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독 (18/24)

18. 독

아스텔과 테오르가 황궁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칼렌베르크 후작은 외궁에 딸린 관청에 가 있었다.

하루 전에 영지와 관련된 서류를 처리해야 하니까 관청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영지를 돌려주겠다는 말을 들은 지 겨우 며칠이 지났는데 일 처리가 빨랐다.

관청 안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수선했다.

수확제 기간인데도 관리들은 바쁘게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후작은 관리가 내주는 서류를 확인하고 서류에 서명했다.

‘설마하니 이 나이에 다시 영지를 돌려받게 될 줄이야.’

선대 황제 때, 외손녀가 황태자의 약혼녀이고 사위가 재상이었을 때도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후작은 서류 확인을 마치고 저녁노을이 지고 있는 복도를 걸어갔다.

반대편에서 어떤 중년 남자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후작을 발견하고 놀란 낯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후작은 상대가 몇 걸음 앞에 다가온 뒤에야 그게 누구인지 깨달았다.

에클렌 백작이었다.

“아…….”

“후작님.”

후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멈춰 섰지만, 에클렌 백작은 몹시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자네도 잘 지낸 것 같군.”

형식적인 인사말을 주고받고 나니까 할 말이 없었다.

후작은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 옛 부관을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 시절의 일은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 * *

“폐하! 왜 그러세요?”

아스텔은 가까스로 쓰러지는 카이젠을 부축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팔에 의지한 채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미안, 괜찮아…… 잠깐 어지러워서…….”

그는 초점을 잡으려고 애를 쓰면서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졌다.

카이젠은 눈을 감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폐하!”

비명을 듣고 시녀가 달려와서 문을 열었다.

아스텔은 창백하게 질린 채 소리쳤다.

“의사를 불러와!”

수확제 첫날이라 황제의 시의는 황궁 밖에 머물고 있었다.

수십 분을 기다린 뒤에야 의사가 달려왔다.

몇 차례 만났던 황제의 시의가 뛰어들어오면서 아스텔에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네.”

카이젠은 시종들에 의해 침대로 옮겨졌다.

그는 마치 잠든 것처럼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안색은 평온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겉보기엔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잠을 자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깨워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호흡도 미약했다.

‘무리해서 피로가 쌓인 게 아닐까?’

아니면 단순한 질병이든가.

아스텔은 침대에 누워 있는 카이젠을 바라보며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황제를 진찰하던 의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

“무슨 병인지 알아냈나?”

의사는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카이젠보다 더 환자 같았다.

“병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독인 것 같습니다.”

“…….”

일순간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시종들과 시녀들도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황제가 독에 중독됐다.

너무 엄청난 일이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스텔은 카이젠을 돌아본 뒤 다시 물었다.

“해독할 수 있겠나?”

“지금으로서는 어떤 독인지 알 수가 없어서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독은 한 가지 독초로 만들지 않는다.

여러 가지 독초와 독성을 보조하는 약초를 조합해서 만든다. 동물에게서 채취한 독을 섞기도 한다.

독의 효능도 조제법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독의 정체를 알면 해독할 수 있는 건가?”

의사는 침통한 기색으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독의 성분을 알아낸다고 해도 그걸 없애는 방법을 연구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해독제를 따로 구하지 못하면 아무래도…… 어려울 듯합니다.”

“…….”

아스텔은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뒤흔들었던 남자.

그녀를 버리고 다시 붙잡으려고 애원하고, 두 번이나 결혼했던 남자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일순간 눈앞이 아찔할 만큼 수많은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모든 것이 흘러가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커다란 충격과 깊은 슬픔이었다.

아스텔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몸을 돌렸다.

“린든 경. 지금 당장 황궁을 봉쇄하고 출입을 통제하세요. 그리고 이 일에 대해 누구도 발설해선 안 됩니다.”

린든에게 명령을 전한 뒤 황후궁의 수석 시종에게도 임무를 내렸다.

“황제궁의 시종장에게 가서 황궁의 요리사들을 전부 잡아 가두고 폐하 근처의 시종들도 체포하라고 전해. 그리고 당장 이곳으로 불러와.”

잠시 후 황제의 시종장이 달려왔다.

시종장은 황궁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중년 남자였다.

그는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황제를 보자마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아스텔은 그에게 사정을 간략하게 말해주고 황제의 식사에 관해 물었다.

“폐하께 올린 식사와 음료는 몇 번씩 검사했습니다.”

“시식도 했겠지?”

시종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시식을 담당하는 시종이 두세 차례씩 검사했습니다.”

시종장은 아스텔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면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스텔은 그의 눈빛에서 다른 감정을 읽어냈다.

마치 수상한 사람을 마주하는 듯이 약간의 의혹이 담긴 시선을.

‘카이젠이 이곳에서 독을 먹었다고 의심하는 건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스텔도 확신할 순 없었다.

수확제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혹시 카이젠이 이곳에 와서 뭔가를 먹었다면?

마침 한나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나. 폐하께서 드신 게 있었어? 혹시 홍차나 술을…….”

“아닙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스텔을 유심히 바라봤다.

아스텔은 한나가 뭔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겠지.

“시종장 자네는 물러가서 황제궁의 시종들을 단속하게. 시종 중에 수상한 행적을 보인 자가 있는지 조사해 봐.”

“예, 황후 폐하.”

“이 일은 절대 새어 나가면 안 돼.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하네.”

시종장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침실을 시종들에게 맡겨두고 한나와 함께 작은 휴식실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한나가 아스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소리를 낮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잠시 동안 황태자 전하의 서재에 계셨습니다.”

“테오르하고 있었다고?”

카이젠은 매일 이곳에 오면 테오르를 보러 갔다.

오늘도 아스텔을 기다리기 전에 테오르를 만나러 갔겠지.

“둘이 뭘 하고 있었는데?”

“황태자 전하께서는 간식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간식이라는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테오르는 어디 있어?”

“괜찮습니다, 아스텔 님. 제가 황태자 전하를 살펴보고 왔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설마 카이젠도 같이 먹은 건가.

그런데 왜 테오르는 멀쩡한 거지?

“다만…… 황태자 전하를 시중들던 시종이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니?”

한나는 테오르의 시종 중 한 명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태자와 함께 있던 황제가 독에 중독됐다. 그리고 곧바로 황태자의 시종이 사라졌다.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었다.

“황궁 안에 있을 거야. 다른 시종들을 보내서 그가 어디로 갔는지 찾아봐.”

한나가 명령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카이젠이 있는 곳을 점검한 뒤 테오르를 살펴보려고 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갔던 한나가 몇 분 뒤에 다시 돌아왔다.

“황후 폐하! 레스턴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공작님’이라는 소리에 순간 프리츠 오빠가 왔다는 말인 줄 알았다.

당장 오빠를 만나고 싶어서 나가려는데 한나의 불안한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스텔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버지가 왔어?”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럽게 뒤엉켰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황제가 독을 먹자마자 시종이 사라지고 아버지가 달려왔다.

이 모든 일이 절대 우연일 리가 없었다.

* * *

레스턴 공작은 응접실에서 아스텔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벽난로의 아늑한 불빛과 의자에 앉아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동안 보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시녀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 손님이 왔는데 차를 내오지도 않아.”

“아버지.”

아스텔은 투덜거리고 있는 아버지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스텔의 목소리는 마치 죄인을 심문하는 것처럼 엄중하게 들렸다.

그러나 공작은 평소와 다름없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황제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들어왔다.”

“그 얘기를 어디서 들으셨어요?”

황제가 독을 먹고 쓰러진 건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공작의 입가에 조소가 섞인 만족스러운 미소가 서렸다.

아스텔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황궁을 봉쇄하라고 했는데요.”

“네가 그런 명령을 내리기 전에 들어왔다.”

아스텔은 독에 대해 듣자마자 황궁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황궁 문을 걸어 잠그고 출입을 통제하라고 명령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소식을 듣고 저택에서 이곳까지 오는 건 불가능했다.

