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15. 과거 (15/24)

15. 과거

아스텔은 오후의 업무를 끝내고 황후궁의 복도를 걸어갔다.

궁전 안에는 오랜만에 조용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후작 부부와 플로린 자매는 시골 영지로 떠났고, 나엔은 황후궁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아스텔은 플로린이 석방된 뒤 나엔을 불렀다.

이 소녀는 두 번이나 플로린에게 이용당했고, 이번에는 아스텔의 협박을 받아서 자기 가문을 수도에서 내쫓는 데 일조하게 됐다.

아스텔은 나엔의 생활을 책임지고 싶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일이 잘못되자 플로린은 나엔에게 덮어씌우려고 했었다.

그 모습을 본 다음인지 시무룩하긴 해도 아스텔을 원망하는 기색은 별로 없었다.

“이대로 가족들이 함께 지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큰언니와 어머니도 시골 영지에서 사는 게 좋을 테고요…….”

후작 부인은 당연히 험난한 유배 생활보다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사는 삶을 원할 것이다.

마리안이 수녀원보다 자기 영지에서의 삶을 더 좋아할 거라는 것도 당연했다.

아스텔은 그들이 수도에 돌아오지만 않는다면야 어떻게 살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계속 이곳에 머물러도 좋아.”

당장 가족들에게 돌아가면 원망을 듣게 될 수도 있다.

나엔도 황후궁에 머물기를 원했다.

후작가의 사건 때문에 그 후 있었던 황궁 연회는 조용하고 무난하게 지나갔다.

아스텔은 첫 번째 황궁 행사를 큰 문제 없이 잘 치러냈다. 

그 후엔 모처럼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테오르는 자기 공부방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아스텔은 방해하지 않으려고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걸어갔다.

공부방으로 쓰는 작은 협실은 서재에서 작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책상에 앉아 있는 테오르가 보였다.

테오르는 책상에 앉아서 조그만 손으로 깃펜을 쥐고 뭔가를 받아 적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의젓해 보였다.

아스텔은 테오르가 공부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수업이 끝났는지 세르벨이 책을 덮었다.

테오르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아스텔과 눈이 마주쳤다.

“엄마!”

테오르가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세르벨도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오르. 수업은 다 끝났니?”

“응, 이제 다 배웠어.”

아스텔은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이제 블린하고 놀아도 돼?”

“그래. 대신 시녀에게 말하고 같이 나가렴.”

“응!”

테오르는 세르벨에게 인사를 건네고 정원으로 달려갔다.

“황후 폐하.”

“세르벨 경.”

세르벨은 정중한 태도로 아스텔에게 예를 갖췄다.

이 젊은 귀족 청년에게는 언제나 점잖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린 황자를 가르치느라 많이 힘들지요? 테오르가 말을 안 듣거나 산만하게 굴지는 않나요?”

“아닙니다. 황자님께서는 이해도 빠르시고 집중력도 좋으신데요.”

세르벨의 어조엔 진심으로 감탄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황자님은 정말 영리하십니다. 무엇을 가르쳐 드리든 단번에 이해하시고 진도보다 앞서가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요?”

황자가 수업을 못 따라가고 지지부진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스승은 없겠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칭찬하는 걸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테오르가 요새 공부하는 걸 재미있어하긴 했다만.

“이런 속도면 조만간 수업 과목과 시간을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스텔은 그와 함께 휴식실로 쓰이는 정원 근처의 유리 온실로 향했다.

온실 너머로 테오르가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리벽 옆에 있는 테이블에 마주 앉자 시녀가 두 사람분의 차를 내왔다.

“그러고 보니 지난 황궁 연회 이후로 처음 보는군요.”

세르벨은 정해진 시간에 황후궁에 와서 테오르를 가르쳤지만, 아스텔은 카이젠이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세르벨과 직접 마주치지 않았다.

“연회 중에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어서 직접 인사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세르벨은 미안한 눈빛으로 사죄했다.

말을 그렇게 해도 기사단장이니 연회 중에도 한가롭게 귀족들과 인사나 나누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아스텔도 시녀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귀족들의 인사를 받느라 바빠서 세르벨이 보이고 안 보이는지 신경도 쓰지 못했다만.

“괜찮아요. 경에게도 즐거운 연회로 기억됐으면 좋겠네요.”

세르벨은 아스텔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긴 송구합니다만, 지난번 연회는 제가 본 황궁 행사 중에서 제일 훌륭했습니다.”

아부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세르벨의 눈빛은 차분하고 정중하기만 했다.

아스텔은 그의 진심 어린 찬사를 들으며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행사를 주관하는 거라서 실수가 없게 처리하려고 노력했는데 무탈하게 지나가서 다행이에요.”

세르벨이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텔.”

황급히 시선들 돌린 곳에 카이젠과 벨리안이 보였다.

둘은 유리 온실의 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폐하?”

아스텔과 세르벨은 놀라서 일어섰다.

카이젠이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걸어들어오며 물었다.

“둘이 뭘 하고 있는 거지?”

카이젠의 질문에 아스텔은 침착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세르벨 경과 테오르의 수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카이젠은 세르벨을 돌아봤다. 세르벨도 공손하게 이야기했다.

“황자님께서 수업 진도가 빠르셔서 학습량을 늘리는 것이 어떠신지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카이젠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만스럽게 내뱉었다.

“테오르는 원래 영리해서 누가 가르치든 빨리 배울 테지.”

세르벨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스텔은 순간 끼어들어서 반박할 뻔했지만 신하들 앞에서 황제와 다툴 수는 없어서 참았다.

대신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억지로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테오르가 세르벨 경을 무척 좋아합니다. 테오르가 스승인 세르벨 경을 잘 따르고 세르벨 경도 능숙하게 지도해 주니까 진도가 빠른 것이겠지요.”

“…….”

그러나 카이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세르벨이 미안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카이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벨리안도 그 순간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폐하, 그럼 저도 이만…….”

“그래. 너도 물러가라.”

카이젠은 얼른 다 가버리라는 듯이 대답했다.

둘은 아스텔에게 인사를 건네고 문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카이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폐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왜…….”

왜 세르벨 경에게 화풀이하시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카이젠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또 세르벨 경 때문에 이러는 건가?’

처음에 카이젠이 세르벨을 몹시 싫어하는 걸 보고 아스텔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어봤었다.

혹시 세르벨이 뭔가 카이젠에게 밉보일 일이 있었는지.

그때 카이젠은 자조 섞인 표정으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었다.

‘당신이 나 말고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보니 질투가 났어.’

당시 아스텔은 화가 나기보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었다.

나중에는 카이젠도 다시 자기 말을 번복하면서 세르벨을 테오르의 스승으로 삼아도 된다고 허락해 줬다.

‘알아. 당신이 누구하고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참견할 자격이 없다는 거.’

그렇게 말하던 카이젠의 모습은 지독하게 쓸쓸해 보였다.

그 일 이후로 카이젠은 세르벨에 관해서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테오르가 공부하는 걸 봐도 칭찬만 할 뿐 나쁜 말은 일절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또 왜 이러는 걸까?’

아스텔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카이젠은 뒤늦게 변명했다.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날 수 있으니까.”

대답을 들으니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르벨 경은 테오르의 스승으로 황후궁에 방문하는 건데 이상한 소문이 날 리가 있습니까?”

아스텔의 황당한 표정에 카이젠은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다.

“폐하!”

그때 테오르가 창문 너머로 불쑥 나타났다.

정원에서 놀다가 카이젠을 보고 이쪽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테오르는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테오르.”

마침 테오르의 등장으로 둘의 대화가 끊어지자 카이젠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아이를 구슬렸다.

“저녁 전까지 검술 연습을 할까?”

“응! 그럴래요!”

아스텔은 그를 직시했지만 카이젠은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테오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대체 왜 저러는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왔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서는 카이젠이 테오르와 함께 목검을 들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습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이 시간이 아니면 둘이 어울릴 시간이 없으니까 방해하기도 뭐했다.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한나가 온실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 폐하.”

“한나? 무슨 일이야?”

한나는 기쁜 표정으로 저택에서 온 소식을 알렸다.

“공작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프리츠 도련님께서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 * *

세르벨은 벨리안과 함께 황후궁을 벗어나고 있었다.

정원을 지나 궁전의 입구를 완전히 빠져나온 뒤, 그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잠시 멈춰 섰다.

“벨리안.”

“응?”

벨리안이 멈춰 서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르벨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황제 폐하가 나를 싫어하시는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오늘 일도 그렇고…….”

세르벨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물었다.

“혹시 폐하께서 따로 말씀하신 건 없어?”

“뭐?”

벨리안은 잠시 생각을 더듬는 척 시선을 먼 데로 돌렸다가 태연히 대답했다.

“글쎄, 따로 너에 대해 말씀하신 적은 없는데.”

“그래?”

세르벨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벨리안은 그런 친구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왜 싫어하시겠냐.’

뻔한 이유였다.

폐하와 황후 폐하의 관계는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점점 더 차갑게 굳어가고 있는데, 젊고 잘생긴 기사가 황후 옆에서 얼쩡거리니 기분이 나쁘실 수밖에.

보통의 귀족이라도 이런 상황을 좋아할 남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벨리안은 아스텔을 생각하면서 플로린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석방돼서 시골로 떠나기 전 플로린은 아스텔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 말했다.

‘이건 황후의 함정이에요. 나는 결백해요.’

플로린은 그렇게 주장했다.

뭐, 아주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아스텔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예, 레이디의 말씀을 믿어드리겠습니다.’

당시 벨리안은 플로린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결혼식 날 있었던 독살 시도부터 공작가의 밀서 사건에 이번 일까지 생각하면 플로린의 결백하다는 말은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믿어드리겠다.

‘하지만 제가 레이디의 말을 믿는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황제 폐하는 황후에게 빠져서 다른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내무대신이 데려온 시녀는 황제 폐하의 무관심에 질려서 매일 벨리안만 들들 볶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황후의 음모를 밝혀내라니.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벨리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황후를 감시해서 증거를 찾아주세요.’

‘증거를 찾아봤자…….’

‘황후가 이런 짓도 감수할 만큼 악독한 걸 보세요. 분명 언젠가는 황제 폐하를 해치고 자기 아들을 황제로 만들려고 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플로린은 그렇게 벨리안을 충동질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다 계획적이었던 것인지도 모르죠.’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더욱 은밀한 빛을 띠었다.

