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작위
플로린은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불이 꺼진 방안은 무섭도록 조용했다. 성의 2층에 있는 휴식실에는 알코브라고 불리는 작은 틈이 있었다. 정확히는 벽을 움푹 들어가게 파내고 만든 조그만 비밀 공간이었다.
겉에는 커다란 태피스트리를 걸어놓아서 얼핏 보면 보이지 않는다.
가족들이 옮겨온 이 낡은 성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오래된 성채라서 이런 특이한 구조가 남아 있었다. 태피스트리의 끝을 조금 들치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플로린은 잠시 멈칫했다.
안에 벌꿀 같은 금발을 어깨까지 짧게 자른 여자가 있었다. 친언니인 마리안이었다.
“쉿.”
마리안은 다급히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소리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플로린은 기가 막혀서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며 물었다.
‘언니가 왜 여기 있어?’
‘나도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단 말이야.’
마리안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벽에 난 작은 구멍을 가리켰다.
플로린이 이곳에 온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 작은 벽틈에는 거미줄처럼 이어진 균열들이 있었다. 그 틈새로 반대편 방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반대편에 있는 방은 아버지인 크로이첸 후작의 서재였다.
작은 틈 사이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 이 정도의 일로 황후를 의심할까?”
마리안은 다시 벽틈에 눈을 들이댔다. 플로린도 그 옆에 있는 틈새로 서재를 엿봤다. 어둑어둑한 서재 안에는 아버지와 두 명의 귀족이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황후는 의심하지 않으셔도 레스턴 공작은 의심하시겠지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내무대신이었다. 두 자매는 그들의 말소리를 열심히 들었다.
“너무 허술하지 않소? 황제 폐하께서 의심하실지도 모르는데.”
후작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킬 일은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로서는 조금이라도 신뢰 관계를 깨뜨릴 수 있다면 좋은 것이지요.”
플로린은 눈가를 찡그렸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 안 될 텐데.’
지금은 가족 모두가 몸을 사릴 때였다. 플로린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뜻은 달랐다.
지위를 잃고 수도에서 추방당했지만 아버지인 크로이첸 후작은 아직도 대신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 낡은 성채로 거처를 정한 것도 그래서였다. 다 쓰러져 가는 성채였지만 이곳은 후작가의 남아 있는 영지 중 수도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었다.
“백작의 일은 어떻게 됐지?”
“그쪽도 잘 되고 있습니다.”
“흠…… 전에도 몇 번 말해봤지만 에클렌 백작은 황후의 일에 몹시 미온적이었는데.”
크로이첸 후작이 자신 없이 말하자 내무대신이 곧바로 반박했다.
“백작은 황후와 황자에게는 유감이 없지만 레스턴 공작을 증오합니다.”
내무대신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작을 없앨 수만 있다면 백작은 무슨 짓이든 동참할 겁니다.”
“에클렌 백작이 레스턴 공작을 혐오하긴 했지.”
크로이첸 후작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이 말했다.
“과거에 둘이 무슨 원한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나도 그렇게 들었네. 실제로도 사이가 안 좋았고.”
“그렇습니다. 백작은 절대 공작의 편을 들지 않을 겁니다.”
내무대신의 대답에 또 다른 귀족이 말을 받았다.
“백작의 아들은 황후의 곁에 있습니다. 여차하면 써먹을 데가 있을 겁니다.”
플로린은 마리안과 함께 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이곳에 온 뒤부터 아버지는 딸들에게 자신의 일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다. 가문이 이런 처지가 된 것은 전부 아내와 딸들 탓이라며 가족들과 선을 긋고 지냈다.
‘남 탓을 하면 속이 편한 법이지.’
그들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재에 있던 아버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귀족들도 아버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날이 밝기 전에 다시 수도로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서재가 텅 비고 난 뒤, 플로린은 벽 틈에서 빠져나오면서 언니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말한 계획이라는 게 무슨 얘기인지 들었어?”
“황제 폐하와 황후를 갈라놓기 위한 가벼운 계획이었어.”
마리안은 플로린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설명했다. 플로린은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황제가 그런 멍청한 수법에 넘어갈 리가 있나. 애초에 그렇게 허술한 암살 시도가 세상에 어딨다고?
플로린은 기가 막혀서 소리를 낮춰야 하는 것도 잊고 언성을 높였다. 마리안도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지금의 아버지로서는 방법이 별로 없으니 그런 시도라도 해본 거겠지.”
언니의 짧게 잘린 머리카락이 플로린의 시선에 들어왔다. 수녀원에서 고생한 덕에 마리안은 전보다 조심스러워졌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 여자가 몰락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대신 아스텔 황후에 대한 격심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
“다프네가 황궁에 들어갔잖아. 황제 폐하는 그 애를 먼지 보듯 하신대.”
“다프네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사실 지금의 황제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 리가 없었다.
마리안은 짜증스러운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엔은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래?”
“그 애한테도 별로 기대할 게 없는 것 같아.”
플로린은 벨리안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에게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 * *
극장에 나갔던 날사고가 있었음에도 황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게 흘러갔다.
단지 변한 게 있다면 황궁 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소문은 분분하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황후 폐하와 공작님께서 황제 폐하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공작님께서…….”
한나가 어두운 표정으로 아스텔에게 보고했다.
“황자님을 새 황제로 세우기 위해 황제 폐하를 죽이려고 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닌데.”
아버지는 실제로도 그런 소망을 품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절대 아버지가 한 짓이 아닌데.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소문이 나도는 걸 보면 역시 누가 작정하고 퍼뜨리는 모양이다.
한나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시종들을 단속해서 그런 소문이 퍼지지 않게 막겠습니다.”
“다른 궁은 우리가 막을 방법이 없지. 황후궁 안에만 나돌지 않게 해.”
다른 궁은 카이젠이 시종장을 시켜서 어느 정도 막아줄 것이다. 카이젠도 그런 소문을 의식하고 있을 테니까.
사고가 났던 날 밤. 아스텔은 카이젠과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눴다. 카이젠은 불안해하는 아스텔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나지막하고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
아스텔은 침실 안에서 그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새삼 카이젠이 강인한 남자라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날렵한 근육으로 감싸인 단단해 보이는 몸은 어지간한 일에는 끄떡도 없을 것처럼 강인해 보였다.
이 남자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이 들어도 아스텔은 애써 미묘한 분위기를 몰아냈다. 하지만 카이젠과 함께 있으니 안심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카이젠은 조심스럽게 몇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스텔.”
그가 아스텔의 창백한 뺨과 입술을 위로하듯이 가볍게 매만졌다. 따뜻한 손길이 귓가에 닿았다.
“예, 폐하.”
아스텔은 그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며 미소를 지었다.
“저도 폐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날 밤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좀 더 편안하고 다정한 온기가 감돌았다.
정작 황궁 안에 황후가 황제를 죽이려 했다는 괴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지만.
사고가 난 지 닷새째 되던 날. 황제궁에서 시종장이 직접 찾아왔다.
“황제 폐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아스텔은 시종들이 내려놓는 상자를 보면서 가만히 옛 기억을 더듬었다. 전에도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예전에도 카이젠이 여러 차례 선물을 보냈지만 한 번도 기분 좋게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카이젠이 뭘 보내든 간에 전부 짜증스럽기만 했었지. 하지만 이번 선물은 그렇게 불쾌하거나 당혹스럽지 않았다.
