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해결
“프리츠 오빠?”
아스텔은 프리츠를 보는 순간 약초 얘기일 거라고 직감했다.
프리츠의 희망 어린 눈빛이 약초가 왔구나, 하는 기대감을 불러왔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그레텔에게 맡기고 밖으로 나갔다.
“기쁜 소식입니다.”
옆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프리츠가 약간 들뜬 어조로 이야기했다.
“세르벨 경이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세르벨 경이 벌써 왔다고요?”
생각지도 못한 소리였다.
“기사단을 다 데리고 왔단 말이에요? 이렇게 빨리?”
란베르크 기사단은 말이 기사단이지 하나의 군사집단이었다.
그런데 그런 규모의 병력이 이렇게 빨리 도착했다고?
기사단 전체가 수도의 관문을 통과해서 들어오려면 그것만으로도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
아스텔은 경비대에서 아무런 보고도 듣지 못했다.
“우선은 세르벨 경과 일개 대대만 들어왔다고 합니다.”
“전부 들어온 게 아니고요?”
“기사들을 선발해서 소수만 데리고 먼저 돌아온 모양입니다.”
왜 소규모만 데려온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프리츠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눈치였다.
아스텔은 우선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세르벨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기 전에 프리츠를 붙잡고 물었다.
“약초 소식은 없나요?”
프리츠는 미안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루 이틀 안에 곧 도착할 겁니다.”
“……그렇군요.”
하루 이틀 안에 온다니 그것만으로도 희망적이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자기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세르벨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황후 폐하.”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세르벨이 황급히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께 소식을 전해 듣고 최대한 빨리 달려왔습니다.”
“세르벨 경, 수고했어요.”
세르벨은 먼 길을 왔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별로 없었다.
“다른 기사들은 어디에 있나요?”
“최대한 빨리 도착하기 위해 부대의 전력을 선별해서 먼저 수도로 왔습니다.”
최대한 빨리 오려고 최고 전력만 선별해서 데려왔다는 말인가.
그 덕에 빨리 돌아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스텔은 기사단 전체가 필요했다.
“남은 부대는요?”
“제가 데려온 인원 중 절반만 수도 안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절반은 수도 근교에 머물고 있습니다. 북부에 남겨둔 부대는 맨 뒤에 남은 대대를 제외하고 순차적으로 수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순차적으로 온다고요?”
한꺼번에 오는 게 아니고?
“늦어도 사흘 안에는 모든 부대가 수도에 도착할 겁니다.”
세르벨은 그렇게 설명하면서 잠시 멈칫하며 아스텔의 눈치를 살폈다.
“한꺼번에 돌아오는 것보다 그게 더 좋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
아스텔은 세르벨의 의미심장한 말을 듣고 상황을 이해했다.
에클렌 백작은 세르벨에게 황제가 위독하며 대신들은 편이 갈려서 위태로운 상태라는 걸 전해준 모양이다.
세르벨은 그 말을 듣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인원을 분산해서 데려오기로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기사단이 언제쯤 도착하는지 예상하지 못하도록.
아마도 맨 뒤에 남은 부대는 실제 인원보다 많은 것처럼 보이게 꾸며놨으리라.
기사단장이 소규모 인원만 데리고 먼저 왔다고 하면 당장은 경계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함께 온 선별대도 절반은 수도 근교에 남겨둔 것이다.
세르벨은 아스텔의 차가운 얼굴을 보며 약간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혹시 제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아니에요, 정말 잘했어요.”
이 성실한 기사단장에게 이런 기지가 있는 줄은 몰랐다.
세르벨은 그제야 안도하며 아스텔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황후 폐하, 신은 목숨을 걸고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성실해 보이는 눈동자엔 차분하고 깊은 결의가 엿보였다.
위기의 순간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하더니.
아스텔은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하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 * *
다행히 좋은 소식이 연이어 들어왔다.
프리츠가 말한 대로 그날 저녁에 영지에서 온 약초가 도착했다.
아스텔은 반가운 마음에 달려나갔다.
그러나 화분에 있는 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이게 그 꽃이라고요?”
화분에 있는 꽃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프리츠가 시들어서 떨어진 꽃잎을 매만지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전에 봤을 때는 이 꽃이 그림과 똑같았습니다.”
하긴 프리츠가 영지에서 이 꽃을 본 건 벌써 한참 전이었다.
활짝 피어 있던 꽃은 그사이에 시들어버릴 만도 했다.
다행히 다른 줄기에도 꽃이 피어 있었다.
살짝 꽃망울을 틔운 작은 꽃송이가 줄기 끝에 매달려 있다.
그림과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달랐다.
같은 꽃이 맞는 걸까? 약간 덜 피어나서 그런가?
“그레텔, 이걸로도 괜찮을까요?”
아스텔은 불안하게 물었다.
그레텔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우선 약부터 만들어 볼게요.”
꽃의 상태는 실망스러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레텔은 한참 동안 꽃을 다듬고 준비해서 약을 끓였다.
아스텔도 옆에서 그녀가 하는 것을 지켜봤다.
잠시 후, 약이 완성됐다.
아스텔은 직접 스푼을 들고 카이젠의 입에 약을 흘려넣었다.
그녀가 빈 약그릇을 내려놓은 뒤에도 그레텔은 여전히 자신 없는 태도였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언제쯤 효과가 나타날지는 모르겠어요.”
결국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스텔은 카이젠의 머리맡에서 밤새 그를 지켜봤다.
카이젠이 깨어나면 아스텔 자신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지금 이 순간엔 중요하지 않았다.
아스텔은 반드시 카이젠이 살아나길 바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안하게 흔들리던 촛불이 밀랍초를 절반 이상 녹였을 무렵이었다.
그레텔이 다급하게 아스텔을 불렀다.
“아스텔 님!”
미동도 없이 누워 있던 카이젠에게서 천천히 변화가 생겨났다.
* * *
플로린은 전채 요리를 가볍게 물리고 물만 홀짝였다.
뒤이어 들어온 농어 요리는 몹시 훌륭했지만 도저히 입맛이 생기지 않았다.
플로린의 옆자리에는 아버지인 크로이첸 후작이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황후의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이 있었다.
“정말 훌륭한 만찬입니다, 공작님.”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했다.
한 시간 전, 크로이첸 후작은 레스턴 공작의 초대를 받아 그의 저택으로 왔다.
딸인 플로린과 마리안도 함께였다.
플로린은 아버지가 대체 왜 자신을 여기에 데려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만이 아니라 마리안까지 데려오다니.
이런 자리엔 차라리 어머니인 후작 부인을 데리고 와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후작 부인은 레스턴 공작의 딸인 아스텔을 죽이려다가 유배된 전적이 있으니 같이 오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크로이첸 후작은 몹시 공손한 눈빛으로 공작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렇게 저희를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도에 돌아오게 해주신 것도 그렇고…….”
“뭐, 수도에 돌아오는 게 금지된 것도 아니잖습니까.”
추방된 사람은 원래 수도에 돌아오지 못하는 게 맞다.
레스턴 공작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그야 그렇습니다만…….”
플로린은 아버지의 비굴한 태도에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버지가 왜 이런 사람에게 굽신대는 것인지는 이해가 갔다.
현 황제 치하에선 크로이첸 가문은 예전의 영향력을 되찾을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태도를 바꿔서 레스턴 공작에게 붙으려고 하는 모양이다.
지금 황제는 위독한 상태라고 들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황제가 죽으면 어린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할 테니까.
‘레스턴 공작은 신흥 귀족들을 회유해서 별 탈 없이 자기 외손자를 황제로 만들고 싶은 거고.’
수도에서 쫓겨나긴 했어도 크로이첸 후작은 신흥 귀족들의 수장이었다.
여전히 그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그렇게 두 사람의 이익이 일치해서 이런 괴상한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의 추측대로 공작이 본론을 꺼냈다.
“후작께서 아직도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다른 대신들을 설득시켜 주십시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들도 별다른 방법이 없을 겁니다.”
플로린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 자리에 플로린 자신과 마리안은 대체 왜 불려온 걸까?
“후작께서는 정말 아름다운 따님들을 두셨군요.”
“아름답고 현명하신 황후 폐하에 비하겠습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겸양을 떨면서 칭찬을 주고받는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보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원수나 다름이 없었는데.
크로이첸 후작은 반 정도 비운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공작을 향했다.
“그래서 어느 쪽이 마음에 드십니까?”
아버지의 물음에 멍하니 음식만 먹던 마리안의 손이 멈칫했다.
플로린도 전신이 차갑게 굳었다.
공작은 두 사람을 훑어보며 미미하게 웃었다.
“정말 아름다운 숙녀분들입니다만. 따님들이 너무 어려서 조금 걱정이 듭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마리안은 새 공작님과 겨우…… 열 살 차이도 안 나는데요.”
프리츠의 정확한 나이가 헷갈리는지, 아니면 마리안의 나이가 헷갈리는 건지 크로이첸 후작은 잠시 간격을 두고 얼버무렸다.
순간 공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야 그렇지만 제게는 좀 어리지요.”
“……예?”
이번에는 후작이 표정을 굳힐 차례였다.
후작은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꿈뻑거렸다.
“저, 저는 아드님을 말씀하시는 줄…….”
“공작 부인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지요.”
레스턴 공작이 약간 짜증스러운 미소로 세 부녀를 찬찬히 돌아봤다.
플로린은 기가 막혔다.
‘지금 우리 둘 중 한 명과 결혼하겠다고? 저 공작이?’
마리안도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후작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예, 정말로 저희 가문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아버지……!”
참다못한 마리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제 교육이 부족해서 그만…….”
그러나 공작은 별로 화내지 않았다.
그는 이제 플로린을 보고 있었다.
“둘째 따님은 정말 차분하고 아름답군요. 숙녀의 귀감입니다.”
플로린은 순간 소름이 끼쳤다.
다행히 그 순간 구원자가 나타났다.
“공작님.”
늙은 집사가 안으로 들어와서 공작을 불렀다.
레스턴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황후 폐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지금?”
지금은 거의 한밤중이었다. 이런 시간에 나를 부른다고?
“급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레스턴 공작은 이틀 전 확인차 황후궁에 들어갔었다.
그때 아스텔은 그에게 귀족들의 상황을 물으면서 넌지시 일렀다.
