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두 번째 결혼식 (12/24)

12. 두 번째 결혼식

아스텔은 테오르가 돌아온 뒤에도 며칠 동안 저택에 머물며 외할아버지를 기다렸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당장 황후궁에 들어오길 바랐지만, 아스텔은 황궁에 들어가기 전에 테오르를 안정시키고 주변도 정리하고 싶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후궁에 들어가기 전에 궁을 제대로 정비하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아스텔은 테오르의 침실과 거처를 정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아스텔은 세세한 주문을 적어서 한나에게 넘겼다.

“벨리안 님에게 전달해 줘.”

“예, 아스텔 님.”

한나가 황궁을 드나들며 아스텔의 요청을 벨리안에게 전했다.

이미 카이젠의 허가가 있었기 때문에 아스텔이 요청만 하면 그대로 궁전의 구조에 반영되었다.

황후궁에 데려올 시녀들은 한나가 직접 선별했다. 대부분 한나와 함께 황태후 전하를 섬기던 시녀들로 채워졌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황궁으로 들어갈 준비가 다 끝났을 무렵, 기다렸다는 듯이 외할아버지가 저택에 도착했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도착하자마자 테오르가 할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외할아버지는 왼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는 아스텔의 걱정스러운 눈을 보고 얼른 말했다.

“걱정 마라. 심하진 않아.”

외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던 테오르가 다친 팔을 보면서 물었다.

“할아버지, 이제 안 아파요?”

“그래, 할아비는 괜찮다. 우리 테오르는 다치지 않은 거냐?”

“응. 난 안 아파.”

외할아버지는 가져온 짐가방에서 테오르의 곰 인형을 꺼냈다.

“자, 네 인형을 챙겨왔다.”

“레빈!”

테오르는 낡은 곰 인형을 받아서 두 팔로 끌어안았다.

“테오르. 할아버님은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 거야. 쉬실 수 있게 해드리자.”

아스텔이 눈짓하자 한나가 테오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심하지 않다고 했지만 할아버지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했다. 왼쪽 팔은 움직일 수도 없고 뒷머리에도 찍힌 상처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다친 팔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테오르를 지켰어야 했는데. 늙은 게 한스럽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심하게 다치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알고는 있었지만 외할아버지의 다친 모습을 직접 보니 가슴이 아팠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안 그래도 답답한 상황에 자신이 눈물까지 보이면 외할아버지는 더 심란해하실 테니.

“저는 테오르를 데리고 황궁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아스텔은 외조부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기어이 그렇게 됐구나.”

외할아버지는 아스텔의 설명을 듣고 길게 탄식했다.

“너는 괜찮은 거냐?”

“테오르를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나아요.”

아스텔은 지극히 담담하게 말했지만, 외할아버지의 눈에는 고통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곧바로 평정을 찾았다.

아스텔은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다시 황궁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 손녀를 앞에 두고 자신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면 아스텔이 더 힘들어할까 봐 배려하는 것이리라.

아스텔은 말없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형식적인 계약 결혼일 뿐이에요.”

“황궁엔 언제 들어가는 거냐?”

“내일 당장 황궁으로 옮겨가야 해요.”

“그렇게 빨리?”

“할아버님이 오시면 짐을 챙겨서 들어가기로 했어요.”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외할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는 저택에 머물겠다고 요구했다.

“할아버님, 당분간 저와 테오르하고 함께 계시면 안 될까요?”

외할아버지가 황궁 밖에 있으면 안심이 안 될 것 같았다.

아스텔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테오르와 외할아버지였다. 아스텔의 약점을 잡기 위해 두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외할아버지가 황궁 밖에 있으면 또 이런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황제가 허락했느냐?”

“네. 얼마든지 함께 지내도 된다고 했어요.”

카이젠은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허락해 줬다.

왜 탐탁지 않은 표정인지 물었지만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도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아스텔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허락했다면야 괜찮겠지.”

* * *

외할아버지가 도착했으니 더는 미룰 수 있는 핑계가 없었다. 미루고 싶어도 미룰 수 없었다.

다음 날 곧바로 황궁에서 마차를 줄줄이 보내왔다.

카이젠도 외할아버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아스텔은 짐을 챙겨서 준비된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황후의 궁전은 황궁의 동쪽에 있는 화려한 건물이었다. 한나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테오르는 눈앞에 있는 웅장한 궁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엄청 커! 우리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

“테오르 님. 마음에 드세요?”

“응! 궁전 같아.”

한나는 테오르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여기가 궁전이에요. 황후 폐하의 궁전인걸요.”

아스텔은 황후궁 안으로 들어가서 황후의 거처를 둘러봤다.

무도회 날에도 구두를 갈아 신으러 이곳에 왔었다. 혼수로 가져온 가구들이 그대로 있어서 마치 황태자비 궁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곳에서 살게 될 줄이야.’

카이젠의 어머니인 전대 황후께서 돌아가신 후 이 황후궁은 오랫동안 쓸쓸하게 비어 있었다.

철모르던 이런 시절엔 이곳에서 살게 될 날을 꿈꿨다.

언젠가 카이젠이 서편의 황제궁에 들어가는 날.

아스텔 자신도 황후궁에서 제국의 안주인으로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이혼하고 황궁을 떠나던 날, 황궁에서 사는 일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또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다니 인생이란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침실을 둘러보면서 감상에 젖어 있는데 시녀가 카이젠의 도착을 알렸다.

“아스텔 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카이젠이 왔다고?

지금은 대낮이었다. 황제의 궁전에서 정무를 보고 있을 시간인데 왜 이 시간에 여기를 왔지?

아스텔은 시녀의 안내를 받아 옆 방으로 들어갔다.

카이젠은 테오르의 방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테오르 옆에 서 있던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몸을 돌렸다.

“아스텔.”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

그와 함께 있던 벨리안이 아스텔을 발견하고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아스텔 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미리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서…….”

“네, 오랜만에 뵙네요.”

아스텔은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벨리안은 친절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무슨 일이든 성심을 다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딘지 비굴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테오르의 출생을 알고 난 뒤부터 벨리안은 아스텔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황후궁의 일로 몇 번 주문서를 보낼 때마다 극진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스텔은 곧 황후가 되고 테오르는 황태자가 될 것이다.

황제의 보좌관인 벨리안으로서는 지난 일들을 털어내고 아스텔과 잘 지내고 싶어 할 만도 했다.

아스텔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마음에 새겨두지요. 벨리안 님께서도 지금 하신 말씀을 잊지 마세요.”

“하하…….”

아스텔의 확고한 목소리에 벨리안은 어설프게 웃었다.

그의 얼굴엔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다는 불안감이 스쳐 갔다.

아스텔은 무심하게 돌아서서 테오르의 거처를 살폈다.

테오르의 방은 아스텔이 주문한 것보다 더 넓고 더 화려했다.

애초에 아스텔은 방을 치장해 달라는 게 아니라 구조와 위치를 바꿔 달라고 요구했었다.

‘이건 좀 과한데.’

동화책으로 가득한 작은 서재와 황후의 침실만큼이나 커다란 침실이 있었다.

서재에는 양쪽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방이 있었다. 하나는 정원이 내다보이는 아담한 거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난감이 가득한 놀이방이었다. 놀이방 안에는 방 안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수많은 장난감이 쌓여 있었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떠냐? 이곳이 마음에 들어?”

테오르는 자신의 새 장난감들을 구경하면서도 외할아버지가 가져온 익숙한 곰 인형 레빈을 끌어안고 있었다.

“……네.”

테오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넓고 사치스러운 방을 보니까 자기 방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저택에 있던 방도 화려했지만 이렇게 넓지는 않았다.

“황자님. 폐하께 감사 인사를 하셔야지요.”

카이젠이 실망하는 걸 보고 벨리안이 얼른 끼어들어서 아이를 달랬다.

벨리안은 조금 초조한 기색이었다.

테오르를 달래는 게 아니라 애원하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러지?’

가만히 지켜보던 아스텔은 그가 왜 저러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겁먹은 벨리안이 카이젠의 눈치를 살피는 걸 보자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카이젠은 테오르가 좋아할 만한 방을 꾸미라고 그간 벨리안을 많이 닦달한 모양이다.

테오르는 카이젠을 향해 기운 없이 머리를 꾸뻑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테오르는 카이젠이 자기 아버지라는 걸 알고 난 뒤부터 그를 조금 낯설어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테오르에게 ‘아버지’라는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꿈 같은 얘기였다.

그런데 가깝게 지내던 카이젠이 갑자기 자기 아버지라니 혼란을 느끼고 낯설어하는 것이다.

카이젠은 씁쓸한 얼굴로 테오르를 놔줬다.

크게 실망한 눈치라 아스텔도 좀 미안해질 정도였다.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다시 말했다.

“우선은 이곳에서 지내거라. 나중에 너를 위해서 새로운 궁을 내주겠다.”

테오르는 그 말에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화려한 궁전에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궁을 준다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테오르 님. 여기 귀여운 인형들도 있어요.”

한나가 테오르를 데리고 장난감을 하나하나 구경시켜 줬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침실을 다시 살펴보려고 옆 방으로 들어갔다.

카이젠이 그녀를 뒤따라왔다.

“아스텔.”

아스텔은 그의 눈빛에 나타난 절절한 애정을 못 본 척 무시했다.

“예, 폐하. 무슨 일이신가요?”

“더 필요한 건 없나? 뭐든 부족한 게 있으면 시종을 보내서 가져오라고 해.”

“필요한 건 없습니다. 그저 저와의 약속을 잘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아스텔의 딱딱한 반응에 카이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 당신은 날 못 믿는 건가?”

“네, 못 믿습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나오는 대답에 카이젠의 잘생긴 얼굴이 멍하니 굳어졌다.

아스텔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폐하께서는 신 앞에서 결혼 맹세를 하신 뒤, 다음 날 바로 제게 이혼을 요구하셨잖아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

아스텔의 말은 그런 뜻을 담고 있었다.

카이젠은 반박하지 못했다.

아스텔의 말대로 먼저 맹세를 깨뜨린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확실한 증거를 남겨두고 싶습니다.”

“내가 계약서라도 써주길 바라나?”

카이젠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

아스텔은 곧바로 대답했다.

“예, 이 결혼에 대한 조건을 계약서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하.”

이쯤 되자 카이젠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당신이 정 원한다면 계약서로 만들어서 서명을 해주지.”

그가 문을 열고 옆방을 향해 소리쳤다.

“벨리안!”

테오르와 함께 노닥거리던 벨리안이 놀란 얼굴로 뛰어왔다.

“서류를 가져와서 받아적어라.”

벨리안은 황급히 어딘가로 가더니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테오르의 침실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 서류를 펼쳐놓고 카이젠이 말하는 걸 받아적었다.

“결혼의 대가로 첫 번째 프리츠 폰 레스턴을 서부의 관리자로 임명한다.”

테이블에서 부지런히 글을 적던 벨리안이 힐끔 아스텔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은 조그만 별과 달, 조랑말 등의 아기자기한 무늬가 새겨진 아이들용 테이블이었다.

거기 앉아서 서류를 작성하는 벨리안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희극 같았다.

“폐하. 다 적었습니다.”

조건을 받아적은 벨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카이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텔이 가만히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해 주세요. 저는 5년 뒤에 제가 원하는 시점에 이혼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벨리안도 경악한 표정이었다.

설마하니 둘의 결혼에 이혼 조건이 달려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이다.

“폐, 폐하…….”

“그대로 적어라.”

벨리안이 아스텔의 조건까지 받아 적고 나자 카이젠은 펜을 들고 빠르고 거칠게 서명했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물었다.

“당신은 원하는 걸 다 가졌으니 이제 뭘 할 거지?”

아스텔은 서류를 집어 들며 말했다.

“프리츠 오빠의 일을 제대로 처리해 주세요. 아버지의 일은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 *

카이젠은 아스텔과의 대화를 끝내고 황후궁을 뛰쳐나왔다.

벨리안은 그를 뒤따라 가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안 좋은 시작인걸.’

오늘은 아스텔이 황후궁에 온 첫날이며 카이젠이 처음으로 황후궁을 찾아온 날이기도 했다.

카이젠이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옆에서 지켜본 벨리안은 잘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아스텔 님을 황궁으로 들이기 위해 후작을 빨리 수도로 데려오라고 매일 재촉했다. 늙은 후작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마차를 보내 아스텔 공녀를 데려왔고.

거기다 내심 아스텔 님이 기뻐해 줄 줄 알고 기대하셨던 것 같은데.

불행히도 이 의미깊은 황후궁의 첫날은 굉장히 불편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걸어가던 카이젠은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계약서를 달라고 하는 아스텔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지만, 감정이 가라앉고 나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제단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고 나서 단 하루 만에 그 맹세를 깨뜨렸으니.

‘…….’

문득 6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결혼 날짜가 정해진 무렵이었다.

아스텔은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직접 황태자궁에 들어와서 두 사람이 함께 지낼 거처를 꾸몄다.

혼수가 될 가구도 고르고 결혼식 드레스도 주문했다.

그때의 아스텔은 몹시 행복해 보였다.

간혹 가구나 태피스트리 같은 걸 보여주면서 그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다.

‘전하, 이건 어떠세요? 마음에 드시나요?’