그 말은 곧, 공작은 아스텔보다 먼저 황제가 독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스텔은 몸을 돌렸다.

“어딜 가는 거냐?”

“아버지를 체포하라고 명령하겠어요.”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황제 암살범으로 죽으면 너와 황태자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버지의 짓인 걸 인정하는 건가요?”

“아무렴.”

레스턴 공작은 몹시 뻔뻔하게 웃고 있었다.

아스텔은 아버지를 때리고 싶은 걸 참았다.

“테오르의 음식에 독을 탄 거예요?”

아스텔의 질책에 레스턴 공작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럴 리가 있느냐? 우리 귀한 외손자가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황제의 음료에만 독을 넣었다. 정확히는 얼음에 넣었지만.”

그렇게 된 거로군.

아스텔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다시 물었다.

“해독제가 있나요?”

“그런 게 있겠느냐?”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해독제가 있어도 아버지가 없애버렸겠지.

“황제는 어차피 죽게 될 거다. 우리는 뒷일을 잘 수습하기만 하면 돼.”

레스턴 공작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마침 네 오라비가 내무대신이고 근위기사단장은 너와 꽤 친밀하지.”

그는 이어서 몇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황제의 측근 대신들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모두 우리 편이니 안심해도 된다.”

“…….”

아스텔은 소름이 끼쳤다.

황제의 대신 중 절반이 이 일을 알고 동조했다는 소리였다.

황제가 죽으면 합법적으로 어린 황태자가 황제가 된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너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냐.”

“무슨 뜻이에요?”

“너는 황제를 내심 원망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가 죽으면 너는 황태후로서 권력과 자유를 누리게 될 거야.”

“…….”

억지로 결혼식을 올릴 때만 해도 카이젠에게서 벗어나길 바랐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내가 너라면 황제의 의사를 가둬놓을 거다.”

똑똑.

아스텔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잠옷 위에 겉옷을 걸친 테오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테오르?”

뒤따라 들어온 시종이 난감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불안해하셔서…….”

테오르는 아스텔에게 달려오다가 멈춰섰다.

“엄마, 왜 그래?”

아스텔은 얼른 심각한 표정을 지워냈다. 불안한 기색이 완전히 지워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테오르, 무슨 일이니?”

“라웰이 없어졌어.”

아스텔은 그게 테오르의 젊은 시종을 부르는 이름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 사람은 잠깐 다른 곳에 갔어. 얼른 침실에 가서 자야지.”

한나가 오래전부터 황태후궁에서 일하던 사람이라고 그 젊은 시종을 데려왔었다.

성실한 사람인 데다 공작가와 인연이 닿아 있는 가문의 먼 친척이라 믿을 수 있다고 했었다.

어쩌면 황태후 궁에 있을 때부터 아버지의 첩자였을지도 모른다.

시선을 돌리자 한나가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한나,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레스턴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오르에게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 못 본 사이에 많이 자라셨군요.”

테오르는 그를 발견하고 아스텔 쪽으로 더 가까이 붙었다.

공작은 그런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나중에 이 할아비에게 고마워하실 겁니다.”

테오르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공작을 뻔히 쳐다봤다.

카이젠을 닮은 붉은 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본능적으로 뭔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테오르는 어리지만 어른들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눈치가 빨랐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공작을 향해 위협적으로 경고했다.

“저택으로 돌아가세요. 아버지.”

테오르의 작은 몸을 끌어안자 현실이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지금 카이젠이 죽으면 테오르가 황제가 된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은 채 결정을 내렸다.

당장 그레텔을 불러야겠다고.

* * *

회랑에서 옛 부하를 마주치자마자 칼렌베르크 후작은 당황한 낯으로 멈춰 섰다.

에클렌은 옛 상관에게 가까이 걸어가며 웃었다.

“후작님께선 매번 저를 피하시는군요.”

“내가 언제 자네를 피했다고…….”

칼렌베르크 후작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는 수도로 돌아온 뒤부터 언제나 에클렌을 피해 다녔다.

후작은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면목이 없어서 그러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후작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현실을 깨달았다.

어떠한 일이 있었든 간에 최종적으로 선택을 내린 건 제클린이었다.

에클렌에게 그녀와의 일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는 제클린의 선택을 이해했고 그녀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는 한평생 멀리서나마 그녀의 행복을 지켜보고 싶었건만, 그럴 수 없었다는 게 불행이었을 뿐이다.

“영지 일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 정말 잘됐군요. 축하드립니다.”

사실은 후작이 가문의 영지를 돌려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 후작님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영지를 다시 돌려받게 된 건 전부 외손녀인 황후 덕분이었다.

‘그리고 황후의 친정인 레스턴 공작 가문도 다시 권력을 얻었지.’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에클렌은 자신을 발탁해준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고 공작을 경멸했지만, 한편으로는 레스턴 가문이 멸문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공작가가 몰락하면 공작의 아들인 프리츠와 아스텔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

공작이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려고 할 때는 아무도 모르게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공작과 원수인 것처럼 보였겠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훌륭한 분이시더군요. 어머님을 많이 닮으셨어요.”

그가 보기에 아스텔은 제클린을 많이 닮았다.

젊은 황후는 안쓰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혼자서 황자를 숨겨서 기르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는 가급적이면 아스텔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 사는 방식도 제 어미를 많이 닮았어.”

“후작님께서는 계속 황후궁에 머무시는 겁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이 완고하신 분이 사랑하는 외손녀 때문에 귀찮은 황궁 생활을 견디고 있다니.

그래도 건강한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쓰라린 감정이 잠시 그림자를 내비쳤지만, 곧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제클린은 무척 행복했다고 들었다.

수도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그렇게 말했다.

레스턴 공작 부부처럼 행복한 신혼부부는 본 적이 없다고.

두 사람은 정원 근처를 거닐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 버렸다.

시종들이 정원으로 통하는 회랑 곳곳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후작은 남색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본 뒤 다시 에클렌을 향했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나중에 황후궁으로 찾아와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 순간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갈랐다.

갑자기 회랑 곳곳에 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황궁 안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뭔가를 수색하거나 점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글쎄요.”

* * *

테오르는 한나의 손을 잡고 침실로 돌아왔다.

복도 주변에 시종들과 시녀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하나같이 불안한 표정이다.

불이 꺼진 침실 안은 따뜻하고 조용했다.

한나는 테오르를 침대에 눕혀주고 곰 인형도 가져다 안겨줬다.

“황태자 전하, 따뜻한 차를 가져다 드릴까요?”

테오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한나는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부터 여기저기에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주변은 시끄럽고 시종은 사라졌다.

엄마는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테오르는 엄마가 그렇게 놀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외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테오르의 머릿속을 스쳐 가기만 했다.

가장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으니까.

“한나, 폐하는 어디 계셔?”

이불을 덮어주던 한나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나 짧은 순간이었다.

한나는 다시 차분하게 이불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어요.”

“벌써?”

정말 이상하다. 어른들은 아직 잠자리에 들 시간이 아니었다.

다들 바쁜데 황제 폐하는 왜 벌써 잠을 자는 거지?

심지어 엄마는 아직 잠옷을 입지도 않았다.

행사장에서 입었던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엄마는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럴 때 폐하는 왜 자러 간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테오르는 두 사람이 예전보다 사이가 좋아졌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 황궁에 왔을 때, 엄마는 황제 폐하를 싫어했다.

폐하가 말을 걸어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싸늘하게 대했다.

테오르는 황제가 좋았지만 엄마가 싫어해서 그에게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둘은 사이가 좋아졌다. 함께 마주 보면서 웃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엄마는 뭔가 걱정하는 것 같았는데. 황제 폐하는 왜 먼저 자러 간 걸까?’