‘황후는 일부러 위험한 시기에 황자를 숨겨서 키웠어요. 상황이 진정되고 폐하께서 여유를 찾으신 다음에 폐하의 눈앞에 나타나서 그분의 관심을 끌었죠.’

황후는 나타나고 싶어서 나타난 게 아니라 황태후 전하의 유언 때문에 억지로 찾아온 것이었지만.

벨리안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플로린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약간 불안한 마음은 드는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황제와 아스텔의 관계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아스텔은 자기 오빠를 영지에 내려보내는 등 자기네 가문까지 챙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로이첸 가문이 저렇게 되면서 이제는 황제파 귀족들마저 레스턴 공작에게 다시 빌붙으려 하고 있었다. 벨리안은 균형을 맞추려고 새로운 아가씨를 데려왔지만 황제는 그녀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는 연회가 끝나자마자 새로운 명령을 내리셨다.

테오르 황자님을 공식적으로 황태자로 정할 것이니 준비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러다가 정말 황제 폐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확실히 좋은 징조는 아니야.’

벨리안은 정원길을 걸어가다가 멀리 보이는 황후궁을 힐끔거리며 생각했다.

‘……조금 알아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앞서가는 세르벨을 향했다.

세르벨은 여전히 황제가 왜 자신을 미워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르벨.”

“응?”

“너는 매일 황후궁에 가지?”

세르벨은 황자를 교육시키느라 황후궁에 자주 들락거리고 있었다.

교육이라기보다는 그냥 놀이 수준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황후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와중에 매일 황후궁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이점이었다.

“그런데 왜?”

벨리안은 살살 웃으며 그에게 부탁했다.

“그럼 나 좀 도와줄래?”

* * *

다음 날 오후, 황궁 정원에서 가든 파티가 열렸다.

아스텔은 직접 참석해서 행사를 주관해야 했다.

황궁 연회를 기점으로 아스텔은 계속해서 황궁 행사에 참여했다. 그동안은 황후가 없어서 이런 소소한 행사들은 전부 생략됐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아스텔 자신이 황후가 됐으니 귀찮아도 전부 관습대로 행사를 준비해야 했다.

황궁의 가든 파티는 대낮에 궁전 정원에서 열리는 가벼운 사교 모임이었다.

이번에는 테오르도 함께였다. 무도회나 만찬 같은 행사에 나오는 건 아직 일렀지만, 야외에서 열리는 가든 파티는 테오르도 참석할 수 있었다.

정원에는 밝은 햇살과 신선한 꽃향기가 가득했다. 야외에서 하는 행사라 답답하지는 않았지만 햇빛 때문에 조금 더웠다.

“테오르 뭘 하고 있니?”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아스텔은 화단 옆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있는 테오르를 발견하고 물었다.

테오르는 테이블 위에 작은 인형들을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엄마, 내 새로운 병사들이야.”

자세히 보니 실체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병사 인형들이었다. 물감으로 색이 칠해지고 표정까지 만들어진 게 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정교해 보였다.

“내가 가져왔다.”

옆에 서 있던 레스턴 공작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런 날에도 아이에게 선물을 주면서 환심을 사려고 하다니.

“응. 할아버지가 줬어.”

테오르도 이제는 이 밉살스러운 외조부에게 나름대로 익숙해진 것 같았다. 테오르는 작은 군선에 병사들을 태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웃으며 바라보던 공작이 손을 내밀었다.

“이 할아비가 도와드릴까요?”

테오르는 그의 손을 피해서 인형들을 품 안으로 감췄다.

“싫어요.”

“…….”

공작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여전히 친해지진 못한 듯싶네.

“테오르. 가서 할아버님께도 보여드리렴.”

테오르는 아스텔의 외조부 칼렌베르크 후작에게 달려갔다.

그런 테오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레스턴 공작이 아스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게도 선물을 가져왔다.”

“필요 없어요.”

“뭔지 보기도 전에 거절부터 하는 거냐?”

아스텔의 매정한 거절에 공작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기에 미소는 잃지 않았다.

그가 아스텔 쪽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산맥 너머에서 가져온 귀한 것이다. 사내를 유혹하는 미혼향이지.”

“아버지가 쓰세요.”

“내가 그런 걸 가지고 뭘 하라고?”

레스턴 공작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입술만 움직여서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아스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텔.”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카이젠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카이젠은 궁정 행사에서 입는 황제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평소에도 저 옷은 카이젠에게 맞춘 듯이 잘 어울렸는데 대낮에 보니 더욱 근사했다. 제국의 주인다운 위엄과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카이젠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저러지? 하고 가만히 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피할 새도 없이 그의 손이 아스텔의 뺨에 살짝 닿았다.

아스텔은 흠칫 놀랐다.

“당신 더워 보이는군.”

“아……. 아뇨, 괜찮습니다.”

이렇게 공개된 곳에서 느닷없이 얼굴에 손을 대다니.

주변에 있는 귀족들은 다들 대화에 열중하는 척하면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폐하,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무리하다가 열사병에 걸리겠어.”

햇빛 때문에 좀 덥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닌데.

카이젠은 정원 한편에 있는 작은 파빌리온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서 좀 쉬는 게 좋겠어.”

황제가 이렇게까지 권유하는데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사실 좋고 싫고 말할 겨를도 없었다. 카이젠은 이미 아스텔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파빌리온도 다실이나 휴식실로 쓰이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에 있는 창문을 다 열어놓아서 시원한 공기가 감돌았다. 

중앙에는 간단한 차와 디저트가 준비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날이 덥다 보니 준비된 다과는 차가운 셔벗과 아이스티였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앞에 놓인 멜론 셔벗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거라서 준비시켰지.”

“…….”

아스텔은 멜론 셔벗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적하지 않고 그냥 자리에 앉았다.

단지 궁금하긴 했다.

“제가 이걸 좋아한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카이젠은 조금 당황한 듯이 아스텔을 바라봤다.

옆에 있던 레스턴 공작이 대신 대답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10년 정도 약혼자였던 카이젠은 그렇다 쳐도 갓난아기 때부터 아스텔을 봐온 아버지마저 그녀의 입맛을 전혀 모른다는 소리였다.

‘딱히 놀랍지는 않지만.’

카이젠의 잘생긴 얼굴엔 실망의 빛이 감돌았다.

“당신 이걸 좋아하지 않는군.”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이런 달콤한 디저트는 딱히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카이젠은 여전히 실망스러워했다.

“한나에게 물어볼 걸 그랬군. 방금 전에 당신을 보고 준비하느라 물어볼 겨를이 없어서…….”

“폐하,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스텔은 덤덤한 손길로 도자기 그릇에 담긴 셔벗을 떠먹었다.

차가운 셔벗이 향긋한 멜론 맛을 머금고 혀끝에서 살살 녹았다.

그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벨리안이었다.

“저, 폐하.”

허겁지겁 달려온 벨리안이 카이젠에게 말했다.

“군무대신께서 급히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에클렌이?”

벨리안은 약간 초조해 보였다.

순간 아스텔도 무슨 일인가 하고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에클렌 백작은 군무대신이고 세르벨 경의 양아버지인 사람이다.

‘국경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카이젠은 아스텔을 돌아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지.”

그가 벨리안과 사라지고 나자 파빌리온 안에는 아스텔과 공작만 남았다.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황제는 대체 네가 어디가 좋다고 이렇게 빠져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에클렌 백작은 무슨 일일까요?”

“뭐 북부나 이런 데에 뭔가 소요라도 생겼겠지. 대단한 일은 아닐 게야.”

아스텔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레스턴 공작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크로이첸 가문 일은 잘 처리했더구나. 아주 잘했다.”

“그를 죽이지 않아서 실망하셨을 줄 알았는데요.”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크로이첸 후작은 신흥 귀족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컸던 사람이야. 그를 죽이면 모두에게 큰 원한을 샀을 거다. 수도에서 추방하는 걸로 끝낸 건 잘한 일이야.”

이런 일로 칭찬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칭찬받아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프리츠도 곧 돌아온다니. 다 만족스럽게 돌아가고 있구나.”

아스텔은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오빠에게 부탁했던 것들을 생각했다.

얼른 아버지도 치워버리고 싶다.

프리츠 오빠가 일을 제대로 해줬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엄마.”

잠시 후에 테오르가 아스텔의 외조부와 함께 파빌리온으로 들어왔다.

“아버님.”

레스턴 공작은 칼렌베르크 후작을 향해 반가운 미소를 보였지만 후작은 그를 무시하고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여기 있었구나.”

“예, 더워서 잠시 쉬고 있었어요.”

이제 아버지를 여기 놔두고 할아버지와 테오르와 함께 다른 데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텔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마침 시종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공작님.”

시종이 그를 부르자마자 눈치 빠른 레스턴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잠시 만날 사람이 있어서 가보겠다. 저녁에 다시 얘기하자.”

아스텔은 누굴 만나는 거냐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자리를 빌려서 귀족들과 친분을 다지는 거겠지. 공작은 시종과 함께 정원 너머로 사라졌다.

칼렌베르크 후작은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런 것이 네 아비라니, 무슨 저주를 받았는지 딸이고 손녀고 왜 하나같이…….”

후작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아스텔은 이어지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주라도 받았는지 딸이고 손녀고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남자들과 결혼했다는 소리인가보다.

“어머니가 좋아해서 아버지와 결혼시킨 거라고 하셨잖아요.”

후작은 아스텔이 어머니의 결혼에 대해 물었을 때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먼저 그 결혼을 원해서 허락한 거였다고.

“그래. 네 어머니가 청혼을 받아들였지.”

후작은 그렇게 말했지만 어딘지 찜찜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아스텔은 마침 생각나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에클렌 백작이 알현을 청해서 잠시 자리를 떠나셨어요.”

“누가 알현을 청했다고?”

“에클렌 백작, 군무대신이요.”

세르벨 경의 양아버지인 군무대신이 에클렌 백작.

아스텔은 오래전에 그를 황후궁에 초대했지만 그동안 계속 일이 터지는 바람에 정식으로 그와 만날 겨를이 없었다. 연회 때도 형식적인 인사만 주고받았다.

