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11. 발각 (11/24)

11. 발각

아스텔은 저택의 2층에 있는 서재에 있었다.

이곳에 갇힌 뒤부터 아스텔은 종종 그곳에서 시간을 때운다고 했다. 서재 문 앞에 다다른 카이젠은 주저하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있던 아스텔이 그를 돌아보고 몸을 일으켰다.

“폐하?”

아스텔은 피곤해 보였다. 흰 피부는 눈처럼 창백하고 눈가에는 검게 그늘이 져 있었다.

동부의 시골에서 재회했을 때보다 더 수척한 모습이었다. 불편하지 않게 잘 챙겨주라고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편안한 잠자리와 식사 같은데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테오르와 함께 있던 아스텔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두 모자는 언제나 행복해 보였다. 아이를 바라보는 아스텔의 눈에는 진심 어린 애정이 가득했다.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도 둘 사이엔 조용하고 평온한 온기가 감돌았다.

‘이곳에 가둬두고 마음고생만 시킨 꼴이 됐군.’

그래도 카이젠은 아스텔을 보내줄 수 없었다.

이미 황궁 안에 결혼식 준비를 명령해 놨다.

무슨 일이 생겨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아스텔을 황궁으로 데려올 것이다.

“당신에게 해줄 얘기가 있어.”

카이젠은 잠시 말을 골랐다.

아스텔을 절대 보내줄 수 없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이렇게 힘겨워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일을 말해주면 아스텔은 더욱 충격을 받을 텐데.

그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스텔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폐하? 무슨 일이신가요?”

카이젠은 안쓰러운 마음을 억누르고 대답했다.

“후작과 테오르에 대한 소식이야.”

아스텔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 * *

‘왜 다시 온 거지?’

황궁으로 돌아갔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카이젠이 다시 서재로 찾아왔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스텔은 그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스텔은 그가 조금 전에 하던 대화를 이어가려고 하는 줄 알았다. 불편했던 대화가 린든의 등장으로 끊어져 버렸으니까.

그런 안일한 생각은 그가 테오르와 할아버지에 관한 소식을 말하는 순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무슨 일인데요?”

카이젠은 조금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아스텔은 직감적으로 좋지 못한 일이 생겼다는 걸 느꼈다.

“내 기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습격이 있었던 모양이야. 후작이 다쳤다는군.”

“습격이라고요?”

기어이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순간 아스텔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카이젠이 재빨리 곁으로 다가와서 아스텔을 부축했다. 그가 아스텔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위로했다.

“아스텔, 괜찮아. 후작은 무사해.”

“얼마나… 얼마나 다치셨는데요?”

“심각하진 않다는군. 금방 회복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야.”

뒤늦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 무사하시구나.’

할아버지가 다쳤다는 말에 끔찍한 결과부터 떠올랐었다.

안도하던 아스텔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테오르는요?”

“…….”

이번에는 쉽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폐하, 테오르는 무사한가요?”

아스텔이 대답을 재촉하자 카이젠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테오르는 당신 아버지가 데려간 것 같아.”

“뭐라고요?”

아버지라는 말에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버지가 테오르를 데려가?’

“공작가의 수하들이 근처에 있었다는군. 지금 린든을 그쪽으로 보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

아스텔은 그 한마디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했다.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이 다시 황후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텔이 말을 듣지 않으니 테오르를 납치한 것이다.

아이를 인질로 잡아두고 협박하려고.

아버지의 냉혹하고 이기적인 행태에 분노가 솟아났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아버지가 테오르를 데려갔다면 아이의 눈이 붉은색이라는 걸 들키게 될 것이다.

눈치 빠른 아버지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테오르가 황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아스텔은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다시 물었다.

“확실한 건가요? 만일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면…….”

“다른 사람이 왜 테오르를 데려가겠어?”

“제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아스텔은 플로린 모녀를 직접적으로 가리키지 않고 ‘원한을 가진 사람’이라고만 말했다.

그렇게만 말했지만 카이젠은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크로이첸 후작 부인이 당신에게 원한이 있어도 내가 황후로 삼겠다고 천명한 마당에 굳이 어린애를 데려갈 리는 없어. 크로이첸 후작이 그걸 좌시하지는 않을 거야.”

“…….”

아스텔은 카이젠의 확신 어린 말에 침묵했다.

카이젠의 말이 옳았다. 테오르가 그의 아들이라는 게 밝혀지지 않은 이상, 테오르를 납치하려고 들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카이젠은 가늘게 떨고 있는 아스텔을 위로하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당신 아버지가 테오르를 해치려고 데려간 건 아닐 거야.”

카이젠도 공작이 왜 테오르를 데려갔는지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공작이 목적이 있어서 테오르를 데려갔으니, 아이는 무사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그렇게 안도할 수가 없었다.

‘만일 아버지가 테오르의 눈을 보면…….’

정말 최악의 사태였다.

아스텔은 충격으로 떨면서도 한줄기 희망을 품었다.

공작가에는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의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오빠인 프리츠의 수하들도 있었다. 근처에 있었다는 공작가의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프리츠 오빠의 사람들이 아닐까?

혹시 프리츠가 보낸 사람들이 아버지의 수하들을 물리치고 테오르를 데려간 건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다쳐서 몸을 피하지 못하고 테오르만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 게 아닐까.

‘프리츠 오빠가 데려갔다고 해도 눈 색은 들키겠지만.’

그래도 프리츠에게 들킨다면 최악은 아니다. 그쪽은 최소한 설득해 볼 여지라도 있을 테니까.

“폐하, 제가 할아버님을 뵈러 가도 될까요?”

“당신 할아버지는 걱정하지 마. 상태가 안정되는 대로 수도로 데려오라고 했어.”

“감사합니다, 폐하.”

프리츠 오빠만이 유일한 희망이지만, 지금으로선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스텔은 정원이 보이는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투명한 유리창에 근심으로 흐려진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유리창 속에서 카이젠이 아스텔 쪽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아스텔은 그에게 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귓가에 카이젠의 손가락이 닿았다.

카이젠은 흘러내린 백금색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면서 아스텔을 안심시켰다.

“테오르는 반드시 되찾아올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다시 만난 이후 아스텔은 가끔 카이젠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특히 이렇게 다정다감한 행동을 할 때마다 이 남자가 자신이 알던 카이젠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과거의 카이젠은 다정한 약혼자를 연기하면서도 언제나 냉정했다. 매번 아스텔을 배려하는 척했지만 그런 계획된 친절함 속에도 어딘지 모르게 매정한 구석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반면 지금의 카이젠은 흠결 없이 다정하고 친절했다. 따스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길, 어디에도 거짓된 구석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라서 그런 건가.

다정한 카이젠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풀어지면서도, 기억 속 옛날 모습과 대조될 때마다 풀어진 마음이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게다가 지금 이 모든 일이 결국은 이 남자가 괜한 짓을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감정이 얼어붙다 못해 분노가 치밀었다.

아스텔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의 곁에서 벗어났다.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

카이젠의 무거운 눈빛이 아스텔을 따라왔다.

그는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이만 돌아갈 테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아스텔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안타까운 시선이 잠시 동안 머물다가 사라졌다. 고개를 들자 문밖으로 나가는 카이젠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이 닫힌 뒤 아스텔은 불안감을 곱씹으며 다시 유리창으로 몸을 돌렸다.

잿빛으로 흐려져 가는 수도의 정경이 보였다. 이제는 제발 테오르가 무사하기만을 마음속으로 비는 수밖에 없었다.

* * *

테오르는 덜컹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여긴 어디지?’