“오늘 행사 때문에 일이 많으셔서 피곤한가 봐요. 전하는 피곤하지 않으세요? 오늘 하루 종일 황궁 밖에 나갔다 오셨잖아요.”

한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찜찜했다.

테오르는 다른 의문을 꺼냈다.

“그 할아버지는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네?”

“내가 황제가 된다고 했어.”

엄마가 자신을 끌어안았을 때 외조부인 공작이 그렇게 말했다.

‘조만간 황제가 될 텐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지.’

“폐하는 폐하가 없어지면 내가 황제가 된다고 했는데.”

언젠가 황제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테오르는 황제 폐하가 없어지는 건 싫다.

자신은 영원히 황제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나가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공작님은 항상 그런 이상한 말씀을 하시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평소라면 이렇게 말을 거르지 않고 내뱉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한나는 테오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부드럽게 토닥토닥 두드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무 일도 없으세요. 걱정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응…….”

테오르는 억지로 납득했지만 여전히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나 내일 아침에 폐하를 만날래.”

직접 눈으로 보면 이 막연한 불안감도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테오르는 한나에게 신신당부했다.

“폐하가 일어나시면 아침에 깨워줘. 응? 약속이야.”

“……네, 황태자 전하.”

* * *

아스텔은 테오르를 한나에게 건네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레텔을 불러줘. 지금 당장.’

한나는 테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조용한 방 안에 남아 생각을 이어갔다.

그레텔이 오면 뭔가 해결책이 생길까?

아스텔은 그레텔의 연구실에서 봤던 해독초를 떠올려봤다.

그레텔에겐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대륙을 돌아다니며 언제나 기상천외한 약을 만들어내곤 했으니까.

아스텔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갑고 선명한 현실을 느꼈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막연한 희망에 기대는 것 말고는 아무런 방법도 없다는 것을.

“다른 증상은 나타나지 않는 건가요?”

아스텔은 응접실로 돌아가서 레스턴 공작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냐?”

“계속 저렇게 잠든 것처럼 누워 있는 거냐고 물었어요.”

“그래. 저놈에겐 어울리지 않는 아주 평온한 죽음이지.”

공작은 여전히 벽난로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와중에 차가 넘어간다니.

아스텔은 뜨거운 차를 아버지에게 끼얹고 싶어졌다.

공작은 다시 아스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내가 어느 정도 값을 치르고 저 약을 구했는지 아느냐?”

“저 약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지만 그건 궁금하지 않네요.”

“저 약을 먹으면 가사상태에 빠진다. 겉으로 보기엔 잠든 것처럼 보여서 자세히 진찰하지 않으면 독이라는 걸 알 수가 없지.”

잠든 것처럼 보이는 독이라.

확실히 가격에 높을 만도 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음?”

“얼마나 저렇게 있는 거냐고요.”

차마 얼마나 저렇게 있어야 죽는 거냐고 물을 수는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곧바로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길어야 며칠일 거다.”

며칠 안에 카이젠을 살릴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스텔은 날짜를 헤아리면서도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계속 여기 계실 건가요?”

“너를 도와주고 싶다.”

“뭘 어떻게 도와주실 건데요?”

“대신들을 불러야지.”

공작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유유히 이야기했다.

“대신들에게 황제가 아프다고 전해라. 그러니 내일부터 일정을 취소하고 수도의 관문을 막으라고 해.”

현재 수도에 있는 병력은 황궁의 근위기사단과 수도경비대 정도였다.

수도 근교에 란베르크 기사단이 있지만 대부분은 세르벨과 함께 북부로 갔다.

남은 전력은 얼마 안 된다고 들었다.

즉, 황궁을 지키는 기사단과 경비대만 장악하면 수도 안에는 황제를 지켜줄 만한 병력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 두 개의 병력은 각각 근위기사단장인 린든과 내무부의 명령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그것까지 생각해서 이런 짓을 했구나.’

새삼 아버지가 징글징글하게 느껴졌다.

“우선은 딴소리하지 못하게 시의부터 감금해라.”

“시의가 없는데 대신들이 제 말을 믿어주겠어요?”

“시의 말고도 의사는 많아.”

다른 의사 중에 이미 포섭해 둔 사람이 있다는 말투였다.

공작은 부정하는 대신 웃기만 했다.

“내 딸이 황후인데 그 정도도 못하겠느냐?”

“어련하시려고요.”

아스텔은 카이젠의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의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시의가 긴장된 낯으로 들어왔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을 감금하고 다른 의사를 데려오자고 하시네요.”

그 말에 시의가 창백하게 질렸다.

의사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살피는 직업이라 더 눈치가 빠삭했다.

시의는 아스텔의 그 한마디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분명히 깨달은 듯했다.

“황후 폐하, 저는…….”

아스텔은 시의의 떨리는 목소리를 끊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어요?”

시의의 불안한 시선이 아스텔과 공작을 오갔다.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더는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황제는 곧 죽을 테고 어린 황태자가 새 황제가 될 테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황후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도 깨달은 듯했다.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아스텔은 린든에게 명령해서 황제의 대신들을 황후궁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폐하의 병환에 대해 알리고 행사를 중단하라고 명령할 생각이에요.”

린든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왜 대신들에게 독에 관해 말하지 않는지도 묻지 않았다.

황제가 독을 먹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발표하면 큰 혼란이 올 테니까.

범인을 조사하는 동안은 비밀로 해두는 게 좋았다.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독을 탄 범인을 잡는 일은 어떻게 할까요?”

“황제궁의 시종장이 폐하의 요리사들과 시종들을 조사하고 있어요. 린든 경도 황제궁의 시종들과 기사들을 조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동안 폐하는 이곳에 모셔두는 게 좋겠어요.”

린든의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 불안한 눈빛이 잠시 응접실 쪽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린든도 아버지가 여기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군.’

하긴 황궁의 입구는 전부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황궁 병사들은 근위대의 소관이니 린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아스텔은 레스턴 공작이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지 변명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아버지는 행사 때문에 왔다고? 독살과는 무관하다고?

무슨 말을 해도 너무 궁색한 변명 같았다.

“…….”

린든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아스텔을 직시했다.

아스텔은 린든이 느끼고 있는 갈등을 이해했다.

그는 아스텔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제일 의심스러운 사람은 아스텔의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이었다.

황제가 갑자기 죽으면 유일하게 이득을 보는 사람은 황후인 아스텔과 레스턴 가문이니까.

하지만 일개 기사단장인 그가 황후의 부친을 체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명령을 내려줄 황제는 독을 마시고 죽어가고 있었으니.

그리고 만일 황제가 죽는다면 유일한 후계자는 테오르였다.

카이젠에게 충성을 맹세한 린든으로서는 그의 아들인 테오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스텔은 린든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린든 경. 나를 믿어줘야 해요. 나는 어떻게든 폐하를 구하고 싶어요.”

린든은 잠시 갈등하는 것 같았지만 아스텔에게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저는 물론 황후 폐하를 믿고 있습니다.”

“나를 믿고 내 말대로 해주세요. 지금으로서는 황제 폐하를 살리는 게 우선이에요.”

“폐하께서는 회복하실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내가 아는 약제사를 황궁으로 불렀어요. 그녀에게 다른 방법이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 모든 혼란은 카이젠이 살아나기만 한다면 끝날 것이다.

그를 살릴 수 있다면…… 말이지.

* * *

대신들은 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황후궁에 도착했다.

오늘은 수확제의 첫날이었다.

수도의 저택에서 사교 모임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신들의 옷차림이 각양각색이었다.

급하게 차려입은 궁정예복부터 화려한 야회복, 단출한 평상복까지. 다들 정신없이 달려온 듯했다.

그중엔 연락을 받고 달려온 프리츠도 있었다.

아스텔은 그들을 한 명씩 훑어봤다.

모일 사람은 다 모였는데 한 명이 부족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에클렌 백작은요?”

“백작님은 어디 계신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행사날이라 외출이라도 한 걸까.

