그레텔은 프리츠의 대답을 들으며 문득 의문을 느꼈다.
“어떻게 다 알아보신 거예요?”
약초에 대해 배운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약초를 구분하는 걸까?
“그레텔 양과 함께 있으면서 많이 배웠지요.”
“제가 가르쳐 드린 적도 없는데…….”
그레텔이 의아한 표정을 하자 프리츠는 작게 웃으며 솔직히 대답했다.
“사실은 약초책을 좀 읽었습니다.”
“약초책을……. 왜요?”
“그레텔 양을 보니 흥미가 생겨서요.”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호숫가로 다가갔다.
그레텔은 프리츠가 그녀와 대화하려고 약초에 대해 공부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런 자상함과 세심함이 고맙기도 하고 약간 미안하기도 했다.
자신은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좀 형편없는 연인이네.’
그레텔은 이런저런 약초를 채집하면서 호숫가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프리츠의 안색을 살폈다.
‘언제쯤 말하는 게 좋을까?’
호숫가를 절반쯤 돌았을 무렵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그레텔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프리츠를 불렀다.
“저…….”
앞서가던 그가 몸을 돌렸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물어가는 노을이 그의 잘생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상쾌한 푸른빛을 내던 호수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레텔은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 용기가 나지 않아서 입만 달싹이고 있었는데 나지막한 음성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프리츠는 사라지기 직전의 석양처럼 쓸쓸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도 그레텔 양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 * *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프리츠도 그레텔만큼이나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레텔과 연인이 된 것은 좋았다.
산맥에서 함께 지낸 나날은 달콤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수도에 돌아온 뒤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별궁에 함께 온 것을 기회로 수도에 있을 때보다 자주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레텔은 오히려 이곳에 온 뒤로 더욱 그를 피했다.
단둘이 있을 때도 질문에 대답만 하고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많았다.
그레텔은 여전히 그의 소중한 연인이었지만 프리츠는 어딘지 모르게 점점 그녀와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차츰 멀어지려는 건가.’
그레텔은 그와 자신의 신분 차이를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프리츠는 한편으로 그레텔이 이 관계를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몹시 진지했지만 그레텔은 둘의 연애를 잠시간의 유희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프리츠는 고민 끝에 이곳에서 외조부인 후작에게 상담했다.
딱히 이런 문제를 상담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늙은 후작은 귀찮은 표정으로 외손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한탄했다.
“왜 내 손주들은 다들 어려운 길을 택하는지 모르겠구나.”
후작은 그냥 솔직하게 대화를 해보라고 단순한 조언을 건넸다.
상대가 불편해하면 먼저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프리츠는 외조부의 말에 수긍했다.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때 카이젠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대화가 끊기면서 화제는 아스텔의 과거 이야기로 흘러갔다.
프리츠는 용기를 내서 그레텔에게 자신의 마음을 한 번 더 솔직하게 말했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관계를 불편하게 느낀다면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언제든지 그레텔 양이 원하신다면 물러나겠다는 뜻입니다.”
헤어지고 싶어 하면 언제든지 헤어져 주겠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말 같았지만 그 말을 하는 프리츠의 얼굴은 진지하면서도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
순간 그레텔은 그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건지 깨달았다.
‘어찌 보면 오해가 아니긴 했지만.’
처음에는 이 관계가 금방 끝날 짧은 꿈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다.
“저…… 저는 공작님이 정말 좋아요.”
그레텔은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앞으로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공작님을 떠날 생각은 없어요.”
임신하지 않았어도 떠날 마음은 없었다.
나중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지만 그레텔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아마 먼 미래에도 이 남자를 떠날 마음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깊은 물처럼 흐려졌던 프리츠의 눈이 순식간에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니 그레텔은 부끄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약간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레텔은 달빛이 비치는 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공작님은요?”
“예?”
“공작님은 고귀한 분이잖아요. 나중에라도 제게 질리시면 다른, 음. 귀한 레이디를 만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확신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텔이 고개를 들자 프리츠는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런 말은 너무 성급하지만 저는 그레텔 양과 평생 함께 있고 싶습니다.”
“네……?”
평생 함께 있고 싶다니.
사실상의 프러포즈나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 그게 무슨…….”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물론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임신까지 한 상황이지만.
