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수확제 (17/24)

17. 수확제

그 후 한동안 공작가의 일이 사람들의 화제에 올랐다.

레스턴 공작이 갑작스럽게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레스턴 공작은 한때 황제와 원수 관계였다.

지금은 딸이 황후가 되어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지만 다시 재상 자리에 복귀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러니 아들을 정면에 내세워서 정치에 간섭하려는 게 아닌가 하고 다들 추측했다.

다행히 새로운 소식이 공작가에 대한 화제를 밀어냈다.

여름이 저물어갈 무렵, 테오르는 정식으로 황태자의 지위를 받았다.

* * *

그날은 관습대로 황궁에서 성대한 축하연이 열렸다.

테오르도 정식으로 축하연에 참석하기 위해 새로 만든 예복을 입었다.

푸른색 예복을 입고 서 있는 테오르는 인형처럼 귀여웠다.

시녀들은 테오르를 보며 감탄했다.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아스텔은 테오르를 꼼꼼히 살피며 물었다.

“불편하진 않지?”

“응!”

황궁에 들어온 뒤 테오르의 옷을 전부 새로 만들었는데 이제는 새로 맞춘 옷도 아슬아슬하게 작아졌다.

“몇 달 만에 많이 자랐구나.”

새삼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제 시골에서 입던 옷은 작아서 못 입을 것 같다.

앞으로는 그런 평범한 옷을 입을 일도 없겠지만.

“오늘은 폐하 곁에서 얌전하게 있어야 해.”

아스텔은 잘 빗어넘긴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벌써 황태자가 된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조금 두렵기도 했다.

테오르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잘할 수 있어. 할아버지하고 연습했는걸.”

테오르를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귀족들의 정중한 인사법을 흉내 냈다.

나름대로 잘하긴 하는데, 인형처럼 귀여운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니까 귀엽고 앙증맞으면서도 웃겼다.

아스텔은 그런 테오르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한나도 웃음을 보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인사하던 테오르는 그런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웃지 마!”

“그래그래, 잘하는걸.”

아스텔은 테오르의 손을 잡았다.

“자, 이제 연회장으로 가자.”

축하연이 진행되는 내내 테오르는 카이젠의 곁에서 얌전히 귀족들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정말로 연습한 효과가 있는지 행동이 아주 의젓했다.

아스텔도 귀족 부인들의 인사를 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테라스로 나왔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아스텔이 있는 테라스로 나왔다.

“황후 폐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백작님, 오랜만이네요.”

세르벨의 아버지인 에클렌 백작이었다.

전에 황후궁에서 만난 뒤로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세르벨 경이 북부로 떠나서 테오르가 정말 많이 아쉬워했어요.”

세르벨 경이 북부로 파견되는 바람에 테오르의 교육은 한동안 외조부의 몫이 되었다.

에클렌 백작은 유리문 안쪽으로 보이는 테오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도 의연하시군요. 분명 훌륭한 군주가 되실 겁니다.”

카이젠을 닮은 거겠지.

테오르는 조금씩 자랄수록 점점 더 카이젠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성격은 안 닮았으면 좋겠는데.’

잠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또 다른 사람이 테라스 문을 열었다.

무심코 돌아봤던 아스텔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도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이다.

오랜만이라고 해도 한 달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만.

아스텔이 먼저 말을 걸기도 전에 공작이 웃으며 예를 갖췄다.

“축하드립니다, 황후 폐하.”

에클렌 백작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그래, 오랜만이군.”

공작은 딱딱한 태도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경직된 말투였지만 눈빛은 경멸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백작은 그를 담담히 바라보며 말했다.

“계승식 얘기는 들었습니다.”

일순간 아버지의 연녹색 눈에 불쾌감이 스쳐 갔다.

레스턴 공작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도 나이가 들었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됐지.”

공작은 자식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자상한 부모의 얼굴을 가장하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작위를 물려줄 자식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내 피를 이어받은 친아들이니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

친아들이 없어서 조카를 양자로 삼은 에클렌 백작을 비꼬는 소리였다.

유치하기는.

“훌륭한 아드님을 두셔서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새 공작님은 나무랄 데 없는 분이더군요.”

그에 비하면 에클렌 백작은 여전히 예의를 잃지 않았다.

위압감이 넘쳐 흐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솔직한 태도에는 군무 대신 다운 품위가 느껴졌다.

“백작님. 잠시 아버지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

아스텔은 이 두 사람을 떼어놓기로 했다.

에클렌 백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백작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뒤 침착하게 물러났다.

“오랜만에 뵙네요. 아버지.”

“그래, 오랜만이구나.”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대답이 돌아왔다.

“드디어 황태자가 됐구나. 국혼 이후 시간이 지난 걸 생각하면 오래 걸린 셈이지.”

아버지는 아직 공작이었다.

가주가 살아 있을 때 후계자가 작위를 계승하는 건 서류 작업이 복잡해서 시간이 좀 걸렸다.

“오빠에게서 소식은 들었어요.”

무슨 생각으로 쉽게 동의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빛엔 아무런 의심스러운 구석이 전혀 없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도 겉으로 드러낼 리가 없긴 하다만.

“네가 원하는 게 아니냐. 프리츠도 공작위를 바란다니, 물려주겠다는 것뿐이야.”

“그게 다인가요?”

“다른 게 뭐가 있겠느냐.”

공작은 유리문 너머로 카이젠의 곁에 서 있는 테오르를 바라봤다.

“어차피 공작위가 없어도 내가 황태자의 외조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을.”

아스텔은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다. 그 순간 다시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시종이 아스텔을 불렀다.

공작은 그 틈에 아스텔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계승식에서 뵙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날의 대화는 아스텔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스텔은 프리츠에게도 자신이 느낀 것을 그대로 전했다.

“아버지가 뭔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분명해요.”

프리츠는 아버지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더 주의 깊게 관찰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래도 찜찜한 기분이 들어.’

그러나 아스텔로서는 공작가의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을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스텔은 수확제 준비로 다시 바빠졌다.

수확제는 일 년 중 손꼽히는 대행사였다.

이미 한참 전부터 예산과 행사 순서 등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할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아스텔은 정신없이 일에 매달려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버지의 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불길한 안개처럼 찝찝했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반강제적으로 작위를 뺏긴 했지만 죄인 신분이 아니기에 저택 안에 가둬 둘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방 안에 가둬놔도 질 나쁜 음모를 꾸밀 만한 인간이었다만.

아스텔은 수확제를 전후로 아버지를 다시 설득해서 영지로 내려보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아버지가 순순히 따를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골치 아픈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가을이 초입에 들어선 어느 날, 황후궁에 예기치 못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누가 찾아왔다고?”

시녀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방문객의 도착을 알렸다.

“동부에서 온 젊은 약제사라고 합니다. 황후 폐하를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약제사?”

“네, 황후 폐하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아스텔은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디 있어?”

시녀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아스텔은 빠르게 응접실로 향했다.

밝은 빛이 스며들어오는 응접실에는 곱슬곱슬한 다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앉아 있었다.

단조로운 회색 모직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낡고 칙칙한 옷에 어울리지 않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잘 손질되어 있고, 발에는 튼튼한 부츠를 신고 있었다.

아스텔은 그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그레텔?”

그레텔이 아스텔을 돌아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스텔 님!”

아스텔이 동부에서 만나 친구가 된 약제사.

테오르의 눈 색을 바꾸는 약을 만들어준 그레텔이었다.

“그레텔.”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거의 반년 만인가.

그레텔은 약초를 연구하느라 항상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아스텔 님! 아, 아니지. 황후 폐하.”

그레텔은 화들짝 놀라면서 뒤늦게 무릎을 꿇었다.

아스텔은 얼른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니까 일어나요.”

그레텔은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정말 황후 폐하가 되셨군요.”

그레텔의 황갈색 눈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스텔을 신기한 듯이 바라봤다.

“소식을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내 편지를 받았군요.”

“네, 편지를 받자마자 출발해서 왔답니다.”

첫 번째 편지를 보냈을 때는 답이 없었다.

예정과 달리 먼 곳에 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디에 갔었냐고 물었더니 그레텔은 민망한 듯이 대답했다.

“저는 그동안 남부에 있었어요. 원래는 북부에 가려고 했는데 북부는 아직도 불안하다고 해서 무섭더라고요.”

