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무도회
그 후 며칠간은 조용히 지나갔다.
아스텔은 할아버지를 간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별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쏜살같이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무도회 날이 다가왔다.
‘드디어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긴장감이 차올랐다. 며칠간 기다린 무도회 날이었다.
아스텔은 유리창에 비쳐드는 새벽빛을 보며 일찌감치 각오를 다졌다.
오늘은 정말 잘해야 한다. 오늘 테오르 일만 잘 해결되면 더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니까.
카이젠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다.
무도회를 이렇게 간절히 기다린 건 난생처음인 것 같다. 수도에서 공녀로 살 때는 무도회 따위 귀찮은 행사였을 뿐인데.
함께 아침을 들던 할아버지가 잔득 긴장한 아스텔을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허락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잖느냐.”
“네, 맞아요.”
‘그래. 허락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유언장 일은 아스텔 자신만 데려가면 된다. 굳이 할아버님과 테오르까지 수도에 데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만일 거절하면 내가 직접 부탁해 보겠다.”
그래. 할아버지까지 나서서 부탁하면 설마 들어주겠지.
아스텔은 품 안에 지니고 다니는 약병을 할아버지에게 맡겼다. 오늘 저녁에는 테오르와 함께 있을 수 없다. 약을 넣어줄 시간도 없을 것이다.
“테오르를 부탁드려요.”
“그래.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라.”
오후에 접어들자 정신없이 바빠졌다.
아스텔은 대낮부터 무도회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준비를 했다.
공녀로 살 때는 평소에도 피부와 머릿결을 관리했고, 언제든 대충 꺼내 입고 나갈 드레스와 구두, 장갑과 손수건까지 전부 구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난 6년간 아스텔은 시녀만도 못하게 살아왔다.
생활비도 빠듯할 정도였는데 피부나 머리카락을 관리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 탓에 피부는 조금 거칠었고 머리카락은 끝으로 갈수록 마른 풀처럼 뻣뻣했다.
손톱도 그냥 짧게 잘려 있었다.
“화장수로 머리를 감고 간단하게 화장만 할 거야. 백분은 됐고 연지만 조금 발라줘.”
아스텔의 말에 시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디. 화장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무도회에 참석하실 수 없습니다.”
제국에는 무도회나 다과회 등의 사교 행사에 엄격하고 복잡한 예법이 있었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여성은 화장을 하고 머리도 틀어 올려서 화려하게 치장해야 했다.
어차피 춤을 출 생각도 없고, 이곳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 감탄을 받을 정도로 완벽하게 차리고 갈 생각은 없다만.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지만 않으면 되겠지.’
아스텔은 시녀들을 돌아보며 다시 부탁했다.
“그래, 그러면 남들한테 흠 잡히지 않게만 해줘.”
그런데 그것도 생각보다 힘들었다.
해 질 무렵까지 하루 종일 팔다리에는 버터밀크를 바르고, 얼굴에는 피부를 곱게 한다는 크림을 두텁게 발랐다.
“레이디. 이게 도움이 될 겁니다.”
뻣뻣해진 머리카락을 되살려내기 위해, 시녀가 달걀노른자를 섞은 정체불명의 물약을 가져왔다. 그걸로 머리를 감고 향유를 발랐다.
시녀들이 아스텔을 보며 감탄했다.
“세상에, 피부가 정말 고와지셨어요.”
“머릿결도 비단결 같으세요.”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 창백하고 거칠던 피부도 보들보들해졌고 향기 나는 물로 감고 나온 백금발도 잔잔한 윤기를 머금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말린 뒤엔 화장대 앞에 앉아 백분으로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었다.
무도회에 입고 갈 야회복은 연보라색 실크 드레스로 골랐다. 카이젠이 선물로 보낸 가봉된 드레스 중 하나였다.
라일락 꽃잎처럼 세련되고 우아한 드레스였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치마 밑단에 조그만 연분홍색 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연보라색 옷감에 분홍색 꽃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모습이 은은하고 기품있어 보였다.
‘야회복을 입어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머리는 정수리 뒤로 느슨하게 틀어 올리고 진주와 금은으로 만들어진 백합 비녀를 꽂았다. 목에는 작은 자수정이 달린 진주 목걸이를 하고, 마지막으로 장미석과 다이아몬드가 달린 귀걸이를 했다.
준비를 끝낸 뒤 화장대 앞에 서서 결과물을 확인했다. 거울 속에는 백금발을 느슨하게 틀어 올린 귀부인이 있었다.
“정말 예쁘다. 공주님 같아!”
치장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갔더니 테오르가 아스텔을 보며 감탄했다.
테오르는 며칠 만에 기운을 회복했다.
충격의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한나는 계속 맛있는 간식거리를 가져다줬고, 할아버지도 테오르를 곁에서 떼놓지 않고 하루 종일 놀아줬다.
두 사람의 과한 보살핌 속에 테오르는 전보다 더 활기차게 지내고 있었다.
“다녀올게. 할아버님 말씀 잘 듣고 먼저 자고 있어.”
“응!”
아스텔은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무도회로 출발했다.
* * *
무도회는 성의 본궁에 있는 연회 홀에서 열렸다.
