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수도 (8/24)

8. 수도

덴츠에서 출발한 지 열흘째 되던 날 아침. 덜컹거리는 마차가 수도의 동쪽 문을 통과했다. 드디어 수도에 도착한 것이다.

아스텔은 익숙한 도로의 풍경을 내다보며 씁쓸한 상념을 삼켰다.

‘다시 돌아왔구나.’

6년 전 이곳을 떠날 때만 해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는데.

세상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이렇게 황제와 함께 수도로 돌아오게 되다니.

황제의 일행은 황궁으로 들어갔지만 아스텔과 테오르가 탄 마차는 황궁 근처의 저택으로 향했다. 아스텔이 황궁에 머물지 않겠다고 하자 카이젠이 미리 준비하라고 명령해 둔 저택이었다. 

마차가 커다란 대문을 들어섰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흔들어 깨웠다.

“테오르. 도착했어. 일어나렴.”

“으응…….”

아스텔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던 테오르가 부스스 눈을 떴다.

“여기가 수도야?”

“그래. 이제 수도에 도착한 거야.”

마차에서 내리자 커다란 저택의 앞마당이었다. 신성수를 조각해 놓은 새하얀 벽에 금은으로 장식된 수십 개의 창문이 달려 있었다. 엄청나게 화려한 저택이었다. 아스텔이 살던 레스턴 가문의 저택과 맞먹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몰락한 어느 공작가의 저택이었다. 함께 마차에서 내린 할아버지도 그걸 깨달았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과한 것 같구나.”

“하루 이틀만 머물 건데요, 뭐.”

유언장 일만 마무리 되면 곧바로 돌아갈 것이다. 그건 카이젠도 허락한 일이었다. 암살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오르도 이곳까지 같이 왔지만 최대한 빨리 수도를 떠나는 게 좋았다.

그러니 어떤 곳에 머물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저택 안으로 들어온 뒤에는 아스텔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택 안은 훨씬 더 화려했다. 깨끗한 대리석 바닥과 샹들리에. 호사스러운 조각상과 장식품들. 얼마 전까지 머물던 덴츠성보다도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일개 귀족의 저택이라기엔 격에 안 맞을 만큼 호사스러웠다. 아스텔은 복도에 늘어선 조각상들을 구경하면서 물었다.

“다 새것 같네요.”

아스텔이 금장식이 달린 벽을 보면서 중얼거리자 저택 문을 열어준 시종이 얼른 대답했다.

“폐하께서 미리 황궁에 서신을 보내서 이곳을 새로 단장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이건…… 정말 너무 과한데.’

겨우 이틀 정도 머물 곳인데 이렇게까지 해놓다니.

시종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침실은 더 화려했다. 호사스러운 가구와 침구가 가득했다. 그것도 전부 새것이었다. 과거 아스텔이 하루 정도 머물렀던 황후의 침실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사치였다.

저택이 다가 아니었다. 테오르와 함께 머물 침실로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선물 상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저건?”

“폐하께서 도련님께 보내신 선물입니다.”

‘테오르에게?’

테오르는 선물 상자를 두 손으로 붙잡고 아스텔에게 물었다.

“뜯어봐도 돼?”

“그래. 뜯어보자.”

상자 안에는 은으로 만든 손가락만 한 병정 인형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그만 병정 인형들을 위해 작은 대포도 있었다. 손가락만 한 포병대 병사들이 세트로 딸린, 실물처럼 세밀하게 만들어진 작은 무기였다. 다른 상자에는 진짜 배와 똑같이 만들어진 범선도 있었고, 커다란 상자 안에는 3층으로 된 정교한 성도 있었다.

“우와…….”

테오르가 장난감들을 구경하며 감탄했다. 작은 얼굴에 순수한 기쁨의 빛이 차올랐다. 테오르는 여지껏 이렇게 좋은 장난감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폐하를 만나면 감사드리렴.”

“응!”

아스텔은 불안감을 숨기며 미소 지었다.

‘괜찮아. 최대로 많이 머물러도 이틀만 머물 거다. 이틀만.’

이틀을 되뇌며 방 안에 짐을 풀었다. 

한나가 방에 따라와서 아스텔을 도왔다. 한나는 정식으로 황궁에 사표를 제출하고 아스텔과 함께 수도로 돌아왔다. 이곳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함께 동부의 시골로 가기로 했다.

“한나. 내 짐은 내가 정리할게. 방에 가서 쉬어. 너무 피곤할 텐데.”

“아니에요, 아스텔 님.”

“괜찮아. 다 정리해 놓을 것도 아닌데.”

짐도 꼭 필요한 것만 정리해 놨다.

당장 이틀만 있으면 다시 출발할 텐데 짐을 다 풀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이틀 동안 써야 하는 것만 정리하고 나머지는 가방째 옷장 안에 넣어두었다.

창문 밖에 정원에서 놀고 있는 테오르가 보였다. 테오르는 그새 사냥개 블린을 데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정원으로 나가 있었다. 테오르의 해맑은 모습을 보니 문득 카이젠이 떠올랐다.

덴츠성에서의 마지막 날 이후 카이젠과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어쩌다 만날 기회가 생겨도 카이젠은 언제나 바쁜 것 같았다.

‘다행이지. 자주 만났으면 불편하고 민망했을 텐데.’

신전에는 내일 가기로 했다. 거기서 카이젠과 만나 유언장 일을 마무리 짓고 나면 더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도피할 곳을 알아봐야 하나.’

저택으로 가면 테오르의 정체가 밝혀지는 건 막을 수 있겠지만, 암살 사건의 진상은 어떻게 될까?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진상이 밝혀지면 아스텔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수도 있었다.

‘피신할 곳을 찾아야 할까? 하지만 내가 갑자기 몸을 숨기면 또다시 할아버지와 테오르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는데.’

아스텔은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짐을 정리했다. 짐 정리를 끝내고 정원으로 나가보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응접실 쪽을 지나가는데 시녀가 나와서 아스텔을 붙잡았다.

“레이디.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손님?”

무심코 응접실로 몸을 돌렸던 아스텔은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굳어졌다.

“아…….”

아스텔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마주하자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훤칠한 키와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 익숙한 백금발과 연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 연녹색 눈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아스텔의 연녹색 눈은 차갑게 식었다. 잠시 놀라움이 감돌았던 아스텔의 얼굴이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아스텔의 냉랭한 표정을 보고 방 안으로 들어오던 남자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스텔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난 6년간 거의 잊고 살았던 이름을.

“프리츠 오빠.”

아스텔의 친오빠인 프리츠였다. 서로에게 하나뿐인 남매이자 유일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던 두 살 위의 친오빠.

자신을 부르는 여동생의 싸늘한 음성에 프리츠의 조각같이 단정한 얼굴이 후회와 자책으로 일그러졌다.

“아스텔…….”

프리츠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용서를 빌었다.

“아스텔 미안하다. 이 오빠가 잘못했다.”

“…….”

어린 아스텔에게 프리츠는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데 있는 존재였다.

같은 부모를 두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가문의 후계자가 된 오빠는 딸로 태어난 아스텔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게다가 프리츠는 어릴 때부터 영재로 소문날 만큼 똑똑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아들이었다.

‘오빠는 너무 대단해서 감히 질투할 수도 없었지.’

아버지를 빼닮은 프리츠는 차갑고 자부심 높은 귀공자였지만 그래도 아스텔에게는 다정한 오빠였다.

프리츠는 아스텔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고, 아스텔이 밖에 나가고 싶다고 하면 투덜거리면서도 함께 데려가 주곤 했다.

카이젠을 제외하고 아스텔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오빠인 프리츠일 것이다. 매정하고 욕심 많은 아버지 대신 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이혼당하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도 아스텔은 오빠가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프리츠는 아스텔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왜 아버지 허락도 없이 이혼을 받아들였어?’

프리츠가 지친 얼굴로 돌아온 아스텔에게 처음 한 말이었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기분으로 저택을 떠날 때 프리츠는 아스텔을 붙잡으며 화를 냈다.

‘고집부리지 말고 아버지께 용서를 빌어.’

그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자신이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마지막 줄이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후 아스텔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수도를 떠났다.

“제게 사과할 필요 없어요. 돌아가세요.”

“아스텔…….”

아스텔의 냉랭한 눈빛을 마주하는 프리츠의 표정엔 슬픔이 깃들었다.

“다시 시작할 순 없는 걸까?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되겠느냐……?”

“6년간 말 한마디 못 해본 사이인데 이제 와서 무슨 기회가 필요한가요?”