카이젠이 왜 이런 선물을 보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소문을 불식시키려는 거겠지.’
시종이 커다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희귀한 황금색 진주로 만들어진 목걸이와 사파이어 귀걸이 등 온갖 다채로운 보석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쓸지 고민될 만큼 커다란 연녹색 다이아몬드도 있었다. 간단하게 컷팅된 다이아몬드는 잘 익은 자두보다 조금 작은 크기였다.
진짜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 거지? 목걸이나 머리핀으로 만들면 너무 무거울 것 같은데.
“대단하구나.”
마침 함께 있던 아버지 레스턴 공작이 연녹색 다이아몬드를 집어 들며 감탄했다.
“이건 황가의 가보 중에 하나야. 일개 황후에게 주기는 아까운 보석인데.”
일개 황후라니.
황후는 제국 여성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신분인데. 거리낌 없이 황후를 낮춰보는 아버지의 말투가 황당할 정도였다.
공작은 금진주로 만든 목걸이도 값을 매기듯이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저런 소리를 듣고 나니까 이쪽에서도 좋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아스텔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물었다.
“우리 영지의 재정이 어렵나요?”
‘아버지, 돈 필요하신가요?’ 하는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의 담담한 목소리에 담긴 조소를 읽어내고 불쾌한 낯으로 보석을 내려놓았다.
“저택에도 자금은 충분히 있다.”
아스텔은 형식적인 감사 인사를 하고 시종장을 내보냈다.
보석도 치워놓고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지난번 일 때문에 오신 건가요?”
“그럼 내가 무슨 일 때문에 왔겠느냐?”
“그야 모르죠. 아무 일도 없어도 매일 황후궁에 오셨잖아요.”
황후가 된 초기에는 거의 매일 들어와서 테오르를 귀찮게 했으면서. 아버지는 지금도 간간이 황궁에 방문했다. 요새는 몸을 좀 사리느라 그렇게 자주 오지는 못했다만.
레스턴 공작은 할 말이 없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찻잔만 들이켰다.
“지난번 사고와 관련해서 안 좋은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건 들었겠지?”
“그 일은 황제 쪽 귀족들의 짓이겠죠.”
“황제의 짓은 아닌 것 같으냐?”
“아니에요.”
아스텔은 한쪽으로 치워놓은 보석 상자에 다시 눈길을 줬다.
“저걸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세요? 황제 폐하는 저와 테오르를 아끼고 계세요. 우리 가문을 없애려고 하실 리가 없잖아요.”
“그건 모를 일이지. 너와 테오르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제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황후와 후계자만 있으면 되고 불필요한 외척은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아스텔은 잠시 대답이 없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황제 쪽 귀족들은 좀 포섭해 뒀나요? 우리 편이 된 사람들은 누구예요?”
“꽤 많다. 우선 루츠 백작과…….”
레스턴 공작은 손가락을 꼽으며 몇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아스텔도 들어본 대신들이 몇 명 있었다.
“너는 어떠냐? 에클렌 백작이 다녀갔다면서?”
“그 사람은 저를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의심스러울 만큼 호의적이구나.”
“어머니와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제게도 호의적인 거겠죠.”
찻잔을 내려놓던 공작이 슬쩍 멈칫했다.
“네 어머니와 가깝다니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
“외할아버님께 들었어요.”
“그 늙은이가 그런 얘기까지 했느냐? 하여간 노인네가 주책이군.”
공작은 손녀딸한테 무슨 그런 얘기를 하냐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소린가요?”
아스텔이 순진하게 질문하자 레스턴 공작은 불쾌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안 될 게 뭐가 있겠느냐? 둘이 가까웠다고 하던데. 뭐, 결혼 전에야 무슨 일이 있었든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의외로 관대한 소리였다. 아버지라면 공작 부인은 흠결 없는 정숙한 과거를 가져야 한다는 그런 더러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것 같았는데.
에클렌 백작이 젊은 시절 억울하게 쫓겨났었다는 게 떠올랐다.
‘그것도 느낌상으로는 딱 아버지의 짓 같았는데. 역시 아닌 걸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아버지는 예전에 에클렌 백작의 이름을 들었을 때 몹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불필요한 잡담은 그만하죠. 안 그래도 아버지를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스텔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똑바로 보며 본론을 꺼냈다.
“황제의 대신 중 우리 가문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몰아내 주세요.”
“대신들을?”
공작은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아스텔은 차갑고 냉혹한 표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언제까지 방어만 할 수는 없어요. 그쪽에서 계속 우리 가문을 노린다면 우리도 보복해야죠. 아버지도 황제와 그쪽 귀족들 때문에 계속 불안해하고 계시잖아요.”
“황제가 가만히 있겠느냐?”
아스텔은 깊은 물처럼 어두운 눈빛으로 그를 직시했다.
“폐하께서 아버지를 노린다고 해도 우리가 선수를 쳐서 황제 편인 대신들을 없애버리면 되잖아요.”
“없애라고?”
“말 그대로예요. 저쪽에서 먼저 독을 쓰고 화약도 썼으니 우리도 똑같이 하지 말라는 법은 없죠.”
독을 쓰든 뭘 하든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없애라는 뜻이었다.
“…….”
레스턴 공작은 새삼 아스텔이 아버지인 자신을 많이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연녹색 눈과 백금발도 자신을 닮았지만 특히 이런 성격은 자신에게서 물려받은 게 분명했다.
공작은 아스텔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아내인 제클린을 나름대로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를 차지하는 건 꽤 험난한 과정이었다.
제클린은 어리석게도 하찮은 부관 따위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공작인 그가 남몰래 마음을 표현해도 무시하기만 했다.
‘그런 모자란 면은 딱 아스텔이 물려받았지.’
하지만 다행히 아스텔에겐 아버지인 그를 닮은 냉철하고 현명한 머리도 있었다. 그는 제클린을 차지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황후가 된 딸과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았으니 후회할 일이 없었다. 비록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몇 가지 강제적인 수법을 쓰기는 했지만. 어리석은 후작 영애가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레스턴 공작은 전도유망한 젊은 공작이었다. 그 하찮은 부관을 쫓아버리고 후작 영애의 약점을 잡아서 결혼을 강요하는 것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공작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우선 황제의 근처에 제 조카를 밀어 넣은 내무대신부터 없애주마.”
* * *
아스텔은 황제의 궁전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갔다.
긴 회랑의 양옆으로 황궁의 정원이 보였다. 지나다니던 관료들이 황후를 발견하고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황궁에 돌아온 지 벌써 꽤 시간이 지났지만 이 길을 걸어간 건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아스텔은 카이젠을 만나러 간 적이 별로 없었다. 찾아가지 않아도 카이젠이 매일 저녁 황후궁으로 오니까 굳이 만나러 갈 필요가 없었다. 황제궁에 다다르자 중년의 시종장이 놀란 얼굴로 달려 나왔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시종장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였지만 그의 주름진 눈가에는 놀랍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스텔이 직접 찾아온 게 무척 의외인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아스텔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린든 경을 접견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 방문하겠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는데.”
당연히 약속도 없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아스텔은 미리 카이젠에게 찾아가겠다고 언질을 보냈다.
“린든 경께서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다며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급한 일이라.
지금 급한 일이라면 지난번 폭파 사고에 관한 일인 걸까?