‘너무 오래 가지 않게 처리할게요.’
뭘 처리하겠다는 건지는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황제는 현재 갑자기 병이 나서 사랑하는 황후 곁에서 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으면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레스턴 공작은 잠시 상황을 계산해 봤다.
란베르크 기사단은 아직 수도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쪽 기사단장이 소규모 인원만 데리고 수도로 돌아온 게 겨우 하루 전이었다.
반면 로트우드 쪽은 삼사 일 안에 수도에 온다고 했다.
‘별일 없을 듯하군.’
레스턴 공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알겠다. 지금 바로 황궁으로 가겠다."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이 왜 자신을 찾는 건지 의아했지만 이런 시간에 자신을 찾는 것을 보면 다급한 일이 분명했다.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황제는 여전히 황후궁에, 즉 아스텔의 손아귀에 있었다.
레스턴 공작은 황궁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면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프리츠는 어디 있지?”
집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후궁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 녀석까지 있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보군.’
레스턴 공작은 그동안 프리츠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황제가 그렇게 된 뒤부터 프리츠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황궁에서 지냈다.
표면상으로는 일이 많아서 집무실 근처에서 지낸다고 했지만 의도적으로 저택을 피하는 게 분명했다.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별 상관없었다.
공작 자신도 아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데, 아스텔과 함께 자신을 협박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프리츠가 영지에서 뭘 가져왔다고 했지. 그게 뭔지는 알아냈느냐?”
얼마 전에 프리츠가 영지로 사람을 보냈다는 말을 들었다.
영지에 놔두고 온 것을 가져오라고 시켰다는 말을 듣고 그게 뭔지 알아보라고 했었다.
“예, 영지 수입과 관련된 서류하고 영지에서 받은 선물을 가져오게 했다고 합니다.”
“다른 건?”
“제가 알아본 바로는 다른 것은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서류와 선물이라.
왜 그런 것을 가져오게 했을까.
‘돈으로 바꿔서 자금을 확보해 두려는 건가.’
공작위를 계승받았다고 해도 프리츠는 자기 몫으로 확보해 둔 자금이 별로 없었다.
황제가 급사하면 당분간 수도는 혼란스러워질 테니 돈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래 봤자 소용없지.’
레스턴 공작은 황제의 일이 정리되면 새로 결혼해서 후계자가 될 아이를 낳을 생각이었다.
새로운 아들만 낳으면 쓸모없는 프리츠는 없애버리면 된다.
그는 만찬석에서 봤던 두 자매를 떠올렸다.
수도에는 명문 귀족들이 거의 사라진 상태라서 공작의 신부가 될 만한 여자가 별로 없었다.
크로이첸 가문은 오랫동안 공작가의 적이었지만 그 집안 딸들은 둘 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레스턴 공작은 예전에도 마리안과 플로린을 눈여겨봤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셋째한테는 관심도 없었고.
레스턴 공작은 침착하고 조용한 플로린이 마음에 들었지만 너무 어려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분명 몸도 약하다고 했지.
나이를 보면 역시 첫째 쪽이 나은 것 같긴 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집사의 보고를 받고 만찬석으로 되돌아오자 크로이첸 후작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황후께서 저를 부르시는군요.”
“저런, 황궁에 무슨 일이라도…….”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황제 폐하의 병환이 길어지니 불안해서 그런 거겠지요.”
후작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황후궁에 갔던 황제가 갑작스레 병이 났다.
황후는 황제가 앓아누운 날부터 공식적으로 수도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런 황후가 한밤중에 황제의 병환을 논의하자고 자기 아버지를 부른다.
황제의 병환은 공작과 황후, 두 사람의 합작품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시군요. 그럼 바쁘실 테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요. 이번 일을 나중에 더 논의합시다.”
그는 마리안과 플로린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두 자매는 둘 다 차갑게 굳어진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 * *
변화가 일어난 건 한밤중이 다 되어서였다.
“아스텔 님!”
그레텔이 황급히 그녀를 불렀다.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며 시간을 생각하고 있던 아스텔은 그레텔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던 카이젠이 서서히 눈을 떴다.
가늘게 떨리던 눈꺼풀 사이로 익숙한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카이젠은 촛대의 불빛에 눈이 부신지 눈가를 찡그리며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스텔?”
“폐하!”
아스텔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지난 이틀간 카이젠은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몇 차례 정신을 차렸지만 독성이 몸을 잠식할수록 정신을 차리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지켜보는 아스텔은 더욱더 애가 탔다.
그런데 지금 카이젠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편안하게 눈을 떴다.
밤새 마음을 졸이고 있던 아스텔은 안도감과 함께 기쁨이 밀려왔다.
이렇게 눈을 떴다는 건 약초가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카이젠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아스텔은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가리려고 시선을 떨구며 대답했다.
“열흘 정도 지났습니다.”
“이런…….”
카이젠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스텔은 그를 만류했다.
“폐하, 지금은 더 쉬셔야 합니다.”
그레텔이 그를 다시 진찰하고 기뻐하며 말했다.
“다행히 약초가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비록 완전히 해독된 건 아니지만요…….”
그레텔은 아스텔이 너무 실망할까 봐 걱정하는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정해진 해독제는 아니다 보니 완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어요.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 독성이 사라지기는 했지만요.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죠.”
해독초가 독을 거의 제거해 주긴 했지만 뿌리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당장 목숨을 잃지는 않을 테니까요. 어쨌든 성공한 셈이에요.”
“그래요. 남부에서도 약초를 가져오기로 했으니 더 복용해 보면 남은 독도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서부에서 프리츠가 가져온 건 이게 다였지만 아스텔은 남부에도 사람을 보내서 약초를 더 가져오게 했다.
그것까지 더 복용하면 남아있는 독성도 사라지지 않을까.
아스텔은 그런 희망을 품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약초가 더 오면 다시 약을 만들어 볼게요.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스텔은 그레텔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목숨을 구했다는 말에 안도하는 한편, 일말의 불안함도 남았다.
아스텔은 카이젠을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폐하의 몸에 후유증이 남을까요?”
“그것도……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워낙 희귀한 독인데다가 독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라서 앞으로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고 그레텔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도 생명이 위험하지 않다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그레텔.”
아스텔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레텔이 없었으면 카이젠은 손쓸 수도 없이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레텔은 황제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었다.
뒤에서 힘겨운 신음이 들렸다.
“윽…….”
놀라서 돌아봤더니 카이젠이 침대 기둥을 잡고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폐하, 지금은 조금 더 주무세요.”
하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생명에 지장도 없다는데 이제 일어나야지.”
하여간 쓸데없이 고집은.
다행히 열흘 가까이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도 카이젠은 조금 수척하고 창백한 것 말고는 괜찮아 보였다.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그런가.
그레텔이 옆에 붙어서 계속 체력을 보충하는 약이나 독의 진행을 늦추는 약을 조제해서 먹인 덕도 있겠지만.
힘겹게 일어나 앉은 카이젠이 아스텔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너무 고생시켰군.”
“그런 말씀 마세요.”
아스텔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카이젠이 죽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눈가가 뜨거워질 만큼 기뻤다.
아스텔은 눈물을 참으며 미소 지었다.
“그걸 아시면 얌전히 쉬고 기운을 차리세요.”
* * *
아스텔은 카이젠을 남겨두고 잠시 옆방으로 나왔다.
시간은 자정을 지나 새벽으로 가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날이 밝을 것 같았다.
복도로 나서자마자 한나가 아스텔을 발견하고 쫓아왔다.
“황후 폐하, 괜찮으신가요?”
“한나.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약초가 왔다는 것은 한나도 알고 있었다.
어찌 될지 걱정돼서 새벽까지 밖에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약초가 효과가 있었어.”
한나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피어났다.
“프리츠 님과 세르벨 님. 두 분 모두 이곳에 계십니다.”
“둘 다?”
프리츠 오빠는 얼마 전부터 계속 황궁에 머물렀다.
오늘 밤은 약초의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머물 것 같았는데 세르벨까지 같이 밤을 새운 건가.
아스텔은 두 사람이 있는 휴식실로 들어갔다.
“황후 폐하!”
테이블에 앉아 있던 프리츠와 세르벨이 그녀를 발견하고 일어났다.
“두 사람 모두 아직도 여기 계셨던 거예요?”
둘 다 낮에 만났던 복장 그대로였다.
함께 결과를 기다리면서 밤을 지새운 모양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스텔은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말했다.
“다행히 약초가 효과가 있었어요.”
두 사람에게 그레텔의 설명을 전해줬다.
둘 다 몹시 기뻐했다.
“정말 다행입니다.”
아스텔은 카이젠이 깨어났고 지금은 쉬고 있지만 괜찮아 보인다는 것도 말했다.
설명을 들은 프리츠가 안도하는 가운데서도 조용히 물었다.
“황후 폐하, 이제 어찌할까요?”
아스텔은 그 질문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황제가 회복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여기 있는 둘과 아스텔, 한나, 그레틸뿐이었다.
“세르벨 경.”
아스텔은 세르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현재 세르벨이 데려온 기사 중 절반만 수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평민으로 위장해서 수도 근교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한다.
북부에 남겨둔 부대도 순차적으로 수도를 향해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세르벨이 다급히 소수 병력만 데리고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수도 근교에 머물고 있는 기사단을 비밀리에 수도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까요?”
세르벨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오늘 중으로 모두 불러올 수 있습니다.”
아스텔은 그의 확답을 받고 나서 프리츠에게 말했다.
“일을 정리할 거면 한 번에 확실하게 해야죠.”
“그 말씀은…….”
“폐하가 회복하신 것을 숨기고 대신들을 불러들이겠어요. 우선은 아버지부터요.”
* * *
레스턴 공작은 황후궁의 입구를 통과했다.
황후궁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지난 며칠간 황제가 이곳에 머물러서 기사들과 시종들 때문에 부산스러웠는데 오늘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황제는 여전히 상태가 안 좋다고 들었는데.’
황제에게 독을 먹인 시종은 이미 죽여 없앴다.
레스턴 공작은 다른 시종을 통해 황후궁 안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황제는 서서히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고 했다.
어째 생각보다 독이 듣는 속도가 느렸다.
이쯤이 되면 숨이 끊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워낙 젊고 건강해서 그런가.’