서서히 눈을 뜨자 낯선 풍경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무늬 없는 지붕과 창문이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몸이 끝없이 흔들리고 덜컹거렸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테오르는 자기가 달리는 마차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천장 아래에 달린 유리창에 푸른 하늘과 나뭇가지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저 어린애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낯선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 처음 보는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깨어난 거냐.”

테오르는 깜짝 놀라서 두 사람을 살폈다.

둘 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황제 폐하와 비슷해 보였는데, 황제 폐하와 달리 험악하고 무서워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누굴까?

‘나는 왜 여기 있지?’

테오르는 주변을 둘러보며 할아버지를 찾았다. 하지만 좁은 마차 안에는 낯선 두 남자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다른 남자가 툭 내뱉었다.

“후작님은 여기 없다.”

훌쩍이던 테오르는 놀라서 굳어졌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젯밤의 일이 기억났다.

어젯밤, 누군가가 테오르가 숨어 있는 옷장 문을 열었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 그가 테오르를 잡아끌었다.

“싫어!”

테오르는 비명을 질렀다. 그때 뒤에서 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조심해서 다뤄라.”

그러자 테오르를 붙잡은 남자가 천으로 테오르의 입을 막았다. 이상한 냄새와 함께 정신이 흐려졌다. 기억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테오르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을 보건대 자신은 이 사람들에게 붙잡힌 모양이다.

분명 납치당한 것이다.

납치가 뭔지는 안다. 동화책이나 연극에서 본 적이 있었다. 나쁜 사람들이 어린애나 숙녀를 잡아가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아는데 그다음에 어떻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동화에서는 누군가가 납치된 사람을 구하러 오지만 현실과 동화는 다르다는 걸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마차는 여전히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들이 그걸 알려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어젯밤 옷장에 들어간 이후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장 밖에서 들리던 난폭한 소음도 다시 기억 속에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다친 걸까?’

잡혀가고 있다는 현실보다도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흑…….”

테오르는 훌쩍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테오르가 우는 걸 보고 맞은편의 남자가 화를 냈다.

“질질대지 마라. 우는 애는 질색이야.”

맨 처음부터 테오르에게 말을 걸던 남자였다.

테오르는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다른 남자가 그런 테오르를 보며 동료를 만류했다.

“함부로 대하지 마라. 귀한 도련님이야.”

그는 마차의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종이로 된 상자 안에는 한입 크기의 비스킷이 들어 있었다.

고소한 버터향이 풍겼다.

“이걸 줄 테니 울지 마라.”

테오르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비스킷 상자를 바라봤다.

비스킷 같은 걸 먹고 싶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른이 주는 선물을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테오르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남자가 주는 비스킷을 받았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할 것 없다.”

남자의 무뚝뚝한 말에 감사 인사를 하던 테오르는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자세히 보니 그가 다른 남자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계속 뭐라고 구시렁대는 다른 남자보다 선량해 보이는 눈이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남자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너…….”

“네?”

남자는 테오르의 어깨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놀란 표정으로 테오르의 눈을 들여다봤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은 충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테오르는 그가 왜 자신을 보고 놀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가만히 눈만 깜빡이던 테오르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젯밤부터 눈 색을 바꾸는 약을 넣지 않았다는 것을.

* * *

육중한 서재 문이 부서질 듯이 거칠게 열렸다. 서재에 앉아 있던 레스턴 공작은 노크도 없이 들이닥친 자신의 아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인지 몰라서 물으십니까?”

프리츠는 아버지를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할아버님을 습격하고 테오르를 데려가셨지요?”

공작은 의아한 눈길로 아들을 올려다봤다.

아직 아이를 데려오라고 보낸 부하들이 수도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수도에만 있던 프리츠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조금 놀라웠다.

‘이 녀석도 아이를 데려오려고 했던 건가?’

프리츠는 아스텔을 도와주지 못해서 안달이니 그 어린애를 데려다가 보호해 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화를 내는 걸 보니 한발 늦었나 보군.’

공작은 별다른 감흥 없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예상은 했지만 뻔뻔하게 부정하는 아버지를 보자 화가 났다.

프리츠는 욕설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버지 짓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공작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며 물었다.

“증거가 있느냐?”

“할아버님께서 아버지의 수하들을 보셨다더군요.”

아스텔은 프리츠를 따로 불러서 테오르와 할아버지를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프리츠는 아스텔의 부탁을 듣자마자 자신의 심복들을 동부로 보냈다.

테오르와 할아버지를 찾아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호위하고, 집에 도착한 뒤에도 자신이 다시 부를 때까지 두 사람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가 보낸 부하들은 간발의 차이로 늦고 말았다. 그들이 두 사람을 찾았을 때는 이미 테오르가 괴한들에게 붙잡혀간 뒤였다. 외할아버지는 습격을 받아 상처를 입고 여관방 안에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외할아버지의 부상은 심하지 않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들이 프리츠가 보낸 사람들인 걸 확인하고 자신을 공격한 자들이 누구인지 말해줬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공작가의 사람들이었다고.

“잘못 봤겠지.”

공작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아들의 말을 반박했다.

“네 외조부님은 오랫동안 공작가에 온 적이 없는데 우리 가문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하시겠느냐? 다른 사람과 착각하셨겠지.”

“제 부하들이 조사해 본 결과 여관 근처에 분명 우리 가문 사람들이 왔었다고 합니다.”

“내 부하들은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근처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증거가 되겠느냐?”

“아버지. 저는 말장난을 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프리츠는 분노를 참으며 물었다.

“외할아버님이 다치셨고 테오르는 사라졌습니다. 테오르는 어디 있습니까?”

프리츠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스텔이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황궁 무도회 이후 아스텔은 저택에 갇혀서 꼼짝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무도회 날의 폭로로 아스텔이 테오르의 생모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 아스텔은 사생아를 낳은 공녀로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테오르와 할아버지는 먼저 집으로 떠났다고 했다. 가엾은 아스텔은 프리츠를 불러서 두 사람이 집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했다.

아스텔이 그에게 직접 도움을 청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반드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도와주지 못하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의 간절한 부탁도 들어주지 못하다니. 자신은 정말로 한심한 오빠였다.

심지어 그가 늦는 바람에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까지 괴한들의 습격에 부상을 입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던 프리츠는 이제라도 테오르를 찾아서 아스텔에게 데려다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 테오르가 어디 있는지 말씀하십시오.”

공작은 여전히 시치미를 뗐다.

“글쎄, 몇 번을 물어도 난 그 사생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프리츠는 아버지의 뻔뻔한 모습에 참다못해 카이젠의 이름을 꺼내 들었다.

“폐하 앞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폐하라니?”

“폐하께서 테오르를 찾으라고 기사들을 동부로 보냈습니다.”

부하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이 떠나기 직전 황제가 보낸 기사들이 왔다고 했다. 외조부인 후작은 이 일로 프리츠가 곤란해질까 봐 서둘러 그의 부하들을 수도로 돌려보냈다.

황제가 기사들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서야 공작의 뻔뻔한 미소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황제가 그 애를 왜 찾는단 말이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제의 속셈이 뭔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작은 다시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제가 뭐라고 해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를 아무리 심문해 봤자 있지도 않은 애를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

프리츠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포기했다.

더 얘기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공작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지며 차갑게 선언했다.

“저는 제 힘으로 아이를 찾겠습니다.”

프리츠는 이미 저택 구석구석을 뒤지고 아버지의 별장도 다 찾아봤다.

그러나 어디에도 테오르는 없었다.