다행히 오래 기다릴 일은 없었다. 잠시 후에 린든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아스텔을 발견하고 반가운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황후 폐하.”
“린든 경, 수고가 많으시네요.”
아스텔의 친절한 태도에 린든은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 지난번 일로 사죄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전부 제 불찰이었습니다. 송구합니다.”
린든은 극장에 나갔던 날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개의치 말아요.”
황제의 마차가 가는 길에서 폭탄이 터졌으니 근위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부주의한 일이긴 했다만.
그래도 그의 잘못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난간 틈새에 있던 조그만 폭약은 발견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사실 별로 위험하지도 않았고.
“아스텔.”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카이젠이 나타났다. 아스텔의 목소리를 듣고 기다리지 못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아스텔은 그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제가 정무를 방해한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니야. 할 얘기는 다 끝났어.”
카이젠이 따라오라는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텔은 그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갔다. 방금 이곳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짐작이 갔다. 문이 닫힌 뒤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물었다.
“지난번 사고에 관한 일이었나요?”
“그래.”
카이젠은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화약을 조사해서 출처를 알아냈어.”
“빨리 알아내셨네요.”
“어려울 것도 없지. 어차피 의심할 만한 사람은 몇 명 안 되잖아.”
하긴 용의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래도 무척이나 빠른 일 처리였다.
“사실 저도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부탁?”
“선대의 조세 기록을 살펴봐도 될까요?”
“조세 기록을?”
황궁의 지하 서고에는 황궁의 정무 기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당연히 각 지역의 조세 기록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자료들은 황제의 허락 없이는 열람할 수 없었다.
“아, 그래. 당신 아버지의 일 때문에 필요하다고 했었지. 그때는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군.”
카이젠은 지난번 대화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레스턴 가문의 영지와 조세 수입에 관한 기록은 이미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흠잡을 데가 없었어. 수백 년간 동전 한 푼도 잘못된 게 없더군. 그런데 그걸로 뭘 어떻게 하려는 거야?”
카이젠도 레스턴 가문을 처벌하려고 황궁 서고에 있는 서부 영지의 기록을 몰래 조사했었다.
조세 장부라는 게 실수로라도 조금씩 틀릴 수 있는 건데, 레스턴 가문의 기록은 티끌만큼도 잘못된 부분이 없었다.
너무 완벽한 기록이라 존경스러울 정도라며 행정 관료들이 몇 번이나 감탄을 늘어놨었다.
아스텔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가문의 비밀인가 보군.”
화를 내려나 싶었지만 다행히 카이젠의 얼굴엔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고 서운한 낯을 했을 텐데. 두 사람 사이에 나름대로 신뢰 관계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가문의 비밀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비밀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이걸 아는 건 아버지 레스턴 공작밖에 없었다. 아스텔이 이 비밀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카이젠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테오르는?”
“궁 안에서 공부하고 있지요.”
카이젠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그래. 세르벨을 북부에 보내야 할 것 같아.”
“무슨 일이 생겼나요?”
“심각한 건 아닌데. 그래도 주의할 필요가 있으니까. 임시로 다른 교사를 구하는 게 좋겠어.”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카이젠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세르벨도 떠나고 당분간 밖에 나가지도 못할 테니 테오르가 많이 심심해하겠군. 위로라도 해줄 겸 인형극단을 불러서 보여줘야겠어.”
예전에 광장에서 인형극을 봤던 일이 떠올랐다.
카이젠은 그 인형극단을 테오르에게 보내줬었다.
“테오르가 정말 기뻐할 겁니다.”
테오르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스텔은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카이젠을 올려다봤다.
사실 원래 이곳에 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걸 말하려니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만.
“제일 중요한 내용을 빠뜨렸네요. 보내주신 보석들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황제의 선물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를 하러 오는 게 예의였다.
그전까지는 이런 예의를 지키지 않고 그냥 시녀만 보냈던 것 같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의 말에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아스텔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마음에 들었어?”
“제게 과분한 것들이었습니다.”
“당신에게 과분한 건 이 세상에 없어.”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부끄러울 만큼 애정이 가득한 말이었다.
아스텔은 조금 놀란 눈빛으로 카이젠을 주시했다. 저렇게 민망한 소리를 저토록 당당하게 하다니. 카이젠도 그걸 느꼈는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렸다. 자기가 말하고서도 부끄러운 모양이다.
아스텔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보석들을 구경하면서 일개 황후에게 주기는 아깝다고 말하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사실 그게 객관적인 평가일 것이다.
애정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고 했나.
아스텔은 카이젠의 눈빛을 피하며 몸을 돌렸다.
“그만 돌아가 봐야겠네요. 테오르가 수업을 끝내고 기다릴 겁니다.”
카이젠은 조금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애써 가볍게 말했다.
“그래. 저녁에 찾아갈게.”
아스텔은 밖으로 나왔다. 이런 편안한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다만. 카이젠과의 부드러운 관계에 익숙해지는 것은 조금 두려웠다.
* * *
테오르의 핑계를 대고 돌아왔는데 정작 황후궁으로 돌아왔더니 테오르는 정원에 나가서 놀고 있었다.
“시녀와 함께 북쪽 정원으로 나가셨습니다.”
“거기까지 갔어?”
아스텔은 한나의 말을 듣고 놀랐다.
동쪽 정원은 황후궁의 끝에 있었다.
“근처 정원은 익숙해서 새로운 곳에 가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하긴 늘 황후궁에 갇혀 있으니 심심할 만도 했다만.
테오르는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됐지만 활달하고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하필이면 얼마 전에 극장에 데리고 나갔다 와서 더욱 답답한 기분을 느끼는 모양이다.
아무리 끝이라도 황후궁에 속한 곳이었으니 위험할 일은 없다만.
“그럼 이참에 나도 동쪽에 가봐야겠어.”
아스텔은 남은 업무를 정리해 두고 밖으로 나섰다. 한나는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길잡이까지는 필요 없었다. 아스텔은 아름답게 꾸며진 화단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갔다.
익숙한 근처 정원을 지나자 조금 낯선 풍경이 나타났다. 새삼 황후궁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에 온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낯선 곳이 있다니.
처음 보는 연못가를 지나는데 풀숲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게 아니야!”
날카로운 말투에 아스텔은 걸음을 멈췄다.
풀숲으로 가려진 화단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엔이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비웃듯이 대답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는 이미 황후 편이 됐잖아.”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지? 처음 듣는 음성인데.
“나를 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나엔의 목소리는 흡사 울먹이는 것처럼 들렸다. 당황하고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너는 황후를 곁에서 섬기니까 할 수 있잖아? 나를 이곳 시녀로 넣어줘.”
시녀를 들이는 건 황후의 권한이었다.
그걸 왜 나엔에게 부탁하는 걸까.
“내가 어떻게…….”
나엔이 말끝을 흐리자 낯선 목소리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어떻게든 해봐! 황제궁에서는 황제 폐하를 만나볼 기회가 없단 말이야.”
황제를 볼 수 없어서 황후궁에 오겠다니.
아스텔도 당혹스러웠다.
물론 카이젠은 황제궁보다 황후궁에 더 많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기가 막힌 소리였다. 한편으로는 창피하기도 했다.
아스텔은 풀숲을 향해 침착하게 물었다.
“나엔 양, 무슨 일이지?”
