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덴츠 성
아스텔은 순조롭게 회복하고 이틀 만에 반점이 깨끗이 사라졌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몸에서 반점이 사라진 뒤에도 이틀간 더 성에 머물렀다.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떠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제 완전히 나았습니다. 폐하. 재발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의사가 몇 번이나 그렇게 확답을 하고 난 뒤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일행은 다시 목적지인 덴츠 성으로 향했다.
또다시 사흘간의 기나긴 여정 끝에 드디어 덴츠 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전에 머물렀던 성들은 말 그대로 하늘 높이 솟은, 석조로 건축된 구식 성이었다. 반면 덴츠 성은 이름만 성이지 평지에 건설된 궁전이었다. 가운데 있는 본궁을 중심으로 화려한 정원과 여러 개의 별궁이 함께 있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황제가 동부에 올 때 머무는 제2의 황궁이었다.
황제가 탄 마차와 그 일행은 정문을 통과해서 성의 본관으로 들어갔다. 아스텔을 태운 마차는 호화롭게 조성된 커다란 정원을 지나 성의 동편으로 향했다.
“레이디, 이쪽입니다.”
아스텔이 안내된 곳은 궁전의 서쪽에 있는 아름다운 별채였다.
커다란 정원이 딸린 단층 건물이었는데, 이 고색창연한 궁전에 어울리게 아름답고 세련되게 꾸며진 곳이었다.
‘그런대로 잘 지내고 계셨던 것 같네.’
이런 곳을 배정해 줄 정도면 카이젠이 장담했던 대로 대접이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테오르와 함께 복도를 걸어가는데, 앞서가던 젊은 시종이 아스텔을 돌아보며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예? 뭐가 죄송한가요?”
“저…… 제가 후작님을 제대로 시중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젊은 시종은 아스텔에게 사죄하며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자기가 탐탁지 않았는지 후작님이 자꾸만 물러가라고 했다는 것.
병 간호를 하고 싶었지만 계속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셔서 제대로 돌봐 드릴 수 없었고, 청소할 때와 약을 가져다드릴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까지.
그는 착잡한 낯으로 사죄했다.
“후작님께서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하신 건 아무래도 제 탓인 것 같습니다. 전부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
아스텔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외할아버지가 이 시종을 왜 자꾸 내쫓았는지는 자명했다. 아프지도 않은데 옆에서 간호를 해준다고 붙어 있으니 곤란하셨겠지.
아스텔의 손을 잡고 따라오던 테오르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놀라서 물었다.
“아스텔 고모, 할아버지가 아파?”
“아냐, 할아버님은 이제 괜찮아.”
“정말?”
“응. 다 나으셨대.”
아스텔은 얼른 테오르를 달래주고 이어서 젊은 시종도 달랬다.
“그렇지 않아요. 할아버님께서는 원래 곁에 모르는 사람을 두는 걸 싫어하세요. 시중드는 사람이 있는 게 불편하셨던 모양이네요.”
사실은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곁에 있는 사람이 불편했던 거겠지만.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여러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할아버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말았다. 할아버님은 지난 며칠 동안 멀쩡한 몸으로 환자 연기를 하면서 힘들게 지냈을 것이다.
아스텔은 시종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할아버님 곁에서 시중을 들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감사합니다, 레이디.”
시종은 아스텔이 화를 내지도 않고 자기 일을 도와주겠다고 해서 정말로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방문 앞에 도착했다.
시종이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던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
테오르가 달려가서 할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아스텔은 시종을 돌려보내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외가인 칼렌베르크 후작가에는 선이 가늘고 단정한 외모가 유전되었다. 외사촌인 지그문트 오빠도 어릴 때는 곱상하게 생긴 미소년이었다.
그런 집안 내력답게 외조부인 후작도 무인 출신이지만 학자같이 점잖은 생김새였다. 외모만 보면 지적이고 다정한 노신사 같았다. 비록 군인 귀족다운 근엄하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긴 했다만.
아스텔은 어릴 때부터 이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몰래 외가에 편지를 보내곤 했었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얼굴을 비비던 테오르가 고개를 들고 걱정스레 물었다.
“할아버지, 아파요?”
“아니, 우리 아가. 이 할아비는 괜찮다.”
할아버지는 웃으며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스텔은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늦어서 죄송해요……. 많이 힘드셨죠?”