물론 그는 결혼식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당신 마음대로 골라. 나는 당신의 안목을 믿어. 당신이 고른 거는 다 훌륭할 거야.’

매번 그렇게 그럴듯한 대답을 건넸다.

그러면 아스텔은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미소를 지었다.

행복한 예비 신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심 바보같이 기대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때처럼 아스텔이 기뻐할 거라고. 하지만 지금 황후궁으로 들어온 아스텔은 화려한 궁전을 무심한 눈빛으로 둘러보기만 했다.

딱딱한 얼굴로 서서 계약서에 서명이나 하라고 요구했다.

‘계약서 따위…….’

카이젠은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아스텔의 마음을 돌릴 것이다.

절대 쉬운 일을 아니겠다만.

“아스텔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

뒤따라오던 벨리안은 황제의 한숨 섞인 푸념을 들었다.

벨리안은 입을 굳게 다물고 듣기만 했다.

이런 상황엔 눈치껏 좋은 말을 해서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게 보좌관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가능할 것 같아서 도저히 좋은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무슨 짓을 하셔도 아스텔 님이 마음을 바꿀 것 같지는 않은데.’

방금 전에 쓴 계약서를 떠올리면 마음을 바꾸기는커녕 계속 황궁에 살기나 하면 다행이겠다.

벨리안은 마지막 조건을 떠올리며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정말로 5년 뒤에 떠나실 생각인 건 아니겠지?’

설마. 테오르 님이 있는데…….

하지만 아스텔의 단호한 성격을 생각하면 과연 이 결혼이 어떻게 될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 * *

카이젠이 돌아간 뒤 시녀가 또 다른 방문객을 알렸다.

“아스텔 님, 레스턴 공작님과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바쁘네.’

황후궁에 와서 짐을 푸르기도 전에 손님이 또 오다니.

아버지와 프리츠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텔이 도착하자 의자에 앉아 있던 레스턴 공작이 감탄하듯이 말했다.

“드디어 이곳에서 너를 보는구나. 6년 만이군.”

오랜 소원을 이뤘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목소리였다.

아스텔을 이곳에 넣기 위해 20년 가까이 노력해 왔으니 만족스러울 만도 했다만.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 곁에 있는 한나에게 손짓했다.

“날이 덥구나. 차를 가져와라.”

자기 집 하녀에게 하듯이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한나는 동상처럼 무표정하게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져올 필요 없어. 오래 계시지 않을 거니까.”

아스텔의 짤막한 명령에 레스턴 공작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나는 우리 황자님을 보러 왔다.”

“테오르는 아직 황자가 아니에요. 신전에서 검사를 받지도 않았어요.”

이미 테오르가 황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신전에서 혈연 검사를 다시 받아야 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신전에서 검사받을 수 있게 일정을 잡아뒀다고 들었다.

“황제의 아들이면 황자인 게지. 그 얼굴과 눈 색을 보면 누구라도 황자라고 할 거다.”

레스턴 공작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아주 감쪽같이 속였더구나. 6년씩이나 숨겨놓고 있었다니. 내 딸이지만 대단해.”

조롱과 감탄이 반씩 뒤섞인 말이었다.

아스텔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조용히 서 있던 프리츠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할아버님은 괜찮으신 거냐?”

“네, 상처를 좀 입으셨지만 괜찮으신 것 같아요.”

“다행이구나.”

레스턴 공작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게 그 나이에 왜 검을 들고 설치시는지. 그냥 가만히 계셨으면 다치지도 않았으련만.”

프리츠가 아버지의 무례한 말에 미간을 찡그린 반면 아스텔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세게 쥐었다.

외할아버지는 그 일로 팔을 크게 다쳤다.

감히 저런 소리를 하는 아버지도 똑같이 아프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분노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화를 내면 안 된다.

지금은 아버지를 회유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때 테오르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엄마! 이것 봐! 레빈의 옷이 있어!”

기사 옷을 입은 레빈을 들고 아스텔을 향해 달려오던 테오르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테오르의 시선은 의자에 앉아 있는 공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레스턴 공작은 아이를 발견하자마자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우리 황자님.”

테오르는 도망쳐서 아스텔의 뒤로 숨었다.

“엄마, 저 사람 싫어. 나쁜 사람이야.”

“테오르. 저분은 네 외할아버님이란다.”

“외할아버지?”

테오르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가족 관계의 호칭을 몇 번 가르치긴 했지만 테오르가 아는 외할아버지는 아스텔의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뿐이었다.

“그래.”

공작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테오르에게 손짓했다.

“황자님. 이 할아비에게 와보십시오.”

그러나 테오르는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려고 하자 곰 인형을 끌어안고 도망쳤다.

“나쁜 할아버지! 싫어!”

공작은 미소 짓던 얼굴 채로 굳어졌다.

아스텔은 아버지를 위로했다.

물론 진심은 담겨 있지 않았다만.

“신경 쓰지 마세요. 아직 낯설어서 그래요.”

“제가 잘 말할 테니 당분간은 테오르에게 가까이 가지 마세요. 낯을 많이 가려서 억지로 다가가면 더 싫어할 거예요.”

“사내애가 까탈스럽구나.”

공작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찡그렸지만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감돌았다.

“하긴, 일국의 황제가 될 아이라면 너무 쉽게 마음을 줘도 안 되지.”

아버지는 테오르가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황위 후계자이기 때문이겠지.

자신을 섭정으로 만들어줄 중요한 아이니까.

“안 그래도 아버지를 뵙고 싶었어요.”

“무슨 일로?”

아스텔은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차분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선언했다.

“저는 이제 이제 황후가 될 거예요. 테오르도 황자로 인정받을 테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해요.”

“내 도움이 필요하다?”

공작은 아스텔의 말을 듣고 조소를 보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곧 황후가 될 테고, 테오르는 황태자가 될 텐데 대신 중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아스텔은 솔직하게 털어놨다.

“황제가 네게 푹 빠져 있잖느냐.”

“그게 얼마나 가겠어요?”

아버지의 도움을 받겠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지금이야 아스텔 자신에게 빠져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있지만 카이젠은 언제 다시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레스턴 공자도 아스텔의 말에 동의하는 듯 혀를 찼다.

“하긴, 오래 못 갈 거다. 네가 너무 나이가 들었어.”

프리츠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아버지를 노려봤다.

아스텔은 그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눈짓을 보내고 다시 공작을 향했다.

“프리츠 오빠를 서부의 관리인으로 만들어 달라고 폐하께 부탁드렸어요.”

“뭐라고? 왜?”

자신의 것이었던 직책을 프리츠에게 준다는 말에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공작이 놀라서 아들을 돌아봤다.

아스텔은 답답하다는 듯이 설명했다.

“아버지에게 그 자리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오빠를 임명해 달라고 했어요.”

카이젠은 2년 전에 북부의 반란에서 트집거리를 잡아 공작가의 직책을 회수했다.

이제 와서 그걸 공작에게 돌려달라고 해봤자 들어줄 리가 없었다.

“들어주겠다고 하더냐?”

“네. 약속했어요.”

“잘했다.”

공작은 흔치 않게 애정 어린 눈으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몇 년 동안 구석에 처박아뒀던 잡동사니가 뒤늦게 쓸모 있다는 걸 깨달은 표정이었다.

공작은 아스텔을 품평하듯이 살폈다.

나이가 많다고 깎아내렸지만 사실 아스텔은 아직도 한참 젊고 아름다웠다.

아직도 저렇게 하녀처럼 평범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마른 몸엔 기품이 서려 있었다.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빠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회수했던 직책까지 다시 돌려준 것은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카이젠은 레스턴 가문을 없애버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아스텔의 한마디에 그걸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어 버린 것이다.

‘완전히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군.’

이건 생각보다 더 쉬울 것 같았다.

공작은 아스텔에게 다짐했다.

“그래. 이 아비를 믿어라. 너와 황자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할 테니까.”

“고마워요, 아버지.”

아스텔은 감동한 듯 미소 지었다.

‘미안하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되진 않을 거예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하지만 아스텔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프리츠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스텔은 그에게 계획대로 하라고 살짝 눈짓을 보냈다. 프리츠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은 신전에서 시작됐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마자 카이젠이 시종을 보냈다.

테오르를 신전에 데려갈 테니 준비시키라는 말을 전했다.

“벌써?”

신전에서 확인 절차를 밟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른 시간에 갈 줄은 몰랐다.

아스텔은 침실에서 간단한 아침을 들고 옷을 갈아입은 직후였다.

테오르는 아직 자기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황제의 시종은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한시라도 빨리 황자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신전에 이미 신관들이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신전에서 혈통을 검사하고 정식으로 황자 지위를 주고 싶은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테오르를 깨워서 가볍게 아침을 먹이고 신전에 갈 준비를 했다.

“어디 가는 거야?”

테오르는 졸린 눈을 부비며 사과잼을 곁들인 라이베쿠헨(감자 팬케이크)을 오물오물 잘라 먹었다.

아스텔은 그릇에 담긴 크림 수프를 식혀서 덜어주며 말했다.

“폐하와 함께 신전에 가는 거야.”

“신전에는 왜 가?”

테오르는 황궁에 적응하기도 전에 다시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신전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황제 폐하가 네 아버지라는 걸 알려주려고 가는 거야.”

아스텔은 테오르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함께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외궁으로 향했다.

황궁의 외궁에 도착하자 카이젠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오르, 어제는 잘 잤느냐?”

“네, 폐하.”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가워하던 카이젠은 아스텔을 보고 잠시 표정을 굳혔다.

어제 계약서를 써준 일이 생각 나서 저러는 건가 했는데.

카이젠이 무거운 낯으로 물었다.

“불편하면 안 가도 돼.”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공식 석상에서 수많은 귀족을 마주하는 일이니 불편할까 봐 걱정해 주는 모양이다.

그답지 않은 걱정에 아스텔은 당황함도 잠시,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테오르만 보낼 수는 없지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불편할 게 뭐가 있나.

이미 황궁 무도회에서 청혼을 받는 일도 겪었는데.

카이젠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에스코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니 치우라고 거절하고 싶었지만, 곁에서 테오르가 초롱초롱한 눈길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스텔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서둘러 불러내서 미안하군. 한시라도 빨리 신전 일을 끝내고 싶었어.”

“괜찮습니다, 폐하.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 빨리 끝내는 게 좋지요.”

맑은 햇살 아래 궁정 예복을 차려입은 카이젠의 옆모습이 보였다.

밀린 업무가 많을 텐데도 테오르를 황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온 것이다.

테오르를 아끼는 마음만은 진심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아스텔 자신은 카이젠에게 기대를 접었지만.

황궁 안에서 나란히 걷고 있으니 문득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에도 이렇게 황궁의 외궁에서 만나 함께 신전에 가곤 했었다.

특히 황태후 전하의 건강이 나빠질 때마다 아스텔은 카이젠과 함께 기도를 드리러 갔었다.

카이젠은 먼저 나와서 아스텔을 기다렸다.

‘아스텔.’

그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함께 와줘서 고마워, 아스텔.’

기억 속에서 십 대의 카이젠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아스텔은 밝은 햇살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반짝이던 추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제 그녀의 옆에는 당당한 황제가 된 카이젠과 어린 테오르가 있었다.

두 사람은 테오르를 데리고 신전으로 향했다.

* * *

시종의 설명대로 신전에는 이미 신관들이 나와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제단 아래엔 이 역사적인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예전에 아스텔이 황태후의 유언장에 서명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때는 대신들을 비롯한 중신급의 귀족들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귀부인들과 젊은 귀족 영애들까지 제단 아래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무도회 날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아스텔은 테오르와 함께 카이젠을 따라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모였다.

테오르는 너무 많은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자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속삭였다.

“괜찮아, 테오르.”

아스텔의 목소리에 테오르는 떨지 않고 의젓하게 걸었다.

늙은 대신관이 아스텔에게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성배에 금빛이 감도는 물을 담아서 가져왔다.

혈연을 검사할 때 쓰는 특별한 약물이었다.

테오르가 태어났을 때도 저 물로 외조부와 혈연관계가 있다는 걸 증명했었다.

외조부의 피를 물속에 집어넣고 갓 태어난 테오르의 손에서도 피를 빼서 넣었다.

검사 과정은 간단했다.

직계 혈연관계가 있으면 빛이 나고 남남이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혈연이 강할수록 강한 빛이 난다.

그때는 수면 위에서 희미하게 빛이 일다가 사라졌다.

그래도 테오르가 할아버지의 증손자라는 걸 입증하기에는 충분했다.

“황자님, 손을…….”

신관이 테오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테오르는 조금 겁먹은 얼굴로 아스텔을 돌아봤다.

“괜찮아. 테오르. 많이 아프지 않을 거야.”

대신관이 테오르의 손가락을 찔러서 피를 빼냈다.

테오르는 따끔한 아픔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입술을 깨물고 잘 참아냈다.

핏방울이 성배 안으로 떨어졌다.

일순간 눈이 부실 만큼 환한 빛이 지나갔다.

“아……!”

“정말로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신…….”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 섞인 소란이 일었다.

모두들 테오르가 카이젠의 아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걸 목격하자 뒤늦게 놀라움이 일어났다.

몇몇 사람의 눈에는 충격과 혼란이 담겨 있었다.

대신관이 인자한 목소리로 테오르를 달랬다.

“다 끝났습니다, 황자님.”