그 말에 둘의 대화가 뚝 끊어졌다.
다급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 황후 폐하.”
풀숲에서 나온 나엔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멈춰 섰다.
그녀의 뒤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시녀가 보였다.
그 시녀도 아스텔을 발견하고 놀라서 굳어져 있었다.
“저쪽은 누구지?”
“아……. 그, 그게…….”
나엔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스텔은 붉은 머리 시녀에게 다가갔다.
“이곳 시녀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디 소속된 시녀냐?”
“황제궁에서 황제 폐하를 모시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를 모신다니.
대부분은 어느 궁에 소속되었다고 말하는데 조금 특이한 표현이었다. 붉은 머리의 시녀는 마리안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에 갸름한 얼굴. 조금 싸늘해 보이는 미인이었다.
황후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시녀라기에는 몹시 도도하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아스텔은 이 시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귀족들이 황제의 곁에 보낼 젊은 시녀를 데려왔다고 했었나. 아마도 이 시녀가 그 주인공인 모양이다.
아스텔은 담담한 눈길로 그녀를 직시했다.
황제궁에서야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지만 황후궁에 와서 시끄럽게 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황제 폐하를 섬기는 시녀가 무척 한가한가 보군. 이런 시간에 허락도 없이 황후궁에 들어온 걸 보면 말이야.”
붉은 머리 시녀는 아스텔의 말을 듣고 얼굴을 치켜들었다. 허락 없이 황후궁에 들어와서 황후 앞에서 질책을 들었는데도 당황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아스텔을 꼼꼼히 살피듯이 바라봤다. 구슬같이 반짝이는 눈동자가 아스텔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스텔은 기가 막혔다.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는 거냐? 황제궁의 시녀가 왜 이곳에 와 있지?”
시녀는 탐색을 마치고 만족스러운 고양이처럼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부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아스텔은 순간 자신이 황궁 예법을 잘못 알고 있는지 잠시 의문이 들었다.
“친구라고?”
아스텔은 나엔에게 시선을 줬다. 나엔은 얼음처럼 굳어져서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대충 봐도 친해 보이진 않았다.
“예, 황후 폐하. 나엔과 저는 어릴 때부터 친했습니다.”
순간 아스텔은 이 레이디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한 6, 7년쯤 전에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분명 뷔르겐 자작 가문의 방계 친척 중 한 명이었는데.
“레이디 다프네로군. 나엔 양보다는 나이가 더 많지 않나.”
당시 기억을 되짚어보니 지금 대충 성년쯤 되었을 듯했다. 소녀 시절과 인상이 많이 달라져서 빨리 떠올리지 못했다.
예전에는 좀 더 귀여운 인상이었던 것 같았는데. 하긴 그때는 성년이 되기 전이었지.
아스텔이 알기로 이 레이디는 내무대신의 조카였다. 귀족들이 카이젠의 후비로 만들려고 황궁에 데려온 여성이기도 했다.
그래서 황후궁에 시녀로 들어오고 싶다고 나엔을 들볶고 있었던 모양이지.
다프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언니처럼 챙겨주고 있답니다.”
언니처럼 챙겨 준다라.
방금 소리치며 윽박지르는 것 같았는데.
“나엔 양은 나를 보좌하는 여관이야. 사석에서는 편하게 대해도 좋지만 황궁 안에서 일개 시녀가 언성을 높일 상대가 아니다.”
시녀와 여관은 달랐다.
시녀는 말 그대로 시녀지만, 여관은 황후를 보좌하는 비서나 서기관 같은 일종의 하급 관료였으니.
직책부터 차이가 있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다프네는 살살 웃으면서 말했다.
“오래전부터 친밀하게 지내던 사이라 잠시 예절을 잊고 허물없이 대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이 레이디를 보고 있으니 플로린의 언니인 마리안이 생각났다.
마리안은 밉살스럽긴 해도 조금 맹한 구석이라도 있었는데.
다프네는 마리안보다 훨씬 더 뻔뻔했다.
“황제궁의 시녀라면서 누구 허락을 받고 이곳에 들어왔지?”
다프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황한 낯을 가장하며 더듬거렸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저…… 제가 아직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허락을 받고 들어와야 하는 줄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들어왔다가 들키면 저렇게 말하려고 미리 연습한 듯했다.
“황궁에 들어온 지 한 달도 넘은 것으로 아는데. 그동안 내내 마음대로 다른 궁에 들어갔었느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아직 예법에 어두워서…….”
다프네는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대답했다.
“낮에는 허락 없이 방문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아스텔은 진심으로 이 레이디가 뭘 믿고 이렇게 건방지게 행동하는 건지 궁금했다.
‘자기 백부를 믿고 이러는 걸까?’
하긴 내무대신은 현재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아스텔을 바라보는 눈빛이 약간 적대적이었다.
“예법도 모르는 시녀를 황궁 안에 둘 수는 없지. 시종장에게 말해서 황궁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겠다.”
“황후 폐하, 저는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고 황궁에 들어왔습니다.”
다프네는 갑자기 처량한 표정을 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황제 폐하께 잘못을 아뢰고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다프네의 말은 자신은 황제가 고용한 시녀니까 황후에게 해고당할 수는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 앞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눈길을 끌어보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뻔뻔한 것도 이 정도면 존경스러울 정도로군.’
반면 옆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나엔은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고 보기만 하는데도 기절할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실 황제궁은 말 그대로 황제의 궁전이라 그곳에서 일하는 시종과 시녀들은 전부 황제가 직접 임명했다.
물론 황제는 시녀들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엔 너무 바빠서 대부분 시종장이 알아서 처리했지만.
어쨌든 황제의 시중을 드는 이들이니 황후라고 해도 허락 없이 마음대로 내보낼 수 없었다.
다프네는 그걸 믿고 저러는 듯했다.
“아니. 정무로 바쁘신 황제 폐하를 이런 사소한 일로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지.”
아스텔은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황제 폐하께서는 내게 황궁 일에 관한 전권을 맡기셨으니까. 말씀드릴 필요도 없고.”
“네?”
“황제 폐하께서는 일개 하녀들부터 시종장까지 내 뜻대로 임명하라고 허락을 내려 주셨다.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그것도 모르는 모양이야.”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카이젠은 결혼과 동시에 아스텔에게 그렇게 말했다. 황궁 일은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사실 황후가 그 정도로 모든 권한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례적인 일이라 아스텔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제야 다프네의 고운 얼굴이 진심으로 하얗게 질렸다.
“잘못했습니다, 황후 폐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진짜로 쫓겨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태도가 공손해졌다.
사실 아스텔은 이 레이디를 내쫓을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귀족들이 황제에게 들여보낸 시녀를 공개적으로 내치면 황후가 질투심에 트집을 잡아서 내쫓았다고 소문이 분분해질 테니까.
이 거만한 레이디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오늘 일을 말해주고 예법 교육을 다시 시키라고 시종장에게 전해라.”
황궁에는 예법을 가르치는 나이 든 시녀가 따로 있었다.
몹시 엄격한 교사라서 그쪽에서 받는 예법 교육은 군대 훈련을 방불케 한다고 들었다.
다프네도 그걸 아는지 겁에 질린 눈빛이었다.
“……예, 황후 폐하.”
“그만 돌아가라.”