그레텔은 가방 안에서 두툼한 노트를 꺼냈다.

약초를 그린 그림과 알아낸 정보를 적어놓은 노트였다.

“그래도 남부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어요! 새로운 조제법도 개발했고요.”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신기한 내용이 많았다.

“정말 처음 보는 약초가 많네요.”

자료를 꺼내놓던 그레텔은 그림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 아스텔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아스텔 님이 황후 폐하가 되셨다니.”

그레텔은 머뭇머뭇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곳…… 일은 잘 해결되신 건가요?”

황제와의 관계가 제대로 이뤄진 것인지, 스스로 원해서 황후가 된 것인지 걱정하는 것이리라.

아스텔은 그레텔에게 자신의 신분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외조부의 작위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그레텔은 제국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수년간 왕래하면서 그레텔은 아스텔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다.

테오르의 친부에 대해서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아스텔의 신분과 테오르의 눈 색을 보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겠지만.

아스텔은 그레텔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간의 오해도 풀리고 잘 해결됐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레텔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황후 폐하.”

“고마워요.”

금세 기운을 회복한 그레텔이 웃으며 물었다.

“우리 테오르, 아니, 황태자 전하는 어디 계신가요?”

* * *

그레텔의 방문으로 오후 시간은 즐겁게 지나갔다.

테오르는 오랜만에 만난 그레텔을 보자마자 그녀의 품으로 달려가서 안겼다.

“그레텔 이모!”

“테오르, 아니지 황태자 전하. 세상에 그동안 정말 많이 자라셨네요.”

그레텔은 한참 동안 테오르와 놀아주다가 돌아갔다.

이곳에서 지내도 된다고 했지만 이미 수도 안에 거처를 구했다고 했다.

평민인 그녀가 황후궁 안에 머물렀다가 아스텔이 괜한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해 주는 듯했다.

테오르는 그레텔이 방문한 덕에 내내 기분이 좋았는데 그녀가 떠나버리자 다시 침울해졌다.

다행히 곧이어 카이젠이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왜 그러고 있지? 무슨 일이 있느냐?”

“폐하.”

카이젠은 테오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궁 안에만 있으니 심심한 모양이구나. 내일쯤 시간을 내서 정원으로 놀러 나갈까?”

“정원은 다 가봤어요.”

“동북쪽에 있는 정원에는 못 가봤을 텐데. 그곳으로 피크닉을 나가자.”

“피크닉 가고 싶어요.”

피크닉이라는 소리에 테오르는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숲에 가는 게 좋은 모양이구나.”

카이젠은 웃으며 테오르를 내려놓았다.

“걱정하지 마라. 얼마 안 있으면 수확제니까. 사냥 대회에 갈 때 너도 함께 데려가 주마. 수도 옆에 있는 숲에서 열릴 테니 그때는 숲속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어.”

둘의 대화를 듣던 아스텔이 놀라서 물었다.

“폐하, 정말 사냥 대회에 나가시는 건가요?”

“전에도 말했잖아.”

언젠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테오르가 카이젠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축제에서 사냥하는 거예요?”

“그래. 성대한 대회를 하는 거야.”

카이젠은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신이 우승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당연히 우승하겠지. 황제 폐하인데.

‘아무래도 말리는 게 좋겠지.’

사냥 대회는 숲속에서 개최된다.

숲에 들어가면 기사들이 황제를 지키기 어려워진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스텔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를 만류하려고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지원군이 나타났다.

테오르가 카이젠의 옷을 쥐고 있던 손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는 사냥 싫어요.”

“뭐?”

테오르는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카이젠을 올려다봤다.

맑게 빛나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흡사 잔인무도한 사냥꾼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곰 죽었어.”

“…….”

아스텔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예전에 마에른의 사냥 별장에서 박제된 곰을 봤다고 했었다.

동물이 죽는 걸 본 적 없는 테오르에겐 꽤 충격적인 기억이었다.

“그래. 예전에 사냥 별장에서 곰 박제를 보여준 적이 있었지……”

카이젠은 테오르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턱 끝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제안했다.

“그럼 다른 대회를 할까?”

“다른 대회요?”

“다른 대회를 하신다고요?”

이 대화를 지켜보던 아스텔은 또 한 번 놀랐다.

수확제의 사냥 대회는 제국의 전통인데 다른 걸 하겠다니.

다른 대회라는 말에 테오르는 다시 카이젠에게 매달렸다.

“그럼 인형극 대회를 하면 안 돼요?”

“그건…… 수확제 하고는 조금 안 어울리는데.”

수확제에는 전통적으로 사냥이나 사격술 같은 기사들의 실력을 선보이는 행사를 했다.

그런 얘기를 해줬더니 테오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건 안 될까요?”

* * *

“검술 대회를 한다고?”

다음 날 아스텔과 마주 앉은 외조부는 전날 밤에 있었던 얘기를 전해 듣고 되물었다.

“네, 그렇게 결정됐어요.”

아스텔은 향긋한 홍차를 맛보면서 대답을 이어갔다.

“예전에는 수확제에서 검술 대회나 궁술 대회를 했다면서요?”

“그랬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스텔은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가만히 웃기만 했다.

과거에는 검술이나 궁술을 겨루는 시합을 했지만 화약과 대포가 나오면서 사냥 대회로 바뀌었다.

“테오르가 싫어하니까 황제 폐하께서 검술 대회로 정하셨어요. 정확히는 테오르가 동화책에서 봤다면서 그런 대회를 하자고 말해서요.”

사실 동화에 나온 건 마상 경기였다.

마상 경기보다는 그냥 검술 시합이 나을 것이다.

둘 다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도 검술은 심각해진다 싶으면 중간에 심판이 떼어놓기라도 하지만, 마상 창시합은 사고가 나도 말려줄 사람이 없으니.

“그래 뭐, 옛 전통도 되살리고 나쁘지는 않구나.”

“테오르가 하도 지루해해서 내일은 같이 피크닉을 가기로 했어요. 할아버님도 함께 가실래요?”

“아니. 난 더워서 그냥 쉬고 싶다.”

외조부는 황급히 거절했다.

세 사람이 같이 놀라고 자리를 피하는 것 같았다.

아스텔은 굳이 지적하지 않고 모른 척 다시 권했다.

“그러지 말고 함께 가세요. 할아버지가 안 가시면 테오르가 많이 섭섭해할 거예요.”

몇 번 더 졸라서 결국 같이 가겠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외조부는 함께 찻잔들 들다가 아스텔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기 좋구나.”

무슨 말인가 하고 돌아봤더니 외할아버지는 낮게 한숨을 내쉬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좋든 싫든 네게는 이런 삶이 어울려.”

아스텔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들으면서 자랐으니까요.”

아이 때부터 황후가 돼야 한다고 세뇌를 당하다시피 했는데 익숙해질 수밖에.

후작은 안타까운 눈길로 아스텔을 바라보며 물었다.

“동부로 돌아가고 싶으냐?”

“할아버지는요?”

아스텔은 외조부가 시골에 있는 낡은 저택을 처분하지 않고 놔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매달 받는 연금도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는 것도.

언젠가 시골로 돌아가고 싶으신 걸까.

그런 마음이 들어서 물었다.

“나는 어디서 살든 상관없다. 얼마나 더 살겠다고.”

외할아버지는 완고한 태도로 대답하며 아스텔을 물끄러미 직시했다.

고집스러운 말투였지만 아스텔을 바라보는 눈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너는 부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구나.”

“…….”

마음 한구석에 애틋하고 따뜻한 감정이 솟아났다.

자신이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해주는 가족이 곁에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아스텔은 테이블 위로 할아버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 * *

“사냥 대회를 취소했다고?”

레스턴 공작은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놀라서 언성을 높였다.

심복이 난처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황제가 오늘 느닷없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공작은 저택의 밀실에서 수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예정과 달리 사냥 대회가 취소됐다는 소리에 공작은 낭패감을 느꼈다.

왜 갑자기 그런 짓을 했지?

설마 뭔가 눈치챈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계획을 세우기만 했을 뿐 아직 뭔가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도 않았다.

자신의 머릿속에만 있는 계획을 카이젠이 어떻게 눈치챈단 말인가.