오늘도 그는 참석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마 카이젠에게 알현을 청한 일과 관련이 있겠지.

‘위험한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황후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계속 시끄러운 사건이 생기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에클렌이 무슨 일로 이런 시간에 황제를 뵙겠다고 했을까?”

옆에 있던 외조부도 조금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치며 물었다.

걱정스러울 만도 했다. 다급한 일이 아니면 평화로운 궁정 행사 중에 굳이 황제를 만나겠다고 급하게 요청할 리가 없으니까.

“글쎄요. 아버지는 북부의 일일 거라고 하더군요.”

반란을 일으켰던 북부 영주는 황제에게 진압당했지만 반란이 집안된 후에도 간간이 문제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수세대를 이어온 대영주 가문이 갑작스럽게 사라졌으니 안정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아스텔로서는 설마 카이젠이 직접 가야 할 만큼 문제가 심각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클렌 백작을 황후궁에 초대했는데 매번 일이 생겨서 아직도 만나보지 못했네요. 이번에 기회를 봐서 불러야겠어요.”

외할아버지는 조금 불편한 눈빛으로 아스텔을 쳐다봤다.

아스텔과 시선을 마주치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길을 돌렸다.

이번에도 또 이런 반응이었다.

외조부는 그에 대해 말을 할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아스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에클렌 백작은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싫어하는 게 아니야.”

어딜 봐도 싫어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불편해하는 걸 보면 그가 외조부에게 엄청 큰 잘못을 했든가.

아니면 외조부가 그에게 큰 잘못을 했든가.

둘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테오르는 두 사람의 대화에 흥미를 잃고 정원에 나가서 놀고 있었다.

아스텔은 잠시 고민하다가 외할아버지를 떠봤다.

“전에 백작을 만났을 때 어머니 얘기를 하더군요. 설마 어머니와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죠?”

그 순간 외조부가 놀라서 시선을 들었다.

그냥 떠보려고 했던 말인데.

외할아버지가 흠칫 놀라는 걸 보고 아스텔도 당황했다.

“그 사람은 어머니와 친구였다고 하던데요.”

“친구였다고?”

“아닌가요?”

“그래…… 둘이 친하긴 했다. 네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절친한 사이였지.”

이번에는 아스텔이 놀랐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절친한 관계였다니.

외조부의 말은 어머니의 결혼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아스텔은 당황하며 물었다.

“설마 어머니가 그분과 연인 사이였다는 말씀은 아니시죠?”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어머니를 어떻게 보는 거냐?”

“저는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해요.”

“그래도 그건 불가능한 얘기야.”

“왜요? 신분이 낮아서요?”

에클렌 백작도 귀족이지만, 당시에는 시골의 이름 없는 기사 가문 출신 청년이었을 테니 후작의 딸과는 격이 맞지 않는다.

“둘이 꽤 친하긴 했다.”

외조부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하지만 그 애는 네 아비를 선택했어.”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었던 거 아닌가요?”

결혼 전에야 친한 관계였다고 해도 결국 어머니에게 청혼한 사람은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아무 문제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긴 하지…….”

“그런데 왜 불편해하시는 거예요?”

부관으로 데리고 있다가 내보낼 때도 문제가 없었고, 어머니와의 일도 문제가 없었다면서 이렇게 불편해하는 이유는 뭘까?

심지어 아버지도 그에 관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제게 똑바로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저도 백작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지 분명히 할 수 있잖아요.”

아스텔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외조부는 언제나 이 얘기를 회피했다.

이번 기회에 이 일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데 파빌리온의 입구에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황후 폐하.”

“세르벨 경?”

기사단 군복을 입은 세르벨이 파빌리온 안으로 들어와서 아스텔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요?”

“이곳에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지난번 연회 때는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 송구했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일 때문에 그랬던 건데요.”

그런 말을 듣고 나서 세르벨 경을 만나니까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세르벨은 외조부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외조부는 별말 없이 간단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보니 외조부는 에클렌 백작의 양아들인 이 젊은 기사단장도 불편한 모양이었다.

아스텔은 오늘 저녁에 황후궁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인지 묻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부친이신 백작님은 잘 계신가요?”

“예, 황후 폐하. 아버님께서는 조만간 황후 폐하를 찾아뵙고, 그동안 황후궁에 방문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사죄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게 사죄하실 것 없어요. 일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았던 것뿐인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조만간 아버님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그래요. 언제든 환영한다고 전해주세요.”

세르벨은 아스텔의 자애로운 미소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스텔은 언제나처럼 흠 없이 우아하고 기품있는 태도를 고수했지만,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불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왜일까?’

그는 처음 봤을 때부터 이 기품있는 분에게 호감을 느꼈다.

황후가 되자마자 황궁에서 내쫓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안타까움과 함께 연민도 품었다.

‘황후가 플로린 자매를 모함해서 크로이첸 가문을 내쫓았어.’

벨리안은 그렇게 말하면서 황후궁에 있는 나엔을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황후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친분을 쌓아달라는 부탁도 했다.

‘황후께서 그랬을 리 없어.’

‘……네가 황후에 대해서 뭘 아냐?’

벨리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세르벨은 그에게 굳이 양아버지와 죽은 공작 부인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딱 잘라서 거절했다.

‘만일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밀정 짓은 안 할 거야.’

* * *

카이젠은 빠른 걸음으로 정원길을 걸어갔다.

파빌리온 안에 아스텔을 남겨두고 황궁 안에 들어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좀 더 일찍 돌아오려고 했는데 에클렌 백작과의 대화가 길어져서 늦고 말았다.

얼른 파빌리온으로 돌아가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귀족들이 그에게 황급히 인사를 건네는 것도 다 무시했다.

정원의 화단을 지나자 저 멀리 파빌리온이 보였다. 활짝 열린 창문 안에 아스텔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세르벨이 있었다.

‘저 녀석은 왜 또 저기 있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그 짧은 순간에 저 녀석이 나타나다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아스텔은 파빌리온 안에서 세르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또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저 녀석은 왜 저렇게 아스텔에게 자주 접근하는 건가. 아무리 테오르의 스승이라고 해도 정도가 과했다.

카이젠은 가까스로 화를 참으며 파빌리온으로 다가갔다.

“폐하.”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스텔. 나를 기다리고 있었군. 늦어서 미안해.”

아스텔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폐하. 세르벨 경이 인사를 하러 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무덤덤한 말투였지만 인사를 하러 온 것뿐이니 또 저번처럼 화내지 말라는 비난이 섞여 있었다.

카이젠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간 세르벨과 아스텔이 함께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이유 없이 짜증을 냈기 때문이다.

카이젠은 분노를 삭이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세르벨을 돌아봤다.

“그래. 황자를 가르치느라 그대가 수고가 많은데 지대로 치하해 주지도 못했군.”

마음 같아서는 한가하냐고 비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자애로운 황제의 모습으로 그렇게 말했다.

세르벨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앞으로도 황자를 잘 부탁하네.”

아스텔이 조금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젠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에클렌 백작은 북부에서 반란의 기미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카이젠은 이참에 세르벨을 북부로 보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테오르의 스승은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겠다.

이왕이면 점잖은 늙은 학자로.

* * *

아스텔은 행사가 끝난 뒤 저녁 무렵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외조부를 다시 만난 건 한밤중이 다 될 무렵이었다.

카이젠이 테오르의 방에 가 있을 때 아스텔은 잠시 기회를 봐서 외조부의 서재로 들어갔다.

외조부는 창가에 불을 밝혀놓고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이제 어머니 일을 말씀해 주세요.”

아스텔은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했다.

“그걸 물으려고 이 시간에 찾아온거냐? 황제는 어쩌고?”

“테오르와 함께 있어요.”

외조부는 한참 동안 아스텔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더 설명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느냐. 네가 대충 짐작하고 있는 대로다.”

외조부는 그렇게 설명하면서 한탄조로 말을 이어갔다.

당시 외조부의 부관이었던 에클렌 백작은 아스텔의 어머니 제클린과 몹시 친밀했다고 한다.

부관은 상관의 저택에 매일 드나들며 일을 돕는다.

당연히 가족들과도 자주 만날 수밖에 없다.

대귀족의 어린 딸과 젊은 부관.

연인이 되기엔 딱 좋은 환경이긴 했다.

“둘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지. 나는 아무래도 불안해서 그를 다른 부대로 내보내려고 했었다. 너도 알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결합은 용인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

하긴 그때는 그랬다.

명문 귀족의 딸과 시골 기사의 아들은 절대 결혼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전투 중에 큰 실수를 했다는 게 밝혀졌고…… 나는 그를 다른 곳으로 내쫓았다.”

아스텔은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외조부가 왜 그렇게 그를 불편해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잘못이 아니었나요?”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랬다.”

외조부는 간결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 해에 국경에서 소규모 접전이 있었다. 대단한 전투는 아니었다. 국경의 이민족들이 잠시 분란을 일으켰을 뿐이니까.

그러나 쉽게 끝날 거라고 여겼던 전투는 예상과 달리 소소한 피해를 내면서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부관이었던 에클렌이 전투 중에 명령서를 잘못 전달하는 바람에 부대 간의 명령이 꼬여서 일어난 일이었다.  단순한 실수긴 해도 문책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클렌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의 말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후작은 단순한 실수라고 여겨서 크게 처벌하지 않고 내쫓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에클렌은 불명예스럽게 변경 지역으로 쫓겨났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실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계속 조사한 끝에 2년쯤 뒤에야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졌지.”

외조부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안타까운 얘기로군.’

사령관의 부관 자리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다.

비록 비서나 다름없는 자리였지만, 신임 기사들은 높은 분들의 부관이 되길 원했다. 상관의 곁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고, 든든한 인맥을 얻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출신이 안 좋은 청년이 좋은 자리를 얻었는데 억울하게 쫓겨나고 말았다. 젊은 에클렌에게는 인생이 무너지는 일이었으리라.

아스텔은 외조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누구 짓인지 밝혀냈나요?”

“밝혀내지 못했다.”

“혹시…… 저희 아버지하고 연관된 일이었을까요?”

딱 아버지가 할 만한 짓처럼 느껴졌다.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경쟁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레이디를 차지하는 신분 높은 악역. 그러나 외조부는 아스텔의 예측을 부정했다.

“아니. 네 아비는 그 당시엔 네 어머니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래요?”