아스텔을 본궁까지 모셔 가기 위해 시종이 별채로 찾아왔다. 아스텔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성의 중앙에 있는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머무는 서쪽 별채에서 무도회장까지는 꽤 멀었다. 한참을 걸어서야 무도회장으로 쓰이는 커다란 홀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연회 홀의 대리석 문 너머로 환한 빛과 잔잔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늦었나?’
이미 초대된 사람들은 다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스텔은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아스텔의 도착을 알렸다.
“레이디 아스텔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아스텔이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연회 홀 안이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놀라움과 호기심을 담고 일제히 그녀를 바라봤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분이 바로 그…….”
“예, 그래요. 분명히 전 황후라는…….”
순식간에 아스텔은 화제의 중심이 되고 말았다. 마치 생일 파티나 약혼 파티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돌이켜 보면 이혼하자마자 수도를 떠나 시골에 숨어 산 건 좋은 선택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일이 없었으니까.
하긴 화젯거리가 될 만도 했다. 결혼한 지 하루 만에 이혼당한 황후라니.
게다가 6년 동안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황제의 순행에 함께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충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도 남았다.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웠지만 아스텔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여길 떠나면 평생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인데.
아스텔은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연회장의 중심을 지나 창가로 걸어갔다.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줄줄이 따라왔지만 안면이 있는 사람이 없다 보니 먼저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말을 안 걸어주는 게 좋지.’
애초에 춤을 추거나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다.
아스텔은 카이젠이 있는 곳을 찾았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카이젠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지? 설마 참석을 안 한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자리를 이용해 카이젠을 만나서 수많은 사람 앞에서 허락을 얻어내려고 했는데. 정작 카이젠이 오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스텔은 주위를 더 둘러봤지만 물어볼 만한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아는 사람이 몇 명 보이긴 했다. 홀의 저편엔 벨리안이 여러 귀족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저쪽을 보니 좀 불안하네.’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벨리안을 보니 카이젠은 정말 안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젠이 왔으면 귀족들이 어떻게든 인사를 하고 안면을 익히려고 했을 텐데. 모두들 보좌관인 벨리안한테 붙어 있는 걸 보면 역시 카이젠은 참석하지 않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아스텔을 불렀다.
“저, 레스턴 가문의 공녀님이신가요?”
돌아봤더니 풍만한 몸집의 중년 부인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 근처에 사는 슈만 부인입니다.”
슈만 부인이라고 소개하는 걸 보면 이 지역에 사는 기사의 부인인가 보다. 귀족 중엔 백작이나 남작 작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기사 작위만 있는 최하급 귀족이 제일 많았다.
“예전에 친척분의 초대로 수도에 갔을 때 공녀님의 어머님을 뵌 적이 있답니다.”
“저희 어머니를요?”
아스텔은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아스텔의 어머니 제클린은 아스텔을 낳고 며칠 뒤에 죽었기 때문이다.
슈만 부인이 행복한 과거를 회상하듯 말했다.
“얼마나 아름답고 다정한 분이셨는지. 공녀님께선 어머님을 많이 닮으셨네요.”
“감사합니다.”
이런 곳에서 어머니를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아스텔은 조금 놀라긴 했지만 반가웠다.
슈만 부인은 아스텔의 어머니를 만났던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다른 부인들이 불러서 그쪽으로 갔다.
아스텔은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카이젠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설마 무도회가 끝나기 전에는 오겠지?’
“저…….”
그런데 또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실례합니다만, 아스텔 공녀님이신가요?”
“누구신가요?”
연한 은색 머리카락에 하늘색 눈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데 희고 단정한 얼굴에 선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란베르크 기사단장 세르벨 폰 에클렌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스텔 님.”
아스텔은 상대의 신분을 듣고 조금 놀랐다.
“기사단장님이시군요.”
아스텔은 조금 놀랐다.
란베르크 기사단은 서열상으로는 근위 기사단보다 못하지만, 전시엔 근위 기사단보다 더 중요한 전력이었다. 어려 보이는데 실력이 좋은 건가?
‘기사치고는 너무 순해 보이는 인상인데.’
저쪽에서 젊은 영애들 몇 명이 이쪽을 힐끔거리면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저러는 건 아닐 테고, 이 남자를 보는 거겠지.
“기사단장님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북부로 가기 전에 폐하를 알현하고 보고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북부로 가신다고요? 무슨 일이 있나요?”
아스텔의 걱정스럽게 묻자, 세르벨은 얼른 대답했다.
“걱정하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반란을 진압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치안 유지를 위해 순찰을 나가는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하긴 반란이 일어난 곳이니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다른 데서 전쟁이 일어날 기미도 없으니 기사단을 보내놓는 건가 보다.
‘그런데 이 사람 왜 나한테 말을 걸었지?’
의아한 눈길로 봤더니 세르벨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아스텔에게 말했다.
“제 아버님께서 칼렌베르크 후작님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아버님이시라면…….”
“아, 죄송합니다. 군무 대신이신 제럴드 폰 에클렌 백작님이십니다.”
완전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스텔은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수도의 정세가 정말 많이 변했구나. 새삼 변화가 실감이 났다.