테오르는 울먹이던 걸 그치고 아픈 손을 매만졌다.

아스텔은 아이의 손을 잡아서 약을 발라줬다.

카이젠은 자부심 가득한 눈빛으로 테오르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테오르, 이리 와라.”

테오르는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걸어갔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한 팔로 들어 올려서 품 안에 감싸 안았다.

지켜보던 중신들이 뒤늦게 카이젠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굽혔다.

“폐하, 황자님을 찾으신 걸 경하드립니다.”

대신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카이젠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켜보는 아스텔은 웃을 수 없었다.

황자를 찾은 걸 축하한다라.

평생 이런 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건만.

오늘은 테오르가 황자로 인정받은 중요한 날이었다.

하지만 부모인 두 사람은 극적으로 희비가 엇갈렸다.

카이젠은 행복한 얼굴로 자신의 아들을 신하들에게 내보였으나, 그 옆에 선 아스텔은 허망하고 쓰라린 감상만을 느꼈다.

아스텔은 테오르가 황제의 아들로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기를 바랐다.

힘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영원히 신분을 들키지 않고 조용히 살 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나 헛된 희망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제는 좋든 싫든 이곳에서 테오르를 지키기 위해 사는 수밖에 없었다.

아스텔은 한쪽에 조용히 서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마른 체구의 중년 남자였다.

“저, 아스텔 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저는 내무대신인 뷔르겐 자작입니다.”

처음 듣는 이름은 아니었다.

아스텔이 공녀로 살던 시절에도 중간급 관리였던 남자였다.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레스턴 가문과도 꽤 친밀했다.

‘대귀족들이 몰락하고 대신급에 올랐나 보네.’

“예, 오랜만에 뵙네요. 황후궁을 새로 단장하느라 바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혼 준비까지 여러모로 바쁘실 것 같네요.”

내무대신은 아스텔이 자신의 공을 알아주자 반가워하며 말을 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결혼식은 제가 차질없이 준비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만간 황후 폐하가 되실 테니 미리 축하 인사를 드리고자…….”

아스텔은 정중하지만 냉정한 태도로 줄줄이 이어지는 말을 끊어냈다.

“저는 폐하의 명령으로 황자님을 데리고 왔을 뿐입니다. 축하 인사는 결혼식 이후에 받겠습니다.”

아직 황후가 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대신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이렇게 세력 판도에 따라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사람과 친분을 쌓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 그러시군요. 그럼 나중에 다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아스텔은 실망한 표정의 내무대신에게 인사를 건넨 뒤 사람들을 피해서 신전의 테라스로 나갔다.

잠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정원을 감상했다.

황궁에 옮겨온 직후 신전으로 나온 것도 피곤했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피곤했다.

잠시라도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뒤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이곳에서 인사를 드리게 되었군요, 아스텔 님.”

돌아봤더니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세르벨의 아버지인 에클렌 백작이었다.

“백작님. 이번에도 신전에서 뵙네요.”

“말씀을 편히 하십시오.”

백작은 테라스로 나오면서 멋쩍은 듯이 말했다.

“저는 황후 폐하께 공대를 받을 만한 신분이 아닙니다.”

“저는 아직 황후가 아닌걸요.”

백작은 신전 안을 돌아봤다.

유리문 너머로 카이젠과 함께 있는 테오르가 보였다.

“황자님께서는 어린 나이에도 의젓하시군요.”

테오르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수많은 사람을 올려다보며 얌전히 서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금 당황한 것 같긴 했지만 겁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백작은 그런 테오르를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황자님의 침착한 성격은 아스텔 님을 닮으셨나 봅니다.”

“폐하를 닮았겠지요.”

카이젠은 침착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아스텔은 예의상 그렇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황제를 닮았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게 예의였다.

더군다나 이 남자는 황제의 측근이었다.

백작은 아스텔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소리 없이 웃었다.

그도 카이젠과 침착함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스텔 님께서는 어머님을 정말 많이 닮으셨군요.”

“저희 어머니를 아시나요?”

질문을 내뱉는 순간 외조부의 부관이었으니 당연히 어머니를 잘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클렌 백작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예, 친구 사이였습니다.”

“저희 어머니의 친구분이시라고요?”

젊은 부관과 상관의 딸 정도의 관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라는 말이 나오다니 의외였다.

찰나의 순간 백작의 눈에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깊은 회한이 스쳐 갔다.

“귀한 분과 친구라고 하기엔 좀 그렇군요. 나이가 비슷해서 가깝게 지냈지요.”

“그러시군요.”

백작은 가볍게 말했지만 꽤 친한 사이처럼 들리는 어감이었다.

‘이건 처음 듣는 얘기인걸.’

외할아버지는 그런 말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왜 어머니와 가까웠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을까?

조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스텔은 찜찜한 기분을 숨기며 미소 지었다.

“백작님, 괜찮으시면 황후궁에 한 번 방문해 주시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네요. 어머니의 이야기도 더 듣고 싶고요.”

아스텔은 순수한 호의처럼 말했지만, 사실 순수한 호감만은 아니었다.

현재 대신 중에 아스텔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나마 인연이 닿은 사람은 이 남자뿐이었다.

이 남자는 군부를 책임지는 군무대신이었으니 이참에 친분을 쌓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외조부와 연관된 인연도 있고 백작 본인도 아스텔에게 호의적이었으니까.

아스텔은 그런 의도로 백작을 황후궁에 초대했다.

“감사합니다, 아스텔 님. 빠른 시일 안에 찾아뵙겠습니다.”

백작은 기뻐하면서 초대를 받아들였다.

* * *

신전에서의 행사는 무리 없이 끝이 났다.

그날부터 아스텔이 사는 황후궁에는 새로운 시종들이 추가됐다.

“폐하께서 황자님을 시중들라고 보내셨습니다.”

원칙대로 하면 황자로 인정받은 테오르는 자기 궁을 따로 받아서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서 황궁에 적응할 때까지는 이곳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궁전을 내려주지 못하니 황자의 시종단이라도 먼저 만들어주려는 모양이었다.

“잘 부탁하네. 주의할 사항은 한나가 알려줄 거야.”

시종들의 우두머리가 아스텔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서 인사하고 물러갔다.

아스텔은 시종들이 밖으로 나간 뒤에 한나에게 고개를 기울이고 속삭였다.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 알아봐.”

황후궁의 시녀들은 전부 한나가 선별해서 데려왔다.

카이젠이 보낸 시종들도 그쪽에서 나름대로 골라서 보냈겠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테오르의 곁에 둘 사람들은 주의해서 골라야 해.’

이곳 황후궁에 들어오면서 아스텔이 가장 주의를 기울인 건 테오르의 안전이었다.

당분간 테오르는 이곳에서 돌보겠다고 한 것도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아스텔은 궁전의 구조부터 신경을 많이 썼다.

테오르의 거처를 가장 안쪽으로 두고 반대편엔 아스텔의 거처를, 다른 쪽에는 외조부의 방이 있게 만들었다.

양쪽 통로를 따라 온종일 시녀들이 돌아다녔고, 정원에는 궁전을 지키는 근위대 병사들이 밤낮없이 초보를 섰다.

테오르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이 닿을 수 있었다.

“엄마!”

테오르가 아스텔을 찾아서 테라스로 뛰어왔다.

“테오르. 할아버지와 놀고 있는 줄 알았는데.”

홍옥 같은 붉은 눈이 맑은 호기심과 애정을 담고 아스텔을 바라봤다.

수도에 돌아온 뒤로 테오르는 더 이상 색을 바꾸는 약을 눈에 넣지 않았다.

테오르는 매일 약을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보다 아스텔을 마음껏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가 더 좋은 모양이었다.

틈만 나면 아스텔을 엄마라고 부르고 쫓아왔다.

“할아버지는 이제 졸린가 봐.”

테오르는 아스텔의 의자 팔걸이에 매달렸다.

“엄마, 우리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해?”

“여기 있는 게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테오르는 고민스러운 듯 입을 다물었다.

아직 여기가 낯선 모양이지.

수년간 할아버지와 셋이서 도란도란 살았는데, 이런 커다란 궁전은 적응하기 힘들 만도 했다.

한나가 테오르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으며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황자님, 정원에 작은 성을 만들어 드릴까요?”

“성? 진짜 성을 만들 수 있어?”

“그럼요. 하인들에게 부탁해서 나무로 근사한 성을 만들어 드릴게요.”

한나는 아스텔을 슬그머니 돌아보며 덧붙였다.

“예전에 황태자궁에도 그런 성이 있었답니다. 어린 황태자 전하와 어린 공녀님을 위한 놀이터였지요.”

한나가 말하는 건 어릴 때 황태자궁 정원에 있던 작은 성이었다.

어린 카이젠을 위해 황태후 전하께서 만들어주신 조그만 성채였다.

“여기에도 만들어 줘!”

“성을 어떻게 만들지 그림으로 그려주세요. 똑같이 만들어 드릴게요.”

“응!”

테오르는 신이 나서 한나의 손을 잡고 자기 서재로 갔다.

아스텔은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약을 넣지 않아서 테오르의 눈은 카이젠과 똑같은 붉은색이었다.

신전에서 둘이 나란히 서 있을 때도 느꼈지만, 그렇게 똑같은 머리색과 눈색을 하고 서 있는 둘은 누가 봐도 부자지간처럼 보였다.

똑똑.

시녀가 문을 열고 서한을 가져왔다.

“아스텔 님, 밀로트 자작 부인께서 다른 부인들과 함께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자작 부인?”

서한에는 황후궁에 방문해서 아스텔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는 요청이 적혀 있었다.

참석자로 적힌 이름은 전부 중신급 귀족들의 부인들이었다.

그중엔 플로린의 어머니인 크로이첸 후작 부인의 이름도 있었다.

아마 국무대신인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서 귀부인들 틈에 끼었나 보다.

‘곧 황후가 될 테니 눈도장을 찍어두고 싶다는 뜻이군.’

마음 같아서는 그냥 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황후가 되면 사교계의 귀부인들 모두와 척을 지고 살 수는 없었다.

“그래. 오후에 방문해 달라고 전해.”

* * *

몇 시간 뒤 귀부인들이 아스텔을 찾아왔다.

응접실로 갔더니 열 명쯤 되는 귀부인이 모여 있다가 아스텔을 향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아스텔 님.”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그중 제일 나이 많은 부인이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나섰다.

이 사람이 편지를 보낸 자작 부인인 모양이다.

“아스텔 님. 알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식 전에 미리 인사를 드리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했습니다.”

이 중에 아스텔과 친분이 있는 귀부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따로 오지 못하고 다 함께 온 것이겠지.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차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스텔 님.”

응접실 옆에는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한 접견실이 있었다.

아스텔이 차를 가져오라고 하자마자 시녀들이 접견실의 테이블에 차와 디저트를 내왔다.

찻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아스텔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축하드립니다, 아스텔 님.”

끝없이 이어지던 축하 인사의 행렬은 마지막 자리에 가서 갑작스레 끊어졌다.

크로이첸 후작 부인이었다.

아스텔과 제일 먼 자리에 앉아 있던 크로이첸 후작 부인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주변의 눈치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뭐, 저도…….”

아스텔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부인께서는 테오르를 사생아라고 폄하하셨지요.”

아스텔은 후작 부인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와서 제게 축하 인사를 하려면 우선 그 일부터 사과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테이블 위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후작 부인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스텔을 노려봤다.

형식적으로라도 사과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후작 부인이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는데도 어느 누구도 그녀를 따라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후작 부인의 인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유일한 황자의 모후인 아스텔이 그 정도로 황궁 안에서 확고한 위치라는 뜻이기도 했다만.

아스텔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살펴가세요. 앞으로는 이곳에서 부인을 안 보고 싶습니다.”

저택의 복도를 지나가던 플로린은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반쯤 열린 문 안에서 시끄러운 고함이 들렸다.

플로린은 말리려고 들어가는 하녀를 막았다.

“내버려 둬.”

플로린은 혀를 차면서 자기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아스텔의 아들이 황자로 밝혀진 뒤부터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좋을 수가 없겠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자를 사생아라고 비웃어댔으니.

수도로 돌아온 뒤, 후작 부인은 근신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전과 다름없이 지냈다.

티 파티를 열고 산책을 나가고 무도회에 참석했다.

황제는 국무대신인 크로이첸 후작의 체면을 봐서 후작 부인을 용서해 준 거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런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굴더니, 무도회장에서 황제의 청혼을 받은 아스텔에게 ‘사생아를 낳은 여자’라며 공개적으로 모욕을 줬다.

그러나 사생아인 줄 알았던 어린아이는 황제의 아들이었다.

아스텔을 비웃던 귀족들은 뒤늦게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아스텔을 모욕한 후작 부인은 애를 써볼 기회도 없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새 황후가 될 아스텔과 화해하라고 어머니를 강제로 황궁에 보냈는데.

반응을 보니 그나마도 완전히 실패한 모양이다.

‘한심하기는.’

어머니의 생각 없는 행동에 짜증이 밀려왔다.

아스텔의 일로 가장 난처한 상황에 놓인 사람은 후작 부인이었지만, 가장 큰 분노를 느낀 사람은 플로린이었다.

‘황제가 일을 이렇게 빨리 진행할 줄은 몰랐어.’