아스텔은 프리츠의 부탁을 거절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는데, 프리츠는 그 말을 듣고 한층 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아스텔을 불렀다.

“아스텔…… 난…….”

그 순간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오르가 반쯤 열린 문을 붙잡고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아스텔 고모……?”

아스텔은 테오르를 보면서 흠칫 놀랐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빠가 테오르의 정체를 알아볼까?’

프리츠는 어릴 때부터 카이젠과 어울려 놀았다.

카이젠은 두 살 위인 프리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공작가의 후계자라 무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동생인 아스텔이 카이젠의 약혼녀였기에 프리츠도 아주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드나들며 카이젠과 놀이 친구처럼 지냈다.

테오르를 자세히 보면 어린 시절의 카이젠과 닮았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프리츠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테오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의문이 감돌았다.

“저 애는…….”

아스텔은 프리츠가 질문을 끝내기도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테오르예요. 지그문트 오빠의 아들이요. 얘기 못 들으셨나요? 지그문트 오빠가 아들을 남겼다는 거요.”

프리츠는 아스텔을 돌아봤다.

순간 그의 연녹색 눈에 복잡한 감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뭐지? 설마 눈치챈 건가?’

아스텔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프리츠는 테오르에게 다가갔다.

“네가 지그문트의 아들이라고?”

프리츠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테오르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만나서 반갑구나. 네 아버지인 지그문트는 내 사촌 동생이었단다.”

* * *

‘못 알아본 건가?’

하긴, 프리츠와 카이젠은 두 살 차이였다. 카이젠이 어릴 때는 프리츠도 어렸다. 다행스럽게도 프리츠는 어린 카이젠의 모습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아스텔은 남몰래 안도했다.

프리츠는 테오르에게 다가가서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네가 지그문트의 아들이구나. 꼭 만나보고 싶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테오르. 이분은 프리츠 삼촌이야. 고모의 오빠란다.”

아스텔의 설명에 테오르는 프리츠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프리츠 삼촌.”

“정말 귀여운 아이구나.”

테오르는 굉장히 귀여웠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은 맑고 깊은 호수처럼 진하고 아름다운 색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는 똘망똘망해 보였고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엔 티끌 하나 없었다.

“웃으니까 더 귀엽네. 인사성도 바르고.”

프리츠는 감탄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스텔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용건이 없으면 그만 돌아가 주세요. 방금 도착해서 쉬고 싶어요.”

“아스텔…….”

다시 애원하려던 프리츠는 테오르를 돌아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숨과 함께 이곳에 온 이유를 말했다.

“너를 만나러 온 건 황태후께서 남기신 유품 때문이야.”

“유품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유언만 있는 게 아니라 유품도 있었어요?”

“그래. 폐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황태후께서 네게 몇 가지 유품도 남기셨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스텔은 얼른 테오르부터 내보냈다.

“테오르. 네 방에 가 있으렴. 얌전히 기다리면 맛있는 쿠키를 줄게.”

“응!”

테오르는 나가기 전에 프리츠를 보고 꾸벅 머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프리츠 삼촌.”

프리츠는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가 정말 귀엽구나. 잘 키웠어.”

아스텔은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요구했다.

“유품 얘기나 해주세요.”

“그래.”

프리츠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단한 물건들은 아냐. 너무 값진 물건들이 사라졌다는 걸 알면 폐하께서 유품이 어디 갔냐고 찾으실까 봐 꼭 주고 싶은 것만 고르셨다는구나. 네게 주고 싶으셨던 그림과 보석…… 이런 것들을.”

황태후 전하는 아스텔을 많이 아끼셨다. 유언장에 그런 조항을 남기신 것도 아스텔을 위해주려는 그분 나름의 배려였다. 몰래 유품을 남겨주셨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폐하께서 아시면 화를 내실까 봐 돌아가시기 전에 몰래 우리 저택으로 보내셨단다.”

“그 유품들은 지금 어디 있는데요?”

“그게 아버지가…….”

프리츠는 대답에 앞서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데 내가 달라고 사정해도 못 가져가게 하신다.”

아스텔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이젠 황태후 전하의 유품까지 욕심내는 건가. 정말 지긋지긋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품이 탐나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가세가 기울었어도 명색이 공작인 아버지가 황태후 전하께서 남기신 잡다한 소지품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아버지는 유품이 탐나서가 아니라 아스텔에 대한 분노 때문에 고집을 부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버지는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아스텔은 단호한 말투로 오빠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전해주세요. 당장 그 물건들을 가져오지 않으면 폐하께 유품 얘기를 말씀드리고 아버지를 고발할 거라고요.”

프리츠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그…… 그러면 폐하께서 유품들을 압수하실 텐데.”

“아버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안 주는 거겠죠.”

아스텔이 가져야 할 물건들이지만 황제의 눈을 피해서 비밀리에 받은 유품들이니 안 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겠지.

아스텔이 받고 싶어도 어디 가서 고발할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새어 나갔다가는 아스텔을 싫어하는 황제가 유품을 다시 빼앗아 갈 테니까. 유품을 못 받아도 아무것도 못 하겠지. 그렇게 계산하고 있는 게 불 보듯 뻔했다.

“상관없어요. 황태후 전하의 유품을 아버지에게 드리느니 차라리 황태후 전하의 손자분인 황제 폐하께 가져다드리는 게 낫겠네요.”

아스텔의 냉담한 말에 프리츠는 작게 실소했다.

“하긴 그렇긴 하구나.”

프리츠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가겠다며 서재로 가려고 했다.

방에서 나가기 직전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스텔을 향해 말했다.

“수도에는 언제까지 머물 생각이냐?”

“이틀 뒤에는 돌아갈 거예요.”

“……며칠 더 있으면 안 되겠느냐? 어머니의 무도회 날이 얼마 안 남았잖아.”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년 이맘때마다 저택에서 정기적인 자선 무도회를 열었다. 그 일은 공작가의 전통이 되었다. 손님들을 초대해서 기부금을 모으고 그 돈을 구빈원이나 가난한 여자들에게 기부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수년간 자선 무도회가 열리지 않았다. 아스텔은 사교계에 데뷔한 뒤 어머니의 추억을 기리기 위해 어머니의 자선 무도회를 다시 시작했다. 그녀가 카이젠과 결혼하고 수도를 떠나기 전까지는 매년 저택에서 무도회가 열렸다. 수도를 떠난 뒤에는 저택에 안주인이 없으니 열리지 않았겠지만.

“그러게요.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됐네요.”

아스텔은 날짜를 헤아리다가 의아해서 물었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계속 무도회를 열었나요?”

“……그래. 내가 직접 주관했다.”

아스텔은 조금 놀랐다.

무도회는 안주인이 주관하는 거라서 남자인 프리츠 오빠는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었을 텐데. 과거 프리츠는 무도회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아스텔이 주관하는 거라서 마지못해 왔을 뿐이었다.

‘정말 후회하고 있었던 건가.’

완고한 성격의 프리츠가 그 정도로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봤자 다 지난 일이지.’

프리츠가 무슨 생각을 했든 아스텔은 관심이 없었다. 이제와서 자선 무도회를 위해 며칠간 이곳에 머물 생각도 없었다. 지금은 한가롭게 무도회에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죄송해요. 이틀 뒤에 꼭 떠나야 해서 저는 참석하지 못하겠네요.”

아스텔의 단호한 대답에 프리츠는 아쉬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제 할 얘기는 다한 것 같았다. 계속 말을 섞다가 불필요한 얘기를 흘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아스텔은 침착하지만 냉랭한 태도로 그에게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괜찮으시면 이제 돌아가주세요. 테오르를 씻기고 점심을 먹여야 해서요.”

매몰찬 축객령에 프리츠의 연두색 눈에 또다시 슬픔이 어렸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아스텔의 뜻에 따랐다.

“그래. 괜찮다면 나는 할아버님을 뵙고 가겠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고 싶구나.”

할아버지와의 만남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가 잘 알아서 말씀하실 것이다.

“할아버님은 정원에 계신 것 같아요.”

“그래.”

프리츠는 잠시 아스텔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네,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할게요.”

딱히 프리츠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가문의 후계자인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고 필요한 게 없으면 연락도 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는데, 프리츠는 아스텔의 대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했다.

“고맙구나.”

“…….”

프리츠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서 정원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

* * *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근위 소장의 정갈한 한마디에 문이 열리면서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대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도의 황궁에 있는 황제의 집무실은 크고 화려했다. 여태까지 순행 중에 들렀던 성들의 집무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카이젠은 테이블의 상석에 앉았다.

