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피트닉 (7/24)

7. 피트닉

아스텔은 며칠 동안 별채에서 우울하게 지냈다.

“얘야, 뭐라도 좀 들거라.”

세 사람은 아침 식사를 위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에그 베네딕트와 달콤한 크레이프, 생크림을 올린 팬케이크, 허브를 곁들인 고소한 크림 수프 등 호화로운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스텔은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입맛이 없어요.”

옆에 앉은 테오르는 자기 몫의 크레이프를 조금씩 잘라서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반면 아스텔은 아무것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크레이프를 다 먹은 테오르가 아스텔을 향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스텔 고모. 배고프지 않아?”

“괜찮아. 자, 테오르는 더 먹자.”

아스텔은 테오르의 그릇에 팬케이크를 더 올려놨다. 맞은편에 앉은 칼렌베르크 후작은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도회 날, 카이젠에게 테오르를 돌려보내 달라는 요청을 거절당한 뒤부터 아스텔은 근심 어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이대로 수도에 테오르를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애를 방 안에만 가둬둔다고 해도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카이젠이 말한 걸 생각하면 수도에 가도 쉽게 보내주지 않을지 몰라.’

카이젠은 아스텔이 자기 옆에 머물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가 힘으로 강요하면 아스텔로서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테오르는 수도에 데려가지 않는 게 좋았다.

잡히더라도 아스텔 자신만 잡히는 게 낫지.

‘그런데 카이젠이 테오르를 보내는 것도 허락을 안 해주고 있으니…….’

아스텔이 실패하고 돌아온 다음 날 칼렌베르크 후작은 정식으로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후작은 황제를 만나서 직접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하겠다고 했다. 아픈 노인이 간곡하게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아스텔도 조금 기대를 품었다. 혹시 할아버지가 만나서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무도회 날에는 아스텔에게 화가 나서 즉흥적으로 거절했던 거고 이제는 정신을 차렸을 테니 허락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작은 희망도 처절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카이젠이 할아버지의 알현 요청을 보란 듯이 거절해 버린 것이다. 밀린 일이 많아서 사적인 알현은 허락할 수 없다는 게 거절 사유였다.

‘정말 너무하네.’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아스텔은 별채의 거처에 칩거하면서 솟아나는 분노를 억지로 눌러 참았다.

아스텔이 방 안에만 있으니 심심해진 테오르가 곰 인형을 갖고 놀다가 물었다.

“우리는 수도에 언제 가는 거야?”

“뭐?”

“우리 이제 수도에 가는 거 아니야?”

푸른 눈동자에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며칠 전부터 테오르는 계속 수도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아마도 납치 사건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정원에서 카이젠을 만났을 때 그가 테오르에게 수도 얘기를 해준 모양이다.

아스텔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고 테오르가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테오르와 눈높이를 맞추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오르. 너는 수도에 가는 거 아니야. 할아버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해.”

“왜?”

“수도는 너무 멀고 어린아이에게는 좋지 않으니까.”

테오르는 곰 인형의 팔을 흔들며 조금 풀 죽은 목소리를 냈다.

“나도 수도에 가보고 싶었는데.”

아스텔은 다정한 손길로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아버님 말씀 잘 듣고 집에서 블린하고 잘 놀고 있으면 수도에서 선물을 잔뜩 사다 줄게.”

“응!”

선물이라는 소리에 테오르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곰 인형을 무릎에 앉히고 손을 흔들며 이야기했다.

“수도에서 곰을 데려오면 안 돼?”

“그건…… 무리일 것 같구나. 대신 곰 인형을 사다 줄게.”

아스텔은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날이었다. 밝고 화창한 하늘에 솜털 같은 구름이 떠가고, 따스한 햇볕이 정원의 녹색 잎에 생기를 더했다. 푸른 나뭇잎으로 치장된 나무가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아스텔은 맑게 빛나는 하늘을 보다가 테오르의 기분을 북돋아주기 위해 제안했다.

“그럼 오늘은 피크닉을 갈까?”

이 궁전 근처에는 사냥터로 쓰이던 숲이 있다. 황제 전용 숲이라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만.

카이젠은 이곳에 와서는 사냥을 하러 나가지 않았다. 산책 겸 다녀오고 싶다고 하면 허락해 주겠지.

‘설마 그것까지 못 하게 하려고.’

테오르는 피크닉이라는 말에 기운을 차렸다.

“정말? 우리 숲에 놀러 가는 거야?”

“그래. 얼른 가서 할아버님께도 말씀드리렴. 나는 부엌에 가서 간식거리를 만들 거니까.”

테오르는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아스텔은 그 모습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숲은 사람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은 곳이니 들풀이나 야생화가 많이 있을 것이다.

‘어차피 테오르를 보내기 전에 물약을 더 만들어서 보내야 해.’

눈 색을 바꾸는 약은 예전에 이미 충분한 양을 만들어뒀다. 하지만 이곳에서 외조부의 저택은 열흘도 더 걸리는 먼 거리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최대한 약을 많이 만들어서 보내는 게 좋았다.

노쇠한 할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겨서 먼 길을 보내는 일인데, 아스텔 자신이 준비해 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빈틈없이 준비해 주고 싶었다.

안 그래도 허락을 받으면 숲에 가서 약초를 더 구해 올 생각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언제쯤 허락을 받을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미리 챙겨놓는 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스텔은 방을 정리해 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이 별채는 작은 곳이었지만 부엌은 나름대로 컸다. 있을 만한 건 다 있었다.

아스텔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빵과 치즈, 햄을 꺼내고 양상추를 잘라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폭신한 하얀 빵 사이에 짭조름한 치즈와 감칠맛 나는 햄, 신선하고 아삭한 양상추를 얹고 달달하게 만든 소스를 뿌려서 만든 단순한 샌드위치였다.

아침에 먹고 남은 애플파이도 챙겼다. 노릇노릇한 사과 조각 사이로 황금빛 시럽이 가득했다.

피크닉용 바구니를 꺼내서 그 안에 약초를 채집할 도구를 넣고 손수건으로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음식을 종이로 감싸서 담았다. 빈공간에 음료로 우유와 레모네이드도 담고 나니 그런대로 괜찮은 피크닉 바구니처럼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는걸.’

아스텔은 바구니를 부엌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가서 시종을 불렀다.

“폐하께 제가 아이를 데리고 근처 숲에 다녀오고 싶다고, 부디 허락을 구한다고 전달해 주세요.”

‘이 정도는 허락해 주겠지.’

설마 이것마저 거절하려고.

아스텔은 그렇게 생각하며 테오르를 찾으러 갔다.

* * *

“어딜 간다고?”

서류를 들여다보던 카이젠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시종은 아스텔의 부탁을 다시 전했다.