그래봤자 어차피 며칠 안에 죽게 될 것이다.
독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누워 있다 보면 체력이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다.
아스텔은 자신이 알던 약제사를 황후궁에 불러다 놓고 황제를 간호하고 있었다.
철저한 아스텔은 황제의 시의도 황후궁에 잡아놓고 궁전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황제의 죽음이 늦어지면 아스텔이 손을 쓸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레스턴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황후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들어섰다.
“아버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스텔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를 반겼다.
아스텔은 시녀 한 명 없이 혼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의 지친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스쳐 가는 걸 유심히 관찰했다.
피곤해 보이는 안색에는 뭔가를 숨기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의 연녹색 눈에 비굴한 눈빛이 얼핏 지나가는 걸 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간 이런저런 일이 있긴 했지만 아스텔은 확실히 상황 판단이 빨랐다.
황제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누구와 손을 잡아야 살 수 있는지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공작은 무엇보다도 이 건방진 딸이 다시 고분고분해진 게 마음에 들었다.
“우리 황태자 전하는 어디 있느냐?”
아스텔은 이번에도 웃으며 대답했다.
“침실에 있죠. 불러드릴까요?”
“아니다. 아이들은 일찍 자야지.”
레스턴 공작은 황후의 허락도 없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왜 갑자기 나를 보자고 했느냐?”
아스텔은 긴장한 표정을 가장하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생각보다 상황은 훨씬 복잡했다.
아스텔로서는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이 이 일을 주도했다는 걸 밝혀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스텔과 프리츠, 더 나아가서는 테오르까지 반역자의 자손이 될 테니까.
‘그렇다고 아버지만 빼놓고 대신들을 처벌할 수도 없지.’
반역에 가담한 대신들은 대부분 레스턴 공작의 말을 듣고 황제가 죽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이번 일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잡아들이면 분명 레스턴 공작이 이번 일을 주도했다고 입을 모아서 증언할 것이다.
‘독살이나 반역을 밝혀내는 건 안 돼.’
공작가에 피해가 가지 않을 만한 새로운 죄목을 만들어야 한다.
아스텔은 생각을 정리하며 준비했던 얘기를 꺼냈다.
“세르벨이 란베르크 기사단을 비밀리에 데려오고 있어요.”
여유롭게 앉아 있던 공작이 그 말에 멈칫했다.
“뭐라고?”
“린든에게 들었어요. 세르벨 경이 제게 알리지 않고 기사단을 데려오고 있대요. 수도 근교에도 비밀리에 부대를 숨겨뒀고요.”
아스텔은 놀라는 아버지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공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너는 그와 꽤 친밀한 관계가 아니냐?”
“그랬죠. 그가 테오르의 스승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기사단을 비밀리에 데려오고 있는 걸 저에게 숨겼어요.”
그 말은 곧 세르벨이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들 기사단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었지, 아스텔의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황궁에 근위 기사단도 있지 않느냐?”
“그렇긴 하지만 확신할 수 없죠. 에클렌 백작과 세르벨이 저를 의심하고 등을 돌리면 린든 경이 누구 편을 들겠어요?”
레스턴 공작은 잠시 상황을 생각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가 분통을 터뜨렸다.
“네 오라비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수도 하나 제대로 관리를 못 해?”
“오빠가 대신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요. 이 정도면 잘하는 거죠.”
아스텔이 프리츠를 두둔하자 공작은 대놓고 비웃음을 보였다.
“그 애가 네 편이 됐다고 아주 감싸고도는구나.”
아스텔은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렸다.
“로트우드 기사단은 언제쯤 도착한다고 했죠?”
레스턴 공작의 눈에도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그가 신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빨라도 사나흘은 걸릴 거다.”
“제 생각에는…….”
아스텔은 곰곰이 생각하는 척 연기를 하다가 조용히 운을 뗐다.
“세르벨을 없애는 게 좋겠어요.”
“없애자고?”
“그리고 수도 밖에 대기 중인 기사들도 없애버리면 문제 될 게 없지 않나요?”
레스턴 공작은 멍하니 아스텔을 쳐다봤다.
“황제의 기사들이 장난감 병정인 줄 아느냐? 란베르크 기사단은 마음 내키는 대로 쓸어버릴 수 있는 병정 인형이 아니야.”
“수도 경비대는 프리츠 오빠가 있으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잖아요. 그리고 아버지를 비롯해 다른 귀족들도 저택에 기사들을 두고 있지 않나요?”
“공작가에도 기사들이 있긴 하지만 황제의 기사단을 없앨 만큼 대단한 전력을 아니다.”
당연하지만 귀족들이 데리고 있는 전력은 황궁에 있는 근위기사단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다.
“세르벨이 기사단을 전부 데려온 게 아니잖아요.”
아스텔은 답답하다는 듯이 반박했다.
“세르벨만 없애면 돼요. 기사단도 일부만 데려왔으니 지금이라면 쉽게 없앨 수 있을 거예요. 세르벨은 저를 안 믿고 있으니 란베르크 기사단이 수도에 전부 도착하면 분명 문제가 생길 거라고요. 그가 기사단을 다 데려오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게 낫잖아요.”
“근위기사단은? 그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린든 경은 제가 황궁 안에 붙잡아두고 있을게요. 어차피 린든은 황궁을 지키느라 수도 밖까지 신경 쓸 겨를도 없어요.”
레스턴 공작은 그 말을 듣고 고민했다.
그의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렸다.
아스텔은 잠시 간격을 두고 그에게 충고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 가문 기사들은 쓰지 마세요.”
“그야 당연하지.”
“아버지나 프리츠 오빠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지도 마세요.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우리 가문이 어떻게 되겠어요?”
아스텔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몇 번씩 당부했다.
불안증에 걸린 사람처럼 초조하게 당부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일이 잘못될까 봐 잔뜩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스턴 공작은 그녀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수도 경비대를 움직여서 습격해 보겠다. 로트우드 기사단이 도착하기 전까지 수도가 위험해지는 건 막아야겠지.”
아스텔은 진심 어린 미소로 화답했다.
“고마워요, 아버지.”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다시 아스텔을 돌아보며 충고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황제는 최대한 빨리 끝내거라. 더 오래 끌어봤자 문제만 더 늘어날 테니.”
아스텔은 힘겹게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황제는 최대한 빨리 끝내거라.”
“알겠어요.”
* * *
침실 문을 열자마자 조용하고 따스한 공기가 아스텔을 반겼다.
환자가 머무는 방이라는 이유로 벽난로에 장작을 가득 넣어놔서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늑한 불빛이 호사스러운 침실 안을 포근하게 감쌌다.
카이젠은 창가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아스텔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또 일어나셨어요?”
서류를 읽던 카이젠은 아스텔을 올려다보며 담담한 변명을 내뱉었다.
“더워서.”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의 옆에는 서류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동안 아스텔이 대신 처리했던 서류였다.
“더 쉬셔야 한다니까요.”
아스텔이 잔소리를 하자 카이젠은 눈을 접으며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냈다.
“왜 웃으세요?”
“당신, 테오르에게 하는 것처럼 말하잖아.”
예기치 못한 대답에 아스텔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잔소리를 한다는 뜻인가 보다.
‘그야 테오르보다 더 말을 안 들으니 그렇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보면서 웃다가 서류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당신 아버지는 돌아갔나?”
그레텔의 약을 먹고 깨어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카이젠은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네, 방금 돌아갔어요.”
“의심하지 않던가?”
“전혀 의심하지 않던데요. 다 잘 됐어요.”
카이젠은 아직도 정신을 잃고 병석에 누워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가 깨어났다는 사실은 아스텔과 그레텔을 비롯해 몇 명만 알고 있었다.
카이젠은 온종일 침실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침실 안에만 있었으니 답답하겠지.’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먼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무슨 말이야?”
아스텔은 난처한 마음에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런 식으로 해결해야 해서…….”
원래대로면 황제가 깨어나자마자 근위대를 움직여서 독살범을 밝혀내고 법대로 처벌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을 생각해서 이런 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당신이 미안할 건 하나도 없어.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는 죽었을 거야.”
그의 손이 아스텔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애틋한 울림을 담고 전해져 왔다.
“그동안 당신을 힘들게 해서 미안해.”
“……그런 말씀 마세요.”
벽난로의 불빛이 두 사람 사이에 따스한 온기를 더했다.
깊은 애정을 담은 붉은 눈동자가 아스텔을 직시했다.
아스텔도 카이젠의 붉은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눈을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신에게 빌었는지 모른다.
이 남자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한가지로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복잡했지만.
그럼에도 단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아스텔은 진심으로 카이젠이 살아나서 기뻤다.
그것만은 분명한 진심이었다.
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아스텔은 얼른 몇 걸음 뒤로 떨어졌다.
카이젠은 조금 아쉬운 듯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거뒀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린든과 세르벨. 그리고 프리츠까지 이번 일에 동참한 사람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카이젠은 세 사람을 돌아보고 제일 먼저 세르벨에게 물었다.
“세르벨. 수도 근교에 대기하던 기사들은 전부 수도로 불러들였나?”
“예, 폐하. 모두 수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북부에 남은 전력은?”
“곧 수도 근처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카이젠은 보고를 듣고 린든에게 명령했다.
“명령한 대로 근위대를 비밀리에 대기해 놨다가 현장을 급습해라.”
“예, 폐하.”
아스텔은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미 이렇게 하기로 준비를 해뒀다.
수도 밖에 대기하고 있는 기사단을 공격하려고 움직이면 바로 습격해서 체포하기로.
황제의 병환 중에 귀족들이 기사단을 습격하고 수도를 장악하려고 했다는 죄목을 만들면, 독살 사건을 밝혀내지 않고도 가담자들을 처벌할 수 있으니까.
이번 일에 동조한 귀족들 입장에서도 황제 독살 미수보다는 이쪽이 훨씬 죄가 가볍다.
‘제발 무사히 해결돼야 하는데.’
아스텔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두 손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상황은 예상보다 더 쉽게 끝이 났다.
공작의 명령을 받은 수도의 병사들이 수도 근처에 있는 마을을 습격했다.
그러나 미리 기다리고 있던 근위기사단에 의해 전부 체포되었다.