‘아직 수도에 데려오지 못한 거겠지.’

아버지는 분명히 테오르를 수도로 데려올 것이다.

테오르는 아스텔을 협박하기 위한 열쇠였다. 아버지는 그 애를 가까운 곳에 두려고 할 것이다. 아버지를 감시하고 저택을 지키고 있다 보면 아이를 찾을 수 있으리라.

프리츠는 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왔다. 그는 자기가 머무는 저택의 서쪽으로 돌아와서 부하에게 명령했다.

“이 저택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아버지의 동향도 감시해라. 아버지가 어디서 누굴 만나는지 철저하게 감시해.”

* * *

프리츠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레스턴 공작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서재에 남은 공작은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 속으로 혀를 찼다.

'저 녀석 나를 감시할 생각이군.'

프리츠는 그의 친아들인데다 가문의 후계자였다. 당연히 이 저택과 수도에 있는 다른 별장들도 빠짐없이 알고 있다.

아비인 그의 행동반경도 샅샅이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밤낮없이 감시하다 보면 어딘가에서 그 애를 찾을 수 있다는 계산이겠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감시당하는 신세라니. 공작은 어이가 없었다.

‘제가 그런다고 나를 이겨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공작은 아들이 몹시 가소롭게 느껴졌다. 철딱서니 없는 어린 자식은 부모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그는 아들의 엄포에 코웃음 쳤다.

‘그런데 카이젠이 그 애를 찾고 있다니…….’

프리츠의 협박은 가소로웠지만 황제인 카이젠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설마 카이젠이 그 사생아에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는데.’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푹 빠져 있었다. 카이젠으로서는 아스텔의 사생아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테니 없어지든 말든 신경도 안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작이 듣기로는 아이와 후작이 먼저 동부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도 카이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공작은 그 말을 듣고 카이젠이 아스텔의 자식을 동부의 시골에 처박아 두려는 줄 알았다.

‘아스텔이 말을 안 들으니 애를 데려다가 협박하려는 건가?’

혹시 카이젠도 공작 자신과 비슷한 목적으로 아이를 찾는 건가 싶었다.

‘지금은 카이젠의 기분을 거스르면 안 되는데.’

지금은 아스텔이 다시 황후가 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시국에 카이젠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거 낭패로군. 그 애를 어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잠시 쉴 생각이니 방해하지 마라.”

그는 뒤따라오는 집사에게 엄명을 내리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의 침실은 황궁 안에 있는 황제의 침실만큼이나 화려했다. 그는 침대 옆에 있는 벽으로 걸어갔다.

연청색 벽에는 백옥으로 우아한 백합 덤불이 세공되어 있었다. 공작은 덤불 아래에 겹쳐진 하얀 꽃잎을 손으로 눌렀다. 단단한 벽에 균열이 생기더니 숨겨진 문이 나타났다.

공작은 후계자인 프리츠에게 오래전부터 가문의 일을 가르쳤지만 모든 것을 다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가주의 침실에서 통하는 이 비밀 통로는 아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른 비밀 통로는 다 가르쳐 줬지만 이곳만은 제외였다.

공작은 문으로 들어가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한참 내려가서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돌벽에 붙은 문이 보였다.

이곳은 그가 제일 신임하는 측근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은밀한 밀실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심복이 밖으로 나왔다.

“공작님.”

“그래. 아이를 데려왔나?”

조금 전에 이미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남은 일을 처리하고 프리츠까지 만나느라 잠시 시간을 지체했다.

“예, 도련님은 모셔왔습니다. 한데…….”

심복이 충격받은 얼굴로 잠시 말끝을 흐렸다.

“왜? 애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오다가 다치거나 병이라도 났나 싶어서 덜컥 걱정이 되었다. 그깟 사생아 따위 죽든 말든 상관없었지만, 카이젠이 찾고 있다는데 지금 죽는 건 곤란했다.

심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공작님, 당장 도련님을 보셔야겠습니다.”

* * *

테오르는 좁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가는 곳은 없었다. 작은 나무문이 하나 있기는 했는데 굳게 닫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테오르는 낯선 남자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 이 이상한 곳으로 왔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엄청 큰 건물이 보였던 것만 기억이 난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테오르는 남자들의 손에 이끌려 땅속에 있는 통로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 작은 방에 갇혀 버렸다.

‘여기는 어딜까? 이 방도 땅속에 있는 걸까?’

이곳엔 창문이 없어서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겠다. 테오르를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는 여기서 기다려 달라고 친근하게 부탁했다.

“도련님.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공작님을 모셔오겠습니다.”

테오르는 그가 말하는 ‘공작’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봤다. 하지만 테오르가 아는 사람 중에 ‘공작’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낯선 사람이 또 다른 낯선 사람을 데려오겠다며 테오르를 이곳에 남겨두고 가버렸다. 충분히 두려운 상황이었지만 테오르는 별로 겁이 나지 않았다.

처음에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겁이 났다. 두려움에 떨면서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하지만 테오르를 납치한 낯선 남자들은 이곳에 오는 내내 테오르를 극진하게 보살폈다.

테오르도 그들의 친절하고 다정한 태도에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테오르는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봤다. 붉은 눈을 들켰을 땐 엄청난 일이 생기는 줄 알았다.

‘엄마는 붉은 눈은 아주 귀중한 거라서 남들이 알면 큰일 난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함께 있던 낯선 남자들은 붉은 눈을 보고도 테오르를 해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테오르에게 비스킷을 건네줬던 낯선 남자는 붉은색 눈을 본 다음부터 테오르를 아주 조심스럽게 대했다.

중간에 잠시 마차에서 내릴 때마다 힘들지 않냐며 편안한 침대를 찾아주고,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가 먹을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했다.

테오르는 남자들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은 자신의 눈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테오르를 귀찮아하던 다른 남자도 붉은 눈을 본 다음부터 놀랄 만큼 친절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사람들을 믿으면 안 돼. 나쁜 사람들이야.’

테오르는 어렸지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은 납치당했다.

남자들이 아무리 친절해도 그들은 납치범일 뿐이었다.

‘도망가야 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도망쳐야 했다.

테오르는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방 안을 둘러보며 나갈 곳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나갈 만한 곳은 없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창문도 없었다.

한쪽 벽 위에는 작은 종이 달려 있었다. 사람을 부르기 위한 종이었다. 테오르가 살던 집에도 그런 종이 있었다. 침실에서 줄을 당기면 부엌에 있는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테오르는 그 종을 만져보려고 했지만 그나마도 너무 높아서 손이 닿지 않았다.

테오르가 네모난 방 안을 돌아보며 벽에 틈이라도 있나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테오르를 데려온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그 남자 뒤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연한 금발에 황제 폐하나 벨리안 같은 사람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마른 체구에 짧은 금발을 차분하게 빗어 넘기고 한쪽 눈에는 단안경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높은 신분 같다. 테오르는 그 남자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집에 있을 때는 신분에 따라 다른 옷을 입는다는 걸 잘 알지 못했다. 황제 폐하를 만나고 함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테오르는 높은 귀족들은 화려하고 멋진 옷을 입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백작인 벨리안도 늘 좋은 옷을 입었고, 기사단장이라는 린든도 그랬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벨리안이나 린든보다 훨씬 더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경악한 얼굴로 테오르에게 걸어왔다.

“이 애가 아스텔의 아들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공작님.”

테오르를 데려온 남자가 백금발 남자에게 말했다.

아스텔은 엄마의 이름이었다.

‘이 아저씨는 우리 엄마를 아는 걸까?’