“아스텔 님께서 북쪽 숲에 산책을 다녀올 수 있을지 폐하께 허락을…….”

카이젠은 다 듣지도 않고 손을 들어서 시종의 말을 끊었다.

그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어린애랑 노인네를 데리고 혼자 숲에 가겠다니……. 얼마 전에 그런 일을 겪고서도.”

대체 아스텔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카이젠은 계속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함께 서류를 들여다보던 벨리안은 고개를 살짝 들고 카이젠의 눈치를 살폈다. 북쪽 숲은 이 궁전에 딸린 사냥터라서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숲 주변엔 경계선이 처져 있고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지 않나 싶었지만…….

벨리안은 그걸 지적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후작님께서 건강이 많이 회복되셨다고 합니다. 아스텔 님께서는 오랜만에 외조부님과 조카분과 함께 나들이를 나가시려나 봅니다.”

황제 폐하의 기분은 무도회날 밤부터 몹시 저조했는데, 아스텔은 아이와 나들이를 나갈 만큼 마음이 가벼운 모양이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은 그 아이, 테오르 때문이었다.

무도회 날, 아스텔은 조카와 외조부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걸 허락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부탁했다. 그러나 카이젠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스텔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다.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당황했다.

‘평범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거절이었지.’

그러나 벨리안은 카이젠의 마음을 이해했다. 폐하께서는 아이와 노인을 꼬드겨서 아스텔 님을 수도에 잡아놓을 생각이셨던 모양이다.

‘……완전히 역효과만 나고 말았지만.’

요청을 거절당한 아스텔은 차가운 석상처럼 연회장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벨리안은 가까이 다가가서 예의상 위로도 건네지 못했다. 이번 일로 그간 조금씩 쌓아놓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산산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어린 조카와 할아버지가 수도에 남는다고 해도 아스텔은 유언장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동부 시골로 돌아가 버릴 듯했다.

‘안타까운 일이군.’

벨리안은 동정심 어린 눈으로 황제 폐하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감상했다.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눈이 시릴 만큼 밝은 날이었다.

벨리안은 이참에 황제 폐하를 도와드리기로 마음먹었다. 황제 폐하를 위하는 순수한 충성심에서 나온 기특한 생각이었다. 물론 황제께서 계속 기분이 안 좋으셔서 곁에서 눈치 보며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만.

“날씨가 좋은데 기분 전환 겸 사냥을 나가는 게 어떠십니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

카이젠은 무슨 이런 머저리가 있냐는 듯이 벨리안을 쳐다봤다.

“아스텔이 그 숲으로 피크닉을 간다는데 어떻게 사냥을 가겠느냐?”

숲에 피크닉을 간 사람이 있으면 사냥을 하러 갈 수 없다.

당연한 상식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옆에서 사냥을 하다가 누군가가 총이라도 맞으면 큰일이니까.

‘결국 피크닉을 가는 건 허락해 주신다는 거로군.’

벨리안은 카이젠의 눈치를 보면서 다시 제안했다.

“그럼 아스텔 님과 함께 피크닉을 가시죠. 이곳에 오신 후로는 휴식 시간도 없이 정무만 보셨잖습니까?”

“…….”

카이젠은 불쾌한 표정으로 서류만 노려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도회 날 이후 아스텔을 만나지 못했다. 그 늙은 후작이 알현을 청했지만 무시해 버렸다.

무도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했다. 그날 밤 정원에서 들었던 아스텔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 각인처럼 새겨졌다.

‘폐하께서는 뭐든 폐하의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세상에는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스텔의 진심이었다. 가슴 안에 꽁꽁 묻어두었다가 처음으로 솔직하게 꺼내놓은 진심이었다. 그때는 화가 나서 막말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스텔의 말이 옳았다.

‘나는 무슨 염치로 그런 소리를 했나.’

카이젠은 새삼 스스로가 한심했다.

6년 전 자신은 아스텔에게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

결혼식장이 치워지기도 전에 10년 넘게 자신의 곁에 있었던 여자를 돈 한 푼 주지 않고 내쳐버렸다. 아스텔도 이혼에 동의했으니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6년 동안 그녀를 잊고 살았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제라도 아스텔에게 그날밤의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한 기회가 없었다.

그 후작이라는 노인네만 알현 신청을 했을 뿐. 아스텔은 무도회 이후 별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별 이유도 없이 거길 찾아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카이젠은 그렇게 며칠째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는 중이었다.

‘이 기회에 찾아가 볼까?’

카이젠은 서류를 들여다보며 갈등했다.

한참동안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벨리안은 포기하고 그냥 일이나 하려고 다시 서류를 들췄다.

그제야 카이젠이 침묵을 깨고 중얼거렸다.

“그래. 노인네랑 애만 데리고 가게 할 수는 없겠지.”

“예, 그렇지요. 안전을 위해서도 폐하께서 아스텔 님과 같이 가시는 게 좋습니다.”

벨리안은 얼른 황제의 말에 동의했다. 카이젠은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크닉을 갈 테니 시종들에게 말해서 준비하라고 해.”

* * *

아스텔은 테오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한 손에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아스텔 고모, 우리는 걸어가는거야?”

“아니, 너무 멀어서 마차를 타고 가야 해.”

별채 밖으로 나오던 아스텔은 정원 앞에 마련된 마차를 보고 멈춰 섰다.

시종들이 알 수 없는 짐 가방을 마차에 싣고 있었다.

‘저 짐들은 뭐지?’

아스텔은 피크닉 바구니하고 잔디에 깔고 앉을 천만 둘둘 말아서 들고 나왔는데 갑자기 시종들이 짐 가방을 챙겨 넣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아스텔을 불렀다.

“아스텔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벨리안이었다.

“백작님. 이게 무슨 일인가요?”

벨리안을 보니까 왠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사람과 엮여서 좋은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게 폐하께서…….”

“나도 함께 가려고 준비시킨 거야.”

벨리안이 대답하기 전에 담담한 중저음이 대답을 대신했다. 놀라서 돌아서자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카이젠이 보였다.

“폐하!”

테오르가 아스텔의 손을 놓고 카이젠에게 달려갔다. 카이젠은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 녀석 완전히 기운을 회복했군.”

지난번 납치 사건 때문에 테오르는 카이젠과 한층 더 친밀해졌다. 

아스텔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카이젠을 가만히 지켜봤다. 무도회 날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다시 만나면 굉장히 불편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너무 당황해서 불편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폐하, 어딜…… 가신다고요? 피크닉에요?”

설마 잘못 들었겠지 했는데 카이젠은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그래. 피크닉.”

“…….”

아니, 대체 왜? 누가 초대했다고?