그레텔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전에 그의 고백을 받았을 때도 일순간 눈앞이 아찔했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휘청거렸다.
시야가 흔들린다 싶었던 순간 발이 꼬여 버렸다.
그레텔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레텔!”
놀란 프리츠가 그녀를 붙잡았다.
두 사람은 함께 물속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첨벙.
차가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프리츠가 먼저 일어나서 그레텔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휘청거리며 넘어졌지만 다행히 프리츠가 금방 붙잡아준 덕에 물 위에 주저앉는 정도로 끝이 났다.
어차피 여기는 얕은 물가라서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잘못하면 크게 넘어질 뻔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해서…….”
프리츠는 흠뻑 젖은 그레텔을 물가로 붙잡아주며 사과했다.
“놀라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너무 성급했습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그냥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놀란 것도 있지만 역시 임신 중이라 시도 때도 없이 졸리고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그간 방에서 잠만 자다 보니 체력이 떨어진 것도 있을 테고.
프리츠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으시면 제가…….”
“네?”
무슨 얘기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몸이 위로 올라갔다.
프리츠가 그녀를 두 팔로 소중하게 끌어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니, 저…….”
내려달라고 말하려는데 프리츠가 선수를 쳐서 말했다.
“제가 옮겨드리겠습니다. 젖은 신발을 신고 돌을 밟으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젖은 건 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레텔은 그의 말을 듣고 얌전히 있기로 했다.
걸어가겠다고 우기다가 혹시라도 아까처럼 휘청거려서 물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뭣보다 그녀는 지금 홑몸이 아니었다.
“아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었잖아요.”
“네, 말씀하십시오.”
프리츠는 그레텔을 안은 채 단정한 발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이 상황에 말해도 될까?’
이렇게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안겨 가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잘 안 보이니까.
“무, 문제가 생겼어요.”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레텔은 슬쩍 눈을 감고 솔직하게 고백을 했다.
“저 임신한 것 같아요.”
그 순간 단정한 걸음이 끊어졌다.
프리츠가 말없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다.
놀란 그레텔이 고개를 들었다.
“저, 저 괜찮으세요?”
“그게 정말입니까?”
“네?”
“임신…… 아이가 생겼다고요?”
그레텔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까요?’
진지하게 의논해야 하는데 프리츠가 너무 놀란 것 같아서 그런 이성적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놀란 만한 일이긴 하지.
우선 충격을 완화하고 현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지도…….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그레텔의 몸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윽…… 저기요.”
숨이 막힌 그레텔은 작게 발버둥 쳤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프리츠가 얼른 그녀를 놓아주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기뻐서요.”
그레텔은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봤다.
“……기쁘세요?”
그레텔을 내려다보는 연녹색 눈동자가 행복감으로 반짝였다.
“당연히 기쁜 일이지요. 갑작스러운 일이라 많이 놀랐을 텐데. 제가 말해줘서 감사합니다.”
프리츠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기뻐하는구나.
하긴 당연히 그럴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조용히 쳐다보기만 하자 프리츠는 살짝 멈칫하며 얼굴을 굳혔다.
“그레텔 양은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겁니까?”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예기치 못한 사건이긴 했지만 아이를 없애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아이를 낳자고 해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프리츠는 그녀의 뜻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방금 전에 드렸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네?”
방금 전에 무슨 얘기를 했지?
너무 많은 일이 연달아 터져서 혼란스러웠다.
문득 방금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말은 너무 성급하지만 저는 그레텔 양과 평생 함께 있고 싶습니다.’
자신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물에 빠졌다.
“우선은 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그레텔 양의 건강부터 추스른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프리츠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진 손길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정말 결혼하자는 말씀이신가요?’
황제에게 결혼 허락은 어떻게 받을 거냐.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냐.
그렇게 따져 묻고 싶기도 했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잔뜩 떠올랐지만, 한편으로는 이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레텔은 그냥 이 순간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어쩌면 평생의 추억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레텔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프리츠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 * *
두 사람이 성으로 돌아온 건, 자정을 시나 새벽 별이 뜬 시간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은 데다 옷도 다 젖어서 이대로 성문으로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이런 모습으로 들어갔다가는 무슨 소문이 돌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레텔이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프리츠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빠르게 성 옆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들어가려고요?”
“이쪽으로 가면 될 겁니다.”