백금발 남자는 테오르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테오르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아!”

테오르는 아파서 발버둥 쳤다.

백금발 남자는 화를 내며 테오르의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만히 있어!”

목덜미를 잡힌 채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테오르는 숨쉬기가 힘들어서 켁켁거렸다.

“눈을 떠라.”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테오르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곳에 남자의 얼굴에 보였다.

“허…….”

그는 테오르의 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테오르를 잡은 손을 풀었다. 테오르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 위에서 남자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렇지. 내 딸이 하찮은 사생아를 낳을 리가 없지.”

테오르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종소리가 들렸다. 밀실 벽에 붙은 작은 종이 저절로 흔들리고 있었다. 백금발 남자가 종을 보며 중얼거렸다.

“집사가 나를 급히 찾는군.”

그는 테오르를 데려온 남자에게 명령했다.

“아이는 잠시 여기 놔둬. 다시 돌아올 테니까.”

* * *

린든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공작가의 응접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함께 온 부하들이 저택의 대문부터 응접실로 통하는 복도까지 점령한 채 그의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공작가의 저택을 에워싸고 있는 건 사라진 테오르를 찾기 위해서였다. 테오르를 되찾아서 아스텔 공녀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린든은 아스텔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순행길 동안 린든은 아스텔의 기품있고 단정한 모습에 매료되었다. 아스텔은 우아하고 현명한 분이었다. 심지어 황제 폐하도 다시 그분에게 마음이 끌리는 게 보였다.

‘테오르 님이 아스텔 님의 아들이었다니.’

린든도 그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아스텔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가엾은 공녀가 모든 것을 잃고 힘겹게 살면서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그 서글픈 현실이 경멸보다는 연민을 자아냈다.

게다가 지금 테오르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걸 보고 있으니 더더욱 아스텔이 가엾게 느껴졌다.

테오르라도 얼른 되찾아서 아스텔의 품에 돌려주고 싶었다.

“아, 자네로군.”

린든은 응접실에서 아스텔의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을 만났다. 린든도 이 중년의 대귀족을 혐오했다. 공작은 그를 보고 반갑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내 저택에는 무슨 일로 온 건가?”

“테오르 님을 모셔가려고 왔습니다.”

“누구를 데려간다고?”

공작은 마치 그런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린든은 그에게 속지 않았다.

“공작님 짓인 걸 알고 있습니다. 증거도 있습니다.”

“내게 관심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군.”

린든은 그에게 성큼 다가서며 위협적은 시선을 보냈다.

“납치는 중죄입니다.”

공작은 느릿느릿 대답했다.

“할아비가 외손자를 데려온 게 잘못이라는 말인가?”

“아무리 손자분이라고 해도 보호자를 습격하고 데려가시는 건 납치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린든은 완고한 말투로 상대를 책망하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테오르 님을 모셔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테오르 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일개 기사단장이 공작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 무례한 소리였다.

하지만 공작은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폐하께서 내 손자를 보고 싶어 하신다면 내가 직접 황궁으로 아이를 데려가겠네. 그러면 되겠나?”

“안 됩니다. 저는 지금 당장 도련님을 모셔가야 합니다.”

린든은 공작이 거부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공작은 순순히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럼 함께 가면 되겠구먼.”

공작은 집사를 불러서 뭔가를 지시했다.

집사가 황급히 어딘가로 향했다.

“잠시만 기다리시게.”

잠시 후, 어떤 남자가 응접실 안으로 공작을 찾아왔다.

공작은 그에게 다시 명령했다.

“아이를 데려와라.”

그 남자가 린든을 힐끗 보고 되돌아 나갔다.

공작은 석상처럼 서 있는 린든을 구경하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자꾸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린든은 이 공작님이 일부러 테오르를 한 번에 데려오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빙빙 돌리면서 자신을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는 인내심 있게 계속 기다렸다. 공작의 말은 테오르가 이 저택 안에 있다는 것을 시인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허튼짓하면 여기를 뒤엎고 테오르를 찾아서 데려갈 수도 있었다.

“공작님. 도련님을 모셔왔습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앞서 명령을 받고 나간 남자가 테오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 그래. 내 손자를 데려왔군.”

공작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린든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다.

“린든 경. 자네도 제대로 인사해야 하지 않나?”

린든은 처음에 공작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린든 아저씨!”

순간 테오르가 그를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왔다.

린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오르의 손을 잡았다.

“테오르 님…….”

그는 아이를 바라보며 괜찮냐고 다친 데는 없냐고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테오르와 눈을 마주친 순간 린든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분명 푸른색이던 테오르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 * *

유리창으로 비쳐든 석양이 바닥에 그림자를 남겼다.

벌써 해 질 무렵이었다. 노을이 수도의 정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스텔은 서재의 창가에 앉아 저녁놀이 지는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없으니 할 일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저택 안에서 하염없이 테오르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한나가 문을 두드렸다.

“아스텔 님.”

“한나? 무슨 일이야?”

아스텔은 혹시라도 새로운 소식이 왔을까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나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스텔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가져온 것이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한나는 착잡한 눈빛으로 작게 접힌 종이 봉투를 꺼내 보였다.

“프리츠 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아스텔은 떨리는 손길로 그 봉투를 받아 들었다. 메마른 종이의 감촉이 섬뜩할 만큼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황급히 봉투를 잡아 뜯었다. 안에는 작게 접힌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 적힌 건 의심할 바 없는 프리츠의 필체였다.

깔끔한 필체로 서두도 없이 간결한 설명만 담겨 있었다. 자기가 보낸 사람들이 한발 늦는 바람에 아버지가 테오르를 납치했으며, 테오르는 아직 수도에 도착하지 못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아스텔은 글을 다 읽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했다.

“아스텔 님!”

한나가 비틀거리는 아스텔을 옆에서 부축했다.

“괜찮아.”

아스텔은 한나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기어이 그렇게 됐구나.’

그동안의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의자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힌 뒤 아스텔은 다시 편지를 들고 이어지는 내용을 읽었다.

프리츠는 자신이 테오르를 찾아볼 테니 안심하라고 적었다. 프리츠가 구해주지 않아도 이미 카이젠이 공작가로 기사들을 보낸다고 했었다.

테오르의 안전은 걱정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데려갔다면 테오르가 위험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라면 테오르의 눈을 보는 순간 그 애가 카이젠의 자식이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그게 문제였다. 아버지가 테오르가 황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테오르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되면 아버지는 당장에 아이를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테오르는 현재 제국에 단 한 명뿐인 황자이자 유일한 후계자였다. 아버지는 테오르의 정체를 폭로할 테고, 결국 제국의 모든 사람이 테오르의 친부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아스텔은 한나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테오르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될 거야. 어쩌면 이미 알았을지도 몰라.”

이제는 한나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렸다.

“아스텔 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스텔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자신은 이곳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대문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황궁과 공작가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스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사태를 수습하고 상황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만들려면 한 가지 방법뿐이다.

아버지가 테오르를 데리고 가당치도 않은 계략을 꾸미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테오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한나. 이곳을 지키는 근위대 기사에게 전해. 내가 지금 당장 폐하를 뵙기를 청한다고.”

* * *

카이젠은 자기 손으로 회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하고 있던 근위 소장이 황급히 그의 도착을 알렸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가 테이블의 상석에 앉자 기다리고 있던 대신들도 자리에 앉았다.

오후의 중신 회의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벌써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일이 너무 밀려서 원래는 오전에 해야 하는 이 회의도 오후로 늦췄다.