비슷한 시간에 일부 괴한들이 세르벨의 마차를 습격했지만 그곳에는 세르벨이 없었다.
대신 잠복 중이었던 란베르크 기사들이 그들을 격퇴하고 모두 붙잡아서 황궁으로 끌고 왔다.
전부 하룻밤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스텔이 레스턴 공작과 독대한 지 하루가 조금 더 지났을 무렵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스텔은 카이젠의 곁에서 상황 보고를 받았다.
“모두 순조롭게 해결됐군.”
카이젠은 린든의 보고를 받고 나서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린든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경비대에 명령을 보낸 마크번 남작과 경비대 병사들을 차출한 지휘관도 체포했습니다.”
“연루된 다른 귀족들도 모두 체포해라. 감히 내가 없는 사이에 내 기사단을 습격하다니.”
카이젠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감돌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을 배신한 자들을 모두 없애버릴 생각인 듯했다.
물론 귀족들은 황제가 죽어간다는. 혹은 적어도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레스턴 공작의 편에 붙은 거였지만.
카이젠은 잠시 간격을 두고 물었다.
그의 시선이 얼핏 아스텔을 스쳐 갔다.
“레스턴 공작은?”
린든도 아스텔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세르벨 경을 공작가 저택으로 보냈습니다. 공작님만 조용히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이번 일은 황제의 병환 중에 귀족들이 기사단을 습격하려고 했던 것으로 처리될 것이다.
카이젠은 최대한 레스턴 공작이 연루되지 않게 처리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와도 예기치 못하게 연루된 것처럼 만들 생각이었다.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현재 독살 시도에 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대다수는 아스텔이 발표한 것처럼 황제가 병이 나서 앓아누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 수고했다. 그만 물러가라.”
조용히 앉아서 둘의 대화를 듣던 아스텔은 린든이 문을 닫고 나간 뒤에 카이젠에게 물었다.
“벨리안 님은 안 부르시네요.”
카이젠은 당연한 소리를 왜 묻냐는 듯이 말했다.
“당신도 그 녀석에게 사정을 설명해 주지 않았잖아.”
“그건…….”
아스텔은 정곡을 찔린 듯이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야 벨리안은 믿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벨리안은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한편으로는 황제파 귀족들의 편이기도 했다.
레스턴 가문의 딸인 아스텔을 공공연히 경계하고 있었고.
카이젠은 아스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이해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숨긴 일을 내가 밝힐 필요는 없겠지. 그 녀석이 자세한 사정을 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가만 보면 카이젠도 벨리안을 그냥 잡일하는 비서 정도로만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스텔은 웃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카이젠이 깨어난 지 이틀이 조금 넘었다.
남부에서 가져오기로 되어 있는 약초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직 독성이 몸에 남아 있을 텐데도 카이젠은 잠시도 쉬지 않고 그간 밀린 일을 처리했다.
“나는 괜찮아. 이제는 나보다 당신이 더 피곤해 보여.”
카이젠은 조금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스텔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신 걸 알면 테오르가 기뻐할 거예요.”
카이젠은 계속 아픈 것처럼 침실 안에 머물렀다.
함께 황후궁에 있는 테오르에게도 아직 그가 회복한 걸 말해주지 않았다.
“그 녀석도 많이 걱정했겠군.”
“그럼요. 폐하를 보고 아프지 말라고 울었어요.”
“이런…….”
카이젠이 걱정스러운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스텔은 테오르가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는 걸 말해줄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직접 만나서 듣는 게 더 좋겠지.’
직접 테오르를 만나서 아빠 소리를 들으면 카이젠은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는 것처럼 기뻐할 것이다.
“당신, 정말 괜찮은 건가?”
카이젠의 목소리가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스텔은 그 뒤에 숨겨진 말도 이해했다.
‘이번에는 정말 당신 아버지를 죽이게 될 텐데.’
그는 아스텔이 괜찮은 건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스텔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친아버지의 죽음을 얘기하는데도 아무런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조금도 안타깝지 않아요. 일이 잘못됐거나 제가 필요 없었으면 아버지는 저도 죽였을 테니까요.”
* * *
레스턴 공작은 서재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잘 되고 있겠지.’
그는 전날 사람을 보내서 세르벨의 위치를 확인하고 기사단이 숨어 있는 마을도 염탐했다.
전해 들은 대로 세르벨은 몰래 기사단을 더 데려왔고 그 일부를 수도 근교에 숨겨 두고 있었다.
전부 아스텔이 말해준 대로였다.
‘젊은 놈이 교활하기는.’
레스턴 공작은 당장 세르벨을 없애기 위해 심복들을 보냈다.
수도 근처에 대기 중인 기사들을 습격하는 건 다른 귀족에게 맡겼다.
프리츠가 내무대신이 되기 전, 전임 내무대신이었던 뷔르겐 자작의 친척에게.
그는 수도 경비대의 지휘관 중에 연줄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위급 상황에 일부 병사들을 빼낼 수 있었다.
프리츠가 대신 자리를 이어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간 경비대의 지휘관들을 바꾸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세르벨을 습격하는 건 자신의 심복들에게 맡겼다.
공작가에 속한 기사들에게 정식으로 명령을 내릴 수는 없으니 수족처럼 부리던 수하들에게 맡겨야만 했다.
다른 가문에서 차출한 기사들도 딸려 보내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불안하군.’
저녁이 될 무렵부터 레스턴 공작은 기묘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걸 느꼈다.
“아직 소식이 없나?”
“예, 아직…….”
지금쯤이면 뭔가 소식이 왔을 만도 한데.
어느 쪽이든 뭔가 연락이 왔어야 정상인데 이상할 만큼 양쪽 모두 조용했다.
공작은 고민 끝에 심복에게 다시 명령했다.
“다시 사람을 보내서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아봐라.”
그 순간 복도 쪽에서 날카로운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얼핏 듣기로도 많은 사람이 저택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공작은 찻잔을 던지듯이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순간 늙은 집사가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그는 황급히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공작님, 황제의 기사들이 왔습니다!”
“황제의 기사라고?”
황제의 기사들이 왜 여기를 와?
레스턴 공작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하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시끄러운 발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도망칠 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젊은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제일 앞에는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란베르크 기사단장 세르벨이었다.
“공작님,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세르벨의 담담한 목소리에 공작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를 습격하라고 사람들을 보냈건만 세르벨은 멀쩡한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세르벨의 입에서 나온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는 말이었다.
레스턴 공작은 존칭을 붙이는 것도 잊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황제가…….”
황제가 살아 있다고?
세르벨은 차가운 눈빛으로 명령을 전했다.
“폐하께서 지금 당장 공작님을 황궁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공작은 얼빠진 낯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공작의 곁에 있던 수하가 검을 잡으려고 했지만 세르벨을 따라온 기사들이 훨씬 더 빨랐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검날이 두 사람을 겨눴다.
레스턴 공작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힘없이 물었다.
“……황제께서 무사하신가?”
세르벨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기력을 회복하시고 황제궁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계십니다.”
“…….”
레스턴 공작은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아스텔이 나를 속였군.’
그는 순간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그 교활한 계집애가…….!”
“공작님, 그 이상 황후 폐하께 무례를 범하시면 저와 제 기사들에게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하실 겁니다.”
세르벨이 엄중하게 경고했다.
계속 그딴 소리를 하면 평범한 죄인처럼 끌려가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레스턴 공작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 애가 제정신인가? 내가 반역자가 돼서 죽으면 저와 황태자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뭔가 착각하셨군요. 황제 폐하께서는 귀족들이 기사단을 습격한 사건에 대해 처벌을 명하셨습니다. 이 일은 반역과는 무관합니다. 또한 공작님과도 무관합니다.”
레스턴 공작은 흔치 않게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무슨 죄목으로 데려가는 거지?”
세르벨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뻔뻔한 대답을 내놓았다.
“공작님은 이번 일의 참고인 신분으로 잠시 황궁에 모셔가려는 것입니다.”
“하…….”
레스턴 공작은 비로소 황제와 아스텔이 자신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아스텔이 기사단을 습격하라고 종용했던 이유도.
‘독살 시도를 덮으려고 이런 짓을 꾸몄군.’
하지만 그걸 깨달아 봤자 이미 늦었다.
사방엔 기사들의 검날이 그를 겨루고 있었다.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 * *
아스텔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황후궁으로 들어온 프리츠에게서 전날 밤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디로 데려갔대요?”
“일단은 황궁에 있는 폐궁에 감금됐다고 들었다.”
프리츠의 목소리에는 착잡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일단은’이라는 말은 앞으로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어젯밤 이후 황궁 안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이번 일에 가담한 귀족들이 한꺼번에 끌려왔기 때문이다.
카이젠은 새벽이 되기도 전에 황제궁으로 돌아갔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한나가 짧게 문을 두드리고 테오르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한 테오르가 곰 인형을 끌어안고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테오르. 일찍 일어났구나.”
“응. 블린이 날 깨웠어.”
“안녕하세요, 프리츠 삼촌.”
“황태자 전하.”
프리츠는 눈빛에 깃든 수심을 지워내고 테오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스텔의 품에 안긴 테오르가 고개를 빼꼼히 들고 물었다.
“오늘은 침실에 가봐도 돼요?”
테오르가 말하는 침실은 카이젠이 있는 아스텔의 침실이었다.
테오르는 매일 아침 카이젠을 보러 가도 되냐고 물었다.
아스텔은 번번이 아이를 달래며 폐하가 아파서 쉬어야 한다고 만류했었다.
지난 이틀간은 카이젠이 깨어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만류해야 했고.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아니, 오늘은 폐하께서 테오르를 보러 오실 거야.”
“정말?”
“응. 폐하께서는 새벽에 일하러 나가셨거든. 아침에 테오르를 보러 오신다고 하셨어.”
카이젠은 아침 식사 전에 잠시 들리겠다고 했었다.
식사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잠시 후에 카이젠이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그가 두 사람을 찾아서 휴식실로 들어왔다.
조금 복잡한 표정을 하고 들어서던 카이젠은 아스텔의 품에 안겨 있는 테오르를 보고 멈춰 섰다.
카이젠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테오르에게 손을 뻗었다.
“테오르.”
잠시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멍하니 서 있던 테오르가 뒤늦게 그에게 달려갔다.
