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적의
침묵을 지키던 한나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스텔에게 눈짓을 했다. 아스텔은 한나와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한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텔 님, 제가 테오르 도련님을 찾아보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
아스텔은 남은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도 흩어져서 아이를 찾아봐라.”
시녀들을 쫓아 보낸 뒤 아스텔은 한나와 함께 정원 길을 달려갔다.
“테오르! 어디 있니?”
“테오르 도련님!”
두 사람은 테오르를 부르며 정원 길을 따라갔다. 그러나 테오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원을 한참 걷다 보니 저 멀리에 사람들이 보였다. 파빌리온이 있는 길목이었다. 그 입구 근처에 시녀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일까?”
“글쎄요…….”
한나도 의아한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놀란 시녀들이 자리를 비키면서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이냐?”
시녀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무슨 일인지 알렸다.
“파빌리온 안에 있던 장식 도자기가 깨졌습니다.”
“뭐?”
평소라면 그런 일이 있나 보다 하고 무시했을 텐데 지금은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테오르가 사라진 상황에 도자기가 깨졌다니.
‘혹시 전시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스텔은 파빌리온 안으로 들어갔다. 한나도 뒤따라갔다.
다른 도자기들은 전에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는데 정중앙에 자랑스럽게 놓여 있던, 바다처럼 푸른 바탕에 금으로 꽃을 그려 넣은 그 호사스러운 도자기만 없었다.
아스텔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푸른 조각들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이런…… 완전히 박살 나버렸네.’
도자기 조각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테오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테오르를 본 사람 있어? 다섯 살 정도 된 어린 남자아이야.”
모여 있던 시녀들은 다들 못 봤다고 대답했다.
아스텔이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정원으로 나가려는 찰나였다.
“아스텔 고모!”
그때 테오르가 아스텔을 찾아서 파빌리온 안으로 들어왔다.
“테오르? 어디 있었니?”
놀란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았다. 뒤이어 익숙한 시녀가 들어왔다. 별채에 있던 시녀들 중 한명이었다.
“아스텔 님께서 별채 밖으로 나가신 뒤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얌전히 품에 안긴 테오르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별채에 아스텔 고모가 없어서 찾으러 왔어.”
아스텔은 테오르를 품에 안고 물었다.
“테오르. 한참 찾았잖아. 어디에 갔었어?”
“나는 정원에 있었는데.”
“저, 레이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청소 담당 시녀가 아스텔에게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지?”
“저, 그게.......”
그 시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백했다.
“저 도련님이 도자기를 밀어서 넘어뜨리는 걸 제 눈으로 분명히 봤습니다.”
시녀의 손가락이 테오르를 가리키고 있었다.
* * *
“테오르. 그게 진짜니?”
놀란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물었다.
“아니야!”
테오르는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어깨를 잡고 다정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실수였으면 화내지 않을 테니까 솔직하게 얘기해.”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 분명하게 얘기했지만…….
그래도 테오르는 아직 어린애였다.
혹시라도 호기심에 손을 댔다가 떨어뜨려서 깨졌을 수도 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해 줬으면 싶었는데 테오르는 절대 아니라고 우겼다.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나 오늘은 여기 온 적 없어.”
모두의 시선이 다시 청소 담당 시녀에게 향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린 도련님께서 개와 함께 들어와서 도자기를 만지다가 깨뜨리셨습니다.”
시녀는 테오르를 똑바로 보며 다시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도자기가 깨지니까 놀라서 나가 버리셨습니다. 제가 분명히 봤습니다.”
“여기는 선대 황제 폐하의 수집품이 있는 곳이야. 왜 유리문을 잠가두지 않았지?”
아스텔이 조용히 묻자 시녀는 고개를 조아리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 그게…… 오늘 청소를 하는 날이라…….”
시녀는 청소하느라 잠시 열어놨는데 그사이에 일이 벌어졌다며 용서를 빌었다.
하긴 예전에 테오르와 왔을 때도 그랬지. 청소하느라 문을 열어놓고 있던데.
“하지만 분명히 도련님께서 도자기를 깨뜨리셨습니다.”
시녀는 다시 한번 그렇게 우겼다.
아스텔은 한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아이를 돌봐주던 시녀는 이상한 목소리를 듣고 자리를 비웠는데 그사이에 전시실에 있던 도자기가 깨졌다.
청소하던 시녀는 아이가 깨뜨렸다는 걸 봤다고 하고 있고.
뭔가 평범하지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함정 같은데.’
함정치고는 굉장히 조잡했다. 쓸데없는 정성이랄까.
‘어린애를 모함해서 함정에 빠뜨려 봤자 뭘 얻겠다고?’
한 가지 얻을 게 있기는 했다.
테오르에게 누명을 씌우면 아스텔이 난처해진다. 선대 황제의 수집품을 망가뜨렸으니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벌을 받지 않아도 최소한 도자기 가격은 배상해야 할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해 낼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작부인의 짓이겠지.’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물었다.
“테오르. 혼자서 어디에 있었던 건지 말해줄 수 있니?”
“나는…….”
테오르는 무심코 대답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 폐하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말한 것만 비밀로 하라고 했었는데.
어디서 만났는지도 비밀로 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비밀이고 어디서부터 비밀이 아닌지 구분 짓기 어려웠다. 말한 것만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만났다는 걸 말하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어볼 텐데.
테오르가 속으로 그렇게 갈등하고 있을 때 아스텔은 테오르의 손목과 블린의 털에 묻어 있는 노란 가루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분명 꽃가루였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향기가 나는 꽃가루다.
토카르 꽃. 분명 그 꽃의 꽃가루였다.
그걸 본 아스텔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토카르 꽃이 있는 화원에 갔었구나.”
“앗, 어떻게 알았어?”
“여기 꽃가루가 묻어 있잖니.”
테오르의 소매를 뒤집어서 모두가 볼 수 있게 했다.
“아이가 화원에 갔었던 모양이네. 여기 꽃가루가 묻어 있어.”
파빌리온에서 화원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본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빙 돌아서 가야 했다.
”아이 혼자 도자기를 깨뜨리고 그런 먼길을 달려갔다가 다시 빙 돌아서 이곳으로 왔다고?”
“그, 그게…….”
시녀는 어물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아스텔.”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더니 카이젠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파빌리온 안에 있던 시녀들은 물론이고 문 근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녀들까지 모두 일사불란하게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무슨 일이지?”
아스텔은 그에게 예를 갖추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곳에 있던 도자기가 깨졌는데 이 시녀가 테오르가 도자기를 깨뜨리는 걸 봤다고 합니다.”
카이젠의 시선이 바닥에 깨진 도자기 파편과 그 옆에 무릎 꿇고 있는 시녀.
그리고 아스텔과 테오르에게 닿았다.
“테오르는 화원에서부터 계속 나와 함께 있었지.”
“그랬습니까?”
“그래. 화원에서 테오르를 만났고 내가 다실까지 데려다줬는데 당신은 거기 없더군.”
본궁에 계셔야 하는 분이 뭣 하러 화원까지 왔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 그걸 물어볼 상황은 아니었다.
아스텔은 다시 테오르에게 물었다.
“테오르. 그게 정말이니?”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테오르도 카이젠이 나타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폐하가 나를 구해줬어.”
“구해줬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카이젠이 테오르 대신 대답했다.
“테오르가 말하길 정원에서 낯선 시녀가 자신을 붙잡으려고 했다는데.”
“뭐라고요? 누가…… 어떤 시녀가요?”
아스텔이 경악하는 걸 보고 카이젠은 안심하라며 말했다.
“그 시녀가 누군지 찾으라고 명령하고 오는 길이야.”
카이젠은 시녀들이 곧 도착할 거라고 말했다. 아스텔은 그 틈에 테오르를 감싸 안은 채 아이에게 부탁했다.
“테오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응.”
테오르는 모든 것을 순순히 말해줬다.