그를 꼭 불러야 하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 행적이 묘연하다니.

“황후 폐하,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모두의 시선이 아스텔에게 향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을까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스텔은 말을 돌리지 않고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많이 편찮으십니다.”

그녀는 미리 준비한 대로 간단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피로가 심해서 쓰러지셨다. 심한 병은 아니지만 당분간 휴식을 취하셔야 할 것 같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모두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왜 갑자기…….”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하긴 몇 시간 전까지 멀쩡한 황제를 봤는데 갑자기 쓰러졌다는 말이 믿기지 않겠지.

의혹이 가득한 불안한 눈동자들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몇 명이 시선을 주고받은 끝에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면서 물었다.

“황후 폐하, 저희가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지금 약을 드시고 주무십니다. 깨어나시면 다시 연락드리지요.”

아스텔이 침착하게 거절했지만 중년의 대신은 물러서지 않았다.

“잠깐이면 됩니다. 잠시라도 황제 폐하의 안전을 직접 확인하고 싶으니…….”

“폐하께서 주무시고 계신데 침실에 들어가겠다는 말입니까?”

또 다른 대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아스텔은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분명 아버지가 우리 편이라고 말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 폐하를 뵈어야 하지 않겠소?”

“한밤중에 침실로 들어가서 뵙겠다고? 그게 무슨 무례한 짓이요?”

두 사람이 언성을 높였다.

언쟁이 벌어지기 전에 누군가가 급하게 물었다.

“황후 폐하, 그러면 시의를 만나봐도 되겠습니까?”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요?”

대신은 대답하지 못했지만 결국 그런 뜻이었다.

“황후 폐하, 그런 게 아니라 그저 황제 폐하의 안전을…….”

그때 뒤늦게 에클렌 백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황후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잘 오셨어요, 백작.”

아스텔은 그에게도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상황을 들은 에클렌은 다른 대신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편찮으신데 허락도 없이 폐하의 침실에 들어가겠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의사라도 만나보겠다는 겁니다.”

아스텔은 두 사람의 언쟁을 끊었다.

“어쩔 수 없군요.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시의를 만나보세요. 시의를 불러오게.”

잠시 후 황제의 시의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의는 폐하께서 그간의 피로가 겹쳐서 병이 나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언제쯤 회복하시겠나?”

시의는 슬쩍 아스텔을 돌아보며 답했다.

“……지금으로서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장담하기 어렵다니 그게 의사가 할 소리인가?”

“도대체 무슨 병이란 말인가?”

“말씀드렸다시피 피로가 심하셔서 잠시 쓰러지신 듯합니다. 언제 회복하실지는 잘…….”

시끄러운 언쟁을 조용히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다 들었으면 따라오세요.”

“예?”

대신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아스텔은 그들을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 말을 못 믿고 의사의 말도 못 믿는다니 폐하를 직접 뵙는 게 좋겠네요.”

아스텔은 앞장서서 황제가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당황하던 대신들이 뒤늦게 그녀를 따라왔다.

침실 안은 조용했다.

아스텔은 시종들에게 촛불을 밝히게 하고 문가에 서서 대신들이 침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그 정도 거리에서도 충분히 생사는 알아볼 수 있었다.

카이젠의 상태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안색도 평온하고 호흡도 일정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볼 때는 그냥 잠든 것처럼 보였다.

대신들은 황제를 살펴본 뒤 발소리를 죽여서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밖으로 나오자마자 황제를 만나게 해달라고 우기던 대신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보시다시피 폐하께서는 휴식을 취하셔야 하니 내일 있을 공식 행사는 모두 취소하겠습니다.”

대신들은 동의했다.

“그리고 폐하의 병환을 빌미로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관례대로 수도의 출입도 통제할 생각이에요.”

“예, 황후 폐하. 철저하게 통제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스텔의 시선을 받은 프리츠가 굳은 목소리로 장담했다.

아스텔을 바라보는 프리츠의 눈빛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스텔의 태도와 행동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 게 분명했다.

“이제 폐하께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실 수 있도록 모두 물러가세요.”

대신들은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아스텔은 그들 중에서 두 사람을 붙잡았다.

“에클렌 백작과 레스턴 공작은 잠시 남아주세요. 내가 할 얘기가 있어요.”

* * *

아스텔은 우선 프리츠 오빠부터 서재로 불러들였다.

단둘이 남자마자 프리츠가 희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버지 짓이에요.”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일의 전후사정을 다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맙소사. 얌전히 계신다 싶었더니만.”

아스텔도 후회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얌전히 지낼 리가 없다는 걸 알고 감시했건만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응접실에서 차를 드시고 계세요.”

프리츠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말했다.

“체포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럴 수는 없어요. 지금 아버지를 잡아 가뒀다는 소문이 퍼지면 모두 의심할 거예요.”

차라리 여기 놔두는 게 낫다. 더는 다른 짓을 못 하게.

똑똑.

노크 소리가 둘의 대화를 끊었다.

“황후 폐하!”

그레텔이었다.

연락을 듣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그레텔은 실내복 위에 외투만 대충 걸쳐 입고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황후 폐하, 무슨 큰일이 있는 건가요? 황궁 문에 기사들이……”

“그레텔 폐하께서 독을 마셨어요.”

그레텔은 입을 조금 벌리고 멍하니 굳어졌다.

아스텔은 그녀에게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레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급한 일이 생기셨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이런 일인 줄은…….”

“그레텔. 내게 해독초가 그려진 그림을 보여줬잖아요.”

“아, 네, 여기 있어요.”

그레텔이 가방 안에서 상자를 꺼냈다.

그녀는 커다란 약상자가 든 가방을 짊어지고 왔다.

한밤중에 급히 찾았으니 누군가 병이 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상자 안에는 온갖 약병이 들어 있었는데 상자 위쪽엔 메모장과 공책이 있었다.

그레텔이 공책을 펼쳐서 간단하게 스케치된 그림을 보여줬다. 그 안에도 전에 봤던 그림과 똑같은 꽃이 그려져 있었다.

“이 약초를 찾아올 수 있을까요?”

그레텔이 울상을 지었다.

“이건 기초적인 해독초예요. 독에 따라서 효과가 다르죠.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독이 사라지기는 하는 거죠?”

그레텔은 자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그 정도면 충분하다.

우선 독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당장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으니까.

“그 약초를 찾아서 최대한 빨리 가져올 수 있을까요?”

“그 약초는 남부 산맥 근처의 영주가 사들여서 보관하고 있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사고 싶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구경만 했어요.”

하긴 어떤 독이든 해독하는 약초라는데 부르는 게 값이겠지.

“거기 다녀오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아무리 빨라도 2주는 넘게 걸릴 거예요.”

2주.

아스텔은 신음을 삼켰다.

카이젠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레텔은 상자 안에 있던 약병을 몇 개 골라서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

“일단 제가 어떤 독인지 살펴봐도 될까요? 해독은 못해도 잘하면 진행 속도를 좀 늦출 수는 있거든요.”

“고마워요, 그렇게 해주세요.”

시간을 늦춘다고 해도 2주면 너무 오래 걸리는 듯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아스텔은 프리츠에게 부탁했다.

“당장 남쪽으로 사람을 보내줘요.”

그러나 프리츠는 아스텔의 말을 듣지 않고 그레텔의 그림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왜 그래요?”

“해독초라는 게 이 약초를 말하는 겁니까?”

“아, 네, 네. 이렇게 생긴 풀이에요.”

프리츠가 두 사람에게 시선을 들었다.

“예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프리츠의 고백에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이 약초를 본 적이 있다고요?”

아스텔은 물론이고 그레텔까지 놀란 눈으로 프리츠를 바라봤다.

프리츠는 종이에 그려진 약초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서부 영지에 갔을 때 이런 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쪽에서 가져온 화초라고 어떤 영주가 선물로 줬습니다.”

“선물이요?”

“화초라고요?”