뒤늦게 별채에서 나온 할아버지가 황제를 발견하고 당황한 낯으로 예를 갖췄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 그래. 많이 나아진 것 같군.”

“예, 한참 동안 이곳에서 요양한 덕분에 완전히 나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지극히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 말투엔 지난 며칠간 끊임없이 알현 신청을 거절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감돌았다. 카이젠도 그걸 느꼈는지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아스텔은 둘 사이의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걸 막으려고 앞으로 나섰다.

“정말 저희와 함께 가시려고요?”

너무 직설적으로 물었는지 카이젠의 붉은 눈에 불쾌한 기색이 감돌았다.

“왜? 내가 가면 안 되는 건가?”

“…….”

‘예, 안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얼마 전에 무도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후 할아버지의 알현 요청도 거절했으면서 무슨 낯으로 같이 가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스텔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그럴 리가요. 폐하께서 참석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대신 정중한 미소를 가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이가 너무 어려서 폐하께 무례를 범할까 봐 염려스럽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테오르와 함께 별채에 머물겠습니다.”

지극히 공손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피크닉을 가고 싶으면 혼자 가십시오. 우리는 빠지겠습니다.

그런 뜻이었다.

카이젠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붉은 눈동자에 스쳐 가는 분노와 짜증, 억울함이 보였다. 아스텔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화를 내는 건 이해하지만 억울할 건 뭐가 있는지?

보다 못한 벨리안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끼어들었다.

“저기 아스텔 님, 그러지 마시고…….”

아스텔은 그를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테오르가 애타는 눈길로 아스텔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고모, 우리는 왜 안 가? 우리도 폐하하고 같이 가면 안 돼?”

‘이런…….’

테오르는 조그만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아스텔을 올려다봤다. 그 간절한 눈빛을 보자 차마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벨리안이 다시 말했다.

“어린 도련님도 이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같이 가시죠. 날씨도 이렇게 좋은데요. 실내에만 머물기 아까운 날씨잖아요.”

“…….”

날씨가 어떻든 카이젠과 같이 나가고 싶지 않지만.

아스텔은 자신을 간절하게 올려다보는 테오르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함께 가지요.”

그녀를 지켜보던 카이젠이 나지막한 조소를 내뱉었다.

“고맙군.”

아스텔은 그를 무시한 채 마차로 걸어갔다.

결국 아스텔과 테오르, 할아버지 이렇게 세 명이 가려고 했던 소박한 피크닉은 카이젠에 벨리안, 거기다 황제를 지키는 병사들까지 포함된 대대적인 외출이 되고 말았었다.

테오르는 카이젠에게 조르르 달려가서 손을 잡아 끌었다.

“폐하도 같이 가요.”

“그래. 다 같이 가는 거야.”

아스텔은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테오르를 데리고 먼저 마차에 올랐다. 일행은 호위로 딸린 병사들을 데리고 숲으로 갔다.

* * *

덴츠 성의 북쪽에 붙은 숲은 정말로 아름다운 숲이었다. 동쪽에서 흘러온 맑은 물이 시내를 이루며 숲을 가로질렀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나무들 사이로 푸른 잎사귀와 부드러운 풀이 가득했다.

이런 곳에서 피크닉을 하면 아주 즐거울 것이다. 맑은 햇살 아래 맛보는 샌드위치와 달콤한 과일 파이. 향긋한 와인과 함께 즐기는 브런치. 아이들은 숲을 뛰어다니며 놀고, 어른들은 잔디 위에 앉아서 간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모두의 머릿속에 행복한 피크닉의 모습이 떠올랐다.

벨리안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비가…… 계속 오네요.”

쏴아아아-

서늘한 빗소리가 숲을 뒤흔들고 있었다.

분명 출발할 때만 해도 화창하게 맑았는데.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숲의 중심에 들어오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행은 급한 대로 짐꾸러미에 있던 천막을 꺼내서 간신히 비를 피하고 있었다. 시종들이 그늘막으로 쓰라고 챙겨준 것이었다.

벨리안은 머리 위에 있는 넓은 천막을 올려다봤다. 엉성하게 세워진 천막은 바람이 불 때마다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그래도…… 이거라도 챙겨와서 천만다행이네요.”

이 천막이 없었으면 다들 비를 쫄딱 맞았을 것이다.

마차는 숲의 입구 밖에 세워놓고 왔다. 함께 온 병사들도 입구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밖에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센 빗줄기가 숲을 뒤덮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가 끊임없이 천막 위로 쏟아졌다. 이대로는 숲 밖으로 나가기도 어려울 듯했다.

지루해진 테오르는 천막 끝에서 작은 청개구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허술하게 세워진 천막이 비바람에 크게 흔들렸다. 천막 위에 고여 있던 빗물이 폭포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비다!”

테오르가 놀라서 안으로 도망쳐 왔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안쪽으로 불렀다.

“테오르. 비에 젖지 않게 안쪽으로 들어와 있으렴.”

천막 안에 앉아 있던 카이젠이 짜증을 냈다.

“하필이면 도착하자마자 비가 와서…….”

피크닉인지 뭔지를 하려고 마차를 타고 이 숲까지 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다니.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카이젠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아스텔을 돌아봤다.

‘아스텔과 제대로 대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상쾌한 숲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다가 기회를 봐서 그날 밤의 일을 말하고 싶었다.

화창한 숲에서 대화를 시작하면 마음도 조금은 가벼울 테니까.

그런 목적으로 반강제적으로 피크닉에 따라왔는데 전부 허사가 되고 말았다.

잿빛 구름 사이로 차가운 비바람이 새어 나왔다. 장대처럼 쏟아지던 빗줄기가 바람에 날려서 벨리안이 있는 자리까지 들어왔다.

“히익…….”

벨리안도 질색하며 안쪽으로 도망쳐 왔다.

다섯 사람은 비좁은 천막 안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테오르는 작대기를 집어 들고 혼자 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아스텔이 그런 테오르에게 물었다.

“배고프지 않니? 간식 먹을래?”

“응. 배고파.”

아스텔은 멍하니 있는 세 사람에게 물었다.

“간식을 꺼내 먹어도 될까요?”

“그러게요. 배고픈데 뭐라도 좀 먹죠.”

벨리안도 챙겨 온 바구니에서 잘 포장된 고기 파이와 와인 병을 꺼냈다. 고소한 닭고기를 넣은 샌드위치와 알록달록한 과일 타르트도 있었다. 황제가 피크닉을 간다니까 시종들이 챙겨준 간식이었다.

벨리안은 몇 개를 꺼내서 카이젠에게 건넸다.

“폐하, 간식이라도 좀 드십시오.”

하지만 카이젠은 손도 대지 않고 아스텔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 샌드위치 먹자.”