그간 카이젠은 정신없이 바빴다. 순행 때문에 밀린 일도 많았고 새로 착수해야 하는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끝없는 업무로 피로가 쌓였지만, 사실 그를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문제는 아스텔의 일이었다.

아스텔은 여전히 그의 청혼을 거부하고 있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편안한 황궁에서 테오르를 기르며 황후로 살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아스텔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아스텔을 다시 황후로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스텔은 그의 도움을 거절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 그녀가 자신을 받아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아스텔이 비난받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좀 더 안락한 환경에서 편히 살길 바랐다. 아스텔이 명예와 권력을 되찾을 수 있게 형식적인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것뿐인데.

‘형식적인 계약 결혼마저도 싫다는 건가.’

아스텔은 카이젠 자신과 다시 엮이는 게 죽도록 싫은 모양이다. 형식적인 황후 자리마저 거절할 정도로.

쓰라린 감정이 느껴졌다.

대강의 안건을 처리한 뒤 카이젠은 서류장을 들춰보며 물었다.

“국혼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그 한마디에 회의실 안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서류를 들춰보던 카이젠은 시선을 들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중신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무겁고 어두웠다. 이미 며칠 전에 있었던 중신 회의에서 카이젠은 아스텔을 다시 황후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연히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다는 사실은 카이젠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아스텔과 결혼할 테니 국혼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을 때도, 모두 죽지 못해 입을 다물었지만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대귀족들이 몰락한 지금 감히 황제에게 불만을 말할 수 있는 귀족은 없었다.

대신들은 카이젠에게 털어놓지 못한 분노를 벨리안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황후궁을 새로 증축하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되고 있지?”

“폐하, 그것이…….”

카이젠의 물음에 내무대신이 머뭇거리며 말을 흐렸다.

카이젠은 서류장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앉은 대신들을 한 명씩 돌아봤다. 그의 눈빛이 닿을 때마다 중신들은 시선을 떨궜다.

“내가 내 황후와 재혼하겠다는데 경들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불만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엄포에 테이블 위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여 있는 중신들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낯빛들이었지만 반대의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똑-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회의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폐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스텔을 지키는 근위기사였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 있나?”

카이젠은 아스텔을 지켜야 할 근위기사가 이곳에 오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갑작스레 회의 중에 난입한 것만 봐도 심상찮은 일이 분명했다. 젊은 기사는 회의실에 모여 있는 중신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폐하, 잠시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카이젠은 그의 말투에 담긴 불안감을 감지했다.

“오늘은 이만 끝내지.”

카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근위기사가 그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공녀님께서 폐하께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아스텔이? 나를?”

“예, 급하게 전해드릴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한시가 급한 일이라고 지금 당장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한시가 급한 일이라는 소리에 카이젠은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고 곁에 있는 시종에게 명령했다.

“당장 아스텔이 있는 저택으로 가겠다. 준비해라.”

그는 곧장 아스텔이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 노을이 사라지고 해가 저물었다.

하늘은 자색빛이 감도는 청회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카이젠은 그늘이 내려앉은 대문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텔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응접실에 있었다.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하늘을 배경으로 아스텔의 뒷모습이 보였다.

카이젠은 순간 아스텔이 사라질 것 같았다. 왜인지 가슴에 저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는 다급히 물었다.

“아스텔. 무슨 일이지?”

창문을 내다보던 아스텔이 그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스텔은 무릎을 굽히며 차분하게 예를 갖춘 뒤 고개를 들었다.

“폐하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카이젠은 놀라서 멈춰 섰다.

아스텔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를 직시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고?”

카이젠은 방금 자기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당신이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어. 조건 같은 건 걸지 않아도 돼.”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다니.

이런 순간에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스텔이 바라던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제발 수도를 떠나서 테오르와 함께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카이젠은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단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제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셨지요. 계약할 거라면 계약 조건을 확실히 정하고 싶습니다.”

아스텔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의지를 담아서 말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말에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차가운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좋아. 무슨 조건이지?”

아스텔은 천천히 심호흡한 뒤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테오르에 대한 일입니다.”

“테오르는 무사히 데려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카이젠은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그리 답했다.

아스텔이 얼마나 테오르를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제 아이가 아니더라도 카이젠은 테오르를 친자식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스텔이 하려고 했던 말은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

“테오르는 폐하의 아이입니다.”

그녀의 말에 카이젠은 눈을 부릅떴다.

“뭐?”

카이젠은 자신이 들은 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뭐라고? 테오르가 내 아들이라고?”

넋을 잃고 서 있는 카이젠에게 아스텔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결코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테오르를 위해서는 아스텔은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어떻게……!”

카이젠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카이젠도 ‘혹시 테오르가 내 자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테오르가 아스텔의 자식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결혼식 첫날밤의 기억이었다.

형식적으로 아스텔과 동침했던 신혼 초야의 기억.

그날 밤 카이젠은 자기가 직접 피임약을 썼다. 하지만 피임약은 가끔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혹시 그때 생긴 아이가 아닐까? 잠시나마 그런 헛된 희망을 품어봤었다.

한편으로는 제발 테오르가 자신의 아들이기를 바랐다.

아스텔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상상할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러나 테오르의 청명한 푸른 눈동자는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카이젠은 지난 며칠간 끝없이 고통과 분노를 느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테오르가 자신의 아들이라니.

아스텔은 카이젠의 황망한 시선을 받으며 설명했다.

“우연히 실력 좋은 약제사를 만나 눈 색을 변하게 하는 약의 조제법을 얻었습니다. 그 약으로 매일 눈 색을 바꿨습니다.”

“약이라고?”

눈 색을 바꾸는 약이라니.

카이젠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그가 테오르를 숲속에 있는 별장에 데려갔던 날. 아스텔은 해 질 무렵 빗속을 뚫고 사냥 별장으로 달려왔었다.

그때는 테오르에게 뭔가 병이라도 있는지 걱정했었는데.

“마에른에서 사냥 별장에 따라왔던 것도 그 약 때문이나.”

그 약인지 뭔지를 넣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온 거였다.

아스텔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카이젠은 침착하게 눈을 내리뜨고 서 있는 아스텔의 모습에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숨긴 거지?”

카이젠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아내며 아스텔을 향해 걸어갔다.

“왜 이때까지 말하지 않은 거야!”

아스텔이 테오르를 조카라고 속인 것도 테오르가 사생아라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생아를 낳은 걸 공개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의 아들이라면 테오르는 황자다. 황자를 죽은 기사의 아들로 속여서 기르고 있었다니.

카이젠은 이를 악물었다.

“아이가 생겼으면 내게도 말을 해줬어야지! 나도 아버지로서 권리가 있잖아!”

카이젠은 그녀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화가 났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를 그렇게 보내버린 자신에게도 분노가 치밀었다. 그의 분노를 온몸으로 맞고 있던 아스텔이 고개를 들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공허한 빛을 담고 그를 올려다봤다.

“만일 그때 제가 임신했다는 걸 아셨으면 어떻게 하셨을 건가요?”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6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올랐던 날.

그 시절의 자신은 대귀족들과 내전 중이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에게도 수없이 많은 암살의 위험이 있었다.

그 살벌하고 냉혹한 시기에 아스텔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

카이젠은 그 물음의 답을 알고 있었다.

아스텔이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아이를 없애려고 했을 것이다. 아이만 없애는 게 힘들었으면 아마 아스텔까지 죽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말없이 서 있는 카이젠에게 아스텔이 말했다.

“제 아버지도 테오르의 눈을 보고 그 애의 신분을 눈치챘을 겁니다.”