손쓸 새도 없이 테오르는 황자가 되고 아스텔은 황후궁을 차지했다.

황후 자리는 하나뿐이다.

그녀가 황후가 되기 위해서는 아스텔이 사라져야만 한다.

어머니와 달리 플로린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황제는 아스텔에게 정신없이 빠져버렸다.

둘 사이에는 이미 황태자가 될 황자도 있다.

이런 상황에 아스텔 모자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분노한 황제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폐하가 그녀를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해.’

아스텔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귀여운 황자까지 낳아서 기르고 있지만, 그녀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이었다.

“공작가의 일은 어떻게 됐어?”

플로린은 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모에게 물었다.

유모는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믿을 만한 하인들을 구해뒀습니다.”

플로린은 유모의 대답을 들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공작의 반역죄를 세상에 낱낱이 밝혀내면 아무리 황제 폐하라고 해도 그녀를 내쫓을 수밖에 없지.’

플로린은 공작가를 무너뜨려서 아스텔과 테오르를 함께 옭아맬 생각이었다.

지난 6년간 레스턴 공작은 황제를 죽이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몄다. 그중 한 가지만이라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밝혀진다면 공작가는 반역죄로 멸문당할 것이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도 반역자의 딸을 황후로 삼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공작이 처형당하면 아스텔도 황후의 보관을 벗어놓고 황후궁을 떠나게 될 것이다.

* * *

신전에서의 검사 이후, 카이젠은 결혼식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모든 것을 속성으로 준비하느라 더 골치가 아팠다.

어지간한 일은 시종장이나 벨리안이 알아서 처리했지만 그래도 카이젠이 직접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웨딩드레스 문제도 그중 하나였다.

원래대로라면 신부의 웨딩드레스는 신부 가문에서 만든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직접 아스텔에게 최고의 드레스를 주고 싶었다.

“웨딩드레스는 수도의 의상실에 주문해라. 돈이 얼마가 들든 가장 화려하게 만들라고 해.”

그는 보석이든 뭐든 아끼지 말고 최고로 호화롭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예, 폐하.”

난생처음 결혼식 준비를 떠맡게 된 벨리안이 기운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벨리안은 요즘 밤낮없이 일만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업무가 쌓여 있었는데 이제는 황제 폐하의 결혼식까지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는 영혼 없이 황제의 명령을 받아 적으며 생각했다.

‘국고가 풍족해서 예산이라도 많아서 다행이지.’

황제 폐하께서는 조만간 있을 결혼식을 위해 돈을 아낌없이 퍼붓고 계셨다.

이대로 가면 역사상 유례없는 성대한 국혼이 될 듯싶었다.

‘하지만 과연 아스텔 님이 좋아하실지…….’

성대한 결혼식을 열고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웨딩드레스를 주문해 봤자 아스텔은 감동하는 척도 안 할 것 같았다.

오히려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귀찮아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벨리안은 몹시 회의적이었지만 카이젠은 드레스 이야기를 끝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랑말은? 준비가 끝났느냐?”

“예, 폐하. 밖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시종장의 대답을 들으며 카이젠은 밖으로 나갔다.

정원으로 통하는 입구에 작은 흰색 조랑말이 대기하고 있었다.

* * *

아스텔은 한나에게 지시를 전하면서 복도를 걸어가는 중이었다.

“결혼식과 관련된 준비는 한나 네게 맡길게.”

신전에서의 검사 이후 아스텔은 황후궁을 관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결혼 예식은 황제궁에서 알아서 준비한다고 전해왔지만, 황후궁에서도 화장이나 보석, 신혼 침실 같은 잡다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아스텔은 결혼식이든 침실이든 그런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예법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그냥 간소하게 준비해도 된다.

“예, 아스텔 님. 제가 책임지고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정원 옆의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정원으로 통하는 창문에 뭔가가 쓱 지나갔다.

얼핏 아스텔 키만큼 높은 위치에 작은 검은 머리가 보였다.

“테오르?”

아스텔은 황급히 창문으로 달려갔다. 정원에서 놀고 있는 테오르가 보였다. 흰색 조랑말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는 테오르가.

“테오르 뭘 하고 있는 거니?”

아스텔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엄마!”

조랑말에 올라탄 테오르가 아스텔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대로 잡아야지. 이걸 놓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카이젠이 있었다.

카이젠은 직접 조랑말의 고삐를 쥐고 테오르가 말을 타고 돌아다닐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그래. 상체를 꼿꼿하게 세워야지.”

“폐하,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스텔은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테오르에게 조랑말을 선물해 주려고 왔어.”

“테오르는 아직 말을 타기엔 너무 어립니다.”

테오르는 이제 5살이었다.

아직은 작은 조랑말도 위험했다.

“고삐를 잡게 하고 태워주면 돼. 어떠냐? 말 타는 거 좋지?”

“말 좋아!”

조랑말 위에 올라탄 테오르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러다가 화난 표정의 아스텔을 보고 금방 기가 죽었다.

“……근데 엄마가 싫으면 싫어.”

테오르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원래부터 동물을 좋아하는 성격이니 실망할 만도 했다만.

카이젠은 그런 테오르가 안타깝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식간에 아스텔 자신만 나쁜 부모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허락했다.

“폐하께서 가져오셨으니 오늘은 잠시만 타고 놀아. 대신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응! 나 안 움직일 거야!”

“내가 직접 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카이젠은 다시 고삐를 쥐고 조랑말을 끌려고 했다.

아스텔은 얼른 정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불렀다.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천천히 걷게 해.”

“예, 아스텔 님.”

아이를 돌본 경험이 없는 카이젠보다는 조심성 많은 시종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카이젠은 아쉬운 눈빛으로 시종에게 고삐를 건넸다.

하지만 그는 고삐를 빼앗기고도 테오르를 따라가면서 자세를 잡는 걸 도와줬다.

“안장을 딛고 서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조랑말은 이름이 뭐예요?”

“아직 이름은 없다. 네가 지어주렴.”

카이젠은 조랑말과 승마에 대해 알려주면서 테오르와 잘 놀아주고 있었다.

카이젠이 저렇게 테오르를 잘 돌보는 걸 보니 신기한 기분이 든다. 카이젠은 원래 어린아이를 싫어했다. 어릴 때도 자기보다 어린 귀족 아이들을 보면 질색하면서 피하고는 했었다.

‘자기 아이라는 걸 알아서 좋은 걸까.’

뒤늦게 아들을 찾아서 좋은 모양이다.

그간의 노력 덕분인지 아이를 돌보는 게 제법 능숙해 보인다.

테오르를 달래면서 자세를 잡게 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부자지간처럼 보였다.

카이젠이 어린 자식을 돌보는 아버지가 되다니. 그에게서 의외의 면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테오르도 언제 어색했냐는 듯이 밝은 얼굴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참 테오르와 대화를 나누던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에는 자부심과 애정이 가득했다.

“저 녀석 말을 잘 타는걸. 용감하고 소질이 있어. 나를 닮았나 봐.”

카이젠은 농담 섞인 자화자찬을 했다.

아스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5살짜리 아이에게 조랑말을 선물해 주는 용감한 아버지보다는 아이가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겁 많은 아버지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스텔이 반응해 주지 않자 민망한 듯이 덧붙였다.

“그래도 사내 녀석치고는 조심스럽고 얌전해.”

“그런 면은 폐하를 닮지 않았나 보네요.”

아스텔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성 없고 자기 멋대로인 카이젠과 달리 테오르는 얌전하다는 뜻이었는데, 카이젠은 그 말을 듣고 잘생긴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야 당연히 그런 차분한 면은 당신을 닮았겠지.”

우리 두 사람의 아들이니까.

그는 그런 뜻으로 말하고 있었다.

카이젠은 그녀만 들을 수 있게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황궁은 안전해.”

“…….”

아스텔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테오르는 조랑말을 타고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말을 저렇게 잘 타는 걸 보니 교육을 시작해도 되겠어. 이참에 가정교사와 검술 스승을 구해주는 게 좋을 것 같군.”

“검술 스승은 아직 이르지 않을까요?”

가정교사는 아스텔도 슬슬 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아직 5살인데 검술은 조금 일렀다.

적어도 7살은 돼야 하지 않을까.

카이젠은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도 저 나이 대 시작했으니 이른 나이는 아니지.”

“외람되오나 폐하께서는 6살 때부터 검술을 배우셨습니다.”

카이젠이 살짝 놀란 듯 아스텔을 돌아봤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

그야 프리츠 오빠에게 들어서 알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첫사랑에 빠진 어린 아스텔은 카이젠에 대해서 뭐든지 알고 싶어 했다.

그가 어떤 걸 싫어하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전부 외우고 다녔지.

대답 없는 아스텔을 보며 카이젠은 뜬금없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기초 자세라도 배우는 게 좋아. 내가 시간 날 때마다 와서 가르쳐 주지. 가르치는 김에 승마 연습도 시키고.”

이 말을 하려고 조랑말을 데려왔구나.

승마와 검술을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매일 이곳에 와서 테오르와 놀아주고 싶은가 보다.

하지만 아스텔은 승마나 검술 교육을 카이젠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카이젠은 실력이 뛰어나긴 했지만 어린아이를 대하는 조심성은 부족했다.

“고마우신 말씀입니다만, 폐하께서는 바쁘실 테니 따로 스승을 구하겠습니다.”

카이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그녀의 말을 반박하려는데, 실컷 말을 탄 테오르가 말에서 내려서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카이젠은 웃으면서 물었다.

“즐거웠느냐?”

“네, 폐하.”

테오르는 아스텔에게 매달리면서 뒤늦게 생각난 듯이 카이젠을 돌아봤다.

“감사합니다, 폐하.”

순간 카이젠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감돌았다.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주려고 직접 조랑말을 골라서 가져왔다.

테오르는 조랑말을 좋아했지만 여전히 카이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카이젠은 조금 씁쓸한 눈빛으로 테오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 재밌었으면 됐다.”

* * *

“알아봤느냐?”

크로이첸 후작 부인은 자신의 시녀에게 물었다.

황궁에서 아스텔에게 모욕을 당한 뒤 그녀는 어떻게든 설욕할 기회를 찾았다.

단순히 모욕당한 것에 분노해서만은 아니었다.

아스텔이 사라져야 플로린이 황후가 될 수 있다.

후작 부인은 어떻게 하면 아스텔을 없앨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스텔만 사라지면 테오르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깟 어린 황자 따위 우리 플로린이 황후가 돼서 아들을 낳으면 먼지보다 못한 존재가 될 테니까.

‘그 여자를 없앨 기회만 찾으면 되는데.’

그러나 아스텔이 얼마나 철저한지 도통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스텔은 황후궁의 일손들을 전부 자기 사람들로 채워 넣고 생필품 하나하나까지 빈틈없이 확인하고 있었다.

‘흥. 적이 많다는 걸 아는 거겠지.’

지금은 황제가 아스텔에게 푹 빠져 있으니 대신들도 겉으로는 그녀에게 굽신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신은 레스턴 공작과 원수 관계였다.

속으로는 그 레스턴 공작의 딸이 황후가 되고 황자를 낳았다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스텔도 그런 불안한 분위기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감시를 해도 빈틈이 생기는 법이다.

아스텔이 결혼식 날 입을 웨딩드레스는 수도의 최고 의상실에서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후작 부인은 그 드레스에 주목했다.

그걸 잘 이용하면 아스텔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곁에 있던 시녀가 그녀의 말을 듣고 조용히 대답했다.

“예, 의상실 안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놨습니다.”

후작 부인은 시녀의 설명을 들은 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절대 실패하면 안 돼. 반드시 이번에 그 여자를 없애야 해.”

아스텔의 치밀한 성격상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번 한 번에 성공해야 했다.

* * *

“황자님!”

정원에서 블린과 함께 놀던 테오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복도를 걷던 벨리안이 정원으로 나오고 있었다.

“황자님, 여기 계셨군요. 사냥개와 놀고 계신 겁니까?”

테오르는 솜을 넣은 폭신한 공을 두 팔로 끌어안고 그에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이런, 제게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테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가 백작님이니까 존댓말 쓰라고 그랬는데.”

“언제 그러셨나요?”

“음…… 숲에 별장이 있는 성에서요.”

황제를 만난 뒤 제일 처음 갔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며칠 동안 있었는데 계속 비가 왔었지.

그래도 사냥 별장에서 블린을 만났다.

“하하. 그때는 황자님이신 줄 몰랐으니까요.”

벨리안은 친절한 얼굴로 웃다가 ‘아스텔 님께서 철저하게 숨기셨죠’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테오르가 그를 멀거니 올려다보자 벨리안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황자님, 이 궁전이 마음에 드세요?”

“응. 여기 좋아요.”

테오르는 그동안 황궁 생활에 익숙해졌다.

황후궁의 구조에도 익숙해지고 한나와 할아버지가 알려주는 궁정 예절도 어설프게나마 익혔다.

거의 매일 이곳에 찾아오는 카이젠과도 전보다 더 친숙해졌다.

“폐하도 여기 왔어요?”

“아…… 폐하께서는 오늘은 못 오실 겁니다. 오늘은 너무 바쁘시거든요.”

벨리안은 무릎을 굽히고 테오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는 다정한 눈길로 말했다.

“이런 편안한 곳에서는 아버님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황자님은 폐하의 아드님이시니까요.”