“폐하.”

고개를 돌려보니 크로이첸 후작이었다. 어둡다 못해 점점 음울한 기운을 띠고 침묵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대신들도 다들 그를 돌아봤다.

“무슨 일인가?”

“폐하, 제 아내와 여식 때문에 심려를 끼쳐 드려서 송구합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카이젠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가문의 여자들 때문에 순행 중에 두 번이나 쓸데없는 소란이 있었다. 마리안은 아스텔을 모함하려다가 들켜서 아직도 그 성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마리안의 모친인 후작 부인은 망신을 당하고 저택으로 쫓겨갔다.

“그 일은 이미 끝난 일이야.”

카이젠은 일말의 동정심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차갑게 명령했다.

“레이디 마리안은 감히 내가 초대한 손님을 모함하려 했으니 섬에 있는 수녀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후작 부인은…….”

카이젠은 후작 부인을 생각하며 잠시 말을 끊었다.

그는 마리안보다 후작 부인이 더 싫었다.

그 여자는 심지어 어린 테오르를 납치하려고 했었다.

‘증거가 없어서 처벌하지는 못했다만.’

납치범으로 잡힌 시녀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후작 부인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죽었다. 

카이젠은 짜증스러운 눈길로 크로이첸 후작을 바라봤다. 그 부인을 혹독하게 처벌하면 남편인 크로이첸 후작도 내쫓아야 한다. 그 여자는 죽여 버려도 아쉽지 않지만, 지금껏 자신에게 충성을 바쳐온 이 신하를 처자식 때문에 내칠 수는 없었다.

“후작 부인은 행실에 문제가 있으니 저택에서 근신하라고 해라.”

크로이첸 후작은 감격한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의 관대하신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자네 딸들이 허락 없이 내 순행 길에 따라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카이젠의 싸늘한 목소리에 테이블 위로 불안한 시선들이 옮겨갔다. 여기 있는 대신들은 모두들 크로이첸 가문의 플로린이 가장 유력한 황후 후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황제가 그 가문의 딸들을 보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크로이첸 후작의 자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고민 없이 명령에 복종했다.

“예, 폐하. 앞으로는 제 딸들이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 겁에 질린 얼굴로 얼마나 열심히 계산을 거듭하고 있을지. 카이젠은 이 영리하고 충성스러운 남자를 신임하고 곁에 뒀지만 아무리 봐도 욕심이 너무 과했다. 플로린을 황후로 만들려고 하다니. 

그동안은 다른 이들이 새 황후로 누구를 생각하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전을 수습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그딴 덴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플로린이라니. 이제 겨우 성년이 된 어린애인데.’

분수에 넘치는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었다. 

카이젠은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싹을 잘라 버릴 생각이었다. 후작 부인과 마리안을 분명하게 처벌하면 플로린을 들이밀지 못하겠지. 회의는 불안한 분위기 속에 빠르게 끝이 났다.

* * *

“폐하.”

회의가 끝나고 집무실로 돌아와 업무를 보고 있던 카이젠에게 벨리안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폐하, 정말 암살 사건을 조사하지 않고 비밀로 하실 겁니까?”

카이젠은 덴츠 성에서의 암살 사건을 조사하지 말고 비밀로 묻어두라고 명령했다. 현재 그 일은 수도의 대신들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카이젠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 일은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해라.”

암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다. 예전이었다면 범인을 밝혀서 처형했을 것이다. 반드시 암살을 사주한 자를 밝혀내라고 엄명을 내렸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공개적으로 처벌할 수 없었다. 진범을 밝혀냈다가는 아스텔은 반역자의 딸이 될 테니까.

그런 일이 생기면 황제의 권력으로도 아스텔의 신분과 명예를 온전히 보호해 줄 수 없을 것이다.

벨리안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카이젠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암살 사건은 절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된다. 그곳에서의 일은 철저하게 비밀로 해라.”

* * *

다음 날 아침. 아스텔은 아침 일찍 신전으로 향했다.

대신전은 황궁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아스텔이 머무는 저택도 황궁 근처라 신전과 가까웠다. 연한 물빛으로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회색의 대신전이 조용히 서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방문객은 많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아스텔은 작은 꽃다발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신전으로 들어섰다.

“아스텔 님……!”

“오랜만에 뵙네요. 대신관님.”

연로한 대신관은 반가운 얼굴로 아스텔을 맞이했다. 늙은 대신관은 죽은 황태후와 가까웠고 어릴 때부터 아스텔을 잘 알던 사람이었다.

“일찍 오셨군요.”

“예, 미리 와서 황태후 전하의 제단에 봉헌하고 싶었습니다.”

아스텔은 소중히 들고 온 꽃다발을 보여주며 말했다. 어제저녁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새하얀 아카시아 꽃으로 만든 꽃다발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황태후 전하께서 아스텔 님을 정말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대신관이 눈시울을 붉혔다. 

아스텔은 그와 함께 성소로 향하는 정원 길을 걸어갔다. 하얀 타일이 깔린 길을 걸으며 대신관이 황태후의 말을 전했다.

“황태후 전하께서는 제게 그 유언장을 맡기면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남부의 영지는 원래 내 것이었지만 평생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다스려 보지 못했으니 마지막으로 아스텔을 위해 쓰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그분의 유언을 직접 전해들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황태후 전하는 가엾은 분이었다.

남부 영지의 상속녀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 강제로 황가에 시집와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영지를 통치해보지 못했다.

“아스텔 님은 영민하신 분이니 분명 유언장에 적힌 조건을 영리하게 이용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

황태후 전하의 그 유언장 때문에 여기까지 왔고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그래도 황태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를 얼마나 많이 걱정했으면 그런 생각까지 하셨는지. 그 마음을 생각하면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텔은 소신전을 지나 역대 황제과 황후의 유골이 있는 봉헌실로 들어갔다. 돌아가신 황태후 전하의 유골도 이곳에 있었다. 안내해 준 대신관은 아스텔을 배려해서 입구에서 물러났다.

“저는 먼저 대신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스텔 님께서는 잠시 뒤에 폐하께서 오시면 대신전에서 유언장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예,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신을 조각한 석상이 보였다. 그 아래에 제물을 봉헌하는 제단이 있었다.

아스텔은 신성한 꽃이 정교하게 조각된 제단 위에 아카시아 꽃다발을 올려놓았다. 이슬비 속을 걸어왔는데도 풍성한 하얀 꽃잎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카시아 꽃이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서 돌아봤더니 카이젠이 뒤에 서 있었다.

* * *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다가갔다.

아스텔은 그에게 예를 갖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황태후 전하께서 좋아하셨어요.”

이 신전의 정원에도 새하얀 아카시아가 가득했다. 신앙심이 깊은 황태후는 이곳에 와서 기도를 드리고 새하얀 꽃으로 뒤덮인 정원을 구경하곤 했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된 뒤로는 이곳에 올 수가 없었다.

아스텔은 신전에 오지 못해 슬퍼하는 황태후의 마음을 달래 드리려고 신전의 정원을 가득 채운 아카시아를 직접 그림으로 그려서 황태후에게 선물했었다.

그 그림을 받고 어린애처럼 기뻐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난다.

“그래. 그 꽃을 좋아하셨지.”

그림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아스텔이 준 선물이기에 그렇게 기뻐하셨던 거였다. 할머니인 황태후는 아스텔을 몹시 좋아했다.

‘아스텔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보렴.’

황태후는 카이젠을 볼 때마다 잔소리를 했다. 안쓰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아스텔은 그렇게 똑똑한데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구나.’

당시 카이젠은 아스텔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다.

황태후는 그 말을 듣고 속상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이 이혼하고 아스텔이 수도를 떠난 뒤에도 황태후는 계속 아스텔의 행방을 알아봐 달라고 카이젠을 귀찮게 했었다.

카이젠은 신경 쓰지 않았다.

늙은 할머니의 쓸데없는 다정함이 귀찮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때는 워낙 바빠서 신경 쓸 시간도 없었지만.

그러나 지금 카이젠은 그때의 일들을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아스텔을 하찮게 여겼던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쓰라린 후회가 남았다.

“이제 그만 가지. 대신전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어.”

“벌써요? 시간이 이르지 않나요?”

“당신이 빨리 도착했다고 하길래 내가 시간을 앞당겼어.”

두 사람은 대신전의 본관으로 갔다.