과거엔 명문 귀족 출신이 아니면 아무리 공을 많이 세워도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었다. 대신쯤 되는 자리는 전부 대귀족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독점하는 자리였다.
아스텔의 친할아버지는 재상이었고, 아버지도 선대에 국무 대신을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도 한때 군무 대신이었다. 오빠인 프리츠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카이젠은 내전까지 불사하며 대귀족들을 몰아냈고 그 자리를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 넣었다. 이제 대귀족 중에 그나마 작위라도 유지하고 있는 가문은 레스턴 가문뿐이었다.
“아, 아스텔 님. 여기 계셨군요.”
“린든 경.”
처음으로 그녀가 아는 사람이 다가왔다.
근위 기사단장인 린든 경이었다.
“세르벨과 만나셨군요. 안 그래도 소개해 드리려고 했었는데요.”
세르벨도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 둘은 사이가 좋은 모양이었다.
린든이 세르벨에게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여기 있어도 괜찮나? 이제 곧 무도회를 시작할 텐데, 자네 파트너인 레이디께서 자네를 찾고 계시던걸.”
“아, 그렇군요. 실례하겠습니다. 아스텔 님.”
“괜찮아요. 얼른 가보세요.”
세르벨이 사라지자마자 음악소리와 함께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무도회였으니 누군가가 첫 번째 댄스를 춰야 했다. 그 영광은 당연히 황제와 그 파트너에게 돌아가야 할 텐데. 황후 후보라는 플로린은 어머니와 함께 돌아갔고 황제도 없다.
‘카이젠은 정말 안 온 건가?’
“린든 경. 폐하께서는 어디 계신가요?”
“저쪽에 계십니다.”
린든의 시선이 층계 위 2층으로 향했다.
연회 홀이 내려다보이는 2층에 카이젠이 있었다. 카이젠은 황제가 입는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는 제국의 황제다운 위엄과 품위가 느껴졌다.
‘저 옷은 언제나 잘 어울렸지.’
아스텔이 고개를 들자마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쪽을 보고 있었나?’
어째서인지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왜 저러고 있지?’
어쨌든 아스텔은 카이젠이 참석했다는 걸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뒷머리에 와 닿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 * *
카이젠은 연회장의 위층에 있었다.
이곳 관리인과 귀족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귀찮게 쫓아왔다.
카이젠은 귀찮은 것들을 피하려고 연회장의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는 층계 위에서 아래층에 모인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회장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아스텔에게 멈춰 있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있어도 아스텔에게 제일 먼저 눈길이 갔다.
아스텔은 연회장의 한쪽 벽에 서 있었다. 카이젠은 연보라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화사하게 치장한 아스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섬세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얼굴, 느슨하게 틀어 올린 백금발과 우아한 선을 그려내는 드레스. 아스텔은 그가 여태껏 본 어떤 귀부인보다도 아름답고 우아했다.
카이젠은 자신이 아스텔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비 오는 사냥 별장에서 녹색 드레스를 입고 나온 아스텔을 봤을 때부터, 아니, 6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부터 아스텔은 그의 마음을 끌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인지는 카이젠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6년 전에 이혼한 전 부인에게 다시 끌리다니.
두 사람은 열 살 때부터 약혼 관계였다. 10년 동안 약혼 관계로 살면서도 생겨나지 않았던 감정이 이혼 후 6년이 더 지나서야 생겨난 것이다.
그때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스텔에게 누군가가 다가갔다. 란베르크 기사단장 세르벨이었다. 이어서 린든이 아스텔에게 다가가서 뭔가를 말했다. 아스텔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서렸다.
카이젠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가 아래층에 모습을 드러내자 순식간에 음악이 사라졌다.
카이젠은 홀의 중앙을 가로질러서 아스텔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숨죽인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놀란 아스텔이 뒤늦게 몸을 돌렸다.
카이젠은 정중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아스텔. 내게 첫 번째 파트너가 될 영광을 주겠나?”
* * *
아스텔은 오랜만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궁정에서 무도회가 있는 날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던 것 같다. 차가운 빗줄기가 금은을 세공해 넣은 유리창을 쉴 새 없이 때렸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정원과 달리, 무도회가 열리는 연회 홀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빗소리를 가리는 감미로운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목소리. 숄과 레이스 사이로 보이는 빛나는 보석들.
천장에는 별빛처럼 빛나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드넓은 무도회장에 화려한 빛을 뿌렸다.
열아홉 살의 아스텔은 그 중심에 있었다.
아스텔은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궁정의 행사를 주관했다. 그날은 무도회를 준비하기 위해 새벽부터 황궁에 들어와 한시도 쉬지 못하고 시녀들과 시종들을 지휘했다.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지친 얼굴에 백분을 바르고 저택에서 가져온 화려한 야회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궁정의 예비 안주인으로서 무도회에 등장했다.
하지만 첫 번째 댄스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했다. 사냥을 나갔던 카이젠이 시간보다 늦게 돌아왔기 때문에.
아스텔은 한 시간여를 기다렸지만 카이젠은 오지 않았다. 그냥 시작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대기하던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미뉴에트가 흘러나왔다. 카이젠은 그 후 댄스 타임이 다섯 번쯤 돌아간 다음에야 무도회장에 나타났다.