아버지가 할 만한 짓처럼 보였는데. 아니라고 하니까 오히려 의아했다.

외조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에게 직접 사과했고 보상도 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필요 없다면서 받지 않았지.”

왜 받지 않았을까? 원망하는 마음이 커서?

그래도 보상은 받는 게 좋았을 텐데.

에클렌으로서는 인생의 2년을 억울하게 낭비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 정도로 외조부를 원망했다는 것도 의아했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불명예스럽게 쫓겨났으니 화가 나긴 했겠지만.

그래도 외조부로서는 젊은 부관에게 소명할 기회도 줬고, 조사도 해줬으니 충분히 할 만큼 해줬다고 볼 수 있었다. 2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조사해서 결국 사건의 진상을 밝혀줬는데. 왜 그렇게까지 원망한단 말인가.

그런 의문을 느끼던 아스텔은 순간 해답을 찾았다.

마지막 의문에 답을 찾고 나니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억울하게 쫓겨난 에클렌이 왜 보상을 거부했는지.

당시 사령관이었던 외할아버지는 부관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할 만큼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까지 그를 불편해하는지도.

“그분이 떠나 있던 동안에 어머니가 결혼했군요.”

외조부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둘이 그렇게 가까운 관계인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가까웠던 모양이야.”

신분 차이가 있으니 연인 비슷한 관계였다고 해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겠지.

“그래도 어머니가 아버지의 청혼을 받아들인 거잖아요.”

둘이 정말 미래를 약속할 만큼 깊은 관계였으면 그 정도의 일로 관계가 깨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머니로서는 멀리 떠난 에클렌보다 아버지가 더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닐까.

물론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게 조금 놀랍긴 하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아버지가 근사해 보였을 수도 있고…….

‘음…….’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스텔로서는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해서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나는 네 아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애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스텔은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

외조부로서는 마치 자신이 둘을 억지로 떼어놓은 느낌이라 아직까지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에클렌 백작은 별로 유감이 있는 것 같지 않던데요. 이참에 과거의 일을 털어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외조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텔은 전에 몇 번 만났던 에클렌 백작을 떠올렸다. 그는 아스텔에게 몹시 친절하고 정중했다.

‘우리 어머니를 좋아했던 사람이라서 그랬구나.’

그전까지는 별 뜻 없이 친분을 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얘기를 듣고 나니까 아스텔 자신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마음이 쓰였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그의 관계를 알았던 걸까?’

에클렌 백작의 이름을 들었을 때 조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외조부가 아스텔을 불렀다.

“비가 오는구나.”

돌아봤더니 창문에 빗방울이 점점이 달라붙었다.

아스텔은 시간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젠과 테오르가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침실로 돌아가 봐야겠어요.”

* * *

아스텔은 외조부와 대화를 끝내고 침실로 돌아왔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창문 너머로 내리던 비가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가 정원을 흠뻑 적셨다.

“갑자기 웬 비가…….”

시종들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빗속을 뚫고 화단으로 뛰어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종들은 비를 다 맞아가며 정원의 화초를 보호하기 위해 방수천을 덮었다. 우산을 쓴 사람도 있었지만 우산마저 세찬 비바람에 꺾여 버렸다. 

저게 무슨 고생인지.

‘내년에는 비에 약한 꽃은 심지 말라고 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실에 들어왔다. 불이 켜진 침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폐하? 테오르?”

여기서 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둘 다 사라져 버렸다.

시녀가 아스텔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침실을 정돈하고 있었는지 수건과 잠옷을 들고 있었다.

“황후 폐하?”

“폐하와 황자는 어디 있지?”

“폐하께서는 황자님과 함께 정원에 나가셨습니다.”

“정원에 나갔다고?”

비가 오는데?

정원 쪽으로 난 창문에는 여전히 세찬 비바람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스텔.”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서 돌아봤더니 카이젠이 침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카이젠은 다 젖은 손으로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테오르는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정원에서 비를 맞았는지 둘 다 물에 푹 젖은 모습이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테오르가 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손으로 닦으며 칭얼거렸다.

“히잉…… 차가워.”

카이젠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테오르를 바닥에 내려줬다. 아스텔은 시녀가 가져온 수건으로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닦아줬다.

“얼른 따뜻한 물로 씻어야겠다.”

아스텔이 눈짓하자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욕탕 쪽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따뜻한 물이 준비되었다. 카이젠의 명령에 의해 시녀들이 테오르의 욕탕에 먼저 온수를 채웠다. 아스텔은 직접 테오르를 욕탕에 데려가서 씻기는 걸 지시하고 침실로 돌아왔다. 카이젠은 침실 안에서 수건으로 간단하게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잠시 나가서 놀아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더군.”

카이젠은 가벼운 실내복 차림에 검은색 외투를 대충 걸친 차림이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코트를 벗자 축축하게 젖은 흰 셔츠가 보였다. 얇은 셔츠가 상반신에 달라붙어서 강인한 몸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스텔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못 본 척하고 창가로 피하려고 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당신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는 거야?”

“네?”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데.”

무심코 돌아봤더니 그녀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살짝 사나워 보이는 눈이 아스텔을 직시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눈은 선연한 붉은색이었다. 밤하늘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선을 자아내는 콧날. 차가운 빗물이 다부진 턱선을 지나 탄탄한 근육으로 감싸인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새삼 겉모습은 정말 근사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텔은 쓸데없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외할아버지한테 어머니 얘기를 들어서요.”

“당신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런 건 아닙니다…….”

아스텔은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듣고 나서 약간 심란했을 뿐이다. 에클렌 백작과의 관계도 생각해 봤고.

대단한 일은 아니었는데. 카이젠은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수건을 내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내게 털어놔도 돼. 당신을 돕고 싶다는 건 단지 보석이나 궁전을 주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

짧은 말이지만 절절한 감정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마음을 의지할 상대가 필요하면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뜻인가보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아스텔은 잠깐의 침묵을 두고 그를 향했다.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부탁드릴 일이 있으면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카이젠은 말없이 아스텔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스텔은 그의 붉은 눈동자에 드러나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못 본 척했다. 매번 이런 식으로 선을 긋는 것도 난감했지만 매번 선을 넘어오는 카이젠의 태도도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카이젠은 우리가 계약 관계인 걸 벌써 잊은 걸까?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행히 이 불편한 순간은 금방 끝이 났다. 시종이 바쁜 걸음으로 달려와서 문을 두드렸다.

“폐하, 온수가 준비되었습니다.”

카이젠은 대답 없이 돌아서서 욕탕으로 들어갔다.

* * *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약간 마음이 산란했지만 아스텔은 에클렌 백작의 일을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흘 후, 프리츠 오빠가 황후궁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스텔은 오랜만에 친오빠와 마주 앉았다. 프리츠는 공작가의 영지를 정리하고 그동안 밀린 영지 업무를 처리했다.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었는걸.”

말은 그렇게 해도 프리츠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아스텔은 웃으며 말했다.

“일을 훌륭하게 처리하셨다고 폐하께서도 칭찬하시던데요.”

프리츠는 서부의 다른 영지들도 확인하고 정리하고 돌아왔다.

카이젠이 즉위한 이후 영지를 잃고 몰락한 귀족이 워낙 많아서 영지 관련 업무가 혼란스럽다고 들었다. 주인 잃은 영지들을 정돈하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훌륭한 성과였다.

프리츠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카이젠도 후회 섞인 말투로 그를 칭찬했다. 진작에 프리츠를 지방에 내려보낼 걸 그랬다고.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서부는 오래전부터 레스턴 공작가가 관리하던 지역이었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프리츠는 그쪽 지역의 일에 관해 손금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각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어수선해진 영지 경계를 정리하는 일은 당연히 프리츠가 제일 적임자였다.

‘카이젠도 알고 있었겠지만 예전에는 공작가를 견제하느라 프리츠 오빠에게 중요한 지위를 맡길 수 없었겠지.’

아스텔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찻잔을 들었다. 프리츠는 아스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안 좋은 일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괜찮은 거냐?”

“저는 괜찮아요. 다 해결됐는걸요.”

프리츠도 크로이첸 가문의 일을 들은 모양이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여기서 사는 게 원래 그렇죠, 뭐.”

황궁 안에서 황후로 살려면 그 정도의 일은 감수해야 한다.

과거에도 아스텔은 자신을 둘러싼 소소한 음모와 계략을 이겨냈다. 비록 그때는 카이젠의 곁에 머물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참아냈다면, 이제는 오직 테오르 때문이라는 차이가 있다만.

“제가 부탁드린 건 준비해 오셨나요?”

아스텔은 말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프리츠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품 안에서 봉투를 써냈다. 아스텔이 가져오라고 한 서류였다. 아버지를 내쫓기 위해 준비한.

“정말 아버지를 물러나게 할 생각이냐?”

프리츠는 서류를 확인하는 아스텔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이미 결정한 일이잖아요.”

프리츠가 서부로 떠나기 전에 두 사람은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을 몰아내기로 약속했다.

아버지를 공작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프리츠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그러나 프리츠는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버지를 놔두는 게 좋지 않을까? 네가 조금 더 자리를 잡을 때까지라도.”

“…….”

프리츠가 뭘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벌써 이런저런 일이 생겼는데 지금 아버지도 없어지면 도와줄 사람이 한 명 더 줄어드는 게 아니냐는 뜻이겠지.

안 그래도 대신 중엔 아스텔의 편이 별로 없으니까. 순간 아스텔의 머릿속엔 에클렌 백작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스텔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외조부와의 인연으로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어머니와의 일을 듣고 나니까 그에게 뭔가를 부탁하기가 꺼려졌다.

아스텔은 프리츠가 가져다준 서류를 잘 보관하면서 말했다.

“이 일은 제가 기회를 봐서 처리하겠어요. 오빠는 저와 약속하신 대로 도와주세요.”

“알겠다.”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빠른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녀가 불안한 낯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테오르를 돌봐주는 어린 시녀였다.

“황후 폐하!”

“왜 그러느냐?”

아스텔은 시녀의 다급한 표정을 보며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시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황자님께서 편찮으십니다.”

“테오르가 아프다고?”

아스텔은 놀라서 일어났다.

“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으셨는데 갑자기 열이 심하십니다.”