다프네는 입술을 짓씹으며 간신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
쓸데없는 일로 얼굴을 붉힌 기분이 들었다. 아스텔은 다시 정원을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나엔이 아스텔을 뒤따라오면서 사죄했다.
“다프네 언니는 나쁜 사람은 아닌데…….”
나엔은 힘없이 말끝을 흐렸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너무 건방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대충 그런 뜻인 모양이다.
아스텔이 대답 없이 걷기만 하자 나엔이 곁에서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나엔은 주저하다가 다시 말했다.
“다프네 언니는 황제 폐하의 후비가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
아스텔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제국 역사상 후궁을 두지 않은 황제는 거의 없었다.
정식으로 맞아들인 후비가 없으면 가볍게 정부라도 만들어서 곁에 뒀다.
“그래도…….”
나엔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엔은 내심 아스텔을 걱정해 주는 듯했다.
아스텔은 앞서 걸어가면서 말했다.
“저런 불편한 일이 생기면 내게 말해. 나엔 양은 내 책임으로 있으니 무슨 일이든 내가 처리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다른 힘든 일이 있어도 언제든 얘기하고.”
황후궁에서 지내는 게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말한 거였는데 나엔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힘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아스텔이 그녀를 돌아봤다.
나엔은 솔직하게 말했다.
“이곳에 있으면 할 일도 있고 편합니다.”
화를 내거나 불평하는 사람도 없고.
저택에 있을 때는 언제나 큰언니나 어머니의 불평불만을 들어줘야 했고, 아버지와 둘째 언니의 눈치도 살펴야 했다.
그에 비하면 황후궁의 생활은 편했다.
낮에 아스텔의 서류 작업을 돕고 나면 저녁부터는 온전히 자유 시간이었다.
황후궁 안에서는 어딜 가든 뭘 하든 간섭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괜찮다니 다행이군.”
나엔은 성실하고 순박해서 마음에 든다.
아스텔은 먼저 걸어가면서 방금 만난 다프네를 생각했다.
현 내무대신인 뷔르겐 자작은 예전에는 레스턴 가문과 꽤 친밀했다.
그리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자작은 그 시절에도 중간급 관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렇게 아름다운 조카딸이 있으니 이참에 황제의 곁에 엮어주고 싶은 모양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아스텔도 카이젠이 영원히 자신만 바라보면서 늙어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의 결혼은 일단 시간을 정해놓은 계약 결혼이었다.
‘그 계약이 끝나면…….’
사실 그 후에 어찌 될지는 아스텔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떠나도 된다는 확답을 받아놨지만 카이젠이 과연 떠나게 해줄지.
자신이 떠나도 테오르가 무사할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떠날 수 있을까.’
아스텔은 처음과 달리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미래를 생각해야만 했다.
자신이 이대로 황후의 자리를 지켜야 테오르도 무사히 황태자로 살게 된다.
카이젠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대로 황후로 사는 게 좋을 것이다.
‘특별한 일…….’
이 상황을 뒤집을 만한 특별한 일은 카이젠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내다 보면 카이젠은 언젠가 흥미를 잃고 다른 여자를 찾을까.
얼마 전,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도 약간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던 적이 있었다.
계속 이렇게 지낼 생각이냐고.
그 말에는 앞날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결정하긴 해야겠지.’
앞날을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
아스텔은 정원길을 걸어가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카이젠을 받아주든 완전히 거부하고 떠날 준비를 하든 어느 쪽이든 결정을 지어야 한다고.
* * *
내무대신, 뷔르겐 자작은 황궁에서 온 소식을 듣고 혀를 찼다.
“무슨 그런 일이…….”
황궁에서 온 소식은 별다를 게 없었다.
다프네가 황후에게 밉보여서 혼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일이었다.
“황제 폐하의 관심을 끌지도 못하면서 왜 쓸데없는 일로 황후의 눈총을 받아?”
조카 애는 징징대고 하소연을 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자작은 그걸 반쯤 읽다가 찢어서 버렸다.
쓸모없이 걸리적거리는 조카 애가 짜증스러웠다. 황제 부부가 사이가 멀어졌을 때만 해도 다프네가 황제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눈길을 끌기는커녕 황제는 다프네를 황궁의 장식품 보듯 했다.
자작은 크로이첸 가문이 밀려난 뒤 다프네는 황제의 곁에 앉혀놓고 새로운 실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황제와 황후가 곧바로 화해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기대를 걸었던 다프네도 처절하게 실패했고.
결국 자작은 쫓겨난 크로이첸 후작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황제의 눈치만 보고 있는 실정이었다.
“자작님.”
시종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크로이첸 가문에서 밀서가 왔습니다.”
“밀서?”
왜 갑자기 밀서를 보냈지?
후작을 만나고 온 게 며칠 전이었다. 새로 전할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 자작은 의아한 눈빛으로 시종이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편지봉투에 쓰인 인장과 필체는 분명히 크로이첸 후작의 것이었다. 편지를 꺼내서 읽어내려가던 자작은 흠칫 놀랐다. 길게 적힌 편지에는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무대신, 뷔르겐 자작은 그 짧은 편지를 몇 번씩 읽고 또 읽었다.
크로이첸 후작의 편지에는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자기 집안에 배신자가 있다고.
정보가 누설됐으니 지금 당장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없애라는 것이었다.
‘집안에 배신자가 있었다고?’
아니, 그게 누군데?
배신자가 누구인지 그런 자세한 정보는 적혀 있지 않았다.
무척 급하게 쓴 모양이다. 분명히 후작의 필체지만 글자가 약간 불안정하게 번져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기다니…….’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황궁에서 이번 일을 조사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벨리안을 통해서 그쪽의 조사 과정은 충분히 전해 듣고 있었다.
아직 특별하게 드러난 건 없었다. 이미 증거도 다 없앴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공작에게 덮어씌울 준비도 해놓고 있었다. 벨리안은 물론이고 여차하면 근위 기사들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들 황제가 즉위하면서 새로 중용된 기사들이라 대부분 이쪽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크로이첸 후작은 대체 집안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영지를 거의 다 잃고 낙향한 처지라 힘들긴 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주변인들을 더 철저하게 관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자작은 크로이첸 후작의 어리석은 행동에 분통이 터졌다. 신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멍청한 위인이었다. 하긴 아내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인간이니.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찾아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의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후작이 은거하고 있는 성으로 찾아가는 건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아직 대낮이었다. 가는 데만 몇 시간은 걸릴 텐데. 무슨 이유를 대고 밝은 대낮에 낙향한 전 대신을 찾아간단 말인가.
자작은 한참 고민하다가 황급히 수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렌드릭에게 가라! 급한 일이라고 전하고 그자를 저택으로 데려와!”
렌드릭은 화약을 몰래 조달해 준 상인이었다. 자작은 수하가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 * *
자작의 수하는 명령을 받은 대로 상인을 찾아갔다.
렌드릭의 상단은 수도의 작은 지점을 갖고 있었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상단의 주인이 화약을 구해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대신들과의 연줄 덕분이었다.
화약은 일반인들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범죄에 쓰이지 않게 나라에서 생산과 유통을 엄하게 관리하기 때문이다.
렌드릭은 몇몇 대신의 도움으로 국경 지대의 성채에서 쓰이는 화약을 비롯해 몇 가지 불법 무기를 조금씩 빼돌려서 챙겨놓고 있었다.