‘전하.’
아스텔은 창가에 서 있는 카이젠에게 다가갔다. 말없이 창밖으로 내다보던 그가 몸을 돌렸다.
‘전하. 뭔가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스텔.’
약간 소년티가 남은 카이젠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카이젠은 무뚝뚝한 성격이었지만 아스텔에겐 이렇게 가끔씩 다정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아스텔은 과거를 회고할 때마다 차라리 그가 처음부터 매정하게 굴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 훨씬 나았겠지.’
차라리 솔직하게 혐오감을 드러냈으면 아스텔은 카이젠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헛된 희망에 매달려 인생을 바치지도 않았으리라.
카이젠은 다정하게 웃으며 아스텔의 손을 잡았다.
‘아니. 그냥 피곤해서 그래.’
아스텔은 뒤따라온 시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녀가 작은 트레이에 찻잔을 받쳐왔다. 맑은 흰 찻잔 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담겨 있었다.
‘안 그래도 피곤하실 듯해서 미리 따뜻한 약차를 준비해 놨습니다.’
‘당신은 정말 세심하군.’
카이젠은 아스텔을 칭찬하며 찻잔을 받아 들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춤추는 걸 좋아하지 않아.’
따뜻한 차를 마신 뒤 그가 아스텔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나가서 즐겨도 돼. 이런 걸 좋아하잖아.’
‘저를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저도…….’
저도 무도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 전하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둘이 있는 곳으로 카이젠의 시종이 달려왔기 때문이다. 시종이 그의 귀에 대고 뭔가를 말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가봐야 할 것 같군.’
그는 아스텔의 손을 놓고 돌아섰다.
‘다시 돌아올게. 기다려 줘.’
‘예, 전하.’
아스텔은 멀어져 가는 카이젠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다른 남자와 춤을 추면 당장 그날 밤부터 사교계에 예비 황태자비의 행실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 것이다. 카이젠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별로 관심이 없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스텔은 내색하지 않고 참았다. 언제나처럼.
창밖에서 맑은 빗소리가 들렸다.
밤하늘이 담긴 유리창에 연회 홀의 환한 불빛과 춤을 추는 사람들이 비쳤다. 화려한 빛 사이로 차가운 빗물이 흘러내렸다.
한밤의 정원은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물안개가 감도는 정원의 모습이 연한 잿빛으로 흐릿하게 보였다.
아스텔은 무도회가 끝나고 시종들이 주변을 치울 때까지 무도회장에 머물렀다. 하지만 밤새 기다려도 카이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황공하옵니다만, 폐하.”
그리고 지금, 아스텔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용서를 구했다.
“그동안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춤이 능숙하지 못합니다. 이대로는 춤을 추다가 무례를 범하게 될 것 같아 감히 폐하의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표정부터 말투까지 정중하기 그지없었지만 분명한 거절이었다.
연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어느 누구도 소리 내서 말하지 못했지만 엄청나게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사람들을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던 황제가 난데없이 이혼한 전 황후에게 춤 신청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심지어 전 황후는 황제의 요청을 차갑게 거절했다.
사실 아스텔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이 순간에 카이젠을 만날 생각은 없었다.
허락을 구하는 건 무도회의 중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을 때 하려고 했었다.
사람들 앞에서 허락을 구할 생각에 드레스도 받고 치장하고 무도회에도 왔지만, 카이젠과 춤까지 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말 싫다. 이런 상황.’
그러나 원인 제공자인 카이젠은 아스텔을 똑바로 노려보며 내뱉었다.
“실력 같은 건 상관없어.”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감히 내 손을 거절하는 건가?”
아스텔은 우아하게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확고한 거절이었다.
사실 아스텔은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다. 테오르를 보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상황이 꼬이고 있었다.
‘카이젠이 화를 내고 나가 버리면 어쩌지?’
다행히 카이젠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스텔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내가 이렇게 간절히 부탁해도 안 되겠나?”
“…….”
아스텔은 그의 붉은 눈에 감도는 진지한 감정을 보고 조금 놀랐다. 화를 내고 나가 버릴 줄 알았는데. 카이젠은 아스텔이 수락해 주지 않으면 밤새도록 포기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폐하를 거절하다니…….”
“세상에, 이런 불경한 일이…….”
아스텔은 당혹스러운 기분에 입술을 깨물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황제가 저렇게 말하는데 언제까지나 거절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뭣보다 테오르의 일을 허락받아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제가 폐하의 발을 밟을지도 모릅니다.”
“실컷 밟아도 상관없어.”
‘정말 밟아주고 싶네.’
아스텔은 카이젠이 내민 손 위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고맙군.”
카이젠이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텔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의 한가운데로 나갔다. 가벼운 정적 속에 감미로운 선율이 천천히 새어 나왔다. 왈츠 음악이었다.
‘하필이면…….’
아스텔은 이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왈츠는 다른 춤과 달리 두 사람이 가깝게 밀착된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댄스가 시작되었다.
음악이 시작되는 순간 카이젠의 손이 아스텔을 강하게 이끌었다. 아스텔도 차분하고 여유롭게 스텝을 밟았다.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기품을 자아냈다.
“당신 정말 잘 추는군.”