아스텔도 바구니에서 샌드위치를 꺼내서 테오르에게 건네줬다. 그냥 햄이나 치즈 같은 게 든 평범한 샌드위치였다.

“맛있어!”

테오르는 아스텔이 준 샌드위치를 들고 조금씩 오물오물 베어 먹었다.

아스텔이 샌드위치를 하나 더 꺼냈다. 순간 카이젠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스텔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반대편에 앉은 늙은 후작에게 샌드위치를 건넸다.

“할아버지 드세요.”

“그래. 고맙다.”

카이젠은 힘없이 손을 내렸다.

“…….”

‘쯧쯧.’

몹시 안타깝고 민망한 장면이었다. 폐하께서는 자기 몫으로 주는 줄 아셨던 모양인데.

주군의 불쌍한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안은 카이젠에게 진심으로 동정심을 느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고기 파이를 조심스럽게 카이젠에게 내밀었다.

“저…… 폐하. 이거 드십시오.”

“필요 없다.”

카이젠은 음식엔 손도 대지 않고 벨리안이 따라준 와인만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테오르와 달리 네 명의 어른은 피크닉이라고 모여앉아 음식을 먹으면서도 할 말이 없었다. 서로 불편하고 무안하기만 했다.

카이젠과 벨리안은 칼렌베르크 후작과 초면이나 마찬가지였고, 아스텔과 카이젠은 이혼한 부부였으며, 벨리안과 아스텔은…….

아스텔은 그가 자신을 욕탕에 들여보내고 옷가지와 짐을 뒤져본 다음부터 될 수 있는 한 벨리안과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서로가 불편한 사이인 데다 공통된 화젯거리도 없다. 자연히 천막 안에는 불편하고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거 정말 맛있어. 나 하나 더 먹어도 돼?”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테오르만 즐겁게 음식을 먹었다.

“그래. 마음껏 먹어도 돼.”

테오르는 샌드위치 한 개를 다 먹고 벨리안이 준 고기 파이도 야금야금 잘라 먹었다. 고소한 육즙이 흐르는 달달한 파이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아, 맞다. 아스텔 님 무도회에서 세르벨 경을 만나셨죠?”

이 불편한 침묵을 깬 건 벨리안이었다.

“그 란베르크 기사단장님이요?”

“예, 그 친구요. 저와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래요?”

은색 머리에 연청색 눈을 가진 미청년이 떠올랐다. 예의 바르고 서글서글하고 인상도 좋았는데 벨리안과 친구라는 소리에 호감이 반 토막으로 깎였다.

가만히 듣던 후작이 호기심에 끼어들었다.

“자네와 비슷한 또래라면 젊을 것 같은데 벌써 기사단장인가?”

“예, 그 친구는 아주 실력이 좋거든요.”

벨리안은 자랑스럽게 말하다가 끝에 작게 덧붙였다.

“뭐…… 그리고 아버님이 군무 대신인 에클렌 백작이니까요.”

“누구?”

“군무 대신 제럴드 폰 에클렌 백작이요. 그분이 세르벨 경의 양아버지입니다.”

아스텔은 그 이름을 듣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그래요. 그분이 할아버님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무도회 날 부탁하셨는데 죄송해요. 제가 잊고 있었네요.”

무도회 이후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뒤늦게라도 전해줬는데 후작은 대답이 없었다. 아스텔은 넋 나간 얼굴로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조금 놀랐다.

“할아버지?”

“제럴드 에클렌이 군무 대신이 됐다고?”

“예, 아는 분이세요?”

벨리안의 물음에 후작은 움찔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 뭐 예전에 알던 사이지. 예전에 내 부관이었다.”

“그래요? 그건 처음 듣는 정보네요.”

후작은 여전히 뭔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아스텔은 할아버지의 이상한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뭐지?’

나중에 그 사람하고 무슨 관계냐고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빗줄기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네요.”

바구니를 정리하던 아스텔이 흐릿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옆에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던 테오르와 아이의 그림을 구경하던 벨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고 하늘도 점차 맑아지고 있었다.

테오르가 천막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나가서 놀아도 돼?”

“그래.”

신이 난 테오르는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빗물을 머금은 풀밭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저는 약초를 좀 보러 갈게요. 테오르를 부탁드려요.”

“그래. 조심하거라.”

아스텔은 할아버지의 염려 섞인 말을 들으며 바구니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비가 그쳐서인지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아스텔은 바구니를 들고 깊은 숲 속으로 사라졌다. 아스텔이 사라지자마자 카이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어디에 가십니까?”

벨리안이 어딜 가시냐고 물었지만 카이젠은 대답 없이 아스텔이 사라진 쪽으로 걸어갔다.

테오르가 두 사람이 사라진 숲속을 보며 물었다.

“폐하는 어디 가는 거예요?”

“음……. 폐하께서는 아스텔 님과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보다.”

벨리안은 조금 안타깝다는 듯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작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 여기까지 같이 따라온 것도 그렇고 황제는 이상할 만큼 아스텔에게 신경을 썼다. 아스텔은 그가 단지 죄책감을 느끼는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후작이 보기에는 단순히 양심의 가책 때문에 저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이제 와서…… 아니겠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이미 황제의 쓸데없는 관심 때문에 아스텔은 몇 번이나 안 좋은 일을 겪었다. 지난번에는 심지어 테오르까지 위험에 빠질 뻔했다. 

후작은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황제는 대체 우리 아스텔과 무슨 원수를 졌는지…….’

왜 필요할 때는 무심하게 내버려 놓고 이제 와서 아스텔을 괴롭힌단 말인가. 이제는 그냥 가만히 살게 놔두는 게 제일 큰 도움이건만.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약초를 찾으면서 숲속을 걸어가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스텔.”

뒤따라온 사람은 카이젠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붉은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다가오면서 담담하게 고백했다.

“지난번 일은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에 아스텔은 놀란 것 같았다.

카이젠은 묵묵히 사죄했다.

“무도회의 일을 사과하고 싶었어.내 생각 때문에 테오르를 잡아두려고 했던 건 미안해. 당신 말이 맞아. 내가 이기적이었어.”

“…….”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스텔은 카이젠이 마지막 말을 끝낼 때까지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사과하실 것 없어요.”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뒤에 아스텔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제국의 주인이니 언제나 폐하의 뜻대로 하셔야지요.”

“아부를 듣자고 한 소리가 아냐.”

카이젠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눌러 참았다.

아스텔과 대화하면 언제나 화가 났다. 말 한마디에 이렇게 감정이 치솟을 수 있다니. 자신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만드는 아스텔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스텔은 석상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럼 테오르와 할아버님을 집으로 돌려보는 걸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이런 상황에서도 안 된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 두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도 좋아.”