몇몇 귀족과 대신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절반 정도는 유언장에 서명하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쫓겨난 황후를 보고 싶어서 왔을 것이다.

대신 중에 낯익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6년 사이에 정말 상황이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아스텔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단 앞에 섰다. 사제가 그녀 앞에 서류를 펼쳐놓았다.

“그럼 위임장에 서명하십시오.”

사제는 그렇게 말하며 아스텔에게 펜을 건네줬다.

이곳에 오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정작 이곳에 와서 해야 하는 일은 그냥 서류에 서명하는 것뿐이었다.

유언장의 권리를 황제에게 넘겨준다는 서류였다. 거기에 아스텔이 서명만 하면 끝나는 것이다.

아스텔은 펜을 들고 교본에 나올 것 같은 반듯한 필기체로 자신의 서명을 적었다. 서명을 확인한 사제가 아스텔에게 물었다.

“공녀님께서는 정말로 아무 조건 없이 황제 폐하께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걸 동의하십니까?”

“예, 동의합니다.”

거래의 조건은 이미 받았다. 할아버지의 연금을 돌려받았고, 곧바로 수도를 떠나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으니까.

사제는 황제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다 되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합법적으로 모든 남부 영지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드디어 유언장의 서류 작업이 끝이 났다.

신전을 가득 채운 촛불의 빛이 주변을 은근한 금빛으로 물들였다.

아늑한 불빛 아래 카이젠이 서 있었다. 암살 사건이 있었던 날 밤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고작 포옹 한번 했다고 왜 이렇게 불편한 감정이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이미 결혼하고 첫날밤까지 치른 사이인데.

어렵지 않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손쉽게 해결을 본 덕에 만족스러워하며, 아스텔은 누가 잡기 전에 얼른 대신전을 빠져나왔다.

어느덧 햇살이 따사로운 시간이었다. 인적없는 정원길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아스텔.”

뒤따라 나온 카이젠이 아스텔을 불렀다.

“이제 돌아가는 건가?”

“예. 허락해 주신다면 내일 출발하려고 합니다.”

카이젠은 복잡한 눈빛으로 아스텔을 응시했다.

“여기 남아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

“그에 대한 대답은 예전에 드린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잘생긴 얼굴에 자조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내가…….”

카이젠의 눈빛이 무섭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한 짓을 후회하고 있다고 해도? 그래도 안 되겠어?”

나지막한 목소리엔 침통함마저 감돌고 있다.

아스텔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카이젠은 화내는 대신 작게 실소했다.

“나도 모르겠군…….”

어려서부터 미래의 황제로 자란 카이젠은 이런 식으로 감정에 휘둘려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오직 정치과 권력만을 생각하고 보고 듣고 자랐다. 황제가 되자마자 아스텔을 내쳤던 것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카이젠은 그때의 일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상대로 이런 감정을 갖게 될 거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어.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자존심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감정이었다. 그동안은 인정하기 싫고 믿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을 원해. 내게 과거의 일을 만회할 기회를 줘.”

아스텔은 멍하니 서서 그 솔직한 고백을 들었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니…….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건 암살 사건이 있었던 밤에 대충 알게 되었지만 저렇게 절실한 표정으로 마음을 털어놓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 남자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신기한 걸 보는 기분이었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카이젠은 이제 아스텔에게 거짓으로 사랑을 속삭일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스텔은 그의 감정이 지속될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래봤자 한때의 흥밋거리일 뿐이겠지. 그런 가벼운 흥미에 희망을 갖고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스텔은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카이젠을 똑바로 직시하며 차분하게 대답을 줬다.

“제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하아. 실소인지 체념인지 모를 한숨 소리가 들렸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돌아서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에 마차와 호위병을 보내주지.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시종에게 전해.”

아스텔은 힘없이 돌아서는 카이젠에게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 * *

“아스텔 공녀님.”

카이젠과 헤어진 뒤, 신전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아스텔을 불러세웠다.

진한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중년의 귀족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전 신전에서 유언장에 서명할 때 지켜보고 있던 대신 중 한 명이었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단정한 얼굴이었다. 점잖게 생긴 얼굴엔 조금 순박한 인상이 감돌았다. 그가 아스텔 앞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녀님.”

“실례지만 누구신지…….”

“아, 죄송합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군무 대신인 에클렌 백작입니다.”

‘아, 그 군무 대신 에클렌 백작인가. 세르벨 경의 양아버지라던…….’

아스텔도 무릎을 살짝 굽히고 인사를 건넸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할아버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 할아버지의 부관이었다고 했지.’

하지만 이 사람에 대해 말하는 할아버지의 태도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아스텔은 수도로 오면서 할아버지에게 에클렌 백작의 이름을 듣고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물었다.

‘그냥 내 부관이었는데 몇 가지 실수를 해서 내보냈다. 좋게 끝난 사이가 아니라서 마음에 걸려서 그랬지.’

할아버지는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지만, 아스텔은 직감적으로 뭔가 숨겨진 이야기가 더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오래전 일인 데다 할아버지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에클렌 백작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할아버지에 대해 물었다.

“후작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이제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사실 편찮으셨던 적도 없지만.

“다행이군요. 안 그래도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괜찮으시면 제가 저택으로 찾아뵈어도 될까요?”

아스텔은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할 예정이라서요. 오늘은 짐을 챙겨야 해서 손님을 접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에클렌 백작은 괜찮다며 아스텔을 안심시켰다.

인상도 그렇고 행동도 소박하고 선량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데.’

하긴 할아버지도 이 사람에 대해서 좋게 평가했다.

성품도 바르고 검술에도 뛰어났지만 명문가 출신이 아니어서 젊었을 땐 외직을 전전하며 매번 전장에 나갔다고 했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 사람을 엄청나게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못 오게 하는 게 낫겠지.’

“연금 일은 들었습니다. 제가 이런 자리를 맡고 있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알았다면 진작에 폐하께 말씀 올리고 연금을 돌려드렸을 텐데 면목이 없습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에클렌 백작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눈빛이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연금 일은 행정관들 소관이잖아요. 군무 대신께서 그런 일까지 챙길 수 있을 리가 없지요.”

할아버지가 이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은 걸 보면 그런 걸 부탁할 만한 사이도 아닌 것 같고 말이지.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신전의 입구에 도착했는데 저택에서 타고 온 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함께 온 시종이 아스텔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마차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저택에 연락을 해서 다른 마차를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냥 걸어갈게요.”

둘의 대화를 듣고 함께 걸어온 에클렌 백작이 친절하게 제안했다.

“제 마차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만, 그냥 걸어 가도 괜찮습니다. 제가 머무는 저택은 여기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요..”

아스텔이 머무는 저택은 이 근처였다. 마차를 타지 않아도 조금만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마차를 타고 가라고 부탁했다.

“귀하신 분을 혼자 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마차를 타고 가십시오.”

그렇게 말하면서 마차를 가져오라고 지시하더니 시종이 나서기도 전에 직접 마차 문을 열어줬다. 이렇게까지 권유하는데 거절하기도 난처했다.

아스텔은 어쩔 수 없이 마차에 올랐다.

“감사합니다.”

아스텔은 그의 마차를 얻어타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 * *

저택으로 돌아오니 오후가 지나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신전에 다녀오느라 지치긴 했지만 유언장 일을 마무리 짓고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허락도 받았더니 마음은 편안했다.

“아스텔 님, 잘 다녀오셨어요?”

“응, 한나. 할아버님은 어디 계셔?”

“서재에 도련님과 함께 계세요.”

할아버지에게 일이 잘 해결됐고 내일 떠날 예정이라는 것을 말해줘야 했다.

아스텔은 외투를 벗어놓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서재 안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할아버지, 뭘 찾고 계세요?”

“아스텔. 돌아왔구나.”

칼렌베르크 후작은 커튼 뒤를 살펴보다가 아스텔을 발견하고 돌아섰다.

“신전 일은 잘 끝난 거냐?”

“예, 이제 완전히 끝났어요. 내일 아침에 출발해도 된다고 폐하의 허락도 받았고요.”

마지막에 남아 있어 달라는 부탁을 받긴 했지만.

다행히 거절하니까 포기하고 돌아갔다.

카이젠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다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마음 깊이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계셨어요?”

“테오르하고 놀아주고 있었다.”

후작은 웃으면서 책상 아래를 들여다봤다.

거기도 텅 비어 있었다.

“테오르가 숨으면 내가 찾기로 했는데 이 저택이 워낙 넓어서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구나.”