‘아스텔이 뭔가 눈치채고 황제를 설득한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스텔과 프리츠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자식이라는 것들이 작당해서 아비를 내쫓으려고 하다니.

배은망덕한 것들.

그 둘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특히 아스텔은 이혼 일이 있었는데도 다 용서하고 다시 받아주고 열심히 도와줬건만 이런 짓이나 꾸미다니.

공작은 나름대로 외손자인 황태자에게도 애정이 있었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공작은 아스텔이 한 짓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다른 행사는 없는 거냐?”

설마 수확제인데 행사도 없이 끝내지는 않겠지.

예상대로 수하가 대답을 내놓았다.

“사냥 대회 대신 검술 대회를 하겠다고 합니다.”

“검술 대회라고?”

“황제가 그렇게 정했다고 합니다.”

검술 대회라니.

예정된 계획은 사냥 대회가 아니면 안 된다.

‘역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군.’

사냥 대회면 몰라도 검술 대회에 황제가 직접 나갈 리는 없다.

검술 대회라면 카이젠을 노릴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낭패감이 감돌았지만 공작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황궁 안에는 그를 도와줄 시종들과 시녀들이 있었다.

아스텔이 거의 다 내쫓아버렸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자들이 있었다.

반드시 프리츠의 계승식이 끝나기 전에 이 일을 성공시켜야만 했다.

그래야 그는 작위를 유지한 채 자신의 숙원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 * *

다음 날은 오랜만에 피크닉을 갔다.

피크닉이라고 해도 황궁의 동북쪽 끝에 있는 오래된 정원에 가는 것뿐이었지만.

카이젠과 아스텔 둘 다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출발하려고 했는데도 정오가 지난 뒤에 떠날 수 있었다.

동북쪽에 있는 정원은 울창한 정원수가 숲처럼 우거진 곳이었다.

숲의 가운데에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

사실 이곳은 예전에는 죄인을 가두는 폐궁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 손이 별로 닿지 않아서 잡초도 많았다.

숲이라고 하기엔 좁고 깨끗하고 정원이라기엔 자연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야생 공원 정도라고 할 수 있으려나.

일행은 평지에 매트를 깔고 간단한 간식거리를 먹었다.

다행히 날씨는 화창했다.

눈이 시릴 만큼 맑은 날이었다.

환한 햇살이 정원의 신선한 녹색 잎에 밝은 빛을 더했다.

아스텔은 문득 덴츠 숲에서 함께 피크닉을 갔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걸어 다니지도 못할 만큼 비가 왔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기엔 아쉬울 정도였다.

“연못가에 가볼래!”

테오르는 주스 한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주의를 줬다.

“테오르. 혼자 멀리 가면 안 된다.”

근처에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래도 풀숲이 많아서 시야가 가려지는 곳이 많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후 폐하.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한나가 테오르의 손을 잡고 함께 숲을 걸어갔다.

아이가 떠나고 나니까 어른들끼리는 할 일이 없었다.

잠시 후 카이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걸을까?”

아스텔은 카이젠, 외조부와 함께 풀잎이 가득한 정원길을 걸어갔다.

아스텔은 숲을 산책하면서 간간이 풀잎 사이에 자라난 약초를 뜯었다.

테오르와 놀아주던 카이젠이 그런 아스텔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뭘 하고 있어?”

카이젠은 아스텔의 손에 들린 약초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약초를 뜯는 거야? 이제 이런 약초는 언제든지 구할 수 있잖아?”

카이젠의 말대로 이 정도 약초는 언제든지 주문하기만 하면 시의가 가져다줄 것이다.

이제는 풀잎을 뒤져가며 약초를 찾을 필요도 없건만.

숲에 올 때마다 약초를 뜯었더니 습관이 된 모양이다.

“새로 뜯어가면 신선하니까요.”

대충 둘러댔더니 카이젠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아스텔은 웃으며 덧붙였다.

“취미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스텔은 풀덤불에 붙은 노란 꽃을 꺾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닿기 전에 다른 손이 잎사귀를 낚아챘다.

뒤따라온 카이젠이 아스텔보다 먼저 꽃을 잡아 뜯었다.

그는 꽃잎에 묻은 흙을 털어낸 뒤 아스텔에게 건네줬다.

“감사합니다.”

“이건 뭐지?”

“인디스 꽃이에요. 차로 달여 마시면 잠을 깊게 잘 수 있어서요.”

그 말에 카이젠이 멈칫했다.

“당신 불면증이 있는 건가?”

“신경 쓸 일이 많아서인지 가끔 잠을 깹니다. 불면증까지는 아니지만요.”

카이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몇 분 정도 풀잎을 밟으며 걷다가 카이젠이 불쑥 물었다.

“시골에서 살던 때가 그리워?”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시선을 돌렸다.

환한 햇살 아래에 있는데도 붉은 눈동자가 유독 어둡게 보였다.

“글쎄요.”

시골에서 살 때는 힘들기는 해도 평화로웠다.

하루하루 끼닛거리만 해결하면 크게 걱정할 일이 없었으니까.

고민거리라고 해봤자 테오르의 새 옷을 만들어야 하는데 옷감을 어떻게 살지 궁리하는 것 정도였다.

‘확실히 편하긴 했지.’

그 시절엔 식량과 장작을 살 돈만 있고 할아버지와 테오르가 건강하기만 하면 근심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제 와서 그때를 그리워할 필요는 없지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어차피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무슨 짓을 해도 그 시절로 돌아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

5년의 기한이 끝나면 아스텔과 할아버지는 시골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그때도 테오르는 데려가지 못한다.

데려갈 수 있다고 해도 5년 동안 황궁 안에서 황태자로 살아온 테오르를 다시 그런 생활로 데려가는 건 너무 가혹한 짓이겠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괜한 소리를 했나.

“폐하, 그러고 보니 말씀드릴 일이 있었는데요.”

“뭐지?”

“알고 지내던 약제사가 찾아와서…….”

그레텔 얘기를 하면서 화제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테오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테오르? 무슨 일이니?”

테오르는 풀잎 사이로 아스텔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 이쪽으로 와! 여기 새 둥지가 있어!”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한 걸음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칼렌베르크 후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졸지에 후작은 황제와 단둘이 정원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후작이 천천히 다가가자 카이젠은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 눈길을 줬다.

“아, 그래.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예?”

“선대에 몰수했던 칼렌베르크 가문의 영지를 돌려주라고 했네. 관리들이 며칠 안에 서류를 정리해서 보낼 거야.”

늙은 후작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카이젠을 바라봤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할 것 없네. 그게 부당한 일이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조부인 전전대 황제는 죽기 전에 유약한 아들을 위해서 자신에게 충성을 바쳤던 귀족을 몇 명 제거했다.

이 후작도 그 희생양에 불과했다.

카이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털어놨다.

“만일 다른 일이 생기면 그대에게 아스텔을 부탁하겠네.”

후작에게 아스텔을 부탁한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일 5년 후에 아스텔이 황궁을 떠나면 다시 이 노귀족과 함께 살게 될 테니까.

사실 후작의 영지를 되돌려 주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래서였다.

자신이 직접 영지나 위자료를 준다고 하면 거절할 테니까.

후작도 카이젠의 뜻을 눈치챘다.

“제가 황후 폐하를 상속인으로 지정하길 바라시는군요.”

“그래.”

후작이 아스텔에게 영지를 물려준다고 유언을 남기면 아스텔은 다시 이혼한 뒤에도 평생 후작가의 영지를 소유한 채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아스텔이 그렇게라도 편히 살았으면 좋겠군. 어릴 때부터 마음에도 없이 강제로 내 약혼녀가 돼서 힘들기만 했는데. 제대로 보답해주지 못했어.”

칼렌베르크 후작은 또다시 카이젠을 아연하게 쳐다봤다.

“왜 그러나?”

“폐하 정말 모르십니까?”

“무슨 말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후작의 눈빛에는 안쓰러움과 한심스러움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카이젠은 답답해서 짜증이 났다.

말을 하다 마는 것도 아스텔을 닮은 건가.

“무슨 뜻인가? 말을 제대로 하게.”

칼렌베르크 후작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말을 해줘도 되려나.

두 사람의 관계는 몇 달째 지지부진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 정도는 말해줘도 되겠지. 거짓말도 아닌데.

황제도 알 건 알아야 한다.