필요할 때 쓸 수 있게 챙겨놓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직접 하면 위험 부담이 크다. 그래서 만만한 상인에게 맡긴 것이었다.
“주인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자작의 수하는 건물 뒤편에 숨겨져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은 상단의 주인이 확실했다.
“이봐요, 나는 자작님의 명령으로…….”
급하게 말을 내뱉으며 그에게 다가가는데 상단 주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얼음장처럼 굳어져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자작의 수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상단 주인이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미, 미안합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무슨…….”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든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병사들의 검날이 일제히 그를 겨누고 있었다.
* * *
상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황궁의 기사들은 자작의 수하와 상단 주인을 붙잡고 상단의 자료도 전부 가져왔다.
곧바로 자작도 황궁으로 불려갔다.
내무대신 뷔르겐 자작은 황제의 집무실에서 여러 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를 만났다.
내무대신은 창백하게 질린 채 사정 설명을 들었다. 해당 상인이 화약을 빼돌린 게 밝혀졌다. 그 화약은 다리의 사고에 쓰인 화약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무대신의 심복이 그 상인을 만나러 갔다가 체포당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정황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폭파 사건도 그대 짓이겠지?”
카이젠의 차가운 질문에 그는 황급히 부정했다.
“아닙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왜 화약을 빼돌린 상인을 없애려고 했지?”
“없애려고 한 게 아닙니다.”
자작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가끔 그곳에서 몇 가지 생필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택의 명부를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주문을 의뢰하려고 사람을 보냈던 겁니다.”
그 상인과 관련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화약 일로 몇 차례 연락을 보내고 돈도 건넸으니까. 하지만 그게 화약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곳은 상단이었고 언제나 수많은 물건을 취급하니까. 상황을 들켜도 다른 물건 때문에 보낸 돈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 처음부터 여차하면 이런 식으로 변명하려고 상단을 고른 것이었다.
“린든.”
그러나 카이젠은 그 뻔한 변명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예, 폐하.”
“그 상인이 뭐라고 했느냐?”
“화약과 관련된 일은 전부 자작님의 명령에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로 뷔르겐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무대신은 린든에 말을 들으며 기절할 듯 놀랐다.
아니, 그걸 왜 아직도……. 분명히 이번 일이 끝나면 없애라고 했는데?
린든은 자작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증거로 내밀었다.
그 안에는 화약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상단의 하인들도 상단을 수차례 방문해 온 자작님의 시종을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내무대신에게 향했다.
“저는…….”
내무대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른다고? 그대의 인장이 아니란 말인가?”
“제 인장이 맞습니다만……. 어떻게 그게 거기 찍혔는지는 저도 잘…….”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궁색한 변명이었다. 카이젠은 그를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린든은 이미 며칠 전부터 화약의 조달책으로 그 상인을 점찍어 놓고 조사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함정을 판 건 어제 투서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범인이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상인을 해치려고 한다는 내용의 투서였다.
‘그것도 누구 짓인지 짐작이 가는군.’
현 상황에 내무대신을 비롯한 신진 세력이 망하길 바라는 건 딱 한 명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누가 고발한 것이든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카이젠은 그날의 사고를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났다. 모처럼 테오르를 데리고 아스텔과 외출했었는데 그런 일이 생기다니.
자작은 하얗게 질려서 떨기만 했다.
“당장 뷔르겐 자작을 대신직에서 파면하고 감옥에 가둬라.”
“폐하…….”
내무대신은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황제와 주변 신하들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를 위해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그를 변호해 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황제의 기사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내무대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기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 * *
잠시 후 아스텔은 황후궁의 접견실에서 아버지를 대면했다. 내무대신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공작이 황후궁에 방문했다.
“굉장히 쉽게 풀렸네요.”
빨리 끝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쉽게 해결됐다. 허망할 만큼 간단한 결말이었다.
아스텔이 순수하게 감탄하자 공작은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자가 어리석어서 그렇지.”
아스텔은 예전에 몇 차례 만났던 중년의 내무대신을 떠올렸다. 확실히 별로 유능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전에 한 번 만났던 그 사람의 조카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한 가지 궁금한 부분이 있었다.
“크로이첸 가문의 인장은 어떻게 얻으셨어요?”
인장은 가문의 주인이 갖고 있는 것으로 가족들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아스텔도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레스턴 가문의 인장을 써보지 못했다. 만져보지도 못했다.
찻잔을 들던 공작은 아스텔에게 슬쩍 시선을 건넸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흘렸다.
“집안이 망하면 배신자가 생기는 법이지.”
후작가의 시종이나 하인을 매수했다는 소리였다.
“그 상인도요?”
“장사꾼들은 어디에 붙어야 하는지 금방 눈치채는 법이니까.”
상단의 주인은 자기가 선을 댄 대신들이 몰락하는 걸 보고 공작 쪽으로 붙었다는 뜻인가보다.
하지만 아스텔은 순간 아버지의 손이 살짝 멈칫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뭐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공작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뭔가 다른 일이 있다고 해도 별일은 아니겠지.
이번 일은 내무대신 쪽에서 벌인 일이 분명했다.
카이젠도 이미 화약을 조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일은 그냥 범인이 제 발 저리게 만든 것밖엔 없었다.
인장을 훔쳐낸 것도 대수로울 게 없었다.
아버지는 원래 그렇게 남의 수하들을 매수하고 음모를 꾸미는 일을 잘했다.
거의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아스텔이 관찰하듯 유심히 바라보기만 하자 공작은 약간 불쾌한 듯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비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없느냐?”
“고마워요,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이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자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고마운 걸 알면 황자를 좀 제대로 교육시켜라.”
“테오르가 왜요?”
“왜냐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나를 보면 피하려고 하지 않느냐. 외조부도 못 알아보고.”
몇 달째 테오르에게 선물을 안겼지만 여전히 아이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니까 짜증스러운 모양이다.
그럼 선물 따위로 아이 마음을 돌릴 수 있을 줄 알았나.
“테오르가 아버지를 피하는 건 아버지가 매번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하기 때문이에요.”
“선물을 사다 주고 말을 좀 걸었을 뿐인데 그게 귀찮다니.”
레스턴 공작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너무 오냐오냐하면 안 된다. 제가 누구 덕에 무사히 잘 자라고 있는지 알아야지. 어릴 때부터 나와 우리 가문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야 돼.”
“…….”
자기한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라니.
어이가 없었다.
테오르를 납치하고 함부로 다뤘던 일은 다 잊은 건가.
그때의 일을 생각하자 아스텔은 분노가 치밀었다.
테오르의 목에 남아 있던 멍 자국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아스텔은 묵묵히 화를 참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물론 아버지의 도움은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스텔은 공작에게 감사 인사를 하면서 담담하게 덧붙였다.
“저를 도와주시는 김에 이참에 프리츠 오빠에게 작위도 물려주시는 게 어떨까요?”
공작은 멍하니 아스텔을 직시했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스텔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조금 전의 말을 되풀이했다.
“프리츠 오빠에게 작위를 계승해 주고 공작위에서 물러나시라고 말씀드렸어요.”
“……뭐?”
아스텔은 아버지를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의 한쪽에 있는 서랍장으로 걸어갔다.
작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꺼내왔다.
“이게 대체 뭐냐?”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서류를 불안하게 바라봤다.
뒤늦게 현실을 파악한 듯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아스텔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 드리려고 준비해 뒀어요. 읽어보세요.”