“대접이 좋아서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계속 누워만 있느라 힘들긴 했다만.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을 하려니 원……. 네 조부는 이런 짓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친조부인 전대 레스턴 공작은 카이젠의 조부인 길베르트 황제 시절 제국의 재상이었다.
유능한 분이기는 했는데...행실이 조금 비겁했다.
그분은 정치적으로 불안한 일이 생기거나, 몸을 피해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길 때마다 아픈 척을 하면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죽하면 늙은 황제가 재상은 이번에도 아플 예정이냐며 비아냥거렸을 정도였다.
‘그런 보신적인 성격은 아버지가 물려받은 게 아닐까 싶네.’
할아버지가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어린 시종이 자꾸만 병 간호를 해준다고 해서 쫓아버리느라 애를 먹었다. 나쁜 녀석 같지는 않던데 화를 낼 수도 없고…….”
“시종이 약을 가져왔다면서요? 약은 어떻게 하셨어요?”
“욕실에 쏟아버렸다. 창문을 열고 저 화단에 버리기도 하고.”
할아버지는 한쪽 벽에 있는 유리창을 가리켰다.
세련되고 정갈하게 꾸며진 침실은 한쪽 벽이 커다란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맑은 유리창 너머로 화초로 가득 찬 정원의 풍경이 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거냐?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게…….”
아스텔은 할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며 천천히 늦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아스텔의 말을 듣고 놀랐다.
“네가 아팠다고?”
그 말에 테오르가 얼른 대답했다.
“아스텔 고모는 이제 안 아파요,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초기에 빨리 치료해서 다 나았어요.”
아스텔은 사냥 별장에서의 일과 자신이 병에 걸렸다가 회복한 이야기를 전부 말해줬다. 아스텔의 설명을 들은 할아버지는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아스텔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가엾게도……. 어린것을 데리고 낯선 곳에서 힘들었겠구나.”
아스텔은 익숙한 온기에 미소를 지었다.
테오르는 할아버지의 품 안에서 고개를 빼꼼히 들고 말했다.
“할아버지. 나 강아지 생겼어요!”
“강아지라고? 어디서 데려온 거냐?”
“응. 폐하의 선물.”
할아버지가 황망한 눈길을 아스텔에게 돌렸다.
아스텔은 얼른 설명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사냥 별장에 갔었는데 폐하께서 선물로 한 마리 주셨거든요.”
일단 그렇게 간략하게 말했다.
그 사냥 별장에 담긴 기나긴 뒷사정을 다 설명하려면 시간이 부족했고, 테오르가 있는 앞에서 할 얘기도 아니었으니까.
할아버지는 아스텔의 속마음을 알아듣고 다시 테오르를 토닥였다.
“그 별장에서 받아왔다면 사냥개로구나. 우리 테오르는 사냥하는 걸 배우기엔 이른데.”
“난 사냥 싫어. 곰이 죽었어.”
아스텔은 미미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할아버지를 마주하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전신의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직 안전해진 건 아니지만 이곳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절반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심이 되었다.
“황태후 전하의 일은 들었다. 그 가엾은 분이 네게 마음을 써주시다니.”
할아버지가 테오르에게 약간 복잡한 시선을 보냈다.
황태후 전하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황궁으로 끌려가서 황후가 되었다.
그분이 드넓은 남부 영지의 상속녀였기 때문에. 남부 영지를 합법적으로 황가에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카이젠의 조부인 길베르트 황제는 아내가 나중에라도 자기 영지를 되찾으려고 자신에게 대항할까 봐 어린 황후를 황궁 안에 가둬놓고 공부도 제대로 배우지 못 하게 했다고 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탓에 황태후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순진했다. 황궁을 관리하는 것도 어려워해서 아스텔은 자주 황궁에 드나들며 황태후를 도와 황궁 일을 관리했다.
황태후는 죽은 며느리 대신 황궁 일을 도와주는 아스텔을 마냥 예뻐했었다.
‘이혼했을 때는 정말 많이 눈물을 흘리셨지.’
아스텔은 쫓겨나는 입장인데도 황태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제 다 끝났어요. 이곳에서 며칠만 시간을 끌다가 폐하께 허락을 구해서 할아버지와 테오르를 집으로 돌려보내 드릴게요.”
“그래, 그렇게만 되면 걱정할 게 없겠지.”