“…….”

테오르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카이젠이 아버지라는 건 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왜 우리와 같이 살지 않았을까?’

아빠 엄마는 한집에 같이 사는 거라고 했는데.

이해할 수가 없다.

엄마는 아버지가 바쁘고 위험해서 우리에게 오지 못한 거라고 말했다.

‘황제 폐하는 제일 강하고 제일 높은 사람인데 우리 집에 못 올 만큼 바쁘고 위험했다니.’

황제 폐하는 성과 궁전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성에 가보지 못했다.

테오르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한 건 엄마와 할아버지가 황제 폐하를 싫어한다는 거였다.

물론 두 사람이 황제를 싫어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엄마는 황제 폐하를 볼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할아버지도 황제 폐하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차가워졌다.

‘황제 폐하가 뭔가 잘못한 걸까?’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황제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버지라는 걸 모를 때는 그냥 좋았는데.’

폐하는 친절하고 다정하고…….

조랑말도 태워주고 장난감도 매일 준다.

하지만 엄마와 할아버지하고 화해하기 전까지는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음…… 그냥 폐하라고 부를래.”

테오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공을 던졌다.

블린이 공을 따라서 화단 쪽으로 뛰어갔다.

테오르도 그 뒤를 따라갔다.

벨리안은 어린 황자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혀를 찼다.

어린 황자님의 입에서 ‘폐하’ 소리가 나올 때마다 쓸쓸히 상처받는 황제 폐하가 떠올랐다.

‘갈 길이 멀구먼. 갈 길이 멀어.’

* * *

“아스텔 님. 결혼식 예산안과 예식 순서, 내부 장식, 초대 명단, 그리고 드레스 도안입니다.”

벨리안은 아스텔에게 두툼한 서류와 서류철에 담긴 도안을 보여줬다.

서류는 결혼식의 세부 사항을 계획한 것이었고, 서류철에 있는 건 카이젠이 의상실에 주문한 웨딩드레스의 도안이었다.

아스텔은 벨리안이 건네주는 것들을 대충 보고 한나에게 건네줬다.

“한나. 네가 알아서 정리해 줘.”

“네, 아스텔 님.”

벨리안은 아스텔이 서류를 대충 훑어보고 내려놓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그가 며칠 동안 야근을 하며 준비한 서류가 5초 만에 한나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스텔 님, 그 드레스에 얼마가 들어갔는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네요. 제가 지불해야 하는 금액인가요?”

“……물론 그건 아닙니다만.”

아스텔은 그럼 뭐가 문제냐는 시선을 보냈다.

벨리안은 할 말을 잃고 그냥 자리에 앉았다.

시녀가 그를 위해 차와 디저트를 내왔다.

“마침 잘 오셨어요. 조언을 구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제가 꼭 조언을 드려야 하는 일입니까?”

찻잔을 들던 벨리안은 꺼림칙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그러시나요?”

벨리안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아스텔 님께서 제게 도움을 청하셨을 때마다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요.”

‘그랬나?’

아스텔은 그의 말을 들으며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가 벨리안을 필요로 했던 건 별장 사건을 빼고 단 두 번뿐이었다.

처음엔 약초를 찾으러 가자고 했었고, 그다음은 후작 부인과 티파티를 열어달라고 했었다.

생각해 보니 둘 다 벨리안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 아니긴 했다.

“이번에는 그런 부탁이 아니에요. 테오르의 검술 스승을 구하려고 하는데 적임자가 있는지 추천을 받고 싶어요.”

테오르는 황제의 적장자고, 이제 곧 황태자가 될 것이다.

황태자의 스승을 정하는 일은 무척 까다로운 문제였다.

스승은 훗날 장성한 황태자의 최측근이자 조언자가 된다.

‘마음 같아서는 프리츠 오빠의 친구 중 한 명을 고르고 싶지만.’

그러나 프리츠의 친구들은 전부 옛 대귀족들이었다.

그나마도 거의 세력을 잃고 몰락한 상태였다.

현재 중신들은 전부 카이젠에게 발탁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레스턴 공작가의 딸이 황후가 되고 황태자를 낳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다.

이 와중에 어린 황자의 스승도 대귀족으로 뽑으면, 중신들은 새 황후가 옛 귀족들을 복권해 자기들을 몰아내려는 게 아닌가. 하고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사람을 데려올 수도 없고.’

레스턴 가문을 적대시하는 사람이라면 테오르를 믿고 맡길 수 없으니까.

아스텔은 고민 끝에 제일 적임자가 될 만한 사람을 골랐다.

신흥 귀족에 속하면서 황제의 측근인 사람.

하지만 아스텔과도 인연이 있어서 신뢰가 가는 사람.

에클렌 백작의 양아들 세르벨이었다.

세르벨은 의심할 바 없는 황제의 측근이지만, 그의 양아버지인 에클렌 백작은 외할아버지와 인연이 있고 돌아가신 어머니와도 친분이 있다.

아스텔이 원하는 조건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를 지목하는 건 조금 곤란하지.’

아스텔이 갑자기 세르벨을 테오르의 스승으로 삼겠다고 하면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사람들은 황제의 측근인 세르벨이 레스턴 가문과 무슨 관계인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다.

잘못하면 쓸데없는 억측으로 그와 에클렌 백작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러 벨리안에게 의견을 구했다.

분명 세르벨과 오랜 친구 사이라고 했으니까.

다른 사람을 추천해도 트집을 잡아 거절하다 보면 세르벨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측근 중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고르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예상대로 벨리안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아스텔이 원하던 이름을 꺼냈다.

“음. 세르벨 경은 어떠십니까?”

“세르벨 경이요?”

아스텔은 찻잔을 내려놓고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분은 란베르크 기사단을 통솔하느라 바쁠 텐데요. 테오르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을까요?”

벨리안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근위기사단의 린든 경이라면 수도에서도 바쁘지만, 세르벨은 그 정도 여유 시간은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전쟁을 위해 훈련받는 란베르크 기사단은 평화로울 때는 수도 근교에서 매일 훈련만 반복한다.

평시엔 한가한 직책이다 보니 선대에는 란베르크 기사단장이 황태자나 황자의 스승이 되는 일도 흔했다.

아스텔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세르벨 경에게 부탁해도 되겠네요.”

“잘 됐군요. 제가 당장 세르벨에게 알리겠습니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찻잔을 드는 벨리안을 보며 아스텔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고마워요, 벨리안 님.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 * *

벨리안이 돌아간 뒤 아스텔은 한나를 불러서 다시 명령했다.

“결혼식과 관련된 일은 중요한 부분만 살펴줘.”

이 결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스텔 님. 제가 꼼꼼하게 살피겠습니다.”

그 후 아스텔은 늦은 오후까지 황후궁의 일을 관리했다.

저녁이 되어갈 무렵, 시녀가 방문객의 도착을 알렸다.

“아스텔 님.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세르벨이 예의 바른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세르벨 경. 빨리 오셨군요.”

* * *

카이젠은 빠른 걸음으로 황후궁 안으로 들어갔다.

좀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일이 많아서 늦고 말았다.

이곳에 오려고 무리해서 일을 끝내놓고 오는 길이었다.

아스텔의 거처에 들어서자 시녀들이 그를 보고 예를 갖췄다.

“폐하.”

“아스텔은 어디 있지?”

시녀들이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을 거닐고 있는 아스텔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세르벨이 있었다.

‘저 녀석이 왜 여기 있지?’

아스텔은 세르벨과 대화를 나누며 정원을 걷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의 정원에는 한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평화로운 정원을 배경으로 두 남녀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세르벨이 옆에 있는 아스텔에게 뭔가를 이야기했다.

아스텔이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카이젠은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을 열었다.

“폐하?”

정원을 거닐던 두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카이젠은 가까스로 화를 참으며 물었다.

아스텔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세르벨 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카이젠의 귀에는 보면 모르냐는 듯한 책망의 소리로 들렸다.

카이젠은 세르벨을 돌아봤다.

“경은 몹시 한가한 모양이군.”

평온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저절로 비꼬는 소리가 나왔다.

세르벨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그는 몹시 죄송하다는 듯이 사죄했지만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모를 만도 했다.

카이젠도 그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그냥 이 젊고 잘생긴 기사가 아스텔과 함께 있는 모습에 화가 날 뿐이었다.

아스텔은 이 모습을 어이없이 보다가 끼어들었다.

“폐하, 제가 세르벨 경을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왜?”

아스텔은 그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폐하의 명령대로 테오르의 스승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벨 경에게 테오르의 검술 스승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고요.”

그 말에 카이젠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누구 마음대로 이 녀석을 검술 스승으로 삼아?’

카이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세르벨은 눈치 빠르게 물러났다.

“송구합니다, 폐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물러가라.”

카이젠은 얼른 가버리라는 듯이 대답했다.

세르벨은 미안한 눈길로 아스텔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정원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카이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화롭던 정원 안에는 이제 불편한 침묵이 흘러갔다.

아스텔이 먼저 카이젠에게 물었다.

“세르벨 경이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 일이 있었나요?”

카이젠은 아스텔의 싸늘한 물음에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치밀어서 아스텔을 몰아붙여 버렸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원망하며 되물었다.

“……그런 건 왜 묻지?”

“그 사람을 테오르의 스승으로 정했는데 폐하께서는 마음에 안 들어 하시니 걱정돼서 질문을 드리는 겁니다.”

카이젠은 세르벨을 싫어하지 않았다.

세르벨은 젊지만 유능했고, 그의 양아버지인 에클렌 백작도 충성스럽고 성실한 신하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 젊고 말끔한 얼굴을 보는 순간 불쾌감부터 느껴졌다.

하고 많은 기사 중에 왜 하필 세르벨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저 녀석을 스승으로 정한거야?”

카이젠이 최대한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아스텔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벨리안 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

카이젠은 마음속으로 벨리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녀석은 왜 시키지도 않는 짓을 하는 거지?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딱히 벨리안이 일을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다 거슬렸다.

왜 이렇게 불쾌한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더 불쾌했다.

“글쎄, 그 녀석은 필요 없어.”

카이젠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승마나 검술 정도는 나도 가르칠 수 있어. 내가 시간 날 때마다 테오르를 가르치겠어.”

아스텔은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카이젠을 바라봤다.

“폐하께서는 정무에 바쁘신데 어떻게 아이를 가르치려고 하십니까?”

“내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와서 가르칠 수 있어.”

“오늘도 일이 많아서 늦게 오셨잖아요.”

“…….”

아스텔의 담담한 목소리에 카이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스텔도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세르벨을 싫어하는 건가.’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굉장히 미워하고 있나 보다.

전에 만났을 때도 조금 불쾌한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설마하니 세르벨을 미워해서 그러는 줄은 몰랐다.

란베르크 기사단은 황제의 중요한 기사단 중 하나였는데, 그런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줬을 리는 없으니까.

‘괜히 세르벨을 골랐나.’

제일 적임자여서 그를 선택한 건데.

카이젠이 이 정도로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생각을 다시 해봐야했다.

“엄마!”

아스텔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테오르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테오르. 잘 놀고 있었느냐?”

테오르는 아스텔에게 매달린 채 그를 돌아봤다.

“폐하, 오늘은 바쁘지 않아요?”

“너를 보려고 일을 빨리 끝내고 왔다.”

어린 아들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테오르는 별로 감동받지 못한 것 같았다.

테오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도 봤는데…….”

“…….”

카이젠은 실망한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스텔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세르벨 경의 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카이젠은 그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건가 싶었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끌어안고 다시 물었다.

“테오르. 더 필요한 건 없느냐? 갖고 싶은 거라든가.”

테오르는 카이젠의 품에 끌어안긴 채 잠시 고민했다.

“조랑말을 타고 싶어요.”

아스텔은 테오르가 말을 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제대로 승마의 기초부터 배우기 전에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럼 내일은 일찍 와서 승마를 제대로 가르쳐 주마. 황궁 밖에 나가서 승마 연습을 하자.”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아스텔이 놀라서 끼어들었다.

“폐하, 황궁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합니다.”

“내가 함께 가니까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지난번에 함께 나갔다가 테오르가 린테일 과즙을 먹고 죽을 뻔한 게 겨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카이젠도 뒤늦게 그 일을 떠올리고 작게 덧붙였다.

“이번에는 주의하지.”

“그래도 안 됩니다. 이런 시기에 황궁 밖으로 나가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결혼식이 코앞이었다.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궁 밖으로 애를 데려가겠다는 건지.

아스텔의 딱딱한 말투에 카이젠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럼 당신은 안 가도 돼.”

그때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테오르가 시무룩한 얼굴로 카이젠의 품에서 내려왔다.

“엄마가 안 가면 나도 안 갈래요.”

“…….”

카이젠이 다시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함께 가지.”

“황궁 밖은 안 됩니다.”

카이젠이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장미 정원에 가면 되겠군.”

황궁의 뒤편엔 장미 정원이라고 불리는 넓은 정원이 있었다.

원래는 이름 그대로 장미가 가득 피어 있는 곳이었다.

전전대 길베르크 황제 시절, 그곳에서 황제 폐하를 해치려는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황제의 근위대는 우거진 장미 덤불 때문에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암살자를 미리 발견하지 못했다.