* * *
카이젠은 그날 새벽부터 정식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몸 상태를 묻는 신하들을 무시한 채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이번 사건과 관련된 일도 하나하나 정리했다.
바쁘게 일을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환한 아침이 되었다.
‘아침을 들기 전에 돌아간다고 했는데.’
급한 일만 처리해 두고 돌아가겠다고 아스텔에게 약속했다.
아스텔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꼭 필요한 일만 하고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아스텔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를 걱정하는 아스텔의 눈빛에는 따뜻한 애정이 스며 있었다.
‘아스텔은 주저 없이 내 목숨을 구했지.’
지난 며칠간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마음 깊이 감동을 받았다.
아스텔은 황태후가 될 기회도, 자신의 아버지도 저버리고 카이젠의 목숨을 구했다.
격렬한 사랑은 아닐지 몰라도 애정과 신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조금은 희망을 가져봐도 된다는 뜻일까.’
카이젠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황후궁으로 들어갔다.
아스텔을 만나고 오랜만에 테오르도 만나고 싶었다.
황후궁에 들어서자 시녀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스텔은 프리츠와 함께 있다고 했다.
‘공작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카이젠은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아스텔을 만나러 갔다.
응접실 문을 열자 아스텔과 프리츠가 보였다.
“아스텔.”
그 순간 아스텔의 품에 안겨 있는 테오르가 눈에 들어왔다.
테오르는 거의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카이젠이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 벨리안을 비롯한 젊은 신하들도 저런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다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음이 돼서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회복했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고 무작정 돌아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테오르의 반응은 조금 더 드라마틱했다.
카이젠이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테오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상처럼 굳어졌다.
카이젠은 먼저 테오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테오르.”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테오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마치 이 장면이 현실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카이젠을 향해 달려왔다.
“아빠!”
테오르는 그대로 카이젠의 품에 안겼다.
카이젠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테오르가 지금 뭐라고 했지?’
카이젠은 자기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테오르는 카이젠의 품 안에 얼굴을 묻은 채로 훌쩍훌쩍 흐느꼈다.
“흑…… 흐흑……. 아빠…….”
이번에는 분명히 ‘아빠’라는 말이 들렸다.
처음 듣는 아빠 소리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카이젠은 방금 전에 만났던 관리들보다 더 얼빠진 표정으로 굳어져 버렸다.
“테오르…….”
그런 와중에도 그는 한 손으로 테오르를 토닥이며 달랬다.
아스텔의 옆에 있던 프리츠도 똑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유일하게 아스텔만 카이젠의 얼떨떨한 반응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폐하께서 정신을 잃고 계실 때도 테오르가 폐하를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아스텔은 테오르가 정신을 잃은 카이젠을 보면서 울먹였던 일을 말했다.
그때 처음으로 그를 아빠라고 불렀던 일도 말해줬다.
그동안 테오르는 카이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고집스러울 만큼 ‘폐하’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카이젠을 보고 행여 그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카이젠은 아이의 작고 부드러운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간 쌓아뒀던 벽을 허물고 드디어 테오르가 그를 아빠라고 인정해 주는 순간이었다.
품 안에 안긴 조그만 몸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테오르.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테오르는 고개를 살짝 들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제 안 아파요?”
“그래, 이제 괜찮아.”
카이젠은 손가락으로 아이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아프지 마세요.”
“그래그래. 이제 우리 테오르를 걱정시키지 말아야지.”
카이젠은 테오르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우유 냄새 같은 아이 특유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체향이 느껴졌다.
행복감과 함께 애틋한 감정이 밀려왔다.
어린 아들이 그를 이렇게나 걱정하고 있었다는 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스텔이 테오르에게 손을 뻗었다.
“테오르. 이리 오렴. 폐하는 아직 무리하시면 안 돼.”
감동적인 상봉을 끝내고 세 사람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프리츠에게도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유했지만 그는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자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지 핑계를 대며 집무실로 돌아가 버렸다.
식사를 끝낸 뒤, 카이젠은 오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테오르에게 약속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스텔이 그를 배웅하러 따라 나왔다.
카이젠은 참았던 화제를 꺼냈다.
“당신 아버지는 폐궁에 있어. 만나고 싶으면 만나러 가도 돼.”
“감사합니다만 제가 만나러 갈 일을 없을 것 같습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스텔에게 레스턴 공작은 친부모였다.
아무리 사이가 나쁜 부모라도 부모가 죽으면 조금은 씁쓸한 감정이 남을 수밖에 없다.
“아스텔.”
카이젠은 황후궁의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아스텔도 그와 함께 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스텔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이제 혼자서 힘들어하지 말고 일이 생기면 뭐든 내게 말해.”
“…….”
아스텔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봤다.
한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카이젠이 있었다.
맞잡은 손에서 익숙한 체향과 온기가 전해져 왔다.
이번 일은 악몽처럼 끔찍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카이젠과의 관계가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깝게 밀착될 때마다 민망할 만큼 가슴이 뛰는 걸 보면 조금 심하게 좋아진 것 같긴 했다만.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아스텔은 조심스럽게 손을 빼내며 화제를 돌렸다.
“남부에서 구해온 해독초가 하루 이틀 안에 도착할 거라고 들었어요. 약초가 오면 다시 한번 약을 만들어 드릴게요.”
카이젠은 아직 완전히 해독된 게 아니었다.
남부에서 가져오는 약초로 약을 한 번 더 만들어 먹어도 체내에 쌓인 독이 완전히 사라질지는 미지수였다.
“황궁 시의에게도 독약과 관련된 일은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함구해 뒀어.”
카이젠은 아스텔을 안심시키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을 위해서 기력을 보충하는 약을 가져오라고 해뒀고.”
“저는 그런 약은 필요 없어요.”
카이젠은 아스텔의 손을 잡은 채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그런 소리 하지 마. 당신까지 아프면 테오르가 얼마나 걱정하겠어?”
거절하기도 뭐해서 아스텔은 미미하게 웃기만 했다.
카이젠은 애정이 담긴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혼에서 이혼, 다시 재혼을 거쳐 다시 새로운 관계로 첫발을 내딛는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전부 내가 처리할 테니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 * *
벨리안은 아침도 먹지 못하고 몇 시간째 일만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바쁠 만한 상황이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허기를 느낄 틈도 없었다.
황제의 병환 중에 갑자기 기사단이 습격을 받았다.
습격을 주도한 사람은 수도 안에 있던 귀족들이었다.
새벽에 갑자기 연락을 받고 출근했을 때는 이런 엄청난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새벽에 갑자기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셨고.’
황제는 그 일이 수습되자마자 업무에 복귀했다.
위독하다는 말에 두려워하던 것이 허무할 만큼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명령으로 이번 일과 관련된 자들이 잡혀들어오기 시작했다.
몇몇 귀족과 황후의 아버지 레스턴 공작이.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한 가지만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레스턴 공작은 왜 잡혀온 걸까?
“레스턴 공작은 이번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보고서를 가져온 조사관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분은 증언을 위해 참고인으로 모셔왔습니다. 사건과 관련된 부분은 아직 조사 중입니다.”
“그 공작님은 누가 조사하는 거야?”
“아직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힌 다른 귀족들과 달리 레스턴 공작은 황궁의 한편에 머물게 되었다.
“대접이 좋네.”
“황후 폐하의 아버님이시니 당연한 일이지요.”
하긴 그분은 죄인으로 잡혀 온 게 아니라 이번 일에 대해 증언할 참고인 신분으로 불려왔다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왜 굳이 황궁 안에 놔두는 거지?
‘애초에 뭘 조사하는 거지?’
이번 일은 몇 명의 귀족이 황제의 병환을 틈타서 수도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으로 판명됐다.
수도 경비대를 움직였던 젊은 남작도 절박하게 주장했다.
자신은 반역 같은 걸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고,
그저 황제 폐하의 병환 중에 세르벨 경이 기사단을 몰래 데려오는 바람에, 뭔가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서 나름대로 수도를 지키려고 그랬던 거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덕분에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난 뒤 증언을 바꿨다.
세르벨 경에 대한 원한 때문에 이참에 그를 죽이고 곤경에 빠뜨리려고 그랬단다.
‘그것도 별로 신빙성이 있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조사관의 서류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그러했다.
벨리안은 험한 장면을 보는 게 싫어서 감옥 근처에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서류로만 파악했다.
그러다 보니 도통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갑자기 기사단을 공격한 거야? 세르벨은 기사단을 왜 거기 숨겨두고 왔대? 레스턴 공작은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지?’
궁금한 일투성이였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린든은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고, 세르벨은 아예 벨리안을 피해 다녔다.
참다못해 카이젠에게 슬쩍 의구심을 내비쳤지만 닥치고 서류 작업이나 하라는 반응만 돌아왔다.
‘다들 너무해…….’
모두들 합심해서 자세한 정황을 알려주지 않는 것 같아서 좀 서운했다.
‘레스턴 공작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벨리안은 막연히 레스턴 공작이 황제 폐하의 병환 소식을 듣고 다들 귀족들과 함께 세르벨을 습격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추측했다.
세르벨은 황제 폐하께 충성하는 사람이니까.
황제 폐하가 죽기라도 하면 황태자를 내세워서 섭정해야 하는데 세르벨을 비롯한 신흥귀족들이 반발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이 가설에도 어폐가 있었다.
아직 황제 폐하가 죽은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런 위험한 짓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실제로도 황제 폐하는 며칠 앓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회복했다.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벨리안은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물었다.
“황후 폐하의 주변을 조사하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어?”
황제 폐하의 병환 중에 혹시나 황후가 무슨 일을 꾸밀까 싶어서 황후의 주변을 감시하라고 했었다.
‘딱히 큰 수확은 없었던 것 같지만.’
게다가 황제께서 아무렇지도 않게 회복하셨으니 부질없는 일이었다.
조사관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별다를 건 없었습니다. 젊은 공작님께서 영지에 사람을 보내 뭔가를 급하게 가져오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수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젊은 공작이?”
벨리안을 비롯한 황제의 측근 관리들은 새롭게 레스턴 공작이 된 프리츠를 아버지인 전대 공작과 구분하기 위해 ‘젊은 공작’이라고 불렀다.
자연히 전대 공작은 ‘늙은 공작’이라고 부르게 됐고.