“감사합니다. 폐하.”

아스텔의 창백한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행복해하는 아스텔의 모습을 보니 씁쓸한 감상이 들었다. 카이젠은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진작에 허락해 줬어야 했는데. 내가 쓸데없이 고집을 부렸지.”

“폐하를 원망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이제 테오르는 할아버님과 집으로 돌아갈 텐데요.”

아스텔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백했다.

자신의 뜻대로 됐으니 더는 신경 쓸 일도 없다는 식으로 들렸다.

‘당신도 수도에서의 일이 끝나면 돌아갈 건가?’

카이젠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이라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당연히 돌아가겠지.’

테오르와 후작이 없으면 아스텔은 수도에 있을 이유가 없다. 신전의 일이 끝나자마자 붙잡을 새도 없이 돌아가 버릴 것이다. 

그는 아스텔을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 쓰라린 현실에 슬픔이 느껴졌다.

아스텔은 그를 무시한 채 다시 몸을 돌리고 약초를 찾았다.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이젠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나도 약초를 찾는 걸 도와주지.”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아주 미약하게 부스럭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스텔 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아스텔의 어깨 너머에는 하늘 높이 솟은 자작나무가 가득했다. 커다란 나뭇잎 사이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 있다. 주변을 유심히 살폈지만 어두컴컴한 그늘 사이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 숲에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함께 온 기사들은 숲의 입구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벨리안이나 후작인가?’

카이젠은 그 조용한 발소리를 유심히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군. 절대 벨리안이나 후작도 아니고.’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흔들림 없이 걸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약초를 보고 있는 아스텔의 뒤엔 새카맣게 우거진 풀숲이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을 더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아스텔. 고개를 숙여.”

약초를 발견하고 다가가려던 아스텔은 카이젠의 목소리에 숨어 있는 위험과 긴장감을 읽어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재빨리 몸을 굽혔다.

아스텔이 몸을 굽히자마자, 카이젠은 순식간에 단도를 빼 들고 풀숲을 향해 날렸다.

“크악……!”

그늘진 풀잎들 사이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주변에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객들이 뛰쳐나왔다. 모두 검을 빼 들고 있었다.

* * *

‘암살 시도인가?’

이런 식의 급습은 북부에서의 전쟁이 끝난 뒤엔 한 번도 없었다. 

카이젠은 검을 빼 들었다. 상대는 여섯 명. 승산은 충분했다. 한 가지 중요한 변수만 없었다면 말이지.

“아스텔.”

카이젠은 검을 든 채 아스텔을 등지고 섰다. 무방비하게 있는 아스텔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내 뒤에 가까이 붙어 있어.”

아스텔도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라!”

암살자들의 공격이 시작되자 카이젠은 정신을 다잡으며 날아오는 검을 피했다. 상대의 검을 피하면서 빈틈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커억!”

상대는 여러 명이었지만 카이젠의 검이 그들보다 훨씬 더 빠르고 노련했다.

카이젠은 손쉽게 적들을 한 명씩 쓰러뜨렸다. 마지막 남은 자객이 달려들었지만 카이젠의 검이 순식간에 그를 관통했다. 상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순간 아스텔의 뒤에 있는 숲속에서 자객이 한 명 더 나타났다. 복면을 쓴 암살자가 검을 빼 들고 아스텔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카이젠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스텔!”

놀란 아스텔이 몸을 숙여 검을 피했다. 카이젠의 검이 그 자리를 막았다. 아스텔에게 향하는 검 날은 막아냈지만 순간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집중력이 분산됐다. 

그 틈에 암살자의 검이 어깨 위를 찌르고 들어왔다.

“윽……!”

순식간에 왼쪽 어깨에 피가 솟아났다. 하지만 카이젠도 당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어깨에 검 날이 박히는 순간 그는 자객의 심장을 꿰뚫었다.

짧은 사투 끝에 일곱 명의 시신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스텔은 피가 흐르는 상처를 보고 카이젠에게 다가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카이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순간 발치에 암살범의 시체가 닿았다. 무심코 시선을 내렸던 아스텔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 사람…….’

아까 봤을 때도 어딘지 낯이 익다 했었다.

아스텔은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끔씩 저택에서 본 사람이었다. 복면에 반쯤 가려진 얼굴만으로도 한눈에 신원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아스텔은 이 남자를 여러 번 봤다.

이름은 모르지만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안다. 아버지가 비밀리에 곁에 두고 있는 수하 중 한 명이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

아스텔의 창백한 얼굴을 본 카이젠은 칼에 찔린 어깨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윽……!”

“폐하!”

아스텔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카이젠에게 다가갔다.

카이젠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윽.”

고통스러운지 눈가를 찌푸리고 신음을 흘렸다. 상처 입은 어깨가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아스텔은 카이젠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폐하, 상처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찢어진 옷자락을 벌렸다. 근육으로 감싸인 단단한 어깨에 검에 찔린 상처가 깊이 박혀 있었다. 날카롭게 갈라진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범위가 넓진 않은데 깊이 찔렸어.’

다행히 뼈가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당장 지혈을 해야만 했다. 이대로 두면 피가 많이 흘러서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상처가 깊습니다. 당장 상처를 지혈해야 합니다. 급한 대로 여기서 얻은 약초를 쓰겠습니다.”

아스텔은 바구니에 있던 약초를 꺼내서 손수건으로 닦고 손으로 으깼다.

혹시나 필요할까 해서 상처를 치료할 때 쓰는 약초도 뜯어 놨다. 이렇게 쓰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마른 손수건으로 상처를 닦아내고 지혈을 했다. 상처를 손으로 누르자 카이젠은 찌릿한 아픔을 참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당신을 지키면서 싸우지 않았으면 다칠 일도 없었어.”

아스텔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스텔이 뒤에 있지 않았다면 카이젠이 다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곱 명이나 되는 암살자를 혼자 막아낸 실력이다. 아스텔이 없었다면 손쉽게 위기에서 벗어났으리라.

‘검술을 잘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잘하는 줄은 몰랐는데.’

황태자 시절에는 사냥을 좋아할 뿐 검술 실력은 평균을 조금 웃도는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다.

가끔 기사들과 대련을 할 때도 그렇게 엄청난 실력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고위 귀족 자제 중에 그럭저럭 잘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진짜 실력은 제대로 안 보여주고 있었던 거였구나. 

아주 오래전부터 어느 누구도 믿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카이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발톱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으리라. 

하지만 아스텔은 그와 십 년을 함께한 약혼녀였다. 열 살 때부터 함께 자랐는데도 그는 아스텔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 정도로 신뢰를 나누지 못한 관계였다니 새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아스텔의 아버지와 가문을 생각하면 카이젠이 그녀를 믿지 못하고 거리를 둔 것도 이해가 갔다.