그건 프리츠가 가져다준 자료를 토대로 아스텔이 직접 황궁 서고의 자료를 뒤져가며 찾아낸 내용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건 공작이었다.
“이게 뭐냐?”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이 내놓은 서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읽어보세요.”
공작은 불안한 눈길로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영지 세금에 관한 것이었다. 서부에 있는 레스턴 가문의 영토는 엄청난 규모였다.
수 대를 이어 영토를 하사받은 덕에 서부의 대부분이 레스턴 가문의 땅이었다.
주변엔 결혼이나 매매로 얻은 땅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영지 수입이 크다 보니 당연히 세금도 엄청났다. 대영지에는 제국법대로 세금을 부과한다.
반면 일정 규모 이하의 소영지에는 세금을 감면해 준다.
한 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 영주들은 영지 수입으로 낡은 성을 유지하는 것도 벅차기 때문이다.
레스턴 가문은 아버지가 작위를 계승한 뒤부터 영지 수입이 크게 늘었다.
아버지는 황궁에 보내는 세금을 줄이기 위해 그런 특이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영지 수입을 주변의 소영지로 분산시켜서 세금을 줄이는 것.
군소영주들은 대부분 과거 레스턴 가문의 봉신이거나 친척들이었다.
당연히 공작이 뭘 시키든 시키는 대로 따랐다.
대놓고 장부를 조작하다가 서류에 허점을 남기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서류상으로 다른 소영지의 영토였으니까.
그쪽에서 정리해서 보고하면 아무것도 문제 될 일이 없었다.
선대 황제는 지방 영지의 일에 무관심했다.
큰 문제만 없으면 세금 문제 정도는 가볍게 눈감아줬다.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선대 황제의 치세 동안 다른 귀족들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챙겼다.
그렇게 챙긴 돈은 전부 공작 개인의 비밀자금이 되었다.
물론 카이젠이 즉위하고 정계가 불안정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불법 행위를 빠르게 정리해 버렸지만.
잠시 서류를 들여다보던 공작은 아스텔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프리츠도 이 일을 알고 있는 거냐?”
“그럼요. 오빠도 아버지가 물러나길 바라고 있어요.”
눈앞에 들이밀어진 서류보다 그 한마디 말이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아스텔을 바라보는 눈이 충격으로 크게 떨렸다.
레스턴 공작은 이를 악물고 다시 물었다.
“프리츠가 이런 짓에 동의했다고?”
“영지에 숨겨져 있던 자료를 제게 가져다준 사람이 프리츠 오빠예요.”
공작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프리츠가 아버지인 자신을 배신하고 아스텔의 편을 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이다.
공작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테이블에 내던졌다.
“고작 이걸로 나보고 작위를 내놓으라고?”
“오늘 일도 있잖아요.”
“뭐?”
“아버지가 내무대신을 모함했다는 걸 황제 폐하께 알려도 될까요?”
아스텔은 한 가지 더 덧붙였다.
“아, 크로이첸 후작가의 인장을 훔치는 짓도 하셨죠.”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가문의 인장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중죄였다.
“나는 너와 황자를 위해서……!”
참다못한 레스턴 공작이 언성을 높였지만 아스텔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아버지를 바라봤다.
공작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너는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반역죄도 아닌데 황후 자리까지 잃게 될 일은 없지요.”
황제를 죽이려고 했던 일이 밝혀지면 아스텔은 물론이고 테오르까지 위험해지겠지만.
이 정도의 일은 아버지 한 사람만 처형될 것이다.
물론 크로이첸 가문처럼 공작가 자체가 휘청일 테니 아스텔도 큰 피해를 입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러니까 부탁드리는 거잖아요. 작위를 오빠에게 물려주세요. 작위가 없어도 아버지는 편하게 지내실 수 있잖아요.”
“이게 부탁이냐?”
“거래라고 해두지요.”
공작은 아스텔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으로 돌아가겠다.”
“네, 저택에 가서 프리츠 오빠와 작위 계승에 대해 더 논의해 보세요.”
아스텔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공작은 그녀를 죽일 듯이 쏘아보며 서 있었다.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스텔은 친아버지에게서 원한에 가득 찬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태연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테오르가 황태자가 되고 우리 가문은 훗날 황제의 외가가 될 거예요. 뭐가 문제인가요? 전부 아버지가 꿈꾸시던 일이었잖아요.”
아스텔의 말대로 그것은 아버지의 오랜 꿈이었다.
“단지 공작위에 아버지 대신 프리츠 오빠가 있을 뿐이죠.”
그것은 아스텔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공작은 아스텔을 노려보다가 저주하듯 선언했다.
“너는 반드시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거다.”
아스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몸을 돌려서 밖으로 나갔다.
* * *
아버지가 떠나고 나자 황후궁은 다시 조용해졌다.
“황후 폐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안에서 있었던 대화를 전부 들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오늘 일이나 마무리해야겠어.”
정신이 어지러울 때는 차라리 일에 매달리는 게 마음이 편했다.
아스텔은 한두 시간 정도 남은 일을 마무리했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지는 시간이었다.
일을 끝낸 아스텔은 머리를 식힐 겸 테라스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 한편에 테오르와 놀아주고 있는 카이젠이 보였다.
여러모로 폭풍 같았던 일들이 지나갔는데.
평온하게 놀고 있는 테오르와 카이젠을 보니까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엄마!”
테오르가 달려와서 아스텔의 품에 안겼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아스텔.”
카이젠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춘 뒤 아이를 내려놓았다.
“테오르, 잠시 할아버님께 가 있을래?”
테오르는 아스텔과 카이젠을 돌아보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고는 블린과 함께 반대편 정원으로 달려갔다.
아이와 놀아주고 싶지만 지금은 카이젠과 할 얘기가 있었다.
테오르가 사라지자마자 카이젠이 물었다.
“당신 아버지가 다녀갔다지?”
아스텔은 그와 정원길을 걸으며 말을 이었다.
“예, 자작의 일 때문에 찾아왔어요.”
“당신 아버지가 순순히 물러나겠다고 했어?”
“저택으로 돌아가서 프리츠 오빠를 만나고 나면 물러날 거예요.”
프리츠 오빠도 아버지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자기편이 없다는 걸 알면 일단은 후퇴하는 쪽을 택하겠지.
‘훗날 보복하려고 들겠지만.’
아버지 성격이라면 이런 식으로 물러나서 가만히 지낼 리가 없다.
“잘됐군. 당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공작을 안 볼 수만 있다면 어떤 방식이든 찬성이야.”
카이젠의 홀가분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새삼 예전 일들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스텔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말해야 하는 일이었다.
“숲에서 있었던 암살 사건은…….”
“아스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놀라서 시선을 들자 진중한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지나간 일은 신경 쓰지 마. 나는 당신과 테오르가 안전한 게 제일 중요해.”
“…….”
테오르와 아스텔을 위해 과거의 일은 전부 덮어두겠다는 뜻이었다.
아스텔은 문득 숲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둡고 울창한 숲속에서 다쳐서 피를 흘리던 카이젠의 모습도.
그 모든 일을 아스텔 자신과 테오르를 위해 덮어두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안도감과 함께 가슴이 아릴 만큼 죄책감이 밀려왔다.
카이젠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이 말을 돌렸다.
“대신 자리가 둘이나 비었군.”