아스텔도 웃었다.

시골집에 있을 때도 테오르는 이런 놀이를 종종 했었다. 외조부의 시골 저택은 작은 곳이고 안 쓰는 방은 다 막아놔서 테오르가 어디 숨든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여기는 술래잡기를 하기엔 너무 넓었다.

“제가 찾아볼게요.”

아스텔은 옆방을 시작으로 1층에 있는 방을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테이블 밑에 있는 테오르를 발견했다. 둥근 테이블 위엔 연녹색 실크로 만든 화려한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다.

아스텔이 테이블보를 들추자 안에 있던 사냥개 블린이 컹컹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아스텔 고모?”

“테오르, 여기 숨어 있었구나.”

테오르는 블린과 함께 테이블보 아래에 앉아 있었다.

둘을 중심으로 책과 잉크병이 둥그렇게 쌓여 있고 장난감 병정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블린은 줄줄이 늘어선 장난감 병사들이 신기한지 하나하나 킁킁 냄새를 맡았다.

곰 인형을 끌어안고 정 가운데에 앉아 있던 테오르가 신이 나서 말했다.

“여기는 내 성이야.”

“성이라고?”

“응. 여기는 성벽이야.”

테오르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책들을 가리켰다. 나름대로 성채의 성벽을 만든 건가 보다. 그 위에 있는 장난감 병정들은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고.

아스텔은 웃으며 테이블보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워낙 커서 아스텔이 들어가서 앉아도 자리가 충분히 남았다. 안쪽에 들어갔더니 텐트 안에 들어간 것처럼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성이라…….’

수도까지 오는 내내 계속 성에 들러서 자고 먹고 하다 보니 성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전까지 테오르는 성이나 궁전에 가본 적이 없었다. 멀리서 구경한 적도 없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보고 물었다.

“성에서 지내는 게 좋았니?”

“응. 정원이 넓어서 좋았어. 맛있는 것도 많았고.”

테오르가 좋았던 점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셌다.

“그리고 폐하도 좋았어.”

“…….”

“아스텔 고모도 알아? 우리가 있었던 성은 다 폐하 거래.”

“그래.”

아스텔은 그 말에 테오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녹색 테이블보 너머로 햇살이 비쳐들었다. 햇빛을 머금은 천이 램프의 덮개처럼 테이블 안을 연둣빛으로 비췄다. 테오르의 푸른색 눈에도 불그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테오르는 곰 인형 레빈을 매만지며 물었다.

“할아버지가 우리 내일 떠나야 한대. 다시 성에 가는 거야?”

“아니. 이제 우리 집에 가야지.”

테오르의 눈에 붉은 기가 감도는 걸 보고 있으니 이곳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던 카이젠이 떠올랐다.

‘나는 당신을 원해. 내게 과거의 일을 만회할 기회를 줘.’

수도를 떠나면 다시는 안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다시 만나게 될까?

테오르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지만.

‘암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만나고 싶지 않아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지.’

유일한 희망은 그 사건이 터지고 벌써 열흘도 넘게 지났지만 아직까지 암살자들의 신원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암살자들이 현장에서 모두 죽었다는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덕에 아직까지 암살을 사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아버지가 카이젠을 죽이려고 한 게 그게 처음은 아니겠지. 아직까지 무사했으니 이번 일도 잘 무마하고 넘어갈 수 있으려나…….’

테오르는 아스텔의 표정이 어두워진 걸 보고 아스텔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 성이 좋지만 그래도 우리 집이 제일 좋아.”

“훗.”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이제 아스텔은 테오르가 제일 소중했다. 다시 예전처럼 동부의 시골에서 편하게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 다시는 그런 평화롭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스텔은 불안감을 억누르고 테오르에게 다가가서 두 팔로 귀여운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배고프지 않니? 성의 케이크를 가져다줄까?”

“응! 케이크 먹을래!”

“그럼 여기서 기다리렴.”

아스텔은 테오르를 테이블 아래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케이크를 가져오려고 복도로 나갔는데 지나가던 시녀가 아스텔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레이디.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누군데?”

설마 아까 신전에서 만난 에클렌 백작이 온 건가? 방문하지 말라고 거절했는데…….

하지만 시녀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레스턴 공작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누가 왔다고?”

아스텔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에스테반 폰 레스턴 공작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지난 암살 사건 이후로 열흘 넘게 전전긍긍하다 보니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의 풀 네임에 짜증부터 솟구쳤다.

아버지가 왜 왔는지는 뻔했다.

황태후 전하의 유품 때문이겠지.

그 문제라면 어차피 한 번은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평생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직접 찾아왔다는데 만나긴 해야겠지.

“지금 어디 있어? 안내해 줘.”

* * *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서재의 의자에 앉아서 아스텔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선 아스텔은 거만하게 앉아 있는 금발의 중년 남자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오랜만이구나.”

6년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예전보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긴 했지만 단정한 이목구비에 전신에 감도는 세련된 기품. 상대를 무시하는 저 거만한 시선까지 6년 전과 똑같았다.

젊을 때는 수도에서 손꼽히는 미남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이긴 했다. 고생을 안 하고 늙어서 그런가.

문득 신전에서 만난 에클렌 백작이 떠올랐다.

아버지하고 비슷한 나이대인 것 같은데. 그쪽은 무관이라서인지 아버지와 달리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버지처럼 대귀족다운 기품은 없었지만, 대신 백작은 소박하고 진실된 인상을 풍겼지.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비웃음을 흘렸다.

“차려입은 행색이 시골 아낙네 같구나.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세월의 흔적을 화장으로 가리기라도 해야지.”

‘……역시 에클렌 백작이 훨씬 낫네.’

친아버지보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 더 훌륭하게 느껴지다니 슬픈 일이었다.

아스텔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시골에서 살다 보니 예의도 잊은 게냐?”

“여기 와서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예의는 지킬 만한 사람에게만 지키려고요.”

공작은 기가 막힌지 잠시 동안 아스텔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런 꼴을 하고도 기고만장하구나.”

아스텔은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의 아스텔은 아버지의 뜻에 얌전히 순종했다. 어차피 귀족 가문에서 자식의 혼사를 결정하는 건 부모의 권한이었다. 특히나 아스텔 같은 대귀족 가문의 영애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 상대가 정해지는 게 관습이었다.

원치 않는 삶이란 아무리 화려한 길이라고 해도 쓰라린 고해의 길이 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래도 아스텔은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다른 공녀들과 달리 자신은 약혼자인 카이젠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오히려 자신을 카이젠과 약혼시켜 준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았지.’

공작은 말없이 서 있는 딸을 차갑게 비웃었다.

“황제가 시키는 대로 유언장에 서명을 해줬다지? 너는 자존심도 없는 거냐? 나 같으면 자살이라도 했을 텐데.”

“아버지와 다르게 겨우 서명 한 번 해주는 것 때문에 자살하기에는 제 목숨이 너무 아깝네요.”

아스텔은 조금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일 떠나야 해서 쓸데없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어요. 얼른 용건만 말씀하시고 돌아가면 좋겠네요.”

“용건이라고?”

“황태후 전하의 유품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그걸 빌미로 제게 뭔가를 요구할 생각이셨겠죠.”

그런 목적이 아니었으면 아버지가 그걸 간직하고 있었을 리도 없다.

분명히 다 팔아버렸겠지.

아스텔은 아버지를 잘 알았다. 평생 함께 살아온 친아버지였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뭐든 남의 약점이 될 만한 건 미래를 위해 아껴두는 사람이었다.

황태후 전하의 유품은 아스텔의 약점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보관해 둔 것일 테다. 하지만 아스텔은 아버지가 유품을 전해주는 조건으로 뭘 원하든 간에 해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아버지가 뭘 원하시든 저는 아무것도 해드리지 않을 거예요. 황태후 전하의 유품을 돌려주고 저택으로 돌아가세요.”

“그래. 돌려주지 않으면 나를 고발하겠다고 했다지?”

조롱 섞인 말투였지만 공작의 연녹색 눈이 번뜩였다.

아스텔과 똑같은 그 눈동자에 진심 어린 분노가 차올랐다.

“감히 아비에게 그런 소리를 하다니.”

“당연하잖아요. 잘 모르시나 본데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사람은 도둑으로 고발당한답니다.”

아스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재상 자리를 잃고 실각한 마당에 딸에게 고발당해서 망신까지 당하는 건 바라지 않으시겠죠? 지금은 아버지 편을 들어줄 대신도 없을 것 같은데요.”