후작은 짧은 고민 끝에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황후 폐하는 약혼 기간 내내 폐하를 진심으로 좋아했습니다. 전혀 모르고 계셨다니 놀랍군요.”

* * *

몇 걸음 앞에서 테오르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중간중간 한나의 즐거운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바로 앞에 연못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나와 테오르가 연못가에서 블린을 쫓아다니며 함께 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스텔은 그 소리를 들으며 걸어갔다.

풀잎을 헤치며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손목을 붙잡혔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더니 뒤따라오던 카이젠이 어느새 바싹 다가와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 스쳐 가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보였다.

그가 아스텔의 손목을 한 손으로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무슨……?”

아스텔은 흠칫 놀랐다.

그녀를 바라보던 카이젠은 묵묵히 시선을 떨궜다.

“당신이 말했던 약초야.”

“네?”

놀라서 벗어나려던 아스텔은 카이젠이 가리키는 노란 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잡초로 가려진 흙바닥에 작은 꽃잎이 있었다.

풀잎 사이에 숨은 샛노란 꽃잎이 싱싱한 빛을 냈다.

아스텔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카이젠에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인디스 꽃이네요.”

“…….”

“폐하. 이제 손을 놔주셔도 됩니다.”

약초를 확인했는데도 손목을 안 놔주길래 놔달라고 침착하게 부탁했더니, 그제야 카이젠이 아스텔의 손목을 놓았다.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아쉽다는 듯이 천천히 떨어졌다.

아스텔은 허리를 굽히고 꽃을 꺾었다.

새하얀 꽃잎이 신선한 향내를 풍겼다.

꽃을 바구니에 담고 돌아섰더니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이젠이 있었다.

“폐하? 왜 그러시나요?”

“아냐.”

카이젠은 먼저 한 걸음 앞서가며 화제를 돌렸다.

“할 얘기가 있다고 했었지. 무슨 얘기였어?”

“전에 알던 약제사가 제 연락을 받고 수도로 찾아왔어요.”

아스텔은 그레텔과 만난 이야기를 짤막하게 전해줬다.

“아카데미에서 의학을 가르치긴 하지만 약초에 대해서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요. 허락해 주신다면 수도에 약초를 연구하는 약제소를 만들고 제가 후원해 주고 싶습니다.”

“그 정도는 당신 마음대로 해도 돼.”

두 사람은 연못가로 다가갔다.

테오르와 한나는 반대편에서 놀고 있었다.

관리가 잘 안 돼서 연못 위에는 수련이 아무렇게나 듬성듬성 피어있었다.

그래도 풀숲 사이에 자리한 연못은 상쾌한 느낌을 자아냈다.

맑은 햇살이 찰랑이는 물결 위에 반짝이는 빛을 뿌렸다.

“미안해.”

아스텔은 갑작스러운 사과에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카이젠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깊은 연못물을 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이혼하지 말았어야 했어.”

아스텔은 이게 무슨 말인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설마 이혼할 때의 얘기인가?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카이젠의 시선이 아스텔에게 돌아왔다.

“당신에게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전에도 몇 번 사과를 받은 기억이 나는데.

하긴 그때는 아스텔의 요청을 거절하거나 위자료를 주지 않고 내보낸 것 등을 사과했었다.

아예 이혼 자체를 사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기도 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카이젠의 눈빛엔 괴로운 감정이 가득했다.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카이젠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 지난 일이에요.”

그는 이혼을 원했고 아스텔은 받아들였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돌이키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부질없던 짝사랑도 이혼과 동시에 끝이 났다.

그 시절의 일들은 이제 기억 속에 흔적만 남았다.

언젠가는 남아 있는 흔적도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정도로 아스텔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기억들이었다.

“…….”

아스텔은 말없이 돌아서서 앞으로 걸어갔다.

카이젠은 그녀를 붙잡고 싶은 듯했지만 차마 손을 내밀지 못했다.

아스텔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다정함이 마음에 스며들면서 전보다 평온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피어났지만.

그래도 아스텔은 여전히 그의 손을 잡아줄 수 없었다.

* * *

황제와 황후가 황태자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자 황후궁 안은 텅 빈 것처럼 조용해졌다.

벨리안은 고요한 황후궁 안을 조심스럽게 걸어들어 갔다.

아스텔은 자리를 비웠지만 그래도 이곳에 오면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최대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복도를 걸어갔다.

한참을 들어가서 맨 끝에 있는 작은 휴식실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조그만 몸집의 레이디가 책을 읽고 있었다.

“나엔 양.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나엔은 예고도 없이 나타난 벨리안을 세세히 살폈다.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분명 황제 폐하의 보좌관이었던 남자다.

‘이름이 뭐였지?’

나엔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벨리안 님?”

“네,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사실 벨리안은 이 조그만 영애를 별로 만난 적이 없었다.

플로린이 이 아가씨에게서 사건의 진상을 전해 들으라고 했었지.

하지만 벨리안은 황후궁에 들어올 기회가 별로 없었다.

황후가 그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세르벨에게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그는 벨리안의 요구를 거절했다.

황후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세르벨은 황후에게 무척 호의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녀석을 친구라고…….’

벨리안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 나엔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나엔 양, 이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제가 미리 찾아뵙고 도움을 드렸어야 했는데.”

“저, 저는 괜찮아요.”

“일은 힘들지 않으십니까?”

“네, 힘들지 않아요. 괜찮아요.”

벨리안은 더듬거리며 뭐든 괜찮다고만 하는 나엔을 뻔히 쳐다봤다.

숫기가 없는 건가 조금 모자란 건가.

본론을 꺼내기 전에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것뿐이었는데 이 레이디는 제대로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플로린 양에게 들었는데.”

벨리안은 쓸데없는 수사를 집어치우고 용건을 꺼냈다.

“지난번 독살 사건에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플로린 양은 제게 오해를 풀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어, 언니가요?”

그때의 일이 나오자 나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역시 뭔가 있군.’

나엔은 완강하게 부정했다.

“오해는 전혀 없었어요.”

“그래요? 플로린 양의 증언에 따르면 황후궁의 누군가가 나엔 양을 모함한 일이라고.”

“아니에요. 오해가 아니었어요. 플로린 언니가 약을 보내줬는걸요.”

“황태자 전하를 해치라고요?”

나엔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조그만 아랫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흠. 그 부분에 뭔가가 있었군.’

조종하기 쉬운 아가씨였다.

그래서 플로린이 이 아가씨를 희생양으로 삼아 황궁에 보내고 아스텔은 플로린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이용한 거겠지.

벨리안은 다정한 목소리로 나엔을 구슬렸다.

“저는 나엔 양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아스텔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지 알아내고 싶었다.

지난 몇 달간 황제파인 신흥 귀족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크로이첸 가문이 수도에서 쫓겨난 것도 큰 타격이었는데.

이제는 내무대신마저 자멸하고 말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내무대신인 뷔르겐 자작을 처형하라고 명령하셨다.

공석이 된 대신 자리는 황후의 친오빠인 새로운 레스턴 공작이 가져갈 예정이었다.

이 모든 과정에는 아스텔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섭정 황태후가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아스텔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았다.

무엇이든 새 황후의 약점이 될 만한 걸 찾아야 한다.

“…….”

하지만 나엔은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오늘은 이 정도 해두는데 좋겠군.’

“혹시라도 제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나중에라도 연락을 주십시오.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괜찮으니까요.”

나엔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별 소득은 없었지만 어쨌든 나엔에게서 약속은 받아냈다.

벨리안은 얼른 여기서 나가려고 빠르게 황후궁의 복도를 걸어갔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고 말았다.

저 앞에 아스텔이 시녀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순간 벨리안은 얼른 기둥 뒤로 숨을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몸을 숨길 기회는 없었다.

아스텔이 그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벨리안은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굽혀서 예를 표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영광을 누리시…….”

“벨리안 경.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요?”

아스텔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차갑게 잘라버렸다.

전에는 ‘벨리안 님은’, ‘그대는’ 하고 친근하게 부르더니 언젠가부터 아스텔은 고압적인 태도로 변했다.

물론 먼저 무례를 범한 건 자신이었지만.

“황후 폐하께 황제 폐하의 전언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나는 방금 전까지 황제 폐하와 함께 있었는데요?”

“……이건 오늘 오전에 말씀하신 일입니다.”