진노한 길베르트 황제는 장미 나무를 전부 베어버리고 평평한 공터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은 잔디와 화초가 자란 탁 트인 정원이 되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곳이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

아스텔은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무언의 승낙을 얻은 카이젠이 테오르를 보았다.

“잔디밭에서 말을 실컷 태워주마.”

“네, 폐하, 좋아요!”

테오르는 기뻐했지만 카이젠의 눈에는 또다시 씁쓸한 감상이 지나갔다.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왜 황제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테오르는 맑은 눈동자로 아스텔을 빤히 보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냥…… 폐하가 편한데.”

더 캐물어 봐도 다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아버지라고 부르겠지.’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테오르는 5년 동안 아버지를 모르고 살았다.

이제 와서 아이에게 부모의 정을 강요할 순 없었다.

* * *

다음 날, 카이젠은 대낮부터 테오르를 데리고 넓은 정원으로 나갔다.

“똑바로 서서 자세를 유지해라. 무서운 게 아니니까 겁먹지 말고.”

카이젠은 이번에도 직접 말을 이끌면서 테오르에게 승마를 가르쳤다.

아스텔은 말리는 것도 지쳐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테오르는 겁을 먹지 않고 카이젠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라 했다.

‘확실히 겁이 없는 건 아버지를 닮았나 보네.’

아스텔은 자신이 처음 승마를 배울 때를 기억했다.

10살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스텔이 말 타는 걸 무서워해서 미루고 미루다가 늦게 승마 강습을 시작했다.

어차피 승마는 숙녀의 덕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버지인 공작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더는 미룰 수 없어서 그때부터 정식으로 승마를 배웠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말에 오르지도 못했지만.’

어느 날 저택에 찾아온 카이젠이 아스텔이 승마를 배우는 걸 구경한 적이 있었다.

아스텔은 잔뜩 겁에 질려서 울 것 같았지만 황태자 전하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말에 올랐다.

하지만 말에 올라탄 채 고삐를 쥐고 덜덜 떨기만 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다가와서 그녀의 손을 잡아줬다.

‘괜찮아, 아스텔. 무서운 거 아니야. 괜찮아.’

그 따뜻한 온기가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가끔씩 느껴지는 그런 다정함이 있었기에 자신은 계속 헛된 희망에 매달렸다.

무심하고 차가운 듯 보여도 마음 속 한 구석으로는 카이젠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 꼭 붙잡고 있어라. 절대 손을 놓으면 안 돼.”

“네. 안 놓을게요.”

테오르는 두 손으로 고삐를 꼬옥 붙잡았다.

카이젠은 이제 자기도 말을 탄 채 테오르의 조랑말을 이끌었다.

조랑말은 테오르를 태운 채 빠른 걸음으로 잔디밭을 걸어갔다.

테오르는 달리는 말 위에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더 빨리 갈래요.”

카이젠은 웃으면서 속도를 냈다.

빠르게 걷던 조랑말이 천천히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테오르는 기뻐했지만 지켜보는 아스텔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폐하, 위험합니다.”

아스텔이 두 사람을 쫓아가서 말렸다.

카이젠도 그 말을 듣고 테오르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무 빨라졌다. 다시 속도를 늦춰야겠다.”

그런데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잔디 사이에서 조그만 다람쥐가 머리를 내밀었다.

잘 달려가던 조랑말이 다람쥐를 보고 놀라서 앞발을 들어 올렸다.

히이이잉!

조랑말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말 등에 올라타고 있던 테오르가 고삐를 놓치고 안장에서 떨어졌다.

“테오르!”

아스텔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카이젠이 테오르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아스텔은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폐하!”

주변을 지키던 시종들과 기사들도 놀라서 달려왔다.

두 사람은 마른 잔디 위에 쓰려져 있었다. 카이젠은 테오르가 다치지 않게 두 팔로 아이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아스텔의 놀란 얼굴을 보고 카이젠은 테오르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테오르, 괜찮니? 아픈 데는 없어?”

테오르는 카이젠의 품 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카이젠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살폈다.

아스텔이 손을 대자 테오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놀란 듯 눈이 커졌을 뿐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으응…… 난 안 아파."

그 조그만 목소리를 들으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다행이다.”

아스텔은 그제야 카이젠을 바라보았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한 팔로 끌어안은 채 몸에 묻은 풀잎을 툭툭 털어냈다.

“나도 괜찮아.”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의 몸에는 상처가 많았다.

팔꿈치에는 옷이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어깨에도 옷자락이 피에 젖어 있었다.

주인을 잃은 말 두 마리가 주변을 맴돌았다. 시종들이 말을 붙잡아서 끌고 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카이젠이 잡아챘기에 다행이지 테오르가 혼자 떨어졌으면 크게 다치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테오르가 놀란 것 같군. 황후궁으로 돌아가지.”

* * *

황후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테오르는 카이젠의 품에 안겨 있었다.

황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의사가 불려왔다.

의사는 테오르를 진찰하고 나서 아무런 이상도 없으니 휴식을 취하고 안정시키라고 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방으로 데려가서 진정되는 약차를 마시게 했다.

“엄마, 나 괜찮아.”

다행히 테오르는 자기 방으로 돌아오자 기운을 회복했다.

테오르는 근심이 가득한 아스텔을 올려다보며 도리어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카이젠하고 나가기만 하면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래도 이번 일은 전에 있었던 엄청난 사건들에 비하면 사소한 일처럼 보였다만.

아스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르가 그런 아스텔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엄마, 폐하는 괜찮아……?”

“응?”

테오르는 한나가 가져다 준 인형을 조몰락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 때문에 폐하가 다쳤어.”

“폐하도 괜찮으셔. 많이 다치지 않아서 금방 나을 거야.”

다행히 카이젠도 많이 다치지 않았다.

떨어지면서 좀 긁히고 멍이 들었을 뿐이다.

“나중에 폐하께 직접 감사 인사를 드리렴.”

“응.”

테오르는 조금 걱정스러운 듯이 다시 물었다.

“나 때문에 말이 혼나는 건 아니지?”

“아냐, 혼나지 않게 잘 말해놓을게.”

아스텔은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황제를 다치게 했으니 원래대로라면 시종들이 말을 죽이거나 다른 데로 보내겠지만 아스텔은 절대 그렇게 처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말 못 하는 동물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런 일이 생기면 테오르는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다.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달래놓고 카이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거처에 있는 휴식실에서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아스텔이 들어서자 카이젠은 의사와 시종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테오르는 좀 어때?”

“기운을 회복하고 쉬고 있습니다.”

카이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젠의 팔과 어깨에 다시 붕대가 감겨 있었다. 손등에도 약초를 넣은 습포가 붙어 있다.

“폐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카이젠은 긴 휴식 의자에 드러누웠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

그는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몸에는 상처가 꽤 많았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지만, 바닥에 떨어지면서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다니……. 윽.”

카이젠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몸을 움직이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의사를 다시 부르겠습니다.”

“의사는 필요 없어.”

카이젠은 의자에 기대 누운 채 아스텔을 올려다봤다.

평소 서늘하기만 한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이젠 그것으로 만족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괜찮아.”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시는 걸 보니 괜찮으신 모양이네요.”

아스텔은 다시 냉랭한 얼굴로 몸을 돌렸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덴츠 숲에서 습격을 받았을 때 카이젠은 아스텔을 지키려다가 다쳤다. 그리고 오늘은 테오르를 구하다가 또다시 상처를 입었다.

비록 두 번 모두 카이젠에게 원인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약차를 가져다 드릴게요.”

아스텔은 시녀를 불러서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했다.

약초를 찻주전자에 담고 펄펄 끓는 물을 부어서 차를 우려냈다.

방금 테오르에게 타줬던 약차였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고맙군.”

찻잔을 받아 든 카이젠이 아스텔을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테오르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고마울 것 없어. 자식을 지키는 건 아버지로서 당연한 일이잖아.”

카이젠은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말했다.

테오르에 대한 애정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우습기도 했다.

“폐하께서 어린 아들을 말 위에 태우지 않으셨으면 지킬 일도 없었겠지만요.”

“…….”

카이젠은 억울한 표정이었지만 맞는 말이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약차만 들이켰다.

“드레스 교본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당신 마음에 들어?”

잠깐의 침묵 뒤에 카이젠이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곤 아스텔의 반응을 살폈다.

아스텔은 벨리안이 가져온 서류와 드레스 그림을 떠올렸다. 어떻게 생긴 옷인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한나에게 넘겨줬다.

“마음에 안 들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루만 입을 옷인데요.”

문득 아스텔은 과거의 결혼식 날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그녀는 결혼식 드레스를 준비하며 행복해 했었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드레스를 만들었다.

“그래도 당신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카이젠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마음에 안 들면 연락해서 전부 다시 만들게 할게. 뭐든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도 돼.”

아스텔은 그 애틋한 말을 단칼에 잘랐다.

“괜찮습니다. 이대로 해도 됩니다.”

카이젠은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눈빛이었지만 아스텔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스텔은 그를 외면한 채 빈 찻잔을 치웠다.

예전에는 결혼식을 준비하는 게 기뻤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카이젠과의 행복한 미래 같은 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정성이 헛되진 않았는지 결혼식 날, 카이젠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아스텔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당신 정말 아름답군.’

놀란 눈으로 아스텔의 손을 잡던 카이젠이 떠오른다.

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던 순간, 혹시라도 실수를 할까 봐 손이 떨렸다. 그녀가 긴장한 걸 보고 카이젠은 아스텔의 손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먼 옛날 말 위에 탄 아스텔을 안심시켜 줬듯이.

‘긴장하지 마, 아스텔.’

그 순간에는 왜 그렇게 다정하게 굴었던 걸까.

그토록 하기 싫은 결혼을 억지로 하고 있었으면서.

카이젠과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가끔씩 그렇게 이상할 만큼 다정한 기억들이 있다. 도대체 어느 쪽이 그의 진짜 모습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빼꼼 열렸다.

“폐하?”

테오르가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테오르. 이리 와라.”

테오르는 카이젠에게 달려갔다.

“폐하, 이제 안 아파요?”

“난 괜찮다. 처음부터 아프지도 않았어.”

카이젠은 그렇게 말하며 테오르를 자기 무릎에 앉혔다.

테오르는 그의 팔에 둘러진 붕대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아스텔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제 승마를 제대로 배울 때까지는 말을 타면 안 돼.”

테오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

카이젠이 그런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괜찮다. 내가 매일 와서 가르쳐 주마.”

* * *

며칠 뒤, 한나는 아침 일찍 마차를 타고 수도의 의상실로 향했다.

아직도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6년 만에 있는 국혼이니 준비할 게 산더미였다.

황제궁의 시종들은 쉴 틈 없이 결혼식 준비에 매달리고 있다고 들었다.

황제궁에서 준비를 도맡아줘서 황후궁은 좀 한가했다만.

‘우리도 준비를 완벽하게 해야지.’

비록 아스텔이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지만, 그래도 한나는 아스텔의 두 번째 결혼식이 별 탈 없이 치러지길 바랐다.

그녀는 황후궁에서 준비해야 할 것들을 체크한 뒤, 드레스 작업을 확인하러 의상실에 들렀다.

의상실에 도착하자마자 점원이 놀라서 뛰쳐나왔다.

“어, 어서 오십시오.”

이른 시간이라 연락을 하지 못하고 왔더니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한나는 그녀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잠시 진행 상황만 살펴보고 갈게요.”

사실 미리 연락을 하고 오는 것보다 불시에 들러서 어떻게 되고 있는지 살피고 싶었다.

이른 시간이라 의상실 주인도 없었다.

점원은 한나를 안쪽에 있는 작업실로 안내했다.

“황후 폐하의 드레스는 이쪽에 있습니다.”

반 넘게 완성된 드레스가 보였다.

아직 만드는 중이었지만 디자인과 장식은 교본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이 드레스는 진줏빛 실크와 모슬린에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장식해서 호화롭게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벌써 많이 완성됐네요.”

아직 보석이나 모슬린 장식은 없었지만, 자수 장식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진주 가루를 섞은 흰색 실과 은사로 만든 은실로 꽃을 수놓은 장식이었다.

치마부터 가슴 부분의 보디스, 소매까지 빠짐없이 자수 장식이 있었다.

‘음?’

드레스를 살펴보던 한나는 잠시 멈칫했다.

드레스의 팔꿈치 부분에 이상한 장식이 있었다.

“이 부분은 교본하고 다른 것 같은데요? 여기에 이런 장식이 있었나요?”

한나는 드레스의 소매 부분을 가리켰다.

손목 끝부분에 특이한 꽃 자수가 있었다. 두꺼운 하얀 실로 도톰하게 수놓인 은매화였다.

전에 벨리안이 가져다준 도안에는 이런 장식이 없었다.

어깨에는 얇은 은사로 백합이 수놓일 예정이었고, 팔꿈치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진주색 실로 은은하게 자작나무 가지를 수놓을 계획이었다.

점원은 한나가 가리킨 소매장식을 살펴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이 부분에 넣으면 좋을 것 같다고 재봉사가 디자인을 추가했습니다. 수정안은 이미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요?”

“아무래도 기존 백합보다는 은매화가 황후 폐하께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변경했다고 합니다.”