“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어쨌거나 카이젠은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아스텔을 지켜줬다. 그녀로서는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스텔이 담담하게 감사를 표하자 카이젠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게 다야?”

“그럼 어떻게 하길 바라시나요?”

이런 상황에 농담을 주고받고 싶지 않아서 조금 쌀쌀맞게 물었다.

사실 카이젠이 검에 맞았을 때는 아스텔도 많이 놀랐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차갑게 들렸는지 카이젠은 실소를 흘리며 비아냥거렸다.

“왜, 아예 그냥 버리고 가지 그래?”

이 사람은 왜 좋은 일을 해도 밉살스러운지 모르겠다. 아스텔은 상처를 지혈하던 천을 더 세게 꽉 눌렀다.

둔한 통증에 카이젠이 미간을 찌푸렸다.

“윽…….”

“다 됐습니다.”

카이젠이 비난의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는 묵묵히 무시했다.

아스텔은 손으로 으깬 약초를 카이젠의 상처에 발랐다. 검푸른 잎사귀에서 나온 진액을 바르자 상처에서 배어 나오던 피가 점차 잦아들었다. 

피가 멈추고 나자 상처가 더 제대로 보였다. 날카롭게 난 상처는 거의 뼈에 닿은 정도로 깊었다.

카이젠은 피가 멎은 걸 보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옷자락을 추슬렀다.

“이제 괜찮아졌군.”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안 좋았다. 이렇게 강한 사람이 자신을 지키느라 심하게 다쳤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설마 후유증이 남는 건 아니겠지?’

의사가 아니라서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혹시라도 어깨를 제대로 못 쓰게 되거나 하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이 되었다.

부스럭.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 암살자들인가 싶어서 자동적으로 몸이 긴장됐는데 나무들 사이로 낯익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황제의 기사들이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

카이젠은 놀라서 달려온 린든 경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아스텔님, 괜찮으십니까?”

“네, 저도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어요.”

카이젠은 린든이 데려온 병사들을 보며 물었다.

“습격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들어왔지?”

“숲속에서 연기가 솟는 걸 발견하고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서 다급히 들어왔습니다.”

“연기라고?”

“예, 저쪽에…….”

린든은 연기가 난 쪽을 가리켰다.

아스텔은 그가 가리킨 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테오르와 할아버지가 있는 곳이었다.

아스텔은 놀라서 정신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린든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숲길을 따라 달렸다.

“테오르!”

천막이 있던 곳으로 달려가자 쓰러진 천막 옆에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장작 더미를 쌓아놓고 양쪽에 서 있는 벨리안과 할아버지가 보였다. 마른 장작더미에서 불길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테오르는 벨리안의 품에 안겨 있었다.

“테오르, 괜찮니?”

아스텔은 테오르를 받아서 끌어안았다.

테오르는 울먹이면서 아스텔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흑, 흐윽……. 나쁜 사람들이 왔었어…….”

테오르의 작은 몸이 가늘게 떨렸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래. 괜찮아. 괜찮아, 테오르.”

아스텔은 테오르가 안심할 수 있게 차분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아이를 달랬다.

‘이쪽에도 암살자들이 왔었구나.’

아마 목격자가 될 만한 벨리안과 할아버지도 없애려고 했던 모양이다. 자칫 잘못했으면 테오르와 할아버지까지 위험해질 뻔했다. 상상만으로도 섬뜩한 일이었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작은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불가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아스텔에게 다가오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스텔, 너는 괜찮은 거냐?”

“할아버지 다치셨어요?”

할아버지의 손목에 피가 묻어 있었다.

“별거 아니야. 스치기만 했다.”

아스텔을 뒤따라온 카이젠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린든과 다른 기사들도 보였다. 벨리안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래. 여기도 왔었나?”

“예. 세 명뿐이었지만요.”

벨리안이 무너진 천막을 가리켰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무너진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흰 천 안에 사람의 시신이 덮여 있었다.

‘시체를 덮어놓은 거였구나.’

테오르가 시체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연기를 피워서 병사들을 부르려고 불을 피웠습니다. 나무가 다 젖어 있어서 연기가 잘 나더라고요.”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은 채 할아버지에게 약초를 건넸다.

아까 카이젠에게 발라줬던 지혈제였다.

“할아버지, 일단 이거라도 쓰세요.”

할아버지가 약초를 받아 드는 걸 보고 옆에 있던 벨리안이 투덜거렸다.

“저도 다쳤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이마에 붉게 멍든 자국이 보였다.

‘저런, 싸우다가 맞은 건가. 지금은 타박상에 쓸 약초는 없는데.’

약초를 건네받은 후작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걸 다친 거라고 할 수 있나.”

벨리안은 아스텔에게 하소연을 했다.

“후작님께서 갑자기 저한테 검을 던지셨다고요!”

“……예?”

그의 말에 따르면, 갑자기 암살자들이 나타나니까 할아버지가 지니고 있던 단도를 던져서 자객을 한 명 명중시킨 뒤, 그 틈에 검을 뺏어서 벨리안에게 던졌다고 한다. 이마의 멍은 검의 손잡이에 맞아서 생긴 거라고.

가만히 듣기만 하던 후작이 기가 막히다는 눈길로 바라봤다.

“검을 주면 나하고 같이 싸울 줄 알았지. 검에 얻어맞고 있을 줄 알았겠나.”

“예고도 없이 사람한테 무기를 던지시면 맞을 수밖에 없잖아요.”

할아버지는 혼자서 남은 두 명을 상대하느라 다쳤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후작은 벨리안에게 화를 냈다.

“아니 자네는 어떻게 백작이라는 사람이 검을 쓸 줄 몰라?”

“……저는 문관입니다.”

벨리안은 후작의 시선을 피하며 투덜거렸다.

제국의 남자 귀족들은 교양 수준으로라도 검을 배운다. 최소한 자기 몸을 지키는 방법은 기본으로 배우는데. 벨리안은 전혀 배우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스텔 고모…….”

아스텔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테오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테오르. 이제 괜찮아. 얼른 블린이 기다리는 별채로 돌아가자.”

“으응…….”

아스텔은 테오르의 눈가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줬다.

후작은 아스텔을 안심시켰다.

“다행히 테오르는 아무것도 못 봤다. 이 젊은 백작이 끌어안고 있었거든.”

벨리안은 테오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꼭 끌어안고 할아버지 뒤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테오르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약제사 일로 한동안 벨리안을 싫어했는데 그래도 테오르를 보호해 줬다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벨리안은 아스텔의 감사 인사를 받고 멋쩍은 듯이 말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후작님이 안 계셨으면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요.”