아스텔은 아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테오르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 이제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문밖에서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 너머로 병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병사들 뒤로 줄줄이 걸어오는 시녀들도 보였다.
“모두 밖으로 나와라.”
정원으로 나가자 파빌리온의 문 앞에 있는 잔디밭 위에 시녀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도합 서른 명은 되어 보였다.
카이젠은 파빌리온 안에 있던 시녀들도 그들과 함께 서게 했다.
“폐하, 이건…….”
“그 시간에 자리를 비웠던, 근처에서 목격된 시녀들을 전부 불러온 거야.”
카이젠은 짤막하게 설명하며 테오르에게 다가갔다.
“너를 잡으려고 했던 시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겠느냐?”
시녀들은 모두들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똑같은 옷을 입고 서 있는 수많은 시녀 중에 테오르가 한 명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요.”
빨간 머리의 조그만 시녀를.
“정말 확실한 거니?”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다시 물었다.
“응. 맞아. 저 누나야.”
테오르는 확신에 찬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사람이 그 시녀를 바라보았다.
지목당한 시녀는 당황했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스텔은 시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시녀는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시녀를 바라보던 아스텔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분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치맛단의 뒷부분을 들어보겠어?”
“치맛단의 뒷부분을요?”
“그래.”
궁정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치맛단이 바닥에 살짝 끌리는 드레스를 입는다.
사실상 궁정의 귀부인들은 누구나 그런 옷을 입었다. 높은 귀부인들은 치마가 뒤로 질질 끌리는 드레스를 입고 궁정에 들어왔다. 시녀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치마의 뒤쪽을 살짝 길게 해서 입었다.
시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뒤돌아서 치맛단을 살짝 걷어 보였다. 하얀 패티코트가 드러났다. 걷어 올린 치맛단은 아주 깨끗했다.
“옷을 갈아입었구나.”
길게 끌리는 치마는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바닥에 끌리는 치맛단은 금방 더러워진다. 이렇게 깨끗한 치마는 얼마 전에 갈아입은 새 옷이라는 뜻이었다.
시녀들이 입는 옷은 전부 궁정에서 지급된다. 각자 필요한 만큼만 지급되기 때문에 여벌 옷이 넉넉하지 않았다. 특별히 옷이 더러워지지 않는 한, 아침에 입고 나온 옷을 일하는 도중에 갈아입는 일은 없다.
아스텔은 돌아서서 카이젠을 향했다.
“폐하, 시녀가 테오르를 붙잡으려고 할 때 블린이 시녀의 옷소매를 물어뜯었다고 했습니다.”
“가, 갈아입지 않았습니다.”
빨간 머리 시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아스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로 갈아입은 옷이 아니면 치맛단이 왜 그렇게 깨끗하지?”
“그, 그게…….”
시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얼른 옷을 갈아입어야 했던 다른 이유를 대면 될 텐데. 빨간 머리 시녀는 자기도 모르게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고 하는 바람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스텔의 말을 듣고 카이젠이 명령했다.
“저 시녀의 방에 가서 옷을 조사해 봐라. 소매가 망가진 게 있는지, 없어진 옷이 있는지 찾아봐.”
시녀복은 궁에서 지급된다.
각자 몸에 맞게 매년 일정한 시기마다 재봉사를 고용해서 만들어 준다.
당연히 몇 벌을 가졌는지 장부에 적혀 있을 것이다.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변명하던 시녀는 그제야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바닥에 엎어져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제, 제가 도자기를 깨뜨려서 죄를 숨기려고 그랬습니다.”
도자기가 깨지는 걸 목격했다고 말한 시녀도 용서를 빌었다. 그쪽은 친구가 부탁해서 같이 도와줬을 뿐이라고 우겼다.
“감히 내가 초청한 후작 가문의 후계자를 납치해서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다니.”
카이젠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둘 다 감옥으로 끌고 가라.”
병사들이 울며 용서를 비는 시녀들을 끌고 갔다.
카이젠은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시녀들을 돌려보냈다.
아스텔은 자기 시녀를 불러서 다시 명령했다.
“테오르를 별채로 데려가서 내가 돌아갈 때까지 할아버님과 함께 있게 해.”
“예, 아스텔 님.”
“테오르. 괜찮으니까 먼저 별채에 가 있으렴. 나도 곧 갈게.”
아스텔은 테오르를 달래서 먼저 별채로 보냈다.
소란스럽던 정원 길에는 카이젠과 아스텔 단둘만 남았다.
“아스텔.”
카이젠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아스텔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스텔의 단아한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석상처럼 가만히 허공을 노려보기만 했다.
카이젠은 불안하고 초조해서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언젠가부터 그의 마음은 아스텔 때문에 요동치고 있었다. 아스텔의 표정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감정이 수시로 오르내렸다.
아스텔은 천천히 카이젠을 향해 돌아섰다.
“테오르를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아스텔은 여전히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였지만 일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스텔은 분노로 들끓는 마음을 억누르고 카이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만일 카이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테오르는 시녀에게 납치당해서 어딘가로 끌려갔다가 한참 뒤에 돌아왔겠지.
그러는 동안 도자기를 깨뜨리고 아이가 한 짓이라고 우기면 결백을 밝힐 방법이 없다.
테오르가 자신은 도자기를 깨뜨리지 않았다고, 납치당했다가 돌아온 거라고 말해봤자 어린아이가 하는 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필이면 카이젠이 그 자리를 지나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을 이렇게 쉽게 해결하지 못했으리라.
아스텔은 솔직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복잡한 시선을 보냈다.
“시녀들을 심문해서 더 자세히 조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예, 폐하.”
“아이가 많이 놀란 것 같군. 가서 잘 돌봐줘.”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스텔은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킬 때까지도 카이젠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럼 먼저 별채로 돌아가겠습니다.”
아스텔은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 * *
별채 안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스텔은 할아버지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해 주고 테오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테오르는 자기 방 침대에서 블린을 끌어안고 누워 있었다. 아스텔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테오르의 등을 토닥였다.
“테오르. 많이 놀랐지?”
“응……. 근데 괜찮아. 블린이 도와줘서 도망쳤어.”
아스텔은 테오르 옆에 가만히 누워 있는 블린을 쓰다듬었다.
“고맙다, 블린.”
블린이 아스텔의 손을 핥았다. 테오르가 아스텔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맞아. 그리고 폐하가 구해줬어.”
“그랬니?”
“응, 나 폐하가 좋아!”
“…….”
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에 가슴이 쓰렸다. 아스텔은 가만히 테오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잠시 쉬다가 씻고 저녁부터 먹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렴. 오늘은 먹고 싶은 건 다 먹어도 돼. 여기 주방장에게 만들어 달라고 할게.”
“정말?”
“그래.”
한참 아이를 다독인 뒤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많이 놀랐으니 오늘 저녁 식사는 침실로 가져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황제의 시종장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스텔 님, 폐하께서 도련님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선물?”
“선물이요?”
테오르는 선물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시종장이 손짓하자 선물 상자를 든 시종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도련님께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상자 안에는 다양한 장난감들이 들어있었다. 솜으로 만든 인형과 나무를 깎아 만든 마차, 실물처럼 세밀하게 만들어진 인형의 집도 있었다.
다른 상자에서는 간식거리가 나왔다. 다양한 사탕이 가득 들어있는 유리병과 쿠키 상자. 달콤한 캐러멜, 알록달록한 과일절임.
보기만 해도 단내가 느껴지는 과자들이 상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와…….”
테오르는 줄줄이 나오는 장난감과 과자 더미를 보고 놀라서 입을 벌렸다.
‘테오르를 위로해 주려는 건가.’
카이젠답지 않은 세심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선물은 효과가 좋았다. 테오르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고 기운을 차렸다. 신기한 눈으로 장난감도 구경했다.
“테오르. 폐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지.”
“폐하, 감사합니다.”
아스텔은 시종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 드리세요.”
시종장이 나간 뒤, 테오르는 유리병에 담긴 하늘색 사탕을 들여다보다가 아스텔에게 물었다.