카이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감탄하듯 속삭였다.
아스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텔은 아주 어릴 때부터 댄스 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매일매일 춤연습을 했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발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몇 번씩 다듬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한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이 남자 때문이었지.’
맞잡은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함께 가까이 밀착된 몸에서 카이젠의 체향이 느껴졌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익숙한 체향이었다.
‘이 남자는 내가 저 한마디를 듣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짐작도 못 하겠지.
그러니까 이제 와서 춤을 추자고 말할 수 있는 거겠지.
춤을 추는 내내 카이젠은 아스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텔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아스텔을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저 공녀님은 정말 기품 있게 춤을 추시네요.”
“역시 황후였던 분은 다르네요…….”
수군거리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마지막 스텝과 함께 음악이 끝이 났다.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고 돌아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스텔은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발코니로 다가가자 주변에 모여 있던 귀족들의 분위기가 약간 달라졌다.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더니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여태까지 말 한마디 걸지 않던 귀족들이 아스텔의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춤추시는 걸 봤습니다.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다른 춤에는 참여하지 않으시나요?”
말도 안 걸고 수군거릴 때는 언제고 다들 아스텔의 비위를 맞추려고 눈치를 봤다. 황제가 춤을 추자고 간청하는 걸 봤으니 굽신거릴 만도 했다만.
“감사합니다만 어지러워서 잠시 쉬려고요.”
아스텔은 그들의 인사를 여유롭게 무시하고 돌아섰다.
무도회장 안에는 다시 다음 댄스 타임이 되어 있었다. 달콤한 선율이 연회 홀에 감미롭게 울려 퍼졌다. 홀의 넓은 중앙에는 쌍쌍이 짝을 지어 춤을 추는 이들로 현란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카이젠은 시종이 가져다준 술잔을 받아 들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황제의 표정이 하도 안 좋아서 많이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지금이 기회로군.’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랬다가 카이젠이 다른 데로 가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아스텔은 연회 홀을 가로질러서 카이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황제 옆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놀라며 비켜섰다. 춤을 추러 나가지 않고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전부 아스텔을 바라봤다.
술잔을 기울이던 카이젠은 뒤늦게 아스텔에게 몸을 돌렸다.
“폐하.”
“아스텔? 무슨 일이지?”
아스텔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카이젠의 앞에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서두를 꺼냈다.
“부디 제국의 주인인 폐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긴히 간청드립니다.”
이제 연회장 안의 모든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젠의 잘생긴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감돌았다. 하긴 놀랄 만도 할 것이다. 방금 전에 춤이 끝나자마자 쌀쌀맞게 돌아서 놓고 갑자기 부탁이 있다고 다가왔으니.
“무슨 일이지?”
원래는 무도회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 부탁하려고 했다. 피곤하고 지루해진 카이젠이 무도회장을 떠나기 직전에 부탁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카이젠이 춤 신청을 하는 바람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여기 오래 머물다가는 또 무슨 이상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
아스텔은 그냥 지금 당장 카이젠의 허락을 얻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스텔은 천천히 카이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폐하, 제 외할아버님이신 칼렌베르크 후작님은 저 때문에 먼 길을 함께 오느라 많이 지치셨습니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계시느라 힘드신지 얼마 전부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아스텔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었다.
“많이 편찮으셔서 병석에 누워 계십니다. 모두 저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애처로운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쫓겨난 전 황후가 황제 앞에서 늙은 외조부가 아프다고 울고 있다. 충분히 불쌍해 보이는 장면이었다. 지켜보던 귀족들이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후작님께서 많이 편찮으십니까?”
“저런, 연세가 많으실 텐데…….”
수도에 살지는 않아도 귀족들은 대부분 할아버지의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들이었다. 약 같은 걸 보내주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던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그가 두 손으로 아스텔의 어깨를 감싸 쥐고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다정하게 위로했다.
“자책하지 마. 그게 왜 당신 탓이겠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다정한 태도였다. 조금 지나치게 다정해서 문제일 정도였다만.
두 사람이 너무 가깝게 밀착되자 또다시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스텔은 살짝 몸을 뒤로 빼서 카이젠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다.
“다행히 폐하께서 살펴주신 덕분에 할아버님께서 많이 회복되셨습니다. 부디 간청드립니다, 폐하. 할아버님과 어린 조카를 먼저 저택으로 돌려보내면 안 될까요?”
전 황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놀라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는 부탁을 하는 걸 보고 흥미를 잃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탁이었다. 모두들 당연히 황제가 허락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스텔이 왜 황제의 순행에 따라왔는지 이미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황태후의 유언과 관련된 일이라는 건 알려졌다.
죄를 지어서 끌려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데려갈 필요도 없는 노인과 아이는 돌려보내 줘도 상관없다. 사실 황제 입장에서는 그 두 사람은 안 데려가는 게 더 좋았다. 데려가 봤자 걸리적거리기만 할 테니까.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면서 황제가 아스텔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짐작했다. 아스텔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카이젠이 단호하게 대답했을 때,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예?”
아스텔은 놀라서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방금 전까지 다정하게 아스텔을 위로하던 카이젠은 석상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아스텔을 직시하는 붉은 눈에 분노가 아른거렸다.