그 젊은 공작님이 영지에서 뭔가 급하게 가져왔다고?
“그게 언제인데?”
“폐하께서 병환 중이실 때였습니다.”
벨리안은 약간 수상함을 느끼고 다시 물었다.
“뭘 가져왔는데?”
“조사한 바로는 영지에서 받은 선물들을 수도로 가져오라고 시켰다고 합니다.”
“……선물을 가져와? 이런 상황에?”
황제께서 앓아누워 있는데 선물을 왜 가져와?
“예, 그리고 얼마 전에도 남부에 사람을 보내서 뭔가를 구해오라고 했다더군요.”
“젊은 공작이 이번에 남부에서 가져오라고 한 건 뭔데? 혹시 뭔지 알아?”
“글쎄요,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조사관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무슨 꽃이라고 하더군요.”
벨리안은 상상도 못 한 단어를 듣고 깜짝 놀랐다.
“꽃이라고?”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조사한 바로는 분명히 꽃이었습니다.”
조사관은 왜 그렇게 놀라냐는 듯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 어떤 꽃인데?”
조사관은 여전히 심드렁한 태도였다. 젊은 공작의 행동을 조금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독초나 뭐 그런 특별한 건 아니었습니다. 화분에 심는 꽃이라더군요.”
“혹시 약초로 쓰이거나 그런 꽃은 아냐?”
벨리안의 다급한 물음에 조사관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아닙니다만……. 글쎄요. 독초가 아니라는 말만 듣고 자세히 알아보지는 않아서요.”
수사관이 약제사도 아니니 약초인지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으리라.
“다른 수상한 점은 없었어?”
“뭐 수상할 게 있겠습니까? 명문가 자제다운 취미겠지요.”
조사관은 벨리안이 놀라는 걸 보면서도 여전히 공작의 행동에 별로 흥미를 두지 않는 눈치였다.
벨리안은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 인간은 이렇게 둔감해서 어떻게 조사관 일을 하는 거지?’
상대에게 한심한 눈빛을 보내던 벨리안은 이어서 깨달았다.
아스텔이 약초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벨리안을 비롯해 순행에 따라갔던 극소수만 알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보면 황후의 오빠가 먼 지역에서 꽃을 사들였다는 말을 들어도 별 관심이 없을 만도 했다.
심지어 독초도 아니라고 하니까.
하지만 벨리안은 그렇게 단순하게 넘기기 어려웠다.
“황후께서 가까이 두는 약제사 말이야. 그 여자에 대해서는 뭐 알아낸 게 없어? 특별히 수상한 거라든가.”
벨리안은 그 여자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보라고 했었다.
“별로 없습니다. 그 약제사라는 여자는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약을 팔았더군요. 알아본 바로는 수상한 약을 팔았다는 얘기도 없고 딱히 문제가 생긴 적도 없습니다.”
“……그래?”
“예, 게다가 지난 며칠 동안은 황후궁에서 살다시피 해서 감시할 수도 없었고요.”
벨리안은 턱 끝을 매만지며 고민을 이어갔다.
황제가 쓰러졌을 때 황후는 황제를 계속 황후궁에 붙잡아뒀다.
그사이에 젊은 공작은 갑자기 남부에서 수상한 꽃을 주문했다.
그 꽃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꽃이 도착하기 전에 황제는 병을 회복하고 황제궁으로 돌아왔다.
‘음…….’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까 확실히 수상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황후는 병을 가장해서 황제를 죽이려고 했다.
그 약제사가 질병에 걸린 것처럼 죽게 만드는 약을 개발했는지도 모른다.
젊은 공작이 주문한 꽃은 그 약의 중요한 재료였다.
그런데 재료를 구하는 데 혼선이 생겼다.
그래서 꽃이 도착하기 전에 황제가 회복해 버린 것이다.
‘너무 무리한 추측인가?’
심증만 있고 증거가 없으니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던 벨리안은 돌아가려고 눈치를 보는 조사관에게 마지막으로 명령했다.
“그 약제사를 좀 더 감시해봐. 그리고 젊은 공작이 가져온 약초……. 아니, 꽃에 대해서도 자세히 좀 알아보고.”
* * *
아스텔은 테오르와 함께 유리 온실에 있었다.
황후궁의 유리 온실은 궁전의 정원으로 통하는 한쪽 입구에 있었다.
천장부터 벽까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져 맑은 날에는 햇살이 가득 비쳐들었다.
유리벽 표면에는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여름에는 더워서 이곳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날이 선선해지면서 이곳에 머무는 일이 자주 생겼다.
“블린, 잡아 와!”
테오르가 분수대 쪽으로 공을 던졌다.
컹컹!
맑은 햇빛이 비치는 화단 옆에서 블린이 껑충껑충 뛰며 공을 쫓아갔다.
천으로 만든 동그란 공을 한참 굴러가다가 화단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 여기 있다.”
반대편에서 기다리던 카이젠이 다시 공을 집어서 테오르에게 던져줬다.
테오르와 블린 모두 그 공을 쫓아서 다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아스텔은 한숨이 나왔다.
“폐하, 정말이지 무리하지 마세요.”
회복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업무에 복귀한 지 이제 겨우 나흘째였다.
밀린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카이젠은 틈만 나면 테오르와 놀아주려고 했다.
그는 아스텔에게 걸어오며 어이없다는 듯이 투정을 부렸다.
“이 정도로 무리한다니…….”
“안 그래도 일 때문에 바쁘시잖아요. 휴식 시간에는 좀 쉬셔야 해요.”
카이젠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스텔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이 이렇게 엄격한 보호자인 줄 몰랐어. 당신은 테오르에게도 엄하게 굴긴 했지만 나에겐 더 심하네.”
사사건건 쉬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아스텔에 대한 불평을 담고 있었지만 말투로 보건대 반쯤은 놀리는 말이었다.
“폐하와 테오르는 다르지요.”
“내가 테오르보다 말을 안 듣는다는 뜻인가?”
“비슷한 뜻이었습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담담한 대답을 듣고 웃음을 지었다.
아스텔도 웃으면서 그를 위해 차를 따랐다.
찻잔에 향기로운 다향을 풍기는 홍차가 백자 찻잔을 가득 채웠다.
붉은 찻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제 그레텔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스텔은 착잡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남부에서 구해온 두 번째 해독초가 황궁에 도착했다.
그레텔은 황급히 새로운 약을 만들었다.
카이젠은 새로 만든 약을 남김없이 마셨다.
그 후 시의의 진찰을 받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카이젠은 약을 먹기 전과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멀쩡해 보였다.
“회복하신 것 같기는 합니다만…….”
시의는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보고했다.
“아직도 독성이 남아 있나?”
아스텔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함께 진찰한 그레텔이 주저하며 대답을 내놓았다.
“조금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
아스텔은 그녀의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담긴 진실을 깨달았다.
완전히 해독되지는 않았구나.
뒤이어 절망감이 밀려왔다.
해독초라는 것을 두 개나 가져다 먹었는데도 독성을 깨끗이 없애지 못했다.
“아스텔, 난 괜찮아.”
세 사람의 대화를 듣던 카이젠이 아스텔을 안심시켰다.
“이 약을 한 번 더 먹으니까 조금 더 몸이 개운해진 것 같아.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정말이신가요?”
아스텔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진짜 안도해서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위로하려는 카이젠에게 계속 우울한 모습을 보이는 게 미안해서였다.
아스텔은 그레텔을 배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면서 잠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만일…… 영원히 독을 제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레텔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독은 원래 잠에 빠져서 수일 내에 사망하는 독이었죠. 해독초로 독 성분을 거의 제거해서 지금은 독성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고요.”
“깨끗하게 제거하지 못하면 언젠가 독성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레텔의 얼굴에 그늘이 더 짙어졌다.
아스텔은 직접 듣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레텔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설명을 덧붙였다.
적어도 갑작스레 독성이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중독된 상태로는 원래의 수명보다 일찍 죽게 되리라는 것을.
“엄마, 폐하.”
찻잔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테오르가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손에는 작은 그릇을 들고 있었다.
“한나가 가져왔어요. 이거 드세요.”
그릇 안에는 알록달록한 사탕이 담겨 있었다.
트레이를 든 한나가 뒤따라왔다.
카이젠은 테오르가 내미는 사탕 그릇을 보며 물었다.
“이제는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 거냐?”
테오르는 조금 부끄러운 것처럼 시선을 살짝 떨구고 두 손으로 테이블 위에 사탕 그릇을 올렸다.
“폐하한테 그렇게 부르면 안 된대요.”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느냐?”
“할아버지가요.”
카이젠은 뭐라고 하지 못하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긴 예법에 안 맞는 일이긴 했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알려줬다.
“그럼 아버지라고 불러야지.”
그 말에 테오르는 카이젠을 다시 돌아보더니 사탕 그릇에서 작은 캐러멜 사탕을 꺼냈다.
“아버지, 이거 드세요.”
카이젠은 테오르가 내미는 사탕을 받으며 말했다.
“아빠라고 불러도 괜찮다.”
“정말요?”
“그래.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돼.”
그의 시선이 아스텔에게 잠시 머물렀다.
“아스텔은 엄마인데 나만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도 이상한걸.”
아스텔은 그 말을 들으며 웃기만 했다.
테오르는 가만히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맑은 눈동자로 둘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웃었다.
“왜 웃니?”
테오르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그냥. 엄마 아빠가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아서.”
* * *
차가운 바람이 유리창을 스쳐 갔다.
낡아 빠진 유리창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유리 너머로 저물어가는 하늘이 보였다.
‘감히 나를 이런 곳에 놔두다니.’
방 안에 갇혀 있는 레스턴 공작은 먼지가 가득한 창틀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자각할 때마다 분통이 터졌다.
그는 황궁으로 끌려오자마자 이 낡은 궁전에 갇혔다.
이 폐궁은 오래전에 버려진 음침한 소궁전이었다.
오랫동안 버려진 데다 청소를 해놓지도 않아서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정식으로 처형할 수는 없을 테니 이런 곳에 가둬놓고 독을 주고 자결하라고 시킬 줄 알았다.
하지만 하루 이틀을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때쯤엔 약간 희망이 생겼다.