아스텔은 시녀의 설명을 듣자마자 테오르의 방으로 향했다.

프리츠도 뒤따랐다.

* * *

“프리츠 삼촌!”

의자에 기대있던 테오르는 프리츠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테오르. 괜찮은 거니?”

“응. 난 괜찮아.”

테오르는 프리츠를 반가워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 피곤해 보였다. 얼굴도 평소보다 창백했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이마에 손을 댔다. 손을 대자마자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조그만 이마가 불덩이 같았다.

“열이 심하구나.”

시녀는 갑자기 테오르가 열이 나기 시작해서 아스텔에게 달려왔다고 했다.

문득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테오르는 어젯밤에 카이젠과 함께 비를 심하게 맞았다. 비를 맞아서 가벼운 감기에 걸린 건가?

“의사를 불러와.”

“이미 연락을 보냈습니다.”

사정을 듣고 달려온 한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테오르. 침실로 가자.”

시녀들이 테오르를 침대로 데려가고 물수건을 준비해 왔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침대에 눕히고 차가운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줬다. 혹시 열병인가 싶어서 몸을 여기저기 살펴봤지만 열병을 나타내는 반점은 찾을 수 없었다.

‘단순한 감기면 좋으련만.’

테오르는 이불 안이 답답한지 손을 꼼지락거리며 아스텔을 올려다봤다.

“아직 밤 아닌데 나 여기 누워 있어야 해?”

“누워서 쉬어야지. 아프잖니.”

“나 괜찮은데…… 프리츠 삼촌하고 놀면 안 돼?”

테오르는 오한이 나서 몸을 떨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프리츠가 좋은지 같이 놀고 싶다고 칭얼거렸다.

프리츠는 침대로 다가가서 테오르를 달랬다.

“황자님. 여기 얌전히 계시면 서부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응……. 서부 얘기해 줘요.”

프리츠는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아스텔을 돌아봤다. 아스텔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테오르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래. 여기서 프리츠 삼촌의 얘기를 듣고 있으렴.”

잠시 후 연락을 받은 의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 폐하.”

이미 여러 번 만난 적 있었던 황제의 시의였다. 의사는 테오르를 유심히 살핀 뒤 아스텔에게 보고했다.

“평범한 감기입니다. 비를 맞으셨다니 그 후유증으로 열이 오른 모양입니다.”

“심한 병은 아닌 건가?”

“푹 쉬시고 약을 드시면 회복하실 겁니다. 너무 심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스텔은 그 말을 듣고 안도했다.

“테오르. 오늘은 푹 쉬고 일찍 자야 해. 그러면 내일은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달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테오르가 아프다고?”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사람은 카이젠이었다.

“단순한 감기입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아스텔은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카이젠은 침대에 누워 있는 테오르에게 다가갔다.

“테오르. 괜찮은 거냐?”

“으응……. 괜찮아요.”

테오르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사이에 눈에 띄게 창백해져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힘겹게 이어졌다.

카이젠은 굳은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만졌다.

“이마가 불덩이야.”

그는 프리츠의 인사를 무시한 채 테오르만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아스텔은 미안한 낯으로 프리츠에게 속삭였다.

“오빠, 오늘은 그만 돌아가 주세요. 오늘 일은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그래, 알겠다.”

프리츠는 테오르에게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 * *

괜찮을 거라는 의사의 말이 무색할 만큼 테오르는 밤새 심하게 앓았다.

침대 안에서 미약한 숨소리가 힘겹게 이어졌다. 테오르는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스텔은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를 차가운 수건으로 닦아주며 밤새 테오르의 곁을 지켰다. 

예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었다. 테오르가 자라면서 소소하게 감기나 열병을 앓았을 때. 그리고 전에 린테일을 먹고 열이 났을 때도 아스텔은 밤새 테오르의 머리맡을 지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아스텔.”

카이젠이 그녀의 곁에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워하는 아스텔의 곁에서 함께 밤을 새웠다.

“당신 피곤해 보이는데 좀 쉬어.”

“폐하께서도 주무셔야지요.”

황제인 그는 내일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자러 가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그는 아스텔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자리를 지켰다.

여름밤이었지만 방 안에는 환자를 위해 벽난로에 장작불을 지펴놓았다. 어둑어둑한 불빛 사이로 반대편에 앉은 카이젠의 얼굴이 비쳤다. 붉은 눈동자에 괴로운 감정이 일렁거렸다.

“내 탓이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제 괜히 정원에 데리고 나가서 아이가 아픈 거야.”

“…….”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비가 올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비를 맞아도 괜찮았고.’

아스텔은 그를 위로했다.

“폐하의 탓은 아닙니다. 자책하실 것 없어요.”

카이젠은 그녀를 건너보며 괴로운 마음을 털어놨다.

“당신과 아이에게 지난 세월을 보상해 주고 싶은데. 나는 매번 망치기만 하는 것 같군.”

테오르의 곁에 앉아 있는 아스텔을 보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아스텔은 몇 번이나 혼자서 이런 밤을 보냈을 것이다. 밤새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간호하면서 불안에 떨었으리라.

그 힘든 시간을 함께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지만,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아스텔은 차분한 눈빛으로 테오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테오르가 폐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테오르는 카이젠을 몹시 좋아했다.

아직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않을 뿐. 이미 친아버지로 믿고 따르고 있었다.

카이젠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아스텔은 카이젠이 테오르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만일 아스텔이 떠나도 카이젠은 테오르를 사랑하고 아껴줄 것이다. 전에는 카이젠을 믿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테오르에겐 충분히 좋은 아버지십니다. 너무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카이젠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스텔은 묵묵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카이젠에게 대한 마음은 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 그의 존재가 의지가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 * *

두 사람은 함께 밤을 지새웠다. 다행히 새벽 무렵이 되자 점차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힘겹게 들리던 숨소리도 편안해지고 창백하던 안색도 평온을 되찾았다.

아스텔은 손을 들어서 곤히 잠든 테오르의 이마를 짚어봤다. 이제 열은 거의 사라지고 미열만 남아 있었다.

“괜찮아졌네요.”

약을 지으면서 대기하고 있던 의사가 급히 불려왔다. 그도 테오르를 진찰하고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괜찮아지셨군요. 하루 이틀만 조심하시면 금세 회복하실 겁니다.”

카이젠도 그 말을 듣고 안도했다.

“다행이야.”

안도감이 들자 목이 말랐다. 아스텔은 카이젠과 테오르를 남겨두고 잠시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대기하던 시녀가 아스텔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황후 폐하.”

“왜 그러지?”

“레스턴 공작님께서 급히 찾아오셨습니다.”

아스텔은 시녀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누가 왔다고?”

시녀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금 전의 대답을 반복했다.

“레스턴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황후 폐하께 급히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지금 어디 있는데?”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스텔은 복도의 창문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유리창 밖으로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비치고 있었다. 아침이라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황궁의 하인들도 이 시간이면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 새벽에 왜 찾아왔지?’

설마 테오르 때문에 온 건 아닐 테고.

테오르가 아프다는 건 아버지도 이미 전해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시종 중에 몇 명을 포섭해 두고 황후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세하게 전해 듣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르는 그냥 감기였다. 아버지라면 큰 병이 아니라는 걸 듣자마자 신경도 쓰지 않았으리라.

‘음…….’

조금 불길한 생각이 엄습해 왔다.

‘설마 프리츠 오빠의 일이 벌써 들킨 건가.’

아스텔이 프리츠에게 부탁했던 건 아버지가 숨겨놓았던 자료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프리츠는 아스텔이 시키는 대로 충실히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알겠어. 지금 만날 거니까 차를 준비해 와.”

시녀를 돌려보내고 응접실로 향했다. 

창밖에선 날이 새고 있었지만 아직도 실내는 어두웠다. 응접실은 한밤중처럼 촛대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촛대의 불빛 사이로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이른 새벽이었음에도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세련된 예복을 빈틈없이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아버지, 무슨 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셨어요?”

그녀를 바라보는 연녹색 눈은 약간 불안정해 보였다.

“황제는?”

“테오르와 함께 있어요.”

아스텔은 공작의 질문에 차분하게 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레스턴 공작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물었다.

“아, 그래. 우리 황자님이 아프다고 했지. 아이의 상태는 좀 어떠냐?”

“밤새 열이 올라서 힘들어하다가 조금 전에 열이 내렸어요. 신경 써주셔서 고맙네요.”

아스텔이 비꼬듯이 말했지만 공작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심한 병은 아니라고 들었다. 어린애들은 원래 자주 아픈 법이지.”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이 들어온 문을 힐끔거렸다. 그는 문이 굳게 닫힌 것을 확인하고 나서 본론을 꺼냈다.

“얼마 전에 누군가가 내 영지를 몰래 조사했다.”

아스텔은 놀란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급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이렇게 불쑥 본론부터 꺼낼 줄은 몰랐다.

“프리츠 오빠가 영지를 조사하러 갔었잖아요.”

“프리츠가 한 짓이 아니야.”

레스턴 공작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프리츠가 영지를 정리하는 동안 누군가가 내 뒷조사를 했어.”

“그게 정말인가요?”

아스텔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불안한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혹시 나를 떠보려고 하시는 걸까.

아버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스텔의 짓이라는 걸 눈치채고 그녀의 반응을 보려고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스텔은 놀랍고 두려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나도 모르겠다.”

“거기 뭐가 있었는데요?”

아스텔의 질문에 공작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너는 알 것 없다. 대단한 건 아니야.”

“대단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일어날 시간 아니냐?”

“테오르가 아파서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간호했어요.”

“고작 감기라면서 시녀들에게 맡길 것이지…….”

순간 아스텔은 아버지에게 소리치며 화를 낼 뻔했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하고 예민해져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짜증부터 밀려왔다.

다행히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가 찻잔을 가져왔다. 아스텔은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차를 마셨다.

“황제가 프리츠를 서부로 내려보낸다고 했을 때.”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의 눈치를 보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쁘면서도 의아했다. 황제가 아무리 네게 빠져 있다고 해도 권력까지 나눠준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황제가 지난 수년간 우리 가문을 몰아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설마…… 황제 폐하의 짓이라는 말씀이세요?”

아스텔은 아버지가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여기까지 왔는지 깨달았다.