“저녁 먹기 전에 먹어도 돼?”
집에서는 편식하는 습관이 들까봐 식사 전에는 간식을 먹지 못하게 했었다.
테오르는 간절한 눈빛으로 아스텔을 올려다봤다. 울망울망한 눈으로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는걸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힘든 일이 있었으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그래. 대신 하나씩만 먹어야 해. 나머지는 저녁 먹고 나서 먹자.”
아스텔은 테오르가 먹은 과자를 치워놓고 시녀를 부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아스텔 님.”
복도로 나오자 한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스텔을 불렀다.
“오늘 일은…….”
“그 여자의 짓이겠지.”
테오르가 황제의 아들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재 테오르는 그저 몰락한 후작가의 후계자일 뿐이다. 굳이 힘없는 어린아이를 해치려고 들 만한 사람은 아스텔에게 원한을 가진 후작 부인밖에 없었다.
‘테오르를 모함하려고 하다니.’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
어떻게든 이곳에서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아스텔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가다가 한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나.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 * *
“무슨 일이십니까?”
성문 앞을 지키는 근위군 부장이 시종에게 질문했다.
“레이디 아스텔의 명령으로 도시의 잡화점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시종은 옆에 있는 시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평범한 드레스 위에 외투를 걸친 한나는 바구니를 열어서 안에 든 걸 보여줬다.
“아스텔 님께서 도시에서 파는 곰 인형을 사 오라고 하셨습니다.”
바구니 안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곰 인형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각각 적갈색, 갈색, 연갈색의 곰 인형이었다. 리본도 있고 나름대로 정성 들여 만들어진 귀여운 모양이었다.
“레이디 아스텔이라면…….”
“레스턴 공작가의 공녀님이시지요.”
이 성에 폐위된 황후가 와 있다는 건, 성안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폐황후가 친척 조카를 돌보고 있다는 것도 친한 시종들에게 들었다. 듣기로는 폐황후가 그 어린 조카를 각별하게 아낀다고 했다.
근위군 부장은 한나의 설명을 듣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한나는 시종과 함께 성문을 통과해서 동쪽에 있는 별채로 향했다.
별채로 향하는 정원의 회랑을 통과할 때였다. 회랑의 길을 덮은 평평한 판석을 밟으며 걸어가던 한나는 발을 헛디디면서 실수로 바구니를 떨어뜨렸다.
“아…….”
바구니가 바닥에 엎어지면서 작은 유리병이 튀어나와 굴러갔다. 보라색 꽃잎이 든 유리병이었다. 한나는 놀라서 얼른 유리병을 집어 들고 바구니를 챙겨서 그 자리를 떠났다.
* * *
“티 파티를 열어주세요.”
다음 날, 아스텔은 벨리안을 찾아가서 그렇게 부탁했다.
“……예?”
벨리안은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티 파티?’
그와 마주 앉은 아스텔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정원의 다실에 가보셨나요?”
“……아뇨. 안 가봤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만발한 정원의 한가운데에 있어서 무척 아름답던데요. 그 다실에서 티 파티를 열고 싶어요.”
벨리안은 잠시 간격을 두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그럼 얼마든지 파티를 하셔도…….”
“그런데 이곳에는 저와 친분이 있는 귀부인들이 없어서 초대장을 보낼 수가 없네요. 백작님께서 저 대신 티 파티를 주최해 주세요.”
“아, 아니, 저기 아스텔 님.”
벨리안은 어이없는 눈으로 아스텔을 마주 봤다.
“제가 왜 그런…… 티 파티 같은 걸 주최해야 합니까?”
티 파티는 귀족 여성들의 사교 모임이었다. 귀족 남성이 티 파티를 주최하는 경우는 없었다.
뭐, 법적으로 금지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관습상 그랬다. 남성이 다과회를 주최했다고 하면 수도의 귀족들은 다들 그를 이상한 인간으로 볼 것이다.
아스텔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 고성에서 있었던 일을 벌써 잊으셨나요? 약제사를 하녀로 위장시켜서 제 짐과 약상자를 훔쳐보셨잖아요. 저를 공용 욕탕에 보내서 옷까지 뒤져보셨고요.”
“…….”
아스텔은 벨리안의 순해 보이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걸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말씀드렸잖아요. 나중에 벨리안 님께 도움을 받겠다고요. 그것도 기억 안 나시나요?”
“그…….”
벨리안은 멍하니 버벅거리다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요, 아스텔 님.”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했다.
“아스텔 님께서는 유언장 일만 끝내고 돌아가시겠지만, 저는 평생 수도에 살면서 황궁에서 일해야 한다고요.”
아스텔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과회 같은 걸 하겠다고 나설 리는 없었다.
벨리안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도 알고 있었다. 테오르가 시녀에게 납치당할 뻔한 일이었다. 그는 사건이 터진 당일에 그 일의 전후 사정을 상세하게 전해 들었다.
벨리안 역시 말하지는 않아도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가 되실 분의 어머니와 적대 관계가 되면 제 남은 인생이 얼마나 곤란해질지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제가 생각해야 하는 문제인가요?”
아스텔의 뻔뻔스러운 질문에 벨리안은 할 말을 잃었다. 아스텔은 벨리안의 멍한 얼굴이 웃기다는 듯이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상한 오해를 하시는군요. 저는 후작 부인께 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이건 그냥 티 파티일 뿐이에요. 후작 부인을 초대하는 건 단지 친목을 쌓기 위해서입니다.”
“친목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을 것 같냐는 눈빛으로 벨리안이 코웃음 쳤다.
아스텔은 포기하지 않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마리안 님과 있었던 일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드리고 오해를 풀고 싶어요. 그 가문 사람들과 원수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아요.”
아스텔은 솔직한 태도로 고백했다.
“하지만 제가 초대하면 후작 부인과 따님은 티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시겠죠. 그래서 벨리안 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벨리안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아스텔을 살폈다. 단정한 얼굴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벨리안은 쉽게 속지 않았다.
“그럼 제게 맹세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스텔 님은 후작 부인에게 절대 어떤 짓도 하지 않으신다고요.”
“그럼요.”
아스텔은 일말의 거짓도 없다는 듯이 순진한 표정으로 가슴에 한 손을 댔다. 그리고 진지하게 맹세했다.
“저희 아버님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저기…… 아버님인 공작님과는 의절하신 걸로 아는데요.”
벨리안은 못 미더운 눈길로 트집을 잡았다.
“다른 분도 거시면 안 됩니까?”
“어떤 분을 걸고 맹세할까요?”
“글쎄요. 할아버님이신 칼렌베르크 후작님?”
벨리안은 아스텔이 그나마 중요하게 여길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고민하다가 외조부인 후작을 꼽았다.
아무리 그래도 다섯 살짜리 테오르를 걸라고 할 수는 없어서 테오르는 뺐다.
아스텔은 순순히 맹세했다.
“아버님과 할아버님을 걸고 맹세 드립니다. 저는 티 파티가 끝날 때까지 후작 부인에게 손도 대지 않을 겁니다.”
벨리안은 여전히 의심이 사라지지 않은 찝찝한 얼굴이었지만 아스텔의 맹세를 듣고 더는 트집을 잡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어드리죠.”
“감사합니다.”
아스텔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아스텔이 직접 손을 쓸 일은 없을 테니까.
‘내가 직접 손댈 필요는 없지.’
후작 부인은 성미가 급하고 난폭했다. 그런 사람은 굳이 공격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멸할 타입이었다. 자멸할 계기만 만들어주면 된다.
혹시 맹세를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별 상관없었다.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은 오래전에 의절한 사이였다. 그리고 아스텔이 ‘할아버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외조부인 후작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죽은 전대 공작도 아스텔에게는 똑같이 할아버님이었다.
“걱정 마세요,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스텔은 속마음을 감추고 차분하게 맹세했다.
“그리고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앞으로는 벨리안 님께 이런 어려운 부탁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고성에서의 일도 완전히 잊을 거고요.”