한나는 점원의 말을 듣고 소매 부분의 은매화를 다시 살폈다. 재봉사가 중간에 장식을 추가하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의뢰인이 도안을 만들어 줘도 재봉사가 옷을 만들면서 몇 가지 장식이나 디자인을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한나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은매화가 수놓인 기법은 웹 로즈.

별 모양으로 다섯 개의 기둥을 수 놓고 그 위에 실을 여러 번 교차시켜서 도톰한 꽃을 수 놓는 기법이었다.

흔한 자수법이었지만 요즘엔 많이 쓰이지 않는다. 특히 얇은 천을 사용하는 웨딩드레스에는 그런 도톰한 자수를 넣으면 장식이 너무 눈에 띈다. 혹시 몰라 도톰한 꽃잎을 살짝 눌러봤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나는 점원을 돌아보며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정말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점원은 한나의 칭찬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

그 얼굴엔 조금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다.

“그럼 이대로 계속 작업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한나는 점원의 인사를 받으며 가게를 나섰다.

다시 마차에 오른 뒤, 한나는 마차의 유리창을 통해 의상실을 바라봤다. 이곳은 수도에서 제일가는 의상실이었다. 당연히 귀족 부인들과 인연이 깊을 것이다.

유리창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엔 불안한 의심이 감돌고 있었다.

* * *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황궁은 바빠졌다.

황제궁의 시종장이 결혼식 진행에 대해 보고하러 아스텔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황후궁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우리 황자님.”

레스턴 공작은 애틋한 표정으로 테오르에게 다가섰다.

“우리 황자님께서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이 할아비가 놀라서 달려왔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가득 묻어나는 절절한 목소리였다.

누가 들으면 정말로 손주 사랑에 가득 찬 할아버지로 생각할 만큼.

그러나 테오르는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나쁜 할아버지 싫어.”

“하하.”

공작은 나지막하게 웃기만 했다.

아스텔이나 프리츠가 어릴 때 이런 무례를 범했으면 가만두지 않았겠지만, 이 아이는 황자님이었다.

그것도 제국에 단 한 명뿐인 황자.

“일전에는 이 할아비가 황자님을 몰라뵙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이제라도 용서를 빌 테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레스턴 공작은 한쪽 무릎을 꿇고 테오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용서해 주실 겁니까?”

용서라는 말에 테오르는 쭈뼛거리며 의자 뒤에서 나왔다.

동화책에는 누군가가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면 용서해 주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아스텔도 진심으로 사과하면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게 좋은 거라고 했다. 이 나쁜 할아버지를 별로 용서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이 사람은 엄마의 아버지라고 했다.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때는 몹시 충격을 받았지만.

테오르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용서해 줄게요.”

“감사합…….”

“대신 나쁜 할아버지 이제 여기 오지 마.”

공작은 미소를 지은 채로 잠시 굳어졌다.

그때 아스텔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테오르. 할아버님께 가 있으렴.”

늘 그랬듯이 아스텔이 말하는 ‘할아버님’은 아스텔의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이었다.

테오르는 의자 뒤에서 나왔다.

“응.”

테오르가 문밖으로 사라진 뒤, 레스턴 공작은 불쾌한 눈빛으로 자리에 앉았다.

“저 애한테 내가 할아비라는 걸 알려주거라.”

그는 아스텔에게 투덜거렸다.

“자주 찾아와서 살갑게 구는데도 여전히 똑같구나.”

살갑게 군다는 게 다짜고짜 아이에게 말을 걸고 귀찮게 한다는 뜻이라면야.

레스턴 공작은 카이젠이 오지 않는 낮시간에 황후궁을 자주 찾아왔다. 물론 그 방문의 목적은 테오르와 친해지려는 것이었다. 공작은 어린 외손자를 구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친근하게 굴어도 테오르는 여전히 이 외조부를 싫어했다.

아스텔은 담담한 말투로 아버지를 위로했다.

“아직 어려서 친인척 관계를 잘 몰라요. 더 크면 저절로 이해할 거예요.”

“그래. 조금 더 커서 철이 들면 사리분별을 하겠지. 내가 할아버지라는 것도 알게 될 테고.”

아스텔은 아버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를 테오르의 곁에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더러 영지에 숨겨져 있는 아버지의 비리를 캐라는 거냐?’

얼마 전, 프리츠는 아스텔에게 그렇게 물었다.

아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불가능해요. 비리가 있어도 증거를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아버지를 몰락시킬 수 있는 증거를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었으면 진작에 카이젠이 아버지를 죽였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려는 거냐?’

‘아버지가 죄를 짓게 만들어야죠.’

증거가 없으면 증거를 새로 만들면 된다.

아스텔은 아버지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공작가가 다시 세력을 얻을 수 있게 도와줄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동안 뒤로 아버지를 몰락시킬 수 있는 증거를 모을 것이다. 프리츠가 서부의 관리인이 되면 공작가의 영지도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몰래 증거를 수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스텔 님.”

황궁 밖으로 나갔던 한나가 아스텔을 찾아왔다.

“한나. 의상실에 다녀온 거야?”

한나는 레스턴 공작에게 슬쩍 눈길을 주면서 말했다.

“아스텔 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스텔은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한나가 뒤따라왔다.

아스텔은 한나의 행동에 의아하면서도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의상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별건 아니긴 한데 아무래도 좀 마음에 걸려서요.”

한나는 의상실에서 본 것을 아스텔에게 설명했다.

“자수 장식이 이상하다고?”

“예.”

한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제궁의 의상 담당 시종을 만나보고 오는 길입니다. 의상실에서 디자인을 변경하는 것에 대해 들었는지 물었습니다.”

아스텔의 드레스는 황제궁에서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의 의상 담당 시종이 책임자였다.

한나가 조금 걱정스러운 듯이 말을 이었다.

“의상실에서 소매에 은매화 꽃을 넣겠다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재봉사가 허락을 받고 디자인을 변경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특별한 건 아니지만 뭔가 이상하긴 하네.”

이렇다 할 증거는 없지만 무언가 놓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시기가 그렇다 보니 과민반응하는 걸까.

아스텔은 잠시 고민하다가 역사서에서 배운 내용을 떠올렸다.

“몇 대 전에 황궁 안에 독살 사건이 있었지.”

백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떤 귀족이 황제의 총비를 죽이기 위해 그녀의 드레스에 독을 썼다.

피부에 스며들기만 해도 효과를 발휘하는 독이 있다. 음식에 타는 것보다는 효과가 훨씬 떨어지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수차례에 걸쳐서 독이 피부에 스며들게 하면 결국엔 쇠약해져서 죽게 된다.

그녀가 죽고 난 뒤에야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 후 황궁에 들어오는 옷은 미리 독을 검사받게 되어 있었다.

‘설마 누군가가 독을 쓰려고 하는 걸까.’

국혼에서 황후의 웨딩드레스에 독을 쓰다니.

아무렴 그렇게 정신 나간 짓을 할 사람이 있을까?

독을 써도 검사 중에 들통날 텐데.

“혹시 모르는 일이니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

“네.”

한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 심한 것 같긴 했지만 이곳은 황궁이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린든 경이나 다른 기사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고.’

확실한 증거가 있는 일도 아닌데 그냥 조금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황궁의 기사들에게 조사를 명령할 수는 없다.

뭣보다 이게 정말 누군가의 음모라면, 드러내놓고 조사하는 순간 범인은 계획을 포기하고 자취를 감출 것이다.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있긴 하지.’

증거가 있든 없든 아스텔을 도와줄 수 있는, 음모와 계략에 빠삭한 사람.

아스텔은 다시 방문을 열고 응접실로 돌아갔다.

응접실 안에는 레스턴 공작이 그녀를 기다리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해요.”

“무슨 일이냐?”

“저택에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있지요?”

레스턴 공작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미하게 웃었다.

“그야 물론이다. 내 명령이라면 목숨도 내던질 만한 자들이지.”

재상직을 잃긴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수족처럼 부리는 심복들이 충분히 있었다.

“내가 뭘 해주면 되겠느냐?”

아스텔은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요구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수도의 의상실을 몰래 감시하고 싶어요.”

* * *

결혼식 날 아침은 조용히 시작됐다. 적어도 황후궁에서는 그랬다.

“할아버님 말씀 잘 듣고 놀고 있으렴.”

아스텔은 아침 일찍 테오르를 찾아가서 말했다. 테오르는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침대 위에 앉아 눈을 비볐다.

“엄마, 어디 가?”

“오늘은 결혼식이라 신전에 가야 해.”

“맞다, 그랬지.”

아스텔도 한나도 결혼식 얘기를 거의 꺼내지 않아서 테오르도 결혼식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테오르는 정신을 차리고 아스텔에게 물었다.

“나도 가면 안 돼?”

“결혼식에 가고 싶니?”

“응. 엄마 결혼식 드레스 입은 거 보고 싶어. 나도 갈래.”

아스텔은 테오르를 결혼식에 데려가지 않고 외조부와 함께 황후궁에 남겨둘 생각이었다.

이 결혼식은 두 사람이 행복하게 맺어지는 결혼이 아니었다. 굳이 결혼식 장면까지 기억 속에 남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함께 데려가지 그러느냐?”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외할아버지가 안쓰러운 듯이 말했다.

“그래도 제 부모의 결혼인데. 참석하지 못하면 나중에 더 짐이 될지도 모른다.”

“…….”

할아버지의 충고를 들으니 마음이 흔들렸다.

‘결혼식에 데려가지 않으면 오히려 더 마음이 무거우려나.’

차라리 평범한 결혼식처럼 진행됐다고 기억하는 게 테오르의 입장에서는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함께 가자. 얼른 일어나서 아침 먹고 준비하렴.”

“응!”

데려가 준다는 말에 테오르는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왔다.

“테오르는 내가 준비시키마. 너는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화장만 하면 되는 건데요.”

수많은 이가 이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한 달도 넘는 시간 동안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정작 신부인 아스텔은 특별히 준비할 게 없었다. 화장을 하고 드레스만 입으면 끝이었다. 그 이상을 준비할 마음도 없었다.

외할아버지에게 테오르를 잠시 맡겨놓고 나서 아스텔은 거처로 돌아왔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향유를 섞은 물로 목욕하고 치장을 준비했다.

“아스텔 님. 드레스를 가져왔습니다.”

한나가 직접 의상실에 가서 완성된 드레스를 가져왔다. 커다란 상자 안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얀 드레스가 나왔다.

완성된 드레스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슴 부분의 보디스에는 백합 문양으로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진주색 실크와 모슬린으로 층층이 늘어지게 만든 치마가 특히 아름다웠다.

예전에 첫 번째 결혼식에서 입었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벨리안이 이 드레스에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고 있냐고 했었지. 확실히 엄청난 돈이 들었을 것처럼 보인다.

한나는 드레스를 다른 시녀들에게 건네주고 직접 빗을 들었다.

“공작님께서 연락을 보내셨습니다.”

아직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말려주면서 한나가 조용히 소식을 전했다. 아스텔은 손짓으로 다른 시녀들을 물렸다. 치장을 거들어주던 시녀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새벽에 의상실에 숨어들어온 남자를 붙잡았다고 합니다.”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자수 장식 안에 독을 넣으려고 했나 봅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던 아스텔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자수 장식 안에 독이라니 정말 쓰잘데없는 정성이로군.”

그냥 천에 독을 묻히면 검사하다가 들킬 테니 나름대로 머리를 쓴 모양이다. 얇은 천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피부에 스며들기를 바란 건가.

‘그 정도로는 금방 죽지도 않을 텐데.’

단번에 죽이지는 못해도 계속 그런 식으로 돈을 써서 서서히 죽게 하려고 한 걸까.

“린든 경에게 말해서 의상실 주인과 점원들을 조사하라고 해.”

누군지 조사하면 배후를 밝힐 수 있겠지.

한나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작님께서 저택 안에서 이미 조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건 조사가 아니라 고문이겠지.

어떤 식으로든 배후만 밝히면 되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밝혀내는 것보다는 린든이 공식적으로 조사해서 범인을 밝히는 게 좋다.

아스텔은 코르셋을 하고 치마를 풍성하게 부풀리기 위해 크리놀린을 입었다. 그 위에 패티코트를 두르고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입었다. 아스텔의 치수대로 만든 거라서 몸에 딱 맞았다.

“아프거나 불편하진 않으시죠?”

“괜찮아.”

드레스를 입고 등허리까지 늘어지는 하얀 베일을 뒤로 길게 늘어뜨렸다.

베일까지도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다. 섬세하고 정교한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베일을 쓴 다음엔 마지막으로 신성수와 백합꽃으로 만들어진 부케를 들었다.

거울 속에 흰 베일을 쓴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아스텔 님.”

뒤에 서 있던 한나가 담담한 눈길로 6년 전과 똑같은 축하 인사를 전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스텔. 그 옆에 서 있는 한나.

모든 것이 6년 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때처럼 행복하지는 않았다.

“이제 출발하자.”

아스텔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전으로 출발했다.

* * *

카이젠은 신전 안에서 아스텔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대신전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오늘의 결혼식을 위해 수도 안의 거의 모든 귀족이 대신전에 모였다.

아스텔을 위해 유례없이 화려한 결혼식을 해주겠다는 그의 바람대로 이 결혼식은 과거 두 사람의 첫 번째 결혼식보다 훨씬 사치스럽고 성대했다.