아버지는 황제가 프리츠를 서부로 내려보내 주는 척하면서 뒤로 공작가의 비리를 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스텔과 논의하러 이른 시간에 황후궁으로 달려온 것이다.

혹시 아직도 황제가 자신을 없앨 생각인가 걱정이 돼서.

마침 테오르가 병이 났기 때문에 변명거리도 있었다. 어린 황자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달려왔다는 핑계를 대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누구 짓이겠느냐? 프리츠가 그랬을 리는 없고.”

아스텔은 새삼 아버지가 프리츠 오빠를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 의견이 갈려서 충돌할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오빠를 굳게 믿고 있었다.

‘유일한 아들이라서 그렇겠지.’

아스텔은 씁쓸한 마음을 갈무리하고 다시 말했다.

“대신 중의 한 사람일 수도 있지요. 대부분 아버지를 싫어하잖아요.”

“……다 그런 건 아니다.”

레스턴 공작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크로이첸 후작이 몰락한 이후 몇몇 귀족은 눈치를 보면서 레스턴 가문에 빌붙으려고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은 이미 자기가 포섭한 대신들도 있다는 뜻이리라.

“어쨌든 폐하의 짓은 아닐 거예요. 이제 와서 왜 그러겠어요? 테오르를 생각해서라도…… 아버지를 보호해 주겠죠.”

아스텔은 순진한 얼굴을 가장하며 그렇게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마라. 황제가 네게 흥미를 잃으면 황자가 있든 없든 다시 우리 가문을 내치려고 할 거야.”

레스턴 공작은 답답하다는 듯이 약간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는 아스텔을 직시하며 충고했다.

“그러니 황제가 아직 네게 빠져 있을 때 아이를 하나 더 낳아야 해.”

“…….”

아스텔은 순간 아버지를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진짜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일이 아스텔 자신이 꾸민 일이고, 계획을 완성하기까지는 아버지를 안심시켜야 한다는 전제 조건만 없었으면 찻잔을 끼얹기라도 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다. 기척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아스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카이젠이었다. 테오르의 곁에서 함께 밤을 지새운 덕에 그 역시도 약간 피곤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카이젠은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레스턴 공작을 돌아봤다. 공작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폐하를 뵙습…….”

“이런 새벽부터 알현을 청하는 신하가 있다니 공작이라는 사람이 기본예절도 못 배운 건가?”

레스턴 공작은 찔끔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숙였다.

“황자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이 할아비가 놀라서 달려왔습니다.”

“그렇게 걱정을 했다면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황자님께서는 아직 주무신다고 하기에…….”

“그래. 우리 황자를 걱정해 줘서 고맙군. 테오르는 이제 기운을 차렸으니 그대는 그만 돌아가게. 아이가 몸이 아픈데 외부인을 함부로 들일 수는 없지.”

황자를 만나게 해줄 수 없으니 당장 나가라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레스턴 공작은 내심 분노했지만 감히 황제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에게 눈짓을 하고 허리를 굽힌 뒤 밖으로 나갔다. 조금 전에 하던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는 뜻인가보다.

아버지가 사라진 뒤 아스텔은 평상복 차림인 카이젠을 바라봤다.

예고도 없이 불쑥 난입했지만 짜증스러운 아버지를 내쫓아준 것만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테오르가 방금 정신을 차렸어. 아무리 기다려도 당신이 안 와서 찾으러 왔지.”

“테오르는 좀 어떤가요?”

“괜찮은 것 같아. 일어나자마자 다시 약을 먹였어.”

아스텔은 그와 함께 테오르의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테오르는 기운을 차리고 침대 위에서 블린을 끌어안고 있었다.

“블린!”

테오르는 까르르 웃으면서 블린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블린은 꼬리를 흔들면서 테오르의 뺨을 핥았다. 테오르가 앓는 동안 블린도 밤새 침대 밑에서 자리를 지켰다. 테오르는 블린의 털을 쓰다듬다가 아스텔을 발견하고 시선을 돌렸다.

“엄마.”

“테오르. 이제 괜찮니?”

“응. 나 안 아파.”

그렇게 대답하는 테오르는 조금 창백하긴 해도 편안해 보였다. 반짝이는 붉은 눈과 하얀 뺨에도 생기가 느껴졌다.

아스텔은 안도하며 웃었다.

“배고프지 않니?”

“웅…… 조금.”

아스텔은 한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후 한나가 작은 그릇에 따뜻한 수프를 담아서 가져왔다. 테오르는 침대에 앉아서 얌전히 수프를 떠먹었다. 아스텔은 테오르가 수프를 먹는 걸 도와주다가 카이젠과 눈빛을 마주쳤다.

“당신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일하지 말고 쉬어.”

카이젠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스텔은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저보다 더 피곤하시잖아요.”

아스텔 자신도 잠을 못 자서 피곤하긴 했지만, 카이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황제의 업무만으로도 힘들 텐데 어젯밤에는 밤새 한숨도 못 잤다. 피로가 많이 쌓였을 것이다.

“나는 괜찮아. 당신이 걱정이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수프를 떠먹던 테오르가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은 둘 다 쉬면 안 돼요?”

테오르의 천진한 말에 아스텔과 카이젠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젠이 테오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말했다.

“그건 좀 힘들겠다만. 대신 오늘은 일을 일찍 끝내고 돌아오마.”

세 사람 사이에는 오랜만에 따뜻하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카이젠이 돌아간 뒤 아스텔은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황후 폐하. 오늘은 쉬십시오. 밤새 한숨도 못 주무셨는데요…….”

한나가 그런 아스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쉬라고 조언했다.

“나는 괜찮아. 한나도 잠을 못 잤을 텐데 오늘은 쉬어.”

“하지만…….”

“나도 오늘은 꼭 해야 하는 일만 하고 쉴게.”

그렇게 다짐을 하고서야 하루의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나는 여전히 근심 어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어차피 쉬고 싶어도 쉴 수도 없었다. 아침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방문객이 찾아왔다.

“황후 폐하, 레스턴 공작님께서…….”

시녀의 말을 듣자마자 저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아스텔은 서류를 내려놓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아버지 레스턴 공작이 새벽과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새벽에 만났을 때와 같은 옷차림인 걸 보니 잠도 안 자고 시계만 보면서 아침이 되길 기다린 건가 싶었다.

“황제는 돌아갔느냐?”

“진작에 돌아갔죠.”

“황제가 다른 말을 안 하더냐?”

“아무 말도 없었어요.”

아스텔은 다시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황제 폐하께서 아버지를 노린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 아니면 다른 대신 중 한 명이겠지만…….”

공작은 말끝을 흐렸다.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어떤 면에선 잘된 것 같네.’

아스텔은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아버지가 먼저 위험한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아버지는 위험하다는 걸 느껴야 움직일 것이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네가?”

공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아스텔을 돌아봤다.

“아버지가 무사하셔야 저와 테오르도 무사하지요.”

아스텔은 답답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냈다.

“황제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아볼게요. 그러면서 우리 가문을 적대시하지 못하게 폐하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아 볼게요.”

쉽게 말해서 황제를 감시하면서 유혹하겠다는 소리였다.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려니 약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레스턴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스텔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우리 가문을 노린다면……. 그때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죠.”

아스텔은 의미심장한 어조로 그렇게 덧붙였다. 아무리 설득해도 황제가 뜻을 굽히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쓰는 것도 불사하겠다. 이를테면 황제를 제거하는 극단적인 짓에도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레스턴 공작의 단정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며 나왔다.

“그래. 그래야 내 딸이지.”

새삼 아스텔은 이런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싫어졌다.

좋았던 적도 없긴 하지만.

“그럼 우선 네가 황제의 심중을 살펴보거라. 나도 내 선에서 더 알아볼 테니까.”

“네.”

당장 프리츠 오빠에게 말해서 아버지에게 들키지 말라고 당부를 해둬야겠다.

“우리 황자님은 괜찮은 거냐?”

아스텔과의 대화가 만족스럽게 끝나니 테오르에게도 관심을 줄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네, 이제 완전히 기운을 회복했어요. 애초에 큰 병도 아니었는걸요.”

“그래도 각별하게 조심하거라. 아직 어리니까 몸이 약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공작은 아스텔을 힐끔 돌아보며 새벽에 했던 말을 다시 덧붙였다.

“전에도 몇 번 말했듯이 기회가 될 때 황자를 더 낳아라. 황자는 많을수록 좋아.”

아스텔은 슬쩍 분노가 치미는 걸 참고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버지.”

* * *

짜증스러운 방문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오후가 되기 전에 프리츠 오빠도 다시 황후궁으로 들어왔다.

“테오르. 이제 괜찮은 거니?”

“응. 다 나았어요.”

침대에 앉아 있던 테오르는 프리츠가 가져다준 장난감 배를 가지고 놀았다.

서부에서 가져온 선물이라고 한다.

“나 프리츠 삼촌하고 나가서 놀아도 돼?”

“안 돼. 아직 다 나은 건 아니야.”

테오르와 함께 있던 외할아버지가 프리츠를 보면서 말을 걸었다.

“영지에서 고생을 많이 했나 보다. 몇 달 사이에 수척해졌어.”

“저보다 아스텔과 할아버님께서 힘드셨지요.”

어제 프리츠가 급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둘은 따로 만날 틈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외할아버지와 프리츠는 어느 정도 예전의 관계를 회복한 것 같았다.

지난 몇 년간 프리츠는 할아버지에게 무관심했고, 할아버지도 프리츠를 손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용서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혈육이기 때문이겠지.’

자신과 카이젠의 관계는 달랐다. 프리츠와 외할아버지처럼 저렇게 회복될 일도 없을 것이다.

“오빠, 잠시 할 말이 있어요.”

아스텔은 프리츠를 데리고 옆방으로 가서 아버지와의 일을 말해줬다.

“그러니 들키지 않게 조심하세요.”

“나는 괜찮을 거다. 너야말로 괜찮겠느냐?”

“제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프리츠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혹시 폐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폐하께서도 어느 정도 알고 계신 일인데요.”

테오르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겉으로 보이는 갈등 없이 아버지를 끌어내리는 건 카이젠도 원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몰래 암살하는 것보다는 훨씬 평온한 방법이 아닌가.

“그래. 알겠다. 저택의 일은 걱정하지 마라.”

“네,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프리츠를 돌려보낸 뒤 오후엔 카이젠이 찾아왔다.