의심을 사지 않게 며칠 뒤에 카이젠에게 부탁할 예정이었다. 허락만 받으면 테오르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
‘허락을 받아야 해.’
싫든 좋은 카이젠의 허락을 얻어야 테오르를 돌려보낼 수 있다.
이제부터는 카이젠의 비위를 맞춰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젠의 기분이 좋아야 기회가 왔을 때 테오르를 돌려보내겠다고 부탁할 수 있을 테니까.
다행히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호의적이었고, 아스텔에게도 나름대로 잘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테오르에게 잘해주던 카이젠을 생각하면 테오르와 할아버님을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부탁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것이다.
‘다 괜찮을 거야.’
아스텔은 모든 게 잘될 거라고 확신했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외조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너를 기다린 사람이 또 있단다.”
“예?”
기다린 사람이 있다고?
누가?
그 순간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시녀복을 입은 갈색 머리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진한 갈색 머리카락에 밤색 눈을 가진 침착해 보이는 인상의 젊은 시녀였다.
그녀가 울먹이며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아스텔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6년 만에 다시 만난 자신의 시녀에게 다가갔다.
“한나?”
* * *
한나는 아스텔의 시녀였다.
귀족 가문의 딸들은 어릴 때부터 비슷한 또래의 시녀를 곁에 둔다.
그렇게 함께 자란 시녀들은 어릴 때는 모시는 영애의 친구가 되고, 나중에는 그 영애를 곁에서 보필하는 측근 시녀가 된다. 훗날 레이디가 결혼한 뒤에는 남편의 저택에 가서 안주인의 수석 시녀로 일하게 된다.
아스텔에겐 한나가 그런 존재였다.
“한나. 네가 어떻게 여기에……?”
한나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이곳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시녀장님께 부탁드려서 이 성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아스텔이 황후가 되어 황궁에 들어갔을 때, 한나도 황궁 시녀의 자격을 얻어 황궁으로 함께 들어갔다.
그러나 아스텔은 하루 만에 황궁을 떠나게 되었고, 그 후 수도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영원히 인연을 끊기로 했었다. 그때 아스텔은 자신을 따라 나온 한나를 다시 황궁으로 돌려보냈다.
‘어렵게 얻은 기회잖아.’
한나는 함께 가겠다고 울고 있었다.
아스텔은 그녀를 조용히 달랬다.
‘나는 이제 시녀가 필요하지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한나에게 월급을 줄 형편도 안 될 것 같았다.
한나는 돈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젊고 앞길 창창한 시녀를 무일푼으로 부려먹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임신 사실도 몰랐으니까. 숲속에 들어가서 혼자 수도승처럼 세상을 등지고 혼자 살 생각뿐이었다. 그런 삶에 한나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너는 황궁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잖아. 그걸 버리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 살아.’
한나는 가난한 시골 귀족의 딸로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친척도 없었다.
공작가의 저택으로 돌아가면 이제 모시는 주인도 없는 신세이니 허드렛일이나 하게 될 것이다. 황궁 시녀로 일하면 공작가보다 높은 봉급을 받고 좋은 혼처를 잡을 수도 있었다.
아스텔은 한나를 달래서 황궁으로 들여보내고, 황태후의 시녀장에게 부탁하는 편지도 적어 보냈다.
그 후에는 만나지 못했다.
어두운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시녀들이 쓰는 헤드 드레스를 쓰고 있는 한나는 6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한나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스텔 님께서 떠나신 뒤에 저는 황태후 전하의 궁에서 시녀로 일했습니다.”
“그랬구나.”
아스텔은 한나가 입고 있는 상급 시녀의 옷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후 전하께서 아스텔의 시녀인 한나를 잘 살펴주신 모양이었다.
한나는 후작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후작님과 함께 계신 줄은 몰랐어요. 프리츠 도련님께서 후작님께 아가씨의 행방을 묻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후작님께서 아스텔 님이 안 계시다고 답을 주셔서…….”
“내가 그렇게 부탁드렸거든.”
친오빠인 프리츠는 외조부의 저택에 몇 번 아스텔을 찾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아스텔은 오빠와 연락하고 싶지 않아서 언제나 없다고 답해달라고 부탁했다.
“황제 폐하께서 아가씨를 찾았다고. 함께 이 성으로 온다고 하셔서 최대한 빨리 달려왔습니다. 아가씨를 다시 모시고 싶어서요.”