벨리안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새 공작님께 축하 선물로 서남부의 영지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황제 폐하는 선물 얘기를 오늘 아침에 말씀하셨고, 시종장에게 명령해서 황후에게 전하도록 하셨다.

벨리안은 시종장 대신 자신이 직접 황후 폐하께 전하겠다고 귀찮은 전령 역할을 떠맡았다.

그러면서 일부러 시간을 좀 끌었다.

황후 폐하가 피크닉을 나선 뒤에 이곳에 찾아오기 위한 꼼수였다.

이 말에는 무심하던 아스텔도 놀란 눈빛을 드러냈다.

“너무 과분한 선물이군요.”

작위를 계승했다고 영지를 선물로 준다니. 드문 일이었다.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것이다.

“거절하시는 겁니까?”

“제가 거절할 수는 없지요. 제가 받는 선물도 아닌데요. 프리츠 오빠가 폐하께 직접 말씀드릴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직접 카이젠에게 말해서 거절할 생각이었다.

레스턴 가문만 너무 눈에 띄는 것은 좋지 않으니까.

아스텔은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다른 얘기를 꺼냈다.

“마침 잘 오셨네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어요.”

“네?”

“수도에 약초학을 연구하고 교육시키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그건 오래전부터 그레텔이 바라던 일이었다.

아스텔도 그런 식으로라도 그레텔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폐하께서도 허락하셨으니 공식 절차를 준비해 주세요.”

‘약초라.’

벨리안은 아스텔을 유심히 보다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 * *

카이젠은 복잡한 눈길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내내 후작이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황후 폐하는 약혼 기간 내내 폐하를 진심으로 좋아했습니다. 전혀 모르고 계셨다니 놀랍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카이젠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신혼 첫날, 망설임 없이 이혼에 동의하던 아스텔이 기억났다.

당시 아스텔이 어떤 얼굴을 했더라?

‘예, 폐하. 이혼에 동의하겠습니다.’

그 대답을 내놓는 순간 아스텔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벽난로에 채워놓은 장작을 태우고 또 태운 뒤, 오랫동안 쌓인 먼지와 잿가루를 단번에 털어버리는 것처럼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카이젠은 그 순간 깨달았다.

지난 십 년은 아스텔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는 것을.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착실하고 얌전하게 의무를 다했지만, 아스텔도 마음속으로는 이 결혼을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 순간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이혼을 요구할 때는 약간의 죄책감도 있었다.

아직 결혼식이 끝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황후궁으로 살림살이를 옮기지도 못했는데 짐을 챙겨서 나가라고 내쫓는 격이었다.

이런 부당한 요구를 아스텔이 얌전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카이젠은 그녀가 상처를 입고 괴로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스텔이 이혼할 수 없다고 버티면 막대한 재산을 안겨주겠다고 회유하고, 그래도 안 되면 강제로 별궁에 보내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스텔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이혼에 동의했다.

아주 시원하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을 지으면서.

‘역시 결혼하는 게 싫었던 건가.’

아스텔의 평온한 모습 앞에서 카이젠은 안도감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꼈다.

예상외로 담담한 태도에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렇게 싫었으면서 여태껏 다정하고 성실한 약혼녀 행세를 했던 건가 하는 마음에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기적인 마음이었지만.

아스텔은 공기 같은 존재였다.

너무 익숙해서 곁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상대였다.

그녀는 십 년간 언제나 그의 곁에 머물면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싫어하면서도 가끔은 그녀의 곁에서 편안한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도 일종의 애정인지도 모르겠다.

카이젠은 자신이 아스텔에게 편안한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음의 순간은 짧았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탓에 정이 든 것뿐이겠지.

당시 카이젠은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아스텔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6년 후 다시 만날 때까지 그는 아스텔을 잊고 살았다.

칼렌베르크 후작이 해준 얘기는 그가 기억하고 있던 아스텔과의 지난 세월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말이었다.

‘아스텔이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카이젠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물었다.

늙은 후작은 기가 막힌다는 눈빛으로 어린 아스텔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짤막하게 설명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눈앞에 스쳐 갔다.

그의 손을 잡던 아스텔의 감동 어린 미소.

사소하지만 깊은 진심을 담고 있던 속삭임들.

의무적으로 한 일이라기엔 지나치게 다정하고 애틋했던 순간들이 기억 속에 지나갔다.

‘이혼에 동의하겠습니다.’

카이젠은 비로소 그 당시 아스텔의 무심한 눈빛에 담겨 있던 슬픔을 깨달았다.

이혼을 입에 담는 순간 그 담담한 표정에 나타났던 상처와 환멸을.

아스텔은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혼에 동의하고 떠난 것이다.

때늦은 깨달음은 아픔과 후회를 가져왔다.

카이젠은 괴로운 감정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레스턴 공작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유리병 안에서 투명한 붉은 액체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몇 년간 수소문한 끝에 힘들게 손에 넣은 독약이었다.

이 약을 구해온 자는 불안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직접 먹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레스턴 공작은 유리병 안에 든 붉은 액체를 천천히 흔들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든 이것만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이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 황제가 독살을 당하면 누구나 황후와 레스턴 가문을 의심할 것이다.

‘그냥 사냥 대회였으면 좋았으련만.’

사냥 중에 사고로 죽으면 의심을 사긴 해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없으니 흐지부지 묻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독약은 다르다.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

공작은 고심 끝에 약병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절대 쓰지 않을 생각이지만.’

사냥 대회가 사라진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그의 불안한 눈빛이 다시 유리병 속의 액체로 향했다.

이걸 어떤 식으로 쓸지는 이미 계획은 해두었다.

황후궁의 시종 중에 믿을 만한 자가 있었다.

황제의 음식은 언제나 철저하게 검사를 한다.

사실상 황제의 음식에 독을 탈 기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운이 좋으면 기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 황후궁에는 검사 없이 황제에게 독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레스턴 공작은 독약이 든 유리병을 감싸 쥐고 생각을 이어갔다.

‘수확제 말고는 기회가 없어.’

평상시에 황제에게 독을 먹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수확제라면 황궁 안도 정신없이 돌아갈 테니 기회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최악의 결과는 면할 수 있다.

황제는 이 일을 깊이 파헤칠 수 없을 것이다.

황제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 연루된 일이니까.

레스턴 공작은 곁에 있던 부하에게 말했다.

“황태자를 돌보는 시종에게 내 명령을 전해라.”

그의 명령을 받은 부하가 밀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공작은 화려한 침실 안에 혼자 남았다.

똑똑.

잠시 후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단정한 예복을 입은 프리츠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지난 며칠 동안 레스턴 공작은 몸이 좋지 않다며 침실 안에만 머물렀다.

저택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공작가의 의사를 제외하고는 만난 사람도 없었다.

“괜찮다.”

프리츠는 아버지를 세심하게 살폈다.

레스턴 공작은 작위를 물려주겠다고 결정한 뒤부터 이상할 만큼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 하고 저택 안에 칩거한 것도 아니었다.

프리츠에게 가문의 서류를 다 넘겨주고 가주의 업무를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범하게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다정한 아버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작위를 물려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찜찜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안색이 좋지 않구나.”

심지어 지금도 공작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이 프리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리츠는 말없이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번 일로 제게 실망이 크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아버지를 경계하면서 주의 깊게 감시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타협점을 찾고 싶었다.

아들로서 사죄도 하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저와 아스텔의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레스턴 공작은 대답 없이 듣기만 했다.

“저는 아버지와 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작위를 이어받아도 가문의 일은 전부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것이…….”

프리츠는 한 호흡 정도 간격을 두고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것이 아스텔과 황태자 전하께 해를 끼치는 일만 아니라면요.”

“내가 황후와 황태자에게 해를 끼칠 리가 있느냐?”

가만히 듣던 공작이 어이없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게 실망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나로서도 이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잠자코 있는 것뿐이다.”

그의 목소리엔 체념한 기색이 감돌았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납득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프리츠는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얼마 후엔 수확제 행사가 시작될 겁니다. 그때는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행사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화해를 원하는 말이라는 걸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래, 고맙구나.”

프리츠는 안도한 듯이 편안한 눈빛으로 이런저런 일을 말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레스턴 공작은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독살 계획이 성공한 뒤 가문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프리츠를 억지로 결혼시켜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공작 자신이 지금 당장 새로운 아들을 낳는 게 더 좋을지를.