정곡을 찌른 건지 그 순간 공작의 단정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역시 권력을 잃은 게 아버지의 제일 큰 약점이었나 보다. 매번 남의 약점을 잡을 생각이나 하더니 자기 역린을 지적당하는 건 싫은 모양이지.

분노한 공작이 모욕감에 부들거리며 아스텔을 노려봤다. 그의 입에서 증오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감히 너 따위가……! 하룻밤 만에 쫓겨난 폐황후 주제에……!”

아스텔이 아버지의 모욕적인 말에 대꾸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스텔의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이었다.

“할아버님.”

공작도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런,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은 그런 공작을 경멸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내뱉었다.

“자네는 그 나이에도 예절을 못 배웠나?” 

“이해가 안 되는군요. 남의 딸을 6년씩이나 데리고 있으면서 연락 한 번 안 한 분께서 예절을 말씀하시다니.” 

공작은 지지 않고 응수했다. 그 느릿느릿한 말에 후작은 기가막히다는 듯이 따져물었다.

“아스텔을 데리고 있는 걸 왜 자네한테 말해야 하지? 인연을 끊고 아스텔을 저택에서 내쫓았다면서. 왜, 이제 권력을 잃었으니 다시 딸아이를 데려다가 이용하려고 하는 건가?”

후작의 비꼬는 소리에 레스턴 공작은 눈을 번뜩이며 다가왔다.

“하긴, 생각해 보니 아스텔은 아비인 저보다 그쪽에 더 필요하겠군요. 제가 재상직을 잃긴 했지만 영지도 잃고 자식 손자까지 잃고 살날도 얼마 안 남으신 분께 비하겠습니까?”

공작은 밉살스러운 미소와 함께 과거의 장인을 조롱했다.

“아참, 지그문트가 미천한 계집에게 사생아를 남겼다면서요? 그 반쪽짜리 애를 키우시려면 아스텔이라도 데려가셔야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말이었다.

칼렌베르크 후작은 말없이 공작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늙은 후작에겐 군부를 지휘하던 위엄이 남아 있었다.

레스턴 공작은 찔끔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후작은 원한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내 외손주들의 아비만 아니었다면 내 딸이 죽었을 때 너를 죽이고 나도 죽었을 거다. 네 말대로 이제 나는 살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 아쉬울 것 없지. 너를 죽이고 죽을 수 있다면 기분이라도 좋을 테니.”

아스텔은 할아버지의 말에 서린 원한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었다. 

아스텔의 어머니는 프리츠를 낳고 몸이 약해져서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인 공작은 아이를 낳지 말라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어머니에게 아스텔을 낳게 했다.

‘황후가 될 딸이 필요하니 의무를 다해라.’

그렇게 매일 어머니를 괴롭힌 끝에 아스텔이 생겼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낳지 말라고 권유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배 속에 생긴 아기를 낳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국 아스텔을 낳은 뒤 그 후유증으로 얼마 못 가서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항상 아스텔에게 너 때문에 네 어머니가 죽었으니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스텔은 어머니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정작 딸을 잃은 외할아버지는 아스텔을 조금도 미워하지 않으셨건만.

옆에서 지켜보던 아스텔은 뒤늦게 할아버지를 말렸다.

“할아버지. 상대하지 마시고 테오르에게 가보세요. 테오르가 응접실 테이블 밑에서 혼자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스텔은 혹시라도 테오르가 아스텔을 기다리다가 이곳으로 올까 봐 걱정스러웠다.

‘프리츠 오빠 때는 다행히 잘 넘어갔지만…….’

후작은 아스텔의 말에 담긴 뜻을 파악하고 얼른 돌아섰다.

“그래. 상대할 가치도 없구나.”

후작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을 돌아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테오르가 누구냐?”

“방금 말씀하셨으면서 이름도 모르셨어요? 지그문트 오빠의 아들 이름이 테오르예요.”

레스턴 공작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깟 천한 피가 섞인 애를 내가 이름까지 외우고 있겠느냐.”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유품을 내놓고 돌아가세요. 시종들을 불러서 끌어내기 전에요.”

위협이 아니라 한마디만 더하면 진짜로 끌어낼 생각이었다. 아스텔의 표정에서 진심이라는 걸 읽었는지 공작이 드디어 포기하고 두 손을 들었다.

“유품은 여기 가져왔다. 순 잡동사니밖에 없더구나. 두고 갈 테니 시골구석으로 가져가든지 마음대로 해라.”

그러고는 자기가 데려온 시종을 불렀다. 시종 두 명이 밖으로 나가서 마차에 싣고 온 커다란 상자를 들고 왔다.

“이게 다인가요?”

“내가 몇 개 숨겨놓기라도 했을까 봐?”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잖아요.”

공작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응수하는 아스텔을 보며 기막혀했다.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카이젠도 저런 소리를 하던데. 

그럼 6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모습으로 있을 줄 알았나. 그런 일들을 겪고 변하지 않을 리가 있나.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이 저택에서 일하는 시녀가 들어왔다.

“아스텔 님께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선물? 누가 보냈는데?”

설마 또 카이젠이 뭔가를 보낸 건가. 카이젠에게 받은 드레스와 보석들은 전부 덴츠 성에 그대로 두고 왔건만. 그런데 시녀는 전혀 다른 이름을 말했다.

“에클렌 백작님께서 아스텔 님께 보내신 선물이라고 합니다.”

“에클렌? 에클렌 백작? 그가 왜 네게 선물을 보내?”

에클렌라는 이름에 공작은 느닷없이 화를 내며 물었다.

‘사이가 안 좋은 건가.’

하긴 에클렌 백작은 카이젠에게 신임을 받으며 군부 대신이 된 사람이었다.

카이젠에게 대항하다가 세력을 잃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을 리가 없겠지. 그런 배경을 떼놓고 봐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타입이라 사이가 좋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스텔은 아버지의 날카로운 반응을 시큰둥하게 넘겼다.

“저도 모르죠. 어제 신전에서 만났는데 내일 떠날 거라고 하니까 그냥 호의로 뭔가 보내셨나 보네요.”

레스턴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그가 뭐 다른 말은 안 하더냐?”

“다른 말을 할 게 뭐가 있나요?”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그가 아스텔에게만 호의적으로 구는 이유는 분명 할아버지 때문일 것이다.

‘찾아온다는 걸 거절했더니 선물이라도 보내줬나 보네.’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덴츠에 있을 때도 그의 양아들이라는 세르벨 경을 만났다. 그 세르벨도 아스텔을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했다.

하지만 레스턴 공작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스텔과 똑같은 그의 연녹색 눈이 이채로 빛났다. 아스텔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경고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내일 여기를 떠날 겁니다. 에클렌 백작이든 누구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돈이 필요하면 더 줄 테니 당분간 여기 있는 게 어떠냐?”

“아뇨. 필요 없어요. 아버지도 그만 돌아가세요. 저는 이제부터 짐을 챙겨야 해서 바빠요.”

대놓고 가버리라는 소리에 레스턴 공작의 눈빛에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아스텔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어디 그 시골구석에 가서 다 죽어가는 노인네와 잘 살아봐라!”

“걱정 마세요. 여기서 아버지하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하니까요.”

공작은 아스텔을 노려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다시는 안 만나고 싶다.

혼자 남은 아스텔은 유품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그림이 담긴 액자였다. 새하얀 아카시아꽃이 그려진 그림. 아스텔이 직접 그려서 선물했던 그 그림이었다.

‘계속 간직하고 계셨구나.’

아마 열일곱 살 때쯤에 그린 것 같다.

그렇게 훌륭한 솜씨는 아니었다. 귀족 가문의 영애들은 교양으로 미술을 배웠을 뿐 궁정 화가처럼 전문적인 실력을 익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태후 전하는 이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늘 방에 걸어두고 계셨다. 아스텔의 그림은 섬세하고 색이 아름답다고 언제나 칭찬을 하셨지. 자신이 떠난 뒤에도 갖고 계셨는 줄은 몰랐다.

아스텔은 그림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똑똑.

뒤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문가에 은색 머리의 청년이 서 있었다.

아스텔은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세르벨 경?”

덴츠의 무도회에서 만났던 세르벨이었다.

란베르크 기사단의 단장.

그리고 오늘 낮에 만났던 에클렌 백작의 아들.

세르벨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스텔 공녀님.”

“무슨 일로 오셨나요?”

“양부님의 명령으로 선물을 전해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아. 선물을 가져왔다는 사람이 세르벨 경이었구나.’