‘아니…… 왜 화를 내는 거지?’
“폐하, 할아버님도 그렇지만 어린 테오르도 얼마 전에 열병을 앓아서…….”
“그래, 둘 다 몸도 안 좋은데 굳이 먼 길을 돌려보내야겠나.”
짜증을 눌러 참는 듯한 말투로 카이젠이 아스텔의 말을 반박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수도에 가서 제대로 된 의사에게 보이고 치료받게 하는 게 좋겠어. 이참에 주치의도 구하고 아이의 가정교사도 알아보는 게 좋지 않나 싶은데.”
“폐하, 하지만.”
“그만.”
카이젠은 전에 없이 엄중하게 아스텔의 말을 가로막았다. 매서운 눈길이 아스텔을 직시했다.
“이건 명령이야.”
일말의 반박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
아스텔은 황망한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당황하고 있었다. 왜 허락을 안 해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듣던 벨리안도 카이젠에게 왜 허락해 주지 않으시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황제의 기분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아무도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이 상황을 관망하기만 했다.
카이젠은 강렬한 시선으로 아스텔을 노려보다가 뒤돌아서 연회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스텔은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사라지고 나자 사람들이 멍하니 서 있는 아스텔에게 위로를 건네기 시작했다.
“레이디,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후작님께서는 쾌차하실 겁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스텔은 사람들의 위로를 대충 받다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함께 온 시종이 별채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아스텔은 차가운 밤이슬이 내린 돌을 밟으며 정원 길을 걸었다.
어둠이 내린 정원엔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가슴속은 심란하게 들끓고 있었다만.
‘아니, 대체 왜?’
아스텔은 어이가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고 거부한 걸까. 도대체 자신이 말한 어떤 부분에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내용이 있었던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태후 전하의 유언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아스텔 자신만 수도로 가면 될 텐데, 할아버지와 테오르는 왜 데려가려고 하는 건데?
단둘이 있을 때 얘기하면 분명 이상한 반응이 나올 것 같다는 예상은 했었다. 그래서 무도회장을 선택한 거였으니까.
설마하니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억지를 부리고 나가 버릴 줄은 몰랐다. 보는 눈이 많으면 황제답게 행동할 줄 알았지. 이렇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집을 부릴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고 화도 났다. 너무 기가 막혀서 이제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할 기운도 없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다실 근처였다. 달빛 아래에 다실의 연청색 지붕이 보였다. 아스텔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연회장을 빠져나와 시원한 공기를 마시니까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아스텔은 잠시 아무도 없는 다실 근처에서 답답한 기분을 풀어냈다.
저녁 무렵부터 답답한 치장을 하고 음식 냄새, 술 냄새를 맡고 있었더니 머리가 아팠다. 정원의 풀 냄새와 나무 냄새를 맡으니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상쾌한 바람결을 타고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쳐 갔다. 아스텔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시선을 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하얗게 빛나는 달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새카만 밤하늘을 뒤덮은 새하얀 꽃잎이 보였다.
아카시아였다. 하늘 높이 자라난 아카시아 나무가 향기로운 하얀 꽃을 다실 위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새털같이 가벼운 꽃잎 사이로 밤바람이 스쳐 갔다. 잔잔한 바람이 꽃가지를 흔들 때마다 층층이 매달린 꽃송이가 풍경처럼 흔들렸다. 새하얀 아카시아 향기가 조용히 바람결에 스며들었다.
아스텔은 그 순백의 꽃을 보면서 분노를 삭였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어쩌면 테오르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 앞에서 이렇게 화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순간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텔.”
놀라서 시선을 내리자 어두운 그늘 안에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카이젠이었다. 그가 아카시아 아래에 서 있었다.
“잠시 얘기 좀 하지.”
달빛 아래에서 보는 그의 붉은 눈은 어두운 흑적색이었다. 그 눈엔 여전히 이글거리는 분노가 감돌았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데요?”
화가 나는 건 아스텔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온 거였군.”
카이젠은 아스텔 쪽으로 다가오면서 어이없다는 투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걸 말하려고 온 거였어. 당신 나한테 그 허락을 받으려고 무도회에 참석하겠다고 한 거였지?”
물론 그랬다. 그렇지 않으면 무도회 따위에 참석할 리가 있나.
아스텔은 순간 카이젠이 화를 낸 이유가 뭔지 알아차렸다. 아스텔 자신이 숨은 의도를 가지고 무도회에 참석했다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테오르와 할아버지를 돌려보내 달라는 요청도 거부한 건가.
답을 알아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하.”
카이젠은 실소를 머금고 따지듯이 물었다.
“당신 할아버지하고 애를 돌려보내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하지?”
“폐하께서는 테오르와 할아버님을 왜 수도에 데려가려고 하시는 건데요? 왜 그 두 사람이 함께 가길 원하십니까?”
정곡을 찔린 아스텔은 반대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애와 노인네를 데려가지 않으면 당신은 수도의 일이 끝나자마자 돌아가 버릴 테니까.”
“제가 제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게 이상한가요?”
“당신 집이라고? 당신은 후작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거잖아!”
카이젠도 아스텔만큼이나 답답하고 화가 났다. 아스텔과 달리 카이젠은 자기가 왜 화가 나는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긴 했지만.