“……그 말씀을 믿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벨리안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제 요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신 분을 방해했네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스텔이 감사를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벨리안이 삐뚜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폐하도 초대하실 겁니까?”
아스엘은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그를 물끄러미 돌아봤다.
“어차피 초대할 만한 사람은 아스텔 님과 후작 부인, 레이디 플로린. 그리고 폐하밖에 없는데요.”
아스텔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카이젠과의 만남을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 이름을 들먹이는 걸 보면.
아스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묵은 감정을 풀려고 여는 다과회인데 황제 폐하까지 모셔 올 필요는 없지요. 폐하께는 말씀드리지 마세요.”
* * *
후작 부인은 고급스러운 봉투를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티 파티 초대장이라고?”
오후에 벨리안의 이름으로 다과회 초대장이 전해졌다. 정원의 다실에서 다과회를 열 테니 참석해 달라는 정중한 요청이었다.
“그 여자가 본궁에 왔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백작님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후작 부인의 물음에 초대장을 가져온 시녀가 대답했다.
‘불길해.’
그녀도 바보는 아니었다.
황제의 보좌관인 벨리안이 이곳에서 갑자기 티 파티를 열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남자 귀족이 왜 티 파티를 주최한단 말인가.
‘이건 분명히 그 여자 짓이야.’
그 여자가 벨리안을 시켜서 다과회를 열게 한 게 분명했다. 후작 부인은 아스텔이 별채에서 뭘 하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감시자로 붙여 놓은 시녀는 어제 아스텔이 벨리안을 만났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오늘 티 파티 초대장이 날라왔다. 누가 봐도 아스텔이 꾸민 일이었다.
한데 왜 그랬을까?
후작 부인은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초조한 손길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다가 다시 물었다.
“분명히 보라색 꽃잎을 봤다고 했지?”
“예.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붙여뒀던 시녀가 다시 한번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성 밖에 나갔다 온 아스텔의 시녀가 바구니에서 뭔가를 떨어뜨렸는데 유리병에 담긴 꽃잎이었다고 한다.
유리병에 담긴 보라색 꽃잎.
그 불길한 보랏빛은 죽음의 색이었다.
보라색 작은 꽃잎, 흔히 수도사의 두건이라고 불리는 꽃은 강력한 독으로 유명했으니까. 약초에 문외한인 후작 부인도 그 꽃이 얼마나 맹독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아스텔의 시녀가 유리병에 담긴 보라색 꽃잎을 사 왔다.
증거라고는 시녀의 목격담뿐이었지만 후작 부인은 거기서 다른 목적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그 기분 나쁜 여자가 내게 복수하려는 거야.’
아스텔은 약초에 대해 잘 알고 약병도 잔뜩 가지고 다닌다고 들었다. 불쌍한 마리안은 그 여자가 가진 수상한 약을 살펴보려다가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고 있었다.
공녀라는 여자가 무슨 그런 취미가 있지?
약제사 같은 건 근본 없는 미천한 여자들이 하는 일이잖아.
‘내가 자란 북부에서는 그런 수상쩍은 여자들은 마녀로 몰려서 죽임을 당했는데.’
아스텔에겐 충분히 복수하려고 들 만한 이유도 있었다.
며칠 전, 후작 부인은 아스텔이 돌봐주고 있는 어린애한테 누명을 씌우려다가 실패했다.
파빌리온의 도자기를 깼다는 누명을 씌우려고 했는데, 난데없이 황제 폐하가 끼어드는 바람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파빌리온에 있는 도자기는 전전대 황제가 소중히 아끼던 것들이었다. 그걸 깨뜨렸다가는 아무리 어린애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아스텔은 그 애를 무척 아끼는 듯했으니, 그렇게라도 해서 그 여자에게 복수하고 마리안의 분풀이를 해주려고 했는데.
아스텔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일이 후작 부인의 짓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설마…… 나를 독살하려고?’
두려운 마음을 곱씹던 후작 부인은 다른 가능성도 깨달았다.
‘아니면…… 어쩌면 우리 플로린을…….’
그 여자가 공녀 시절에 지금의 황제 폐하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섬겼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작 부인은 아스텔이 당시 황태자였던 카이젠과 함께 있는 걸 몇 번 목격했었다. 카이젠을 바라보는 아스텔의 눈빛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이었다.
세월이 지났다고 그 마음이 사라졌을 리 없지. 가엾은 마리안이 그 지경이 된 것도 그 여자가 뒤에서 음모를 꾸민 건지도 몰라.
저는 황후 자리를 빼앗기고 쫓겨났는데 어리고 예쁜 우리 마리안이 폐하 곁에 있는 걸 보고 질투가 났겠지. 이제 플로린을 없애서 내게 복수도 하고 연적도 치워 버리려는 건지 몰라.
‘그 여자의 방을 뒤져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별채를 다 수색하면 독약이 나올 텐데.’
하지만 아스텔은 지금 황제에게 초대받은 손님 신분이었다. 확실한 이유가 없는 한 아스텔의 거처를 수색할 수 없을 것이다. 시녀가 훔쳐봤다는 증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나도 참석하겠다고 전해.”
미리 뒤져볼 수 없다면 직접 그 다과회인지 뭔지에 가서 무슨 짓을 꾸미는 건지 감시하는 게 낫다.
* * *
“아스텔 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한나가 머리빗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스텔은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거울 안에 백금발을 느슨하게 틀어 올린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아스텔은 흰 백합이 수 놓인 푸른 드레스를 입고 간단하게 머리 손질만 한 상태였다. 머리엔 둥글게 진주를 세공해서 만든 작약 비녀를 꽂았다.
“고마워, 한나. 수고했어.”
한나의 밤색 눈동자에 희미한 옛 추억이 아른거린다. 이렇게 아스텔의 치장을 도와주다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아스텔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이렇게 화장대 앞에 앉아 한나의 도움을 받으며 머리를 손질하고 있으니 마치 6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도의 사교계에서 황태자의 약혼녀로 살던 시절로.
“이제 나가자.”
아스텔은 한나와 함께 정원에 있는 다실로 향했다.
다실 근처에 다가가자 새하얀 아카시아 꽃의 상쾌한 향기가 풍겨왔다.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층층이 늘어진 꽃송이들이 눈부시도록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다실 안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스텔은 반가운 미소를 보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후작 부인, 오랜만에 뵙네요.”
크로이첸 후작 부인이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스텔 공녀.”
“부인께서도 초대를 받으셨군요. 저 말고도 숙녀분들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백작님이 주최하시는 다과회라니 신사분들만 오시는 건가 걱정했답니다.”
아스텔은 태연하게 웃으며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후작 부인이 뭔가를 더 말하려 하는데 검은 머리의 조그만 아가씨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스텔 님. 저는 크로이첸 가문의 차녀인 플로린입니다.”
‘아, 이 아가씨가 플로린이군.’
마리안의 동생이라는 그 플로린이다. 새로운 황후 후보라는.
마리안의 친동생이니 미인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마리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금발에 마르고 화사한 인상이었던 마리안과 달리 플로린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에 인형같이 귀여운 생김새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려 보인다. 하긴 얼마 전에 성년이 됐다고 했었나?
아스텔을 바라보는 자수정 같은 자색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소녀 같은 표정을 짓자 굉장히 귀여웠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스텔 님.”
“나도 만나서 반가워요, 레이디 플로린.”
이쪽하고는 정말 첫 만남이었다. 후작 부인이나 마리안은 예전에 수도에 살 때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둘째인 플로린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아스텔의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플로린이 곱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저는 몸이 좋지 않아서 어릴 때는 영지에서 요양하고 있었답니다. 아스텔 님을 뵐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라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저런…… 몸이 안 좋으셨나요?”
“예, 어릴 때는 병치레가 심했어요. 이제는 많이 나아졌지만요.”
이제 보니 진주 같은 하얀 피부에 조금 창백한 기색이 감돌았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것도 성장기를 놓쳐서 그런 건가 싶었다.