그가 걸어간 곳은 성벽 옆에 나 있는 조그만 나무문이었다.
그 앞에는 잔뜩 긴장한 병사들과 근위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경계가 삼엄하네.
“공작님.”
그 앞을 지키던 근위 기사가 프리츠를 보고 고개를 숙인 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통과하자 작은 계단이 나왔다.
“저, 여기는…….”
“서쪽 탑으로 통하는 계단입니다. 중간에 발코니와 연결된 문이 있습니다. 그 옆 방이 제 침실입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구조군요.”
황가의 별궁이라 그런지 은근히 미로 같은 구조구나.
한참을 올라가서 작은 나무문을 하나 더 통과하고 나자 발코니로 나가는 문이 나왔다.
비밀 통로 같은 곳인가보다.
밖으로 나가자 발코니의 유리문이 보였다.
발코니와 휴식실 사이에 있는 작은 벽틈에 난 문이었다.
이제 내려달라고 하려는데 휴식실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프리츠?”
칼렌베르크 후작님이 침실 위에 가운만 걸친 채 유리만 안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 후작님?”
그레텔은 뒤늦게 여기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이제 보니 여기는 후작님의 침실이었다.
후작의 침실과 프리츠의 침실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는 게 기억이 났다.
프리츠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왔는데 시간이 늦어서요. 제가 아는 비밀 통로가 여기밖에 없어서 이쪽으로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노후작은 흔치 않게 당황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레텔은 머리끝까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방 안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웅…… 할아버지?”
분명히 테오르의 목소리였다.
“……할아버지?”
그 목소리에 세 사람은 동시에 굳어졌다.
침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잠옷 차림의 테오르가 보였다.
테오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매일 들고 다니는 곰 인형을 잡고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한 손을 붙잡힌 곰 인형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끌렸다.
그레텔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프리츠 삼촌? 그레텔 이모?”
테오르는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왜 물에 젖었어요?”
그레텔은 뒤늦게 자신이 물에 흠뻑 젖은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프리츠도 비슷하게 축축한 옷을 입고 있었다.
프리츠는 그레텔을 힐끗 돌아보고 황급히 변명했다.
“그…… 호수에 나갔다가 물에 빠졌습니다.”
테오르는 졸음이 남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말도 없이 둘만 나갔어?”
그레텔이 얼른 대답을 받았다.
“더, 더워서요. 황태자 전하, 주무시는데 깨워서 미안해요.”
테오르는 여전히 졸린지 두 손으로 눈을 부볐다.
“웅……. 괜찮아. 근데 왜 할아버지 방에 왔어?”
끝없는 질문 공세에 두 사람은 난처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테오르는 아직 졸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답을 주고받다 보면 점차 정신을 차릴 테고, 그럼 더욱더 자세한 질문이 나올 게 뻔했다.
프리츠는 난감한 표정으로 외조부에게 구원을 청했다.
곁에 있던 후작이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그냥 지나가다가 들렸다고 합니다. 자,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야지.”
테오르를 끌어안은 후작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둘을 내보냈다.
“얼른 나가라.”
프리츠와 그레텔은 휴식실을 지나 얼른 복도로 나갔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은 무사히 복도 건너편에 있는 프리츠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침실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둘은 문가에 기대선 채 서로를 돌아봤다.
달빛이 비쳐드는 방 안은 평온하고 조용했다.
그레텔은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레텔 양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 제게요?”
프리츠는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시선을 돌렸다.
“예, 하지만 제대로 준비한 뒤에 말하고 싶습니다.”
그레텔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가 자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뭔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은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아침, 함께 모여 아침 식사를 할 때 테오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 어젯밤에 프리츠 삼촌하고 그레텔 이모를 본 것 같아.”
그레텔은 수저를 놓칠 뻔했다.
후작은 프리츠에게 슬쩍 눈길을 준 뒤,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꿈을 꾸신 겁니다.”
테오르는 달콤한 팬케이크를 오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꿈속에선 삼촌이랑 그레텔 이모가 물에 젖어 있었거든요.”
“…….”
상석에 앉은 카이젠이 그녀와 프리츠를 슬쩍 돌아보는 것 같았지만, 특별히 뭔가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다행히 카이젠은 아스텔의 상태 말고는 어디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프리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열심히 수프만 퍼먹었다.