* * *

아스텔은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다실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정원에서 괜한 소리를 듣고 나서 벨리안까지 만났다.

연달아 신경을 거슬리는 일을 겪었더니 피로가 밀려왔다.

숲에서 카이젠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카이젠은 이혼을 요구했던 것을 사과하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절절한 죄책감이 담겨 있던 눈빛을 마주 보면서도 아스텔은 제대로 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럭저럭 편안한 관계가 됐는데 왜 갑자기 과거의 일을 들추는 건지 모르겠다.

다시 꺼내봤자 좋을 것도 없는 기억들인데.

마음이 번잡해서인지 머리도 지끈거렸다.

아스텔은 한나가 차를 가져다준다는 것도 거절하고 혼자 다실에 남았다.

잠시 혼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용히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잠시 후에 나엔이 다급하게 찾아와서 접견을 요청했다.

“저…… 황후 폐하.”

“나엔? 무슨 일이지?”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엔은 당황한 표정으로 두서없이 말을 이어갔다.

조금 전에 벨리안이 찾아와서 그녀에게 지난번 일을 꼬치꼬치 캐물었다는 이야기였다.

아스텔은 나엔의 기나긴 설명을 유심히 들었다.

“그 사람은 나엔 양을 만나려고 일부러 내가 자리를 비운 시간에 찾아온 거였군.”

아마도 플로린이 벨리안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한 모양이다.

‘억울할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네.’

황자를 해치려고 한 게 아니어도 황궁에 독약을 들여오는 건 큰 죄였다.

크로이첸 가문이 황제 폐하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났을 뿐이지.

평범한 시녀였으면 단순히 독약을 몰래 반입했다는 것만으로도 처형당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할 얘기가 있으면 전해달라고 했다고?”

“네,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벨리안이 플로린의 억울함을 밝혀주려는 정의로운 마음으로 나엔을 찾아왔을 리는 없다.

아스텔을 의심해서 뒷조사를 하려는 거겠지.

뭔가 약점이 될 만한 걸 찾으려는 생각이거나.

‘그 사람은 처음부터 나를 의심했으니까.’

순행 중에는 아스텔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수작을 부렸던 적도 있었다.

카이젠을 위해서 그러는 것인 줄은 알지만, 쓸데없이 귀찮고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이미 두 명의 대신이 아스텔 자신과 관련된 일로 사라졌다.

그런데 아스텔 자신이 황제의 측근인 보좌관까지 함정에 빠뜨려서 내쫓으면 황제파 귀족들 사이에서 반발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놔두기엔 신경이 쓰이는데.

“나엔 양. 내게 알려줘서 고마워.”

아스텔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런 얘기까지 전해주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아닙니다, 황후 폐하.”

나엔은 아스텔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 그럼 그분한테는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아스텔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다음에 만나면 그냥 그때의 일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해. 그가 나엔 양을 귀찮게 하지 못하게 내가 다시 불러서 얘기할 테니까.”

빙빙 돌리고 함정을 파는 것보다 차라리 확실하게 말해두는 게 나을 것이다.

* * *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벨리안은 아스텔이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처리해 줬다.

아스텔은 다음 날 바로 수도의 빈 건물을 구할 수 있었다.

그곳을 약초 연구실로 개조해도 좋다는 허가도 받았다.

아스텔은 일이 정해진 뒤에 그레텔에게 소식을 전해줬다.

그레텔은 얼떨떨한 얼굴로 아스텔의 이야기를 들었다.

“약초를 연구하는 학교를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이렇게 큰 건물에 그것도 수도 한복판에 만든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에요.”

약초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는 예전에도 종종 했었다.

하지만 당연히 시골에 있는 작은 치료소에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그때는 수도에 커다란 건물을 짓는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황후가 돼서 좋은 점도 있는 거죠.”

아스텔은 건물의 구조가 그려진 도면을 살펴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황후의 삶은 피곤한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이 함께 건물의 도면을 살펴보면서 구역을 어떻게 나눌지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시녀가 방문객의 도착을 알려왔다. 잠시 후 프리츠가 안으로 들어왔다.

“프리츠 오빠.”

안으로 들어서던 프리츠는 그레텔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그레텔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분은?”

“전에 말했던 그레텔이에요. 테오르의 약을 만들어준 약제사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공작님.”

그레텔은 얼떨떨한 낯으로 프리츠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프리츠는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는데 그레텔은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왜 저러지?’

그 장면을 의아하게 보던 아스텔은 뒤늦게 프리츠가 꽤 근사한 외모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오빠도 결혼해야 할 텐데.’

정식으로 공작이 되면 새로운 공작부인을 맞이해야 한다.

비슷한 수준의 가문이 남아 있지 않아서 마땅한 상대가 있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혹시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려나?

“아, 그럼 저는 테…… 아니, 황태자 전하께 가보겠습니다.”

그레텔은 남매를 남겨두고 눈치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레텔이 밖으로 나간 뒤 아스텔은 프리츠와 마주 앉았다.

“저택에는 아무 일도 없나요?”

“무슨 일이 있겠어.”

“아버지는요?”

가볍게 대답하던 프리츠는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전히 조용히 지내시지.”

“수상한 점은 없나요?”

“겉으로 보기에는 없다.”

프리츠는 아스텔에게 저택에서 나눴던 대화를 전해줬다.

“별로 믿음이 가지 않네요.”

아버지가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프리츠도 착잡한 말투로 동의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로는 수상한 점이 조금도 없었어.”

정말 이상하네. 아버지가 그렇게 얌전히 지내고 있다니.

“아버지도 수확제에 참석한다는 거죠?”

“그래.”

프리츠는 아스텔의 불안한 표정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의심스러운 일이 있는 거야?”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불안한 기분이 드네요.”

아버지의 이상할 만큼 얌전한 태도와 눈앞에 다가온 수확제.

‘뭔가를 꾸민다면 시끄러운 수확제가 제일 좋은 기회일 텐데.’

하지만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차라리 이참에 아버지를 영지로 보내달라고 할까?

“황후 폐하, 황제궁에서 시종이 왔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녀가 황제궁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무슨 일이지?’

피크닉을 다녀온 날 카이젠은 황후궁에 오지 않았다.

아스텔은 정원에서 대화를 나눈 뒤 그를 만나지 못했다.

젊은 시종이 안으로 들어와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황후 폐하.”

* * *

수확제는 며칠 뒤에 시작되었다.

아스텔은 수확제의 준비로 여전히 정신없이 바빴다. 하루 종일 행사와 관련된 일들을 점검하고 준비하다 보니 정작 수확제 첫날부터 피로가 몰려왔다.

“황후 폐하, 괜찮으시겠어요?”

한나가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는 아스텔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괜찮아. 그래도 오늘은 경기장에 나가봐야지.”

수확제의 첫날엔 야외 경기장에서 행사가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함께 참석하는 날이었지만 대부분은 첫날에는 황후 혼자서 행사의 시작을 알리곤 했다.

“테오르를 준비시켜 줘.”

아스텔은 테오르와 함께 마차를 타고 황궁 밖으로 나갔다.

가는 길에 수도의 중심에 있는 그레텔의 약초 연구실에 들르려고 일찍 황궁을 나섰다.

“어서 오세요,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그레텔이 나와서 두 사람을 반겼다.

“그레텔 이모!”

테오르는 그레텔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안겼다.

그레텔의 약초 연구실은 아직 준비 중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었다.

아래층에는 연구실 등이 있고, 맨 위층에는 그레텔 자신이 머물 방도 있었다.

입구 쪽에는 약초와 물약을 파는 곳도 있다.

“준비가 잘되고 있는 것 같네요.”

아스텔은 연구실을 둘러보다가 그레텔이 쓰고 있는 새로운 약초 책을 보았다.

각 지방의 약초에 관한 설명과 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그린 약초 그림이 딸려 있었다.

아스텔은 그중에 독특하게 생긴 파란 꽃에 집중했다.

“이건 처음 보는 약초네요.”

“독을 해독하는 약초예요.”

그레텔이 대답했다.

“그런 약초가 정말 있나요?”

독을 완벽하게 해독하는 약초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독제는 독약마다 따로 조제해야 한다.