“그런데 벨리안 님은…….”
명색이 주최자라는 사람이 왜 없는 거지?
아스텔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으려는 찰나였다.
새로운 참석자가 다실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을 살펴보던 플로린과 뚱한 표정으로 서 있던 후작 부인이 황급히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주인이신 폐하를 뵙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카이젠이었다. 당황하던 아스텔도 예의상 허리를 굽혔다.
“아스텔.”
“폐하.”
벨리안이 뒤따라서 안으로 들어왔다.
“아, 모두 모이셨군요.”
아스텔은 그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누가 황제까지 부르라고 했나.
후작 부인 모녀만 초대하면 될 것을 카이젠은 왜 데려온 거야?
벨리안은 아스텔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강제로 다과회를 열라고 강요했더니, 그는 카이젠을 데려오는 것으로 아스텔에게 소극적인 보복을 한 모양이다.
‘치졸하기는.’
아스텔의 굳어진 표정이 만족스러운지 벨리안은 보란 듯이 정중하게 카이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폐하께서 제 첫 번째 다과회에 참석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참석자들은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후작 부인과 플로린은 나란히 앉고, 아스텔은 벨리안의 옆자리에 앉았다. 상석은 당연히 카이젠의 차지였다.
시녀들이 테이블에 놓인 하얀 찻잔 안에 향긋한 차를 따랐다.
다실 안은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벽 전체가 연녹색 녹옥이었고, 바닥은 푸른 대리석이었다. 유리창에는 아름답게 늘어진 민트색 실크 커튼이 접혀 있었다.
티 파티는 가벼운 사교 모임이었다. 초대된 숙녀들끼리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잠시 담소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날씨가 좋으면 잠시 정원을 산책하거나 음악 연주를 들으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봤자 한두 시간 정도 같이 어울리는 짧은 행사였다. 대부분 친한 사람들을 초대하기 때문에 소박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담소를 나눈다.
그러나 이 테이블 위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대신 불편한 정적만 감돌았다. 카이젠과 아스텔은 이혼한 사이였고 플로린은 카이젠의 신붓감으로 거론되는 아가씨였다. 플로린의 어머니인 후작 부인은 아스텔을 원수 보듯 했다.
벨리안마저 아스텔의 진위를 파악하고 허튼짓을 못 하게 감시하느라 분위기를 맞춰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상황이 이러니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걷어냈다.
“저, 제가 오늘 다과회를 위해 차와 어울리는 디저트를 가져왔답니다. 수도에서 가져온 재료로 만든 디저트예요. 아주 맛있어요.”
플로린은 여전히 귀엽고 사근사근했다. 아스텔도 친절하게 미소를 보였다.
“어떤 것인지 기대되네요.”
“괜찮으시면 제가 가져온 디저트를 내오라고 할게요.”
플로린이 지시하자 시녀들이 트레이에 준비되어 있던 접시를 테이블로 내왔다.
플로린이 가져온 디저트는 희귀한 과일로 만든 타르트였다. 아스텔은 타르트에 있는 과일을 보고 손을 멈췄다.
타르트 위에는 반투명한 하얀 과일이 매끈한 시럽에 감싸여 있었다.
린테일이었다.
린테일은 수도 근처에서만 자라는 과일이었다. 수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산품이라 동부에서는 구경해 볼 기회도 없었다.
아스텔도 6년 전 수도를 떠난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탱글탱글한 과육이 달달하고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아스텔은 디저트 접시에 손을 대지 않고 차만 마셨다.
“디저트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플로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스텔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뇨, 저는 이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아…… 죄송합니다, 미리 여쭤보고 가져왔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사실은 단순히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스텔은 린테일 과일을 먹으면 열이 나는 특이한 체질을 갖고 있었다.
‘그걸 모르고 어릴 때 이걸 먹었다가 아주 호되게 앓은 적이 있었지.’
그때도 디저트에 담긴 걸 먹었는데, 한 접시 다 먹었더니 몇 날 며칠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한나가 티 포트를 들고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그러다 손이 미끄러져서 티 포트를 놓치고 말았다.
“악……!”
아스텔 옆에 앉아 있던 벨리안이 어깨에 찻물을 뒤집어쓰고 비명을 질렀다.
테이블 위로 쏟아진 찻물이 순식간에 테이블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얀 도자기로 만든 티 포트는 바닥으로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따뜻한 차가 사방으로 튀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죄송합니다.”
한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아스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님, 죄송합니다. 제 시녀가 이런 실수를 범하다니…….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다행히 벨리안은 별로 다치지 않고 옷만 젖은 모양이었다.
아스텔은 뜨거운 차를 마시지 못해서 언제나 차를 약간 미지근하게 준비했다. 한나는 주인의 차를 직접 챙기려고 티 포트를 가져오던 중이었다.
벨리안은 아스텔의 사과를 받으며 손수건을 꺼내서 축축하게 젖은 옷을 닦아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벨리안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아스텔을 쏘아봤다. 아스텔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본궁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와야겠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벨리안은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다실 밖으로 나갔다. 한나는 깨진 티 포트 조각을 줍고 의자와 바닥에 흘러내린 찻물을 닦아내느라 정신없었다. 유리창 밖에는 여전히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스텔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을 구경하다가 제안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벨리안 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잠시 밖에 나갔다 올까요? 근처 정원에 전시실이 있는데 괜찮으시면 그곳을 구경하러 가고 싶네요.”
전시실이라는 말에 후작 부인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플로린은 순진하게 동의했다.
“네. 좋은 생각이네요. 안 그래도 오는 길에 그곳을 봤답니다.”
두 사람은 카이젠을 돌아보며 허락을 기다렸다.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카이젠도 전시실에 가는 걸 동의했다.
“그래, 괜찮겠군.”
다실에서 전시실까지 가려면 정원 길을 따라 걸어야 했다.
오후의 정원은 따스한 햇살이 가득했다. 따사로운 햇살 속에 정원의 풍경이 보였다. 다채로운 꽃들 사이로 풀잎이 싱그러운 풀 냄새를 더했다.
전시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멋진 곳이네요.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아스텔은 파빌리온 옆에 이어진 테라스로 나왔다. 작지만 아름다운 테라스였다. 하얀 대리석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고 앞에는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 계단이 딸려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플로린이 아스텔을 따라서 테라스로 나왔다.
“아스텔 님. 저…… 어머니께서 지난번 일을 사과드리고 싶어 하셨어요.”
플로린은 후작 부인에게 눈짓했다.
후작 부인은 입을 비죽이며 마지못해 사죄했다.
“예, 뭐. 그때는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후작 부인은 여전히 아스텔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못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네.’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스텔은 다 이해한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따님의 일이니 흥분하고 이성을 잃으실 만도 하지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으니 이해하겠다, 는 조롱 섞인 말에 후작 부인이 또다시 발끈했다.
플로린은 앞으로 나서려는 후작 부인을 저지하고 얼른 분위기를 수습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스텔 님. 정말 관대하시네요.”
아스텔은 전시실 쪽을 힐끔 살폈다.
전시실 안에 남아 있는 카이젠은 이쪽이 신경 쓰이는지 당장에라도 따라올 태세였다.
‘그러면 안 되지.’
지금은 방해받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아스텔은 슬그머니 테라스의 유리문을 닫았다.
“플로린 양은 어머니를 닮지 않으셨네요.”
“예, 다들 저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해요.”
“크로이첸 후작님은 국무 대신이셨죠?”
그 말에 뚱하니 서 있던 후작 부인이 자신만만한 미소로 말을 받았다.
“네. 우리 후작님께서는 크로이첸 가문에서 처음으로 대신이 나왔다는 것에 무척 자부심을 갖고 계신답니다. 고결한 귀족이라면 중책을 맡겨주신 황제 폐하께 영원히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지요.”
자부심에 가득 찬 천진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절대 천진하지 않았다.