아스텔과 그레텔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프리츠가 두 사람을 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분명히…… 화초라고 했습니다.”

프리츠는 서부 영지에서 봤던 꽃에 대해 두 사람에게 설명해 줬다.

영지 관리자로 서부에 내려갔을 때 이곳저곳에서 선물을 보내왔다. 값나가는 보석이나 장식품은 받지 않았지만, 정성 들인 음식이나 화초 같은 작은 선물은 거절하기 어려워서 호의로 생각하고 받았다.

그중에는 지역 특산물도 있었고 먼 지역에서 가져왔다는 특이한 식물도 있었다.

“분명히 이렇게 생긴 꽃이 있었습니다.”

아스텔은 다시 그레텔이 그린 그림으로 시선을 줬다.

종이에 그려진 푸른색 꽃은 작지만 아름다웠다.

꽃줄기 위에 풍성한 푸른 꽃잎이 탐스럽게 피어나 있다.

얼핏 보면 조금 크기가 작은 모란 같기도 했다.

“그레텔, 이 꽃이 해독초라는 건 유명한 얘기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저도 이번에 남부에 가서 처음 알았으니까요…….”

약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면 그냥 정원에서 키우는 아름다운 꽃이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시골 영주들은 자기 지역에서 멀리 떠나지 않고 다른 지역의 문물에도 어두웠다.

다른 지역에서 왔다니 신기해서 선물로 준 것이겠지.

“그 꽃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아스텔의 다급한 물음에 프리츠는 난감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귀한 것인 줄은 짐작도 못 해서…… 그냥 영지의 성에 두고 왔습니다.”

프리츠의 기운 없는 대답에 아스텔과 그레텔은 모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영지에서 선물 받은 꽃을 수도까지 가져올 리 없겠지.

“그래도 남부 산맥에 가는 것보다는…….”

아스텔은 다시 프리츠를 향했다.

“우리 영지의 성이 더 가깝겠지요?”

“당연히 서부 영지의 관저가 더 가깝습니다.”

“지금 당장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서 꽃을 가져오세요.”

프리츠는 다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그레텔을 데리고 카이젠이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 안은 방금 전에 들어갔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침실에 있던 의사는 카이젠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가 아스텔을 돌아보고 허리를 굽혔다.

그가 그레텔에게 시선을 줬다.

“황후 폐하, 이분은……?”

“괜찮아요. 내가 부른 약제사예요.”

아스텔은 그레텔을 침대 가까이로 데려갔다.

그레텔은 주변에 있는 시종들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왔다.

그녀는 침대 위에 있는 카이젠을 보고 긴장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괜찮아요. 살펴봐도 돼요.”

지켜보고 있던 의사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황후 폐하, 하지만…….”

아스텔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막아섰다.

“그레텔은 내가 믿는 사람이에요. 약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고.”

의사는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레텔은 천천히 카이젠의 맥을 짚었다.

조금 전까지도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만 정작 독에 당한 환자를 앞에 두자 긴장한 기색이 사라졌다.

그레텔은 잠시 카이젠을 주의 깊게 살펴보더니 탄식하듯 말했다.

“이거 정말 희귀한 독이네요.”

“그레텔도 아는 독인가요?”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어요.”

아스텔은 아버지에게 들은 정보를 말해줬다.

“잠든 것처럼 정신을 잃고 있다가 죽는다고 하더군요.”

“그 말대로예요. 그래서 수면독이라고 불리죠.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구시대에는 독에 당한 줄도 몰랐다고 해요.”

“해독초로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레텔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카이젠을 다시 바라봤다.

“우선은 그 해독초를 쓴 다음에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약초를 가져올 때까지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요?”

그레텔은 다시 카이젠을 바라보다가 확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폐하는 건강해 보이시니 최대한 진행 속도를 늦춰볼 수는 있을 거예요.”

* * *

아스텔은 그레텔을 남겨두고 이번에는 에클렌 백작을 만나러 갔다.

어느새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신없이 바쁜 밤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백작님, 지금 당장 란베르크 기사단을 수도로 불러올 수 있을까요?”

아스텔은 에클렌을 만나자마자 인사도 없이 그것부터 물었다.

에클렌 백작은 놀란 눈빛으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지만 기사단을 찾는 아스텔의 질문에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황제 폐하께서 많이 위독하신 겁니까?”

“아직 확신할 수가 없어요.”

백작은 무거운 눈빛으로 아스텔을 유심히 살폈다.

“병환입니까?”

“…….”

아스텔은 에클렌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백작의 물음은 황제가 정말 아픈 게 맞냐는 뜻이었다.

젊고 건강하던 황제가 갑자기 죽을병이 났을 리가 없다.

당연히 의심할 만한 정황이었다.

‘이 사람에게 자세한 정황까지 말해줘도 괜찮을까.’

이 남자는 처음부터 아스텔에게 호의적이었고, 어머니와의 인연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터놓을 만큼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치료할 수 있습니다.”

아스텔은 담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선은 그렇게만 말씀드릴게요. 부디 저를 믿어주세요.”

“흠…….”

백작의 진중한 얼굴에 갈등이 스쳐 갔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이 사람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아스텔에게 몹시 호의적이었지만 이런 수상쩍은 상황에 아스텔의 부탁을 들어줄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스텔이 다른 말을 꺼내려는 찰나에 백작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저는 신하로서 정해진 규정대로 행동할 뿐입니다.”

에클렌 백작은 아스텔을 안심시키듯이 대답했다.

“폐하께 병환이 생기면 황태자께서 제위를 물려받으시고 황후께서 섭정을 하시는 게 법도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테오르 님께서 황태자가 되신 직후에 저를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의 사태가 생기면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안전을 우선시하라고 하셨지요.”

“…….”

아스텔은 멍한 얼굴로 백작을 바라봤다.

카이젠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니.

아스텔은 밀려오는 감정을 갈무리하고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제일 가까운 곳에 어떤 전력이 있죠?”

“북부에 파견된 란베르크 기사단이지요. 그리고 남부 쪽에 로트우드 기사단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먼저 도착할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서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규모 면에서는 란베르크 쪽이 제일 컸지만, 로트우드도 란베르크에 못지않은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란베르크 기사단은 세르벨이 단장이니까.

에클렌 백작의 명령대로 움직일 것이다.

“예, 란베르크는 세르벨이 단장으로 있습니다만 로트우드 쪽은…….”

에클렌 백작이 난처한 듯이 대답했다.

“그는 크로이첸 후작과 친밀한 사이입니다.”

“…….”

예기치 못한 이름에 아스텔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그와 친밀하다니.

비슷비슷한 수준의 신흥 귀족들이니 친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쪽이 위협이 될까요?”

“그럴 리가요.”

에클렌 백작은 고민 없이 부정했다.

“까다로운 사람이지만 친구를 위해서 반역을 시도할 자는 아닙니다. 그러니 후작이 쫓겨났을 때도 자리를 지킨 것이고요.”

크로이첸 가문과 친하긴 해도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더 강하다는 뜻인가 보다.

반역을 꾀할 사람은 아니지만 만일 황제가 독살당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에클렌 백작은 아스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고 얼른 그녀를 안심시켰다.

“최대한 빨리 세르벨을 수도로 부르겠습니다.”

“예, 부탁드려요.”

* * *

에클렌과의 대화를 끝내고 나자 드디어 혼자서 쉴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아스텔은 기운 없이 걸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어서 아직도 화려한 예복 차림이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기라고 하려고 드레스룸 안으로 갔다.

한나가 그녀를 뒤따라와서 드레스를 갈아입은 걸 도왔다.

“황후 폐하, 괜찮으세요?”

“한나, 할아버님은 어디 계셔?”

“황태자 전하의 침실에 계십니다.”

옷을 갈아입고 작은 문을 통해서 침실을 거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외조부는 어두침침한 침실 안에서 테오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스텔은 문을 조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외조부가 그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르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스텔.”