“폐하, 아스텔 님께서 오셨습니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카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스텔이 신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카이젠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스텔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곱게 화장한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긴 베일을 늘어뜨린 백금발. 은은한 진줏빛이 감도는 드레스는 아스텔의 단아한 외모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흰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은 백합처럼 우아하고 고결한 기품이 흘렀다.

카이젠은 잠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아스텔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서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였다.

“폐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에 카이젠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래.”

자신의 모습이 아주 웃길 것 같았다. 아스텔의 아름다운 모습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니.

그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아스텔이 그의 손 위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카이젠과 달리 아스텔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일말의 긴장도 기쁨도 없었다. 얼음처럼 싸늘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테오르의 손을 잡고 정원에 나갈 때도 이것보다는 다정하고 즐거워 보였다.

‘…….’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것은 억지로 진행한 계약 결혼이다. 그녀가 기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옆에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아득한 기억 속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20살의 아스텔이 떠올랐다. 아스텔은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붙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아스텔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곱게 화장한 이마에는 식은땀도 배어 나와 있었다.

‘긴장하는 건가.’

언제나 인형처럼 침착하고 우아하게 미소 짓는 아스텔이 긴장으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20살의 카이젠은 긴장하고 있는 아스텔의 손을 감싸 쥐었다.

‘긴장할 것 없어.’

특별히 아스텔을 달래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아스텔에게 맞춰 주기 위해서 웃으며 위로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스텔은 감동하는 눈길로 그를 돌아봤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 절절한 애정이 깃든 목소리가 지금에 와서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아스텔은 조각상처럼 차가운 눈길로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스텔은 제단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카이젠은 그녀의 손을 더 강하게 붙잡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아스텔과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카이젠은 가슴이 쓰려 왔다.

* * *

결혼식은 대신전의 본관에서 진행되었다.

촛대의 불빛이 조용한 결혼식장을 은은한 금빛으로 물들였다.

두 사람은 중앙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제단을 향해 걸었다.

아스텔은 제단을 앞에 놓고 카이젠과 나란히 섰다. 정면에 예복을 입은 카이젠이 있었다.

또다시 이 남자와 이 지루한 예식을 되풀이하게 되다니.

똑같은 황제와 다시 결혼하는 것만큼 기이한 일이 있을까.

아스텔 자신은 제국 역사에 길이 남게 될 것 같다. 황제의 곁에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황후로.

두 사람에게 늙은 대신관이 끝없이 이어지는 긴 설교와 축사를 했다. 축사가 끝나자 사제가 혼인서약서를 펼쳐놓았다.

“그럼 이제 두 분. 혼인서약서에 서명하십시오.”

결혼에서 제일 중요한 것 두 가지는 서류 작업과 첫날밤이다. 그 둘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결혼은 합법적으로 완성된다.

카이젠이 먼저 펜을 들고 두 줄에 걸쳐 이어지는 긴 이름을 적었다. 아스텔도 펜을 받아 들고 황제의 이름 옆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서명을 확인한 사제가 두 사람에게 선언했다.

“다 되었습니다. 천신의 이름으로 두 분께서는 이제 합법적인 부부가 되셨습니다.”

* * *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결혼식을 지켜보는 후작 부인은 초조한 마음에 손수건을 잡아 뜯었다.

아스텔의 웨딩드레스에 독을 넣으라고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시녀를 보냈지만, 시녀마저도 사라져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후작가의 기사들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남편인 후작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만일 일이 잘못된 거라면…….’

그녀는 차마 이번 일에 대해 남편에게 털어놓을 용기가 없었다.

후작 부인은 저택 안에서 전전긍긍하다가 어쩔 수 없이 치장을 하고 신전으로 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설마 들킨 것은 아니겠지?

그런 불안을 곱씹으며 결혼식을 보고 있을 때였다.

“후작 부인.”

고개를 돌렸더니 근위대 기사 한 명이 그녀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나오십시오.”

* * *

결혼식의 끝은 축하연이다.

황궁의 대연회장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귀족과 함께 축하 연회를 즐기는 것이다. 아스텔은 황제의 옆자리에 앉아 만찬석을 채운 수많은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카이젠이 간간이 그녀를 돌아봤다.

‘왜 자꾸 보는 거지?’

너무 아무 말도 안 한다고 눈치를 주는 건가 싶었다.

결혼식 날 신부가 재잘재잘 떠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아무나 잡고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외할아버지가 테오르를 데리고 아스텔 쪽으로 다가왔다.

“엄마.”

테오르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꽃다발을 아스텔에 안겨주었다.

“결혼 축하해요.”

수레국화와 은방울꽃. 작은 히스꽃 등등 귀여운 꽃송이를 모아놓은 작은 꽃다발이었다. 소담한 꽃다발이 향긋한 향내를 풍겼다.

“꽃다발은 어디서 가져온 거니?”

“정원에서 만들었어.”

그러고 보니 황후궁의 정원에 피어있던 꽃이다.

아스텔은 흰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테오르의 코를 살짝 건드렸다.

“고마워, 테오르.”

함께 온 외할아버지가 테오르를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결혼선물로 주겠다고 신전에 가기 전에 만들었습니다.”

아스텔은 할아버지의 공손한 대답에 일순간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이제 황후가 됐다. 후작에 불과한 외할아버지는 아스텔에게 정중하게 공대를 써야 했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그 순간 놀라움이 느껴졌다.

자신이 평온했던 삶을 다시 잃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아스텔이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뒤에서 웃음기 섞인 음성이 끼어들었다.

카이젠의 목소리였다.

“편하게 말해도 괜찮네.”

그는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대는 황후의 외조부가 아닌가. 그동안 우리 테오르를 돌봐줬으니 사석에서는 편히 말해도 괜찮네.”

외할아버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곧 예법대로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영광입니다, 폐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내가 도와줄 테니.”

카이젠은 너그러운 군주의 모습으로 그렇게 약속했다.

후작이 알현 신청을 몇 번씩 해도 받아들여 주지 않았던 건 다 잊었는지.

후작은 멀거니 서서 그런 카이젠을 구경하다가 아주 예의 바르고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이 늙은이가 필요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부디 이번에는 폐하께서 오래도록 행복하시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두 분께서’가 아니라 ‘폐하께서’였다.

지극히 공손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가 하루 만에 아스텔에게 이혼을 요구했던 것을 꼬집는 소리였다.

카이젠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뭐라 대꾸할 말은 없는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아스텔은 얼른 외할아버지에게 테오르의 손을 맡겼다.

“고마워요, 할아버님.”

외조부는 테오르의 손을 잡으며 아이에게 눈짓했다.

“테오르.”

테오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귀족들이 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우리 궁전에 가 있을게요, 어머니.”

외할아버지가 가르친 모양이다.

조그만 황자가 궁정 예법을 흉내 내는 모습이 귀여운지 주변에 앉은 귀족들도 테오르를 보며 미소를 보냈다.

아스텔도 그냥 웃으며 테오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나도 곧 갈 테니 먼저 가 있으렴.”

테오르는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돌아서서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카이젠은 그런 세 사람을 쓸쓸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결혼식이 끝나고 아스텔은 드디어 답답했던 드레스를 벗었다.

“어떻게 되었어?”

한나는 드레스를 벗는 걸 거들면서 그동안 알아낸 정보를 말했다.

“후작 부인이 준비했던 건 시간이 지나면 녹는 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수 아래에 숨기려고 했나 보군.”

시종들이 옷 검사를 해도 천만 검사하지 자수 장식까지 뜯어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옷을 입고 있다 보면 장식 안에 있는 독이 녹아서 피부에 묻을 것이다.

드레스에 잘 쓰이지 않는 도톰한 장식을 쓴 것도 그래서겠지. 독을 숨길 자리가 필요하니까.

“그 후작 부인치고는 열심히 머리를 썼네. 한나 네가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피하지 못할 뻔했어. 고마워.”

한나는 아스텔의 칭찬을 받고 부끄러운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독한 약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렇긴 하겠지.

사람은 피부에 스며드는 독으로는 쉽게 죽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독약이 피부에 스며들면 건강이 나빠지거나 정신이 흐려졌을 것이다.

몇 번 더 그런 일을 당하면 몸이 약해져서 죽었을 수도 있고.

“진행 상황을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아스텔은 목욕가운을 입고 시녀들이 준비해놓은 욕탕으로 들어갔다.

깨끗한 연청색 석조로 만들어진 욕탕엔 향긋한 향기가 풍기는 하얀 온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향기 나는 붉은색 꽃잎이 희미한 향을 담고 하얀 물 위에 떠다녔다. 꽃잎이 안개처럼 피어나는 수증기를 달달한 향기로 물들였다.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긴장이 풀리고 나른함이 밀려왔다.

‘결혼식이 끝났네.’

이혼하고 황궁을 떠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결혼식이 끝나고 이렇게 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이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나가야 한다.

아스텔이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시녀들이 피부가 건조해지기 전에 화장수와 향유를 발라주었다.

새하얀 모슬린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돌아왔다.

이제 좀 편하게 쉴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반대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결혼식 때 본 것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카이젠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스텔.”

그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 * *

카이젠은 아스텔을 직시하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두 사람의 첫날밤이었다.

정확히는 두 번째 첫날밤이지만.

새하얀 모슬린 잠옷을 입은 아스텔은 백합처럼 가녀리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걸 보는 카이젠의 마음속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후작 부인의 일을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연회가 끝나기 전에 린든이 와서 그에게 후작 부인의 사건을 보고했다.

카이젠에겐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그는 몇 분 전까지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결혼식을 끝내고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린든은 머뭇거리며 한 가지 소식을 더 전했다. 이미 레스턴 공작이 황후 폐하의 부탁을 받아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카이젠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이미 황후궁으로 돌아간 뒤였다.

“……왜 내게 말하지 않고 공작에게 부탁했지?”

그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상처가 나도록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럼에도 말소리엔 분노가 감돌았다.

“증거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아스텔은 무덤덤한 태도로 대답했다.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까? 잘못하면 무고죄가 되는데. 그래서 증거를 잡으려고 아버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아스텔은 그게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이었다.

지켜보는 카이젠은 허탈해졌다.

“당신은 나를 그렇게 못 믿는 거야?”

후작 부인의 일을 전해 들었을 때 카이젠은 비참함을 느꼈다.

오늘은 두 사람의 결혼식이었다.

심지어 그 드레스는 카이젠 자신이 아스텔을 위해서 만들게 한 것이었다. 후작 부인이 그 드레스에 독을 넣으려고 했고, 아스텔은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런데도 아스텔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그에게 이 일을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감시를 부탁하면서도 그에게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분노보다 앞서 슬픔이 밀려왔다.

“당신 목숨이 걸린 문제를 내게 말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내가 못 미더운가?”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스텔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는 것 같았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폐하를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그를 못 믿는다는 뜻이었다. 하. 너무 기가 막히다 보니 실소가 나왔다. 카이젠은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비참하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이 날 믿을 수 있지?”

“…….”

절절한 슬픔이 감도는 목소리에 아스텔은 조금 놀랐다.

조각상처럼 차갑던 연녹색 눈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아스텔은 금세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카이젠은 감정을 참아내기 위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래, 그렇지. 믿기 어렵겠지.”

그는 무심한 아스텔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오늘 무리했으니 이만 쉬어.”

그가 침실을 벗어날 때까지 아스텔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카이젠은 침실 밖으로 나와서 문을 닫았다. 침실 문을 닫고 나오면 작은 휴식실이 있었다. 텅 빈 휴식실은 싸늘하게 비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황제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신혼 초야였다. 그런 짓을 하면 귀족들은 이번에도 두 사람의 첫날밤부터 어긋났다고 떠들어댈 것이다.

아스텔은 또다시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되리라.

“…….”

카이젠은 한참 동안 닫힌 문 앞에 서 있다가 휴식실의 소파로 걸어갔다. 그는 소파 위에 누워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 * *

“아니, 대체…….”

벨리안은 연회가 끝나자마자 집무실로 불려왔다.

집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크로이첸 후작 부인이 황후의 드레스에 독을 넣었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게 효과가 있긴 하대?”

소식을 전해준 서기관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만큼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그런 짓은 왜 했대?

‘하긴, 그 부인은 원래 골칫거리였지.’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벨리안은 수도에 돌아온 첫날부터 매일 야근을 했다. 한 달 전부터는 결혼식 준비를 위해 매일매일 휴식시간도 없이 밤샘 작업을 했다.

그렇게 힘들게 준비한 오늘 결혼식을 지켜보며 벨리안은 신랑 신부보다 더 행복했다. 드디어 저택에 가서 쉴 수 있나 했더니 갑자기 국무대신의 부인이 엄청난 사고를 쳐버렸다.

‘그 부인은 정말 나한테 너무한 거 아냐?’

결국 오늘도 벨리안은 집무실에 앉아서 밤새 일에 매달려야 했다.

새벽녘이 되자 피곤해서 졸음이 밀려왔다. 벨리안은 책상 앞에서 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벨리안은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놀라서 일어났다.

“폐하? 아니, 왜 벌써.”

카이젠이 차가운 표정으로 집무실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벨리안은 어둡게 가라앉은 붉은 눈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후작 부인은 어디 있느냐?”

“지, 지금 린든 경에 조사실에서 직접 조사를…….”

카이젠은 더듬거리는 설명을 끊고 차갑게 내뱉었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자백을 받아내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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