독약에 따라 해독제의 조제법도 천차만별이었다.

해독법이 알려지지 않은 독도 많았고.

“남부 끝에 있는 산맥에서 한 번 봤어요. 가져오지는 못했지만요.”

“저도 나중에 한번 보고 싶네요.”

보글보글 끓고 있는 솥을 열심히 구경하던 테오르가 문으로 달려갔다.

“프리츠 삼촌!”

예복을 차려입은 프리츠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빠?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프리츠는 이제 공작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아직 작위를 완전히 물려받은 건 아니지만 그는 이미 공작님으로 불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정식으로 대신 회의에도 참석했다.

프리츠는 그레텔을 힐끔 본 뒤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에 들르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왔습니다.”

황궁 밖인 데다 그레텔도 있어서인지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잘됐네요. 함께 가면 좋겠어요.”

아스텔은 반가운 미소를 보이다가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물었다.

“아버지는요?”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스텔이 조금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자 프리츠는 얼른 덧붙였다.

“내일 만찬 때는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저택에만 머물며 사람을 별로 만나지 않는 것도 똑같았다.

어차피 이런 곳에서 더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레텔도 함께 가지 않을래요?”

그 말에 그레텔은 조금 당황한 듯이 귓가를 붉혔다.

“아, 저는…… 이곳을 더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요. 대회가 열리는 날에만 가려고요.”

“그래요.”

황후인 자신과 함께 가는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지난 6년간 친구처럼 지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세 사람은 그레텔에게 인사를 하고 야외 경기장으로 향했다.

* * *

아스텔은 수도의 대경기장에 마련된 관람석에 앉았다.

황제와 황후의 관람석은 경기장의 좌석 중앙에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네 개의 기둥이 천장을 떠받들고 있고, 햇볕을 가리기 위한 얇은 천개도 달려 있었다.

황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카이젠은 오늘은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스텔이 자리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황궁 안에서의 행사는 몇 차례 치렀지만 아스텔이 평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관람석에 앉은 사람들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황후를 신기한 듯이 바라봤다.

프리츠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긴장한 것 같구나. 괜찮은 거야?”

“이렇게 시선을 받는 것도 오랜만이라서요.”

이혼부터 재결합까지 이어진 황제 부부의 관계는 평민들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하긴 여러모로 신기한 얘기였으니까.’

이혼당하고 쫓겨났던 황후가 황자를 데리고 돌아왔다는 것만 봐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너를 안 좋게 말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

프리츠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사람들 사이에 도는 소문을 알아본 모양이다.

그럼 황제를 안 좋게 말하는 건가.

“그러게요. 부정적인 시선은 별로 없는 것 같네요.”

아스텔은 행사를 시작하라는 의미로 한 손을 들었다.

군중 사이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테오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고 난간을 붙잡고 서서 아래층을 구경하고 있었다.

“프리츠 삼촌, 저건 뭐야?”

테오르가 퍼레이드를 위해 준비된 곡물 모형을 보면서 물었다.

“수확을 기념하는 장식인 것 같습니다. 같이 가서 구경할까요?”

“응.”

프리츠는 테오르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스텔은 아래로 내려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리를 지켰다.

행사의 시작은 퍼레이드였다.

수확의 신을 기념하는 여러 가지 장식물이 경기장을 하나둘씩 채우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서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벨리안이 다가왔다.

“황후 폐하.”

“무슨 일인가요?”

그는 아스텔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뒤 말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참석하지 못하게 돼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과를 전하려고 이 사람을 보낸 건가.

황제가 참석하지 못하게 됐으니 보좌관을 보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실 것 없다고 전해드리세요.”

“예, 그럼 저는 이만…….”

“벨리안.”

아스텔은 그를 불러세웠다.

“나엔 양에게 지난번 일에 대해 캐물었다죠?”

벨리안은 표정이 변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황후 폐하?”

“모르는 척할 필요 없어요. 나엔 양에게 다 들었으니까요.”

그제야 벨리안의 순해 보이는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나엔이 아스텔에게 전부 털어놓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아스텔의 눈빛을 슬쩍 피하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제가 플로린 양에게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명색이 황제의 보좌관이라는 사람이 플로린 탓을 하는 걸 보니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플로린 양 때문이 아니었겠죠.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조사하려고 한 게 아닌가요?”

벨리안은 부정하지 못했다.

부정할 게 없겠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긴 했…….”

“벨리안.”

아스텔은 전에 없이 엄중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

벨리안은 움찔 놀랐다.

“크로이첸 후작가는 내가 순행에 동행했을 때부터 나와 테오르를 모함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어. 후작 부인은 심지어 나를 죽이려 했고 플로린은 나를 협박하고 황후궁으로 독약을 가져왔지.”

아스텔은 벨리안을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그런데도 내 행동이 과했다고 생각하나?”

“……물론 과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벨리안이 기죽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스텔은 다시 경기장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본으로 장식된 알록달록한 과일들이 가득한 마차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앞으로 내 궁전의 고용인들에게 쓸데없는 말을 캐묻고 다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예, 황후 폐하.”

벨리안은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그래도 공손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 * *

카이젠은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밀린 업무를 끝내고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황후는 아직 경기장에 있나?”

“예, 폐하. 곧 돌아오신답니다.”

카이젠은 빠른 걸음으로 황제궁을 빠져나갔다.

정원으로 피크닉을 나갔던 날 이후, 카이젠은 아스텔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날 연못가에서 아스텔에게 사과를 한 뒤부터 둘 사이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오늘은 함께 나가려고 했는데.’

일이 밀려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카이젠은 일부러 아스텔과 함께 가는 것을 피했다.

자신의 존재가 아스텔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겠지만.’

예전에는 언젠가 아스텔이 그를 받아들여 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때는 아스텔의 감정을 알지 못했으니까.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스텔이 그를 받아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스텔에게 사죄하면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밖에 없었다.

만일 아스텔이 5년 뒤에 떠나길 원한다면…… 떠날 수 있게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녀를 붙잡을 자격이 없었다.

“폐하, 경기장으로 가실 겁니까?”

시종장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카이젠은 짧은 고민 끝에 걸음을 돌렸다.

“황후궁으로 가겠다.”

* * *

수확제의 첫날엔 황후궁도 다른 때보다 바빴다.

황후와 황태자는 대경기장에 나가 있었지만 남아 있는 시녀들과 시종들은 이어지는 일정 준비로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일은 황후궁에서 성대한 만찬이 있을 예정이었고, 모레는 티 파티와 가면무도회가 있었다.

한나는 앞으로의 일정을 손으로 꼽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아스텔이 황후가 된 뒤 처음 맞이하는 대대적인 행사였다.

부족한 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된다.

해가 지고 나자 황후궁은 전보다 더 바빠졌다.

곧 있으면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가 돌아올 시간이기 때문이다.

황후의 거처를 확인하고 돌아 나오던 한나는 복도를 지나가다가 황태자 궁으로 들어가는 시종을 발견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작은 트레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서던 시종이 한나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황태자 전하의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황태자를 시중드는 젊은 시종이었다.

한나는 그가 들고 있는 것을 힐끔 살폈다.

유리잔에 든 음료와 작은 그릇 안에 담긴 과자였다. 대충 봐도 별다를 건 없어 보였다. 너무 바빠서 세세하게 살필 시간도 없었다.

“그래. 얼른 가봐.”

* * *

카이젠은 일을 끝내자마자 황후궁으로 향했지만 아스텔은 궁 안에 없었다.

아직 행사가 끝나지 않아서 그곳에 남아 있다고 했다.

대신 먼저 돌아온 테오르가 자기 방에서 놀고 있었다.

카이젠은 테오르의 방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서 뭔가를 가지고 놀고 있던 테오르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반겼다.

“폐하!”

“그래, 행사 구경은 재밌게 하고 온 거냐?”

“응, 재밌었어요! 커다란 사과랑 요정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카이젠은 테오르를 다정하게 끌어안아 준 뒤 다시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접시 위에 이상한 녹색빛 나는 쿠키가 가득했다.

다른 한편에는 과일잼과 크림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뭐지?”

옆에 있던 시종이 대신 대답했다.

“몸에 좋은 곡식과 약초를 넣은 쿠키입니다.”

곡식과 약초라니.

대충 들어도 맛이 없을 것 같다.