테오르의 상태를 살펴보려고 잠시 들른 건가 했는데 그는 테오르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스텔을 불렀다.

“가져와라.”

그의 명령을 받은 시종이 찻잔을 가져왔다. 맑은 진줏빛을 내는 찻잔 안에 쓴 냄새가 나는 찻물이 담겨 있었다.

“이건……?”

“피로를 풀어주는 약이라고 하더군.”

아스텔이 의아한 듯 바라보자 카이젠은 간결하게 설명했다.

아스텔을 바라보는 눈길엔 다정한 애정이 가득했다. 한편으로는 조금 쑥스러운 기색도 담겼다. 그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을 위해서 준비하라고 했어.”

아스텔은 찻잔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물에선 약초를 달인 냄새가 진하게 났다. 다시 맡아보니 씁쓸한 향이 어딘지 익숙했다. 순간 이 차가 뭔지 기억이 났다. 이건 피로를 풀고 원기를 보하는 약차였다. 예전에 아스텔 자신도 카이젠을 위해 이 약을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아스텔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약초를 우려낸 차에서는 혀가 아릴 정도로 쓴맛이 났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전과 달리 평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용하고 평온하긴 해도 지루한 건 아니고. 햇볕처럼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그런 평온함이었다.

딱히 그가 좋아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테오르를 함께 간호하면서 카이젠과의 관계가 조금 부드러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전보다 편안해진 것 같네.’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공식적인 부부로 살아야 하는데 계속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당신 아버지는 새벽에 무슨 일이었어?”

아스텔이 빈 찻잔을 내려놓자 카이젠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스텔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갑자기 새벽에 아버지가 달려오고 오늘은 오빠도 들어왔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

그녀는 처리할 일이 생길 때마다 카이젠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서 처리했다. 자기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스스로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젠은 그녀가 혼자서 일을 처리했다고 매번 화를 냈다. 황후가 된 이후 그 문제로 몇 차례나 다퉜던 것 같다.

‘이번에는 자세히 말해주는 게 좋으려나.’

아스텔은 그런 생각 끝에 약간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프리츠 오빠에게 부탁해서 영지에 있던 자료를 훔쳐 왔습니다.”

그녀가 프리츠에게 부탁했던 일. 그리고 아버지가 누구 짓인지 몰라서 걱정하고 있다는 것까지만 짤막하게 말해줬다. 아버지가 카이젠을 의심한다는 것도.

“나를 의심할 만도 하지.”

카이젠은 낮게 코웃음 쳤다. 그리고는 아스텔에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게 대답하고 나자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편안하고 부드러운 침묵이 감돌았다.

“너무 늦었군. 돌아가야겠어.”

* * *

이제 일을 마무리 짓고 테오르를 돌봐주다가 좀 쉬려고 했는데.

시녀가 또 다른 방문객의 등장을 알렸다.

“누가 찾아왔다고?”

시녀는 고개를 숙이면서 앵무새처럼 방금 전의 대답을 되풀이했다.

“군무대신이신 에클렌 백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오늘은 방문객이 오는 날인가. 평소에도 간간이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긴 했지만 오늘은 어째 연이어서 방문자가 찾아온다.

‘에클렌 백작이라고.’

외할아버지에게 사정을 다 듣고 나니까 그를 만나는 게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예전에 초대해 놨으니 안 만날 수도 없었다. 아스텔은 어쩔 수 없이 응접실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응접실 안에는 에클렌 백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자님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씀을 듣고 병문안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황자는 이제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에클렌 백작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상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황자님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약을 조금 준비해 왔습니다.”

어머니가 왜 이 사람과 한때 친밀한 관계였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남자는 높은 지위에 있는데도 솔직하고 순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잘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어딘지 모르게 호감 가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아스텔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어머니와 이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조금 찜찜하고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만. 어차피 언젠가는 대면해야 할 일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말이지.’

아스텔은 이 남자에게 매정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굳이 매몰차게 대할 필요도 없고.

“고마워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스텔은 그날 한참 동안 에클렌 백작과 대화를 나눴다.

“세르벨은 언제나 황자님이 얼마나 영특하신지 칭찬을 늘어놓는답니다.”

세르벨은 에클렌 백작의 친조카였다. 조카인데 어릴 때 부모님을 잃어서 백작이 양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세르벨과 테오르, 백작의 영지 얘기 등등 가벼운 화제를 주고받았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백작과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말을 해볼수록 그가 마음에 들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신기한 일이었다.

아스텔은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할아버님께 예전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에클렌 백작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예전에 안 좋았던 일은 다 잊었습니다. 후작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 개의치 마십시오.”

어머니와의 일도 잊은 걸까?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웠던 건지 궁금했지만 그런 걸 당사자한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무슨 관계였든 간에 결혼 후에는 끝났을 테니까 상관없겠지.’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게 백작과 어머니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았다.

에클렌 백작은 떠나기 전에 아스텔에게 인사를 하면서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황후 폐하.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스텔은 에클렌 백작의 진심 어린 눈빛을 보며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아버지를 몰아내는 데 이 사람을 이용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이 사람을 몹시 싫어했다. 아마도 어머니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걸 이용하면 계획을 좀 더 손쉽게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에클렌 백작이 그렇게까지 아스텔을 도와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런 일까지 도와달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고마워요.”

백작은 아스텔의 대답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정한 기쁨이 가득한 미소였다. 순간 그의 눈이 똑바로 보였다.

햇빛이 비치는 자리에서 볼 땐 전혀 다른 색으로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백작의 눈동자에도 살짝 연녹색이 감돌고 있었다.

‘신기한 우연이네.’

아스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백작을 배웅했다.

* * *

그 후 며칠간은 조용히 지나갔다.

카이젠은 테오르가 몸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는 수업도 받지 못하게 했다.

사실 감기는 사흘 만에 다 나았지만…….

그래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는 재발하지 않게 얌전히 방 안에 머물러야 했다.

“밖에 나가고 싶어…….”

테오르는 며칠간 방 안에서 지루함에 몸부림쳤다.

그렇게 일주일째 되던 날.

카이젠은 테오르가 얌전히 건강을 회복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해주었다.

“대극장에 연극을 보러 가자.”

수도의 중심에는 대극장이 있었다. 수세대 전에 건축된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이었다.

연극이나 오페라, 발레 등을 시즌에 따라 공연했다.

“갈래! 연극 보고 싶어!”

테오르는 당연히 기뻐했다.

원래 연극을 좋아하는 데다, 며칠 내리 방 안에 갇혀 있어서 어디를 가자고 하든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스텔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가시려면 미리 준비해야 할 텐데요.”

황제와 황자가 극장에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험한 게 없는지 극장 검사하고 오가는 거리도 미리 확인해야 한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걱정하는 걸 보면서 낮게 웃었다.

“걱정 마. 사흘 전부터 준비해놓은 일이야.”

말없이 몰래 세 사람의 외출을 준비했다는 건가. 나름대로 테오르를 위한 깜짝 선물이었던 모양이다. 테오르는 기뻐하면서 당장 극장에 갈 준비를 했다.

“레빈도 데려갈래. 같이 가도 돼?”

기뻐하는 테오르를 보니 함께 나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 대신 둘 다 얌전히 앉아서 봐야 해.”

* * *

수도의 대극장은 3층으로 우뚝 솟은 커다란 건물이었다.

규모로 치면 거의 황궁에 있는 연회장의 크기와 비슷했다. 세 사람은 미리 준비된 2층의 발코니석에 앉았다. 무대가 제일 잘 보이는 자리였다.

아래층에 앉은 귀족들이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세 사람이 함께 외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이목이 집중될 만도 했다.

다행히 곧바로 연극이 시작됐다. 연극 내용은 오래된 고전이었다. 드래곤을 무찌르는 왕자와 공주가 나오는 옛 전설을 각색한 연극이었다.

카이젠은 테오르가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춰서 아스텔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테오르가 봐도 괜찮겠지. 그동안은 죄다 치정극이라.”

“이 내용은 괜찮네요.”

테오르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도 않았다. 두 팔로 레빈을 꼭 끌어안고 연극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골에 살 때도 연극을 많이 보여주기는 했는데.’

이렇게 커다란 극장에서 본 건 처음이니까. 게다가 수도의 대극장답게 무대장치나 소품도 아주 그럴싸했다. 중간중간에 화약이나 연기를 이용한 특수 효과도 나왔다.

발코니석에는 어린 황자님을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최고급 사탕과 쿠키가 있었지만 얼마나 집중하는지 그걸 맛볼 겨를도 없었다.

연극은 한 시간 만에 끝이 났다. 다른 연극과 달리 시간이 길지 않은 걸로 고른 모양이다. 하긴 내용이 너무 길면 어린 테오르는 보다가 지칠 테니까. 집중도 못 할 테고.

연극이 끝난 뒤엔 주인공이었던 두 배우가 인사를 하러 왔다.

“공주님 너무 예뻐요.”

테오르는 준비되어 있던 사탕 바구니를 배우들에게 선물했다.

“황공합니다, 황자 전하.”

어린 황자가 기뻐하면서 선물을 주니까 배우들은 나름대로 감동한 눈치였다.

“연극이 재미있었니?”

“응! 너무 재밌어, 내일 또 와도 돼?”

테오르는 마차가 황궁을 향해 출발한 뒤에도 계속 연극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다.

하지만 수도의 중심을 벗어나 황궁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선 뒤에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졸다가 잠들어버렸다.

하긴 이미 한밤중이었으니 어린 테오르는 졸릴 만도 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품 안에서 졸고 있는 테오르를 보며 웃었다.

“테오르는 연극을 정말 좋아하는군. 이 녀석이 황제가 되면 극장을 여러 개 짓겠어.”

아스텔도 웃었다.

테오르에게 일부러 연극을 보여주고 함께 연극 연습을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리 오래된 기억도 아닌데 아주 오래전의 일 같다. 마차는 조용한 밤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인적없는 거리는 고요하고 스산했다. 창문을 내다보면 카이젠이 조용히 말했다.

“예전에도 함께 밖에 나왔던 적이 있었지.”

테오르와 함께 수도의 야시장에 갔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날도 이렇게 함께 야시장을 구경하러 갔었다.

“가끔 생각했어. 그날 거기 가지 않았으면 우리 세 사람은 어떻게 됐을지.”