“후작의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아니, 언제까지 어린애를 돌봐주면서 그 집에 살 건데?”
카이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를 설명하기 위해 테오르를 들먹였다.
“테오르가 더 나이가 들면? 그 애가 나중에 결혼해서 새 후작 부인을 데려오면? 그때도 당신은 그 집에서 군식구처럼 눈치를 보면서 살 건가?”
자기가 내뱉으면서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스텔도 너무 기가 막혀서 잠시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금 내 미래를 걱정해서 화가 난다는 거야? 그것도 한 20년쯤 뒤의 일을?’
“제 미래를 그렇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제가 할아버님댁에서 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시는 건가요?”
“그래, 난 당신이 수도에……!”
소리를 지르던 카이젠은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수도에 살길 바랐다. 아스텔을 계속 손닿는 곳에 두고 싶었다.
이 순행이 끝나고 수도에 돌아가면 아스텔은 다시 떠나 버릴 것이다. 머나먼 동부의 끝자락으로, 그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다.
어쩌면 평생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제가 수도에 살길 바라신다고요?”
아스텔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요?”
카이젠 자신도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아스텔과 관련될 때마다 카이젠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스텔이 그렇게 묻는 순간 카이젠은 비로소 이유를 찾았다.
자신이 왜 그렇게 아스텔에게 신경을 썼는지.
무도회에 참석한 아스텔을 보고 왜 그렇게 기뻤으며, 아스텔이 떠나 버린다는 걸 상상할 때마다 왜 그렇게 괴로웠는지를.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당신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아스텔은 잠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지?’
차가운 달빛이 하얀 꽃잎을 비추고 있었다. 어두운 다실 근처엔 진한 아카시아 향이 상쾌하게 감돌았다.
두 사람은 그 그림 같은 밤의 풍경 속에 나란히 서 있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감도는 건 무거운 정적이었다.
“제가 다시 폐하의 곁에 머물기를 바라세요?”
카이젠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스텔을 응시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애틋하게 고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그래.”
그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엔 가슴속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내 곁에 있기를 바라.”
구구절절 마음을 표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진심으로 애틋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다리며 마음 졸일 필요는 없었다.
곧바로 아스텔이 차갑게 내뱉었다.
“싫습니다.”
달빛 아래로 드러난 아스텔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고 싸늘했다.
“저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폐하의 곁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담담하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아스텔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제가 폐하의 곁에 머물기를 바라신다고요?”
하. 정말 기가 막힌 소리였다.
아마도 6년 전이었다면 저런 말을 듣고 행복과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분명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행복했겠지. 그래. 죽어도 이 남자 곁에서 떠나고 싶지 않던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때는 이 남자에게 버림받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멍청하게도 이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폐하께서는 6년 전에 제게 떠나라고 하셨지요.”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남자에게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아스텔의 세상은 그날 무너져 버렸다.
이혼하자는 말을 들었을 땐 차라리 죽고 싶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아스텔이 죽어버리면 카이젠은 신혼 첫날에 아내를 죽게 만든 냉혹한 황제가 될 테니까. 그는 아스텔이 그냥 굴욕을 견디면서 떠나 버리길 바랐다.
“저는 폐하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이혼을 받아들이고 미련 없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스텔은 카이젠이 원하는 대로 따랐다. 그에 대한 마음을 접고 굴욕을 참으며 영원히 떠났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아스텔이 어떤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카이젠의 곁에 머물기를 원했던 순간, 카이젠은 아스텔을 버렸다.
그리고 아스텔이 모든 감정을 버리고 그에게 무관심해진 지금에 와서야,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수도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닌가. 아스텔은 실소를 머금고 차갑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뭐든 폐하의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세상에는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카이젠은 이제 와서 아스텔에게 보답을 해주면 그동안의 일이 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그 정도로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
카이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스텔은 그를 바라보다가 무릎을 굽히고 빈틈없는 예절로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물러갑니다.”
아스텔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 * *
수도에는 수많은 대저택이 있었지만 그중에 가장 화려하고 가장 웅장한 저택은 레스턴 공작가의 저택이었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유리창을 뒤흔들었다. 장작을 태우는 불꽃이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렸다.
서재에 앉은 레스턴 공작은 어두운 그림자 속에 비치는 것들을 주시하며 물었다.
“황제는?”
곁에 서 있던 남자가 소리 없이 조용히 다가와서 대답했다.
“덴츠 성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예정보다 빠르군.”
이쪽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리면 시골 성에서 미적대면서 시간을 끌 줄 알았는데.
공작은 자신이 포섭한 시에테가 황제의 첩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통해 반란을 준비하는 것처럼 움직여서 황제에게 정보가 들어가게 했다. 그렇게 하면 카이젠은 공작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순행을 질질 끌면서 수도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어디 진짜 함정에 빠진 사람이 누구인지 보자.’
공작은 곁에 있는 수하에게 명령했다.
“덴츠 성에 대기하다가 기회가 생기면 황제를 급습해라.”
공작은 애초부터 반란을 일으킬 생각 따위 없었다.