크로이첸 후작이 쫓겨나면서 국무대신 자리가 비었는데 이제는 내무대신 자리도 비었다.
“하나 정도는 새 공작에게 주는 게 좋겠지.”
“프리츠 오빠를요?”
카이젠의 가벼운 말에 아스텔은 놀라서 그를 돌아봤다.
“그럴 만한 나이가 됐잖아. 서부를 정리하는 일도 아주 잘해냈고.”
과거였다면 프리츠 오빠는 공작위를 계승받지 못했어도 지금쯤 그 정도 지위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얼마 전까지는 적대하던 가문의 새 주인에게 대신 자리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아스텔은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정원길을 걸었다.
해가 기울고 정원의 풀잎이 붉게 물들어갔다.
화단에 피어난 새하얀 꽃잎에도 붉은 노을이 드리웠다.
“아스텔.”
나지막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잡았다.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리자 카이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에게 줄 게 있어.”
“네?”
카이젠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반지였다. 정교하게 세공된 링에 가운데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건…….”
아스텔은 그 보석이 뭔지 알고 있었다. 잊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10살 때 약혼식 날 받았던 그 푸른 보석이었다.
전에는 목걸이였는데?
“당신에게 주려고 다시 세공하게 했어.”
“폐하, 하지만 이건…….”
아스텔은 잠시 고민했다.
이 푸른 보석은 황가에서 신부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혼하고 황궁을 떠날 때 이 보석을 놔두고 떠났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손에 그 반지를 쥐여 줬다. 손가락에 끼워주는 게 아니라 그냥 손안에 건네주기만 했다.
“당신이 가지고 있다가 5년 뒤에.”
그는 감정을 눌러 참는 것처럼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어서 말했다.
“돌려주고 싶으면 그때 다시 돌려줘.”
두 사람이 정한 기한은 5년이었다.
카이젠의 말에는 5년 위에 떠나도 좋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저를 보내주실 건가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보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짤막한 말 안에는 깊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
아스텔은 카이젠이 프리츠를 중용하는 것도 그래서라는 걸 깨달았다.
5년 뒤에도 아스텔이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도록.
카이젠이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내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평생 놓아주지 않을 거야.”
“…….”
아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에 쥔 반지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노을이 저무는 정원 안에서 푸른 보석이 시릴 만큼 맑은 빛을 냈다.
이런 말을 하는 남자를 떠날 수 있을까.
다시는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 * *
레스턴 공작은 공작가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기가 막혀서 분노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스텔과 나눴던 대화를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감히 제까짓 게 나를 협박하다니.’
황후가 되고 황자를 낳고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으니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야.
감히 나를 보고 물러나라는 소리를 하다니.
그래도 공작은 아스텔을 해칠 수 없었다.
테오르는 아직 어리고 그에게 딸은 하나뿐이었으니까.
‘프리츠라면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거야.’
레스턴 공작은 그렇게 한 줄기 희망을 품었다.
“프리츠는 어디 있지?”
레스턴 공작은 아들을 찾아서 서재로 향했다.
위층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그가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프리츠가 복도로 나왔다.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프리츠를 만나서 제대로 얘기를 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자세히 대화를 하고 어쩌고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눈빛에 이미 답이 드러나 있었다.
공작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프리츠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너도 동의한 거냐?”
프리츠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말없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격심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사실 그는 아스텔이 협박을 해도 절대 작위를 내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작위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프리츠까지 제 누이의 편을 들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좋아. 동의해 주마.”
프리츠가 조금 놀란 듯이 그를 쳐다봤다.
공작은 아들에게 조소를 보내며 말했다.
“너도 성년이 된 지 한참 지났으니 작위를 물려받아도 이상할 건 없겠지.”
가끔은 죽기 전에 장성한 아들에게 먼저 작위를 물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공작은 최대한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프리츠는 쉽게 믿지 않았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공작위를 바란다면 내주마. 어차피 언젠가는 네 것이 될 게 아니냐.”
공작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서재 문으로 향했다.
“피곤해서 쉬고 싶구나. 계승식에 관한 일은 나중에 다시 논의하자.”
“…….”
공작은 서재로 들어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아들을 돌아봤다.
“설마 이 집에서도 나가달라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공작은 프리츠를 지나쳐서 자기 방으로 향했다.
가벼운 발걸음이었지만 마음속은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 * *
다음 날 프리츠는 아스텔에게 찾아갔다.
그는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쉽게 동의를 받으셨네요.”
아스텔은 오빠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아버지가 그렇게 쉽게 물러났다니.
적어도 며칠은 프리츠 오빠와 언쟁을 벌일 줄 알았는데.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걸까.’
아버지 성격에 순순히 작위를 내주고 항복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 상황을 뒤집을 만한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나도 의심스럽구나.”
프리츠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절대 그냥 물러날 리가 없지.”
외할아버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다.”
아스텔도 외조부의 말에 동의했다.
프리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함께 저택에 있으니 무슨 일을 하시는지 감시할 수 있겠지.”
“괜찮겠어요?”
이런 일이 있었는데 같은 저택에서 지내는 건 어렵지 않을까.
공작가의 저택이 아무리 넓어도 함께 살다 보면 마주치게 될 텐데.
“어쩔 수 없지.”
프리츠의 눈동자에 약간의 죄책감이 스쳐 갔다.
아스텔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작위를 강제로 빼앗았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 것이다.
비록 문제 많은 아버지이긴 했지만 프리츠는 하나뿐인 후계자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와 유대감이 깊었다.
아스텔은 화제를 전환했다.
“내일 중으로 정식 임명장이 내려질 거예요.”
카이젠은 프리츠를 내무대신으로 임명하겠다고 말했다.
아직 정식으로 발표가 나진 않았지만, 아스텔은 그 얘기를 프리츠에게 전해줬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구나.”
프리츠도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하긴 아버지가 실각했을 때 그런 희망은 다 버렸을 테니까.
프리츠가 돌아간 뒤 아스텔은 외조부와 단둘이 남았다.
“저 애가 벌써 공작이 된다니…….”
후작은 한숨을 내쉬다가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스텔을 발견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저 애를 해치지는 못할 거야. 하나뿐인 후계자인데. 너도 마찬가지고.”
“그렇겠죠.”
아버지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이었지만 가문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프리츠가 죽기라도 하면 공작위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사라진다.
아스텔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카이젠이 레스턴 가문을 우대하는 건 전부 아스텔 덕분이었다.
아스텔이 죽으면 카이젠의 호의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황궁에서 테오르를 지켜줄 사람도 사라진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 다 해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가문의 희망인 테오르를 위험하게 만들지도 못할 것이다.
“오빠가 함께 있으니까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하는지 감시할 수 있을 테고요.”
“그래.”
아스텔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후작은 조금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아스텔도 그렇고 황제도 가급적이면 완만한 방식으로 공작을 없애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테오르의 앞날을 위해서 그러는 거겠지.
외조부가 죄인 신세가 되면 테오르에게는 평생 반역자의 손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스텔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칼렌베르크 후작은 두 사람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레스턴 공작은 두고두고 후환거리가 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참에 그냥 사고로 위장해서 공작을 없애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것도 수상한 소문이 나지 않게 처리하려면 어렵긴 하겠지만.
‘내가 너무 매정하게 생각하는 것 같군.’
그래도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과 프리츠의 친부였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죽인다는 건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