아스텔은 쓰러지듯이 외조부의 품 안에 기댔다.

익숙한 품 안에 안기니까 조금이라도 안도감이 생겼다.

“괜찮은 거냐?”

“예, 저는 괜찮아요.”

아스텔은 아버지의 일. 대신들과의 이야기.

그리고 그레텔과 프리츠와 나눴던 대화까지 전부 할아버지에게 말해줬다.

외조부는 프리츠가 봤다는 해독초 얘기를 듣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프리츠 오빠가 최대한 빨리 약초를 구해온다면 가능할 수도 있어요.”

사실 약초가 온다고 해도 완전히 해독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것 말고는 딱히 희망이 없었다.

외조부는 아스텔을 위로하듯이 감싸 안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만일 황제가 살아나면…….”

그 순간 등줄기에 차가운 물이 끼얹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스텔은 카이젠이 회복했을 때의 일을 일부러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카이젠이 살아나면 아스텔은 황제를 독살하려고 한 반역자의 딸이 된다.

심지어 지금 아스텔은 대신들에게도 독 얘기를 숨기고 있었다.

일이 해결되고 나면 누가 봐도 그녀가 레스턴 공작의 뜻에 동조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아스텔 자신은 물론이고 어쩌면 테오르까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일순간 끔찍한 갈등이 심장을 사로잡았다.

‘나 자신과 테오르를 위해서 황제가 죽는 걸 방치해야 하는 걸까?’

지난 몇 달간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기억 속에 스쳐 갔다.

연못가에서 그녀에게 사과하던 카이젠.

아스텔이 떠나도 재혼하지 않을 거라고 하던 카이젠.

조심스럽게 푸른 보석을 건네주던 열 살짜리 황태자와 새로 가공한 푸른 반지를 내미는 젊은 황제의 모습이 연이어 눈앞에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품 안에서 쓰러지던 카이젠이 떠올랐다.

그 순간 아스텔이 느낀 것은 충격과 두려움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아스텔은 새삼 자신이 그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6년간 떨어져 지내면서 그에 대한 마음은 전부 사라졌다고 여겼건만.

아스텔은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하지만 저는 폐하가 죽는 것은 원치 않아요.”

복잡한 감정이 뒤엉켰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아스텔은 카이젠을 살리고 싶었다.

“모두 피해를 보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독 얘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막으면서 카이젠을 살릴 약을 만들 수만 있다면.

어쩌면 이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가능에 가까운 희박한 가능성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는 희망이 없었다.

“아스텔.”

아스텔은 프리츠가 돌아온 뒤에 테오르의 방을 나왔다.

그는 서부 영지에 있는 해독초를 가져오려고 잠시 내무부에 다녀왔다.

“서부로 사람을 보냈어. 쉬지 말고 달려가서 가져오라고 했다.”

“얼마나 걸릴까요?”

“적어도 며칠은 걸리겠지. 빠르면 닷새 정도겠지만…….”

프리츠는 아스텔의 무거운 표정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실제로 그렇게 빨리 오는 건 불가능했다.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것이다.

“알겠어요. 저는 황제 폐하의 곁을 지킬 테니 오빠는 돌아가서 좀 쉬세요.”

“내 걱정은 말아라. 내무부에서 대기하고 있겠다.”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이었지만 황후궁의 복도는 대낮처럼 부산스러웠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시종들과 시녀들까지 잠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황제가 있는 침실로 걸어가는데 한나가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황후 폐하, 공작님께서…….”

아스텔은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아버지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걸어갔다.

응접실에 있던 레스턴 공작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저택으로 돌아가겠다.”

아스텔이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레스턴 공작은 뭐가 문제냐는 태도였다.

“어차피 황제는 저렇게 누워 있다가 말라죽을 텐데 여기 더 있으면 뭘 하겠느냐.”

황제는 자연스럽게 죽을 테니 그동안 자기는 저택에 가서 앞날을 대비하겠다는 뜻이었다.

분노가 극에 달하니 이제는 화가 나지도 않았다.

“한나, 근위대 기사들을 불러와.”

아스텔은 아버지의 뻔뻔한 대답을 무시하고 근위대를 불렀다.

레스턴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근위대는 왜 부르는 거냐?”

“여기 계세요.”

“나보고 여기서 지내라고?”

“‘여기’는 아니죠.”

황궁 안에는 수많은 방이 있고, 그중에는 비밀리에 사람을 가둬둘 만한 곳도 있었다.

아버지를 감옥에 보낼 수는 없으니 소문나지 않게 조용히 가둬둘 생각이었다.

“네가 나를 감금하겠다고?”

하지만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의 말을 듣고 코웃음 쳤다.

“수도에 있는 병력은 경비대와 근위대가 전부인데, 지금 로트우드 기사단이 수도로 오면 곤란해지지 않겠느냐?”

“무슨 뜻이죠?”

“로트우드 기사단장은 내 편이라는 뜻이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아스텔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공작은 아스텔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너는 내가 병력을 확보하지도 않고 이런 짓을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그는 크로이첸 가문과 친하다고 하던데요.”

레스턴 공작은 시선을 피하며 외투를 챙겨 들었다.

아스텔은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다시 물었다.

“그들에게 뭘 약속하셨죠?”

공작은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아스텔이 험악한 표정으로 힐문하자 답이 돌아왔다.

“황후 자리를 주겠다고 했지.”

“로트우드 기사단장에게요?”

“그에게 어린 딸이 있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구나.”

하.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크로이첸 후작에게는요?”

“가문의 수장은 어떻게든 자기 가문을 되살리고 싶어 하는 법이야.”

가문이 망했으니 크로이첸 후작은 과거의 원한을 잊고 아버지를 돕겠다고 했다는 뜻인가 보다.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기 위해.

“…….”

아스텔은 상황을 정리했다.

로트우드 기사단이 배신했어도 당장 수도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어쨌든 수도에는 수도를 지키는 수비대와 근위 기사단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전이 일어나고 혼란스러워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황제가 죽으면 더 혼란스러워지겠지.

“알겠어요.”

아스텔의 분명한 목소리에 레스턴 공작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아스텔은 다시 말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다고요.”

“이제 와서 너를 믿으라고?”

“아버지도 제가 필요하잖아요.”

테오르가 황제가 되면 형식상으로는 아스텔이 섭정이 된다.

대부분 외조부나 외삼촌이 같이 섭정을 했지만.

그래도 황궁 안에 황태후가 있는 게 좋았다.

황태후가 안주인으로 군림하고 있어야 황궁 살림을 휘어잡고 빈틈없이 유지할 수 있으니.

레스턴 공작은 잠시 아스텔을 바라보며 그런 계산을 하다가 결국 한발 물러섰다.

“그래, 알겠다. 나는 황제의 대신들을 더 설득하겠다. 황궁 상황은 네가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믿는다.”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 * *

집으로 돌아갔던 벨리안은 황궁에서의 소식을 제일 늦게 들었다.

황후궁으로 불려갔던 대신들이 각자 저택으로 돌아온 뒤에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황급히 황궁으로 되돌아갔다.

황제의 병환 때문에 황궁 안은 삼엄한 분위기였다.

벨리안은 황제궁에서 린든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폐하께서는 갑자기 쓰러지셔서 황후궁에서 쉬고 계십니다.”

“쓰러지셨다고요?”

린든은 간결하게 상황을 설명한 뒤 나가려고 했다.

벨리안은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말해달라고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린든은 마지못해 청천벽력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폐하께서 위독하신 것 같다’는 것이었다.

“폐하께서 위독하시다고요?”

벨리안은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린든은 그의 질문에 몇 번이나 같은 대답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황후궁에 갔던 황제 폐하가 갑자기 위독해지셨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물론 잘 지내던 사람도 갑자기 쓰러져서 죽을 수 있다.