아스텔의 레스턴 가문은 대를 이어서 대신이 되고 재상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아스텔의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황제에게 대항하다가 실각한 상태였다.
후작 부인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은 레스턴 가문은 고결하지 못하다고 조소하고 있었다.
아스텔은 후작 부인의 말을 들으면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잔잔한 미소를 보내며 말을 받았다.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이.
“크로이첸 가문은 신흥 가문이지만 충성스럽고 고결한 가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영지 일에만 전념하다가 갑자기 그런 일생일대의 중책을 맡았으니 자부심을 가지실 만도 하지요.”
뼈 있는 말에 대꾸하려다 보니 이쪽도 똑같이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칭찬처럼 들리지만 속뜻은 너희 가문은 시골 영지에서만 살던 하급 귀족이 아니냐.
갑자기 높은 자리에 올라서 거만해졌느냐는 비아냥거림이었다.
“뭐라고요?”
후작 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왜 그러시죠? 후작 가문을 칭찬한 것뿐인데요.”
아스텔의 잔잔한 미소에 후작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폐하께 관심을 받는다고 잘난 척하지 마세요. 이미 이혼한 전 부인에게 그런 관심이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하나요? 지금 조금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고 기고만장하다가는 큰코다치게 될 거예요.”
“어머니!”
“좋은 말씀이네요. 그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후작 부인께서도 늘 그런 겸손한 마음가짐을 간직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지금 가문이 조금 잘됐다고 기고만장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냐?
그런 비아냥거림이었다.
“이……!”
후작 부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머니…….”
“너는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난 돌아가겠다!”
후작 부인은 화가 나서 플로린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죄송해요, 아스텔 님.”
후작 부인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 뒤 플로린은 또다시 아스텔에게 용서를 구했다.
“저희 어머니가 원래 성격이 불같으셔서요…….”
아스텔은 조용히 플로린을 관찰했다.
정말 설탕 과자로 만든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콤하고 연약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소녀였다.
하지만 아스텔은 이 어린 아가씨가 겉보기만큼 귀엽고 무해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괜찮으시면 이제 저희는 그만 다실로 돌아갈까요?”
그래. 바로 이런 점이.
이 귀여운 아가씨는 방금 자신의 어머니가 모욕을 당하고 화를 내며 나가 버렸는데도 사근사근하게 웃으면서 다실로 돌아가자고 한다.
심지어 방금 전에 아스텔이 자신의 가문을 대놓고 모욕했는데도.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아가씨는 어떤 식으로든 절대 평범한 소녀는 아니라는 것을.
“플로린 양은 괜찮으신가요?”
“예?”
플로린이 눈을 깜빡였다.
옅은 보랏빛을 띠는 반짝이는 자색 눈 위에 새카만 속눈썹이 팔락인다. 도자기 인형에 박아 넣은 구슬 눈 같다.
‘어릴 때 저런 인형이 있었는데.’
젖살이 남은 귀여운 얼굴에 꽃잎을 두른 것처럼 레이스가 겹겹이 달린 분홍 드레스를 입은 예쁜 인형이었다.
구슬로 만든 인형의 눈은 크고 영롱했다. 인형을 움직일 때마다 눈꺼풀에 붙인 기다란 속눈썹이 팔락팔락 움직였다.
아스텔은 그 인형을 떠올리며 말했다.
“저 때문에 플로린 양의 언니인 마리안 양이 감옥에 갇혔잖아요.”
“그건 언니가 자초한 일인걸요.”
플로린은 앙증맞은 도자기 인형처럼 사근사근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언니는 폐하께서 아스텔 님께 호의를 보이는 게 싫었던 모양이에요. 아스텔 님께서 이해해 주세요. 언니는 늘 폐하를 좋아했거든요.”
“플로린 양은 괜찮으신가 보네요.”
아스텔에 대한 카이젠의 호의를 불쾌하게 느껴야 하는 사람은 마리안보다 플로린이 아닌가 싶었다.
아직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가장 유력한 황후 후보인데.
플로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스텔 님은 다시 황후가 되실 생각인가요?”
“그럴 리가요.”
다시 황후가 된다니.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없는 소리였다.
“황후가 되고 싶을 리가 없죠. 될 수도 없고요.”
이미 이혼한 지 6년이나 지났다.
이제 레스턴가는 예전만큼 세력을 갖고 있지도 못했다. 세력은커녕 언제 멸문당할지 모르는 신세지.
이제는 아스텔이 황후가 되고 싶어서 죽도록 노력해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요.”
플로린은 생글생글 웃으며 동의했다.
“아스텔 님이 황후가 되실 생각이 없고. 황후가 되실 수도 없다면 저와 적대 관계가 될 필요가 전혀 없잖아요. 안 그런가요?”
어린 소녀처럼 천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오히려 좋아요. 제 라이벌이 될 만한 다른 영애가 아니라 아스텔 님이 폐하의 시선을 끌어서요.”
“요컨대 황후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대라서 편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요. 지금의 제게 그보다 더 편한 상대는 없답니다. 아스텔 님도 경험해 봤으니까 이해하시겠지요?”
아스텔은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플로린 님은 언니분과 다르네요. 어쩐지 벨리안 님이 플로린 양을 많이 칭찬하더군요. 정말 훌륭한 아가씨라고요.”
“감사합니다.”
“플로린 양이 저를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았다면 이렇게 사과하러 찾아오지도 않으셨겠죠.”
아스텔이 조용히 지적하자 인형 같은 얼굴에서 일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사근사근한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웃고 있는 얼굴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
‘이게 이 소녀의 본모습이겠지.’
왜 이 아가씨를 볼 때마다 자꾸만 예쁜 인형이 떠올랐는지 알겠다.
플로린의 예쁜 자색 눈에는 감정이 없었다. 인형 눈에 박아 넣은 구슬 같았다. 아무런 감정도 진심도 느껴지지 않는 인형의 눈동자.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아스텔은 이 소녀의 원래 성격은 무척이나 차갑고 싸늘할 거라고 짐작했다.
그 무기질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아스텔 님은 황후가 되길 원치 않고 황후가 되실 수도 없지만…… 세상일에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기니까요.”
플로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6년 전이었다면 제가 황후가 될 수 있으리라는 걸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요? 저 자신도 상상 못 했던 일인걸요.”
크로이첸 가문은 부유하긴 했지만 대영지를 소유한 대귀족이 아니었다. 내세울 만한 오랜 역사도 없었다. 앞으로 100년 정도 수도에서 인맥을 쌓아도 명문가라고 불리지 못할 가문이었다.
그런 집안의 둘째 딸이 황후 후보가 될 거라고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이젠이 황제가 된 뒤 대귀족들을 전부 축출하면서 제국의 정세가 변하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플로린은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때부터 저는 어떤 위험도 쉽게 넘기지 않기로 했답니다. 세상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터지니까요. 그래서 아스텔 님의 일을 듣고 제 눈으로 직접 두 분의 관계를 확인하고 싶었어요.”
“철저하시네요.”
이제 갓 성년이 된 어린 아가씨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아스텔도 벨리안의 의견에 동의했다. 플로린은 시간을 두고 경험을 더 쌓으면 정말 훌륭한 황후가 될 것이다.
플로린은 아스텔을 보면서 생긋 웃었다.
“사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스텔 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 시절 아스텔 님은 수도에서 제일 고귀한 미혼 여성이셨으니까요. 신분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요.”
플로린은 장난기 어린 눈을 빛내며 고백했다. 구슬같이 무감각한 자색 눈에 처음으로 사람다운 생기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릴 때는 아스텔 님을 동경하는 마음도 있었어요. 아스텔 님처럼 훌륭한 숙녀가 되고 싶었거든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랍니다.”
“……과찬이시네요.”
아스텔은 처음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제게 애정 같은 걸 품고 계신 게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될 거예요.”
플로린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스텔 님은 그 정도로 폐하를 잘 아시나요?”
“예, 그분의 감정은 잘 압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그냥 호기심과 죄책감이지.”