카이젠은 마차 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당신과 테오르는 수도를 떠나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겠지.”

“…….”

아스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때는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테오르가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그래도…….”

아스텔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테오르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카이젠은 놀란 눈으로 아스텔을 직시했다.

“당신은?”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젠가 당신도 이곳에 남아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날이 올까?”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5년 뒤에 떠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처음부터 반드시 5년 뒤에 이혼하겠다고 다짐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나간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

그 후로는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그때 밤거리를 달려가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창문을 내다보니 작은 교량 위였다. 일행이 탄 마차는 폭이 좁은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다리 앞에 나무가 쓰러져 있어서 치우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목은 기사들이 미리 확인했을 텐데 왜 갑자기 그런 일이…….

한참을 기다려도 마차는 출발할 기미가 없었다. 답답해진 카이젠이 마차 밖으로 나갔다.

“언제까지 치우고 있는 거냐?”

앞에 있던 린든이 놀라서 달려왔다.

“폐하, 안에 계십시오.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다.”

카이젠은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이곳은 수도인데다, 이 거리도 이미 기사들이 조사했을 테니 위험할 일은 없겠다만.

그런 생각을 하던 아스텔은 순간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다리의 난간 쪽에서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물소리?’

이상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다리 위에 멈춰 선 마차.

다리 밑에서 들리는 물소리.

아스텔은 그걸 깨닫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폐하!”

카이젠이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 * *

섬뜩한 굉음이 한밤의 고요함을 찢어 놓았다.

주변에는 씁쓸한 화약 냄새가 감돌았다. 놀라서 테오르를 끌어안았던 아스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유리창 밖은 방금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기사들이 카이젠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엄마?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요?”

졸고 있던 테오르가 놀라서 눈을 떴다.

“괜찮아. 잠시 사고가 났어. 다들 무사하니까 걱정할 것 없단다.”

자세히 보니 다리도 무너진 것 같지 않았다.

그 소리는 뭐였을까?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두 사람 다 무사해서 다행이군.”

“예, 폐하께서도 괜찮으신가요?”

“난 괜찮아.”

린든이 마차로 다가와서 보고했다.

“난간의 이음새 안에 작은 화약이 들어 있었습니다. 작은 틈에 박혀 있어서 미리 검사했는데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전부 제 불찰입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기사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 정도라면 아주 작은 폭탄이었을 것이다.

하긴 그렇게 작은 폭탄이니 다리도 무사했겠지.

“주변을 수색해서 범인을 잡아라.”

이상한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폭탄이라면 숨겨놓고 터뜨려 봤자 사람을 해칠 수도 없었을 텐데.

황제 부부가 지나가는 길에 굳이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도 하필…… 카이젠이 밖으로 나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폭탄이 터지다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근위기사 중 한 명이 의아한 듯 말했다.

“희한합니다. 하필이면 마차를 공격한 게 아니라…….”

카이젠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젊은 기사는 황제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쓸데없이 입을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아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누구 짓이지?’

아버지의 짓일 리는 없다.

아스텔이 직접 황제를 설득하고 감시하겠다고.

그런 대화를 나눈 게 겨우 며칠 전인데. 말도 없이 황제를 죽이려고 할 리가 없다.

그럼 대체 누구 짓일까?

* * *

사고 자체는 작은 폭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일이 남긴 후유증은 실제 폭발보다 훨씬 컸다. 일행은 몇 명의 기사와 병사를 남겨두고 황급히 황궁으로 돌아왔다.

황궁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은 짧았다. 애초에 사건이 일어난 곳이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으니. 게다가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마차는 전속력으로 도로를 달려서 황궁의 정문을 통과했다.

“폐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테오르가 똘똘한 눈으로 말없이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아스텔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폭발 소리에 완전히 잠이 깬 듯했다. 카이젠은 다정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테오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줬다.

“다리 위에서 사고가 있었다. 난간이 낡아서 부서졌어.”

“정말요?”

테오르는 그 말에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을 깜빡이다가 안도하듯 말을 했다.

“모두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카이젠은 웃으며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다시 흐트러뜨렸다.

“그래. 다행이지.”

아스텔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마차는 황궁의 문을 통과하자마자 황후궁으로 향했다. 궁전에 도착한 아스텔은 옷을 갈아입자마자 테오르를 씻기고 재웠다. 카이젠은 도착과 즉시 황제궁으로 건너갔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자정이 지난 뒤였다. 카이젠은 오늘의 일을 정리하고 뒤늦게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폐하.”

창가에 앉아 있던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옷을 갈아입은 시간도 없었는지 카이젠은 아까 봤던 것과 똑같은 차림새였다.

“테오르는?”

“조금 전에 잠들었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황궁 안은 조용했다.

궁전의 중심에 있는 황후의 침실도 적막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당신도 피곤하겠군. 얼른 쉬어.”

아스텔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엔 복잡한 기색이 담고 있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도 이미 오늘의 일 때문에 집무실에서 신하들을 닦달하고 왔다.

벨리안은 쩔쩔매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알아보겠다고 우는소리를 했다. 그 녀석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누구 짓일까.’

몇몇 짐작 가는 사람이 있긴 했다. 애초에 이번 일은 목적이 아주 뚜렷해서 헷갈릴 필요가 없었다.

감히 이런 짓을 꾸미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카이젠은 부글부글 끓는 속내를 감추고 아스텔을 안심시키듯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오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아스텔은 그를 가만히 주시했다.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했던 것처럼 아스텔에게도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눈빛도 다정하고 만족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아스텔은 그를 오랫동안 겪어왔기에 알 수 있었다.

카이젠이 지금 머리끝까지 분노했다는 것을.

“별로 정교한 계획은 아니었네요.”

아스텔의 담담한 목소리에 카이젠은 비웃듯이 말했다.

“정교한 계획을 꾸밀 시간이 없었겠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테오르가 아팠던 기간과 카이젠의 급한 성격을 생각하면 이번 극장 방문은 이삼 일 전에 정해졌을 것이다.

범인이 누구든 간에 그런 짧은 시간 안에 정교한 계획을 세우는 건 무리가 있었다.

‘병사들이 미리 주변을 조사했을 텐데 그들의 눈도 피해야 했을 테고.’

이번 계획은 보란 듯이 카이젠만을 노렸다. 마차 안에는 아스텔과 테오르도 함께 있었는데 카이젠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폭탄이 터졌다. 함께 있던 황제의 기사도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을 흘렸을 정도였다.

‘의심할 만도 하지.’

이건 마치 아스텔과 테오르를 놔두고 카이젠만을 노린 듯한 모양새였으니까.

현 상황에서 카이젠이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테오르가 황제가 되고 합법적으로 아스텔이 제국의 황태후로서 섭정이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카이젠의 강한 목소리가 다시 아스텔의 주의를 끌었다.

“반드시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낼 거야. 범인은 물론이고 감히 허황된 생각을 하는 자들도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스텔이 그를 멍하니 쳐다보자 카이젠은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런 눈으로 봐?”

“……허황된 생각이라고 확신하시는 게 놀라워서요.”

카이젠은 그녀의 말을 비웃듯이 내뱉었다.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테오르는 단 한 명뿐인 후계자였고 아스텔은 테오르의 친모이자 제국의 황후였다.

아스텔의 친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를 죽이려고 했었다.

충분히 의심할 만한 위치인데도 카이젠은 그녀를 굳게 믿고 있다.

‘…….’

아스텔은 여전히 카이젠의 열렬한 애정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아스텔 자신에게 열렬한 애정과 믿음을 주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녀를 주시하는 붉은 눈동자에 담긴 강한 신뢰와 애정만 봐도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카이젠은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면서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훨씬 더 정확한 방법을 썼겠지. 이렇게 어설픈 짓을 할 리가 있나.”

칭찬과 조소가 반씩 섞인 농담이었다.

아스텔도 그 말을 들으며 낮게 웃었다.

“칭찬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카이젠도 그런 아스텔을 보며 웃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혀를 찼다.

“당신 아버지도 이런 멍청한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지. 차라리 그런 어리석은 인간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이번 일을 꾸민 사람은 황제가 아스텔과 레스턴 가문을 의심하길 바랐으리라. 범행의 목적을 감안하면 범인이 누구인지 금세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황제 쪽 대신 중 한 명이겠지.’

카이젠의 뜻이 확고하니까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겠지만.

자꾸만 이런 식으로 대신들 간에 분란이 일어나는 게 자못 걱정스럽기도 했다.

* * *

“그래서 황제는 다치지 않았다고?”

“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레스턴 공작은 새벽 무렵에 부하의 보고를 받았다.

간밤에 황제가 황후와 황자를 데리고 극장에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소소한 사고가 있었다는 소리였다.

‘하여간 황제는 목숨도 질기군.’

이왕이면 그냥 죽어버려도 좋았을 텐데. 하긴 난간의 틈새에 폭탄을 숨겨놓았다니. 그런 조그만 폭약으로는 지나가는 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이다. 누군지 몰라도 그걸로 황제를 죽이려고 했다면 머리가 텅 빈 인간일 것이다.

‘아니면 애초에 죽일 마음은 없었거나.’

공작은 또다시 불안감을 느꼈다.

영지에 들어온 첩자.

허술한 황제 암살 미수.

일련의 일이 마치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 같았다. 영지에서 도둑맞은 서류는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선대에 있었던 몇 가지 일을 기록한 증거에 불과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다면 진작에 태워 버렸겠지.

하지만 그걸 찾아냈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자신의 주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었으니.

‘…….’

혹시나 하고 프리츠를 불러서 떠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프리츠 녀석이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지.’

아스텔이 어릴 때부터 황후로 키워졌듯이, 레스턴 공작은 프리츠도 철저하게 자신의 후계자로 키웠다.

프리츠도 가문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 짓이지?’

이번 일만 생각하면 황제의 대신들 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지를 뒤진 건…….

레스턴 공작이 알기로 황제 편인 신흥귀족 중에 그 정도로 수완이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건 전부 황제의 짓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황제로서는 아스텔과 황자를 곁에 두면서도 위협이 되는 공작은 없애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그는 고민 끝에 심복에게 당부했다.

“이번 일에 대해 더 알아봐라. 특히 황제의 움직임을 주도면밀하게 살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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