그레텔도 눈치를 살피며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아스텔은 여전히 침실 안에 있어서 아침 식사에 불참했다.
그레텔은 우선 아스텔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 일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둘이서 앞으로의 계획을 더 논의하고 나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스텔의 휴가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좋은 기회를 봐서 차근차근 말해야지.’
그렇게 시기를 살피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 오늘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 * *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아스텔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되물었다.
“할아버지도 알고 계셨다고요?”
프리츠는 아스텔의 날카로운 눈빛을 슬쩍 피했다.
“제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심지어 테오르도 둘이 함께 있는 걸 목격했다니.
아스텔은 둘의 관계를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어처구니없는 분노를 느꼈다.
반면 카이젠은 다 식은 찻잔을 홀짝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별로 대단한 얘기도 아니었군.’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딱 그런 표정이었다.
요즘 조금 몸이 건강해진 아스텔과 무도회를 즐기고 젊은 연인들처럼 밀회를 즐기려고 했는데.
달콤한 밀회를 즐기는 대신 여기서 이 기나긴 이야기를 들으며 밤을 지새우다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카이젠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 잘 들었네. 이렇게 긴 얘기인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두 사람이 아이도 갖고 잘 지낸다니 보기 좋군.”
잘 들었으니 이제 나가라는 태도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아스텔은 둘을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몹시 화가 났다.
둘이 연인관계였던 것도 모자라서 아이까지 생겼다니.
‘교제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레텔이 민망할까 봐 차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몹시 기가 막혔다.
“임신한 사실을 말 못 한 건 이해해요. 그래도 그렇지 아직까지 이렇게 지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아스텔은 오빠는 왜 그렇게 무책임하냐는 눈빛으로 프리츠를 쏘아봤다.
적어도 관계를 공표하고 뭔가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야지.
그레텔은 그를 위해 뭔가 변명을 하려고 했다.
어제까지는 아무런 약속도 없긴 했지만 두 사람은 오늘…….
하지만 그레텔이 뭔가를 말하기 전에 아스텔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레텔에겐 정말 미안해요. 이렇게 갑자기 해명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런 기나긴 사연이 있는 얘기인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레텔과 단 둘이 조용히 얘기할 걸 그랬지.
그레텔은 걱정이 가득한 눈길로 물었다.
“반대하지 않으시나요?”
그간 말할 기회를 노리면서 시간만 흘려보냈던 건 뭣보다 아스텔의 반응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아스텔이 신분 차이 때문에 그레텔을 혐오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공작가에 대한 기대가 있을 텐데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좋다면 내가 반대할 이유가 있나요?”
그녀는 슬쩍 프리츠를 돌아보며 말을 덧붙였다.
“사실 그레텔이 많이 아깝다고 생각하긴 하지만요.”
프리츠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레텔을 돌아봤다. 그리고 이번에는 안색을 바꿔서 카이젠을 향했다.
“이참에 폐하께 정식으로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순간 네 사람 사이엔 가벼운 정적이 흘렀다.
프리츠는 진중한 목소리로 카이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레텔 양과 결혼할 생각입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카이젠은 조금 의외라는 듯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서로 합의된 건가?”
프리츠는 그레텔과 시선을 마주했다.
사실 그는 오늘 정식으로 그레텔에게 청혼하려고 했었다.
무도회에 그레텔을 초대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리고 원하는 답을 얻었다.
그는 테이블 아래로 그레텔의 손을 잡았다.
가늘지만 살짝 거친 손가락에 자리 잡은 얇은 반지가 느껴졌다.
프리츠는 다시 카이젠을 바라보며 답했다.
“합의되지 않은 일을 허락부터 구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
지극히 당연한 소리였지만 카이젠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아스텔과 눈곱만큼도 합의하지 않고 공작가에 허락을 구하고 멋대로 결혼식을 진행시켰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자신과 아스텔의 두 차례에 걸친 결혼과 그 전후 과정이 떠올랐다.
그 모든 일을 떠올리며 눈앞에 있는 커플을 바라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종의 부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둘이 좋다면야 반대할 필요는 없겠지.”
카이젠의 시선이 아스텔에게 향했다.
아스텔은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얼른 덧붙였다.