병사들이 상황을 정리하는 걸 지켜보던 카이젠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찢어진 옷 사이로 길게 난 상처가 보였다.

“다들 괜찮은 건가?”

“예.”

그의 시선이 아스텔에게 안겨 있는 테오르에게 닿았다.

“괜찮으냐.”

아스텔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테오르가 카이젠의 목소리를 듣고 조심조심 고개를 들었다. 맑은 푸른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네, 폐하.”

카이젠은 테오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제 다 괜찮다. 무서워하지 마라.”

테오르는 그의 말을 듣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아스텔은 테오르가 카이젠을 잘 따르고 마음 깊이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간의 일로 어느새 서로 깊이 정이 든 모양이다.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한 번 눈길을 준 뒤 몸을 돌렸다.

“그만 성으로 돌아가지.”

* * *

“죄송합니다, 아스텔 님.”

벨리안은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아스텔에게 용서를 구했다.

“황제 폐하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니, 성안에 있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아스텔은 방금 전에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별채에 돌아왔다.

옷도 벗지 못하고 테오르부터 씻기고 놀라서 경기라도 일으킬까 봐 아이들을 위한 진정제를 먹여서 재웠다. 겁에 질려 있던 테오르는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잠이 들었다. 

테오르가 잠드는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벨리안이 찾아와서 양해를 구했다. 암살 시도 때문에 아무도 떠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죄송합니다만 후작님과 테오르도…… 이대로 함께 수도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

아스텔은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스텔은 벨리안이 떠날 때까지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혼자 남겨진 순간 의자에 주저앉았다. 참았던 피로가 몰려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후작이 문을 열고 아스텔이 있는 응접실에 들어왔다. 아스텔은 할아버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괜찮은 거냐? 얼굴이 창백하구나.”

할아버지는 손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아스텔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토닥였다. 익숙한 온기에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아스텔은 문과 창문을 확인했다. 전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암살자요.”

그리고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본 것을 털어놨다.

“얼굴이 낯익었어요.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어요.”

“설마 네 아버지의…….”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가…….”

후작의 눈이 충격으로 떨렸다.

숲에서 있었던 일은 분명히 아버지의 짓이었다. 아버지의 짓이 아니라면 아스텔이 낯이 익을 만큼 자주 봤던 사람이 암살자 일행에 끼어 있을 리가 없다.

후작은 목소리를 낮춰서 화를 냈다.

“네 아버지가 보낸 암살자들이 우리까지 죽이려고 했던 거냐?”

“아버지가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죠.”

‘언제나 자기 생각만 하시는 분이니까.’

아스텔이 여기 있다는 걸 알면서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귀찮을 테니 같이 죽이라고 했을지도 모르지.

아스텔은 아버지에 대한 짜증을 억누르고 현실을 살폈다.

아버지가 카이젠을 죽이려고 했다. 아버지의 짓이라는 게 밝혀질까? 그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스텔 자신은 의절당했다고 해도 레스턴 가문의 딸이었다. 가문에 반역의 낙인이 찍히면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제 와서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텔 자신이 죽으면 테오르는…….

“얘야.”

후작은 아스텔의 손을 굳게 붙들었다. 근심에 싸여 있던 아스텔이 고개를 들고 할아버지를 향했다. 창백한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테오르가 칼렌베르크 가문의 아이로 되어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스텔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아스텔 자신도 죽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테오르를 외가 쪽 후계자로 만들면서 아스텔은 내심 안도했었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셨으니 레스턴 가문이 멸문당해도 칼렌베르크 가문은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또 연금을 박탈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작위까지 박탈당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유배당하거나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 만일의 일이 생기면 테오르를 부탁드려요…….”

연로한 할아버지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지만 지금은 달리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만에 하나 저와 그레텔이 전부 약을 만들지 못하게 될 상황이 생길까 봐 저택의 나무 밑에 약의 조제법을 묻어뒀어요.”

만일 아스텔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약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런 상황이 올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조제법을 적어서 땅에 묻어뒀다.

“제가 할아버님을 도와드려야 하는데……. 자꾸 할아버님께 부탁만 드려서 죄송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할아버지에게 짐만 지워주고 있었다. 아스텔은 죄책감에 눈가가 흐려졌다. 후작은 처참한 눈빛으로 앉아 있는 가엾은 손녀를 끌어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다 괜찮을 거다.”

그렇게 말하는 후작의 목소리에도 불안감이 감돌았지만, 아스텔은 한참 동안 외조부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따스한 온기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을 거다.”

귓가에 할아버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텔은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이었다.

“네 아비가 황제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게 이번 일이 처음은 아니었을 게야. 예전에도 분명 이런 시도가 있었겠지.”

“…….”

아스텔도 할아버지의 말에 동감했다. 아버지는 지난 수년간 카이젠을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분명 알려지지 않은 암살 시도가 여러 번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아직까지 네 아비가 무사한 것을 보면 들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그건 그렇지요.”

아스텔의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조심스럽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네 아비는 원체 조심스러운 인간이라 일이 실패해도 증거가 남지 않게 잘 처리했을 게다.”

“정말 그럴까요?”

“그래. 네가 봤다는 그 남자도 공작가와 연관되지 않게 미리 대비해 놨겠지.”

아스텔도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다.

아버지라면 만에 하나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빠져나갈 틈을 만들어뒀을 것이다. 암살자들의 시신이 공작가와 연관되지 않게 뭔가 대비를 해놨겠지.

‘제발 들키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하던 아스텔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범인이 밝혀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카이젠은 나를 구하려다가 검날에 찔려 부상을 입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상처 입고 피를 흘리던 카이젠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그에 대한 자책감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복잡하게 뒤엉켰다.

하지만 만일 아버지의 짓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아스텔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먼저 아버지의 짓이라는 걸 고발하고 용서를 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카이젠은 비슷하게 부친을 고발한 대귀족의 아들을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죽여버렸다.

똑똑.

갑자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한나의 음성이 뒤따랐다.

“아스텔 님!”

“무슨 일이야?”

아스텔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한나의 한마디에 두 사람 다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 * *

아스텔은 얼른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았다.

눈물이 서렸던 눈가는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그나마 눈이 붓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울었던 게 티 나진 않을 것 같았다.

아스텔은 정신을 차리고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카이젠은 별채의 응접실에서 아스텔을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아스텔이 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던 카이젠이 몸을 돌렸다. 다행히 그는 멀쩡해 보였다. 어깨를 깊이 찔리고 피도 많이 흘렸지만 평소와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스텔.”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던 카이젠은 아스텔의 얼굴을 보고 멈춰 섰다.

“당신 울었군.”

“…….”

이런. 분명히 세수를 하고 왔는데.