카이젠은 돌아서서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도무지 지금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중요한 게 있었다.

“린든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공작가에 다시 사람을 보내! 린든에게 말해서 테오르를 이곳으로 데려오라고 해. 지금 당장!”

그를 따라왔던 근위대 기사가 황제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카이젠은 문을 닫고 다시 아스텔이 있는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스텔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테오르 때문에 나와 결혼하겠다는 말이었군.”

아비인 공작에게 테오르의 눈을 들켰기 때문에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청혼을 수락한다는 말에 잠시나마 기뻐했던 자신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내가 테오르만 데려가고 당신은 처벌할 수 있다는 걸 몰라?”

카이젠은 스스로가 진정되지 않아 아스텔에게 차갑게 내뱉었다.

그러나 말을 하고도 그는 입안이 쓰렸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아스텔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

카이젠은 자조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그는 마음대로 아스텔을 처벌할 수 있었다. 감히 황자를 숨긴 죄를 물어서 감옥에 가둘 수도 있으리라.

몇 달 전이었다면, 그녀를 다시 만나기 전이라면 분명히 아스텔을 처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카이젠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조건이라는 게 뭐지?”

카이젠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

아스텔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요구 사항을 말했다.

“제 오라버니를 서부의 관리자로 임명해 주십시오.”

“그 직책은 대대로 레스턴 공작가에서 물려받은 자리지.”

제국은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강력한 나라였다.

영토가 너무 넓다 보니 황제의 권한이 약하던 옛 시절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는 황제의 권위가 통하지 않았다.

옛 황제들은 제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수도가 있는 중부를 제외한 땅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놓았다.

그리고 지역마다 가장 거대한 영지를 가진 귀족에게 그 지역을 관리할 권한을 위임했다.

시대가 변하고 황제의 권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북부와 남부, 동부의 관리자였던 가문들은 차례차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레스턴 가문은 아직도 작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현 레스턴 공작이 대대로 이어진 재상 자리를 잃으면서 서부의 관리자라는 직책도 잃고 말았다만.

“영원히 달라는 게 아닙니다. 3년, 적어도 2년 정도만이라도 프리츠 오빠가 그 직책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세요.”

“당신 아버지를 물러나게 할 생각이군.”

카이젠은 아스텔이 왜 그 자리를 프리츠에게 달라고 하는지 눈치챘다. 자기 가문을 번영시키고 싶었다면 아버지인 공작에게 직책을 돌려달라고 했겠지.

“오라버니가 저희 가문의 세습직을 받으면 공작위를 계승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게 가능하겠나? 공작은 절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텐데.”

카이젠도 마음만 먹으면 공작을 없애버릴 수 있었다. 암살 사건의 배후를 밝히면 공작은 반역자가 될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스텔이 없어도 공작가를 쳐내지 못하게 되었다. 공작이 반역자로 죽으면 자신의 아들인 테오르는 황자임과 동시에 반역자 가문의 후손이 된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흔적은 그 애가 훗날 황제가 되더라도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아버지를 설득하겠습니다.”

아스텔은 아버지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사실을 설득이 아니라 협박이라고 해야겠지만.

가장 좋은 협박거리는 암살 사건이지만, 그 카드는 쓸 수 없었다. 그 일이 알려지면 자신은 물론이고 테오르에게도 치명적일 테니까. 하지만 아스텔에겐 다른 방법이 있었다.

아버지를 협박해서 프리츠 오빠에게 작위를 물려주게 할 방법이.

“……그래. 그 조건은 들어주지. 당신 마음대로 해.”

카이젠은 그녀의 조건을 수락했다.

레스턴 가문이 유지되면서 레스턴 공작만 별다른 잡음 없이 물러난다면야, 카이젠으로서도 기쁜 일이었다.

아스텔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리고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계약 기간은 5년으로 정하고 싶습니다. 그 후에 제가 이혼을 요구하면 언제든 수락해 주세요.”

카이젠은 입을 조금 벌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테오르가 내 아들이라면 황태자가 될 거야.”

카이젠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그런데도 이혼하겠다고?”

“예, 저는 언제든 이혼해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싶습니다.”

정말로 이혼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테오르의 입지를 위해서라면 그녀가 계속 황궁 안에서 황후 자리를 지켜야 하니까. 그래도 아스텔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마지막 열쇠를 손에 쥐고 싶었다.

이 족쇄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손안에 넣고 있어야 황궁 생활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카이젠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순간 붉은 눈에 불꽃이 일었다. 카이젠은 테오르의 출생에 대해 들었을 때보다 더 분노했다.

아스텔은 수년간 황후로 살면서 테오르의 입지를 다진 뒤 떠날 생각인 것이다.

“내가 약속해 주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지?”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녹색 눈동자가 다시 그를 직시했다.

“조건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청혼은 거절하겠습니다.”

“아이만 황궁으로 보내고 당신은 돌아가겠다고?”

카이젠은 아스텔이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스텔은 확고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제 조건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카이젠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자신을 이토록 밀어내는 그녀의 태도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결국 자신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자신이 6년 전, 아스텔을 버리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이젠은 아스텔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아스텔은 두 사람을 포기하고 가버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아스텔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스텔을 보내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감수하면서 여태껏 수도에 잡아뒀던 게 아닌가.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좋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약속해 주지.”

* * *

“자, 아가. 이걸 먹어봐라.”

레스턴 공작은 쿠키를 한 개 집어 들고 테오르에게 내밀었다.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였다. 평소의 그라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안 먹을래요.”

테오르는 그가 손을 뻗자마자 그 손을 피해서 의자 뒤로 도망쳤다. 의자 등받이 뒤에 몸을 숨기고 얼굴만 빼꼼히 내놓았다.

공작은 웃으면서 쿠키를 다시 그릇에 내려놓았다.

“단걸 좋아하지 않는 거냐?”

테오르는 그가 자신을 잡으려고 할까 봐 잔뜩 경계하면서 대답했다.

“싫어요.”

그러고는 그의 눈을 피해 의자 등받이 뒤로 완전히 숨어버렸다.

테오르는 저 공작이라는 사람이 싫었다. 그의 손에 잡혔던 목덜미가 아직도 욱신거리고 아팠다.

조금 전에는 목을 아프게 잡고 화를 냈으면서, 갑자기 친절하게 웃는 것도 이상했다. 높은 사람인 것 같았지만 그냥 보기만 해도 거부감이 들었다.

공작은 냅킨으로 손을 닦아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린애답지 않군. 귀한 혈통이라 그런가.”

어린애들은 이런 과자 같은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공작은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들이란 그저 시끄럽고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조그만 아이는 마음에 들었다.

이 애는 그의 피를 이어받은 황위 계승자였다. 이 아이가 황제가 되면 그는 섭정이 되어 합법적으로 제국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

섭정이 되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그 꿈을 위해 아스텔을 낳았고 미래의 황후로 교육시켰다. 비록 카이젠 때문에 장렬하게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아스텔은 자신의 몫을 다했다. 이렇게 귀엽고 영특한 황자를 낳아줬으니까.

‘이 아이가 황제가 되면 우리 가문이 제국을 지배하게 될 테지.’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복도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콰앙!

응접실 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분노한 프리츠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너는 노크하는 법을 잊은 거냐?”

프리츠는 험악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향해 걸어갔다.

“테오르를 데려왔다고 들었습니다. 아이는 어디에…….”

“프리츠 삼촌?”

그때 의자 뒤에 숨어 있던 테오르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내밀었다.

프리츠는 아이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테오르?”

“프리츠 삼촌!”