“저는 밀레트령이 좋을 것 같아요. 수도에서 가깝기도 하고요. 숲이 딸린 지역이라 그레텔과 잘 어울리는 곳이지요.”
“무, 무슨…….”
갑작스러운 말에 그레텔이 놀라서 그녀를 향했다.
카이젠은 덤덤하게 선언했다.
“그레텔 양에게 그간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영지와 작위를 하사하지.”
그레텔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카이젠은 웃으며 말했다.
“상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렇긴 하지만……. 그건 너무 과분한…….”
카이젠은 그녀에게 상을 준다고 했지만 그레텔은 생각해 본다고 하고 계속 포상을 미뤄왔다.
“진작에 보상을 해드렸어야 했죠. 그레텔은 우리의 은인인걸요.”
아스텔은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프리츠와 결혼하는 데 문제가 없게 그레텔의 신분을 높여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레텔은 그제야 둘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황후 폐하.”
그레텔은 프리츠의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진정으로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아스텔도 기분 좋은 즐거움을 느꼈다.
* * *
기나긴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돌아갔다.
아스텔은 둘을 배웅한 뒤 침실로 돌아와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모두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 궁전 안은 적막하고 고요했다.
아스텔은 하늘하늘한 잠옷 위에 얇은 가운을 걸치고 침실로 들어왔다.
뒤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결혼 준비는 한나에게 맡기지.”
돌아봤더니 카이젠이 침실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에게 왜요?”
한나하고 프리츠의 결혼식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카이젠은 잠시 간격을 두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또 결혼 준비를 신경 쓸까 봐 그러지.”
“설마요.”
아스텔은 그의 말을 일축하며 침대에 앉았다.
“그레텔의 결혼이니 그레텔이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준비해야죠. 제가 간섭할 수 있나요.”
안 그래도 그레텔은 아스텔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스텔이 공작가의 일에 일일이 간섭하면 더욱 주눅이 들 것이다.
프리츠와 결혼하면 그레텔은 이제 공작가의 안주인이 된다.
아무리 황후라고 해도 서로 간의 예의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레텔이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당연히 돕겠지만.
“저는 근사한 선물만 준비하는 게 도리죠.”
“그렇다면 다행이군.”
창가에 있던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다가와서 침대에 앉았다.
그는 아스텔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도회가 심심하게 끝나버렸군.”
“심심하셨다고요?”
그런 폭풍 같은 일이 있었는데?
아스텔이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카이젠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반문했다.
“우리는 춤을 한 곡 춘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했잖아.”
“그럼 무도회에서 춤추는 것 말고 뭘 해야 하나요?”
카이젠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젊은 연인들처럼 밀회를 즐기고 싶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해봤자 통하지도 않을 것 같고.
그는 아스텔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아스텔은 익숙한 온기를 느끼며 살짝 눈을 감았다.
“당신이 그런 생각으로 무도회를 개최한 건지는 몰랐어.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도와줄 걸 그랬군.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의 상대도 찾아주는 게 어떨까?”
“아뇨, 생각을 바꿨어요.”
아스텔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정해줄 필요 없이 다들 좋아하는 상대를 직접 찾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스텔은 이번 일로 실감했다.
프리츠의 결혼 상대를 찾아주고 싶었는데 프리츠 오빠와 그레텔 양은 이미 오래전부터 연인관계였다.
이런 일은 누가 도와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제일 좋았다.
“그래 두 사람은 행복해 보이더군.”
허리에 닿았던 카이젠의 손이 천천히 아랫배로 내려갔다.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아스텔은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봤다.
불빛이 아른거리는 방 안에서 애정이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폐하와 저는 평범한 연인은 아니었죠.”
아스텔은 다시 그의 품 안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행복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함께 걸어온 길이 있었기에 지금의 행복이 의미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카이젠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스텔은 평온한 행복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배에 닿는 조심스러운 손길에서 다정한 온기가 느껴졌다.
“우리 애들에게 사촌이 생기겠군.”
아스텔도 한 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만졌다.
여전히 겉보기엔 변화가 없었지만 이제 이 안에서 아기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그러게요.”
비슷한 또래의 사촌 아이들이 정원에서 함께 뛰어놀 것을 생각하니까 웃음이 나왔다.
테오르는 어린 두 동생을 돌보면서 함께 놀겠지.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