지병이 없는 사람도 어느 날 느닷없이 심장이 멎거나 머리에 피가 몰려서 죽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젊고 건강한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여름 이후 아스텔 님이 황후가 되고 젊은 새 공작이 내무대신이 됐다.

정식으로 황태자를 정한 지는 얼마나 됐나?

그 모든 일이 몇 달 사이에 빠르게 일어났는데 이제 기다렸다는 듯이 황제 폐하가 위독하시단다.

그리고 황제 폐하는 황후궁에 머물고 있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상황이었다.

벨리안은 황제의 시의를 만나려고 했지만 시의는 황후궁에 있어서 만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벨리안은 군무대신이자 세르벨의 양부인 에클렌 백작을 찾아갔다.

백작은 아직 황궁 안에 남아 있었다.

“어젯밤 황후 폐하를 뵙고 설명을 들었네. 자네는 폐하의 병환이 바깥에 알려지지 않게 주의하게.”

“수도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수도의 관문을 걸어 잠그고 세르벨을 불렀어.”

백작의 말은 황제의 병환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내용이나 마찬가지였다.

벨리안은 당황스럽다 못해 울고 싶었다.

시종장을 찾아서 황제궁으로 돌아왔는데, 황후궁의 시종이 그를 찾고 있었다.

“벨리안 님.”

황후궁에서 온 시종이 그에게 명령을 전했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 * *

아스텔은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침실로 들어갔다.

카이젠을 언제까지나 황후궁에 놔둘 수는 없었다.

하루 이틀은 이곳에 있어도 괜찮지만 결국은 황제궁으로 보내야 할 텐데.

‘어떤 이유를 대고 계속 이곳에 두지?’

그런 고민을 하면서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 안은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의사와 시종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던 그레텔이 그녀를 보고 일어났다.

“지금 독을 희석하는 약을 드렸어요.”

그레텔은 아스텔에게 약병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지만요.”

그래도 최대한 독의 효과를 늦출 수만 있다면야. 어떤 약이든 써봐야 했다.

약의 효과는 생각보다 금방 나타났다.

잠시 후 잠든 것처럼 누워 있던 카이젠이 눈가를 찌푸리며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아스텔?”

“폐하!”

아스텔은 황급히 침대로 다가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스텔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는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카이젠은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약간 어지럽군.”

“그냥 누워 계세요.”

시의가 와서 카이젠의 상태를 살폈다.

“약제사님의 약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레텔은 아스텔에게 조용히 말했다.

“해독이 된 건 아니에요. 독이 희석돼서 잠깐 정신을 차리신 것뿐이죠.”

그 말을 들은 카이젠이 아스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독인가?”

“…….”

아스텔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이젠은 흐릿한 정신으로도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머리맡에 있는 시종에게 시선을 돌렸다.

“벨리안을 불러. 황제의 인장을 가져오라고 해.”

시종이 나가는 걸 보고 나서 카이젠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스텔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한 굳은살이 박인 손에서 익숙한 온기가 느껴졌다.

카이젠은 여전히 어지러운 듯했다. 아스텔의 손을 잡은 채로도 몇 차례 기운 없이 눈이 감겼다.

모양 좋은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당신은 괜찮은 건가? 테오르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테오르도요.”

카이젠은 그 대답을 듣고 아스텔을 손을 굳게 잡았다.

그는 정신이 흐려진 채로도 두 사람이 무사하다는 말에 안도하고 있었다.

맞잡은 손에서 안도감이 느껴져서 아스텔은 가슴이 아팠다.

카이젠은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누구 짓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

아스텔은 카이젠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의 손끝에 입술을 댔다.

“조금만 더 버티세요. 해독초를 가져오라고 영지에 사람을 보냈어요.”

카이젠은 눈을 크게 뜨고 아스텔을 올려다봤다.

아스텔이 자신을 살리려고 했다는 게 놀라운 걸까.

아스텔은 슬픈 와중에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럼 죽기를 걸 바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물론 아스텔의 입장에서는 카이젠이 죽는 게 이득이었다.

황제가 자연스럽게 죽으면 그녀는 황태후가 될 테니까.

하지만 아스텔은 그걸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카이젠이 살길 바랐다.

아스텔은 그의 손을 감싸 쥔 채 조용히 속삭였다.

“저와 테오르를 위해서라도 버티셔야 해요.”

카이젠은 그녀를 망연히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없이 목소리를 냈다.

“당신은…….”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문이 열리고 허옇게 질린 벨리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카이젠이 벨리안을 돌아봤다.

“명령을 받아적어라.”

분명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기운 없이 떨렸다.

“내가 회복할 때까지 황후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서서히 눈이 감겼다.

카이젠은 황후에게 권한을 준다는 명령을 끝으로 다시 정신을 잃었다. 처음부터 그 말을 하려고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다.

“폐하?”

벨리안은 실신한 황제를 보고 당황했다.

수년간 황제의 보좌관으로 일했지만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는 아스텔은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심지어 옆에 있는 황제의 시의도 그다지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벨리안 님, 폐하께서는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아스텔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내쫓았다.

“벨리안, 옆방에 가서 기다려 줘요.”

“……네, 황후 폐하.”

벨리안은 침실에서 쫓겨나다시피 옆방으로 내몰렸다.

‘정말 병이 심하신 건가?’

저 모습을 보니까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사실 벨리안은 황후궁에 오면서도 아스텔을 의심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황후와 황후의 가문이 의심스러운 상황이었으니까.

혹시 폐하께 독이라도 쓴 게 아닌가?

이미 돌아가셨는데 병환이라고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무사했다.

물론 많이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긴 했지만…….

병석에 누워서도 간간이 정신을 차리시는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는 힘겹게 정신 줄을 잡고서 황후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명령까지 내렸다.

정말 갑작스레 병이 났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서류를…….’

황제의 명령을 직접 들었으니 서류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글을 적었다.

[황후에게 권한을 위임…….]

그 구절을 적으면서 뒤늦게 차가운 현실이 느껴졌다.

황제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시면 어린 황태자가 새 황제가 된다.

황태자 전하는 이제 겨우 5살, 곧 있으면 6살이다.

제국은 젊은 황후와 황후의 가문으로 넘어갈 것이다.

종잇장을 쥔 손이 축축하게 젖을 만큼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행사장에서 황후 폐하와 기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아스텔이 황후가 되기 전에는 특별히 나쁜 관계는 아니었는데.

황후가 된 뒤에는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약간 불편한 관계가 됐다.

벨리안의 입장에서는 약간이지만 아스텔은 그를 꽤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만일 그런 아스텔이 섭정 황태후가 되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될까?

새삼 두려움이 앞섰다.

“벨리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척도 없이 문이 열리고 아스텔이 안으로 들어왔다.

벨리안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황후 폐하.”

벨리안은 황후를 평소처럼 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 정중한 목소리가 나왔다.

“폐하의 명령을 담은 서류를 작성해 뒀나요?”

“완성했습니다.”

벨리안은 방금 전에 떨리는 손으로 작성한 서류를 아스텔에게 보여줬다.

“당분간 그대가 나를 도와줘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황후 폐하를 돕겠습니다.”

열렬하게 대답하자 아스텔이 미간을 찌푸렸다.

좀…… 지나치게 비굴했나.

“나는 입에 발린 말보다 솔직한 태도를 원해요.”

“명심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병환 중이시니 내일부터 중요한 업무는 내가 직접 처리하겠어요. 그리고 수확제는 최대한 간단하게 마무리하지요.”

“네, 네. 물론 그리 하셔야지요.”

벨리안은 여전히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저, 그런데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병이신…….”

“시의에 따르면 피로가 겹치셔서 갑작스러운 병환이 생긴 거라고 하더군요.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했어요.”

“피로가 겹쳐서…… 그렇군요.”

벨리안은 납득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은 의문투성이였다.

카이젠을 6년 가까이 모셨지만 그가 피곤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작 피로 때문에 병이 나서 저렇게 실신하신다고?