테오르가 쪼르르 달려 나와 그에게 안겼다.

“테오르, 여기 있었구나. 괜찮…….”

괜찮냐고 물으려던 프리츠는 울먹이고 있는 테오르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눈이…….’

아이의 천진한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흑…… 삼촌?”

테오르는 프리츠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런 표정이냐? 네 조카가 놀라겠구나.”

공작이 멍하니 굳어져 있는 아들에게 조소를 보냈다.

“아버지, 이건…….”

“그래. 보다시피 네 조카는 폐하의 자식이다.”

공작은 아들의 얼빠진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어리석은 아들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너는 어릴 때 황제의 놀이 친구였는데도 이 얼굴을 몰라봤단 말이냐? 생긴 것만 봐도 카이젠의 아들이건만.”

프리츠는 떨리는 눈빛으로 테오르를 내려다봤다.

울먹이는 눈동자는 여전히 홍옥처럼 붉었다. 그는 테오르를 보자마자 아스텔의 아이라는 걸 눈치챘었다.

테오르는 지그문트를 전혀 닮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의 단정하고 선이 가는 체구와 귀와 입술, 손의 모양 등이 아스텔과 아주 흡사했다.

그리고 지그문트와 단짝처럼 친했던 프리츠는 그에게 연인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아서 몇 차례 외조부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이 모든 것을 조합하는 순간 나은 답은 하나뿐이었다.

테오르가 아스텔의 자식이라는 것.

그러나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황제하고도 조금 닮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황제의 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눈 색이 가장 확실한 증거였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

“공작님.”

그때 딱딱한 목소리가 울렸다.

문가에 린든이 서 있었다. 조금 전 린든은 테오르의 일을 황제에게 알리기 위해 기사를 황궁으로 보냈다. 하지만 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황제가 보낸 전령이 먼저 도착했다.

“폐하께서 지금 당장 황…… 테오르 님을 아스텔 님의 저택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내 딸이 폐하의 청혼을 받아들인 모양이군. 그렇지?”

린든은 공작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테오르 님, 아스텔 님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 *

아스텔은 테오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젠은 조건을 들어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응접실을 떠났다.

저택 밖으로 나간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혼자 있으려는 모양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느닷없이 엄청난 소식을 들은 셈이니 잠시나마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리라.

이제 카이젠과의 결혼은 정해졌다. 카이젠은 이 결혼이 형식적인 결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아스텔은 황후로 살겠지만 카이젠과 진짜 부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황궁을 피해 도망치는 것도 테오르의 친부가 누구인지 들키지 않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이미 테오르의 정체를 들킨 이상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 다시 황궁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테오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었다.

황궁 밖에서 아무 힘도 없이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황후의 지위를 얻어서 테오르를 지키는 게 나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테오르를 지키는 것이니까.

한나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알렸다.

“아스텔 님! 테오르 님이…….”

한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스텔은 황급히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계단 아래에 린든 경과 테오르가 서 있었다.

테오르가 그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아스텔 고모!”

아스텔은 달려가서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테오르…….”

익숙한 온기와 보드라운 체향이 느껴졌다. 품 안에 안겨 있는 아이의 존재에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이리저리 몸을 살폈다.

“테오르. 괜찮니? 다친 데는 없어?”

“으응…….”

테오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자기 목에 손을 댔다.

“목 아파.”

“목이 아파? 왜?”

아스텔은 놀라서 셔츠 단추를 푸르고 테오르의 목을 살폈다. 흰 칼라를 걷어내자 가느다란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이 보였다.

“멍이 들었구나. 어디서 다쳤니?”

“나쁜 사람이 나를 이렇게 잡았어!”

테오르가 두 손으로 자기 목을 감싸듯이 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니?”

이게 무슨 말인지 더 물어보려는데 곁에 있던 린든 경이 헛기침을 했다.

“흠. 아스텔 님.”

“아, 린든 경, 아이를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린든은 복잡한 표정으로 아스텔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진중한 얼굴에 약간의 노기가 서려 있었다.

화가 난 건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지금 테오르의 눈은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쫓겨난 전 황후가 황제의 아들을 사생아로 속이고 있었다. 황제를 섬기는 신하로서 분개할 만한 일이었다.

아스텔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이 어떤 비난을 하셔도 저는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아스텔 님, 저는 아스텔 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린든은 조금 당황한 듯이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때 계단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린든.”

2층 난간 위에 카이젠이 서 있었다.

* * *

휴식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이젠은 테오르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스텔의 품에 안긴 테오르가 보였다. 카이젠은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린든과 기사들이 그에게 예를 갖췄다.

아스텔도 테오르를 놓고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테오르가 몸을 돌려서 그를 바라봤다.

“폐하?”

아이가 몸을 돌리는 순간 순진한 눈망울 속에 담긴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미 아스텔에게 들었지만 직접 아이의 혈통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정말…….’

테오르는 그의 아들이었다.

그 순간 카이젠은 형용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느꼈다.

“테오르.”

카이젠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테오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우유 향이 감도는 보드라운 뺨이 손끝에 닿았다.

“폐하, 왜 그러세요?”

“폐하가 아니다.”

카이젠은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자신과 같은 붉은 눈이 보였다.

“아버지라고 불러라.”

쥐죽은 듯이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기사들과 시종들 사이로 소리 없는 충격이 스쳐 갔다.

린든이 테오르를 안고 저택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 모두 아이의 눈 색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테오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우리 아빠는 하늘나라에 있는데요?”

카이젠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테오르는 당황한 듯이 아스텔을 돌아봤다.

“고모? 폐하가 아빠 얘기를 해.”

카이젠은 그 소리를 듣고 이를 악물었다.

“이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어머니라고 불러라.”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테오르는 겁을 먹은 듯 아스텔의 치맛자락을 잡고 고개를 돌렸다.

“테오르, 괜찮아. 폐하께서 너를 많이 걱정해 주셨어.”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고 달랬다.

그녀는 카이젠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부탁했다.

“폐하, 오늘은 아이가 많이 놀라고 피곤한 것 같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와주십시오.”

“…….”

카이젠은 슬프고 비참한 심정이 들었다.

6년 만에 만난 아들이 그를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두려워하며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상황을 납득시키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카이젠도 지금 당장 아이에게 아버지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카이젠은 슬픔을 참으며 몸을 돌렸다.

“황궁으로 가겠다.”

* * *

카이젠은 말없이 돌아서서 저택을 떠났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쓸쓸하고 처량해 보였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아버지로 인식하지 못하는 테오르의 모습에 깊이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아스텔은 별로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스텔 님.”

린든도 아스텔과 테오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카이젠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엄마? 황제 폐하가 왜 우리 아빠라고 하는 거야?”

카이젠이 기사들과 떠난 뒤, 테오르는 아스텔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우리 아빠는 하늘나라에 있잖아?”

테오르는 카이젠이 한 말 때문에 혼란스러운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오르.”

아스텔은 테오르를 다정하게 감싸 안고 테오르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아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찾아왔다.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네가 더 크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적어도 5, 6년은 지난 뒤에 사정을 설명해 줄 계획이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상황을 이해할 만큼 성장할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테오르에게도 진실을 말해줘야 했다.

아스텔이 황후가 되고 나면 테오르는 황태자가 될 것이다. 최소한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혈통인지는 분명히 알아야 했다. 아스텔은 한숨을 내쉬며 테오르를 끌어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우선 방으로 올라가자. 한나, 테오르의 옷을 준비해줘.”