아스텔은 눈물 자국이 남았나 싶어서 손으로 뺨을 매만졌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걱정 마. 다 괜찮을 거야.”

“…….”

암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카이젠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암살을 사주한 진범이 밝혀지면 아스텔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아스텔은 이 순간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카이젠을 외면하며 물었다.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그래. 보다시피 나는 괜찮아.”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의사도 별일 없을 거라고 했어.”

꽤 깊게 베인 것 같았는데 워낙 건강해서인가. 그래도 후유증이 남지 않는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스텔은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네요. 저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워 할 것 없어. 당신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야.”

카이젠은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문득 숲에서 봤던 장면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아스텔을 지켜주다가 상처를 입는 카이젠의 모습이. 위기의 순간, 카이젠은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고 아스텔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아스텔은 조금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조용히 대답했다.

“예, 폐하께서도 많이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그 말에 카이젠이 충격받은 눈빛으로 아스텔을 향했다. 놀라다 못해 경악한 눈빛이었다. 아스텔은 자기가 한 말 어디에 저렇게 놀랄 만한 얘기가 있었는지 잠시 고민했다.

“당신…… 나를 걱정해 준 건가?”

그야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황제인데.

“상처가 심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후유증이 남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아스텔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카이젠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폐하?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줬다는 게 놀랍군. 현실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그가 비웃는 건지 진심인지 모를 소리를 했다. 아스텔은 카이젠의 말을 반박하려다가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저를 구해주셨는데 걱정할 수밖에요.”

고마운 마음 속에는 죄책감도 섞여 있었다. 카이젠을 죽이려고 한 건 아스텔의 아버지 레스턴 공작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오늘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는데도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스텔.”

아스텔의 복잡한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젠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폐하?”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카이젠이 있었다. 무감각하던 붉은 눈에 따스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 눈빛에 담긴 진심 어린 애정에 말문이 막혔다.

카이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스텔은 멍하니 굳어져 있다가 뒤늦게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하지만 놀라서 몸을 빼기 전에 카이젠이 아스텔의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품에 안았다.

“폐, 폐하?”

아스텔이 당황해서 벗어나려는 순간 흔들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암살자가 당신에게 달려들었을 때 숨이 멎는 줄 알았어.”

언제나 강하고 냉정하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잘못될까 봐 두려웠어.”

두려움이 감도는 카이젠의 목소리는 기묘하게 느껴질 만큼 낯설었다. 아스텔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분명히 벗어나야 하는데 온몸에 기운이 빠졌다.

“폐하, 저는…….”

카이젠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붉은 눈동자를 담은 날카롭고 섬세한 눈매. 날렵한 선을 자아내는 콧날. 위험할 만큼 유혹적인 남자였다.

아스텔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일순간 분위기에 휩쓸려 선을 넘게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카이젠을 확 밀치고 품 안에서 벗어났다.

“폐하.”

아스텔은 몸을 돌렸다.

“그만 돌아가 주세요.”

이런 식으로 카이젠에게 경계를 허물면 안 된다. 아스텔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

카이젠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 * *

황제를 기다리며 회랑에서 서성이던 벨리안은 별채 밖으로 나온 카이젠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폐하.”

카이젠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쳐서 본궁을 향해 걸어갔다.

벨리안은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저……. 암살자들의 시신은 전부 수습했습니다.”

뒤따라가면서 보고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기분이 안 좋으신 모양이다.

벨리안은 피크닉에 따라가라고 권했던 걸 정말 깊이 후회했다. 그런 제안을 꺼내지만 않았더라면 절대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북쪽 숲은 병사들이 계속 지키는 곳이라서 안전할 줄 알았다.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카이젠은 제국 안에서 손꼽히는 검술의 달인이었다. 그런 황제 폐하에게 무슨 위험이 생기겠나 싶어서 마음 놓고 있었다.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하필이면 아스텔과 테오르까지 있는 자리에서 그런 일이 생기다니. 그 탓에 황제 폐하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벨리안은 눈치를 보면서 뒤따라갔다. 회랑의 중간쯤 다다랐을 때 카이젠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스텔을 황궁에 데려갈 거다.”

“예……?”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

벨리안은 놀라서 멈춰 섰지만 카이젠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벨리안은 열 걸음쯤 멀어진 뒤에야 다시 황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폐, 폐하.”

벨리안은 카이젠을 따라가면서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조용히 건넸다.

“폐하, 레스턴 공작이 반역자로 죽으면 아스텔 님을 다시 황궁에 들일 수 없습니다.”

이번 사건의 배후는 분명 레스턴 공작일 것이다. 이번 사건이 아니더라도 카이젠은 레스턴 공작을 언젠가는 반역자로 몰아 죽이고 그의 가문을 없앨 생각이었다. 

아스텔이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도 반역자의 딸이 되면 황후가 될 수 없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흔들림 없이 걸어가면서 차갑게 대답했다.

“공작이 반역자가 되기 전에 죽으면 아스텔도 반역자의 딸이 아니지.”

뒤따라가던 벨리안은 그 속에 담긴 뜻을 깨닫고 놀라서 멈춰섰다.

그것은 레스턴 공작의 죄를 밝히지 않고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또한 그렇게 해서라도 아스텔을 다시 황궁에 데려오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 * *

일행은 다음 날 곧바로 수도로 출발했다.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암살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경계 대상이었다. 잠시 숙소에 머물 때도 아스텔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숙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최대한 빠른 경로로 수도에 도착하기까지 열흘이 걸렸다. 그동안 아스텔은 감옥으로 이송되는 죄수처럼 엄중한 분위기 속에 마차 안에만 갇혀 있었다.

‘테오르의 물약을 많이 만들어둬서 정말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약초를 구하기 위해 기사들을 피해서 도망쳐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도 잡히지 않고 약초가 있는 숲까지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 정도로 황제를 지키는 근위대는 어느 때보다 경계가 삼엄했다.

‘…….’

암살 사건을 떠올리자 숲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날 밤 카이젠과 만났던 일도 방금 전의 일처럼 떠오른다. 아스텔은 그 애처로운 눈빛에 잠시 마음이 풀어졌던 것을 깊이 후회했다.

‘그런 식으로 경계를 허물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스텔에겐 카이젠과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가 충분히 많았다.

테오르의 출생과 아버지의 일만 생각해 봐도 그랬다. 그런데도 왜 그 순간 카이젠에게 마음이 풀어졌는지 스스로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그 순간 아스텔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던 테오르가 몸을 뒤척였다. 아스텔은 곤히 잠든 테오르를 보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쨌든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아스텔은 마차의 창문을 내다보며 그렇게 다짐했다. 수도에 가자마자 유언장 일을 끝내고 떠나겠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