‘운이 좋으면 어딘가에 영원히 유폐되는…… 그런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
어쨌든 자신은 황후의 아버지이자 황태자의 외조부니까.
게다가 황제가 먹은 독은 평범한 독이 아니었다.
잠시 깨어났다고 쳐도 언제 다시 쓰러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 막연한 희망을 품고 황제의 명령을 기다렸다.
끔찍할 만큼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결정이니 더욱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공작은 초조하고 불안한 기분으로 하루하루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며칠을 기다려도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제는 기다리다 못해 분노가 치밀었다.
‘사람을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이 시궁창 같은 곳에서 며칠을 견뎠는데 얼마나 더 여기 있으라는 거야?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눈앞에 놓인 그릇을 유리창으로 던져 버렸다.
쨍그랑.
창문으로 날아간 그릇이 창틀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깨진 유리 조각들 사이로 묽은 수프가 바닥에 쏟아졌다.
손도 대지 않은 그의 저녁 식사였다.
“공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입구를 지키는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젊은 근위 기사는 이 유폐된 궁전을 지키는 책임자였다.
레스턴 공작은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
“나를 언제까지 여기 둘 건지 폐하께 여쭤봤나?”
젊은 기사는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침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아직도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저것과 똑같은 대답을 100번쯤 들은 것 같다.
물론 상대방도 지난 며칠 동안 똑같은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공작이 만날 때마다 그렇게 물었으니까.
아무리 물어봐도 계속 똑같은 대답만 돌아온다.
공작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따져 물었다.
“나를 여기 두고 굶겨 죽이기라도 할 건가?”
“식사가 부족하시면 더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공작은 화를 못 이기고 남은 그릇을 내던졌다.
기사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공작이 무슨 소리를 하든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사실 그가 뭔가 해주고 싶어도 명령이 내려오질 않는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시종을 불러서 치우라고 하겠습니다.”
젊은 기사는 더 할 얘기 없으면 나가겠다는 듯이 걸음을 돌렸다.
공작은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그를 황급히 붙잡았다.
“황후 폐하께 내 말을 전해드리게.”
“황후 폐하께요?”
공작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래, 내 딸. 황후 말이야.”
아비가 이런 곳에 잡혀 있는 데도 코빼기도 안 비치는 괘씸한 것.
아스텔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아스텔은 나를 조용히 없애고 이번 일을 묻어두려고 하는 모양이지.’
황제가 왜 그걸 허락했는지 모르겠지만 공작은 그렇게 쉽게 죽어줄 생각이 없었다.
“황후에게 전해줘. 내가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말이야. 우리 가족과 관련된 일이야.”
공작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멀뚱멀뚱 서 있는 기사에게 건네줬다.
“중요한 일이니 꼭 좀 부탁하네.”
기사는 손바닥을 펴고 건네받은 반지를 힐끗 살폈다.
검은 보석이 박힌 반지는 꽤 값이 비쌀 것 같았다.
무려 공작의 손에 있던 것이니 분명히 엄청난 값이 나가겠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감금된 사람에게 청탁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일이 잘못되면 자신도 같이 처벌을 받을 테니까.
근위 기사단장인 린든은 이런 일에 관해서 무척 엄격했다.
“이런 건 안 주셔도 됩니다.”
젊은 기사는 공작의 옆에 있는 테이블에 다시 올려놓았다.
공작이 얼굴을 찌푸리려는 찰나에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 하신 말씀은 황후 폐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는 말해줘도 되겠지 싶었다.
어차피 이 공작님을 어떻게 하려는 건지 그도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황후 폐하의 아버지니까 너무 가혹하게 대할 수도 없었다.
* * *
아스텔은 닳아서 변색된 종이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지하 서고에서 가져온 오래된 약초책이었다.
워낙 낡은 책이라 만질 때마다 먼지가 버석버석 일어났다.
맨 끝 페이지의 마지막 글자까지 유심히 읽어나간 뒤 아스텔은 한숨을 쉬며 책을 덮어놨다.
“여기도 없어요.”
맞은편에 있던 그레텔도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여기도…… 별다를 건 없네요.”
두 사람은 실망스러운 눈빛을 마주했다.
아스텔은 카이젠의 독에 대해 그레텔과 함께 연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료를 뒤져봐도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버지를 심문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스텔이 푸념하는 소리를 듣고 그레텔이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이 약초에 관해 잘 아시는 게 아니면 소용없을걸요.”
하긴 그럴 것이다.
카이젠이 정신을 잃고 있을 때 이미 아버지를 슬쩍 떠봤다.
이 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캐물었지만 아버지도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남부에서 어렵게 구한 독이며 해독제가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었다.
‘지금으로서는 해독초를 더 구해오는 게 유일한 희망인가.’
아스텔은 한쪽 서류 더미에서 제국 지도를 꺼냈다.
“혹시 다른 지역에는 해독초가 더 있지 않을까요?”
다른 지역에 가서 약초를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자신은 황후 신분이니 불가능한 얘기겠지만.
그레텔은 초조하게 지도를 훑어보는 아스텔을 달랬다.
“새 공작님께서도 찾고 계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아는 곳에 수소문해 볼게요.”
아스텔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츠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보내서 찾고 있었고, 지역 관료들을 통해 공식적으로 해독초를 찾았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이번 일 때문에 그레텔이 제일 고생이 많았네요. 내가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아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레텔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황제 폐하의 일인데요.”
그녀는 잠시 간격을 두고 비밀을 말하듯이 덧붙였다.
“물론 우리 테오의 아버지 일이니까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있지만요. 앗, 죄송해요. 감히 이렇게 부르면 안 되는데…….”
그레텔은 실수했다는 듯이 입을 살짝 가리고 사죄했다.
아스텔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그냥 편하게 얘기하라니까요.”
아스텔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한밤중이 되어가고 있었다.
“염치도 없이 매일 늦게까지 붙잡아놓고 있었네요. 오늘은 먼저 돌아가서 쉬어요.”
아스텔은 괜찮다고 하는 그레텔을 설득해서 내보냈다.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황후궁의 뒷문으로 나갔다.
문을 지키는 기사가 조금 놀란 눈으로 예를 갖췄다.
아스텔은 그에게 명령했다.
“마차를 가져와.”
마차를 내오게 해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게 했다.
그레텔은 마차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얼른 주무세요. 저는 내일 다시 올게요.”
“네, 기다릴게요.”
아스텔은 그레텔을 배웅한 뒤 서재로 돌아왔다.
촛대의 불빛과 벽난로의 장작불이 어두운 방 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테오르는 잠들었고 카이젠은 일이 밀려서 황제궁에서 잔다고 전해 왔다.
한나도 피곤할 것 같아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자라고 보냈다.
서재 안에는 아스텔 혼자만 남았다.
‘오늘밤에는 밤새 약초에 대한 자료를 뒤지다가 자야겠다.’
아직도 살펴볼 자료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아스텔은 책상 앞에 서서 약초 그림이 그려진 종잇장을 천천히 넘겼다.
마른 종잇장을 넘기는 손에 뭔가가 닿았다.
아스텔은 흠칫 놀라서 몸을 돌렸다.
카이젠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폐하?”
“이런. 내가 놀라게 한 것 같군.”
어느새 한 걸음 뒤로 다가온 그가 아스텔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아스텔은 놀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들어왔어.”
그레텔을 배웅해 주러 나간 사이에 서재에 들어와 있었나 보다.
일부러 놀리려고 잠시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장난을 하셔도…….”
아스텔이 핀잔을 주는데도 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미안해. 숨어 있었던 건 아냐. 잠시 옆방에 가서 거기 있는 책들을 보고 있었어.”
아스텔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서재에는 작은 협실이 딸려 있었다.
아스텔은 그동안 그 안에 약초에 대한 자료들을 숨겨놓았다.
카이젠이 보면 걱정할 것 같아서였다.
카이젠은 예상대로 낮게 한숨을 쉬며 아스텔이 보고 있던 그림을 넘겼다.
“밤늦게까지 이런 걸 보고 있었군.”
“할 일이 없어서 취미 삼아 하는 건데요.”
아스텔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당신까지 이렇게 무리할 것 없어. 황궁 의사들도 찾고 있으니까. 시의도 앞으로 10년간은 괜찮을 것 같다고 했고.”
황제의 시의는 어떤 독인지 구분하지도 못했는데.
별로 믿음이 가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아스텔은 반박하는 대신 조용히 중얼거렸다.
“10년 후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말이 10년이지 몇 년 후에 다시 몸이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지금 상황에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10년에서 15년이면 충분해.”
카이젠은 무심한 목소리로 아스텔이 보고 있던 자료를 덮었다.
“테오르가 성장할 때까지만 살면 되겠지.”
아스텔은 그 말에 시선을 들고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국을 다스리고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그의 삶이 끝난다니.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아스텔은 카이젠이 원래 수명보다 일찍 죽을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도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아스텔은 시선을 내리고 솟아나는 감정을 참았다.
“아스텔…….”
카이젠은 그녀를 위로하려는 듯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 탓이 아냐.”
가늘게 떨리는 손등 위에 따뜻한 손이 내려앉았다.
아스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에 카이젠이 있었다.
벽난로의 불꽃이 그의 단정한 얼굴에 위태로운 그림자를 그렸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카이젠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슬아슬하게 입술이 닿기 직전에 아스텔은 눈을 감았다.
똑똑.
그러나 그 가슴 떨리는 순간은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순식간에 끝이 났다.
아스텔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황후 폐하.”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카이젠을 발견하고 놀라서 허리를 굽혔다.
“황제 폐하를 뵙습…….”
“무슨 일이냐?”
“폐궁에서 기사가 왔습니다.”
페궁에는 아버지 레스턴 공작이 갇혀 있었다.
아스텔은 지난 며칠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시녀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황후 폐하께 전해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카이젠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고 해요.”
아스텔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듣고 싶지 않아요.”
아스텔은 카이젠 때문에라도 아버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 * *
그레텔은 황후궁에서 내준 마차를 타고 황궁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진 거리엔 환한 등불이 가득했다.
거리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잠시 멈춰졌던 수확제 행사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병환은 수도에도 알음알음 알려졌지만 대부분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 만에 회복했고 수확제가 다시 이어졌기 때문이다.
황제는 수확제 동안 잠시 병이 나서 쉬다가 복귀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지.’