처음부터 그가 노리는 건 암살이었다. 황제가 수도의 황궁에 있을 때는 좀처럼 암살의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순행 중이라면 근위대는 황궁에서만큼 황제를 보호할 수 없다. 언제고 빈틈이 생기게 마련이다.
“저, 그런데 공녀님께서…….”
“응?”
“공녀님께서 황제와 함께 계십니다.”
공작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공녀가 누구인지 생각하느라 시간이 좀 걸려서였다.
“아스텔은 신경 쓸 것 없어.”
감히 애비 명령을 거역하고 떠나 버린 배은망덕한 계집애.
공작은 불길 너머를 바라보며 하나뿐인 딸을 생각하고 있었다. 불길을 바라보는 눈이 한밤의 추위보다 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스텔은 유용한 패였다. 6년 전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공작은 철들 무렵부터 자기 딸을 황후로 올려서 외손자를 황제로 만들고 섭정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혈통의 딸을 낳기 위해 유서 깊은 후작 가문의 딸을 힘들게 데려다가 결혼했다.
계획대로 그 아내에게서 아름다운 딸을 얻고 황태자와 약혼시켰을 때만 해도 모든 게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순식간에 시궁창에 처박혔다. 선황제가 급사하고 황제가 된 카이젠이 아스텔을 내쫓아 버렸기 때문에.
‘차라리 아스텔을 일찌감치 고분고분한 선황제에게 시집보내서 빨리 아이를 낳게 해야 했는데.’
그런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다. 순하고 어리석었던 선대 황제는 죽어버렸고, 그 자리는 냉혹하고 영리한 카이젠이 차지했다. 후회해봤자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스텔은 이혼당하고 쫓겨난 주제에 집을 나가서 연락도 끊어버렸다. 카이젠이 황태후의 유언 때문에 그 애를 찾기 전까지 공작은 아스텔의 생사도 알지 못했다. 알고 보니 아스텔은 6년 동안 외조부의 집에 빌붙어 살았다고 한다.
“그래, 그 늙은이와 있을 줄 알았어.”
그 애가 갈 만한 데가 거기밖에 더 있나.
사실 카이젠이 아스텔의 행방을 물었을 때 제일 먼저 그쪽이 떠올랐지만, 카이젠을 도와주기 싫어서 모른다고 잡아뗐었다. 필요하면 제가 알아서 찾으라지.
듣기로는 크로이첸 가문의 딸 중 한 명이 아스텔과 싸우다가 감옥에 갇혔다던데.
그 일로 크로이첸 후작이 죽상을 하고 다니는 건 볼만했다.
그자는 자기 둘째 딸을 황후로 밀어 넣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래봤자 카이젠은 그 집 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뭐, 카이젠은 원래 여자들에게 매정했지만.
이번에 아스텔 편을 들어준 것도 황태후의 유언장 때문에 아스텔의 비위를 맞춰주는 거겠지. 크로이첸네 딸은 그것도 모르고 시비를 걸다가 당한 걸 테고.
공작은 아스텔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큰아들이자 아스텔의 오빠인 프리츠가 뒤늦게 아스텔이 떠나게 내버려 둔 걸 후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츠는 자신이 여동생을 감싸줬어야 했다고 맨날 땅을 파고 후회하더니 이제는 아버지인 공작에게도 화살을 돌렸다. 그래도 지난 6년간은 그럭저럭 잘 지냈는데 아스텔이 다시 나타나자 요즘엔 부자 관계가 최악이었다.
프리츠는 틈만 나면 아스텔 얘기로 공작을 비난했다.
‘자식이라고 낳아서 길러봤자 다 소용없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공작도 아들만큼이나 그때의 일을 후회했다.
아스텔을 그렇게 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계집애들은 언제나 쓸모가 있는 법이다. 아스텔은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공녀였다.
‘쓸 만한 귀족한테 팔아먹었어야 했는데. 이혼당했어도 그 애의 혈통을 원하는 놈들이 있었을 텐데.’
예전 같았으면 가문의 적녀를 아무한테나 보내서 레스턴의 이름을 수치스럽게 하느니 차라리 아스텔을 수녀원에 처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이었다.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스텔은 아버지인 공작과 인연을 끓고 떠나 버렸다. 재혼은커녕 이제 와서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라고 해도 그 애 성격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애를 설득할 만한 게 있기는 한데.’
죽은 황태후는 유언장만 남긴 게 아니었다. 황제 몰래 아스텔에게 몇 가지 유품도 남겼다.
아스텔에게 직접 줄 수가 없으니 공작저에 몰래 보내면서 나중에 아스텔을 찾으면 전해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죽었다. 대부분 그림이나 책 같은 잡동사니였지만 보석도 좀 있었다. 공작은 황태후가 죽자마자 그 물건들을 팔아버릴까 했지만 나중을 위해서 남겨두기로 했다.
아스텔은 그걸 받고 싶어 할 테니까. 그걸 미끼로 아스텔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고작 유품을 받겠다고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걸 받아들이지는 않겠지. 그 멍청한 계집애는 카이젠을 좋아하니까.’
공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아스텔은 이미 나와 인연을 끊었으니 신경 쓰지 마라. 만일의 상황이 생기면 아스텔을 황제와 같이 죽여도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