잘해주다 보니 사랑이라고 혼자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카이젠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린테일인 줄 알고 포도알을 사 먹은 부자 상인처럼.
테오르에게 읽어준 동화 속 이야기였다.
린테일을 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는 부자 상인은 평생 포도알을 린테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먹었다고 한다.
어쩌면 카이젠도 평생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스텔은 그가 착각 속에서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라지 않았다. 착각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라고 해도 이제는 싫었다.
“그럼 아스텔 님의 말씀을 믿어볼게요.”
아스텔의 설명을 들은 플로린은 만족스러운 고양이처럼 웃었다. 아스텔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한 가지 불안이 솟아나는 걸 느꼈다.
이 어린 아가씨가 테오르의 존재를 알면 상당히 신경 쓰이는 적이 될 것 같다는 불안이.
* * *
후작 부인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거처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티 파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먼저 가버릴 수는 없었다. 심지어 이건 황제까지 참석한 다과회였다.
주최자인 벨리안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아서 티 파티를 끝내라고 요청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실로 돌아가겠네.’
그래도 그 밉살스러운 여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것보다는 다실에 가서 목이라도 축이는 게 낫다.
후작 부인은 정원을 걸어서 다실로 돌아왔다.
그녀가 다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다실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보였다. 갈색 머리의 젊은 시녀가 자신의 찻잔을 만지고 있었다. 방금 전에 찻물을 엎질렀던 아스텔의 시녀였다.
다실 안에는 두 명의 시녀가 더 있었지만, 한 명은 벽 근처에 놓인 삼단 트레이를 정리하느라 테이블 쪽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다른 한 명은 창가에 있는 화병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둘 다 아스텔의 시녀가 뭘 하는지 못 보고 있었다.
후작 부인은 발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
갈색 머리의 시녀는 다른 시녀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등을 돌린 채 찻잔에 뭔가를 넣고 있었다. 후작 부인은 문 뒤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지켜봤다.
시녀가 중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살짝 돌렸다. 그랬더니 그 안에서 가루가 나왔다.
연한 보라색 가루였다.
후작 부인은 비명처럼 소리쳤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 * *
아스텔은 전시실에 있었다.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온 시녀가 다실에 일어난 소동을 알렸다.
“후작 부인께서 빨리 돌아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시녀는 카이젠에게 말하고 있었다.
카이젠은 후작 부인이 뭔 짓을 하든 관심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러나 시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아스텔 님의 시녀가 후작 부인의 찻잔에 독을 타려다가 잡혔습니다.”
카이젠과 플로린이 놀란 눈길로 아스텔을 돌아봤다. 아스텔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장 돌아가 보죠.”
다실로 돌아와 보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후작 부인이 병사들을 부르라고 소리치고 있었고, 한나는 다실의 정 가운데에서 멍하니 서서 아스텔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른 시녀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쪽에 모여 있었다.
“폐하!”
카이젠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후작 부인은 재빨리 고개를 숙인 뒤 비명처럼 소리쳤다.
“저 시녀가 제 찻잔에 독을 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나에게로 모였다.
카이젠은 표정 없이 굳어진 얼굴로 한나에게 물었다.
“정말이냐?”
한나는 넋 나간 얼굴로 서 있다가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주인이신 폐하를…….”
“됐으니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냉엄한 목소리에 한나는 고개를 들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폐하, 저는 독을 타지 않았습니다.”
“내가 분명히 봤는데 거짓말을……!”
“그만.”
후작 부인이 소리를 지르려고 들자 카이젠은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을 잘랐다.
후작 부인은 굴하지 않고 다시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폐하, 제가 먼저 다실로 돌아왔을 때 이 시녀가 제 찻잔에 독약을 타고 있었습니다. 반지 안에서 보라색 가루를 꺼내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때 옷을 갈아입으러 갔던 벨리안이 다실로 돌아왔다.
벨리안은 다실 안의 상황을 보고 놀라다가 후작 부인의 말을 듣고 사태를 파악한 듯 아스텔을 돌아봤다. 아스텔은 그의 시선을 묵묵히 무시했다.
한나가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냈다.
“이건 평범한 반지입니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카이젠이 다른 시녀에게 눈짓했다. 확인해 보라는 뜻이었다.
한나의 반지는 얇은 링에 작은 루비가 박힌 단순한 반지였다. 시녀는 반지를 받아서 이리저리 살폈다. 작은 보석을 눌러보기도 하고 손톱으로 돌려보기도 했다.
시녀가 본 다음엔 벨리안이 반지를 건네받아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폐하, 이건 그냥 평범한 반지입니다.”
“말도 안 돼! 거짓말이에요!”
후작 부인은 벨리안이 들고 있는 반지를 낚아채서 자기가 직접 세세히 살폈다. 그러나 그녀가 살핀다고 해서 있지도 않은 비밀 공간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치만…… 분명히 저 시녀가 독을 타는 걸 봤다고요! 제 찻잔에 보라색 가루를 타고 있었어요.”
멍하니 서 있던 한나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변론했다.
“저는 찻잔에 꽃잎이 떨어져서 집어내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후작 부인께서 화를 내셔서…….”
“거짓말하지 마!”
“찻잔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해 보신 건가요?”
가만히 지켜보던 아스텔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아스텔에게 쏠렸다.
“의사를 불러서 찻잔에 정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해 보시죠.”
다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듯 카이젠이 다른 시녀에게 명령했다.
“의사를 불러와라.”
잠시 후, 중년의 의사가 다실로 불려왔다.
시골 동네의 고성에서 열병을 앓았을 때 한 번 만난 적 있는 그 의사였다.
“찻잔에 독이 있나 검사해 봐라.”
의사는 전후 사정을 듣고 찻잔을 유심히 살폈다.
황궁에는 언제나 독성분을 검사할 때 쓰는 보석이 있었다. 의사는 그 보석으로 된 얇은 침을 찻잔에 넣고 반응을 관찰했다. 두 번 더 검사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폐하, 찻잔에는 독이 전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후작 부인은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우겼다.
“독이 아니라면 다른 수상한 약이겠죠. 뭐든 간에 저를 해치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확신하시죠? 부인께서 잘못 보셨을 수도 있잖아요? 제 시녀가 부인을 해칠 만한 이유라도 있나요?”
아스텔의 차분한 반박에 후작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아스텔의 시녀가 자신을 해칠 이유라면 당연히 테오르의 일이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데 말을 할 수 없으니 답답했다.
아스텔은 옅은 조소를 띤 채 그녀에게 요구했다.
“근거 없는 말로 제 시녀를 모함하셨으니 제대로 사과해 주세요.”
그 말이 결국 도화선이 되었다.
후작 부인은 분노해서 외쳤다.
“근거 없는 말이 아닙니다. 저 시녀가 몰래 밖에 나갔다 오는 걸 똑똑히 봤습니다. 그때 분명 독초가 든 유리병을 떨어뜨렸는데…….”
“어머니!”
플로린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낮게 소리를 질렀다.
후작 부인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아스텔의 시녀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자기 입으로 내뱉은 것이었다.
카이젠은 한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한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스텔 님의 명령으로 도련님의 장난감을 사려고 나갔다 왔을 뿐입니다. 별채의 시종과 함께 다녀왔으니 그분이 확인해 주실 겁니다.”
카이젠은 별채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 보게 했다. 명령을 받고 갔던 시녀가 시종과 함께 돌아왔다.
“예, 잡화점 말고 다른 곳은 간 적이 없습니다. 가게 주인이 증언해 줄 겁니다.”
시종이 분명하게 말했다.
“반지에 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찻잔에 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상한 곳에 다녀온 것도 아닌데.”
카이젠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후작 부인을 향했다.
“그대는 대체 뭘 보고 이 소란을 피운 거지?”
“폐, 폐하……”
“시녀가 밖에 나갔다 왔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후작 부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쓰러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전부 제 잘못입니다……. 제가 시녀들의 말만 믿고 착각을 해서…….”