하지만 그 말대로 황제 폐하는 피곤하고 지친 것처럼 보였다.

벨리안 자신도 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중독된 사람은 안색이 검게 변하거나, 피를 토하거나, 경련을 일으키거나, 아무튼 중독된 티가 난다.

그에 비하면 황제 폐하는 피로가 쌓인 모습일 뿐, 독에 중독되거나 어디 크게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아스텔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그를 내보냈다.

“오늘은 수고했으니 이만 물러가세요.”

벨리안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싸늘한 복도로 나오자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복도에는 여전히 기사들과 시종들이 오가고 있었다.

모두 바빠 보였고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충 봐도 여기서 새로운 정보를 알아낼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멍하니 복도를 걸어가는데 한쪽에서 낯선 여자가 어딘가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황후의 시녀는 아니었다.

‘누구지?’

뒤늦게 그 여자가 아스텔이 부른 약제사라는 게 떠올랐다.

황후는 저 젊은 약제사와 연구실 겸 약물 상점 같은 걸 만든다고 적당한 건물을 찾아달라고 명령까지 했었다.

호기심에 그 건물을 지나가다가 저 약제사를 얼핏 봤었다.

‘황후 폐하는 얼마 전에 저 약제사를 수도로 불러들였지.’

저 여자가 왜 여기 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곧 아스텔이 치료제가 있는지 물어보려고 불렀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의문이 들었다.

‘혹시 기운이 빠져서 죽게 만드는 약도 있을까?’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벨리안은 눈 색을 바꾸는 약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벨리안은 어둠에 싸인 복도를 걸어가면서 마음속에 피어나는 불길한 의문을 되뇌었다.

눈동자 색을 바꾸는 약을 만들 정도로 뛰어난 약제사라면,

기력이 쇠한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약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 *

아스텔은 그 후 며칠간 황제의 일을 대신해서 수확제의 뒷마무리를 했다.

벨리안도 겉으로는 아스텔을 잘 도와줬다.

황궁 안은 겉으로는 꽤 평온해 보였다.

여전히 철통같은 감시를 펼치고 있었지만 황궁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사불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황제가 독을 먹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스텔에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폐하는 어디 계셔?”

며칠간 카이젠을 만나지 못하자 테오르는 왜 그가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는지 계속 의아해했다.

‘변명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마음 같아서는 황제가 어디 멀리 갔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려고도 했는데 테오르는 그녀의 예상보다 더 눈치가 빨랐다.

“왜 의사 아저씨가 매일 여기 있는 거예요?”

“그레텔 이모는 우리하고 같이 사는 거예요?”

“근위대 기사들은 왜 다들 여기 모여 있어요? 폐하하고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세르벨에게서 기초적인 군사 상식을 배운 테오르는 기사들의 정복을 보고 각 기사단의 문장을 구분할 수 있었다.

이쯤 되자 아무리 시녀들의 입단속을 해봤자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계속되는 질문 세례를 버틸 수가 없었다.

“테오르.”

아스텔은 결국 테오르에게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테오르. 폐하께서는 많이 편찮으시단다.”

테오르는 그 말을 듣자마자 흠칫 놀랐다.

“황제 폐하가 아파?”

“그래.”

조그만 손이 아스텔의 드레스 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붉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왜 아픈데? 병이 났어?”

아스텔은 테오르를 안심시키려고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테오르의 어깨를 감싸 쥐고 시선을 맞추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응. 테오르도 예전에 열이 나고 아팠던 적이 있지? 폐하도 지금 많이 편찮으셔서 조용히 쉬고 계시단다.”

테오르는 잠자코 아스텔을 바라보며 설명을 유심히 들었다.

순수한 의문이 담겨 있던 맑은 눈망울에 근심의 빛이 차올랐다.

“폐하가 많이 아파……?”

“테오르, 괜찮아. 폐하께서는 괜찮아지실 거야.”

아스텔은 테오르를 감싸 안고 위로하면서 생각했다.

훗날 테오르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할지.

아스텔의 품에 안긴 테오르는 기운 없이 시선을 떨궜다.

힘없이 레빈의 손만 꾹꾹 누르다가 다시 아스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병문안을 가면 안 돼?”

“…….”

아스텔은 잠시 고민했다.

카이젠은 여전히 잠든 것처럼 정신을 잃고 있었다.

간간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때도 있지만 몇 분 만에 다시 의식을 잃었다.

가까이서 관찰해도 그냥 피곤하거나 병이 난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이 독에 대해 뭐라고 했더라?

‘말라 죽는다’라고 했었나.

이대로면 독이 아니라도 정말 실신한 채로 기력이 쇠해서 죽게 될 것 같았다.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독을 마신 것 같지 않았다.

한 번쯤은 보여줘도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지금이 최대한 멀쩡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까.

아스텔은 짧은 고민 끝에 테오르의 손을 잡았다.

“그래, 잠시 다녀오자. 폐하께서도 테오르를 보면 기뻐하실 거야.”

아스텔은 테오르를 데리고 카이젠을 만나러 갔다.

카이젠은 여전히 황후궁의 침실에 있었다.

아스텔은 황제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지난 며칠 동안 카이젠을 황제궁으로 옮기지 않았다.

테오르는 아스텔의 침실로 들어서면서 의아한 눈빛으로 아스텔을 돌아봤다.

“폐하가 여기 있었어?”

“……응, 황후궁이 좋다고 하셔서 옮겨왔어.”

“잘됐다.”

“뭐가 잘됐다는 거니?”

테오르는 아스텔을 올려다보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폐하는 여기를 좋아하니까.”

“…….”

두 사람이 들어서자 침실 안에 있던 시종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허리를 굽혔다.

약초 병을 정리하던 그레텔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테오르는 그레텔을 보지 않았다.

잠들어 있는 카이젠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텔은 그레텔에게 얼른 물었다.

“폐하께서는 잠드셨나요?”

“아, 예, 예. 지금 막 약을 드시고 주무시네요.”

그레텔도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테오르가 아스텔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까이 가봐도 돼요? 조용히 할게요.”

“그래.”

테오르는 까치발로 조심조심 카이젠에게 다가갔다.

침대 머리맡으로 가서 잠든 카이젠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카이젠은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정신을 잃고 누워만 있어서인지 며칠 사이에 조금 더 창백해진 것 같았다.

그래도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는데, 어린 테오르는 놀란 것처럼 멈춰 섰다.

테오르에게 카이젠은 언제나 태산처럼 높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런 카이젠이 힘없이 누워 있는 모습에 조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작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 붉은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폐하……. 아프지 마세요.”

그레텔은 어린 테오르가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글썽였다.

“황태자 전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는 금방 회복하실 거예요.”

테오르는 작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네, 약을 드시고 푹 쉬시면 다시 건강해지실 거예요.”

그레텔은 밝은 낯으로 테오르를 열심히 달랬다.

“테오르, 아니, 황태자 전하도 아플 때 제가 만든 약을 먹고 나았잖아요? 푹 자고 일어나니까 아프지도 않고 다시 쌩쌩해졌던 거 기억나죠? 폐하도 곧 그렇게 되실 거예요.”

“으응…….”

테오르는 그레텔의 설명을 듣고 울음을 그쳤다.

“자, 폐하께서는 푹 쉬셔야 해. 이제 인사를 드리고 나가자.”

아스텔이 조곤조곤 달래자 테오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카이젠에게 다가갔다.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단단한 마디가 잡힌 거친 손 위에 아이의 작고 하얀 손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얼른 나으세요.”

테오르는 그대로 카이젠의 손을 놓으려다가 멈춰 섰다.

카이젠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뭔가를 고민하듯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

“……아빠.”

조그만 목소리가 끊어질 듯 희미하게 울렸다.

아스텔은 그 조용한 목소리를 들으며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테오르…….”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

프리츠가 문을 열고 아스텔을 불렀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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