“네, 아스텔 님.”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한나가 테오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테오르가 그녀를 발견하고 아스텔의 어깨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한나, 안녕.”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테오르 님.”

한나의 눈에 안도의 눈물이 고였다.

테오르가 놀라서 손을 들었다.

“울지 마. 한나.”

“네……. 너무 기뻐서 그래요.”

한나는 미소를 보이며 테오르의 손을 잡아줬다.

“많이 시장하시죠? 목욕하시는 동안 식사도 준비하겠습니다.”

“응. 나 배고파.”

한나가 웃음을 터뜨렸고 아스텔도 미소를 지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고 2층으로 올라왔다. 한나는 재빨리 목욕물과 갈아입힐 옷을 준비하러 갔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침대 위에 앉히고 무릎을 굽혀서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테오르, 많이 힘들었지? 이제 다 괜찮아. 여기는 안전해.”

“엄마,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나를 옷장 안에 넣었는데. 사라졌어.”

테오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시대. 조만간 이곳으로 오실 거야.”

“정말?”

“그럼.”

아마 납치범들이 두 사람을 습격했을 때 테오르를 옷장 안에 두고 싸웠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상처를 입고 다치셨던 거겠지.

상처 입은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니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컹컹!”

침실 안에 있던 블린이 테오르를 발견하고 반갑게 짖으며 달려왔다.

“블린!”

테오르는 블린의 목을 끌어안고 포근한 금색 털에 얼굴을 부볐다.

블린도 테오르를 만나서 기쁜지 폭신폭신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테오르는 블린을 끌어안고 헤어진 가족을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것처럼 절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블린, 보고 싶었어.”

블린은 그 말에 대답하듯이 테오르의 뺨을 핥았다.

테오르는 까르르 웃었다.

“네가 없는 동안 블린이 너를 많이 그리워했단다.”

테오르가 떠난 뒤부터 블린은 매일 테오르의 방에서 기운 없이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한나나 아스텔이 산책을 시키려고 해도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걷다가 다시 테오르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스텔은 서랍 안에 넣어뒀던 연고를 꺼내놓고 테오르의 목덜미를 다시 살폈다.

자세히 보니 더 심했다.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심하게 멍들어 있었다.

아스텔은 그 멍 자국을 살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목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니?”

“나쁜 사람이 내 목을 잡았어.”

“누가?”

테오르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공작이라는 사람.”

“…….”

그 한마디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이 갔다.

‘테오르가 카이젠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어떤 꼴을 당했을지…….’

테오르가 정말로 아스텔이 낳은 사생아였다면 아버지는 테오르를 다락방에 가둬놓고 방치했을 것이다. 목숨만 붙여놓은 채 자신을 협박하는 패로 썼겠지. 아버지의 냉혹하고 비정한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목에 약초로 만든 연고를 발라줬다.

“우선 진정되는 약을 발라 놓을게. 목욕을 하고 나서 다시 약을 바르자.”

테오르는 얌전히 아스텔이 약을 발라 줄 때까지 기다렸다.

풀냄새가 나는 약을 손에 묻혀서 피부에 발랐다. 보드라운 여린 피부가 손끝에 닿았다.

아이의 목은 한 손에 잡힐 만큼 가늘고 연약했다. 약을 발라주는 동안 다시 분노가 치솟았다.

이렇게 어린아이를 멍이 들 정도로 거칠게 다루다니.

심지어 자신의 외손자를.

이혼하고 집안에서 내쫓기면서 아버지에 대한 애정도 깔끔하게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스텔은 지난 6년간 아버지가 무사히 살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잘못되면 아스텔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할아버지를 다치게 하고 테오르를 납치하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테오르를 위해서라도 아버지를 그냥 놔둘 수는 없다. 아스텔은 아버지의 작위와 권력을 빼앗아버릴 생각이었다.

‘가문까지 피해가 가면 안 돼.’

아스텔 자신과 테오르를 위해 공작가는 건재해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라져야 한다.

연고 뚜껑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천진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엄마.”

블린을 쓰다듬던 테오르가 아스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아까 왜 그런 거야?”

“…….”

아스텔은 침대 아래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다시 테오르와 눈높이를 맞췄다.

“테오르.”

아스텔은 잠시 말을 멈추고 침대 위에 있는 아이의 두 손을 맞잡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위험해질까 봐 지금까지 말해주지 못했단다.”

아스텔은 혹여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까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폐하가 네 아버지야. 너는 황제 폐하의 아들이란다.”

테오르는 눈을 크게 떴다.

테오르는 또래에 비해 영리했지만, 황가의 핏줄이라는 게 얼마나 큰 위험을 담고 있는 자리인지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다.

테오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래서 폐하도 빨간색 눈인 거야?”

“그래.”

“근데 왜 우리랑 같이 안 살았어?”

테오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는 우리하고 같이 사는 게 싫대?”

“…….”

아스텔은 테오르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어디서 이런 말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 티 없이 맑은 눈동자에 속이 쓰렸지만 어린 테오르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해줄 수는 없었다.

대신 아스텔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폐하가 우리와 같이 살지 못한 건 너무 바쁘고 위험했기 때문이야.”

“정말?”

아스텔은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줬다.

“그래. 하지만 이제는 다 괜찮아졌어. 우리는 이제 황궁에 가서 폐하와 함께 살게 될 거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황궁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황궁에 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차피 갈 곳이라면 빨리 옮겨가는 게 나을 것이다. 이 저택보다는 황궁에서 지내는 게 더 안전할 테니.

테오르는 아스텔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그럼 우리 집으로 안 가?”

“…….”

그 질문에 아스텔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시골에서 살았던 6년간의 세월은 힘들었지만 평화로웠다. 외할아버지와 함께 테오르가 자라나는 걸 하루하루 지켜보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이제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평온하고 소박했던 행복이 영원히 끝나버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이제 우리 집에는 못 가.”

* * *

다음 날, 아스텔은 프리츠를 저택으로 초대했다.

사실 초대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초대장을 보내자마자 프리츠가 저택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일찍 오셨네요.”

프리츠는 문가에 서서 무거운 눈길로 아스텔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에는 어떻게 이런 비밀을 숨겼냐는 듯한 걱정과 책망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프리츠가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테오르는 괜찮은 거냐?”

“네, 하룻밤 자고 났더니 안정됐어요.”

테오르는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에 지친 모양이었다.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자마자 잠들어버렸다.

다행히 아침에 일어난 뒤엔 다시 기운을 되찾고 방에서 블린과 놀고 있었다.

“테오르를 미리 구해오지 못해서 미안하다. 내가 먼저 아이를 데려왔으면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이미 지난 일은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아스텔은 당장 황후가 되어 황궁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지나간 일을 자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프리츠는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들었다. 괜찮은 거냐?”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오빠를 만나고 싶었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스텔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작위를 내려놓고 물러나게 만들고 싶어요. 아버지 대신 오빠가 공작위를 계승해 주세요.”

그 엄청난 제안에 프리츠는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아버지는 절대 가문의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거다.”

“내려오게 만들어야죠.”

물론 아버지는 작위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스텔은 아버지를 잘 알았다.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은 정말로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이 되면,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작위든 뭐든 내놓을 사람이었다.

“오빠의 도움이 필요해요. 방법은 황궁에 들어간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제가 부탁드리는 대로 해주실 수 있나요?”

프리츠는 잠시 갈등하는 것 같았다.

친아버지를 몰아내고 가문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쉽게 결정하기 어려울 만도 했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그는 아스텔이 그렇게 떠나가고 많은 후회를 했다. 프리츠는 아스텔 앞에서 다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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