“새로 오신 약제사님께서 황태자 전하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약초를 가져오셨습니다.”

약제사라.

아스텔이 시골에서 살 때 알고 지내던 약제사가 황후궁에 드나든다는 건 카이젠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테오르의 눈 색을 바꾸는 약도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아스텔은 지난 6년간 그녀와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아스텔이 그렇게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그런데 그걸 쿠키에 넣었다고?”

“저녁에 단 음식을 많이 드시면 몸에 좋지 않다고 하셔서……. 대신에 이렇게 약초를 넣은 간식을 드리고 있습니다.”

시종은 송구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카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테오르에게 매일 약을 먹으라고 하면 싫어하겠지.

그래서 나름대로 간식처럼 만들어서 주는 모양이다.

“그런데 쿠키를 가지고 뭘 하고 있는 거냐?”

“제가 쿠키를 만들고 있어요.”

테오르는 작은 잼 나이프로 쿠키 사이에 과일잼이나 크림을 바르고 두 개씩 포개 놓았다.

“이렇게 만들면 돼요.”

“잘 만드는구나.”

동그랗게 겹쳐놓은 쿠키가 앙증맞고 귀여웠다.

‘자연스럽게 먹이려고 놀이를 시키는 건가.’

왜 이런 걸 시키는지도 알 것 같았다.

말이 쿠키지 약초를 첨가하니까 색도 모양도 맛없어 보인다.

이렇게 이상한 쿠키를 그냥 주면 안 먹으려고 할 테니 놀이처럼 가지고 놀면서 먹게 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테오르는 쿠키 사이에 잼을 발라서 쌓는 놀이에 흠뻑 빠져 있었다.

완전히 집중해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쿠키 사이에 달콤한 크림을 발랐다.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인 것 같군.

“이건 누가 생각해 낸 거냐?”

카이젠의 물음에 시종이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즐거워하실 거라고 황후 폐하께서 시키셨습니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군.”

테오르가 쿠키 쌓기에 열중하는 동안 시종은 두 개의 유리잔에 과일 주스를 따라서 가져왔다.

맑은 오렌지색 음료가 신선하고 달달한 향내를 풍겼다.

시종은 한 개의 잔에만 얼음을 넣었다.

얼음이 든 잔은 카이젠의 옆에 놓였다.

“나도 얼음.”

테오르가 자기 옆에 놓은 유리잔을 확인하고 칭얼거렸다.

시종은 난처한 듯 말했다.

“전하께서는 저녁에 차가운 음료를 드시면 안 됩니다.”

“쿠키는 다 된 거냐?”

카이젠은 테오르의 시선을 돌리려고 물었다.

그 말에 테오르는 두 개씩 쌓인 쿠키를 접시에 옮겨 담았다.

“네, 다 됐어요.”

테오르는 먼저 완성된 쿠키를 하나 입에 넣고 오물오물 먹었다.

그러고는 잘 쌓인 쿠키를 작은 접시에 담아 카이젠에게 내밀었다.

“폐하, 드세요.”

카이젠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접시를 건네받았다.

“그래, 고맙구나.”

작은 접시 위에 동그란 쿠키가 달콤한 크림을 담고 두 개씩 붙어 있었다.

테오르는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며 카이젠을 올려다봤다.

카이젠은 테오르가 크림을 발라서 쌓아놓은 쿠키를 하나 집어 먹었다.

그리 달지 않은 부드러운 크림과 바삭하고 고소한 쿠키의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의외로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 * *

아스텔은 해가 진 뒤에야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테오르는?”

“황태자 전하께서는 저녁을 드시고 침실에 계십니다.”

아스텔을 맞이하러 나온 한나가 대답했다.

하긴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 지났군.

“식사와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잠시 남은 일을 끝내고 쉬어야겠어. 내일은 아침부터 바쁠 테니까.”

“아, 저 황후 폐하…….”

“응?”

한나가 조금 난처한 듯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이젠이 서재에 있다고?

평소에는 언제나 테오르와 시간을 보내다가 침실에서 만났는데.

뭔가 할 얘기라도 있는 걸까?

“그래. 알겠어.”

“차를 준비할까요?”

“아니야, 괜찮아. 나중에 다시 부를게.”

아스텔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서재 안에는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여름이 거의 지나서인지 오늘따라 밤공기가 차가웠다.

“아스텔.”

어두운 서재 안에 카이젠이 있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는 황제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폐하?”

아스텔은 피하지도 못한 채 카이젠을 마주하고 섰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어요?”

카이젠은 아스텔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기다렸어.”

“침실에서 기다리시지 않고요.”

정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그날 이후 이렇게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카이젠은 대답 없이 아스텔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 드러난 붉은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동부에 있는 덴츠 성을 당신에게 줄게.”

“네?”

“당신이 그곳에서 평생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덴츠 성은 순행 중에 들렀던 곳이다.

동부의 황궁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성이었다.

아스텔은 그곳에서 카이젠과 춤을 췄었다.

그 성에 딸린 정원에서 카이젠은 그녀를 지키려다 상처를 입었다.

갑자기 그 성을 주겠다니 무슨 뜻인 걸까?

“저보고 황궁을 나가라는 말씀이신가요?”

“5년 후에 가고 싶으면 떠나도 좋다는 뜻이야. 아니, 언제라도 당신이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떠나도 돼.”

카이젠은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나는 당신이 떠나도 평생 재혼하지 않을 거야.”

“…….”

아스텔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테오르를 위해서요?”

새 황후가 들어오면 테오르에게 위협이 될 테니까.

그래서 재혼하지 않겠다는 걸까?

카이젠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당신을 위해서야. 당신이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게 해주고 싶어.”

카이젠은 아스텔을 위해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5년의 기한이 지난 뒤에도 아스텔은 테오르가 걱정돼서 황궁을 떠나지 못할 테니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카이젠은 잠시 복잡한 감정을 담고 아스텔을 직시했다.

“당신에게 6년 전의 일을 보상해 주고 싶어. 아니, 그전부터 당신이 내 곁에 있었던 시간들을 전부 보상해주고 싶어. 그리고 당신의 마음도…….”

담담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힘없이 끊어졌다.

아스텔은 그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알지 못했던 아스텔의 감정에 대해서도 늦게나마 보상해 주고 싶다는 뜻이리라.

아스텔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눈치챘다.

“할아버님이 쓸데없는 말씀을 하셨군요.”

정원으로 피크닉을 나갔을 때 왜 갑자기 카이젠이 사과했는지 의아했었다.

이제 보니 할아버지가 카이젠에게 옛날 일을 말해준 모양이다.

어린 아스텔이 십 년 동안 카이젠을 사랑했다는 것을.

당사자인 카이젠에겐 알리고 싶지 않았던 일인데.

“이곳을 떠난다고 해도 그렇게 호사스러운 궁전은 필요 없습니다.”

“그럼 다른 성을 줄게. 마에른 성이나 원하는 곳을 골라. 원한다면 영지도 줄게. 동부의 어떤 지역이든 당신이 원하는 만큼 줄 수 있어.”

어디든 원하는 곳을 다 주겠다니.

어처구니없을 만큼 대단한 소리였다.

역대 어떤 황후도 그런 식으로 영토를 받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카이젠의 눈빛에는 장난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아스텔은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억지로 농담을 쥐어 짜냈다.

“제가 동부 전체를 원해도 주실 건가요?”

“그래.”

“농담하지 마세요.”

“나는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카이젠은 담담한 목소리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그의 붉은 눈동자가 위험할 만큼 깊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재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도 진심이야.”

“…….”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아스텔은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런 식으로 가깝게 있다가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쓸려서 선을 넘게 될 것 같았다.

“잠시 피곤해서……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다가 실수로 드레스 자락을 밟았다.

아스텔은 중심을 잃고 크게 비틀거렸다.

카이젠이 황급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그는 아스텔을 끌어안듯이 부축했다.

익숙한 체향이 확 끼쳤다.

카이젠의 품 안은 성숙하고 유혹적인 체취와 따스한 온기가 공존했다.

아스텔은 억지로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당신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의사를…….”

카이젠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아스텔을 받쳐주던 카이젠은 창백해진 낯으로 멈춰 서 있었다.

“폐하?”

갑자기 왜 그러는 건가 하고 당황해서 그를 불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카이젠은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폐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