후작 부인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애처롭게 용서를 빌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시녀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며 시녀들 탓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카이젠은 그런 뻔한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아스텔 쪽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실수인 걸 알았으면 사과를 해.”
후작 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스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죄했다.
아스텔과, 그 옆에 있는 한나에게.
“제가 잘못 보고 오해해서 이런 실수를 범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사죄를 받았다.
카이젠은 플로린에게 차갑게 명령했다.
“당장 후작 부인과 함께 수도로 돌아가거라.”
아스텔은 말없이 서 있는 플로린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다.
플로린의 귀여운 얼굴은 섬뜩할 만큼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조각상처럼 무표정하게 굳어져 있다가 카이젠과 눈이 마주치자 순식간에 가면을 뒤집어쓰듯이 당황한 표정으로 바뀐다.
카이젠의 명령이 이어졌다.
“그리고 후작 부인은 당분간 저택에서 근신하라고 전해라. 처분이 정해질 때까지.”
처분이라는 말은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플로린은 더는 뭔가를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 * *
“아스텔 님.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짧은 폭풍이 지나가고 다과회가 어영부영 끝나 버린 뒤, 벨리안이 아스텔에게 다가와서 따져 물었다.
아스텔은 무슨 소리냐며 눈을 크게 떴다.
“저는 약속을 지켰는데요. 말씀드렸다시피 후작 부인께 손도 대지 않았잖아요?”
“아니, 대체…….”
벨리안은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이었지만 불행히도 아스텔은 별로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처음부터 이 다과회라는 게 평범하게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서 폐하를 모셔 오신 건가요?”
황제를 데려오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한 걸까.
벨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스텔을 추궁했다.
“어리석은 후작 부인을 속여서 일을 크게 만들었으니 이제 만족하십니까?”
“예.”
아스텔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위험한 분이 테오르 곁에서 사라져서 기쁘네요.”
아스텔은 후작 부인을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한나를 시켜서 미리 유리병을 감시자의 눈에 띄게 만들고 후작 부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찻잔에 가루를 타게 했다.
차에 탄 가루는 일레인 열매를 빻은 가루였다. 일레인 나무에 달리는 열매는 가루로 만들면 아무런 맛도 냄새도 없었다. 독성이 없으니 독 검사에 검출되지도 않는다.
그 밋밋한 가루는 영양제를 만들 때 필요한 재료였다. 말린 일레인 열매는 처음 저택을 나왔을 때부터 아스텔의 약 상자에 들어 있었다.
푸른 일레인 열매를 잘 갈아서 붉은 색소를 넣고 한데 뭉치면 진한 보라색 가루가 된다. 그걸 반죽해서 얇게 편 다음에 손으로 조금씩 찢어서 유리병에 넣으면 보라색 꽃잎처럼 보인다.
물론 가까이서 보면 이상하다는 걸 금세 눈치챌 수 있겠지만. 멀리서 힐끔 보면 구별하기 어렵겠지.
후작 부인은 아스텔이 보복할 거라고 생각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니 이런 단순한 짓에 쉽게 걸려든 거였다.
“아스텔 님은 만족스러우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아스텔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벨리안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악담처럼 내뱉었다.
“수도에 가시면 크로이첸 가문 사람들을 다시 만나실 겁니다. 그때는 어쩌시려고요?”
“상관없습니다. 저는 수도에 갔다가 곧바로 돌아갈 거니까요. 후작가 사람들이 아무리 저를 원망해도 이런 민감한 상황에 굳이 저를 해치려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플로린은 미래의 황후감으로 뽑히고 있었다.
가족 모두가 조심해도 모자란 상황에 굳이 전 황후를 해치는 위험한 짓을 할 리가 없다.
후작 부인이라면 몰라도 크로이첸 후작이나 플로린이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 * *
“얘, 얘야……. 이 일을…….”
화장대 앞을 서성이던 크로이첸 후작 부인은 창가에 앉아 있는 딸을 돌아보며 울먹였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니……. 폐하께서 그렇게 진노하시다니…….”
창가에 앉은 플로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정원의 풍경이 보였다. 정원에는 수많은 붉은 장미꽃이 무성하게 피어나 있었다. 따스한 바람을 타고 진한 장미향이 스며들어 왔다.
하지만 플로린의 눈엔 그 모든 것이 짜증스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플로린, 내 얘기 듣고 있는 거니?”
후작 부인이 창가 쪽으로 걸어오면서 플로린에게 화를 냈다.
플로린은 그제야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화를 내던 후작 부인은 딸의 자색 눈동자에 담긴 분노와 환멸에 당황했다.
“얘, 얘야.”
“어머니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꾸미시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됐는데 제가 뭘 어찌하겠어요?”
플로린은 어머니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신 건가요? 그런 짓을 해봤자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어머니가 그 어린애를 괴롭히려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그 여자가 이런 일을 꾸민 거잖아요.”
“그건……. 그, 그 여자가 너무 거만하게 굴어서……!”
부모도 부모 나름이라지만 이런 멍청한 부모는 없는 게 낫지 않을까?
플로린은 순간 진심으로 그런 냉혹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겨우 어머니가 기분이 나빴기 때문에 저와 아버지까지 곤란하게 만드신 건가요? 고작 어머니의 자존심 때문에?”
오늘 일도 그랬다. 그렇게 뻔히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다니. 바보가 따로 없지.
후작 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플로린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할 얘기 없으니 좀 나가주세요. 머리가 아파서 쉬어야겠어요.”
친어머니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 무례한 소리였지만 후작 부인은 플로린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남편인 크로이첸 후작이 가족 중에서 플로린을 가장 아꼈기 때문이다.
이 영민한 둘째 딸만 자기를 닮았다며 크로이첸 후작은 몸이 약한 플로린에게 정성을 들였다.
남편이 워낙 싸고돌고 모시다시피 해서 언니인 마리안은 물론이고, 어머니인 후작 부인도 플로린의 눈치를 봐야 했다.
플로린은 의자에 기대앉으며 눈을 감았다. 방 안이 조용해지자 플로린 곁으로 풍만한 체구의 부인이 다가왔다.
플로린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유모. 아스텔 님에 대해 알아보라는 건 알아봤어?”
“네, 아가씨.”
유모는 플로린의 어깨에 따뜻한 모포를 덮어주며 대답했다.
“지시하신 대로 그 전 황후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봤습니다.”
“그래. 만일에 대비해서 그분의 약점을 잡아두고 싶어. 어때? 특별한 게 있었어?”
“별다른 건 없더군요. 6년간 내내 시골에서 살았답니다. 여자 약제사가 자주 들락거리긴 했다는데 그건 아마 아이 때문이겠죠.”
“그렇겠지.”
플로린도 어릴 때는 매일 약을 달고 살았다. 너무 몸이 약해서 시골 별장에 가서 요양하느라 수도에 오지도 못할 정도였다.
‘어쩌면 그곳에서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때만 해도 크로이첸 가문은 그렇게 부유하지 않았다.
플로린이 자신의 영민함을 입증하지 못했으면 아버지는 약값도 제대로 대주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플로린이 충분히 영리하고 쓸모 있다는 걸 입증하자 아버지는 갑자기 플로린에게 온갖 명의를 붙여주고 정성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 덕에 건강을 회복하고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눈을 감고 그런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데 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마에른 성에서 일하던 시녀가 아주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응?”
플로린은 유모의 말에 눈을 떴다. 유모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냥 별장에 갔을 때 들었다더군요. 그 아이가 아스텔 공녀를 ‘엄마’라고 불렀답니다.”
“……뭐?”
예상치 못한 소리에 플로린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곧 웃어넘겼다.
“그게 뭐가 이상해? 나도 어릴 때는 유모를 엄마라고 불렀잖아.”
“그렇긴 했지요.”
미소를 짓던 플로린은 잠깐의 생각 끝에 다시 말했다.
“그 아이의 출생에 대해서도 한번 알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