“북부로 가신 줄 알았는데요.”

“아…… 예, 그랬습니다만.”

세르벨은 턱 끝을 매만지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중간에 갑자기 명령이 바뀌어서 다시 수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랬군요.”

뭔가 사정이 있던 모양이다.

세르벨이 가져온 선물은 책이었다.

동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었는데, 부드러운 가죽으로 된 책 표지엔 금박이 입혀져 있고 책등과 표지 사이사이에 작은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동부로 돌아가신다니 이 책을 전해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스텔은 꽤 사려 깊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정이 어렵다는 걸 알고 도와주고 싶었나 보네.’

대놓고 돈이나 그냥 보석을 보냈으면 받지 않고 돌려보냈을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난 귀족 남성에게 보석이나 금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책으로 보내면 받지 않는 게 더 무례하게 느껴진다. 여행에 들고 가기도 좋고 말이지.

책 표지에 장식된 보석들은 조그만 크기였지만 꽤 값진 것들이었다.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다가 필요하면 팔아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양부님께서 아스텔 님께 꼭 이 선물들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제 임무를 다하게 돼서 기쁩니다.”

세르벨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다시 봐도 정말 잘생겼네.’

아스텔은 내심 감탄했다.

프리츠 오빠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미남이다.

나이는 좀 더 어린 것 같지만.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려던 세르벨은 테이블 위의 그림을 보고 멈칫했다.

“이것은…….”

“아…… 제가 오래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예,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고요?”

‘내가 신전의 아카시아를 그려서 황태후께 선물한 걸 알았다고?’

그게 그렇게 유명한 얘기였나?

아스텔이 황태후에게 이 그림을 그려준 게 비밀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다 알 만큼 널리 퍼진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렇게 널리 퍼질 만큼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세르벨은 웃으면서 어떻게 된 사연인지 이야기했다.

“저는 7년쯤 전에 기사단 후보생으로 신전을 지키는 일을 맡았습니다.”

기사단 후보생이었다니. 명문가 자제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기사로 서임된다.

‘좋은 가문 출신이 아니라서 그랬구나.’

에클렌 백작도 외지로만 전전했으니 그 양아들이라는 이 사람도 좋은 자리로 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르벨은 옛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신전에서 아스텔 님이 이 그림을 그리시는 걸 봤습니다.”

“아…… 그랬군요.”

‘묘한 인연이네.’

당시 아스텔은 그림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누가 자기를 지켜보는 줄도 몰랐다.

성기사단 사람들은 신전을 돌아다니니까 봤을 수도 있겠지.

신기한 인연이라고 말하려는데 문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아스텔.”

열린 문 너머로 목소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카이젠이었다.

순간 아스텔은 그를 못 알아볼 뻔했다. 카이젠은 검은 바탕에 옷깃과 소매에 금사로 자수가 놓인 화려한 궁정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동안은 순행을 나가 있느라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구나. 황궁에 있는 황제는 저런 옷을 입고 있는 게 당연했는데. 순행 기간에는 평범한 귀족들처럼 평상복을 입고 있어서 못 알아봤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카이젠은 두 사람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붉은 눈동자로 세르벨을 직시했다.

“세르벨 경.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폐하.”

세르벨은 공손하게 예를 갖춘 뒤 대답했다.

“제 양부님의 명령으로 아스텔 님께 선물을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카이젠은 뭣 때문인지 불쾌한 것 같았다. 날카로운 눈빛이 아스텔을 향했다.

“선물이 뭐지?”

“책입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역사책을 보여줬다.

카이젠은 눈가를 찌푸리더니 세르벨을 내쫓았다.

“용건이 끝났으면 그만 돌아가게.”

“예, 폐하.”

세르벨은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스텔 님.”

“예, 저도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르벨은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카이젠은 기분이 좋지 않은지 불쾌한 눈빛으로 아스텔을 쳐다보기만 했다.

찾아왔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지?

“폐하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당신을 만나러 온 게 아냐.”

카이젠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테오르를 만나러 왔어.”

“테오르를요?”

카이젠이 테오르를 만날 일이 뭐가 있지?

“아이는 어디 있지?”

“할아버님과 함께 있을 겁니다.”

“불러와.”

시녀를 불러서 테오르를 데려오라고 했다.

잠시 뒤에 테오르가 서재로 달려왔다.

“폐하!”

테오르는 카이젠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워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품 안에 안았다.

“그래, 잘 있었느냐.”

“예, 선물 좋아요. 은으로 된 병사들이 있어요.”

둘이 저렇게 친해진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씁쓸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괜찮겠지.’

이제 내일 떠나면 테오르하고 카이젠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전에 테오르를 극장에 데려가 준다고 약속했는데 내일 떠난다니 시간이 없어서 안 되겠구나.”

아스텔은 카이젠이 하는 말을 듣고 놀랐다.

아니, 언제 그런 약속을 했담?

테오르가 실망하는 표정을 짓자, 카이젠은 테오르의 보드라운 뺨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오늘 야시장이 열리는데 거기라도 구경 갈까?”

“갈래요!”

“잠깐만, 야시장이요?”

아스텔이 놀라서 소리치자 두 사람은 그제야 이쪽을 돌아봤다.

“그래. 내가 약속한 거니까 내가 데려가지.”

“폐하와 단둘이 간다고요?”

“호위는 따라갈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야 황제가 시장 같은 데에 잠행을 나갈 땐 황제를 지키는 근위 기사가 몰래 뒤따르는 법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몰래 뒤따라가면서 지키는 거지.

결국은 카이젠과 테오르만 단둘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테오르를 카이젠과 단둘이 시장에 보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호위로 따라붙은 기사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기도 전에 카이젠이 테오르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아스텔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저도 가겠어요.”

카이젠의 잘생긴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당신 날 못 믿는군.”

“…….”

그럼 폐하를 어떻게 믿고 아이를 맡깁니까?

믿을 사람이 따로 있지.

카이젠은 유능한 황제였다.

하지만 아이를 돌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다섯 살짜리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카이젠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벨리안한테 맡기는 게 낫지.

카이젠은 아스텔이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상황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크게 선심 쓰듯 낮게 웃으며 말했다.

“뭐, 따라오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아스텔 고모도 같이 가는 거야?”

테오르는 둘 다 간다니까 마냥 좋아했다.

아스텔은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래. 다 같이 가자.”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은 함께 야시장에 나가게 되었다.

* * *

수도는 굉장히 넓은 도시였다.

황궁 남쪽에 있는 번화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수많은 인구 밀집 지역이 있었다.

야시장은 수도의 대공원에서 열렸다.

중심지를 가로지르는 긴 대리석 보도와 분수 광장은 이 공원의 자랑거리였다.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풍경을 자아내는 광장은 철저한 관리로 언제나 깨끗하고 안전했으며, 또한-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테오르. 조심해야 해. 손을 놓치면 절대 안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 테오르는 연신 주변을 살피고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와.”

마차를 타고 수도의 번화가를 가로지를 때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보느라 아스텔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응. 안 놓을게.”

그래도 광장에서 내리고 나서 수많은 사람 사이에 들어오니까 아스텔과 떨어지게 될까 봐 테오르는 그녀의 손을 꼬옥 붙들고 따라왔다.

테오르는 연신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여러 사람이 오가는 광장의 통로를 둘러보았다.

전부 처음 보는 것들뿐이다. 바깥 구경을 거의 해보지 못한 테오르에겐 어느 것이든 신기한 것들뿐이었다. 온갖 사람이 판을 벌이고 다채로운 물건들을 파는 것도 유심히 구경했다.

뒤에서 카이젠이 투덜거리며 뒤따라왔다.

“사람이 정말 많군.”

아스텔은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걸어오는 카이젠을 흘끔 돌아봤다. 키가 큰 그는 장대에 걸린 등불에 머리가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정세가 급변하면서 대귀족들이 몰락하고 얼마 전에는 내전도 일어났지만 수도는 전보다 더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 그건 전부 카이젠의 공로였다.

“당신, 전에도 여기 와봤어?”

“그럼요.”

카이젠은 아스텔의 대답을 듣고 놀란 것 같았다.

“왜 놀라시나요? 저는 야시장을 좋아했어요.”

“이런 곳에 오는 걸 좋아할 줄은 몰랐군. 예전의 당신은 저택 안에서만 살 것 같았어. 당신 아버지도 당신이 이런 데 가는 걸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고.”