그레텔 자신도 비밀을 공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예전 같으면 그런 엄청난 일에 연관되는 걸 피했겠지만.’
아스텔의 부탁이니 최선을 다해서 도와야 했다.
테오르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땐 아스텔이 안쓰럽게 느껴졌는데 다행히 이제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차는 그녀가 지내고 있는 숙소 앞에서 멈춰 섰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레텔은 마부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씻고 쉬려고 안으로 걸어들어 가는데 문득 책상 위에 쌓인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음?’
그레텔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층층이 쌓여 있는 책더미였다.
두꺼운 약초 사전들 사이에 작은 책이 끼어 있었다.
<약초 재배의 기본>.
그레텔은 홀린 듯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평소에 별로 읽지 않던 책이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그레텔은 한 곳에서 진득하게 약초를 기르는 일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이 책을 필요로 한 사람은 동부 시골에 살던 아스텔이었다.
5년 전, 아스텔에게 이 책을 빌려주고 약초를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 줬던 적이 있다.
아스텔은 그 후 몇 년간 기본적인 약초를 키워서 팔았다.
찾아갈 때마다 그레텔에게도 나눠줬다.
책장을 펼치자 풀잎과 꽃 그림들이 가득 나왔다.
밭을 일구고 약초를 기르는 방법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그걸 보니까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해독초도 이렇게 재배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첫 번째로 구한 해독초는 프리츠가 서부 영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활짝 피어나 있던 꽃이 시들어서 떨어지고 새로운 꽃봉오리가 맺힌 상태였다.
잘 피어난 꽃은 시들어버리고 새로 맺힌 꽃은 아직 개화하기 전이라서 다들 크게 실망했었다.
하지만 꽃이 시들면 그 아래에 작은 씨앗들이 맺히는 법.
그레텔은 남은 꽃을 따서 약을 만든 뒤 그 화분을 그대로 황후궁 안에 보관해 뒀다.
평범한 꽃이라면 지금쯤 씨앗이 맺혀서 여물었을 것이다.
‘그래.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그야 그 해독초는 남부지방에서 가져온 꽃이었으니까.
식물을 다른 지역에서 기르면 토양이 다르고 기후도 달라서 잘 자라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특이한 약초는 인공적으로 재배하기 어렵다.
평지에서 기르면 꽃을 피우지 않거나 병에 걸려서 시들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이 해독초는 어떻게 키워내야 하는지 알려진 정보도 없다.
그래서 당연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약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황제였다.
‘남부 산맥에 재배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자라게 하면 되잖아.’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면 산에 약초를 재배하는 온실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리라.
실패할 가능성도 있고 어쩌면 제대로 키워내기까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시도도 안 하고 찾기만 하는 것보다는 낫다.
아직 몇 년간의 유예 기간이 있으니 그 시간 동안 연구하면서 천천히 키워내면 된다.
‘일단 씨앗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지.’
혹여 재배 방식이 달라서 씨가 맺히지 않았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그레텔은 희망적인 구상을 하면서 책을 덮었다.
그런데 그 순간 책더미 사이에 있는 그림이 보였다.
새로 발견한 약초를 그려놓은 조잡한 그림들이었다.
‘음?’
평소에 놔두던 것과 똑같아 보였는데 유독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그레텔은 약초 그림을 언제나 지역별로 정리해 뒀다.
그래야 나중에 다시 찾을 때 편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림을 그린 종이들은 평소에 정리해 둔 순서대로 쌓여 있었다.
그것만 보면 이상한 점이 조금도 없었다.
문제는 그레텔 자신이 며칠 전에 해독초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급히 나가느라 이 그림들을 대충 쌓아두고 갔다는 점이었다.
분명 중간에 순서도 몇 개 뒤섞여 있었다.
순서를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 대충 구분해서 쌓아두고 ‘돌아와서 다시 정리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종이들은 순서대로 가지런히 쌓여 있다.
약간 흐트러져 있긴 했지만, 마치 누군가가 실수로 종이를 떨어뜨렸다가 다시 비슷하게 정리해 둔 것처럼 보인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세심하게 기억하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누군가가 이 그림들을 뒤져봤다.
그레텔은 창문으로 달려갔다.
방 안에 있는 두 개의 유리창은 굳게 잠긴 채였다.
사람이 침입한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열쇠로 잠가놨던 문도 그대로였다.
다른 물건들도 언뜻 보면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이 책을 펼쳐봤다.
이곳은 아직 제대로 개업하지 못했다.
그레텔 혼자서 위층에 있는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나마도 지난 며칠간은 황후궁에서 지내면서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왜 여기를 뒤져본 거지?’
그레텔이 가져온 짐은 여행을 다닐 때 가지고 다니는 옷과 책, 약초와 물약을 담은 유리병들이 전부였다.
수상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지만.’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그레텔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독살을 지시한 건 아스텔의 아버지인 전대 공작이었는데 그 사람은 이미 붙잡혀서 황궁 안에 갇혀 있다.
그와 관련된 사람들도 거의 잡혀들어왔다고 들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정확히는 아스텔 님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 걸까?’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작 사건의 피해자였던 황제 폐하도 일의 경위를 모두 알고 있고, 오히려 아스텔을 보호해 주려고 하는데.
‘대체 누가 나를 감시하는 걸까?’
독살에 대해 조사하는 사람인가?
지금 시기에 누가 그런 걸 조사하는 거지?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족들 간의 알력다툼 같은 건 조금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레텔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잠긴 문을 다시 점검했다.
어둠이 내린 창밖을 살펴보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창문 덮개를 확 덮었다.
* * *
그레텔은 다음 날 아침 황후궁에 가서 화분을 확인했다.
프리츠가 서부 영지에서 가져온 해독초는 줄기와 잎사귀만 휑하니 남아 있었다.
시든 꽃은 며칠 사이에 마른 꽃잎이 다 떨어
그레텔은 꽃이 사라진 자리를 세밀하게 살폈다.
예상대로 꽃받침이 있던 자리에 작은 씨앗들이 맺혀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은 양의 씨앗이 한꺼번에 여물었다.
그레텔은 얼른 아스텔에게 달려가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약초를 재배하자고요?”
그레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 산맥에 재배지를 만들고 몇 년간 연구하다 보면 재배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아스텔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아스텔은 그녀의 설명을 듣더니 좋은 생각이라며 반가워했다.
“잘 되면 좋겠네요. 필요한 건 무엇이든 다 준비하겠어요.”
아스텔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당장에라도 재배지를 찾으라고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레텔은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달랬다.
“우선은 제가 더 알아볼게요. 너무 희망을 갖지는 마세요. 아주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스텔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래도 아무것도 못 하고 찾기만 하는 것보다는 나아요.”
“그렇긴 하죠.”
그건 그레텔도 동의하는 바였다.
“저…… 황후 폐하. 사실 어젯밤에 다른 일이 있었어요.”
그레텔은 이번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어젯밤의 일을 알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던 것 같다는 말을.
“누가 그레텔의 책을 뒤져봤다고요?”
아스텔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텔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들어와서 제 물건을 뒤져본 건 확실해요.”
아스텔은 불안한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짚이는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독살 사건의 주범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약제사라는 말에 그레텔까지 감시하는 모양이네요.”
아스텔은 차분하게 가라앉는 눈으로 그레텔을 바라보며 말했다.
“프리츠 오빠에게 부탁해서 몰래 그레텔의 숙소를 지켜보라고 할게요. 누구든지 수상한 사람이 접근하면 잡아 올 수 있게요.”
* * *
“세르벨!”
벨리안은 숨을 헐떡이며 정원을 달려갔다.
정원 한구석으로 빠르게 걸어가던 세르벨이 걸음을 멈췄다.
벨리안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차분한 낯색이었지만 벨리안은 그의 단정한 얼굴에 낭패감이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아아, 오랜만이야.”
“오랜만…… 헉헉…… 이라고?”
벨리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세르벨에게 신경질을 냈다.
“오랜만이라는 말이 나와? 너 계속 나를 피해 다녔잖아?”
“피해 다니지 않았어. 일 때문에 바빠서 황궁에 올 시간이 없었을 뿐이야.”
세르벨은 침착하게 변명했다.
벨리안은 그 담담한 목소리에 화가 치미는 걸 억지로 참았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꽤 친했다.
비슷한 수준의 귀족인 데다 영지도 가깝고 집도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 말고는 친해질 이유가 별로 없었다.
둘은 성격도 취미도 전혀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귀족 도련님들이 친구가 되는 데엔 그 정도 조건이면 충분했다.
그래도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는데 나한테 거짓말을 하다니.
벨리안은 배신감을 느끼며 다시 따져 물었다.
“대체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기사단을 이상하게 움직였어?”
“일이 다급해서 그랬어.”
세르벨은 조금 미안해하면서 사정을 설명했다.
“아버지가 내게 급전을 보내셨어. 황제 폐하께서 위독하시니까 빨리 수도로 돌아오라고.”
그는 아버지, 에클렌 백작이 보낸 연락을 받고 수도로 돌아오게 된 경위를 말했다.
“폐하의 병환을 빌미로 수도 안에 위험한 움직임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나는 그 말을 듣고 기사단을 몰래 데려오기로 한 거야. 너한테 말하지 못한 건…….”
세르벨은 벨리안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언제나 황궁 안에 있잖아. 연락을 보냈다가 누가 가로채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어.”
“그건…….”
……그건 그렇긴 하네.
벨리안은 세르벨의 말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가 황제의 보좌관에 불과한 벨리안에게 먼저 연락을 해줄 이유는 없었다.
벨리안은 제일 궁금했던 내용을 꺼냈다.
“그럼 수도에서의 일은 어떻게 된 거야? 귀족들이 왜 너를 습격했어?”
세르벨을 습격한 귀족들은 벨리안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간 레스턴 공작에게 찾아가던 사람들이다.
벨리안은 세르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질문을 던졌다.
“혹시 황후와 관련 있는 일이야? 그런 거지? 그래서 늙은 공작님이 황궁에 잡혀 온 거지?”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황후 때문에 세르벨은 지금껏 그를 피한 것이다.
벨리안은 자신의 추측이 확실하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세르벨을 쳐다봤다.
하지만 세르벨은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황후 폐하는 이 일과 전혀 관련이 없어.”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