귀족 가문의 숙녀들은 이렇게 평민들이 어울리는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

아스텔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뭐…… 아버지 허락을 받고 나오진 않았어요.”

수도 안에 수많은 귀족 가문이 있지만, 그 집 중에 이런 곳에 간다는 걸 흔쾌히 허락해 줄 아버지는 거의 없을 것이다.

“프리츠 오빠하고 같이 나왔죠. 나중에는 지그문트 오빠도 함께 왔고요.”

생각해 보니 프리츠 오빠도 카이젠처럼 인파에 치이면서 투덜거렸다.

‘이렇게 먼지가 풀풀 나는 시장통이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그래?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아스텔은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먼지도 나고 사람도 많지만 기회가 될 때 더 많이 봐두고 싶었다.

‘황궁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밖에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불평을 해대던 카이젠은 쓸쓸해 보이는 아스텔의 모습에 놀랐다. 뭔가 더 말하려고 하는데 아스텔이 갑자기 광장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테오르. 저기 인형극을 한다. 가서 구경할까?”

“인형극이 뭐야?”

“인형으로 연극을 하는 거야.”

연극이라는 말에 테오르는 당장 그쪽으로 달려갈 태세였다.

“보러 갈래!”

아스텔은 테오르와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

광장 한구석에 작은 간이 무대를 만들어놓고 인형으로 연극을 하고 있었다. 무대 앞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볼 수 있게 바닥에 자리를 깔아놓았다. 조그만 아이들이 무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스텔은 잘 보이는 자리를 골라서 테오르를 앉혔다.

“여기 얌전히 앉아서 구경하렴.”

무대 위에는 줄에 매달린 토끼 인형과 곰 인형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공연이라 동화 같은 스토리였다. 산책을 가고 맛있는 걸 먹고 하는 얘기가 이어졌다.

자리가 깔린 곳에 테오르를 앉혀놓고 아스텔은 뒤에 있는 맨바닥에 서서 지켜보았다. 카이젠도 곁으로 다가와서 아스텔 옆에 섰다. 한참 인형이 움직이는 걸 보고 있는데 곁에 있는 카이젠이 다른 얘기를 꺼냈다.

“당신 아버지를 만났나?”

아스텔은 나를 감시하는 거냐고 물으려다 관뒀다.

어차피 황제가 내려준 저택에서 지내고 있는데 무슨 일을 하든 시종들의 입을 통해 알려지겠지 싶었다.

한편으로는 카이젠이 아스텔을 감시한 게 아니라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을 감시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암살 사건의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는 걸까?’

그 일은 분명 아버지의 짓이었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원칙대로라면 아버지도 프리츠 오빠도 죽게 될 것이다. 아스텔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아스텔은 솟아나는 불안감을 감추고 대답했다.

“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지?”

“별 얘기 없었습니다. 그냥 집안 일이었어요.”

카이젠은 아스텔의 애매한 대답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레스턴 공작이 아스텔을 만나러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몇 달 전, 카이젠이 아스텔의 행방을 물었을 때, 레스턴 공작은 눈물을 찍어내며 말했다.

‘제 가엾은 딸은 이혼 재판이 끝나자마자 저택을 떠나 종적을 감췄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상했으면 귀하게 자란 아이가 수도를 떠나 사라져 버렸는지…….’

누가 보면 딸을 잃고 가슴 아파하는 불쌍한 부모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슬퍼하는 척하면서 카이젠을 비난하고 있었다.

네가 아스텔을 버려서 불쌍한 아스텔이 상처받고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연락도 안 되는데 찾아볼 생각은 안 했나?’

카이젠의 물음에 공작은 또다시 눈물을 찍어내며 불쌍한 척을 했다.

‘제가 찾아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서……. 혹시 우리 가엾은 딸이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하지 않았을지 괴로워하며 6년을 보냈습니다.’

극적이게도 그 순간 아스텔의 행방을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당신 딸은 당신 장인의 저택에 있다는군.’

카이젠은 쪽지에 적힌 아스텔의 소재지를 읽으며 그를 차갑게 비웃었다.

‘그대는 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장인이 어디 사는지도 몰랐나?’

공작은 순식간에 슬퍼하던 가면을 내던지고 불만스러운 낯으로 대답했다.

‘…인연이 끊긴 지 오래라서요.’

카이젠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 쓰레기 같은 인간.’

암살 사건의 배후가 공작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밝혀내면 공작은 반역자가 된다. 아스텔도 반역자의 딸이라는 이유로 귀족 신분을 박탈당하고 처벌받게 된다.

‘그렇게 만들 순 없지.’

레스턴 공작을 반역자로 죽일 수는 없다. 대신 카이젠은 그를 은밀하게 암살해 버릴 생각이었다. 

예전에는 암살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공개적으로 죄목을 붙여서 처형해야 공작 가문을 정당하게 없앨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스텔이 있다. 아스텔을 죄인의 딸로 만들어 굴욕을 겪게 할 수는 없다. 공작의 죄상을 공개하고 가문을 멸하는 대신 사고로 위장해서 몰래 없애 버려야만 했다.

‘……괜찮으려나.’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카이젠이 기억하는 과거의 아스텔은 아버지인 공작을 잘 따랐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밖에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가문에서 의절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친아버지가 죽으면 아스텔은 슬퍼할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차라리 일이 끝날 때까지는 수도를 떠나 있게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일단은 아스텔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이 다 마무리된 뒤에 이유를 붙여서 다시 데려오면 되니까.

어차피 공작이 죽기라도 하면 아스텔은 유산을 분배받고 친오빠가 공작이 되는 걸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수도로 돌아올 것이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포기하지 않았다. 공작의 일을 마무리 짓고 모든 위험을 없앤 뒤에 다시 아스텔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 * *

“테오르.”

아스텔은 여전히 인형극에 푹 빠진 테오르에게 다가갔다.

카이젠도 뒤따라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니?”

“너무 재밌어. 더 구경하고 싶어.”

작은 무대 위에는 또다시 토끼와 곰이 산책을 가고 있었다.

‘했던 내용 또 하는 것 같은데……?’

공연이 한 번 끝나고 이어서 다시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테오르는 계속 집중해서 인형극을 구경했다. 눈을 빛내며 열심히 집중하는 얼굴이 귀엽기도 하고 좀 웃기기도 했다. 하긴 이런 인형극을 본 적이 없으니.

“배고프거나 목마르진 않아?”

“조금. 약간 목말라.”

“그럼 먹을 걸 좀 사 올게. 여기서 기다리렴.”

“응.”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다가가서 테오르를 부탁했다.

“그……. 아이를 잘 지켜봐 주세요.”

폐하라고 부를 수가 없어서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다.

“걱정 마.”

아스텔은 간식거리를 사 오겠다며 광장의 통로로 나갔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뒤에 어떤 여자가 컵이 잔뜩 담긴 바구니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금방 짜낸 신선한 과일 주스입니다.”

평소엔 이런 데서 뭘 사 먹은 적이 없지만 오늘은 어째 목이 말랐다.

속이 타서일까.

카이젠은 여자를 불렀다.

“얼마나 하느냐?”

“한 컵에 1실링입니다.”

여자에게 돈을 건네고 두 컵을 집어 들었다.

여러 가지 흔한 과일을 섞어서 즙을 짜고 물과 설탕을 조금 넣은 평범한 주스였다. 한 모금 마시자 진한 과일 향과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확실히 애들이 좋아할 것 같은 맛이군.’

카이젠은 컵에 든 걸 마시면서 여전히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테오르에게 다른 컵을 건네줬다.

“자, 목마르다면서. 이거라도 마시면서 봐라.”

“감사합니다.”

테오르는 컵을 두 손으로 잡고 안에 든 주스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러면서도 인형극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말 푹 빠졌는데.

이거 이러다가 야시장이 끝날 때까지 여기 있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아이가 저렇게 좋아하니까 데리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오르는 주스를 마시면서도 여전히 인형을 바라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귀여운 녀석.’

평생 아이들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녀석은 보면 볼수록 귀엽다.

카이젠은 테오르의 곁에서 과일 주스를 마시면서 멍하니 움직이는 인형들을 보고 있었다. 끈에 매달린 인형이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인다.

무대를 보고 있는데 발치에 뭔가가 툭 쓰러졌다.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테오르가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서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옆에 빈 주스 컵이 굴러다녔다.

카이젠은 놀라서 아이를 일으켰다.

“테오르!”

테오르가 흐린 눈으로 카이젠을 올려다봤다. 아이의 하얀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카이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점점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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