아스텔은 한나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아스텔의 시녀가 아니니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아도 될 텐데. 일부러 발령을 받아가며 이곳에 와준 마음이 고마웠다.
할아버지에게 붙어 있던 테오르가 두 사람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어깨를 잡으며 한나에게 소개했다.
“한나, 이쪽은 테오르야.”
“후작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지그문트 도련님의…….”
어릴 때부터 아스텔 곁에 있던 한나는 지그문트와도 친숙했다. 지그문트는 조용하고 성실한 성품이라 시녀나 시종들에게도 상냥했다.
테오르를 보는 한나의 눈빛에 안쓰러운 연민이 스쳐 갔다. 다행히 한나는 테오르의 출생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지그문트의 유복자라고만 생각하고 안타까움을 느끼는 모양이다.
젊고 성실했던 지그문트의 죽음은 가까운 이들에게 큰 충격을 남겼다. 가깝게 지내던 사촌 오빠의 죽음에 아스텔도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을 느꼈다.
어쩔 수 없이 그 사촌 오빠의 이름을 빌려서 테오르를 기르고 있기 때문에 사촌 오빠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깊은 슬픔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한나는 무릎을 굽히고 테오르와 눈높이를 맞추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테오르 도련님. 저는 한나입니다.”
테오르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나를 관찰했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테오르. 한나에게 인사해야지.”
“안녕, 한나.”
테오르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정말 귀여운 도련님이시네요.”
한나는 그런 테오르가 귀엽다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맛있는 쿠키를 가져다드릴게요.”
“응!”
테오르는 좋아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텔도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한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스텔 님. 먼 길 오느라 피곤하셨죠? 따뜻한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고마워, 한나.”
* * *
덴츠 성에 도착한 카이젠은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집무실로 향했다.
워낙 화려한 성이다 보니 성의 집무실도 황궁 못지않게 잘 꾸며져 있었다. 황궁에 있는 황제의 집무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카이젠은 성에 도착하자마자 밀린 업무부터 처리했다. 덕분에 벨리안도 짐도 정리하지 못하고 집무실로 따라왔다.
“수도 쪽에는 별일 없겠지?”
“예,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벨리안은 수도에서 온 보고서를 넘기며 대답했다.
수도의 일은 전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카이젠이 물었다.
“그쪽은?”
카이젠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벨리안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레스턴 공작이 비밀리에 서부에 돈을 보냈다고 합니다.”
수도에 있는 레스턴 공작은 여전히 열심히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돈까지 보낸 것을 보면 반란을 준비하려는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가 동맹을 맺은 상대가 카이젠 쪽의 첩자였다는 것이었지만.
덕분에 공작의 행동은 전부 이쪽으로 보고되는 중이었다.
벨리안은 조금 복잡한 시선으로 카이젠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이 일을 전했을 때만 해도 드디어 레스턴 공작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즐거웠었다.
그 당시엔 카이젠도 순행에 시간을 끌면서 공작이 함정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려고 했었다. 카이젠이 순행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야 공작이 더 많은 일을 벌일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다.
‘우리 폐하는 지금 아스텔 님께 끌리고 계신데 말이지.’
수도에서는 레스턴 공작이 반역을 준비하면서 함정으로 착착 걸어 들어가고 있는데, 황제 폐하는 이곳에서 그 레스턴 공작의 딸인 아스텔에게 마음을 빼앗기셨다.
지켜보는 입장인 벨리안마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레스턴 공작이 반역자로 처형당하면 아스텔 님은 어떻게 되려나.’
잘 모르겠다.
황제 폐하는 반역자 가문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켰던 북부의 가문은 여성들도 함께 처형당했다. 반란까지 가지 않은 경우는 남자들만 처형당하고 여자들은 수녀원으로 보내졌지만.
‘하지만 아스텔 님은 그렇게 되지 않겠지.’
황제 폐하는 아스텔에게 애정을 갖고 있었다.
레스턴 공작이 죽어도 아스텔은 동부의 시골에서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역자의 딸이 되면 수도의 사교계에 나오는 건 힘들겠지.
‘폐하의 곁에 머무는 것도 불가능해지겠지. 반역자의 딸을 황궁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되면 아스텔이 다시 황후가 되는 건 완전히 불가능해진다.
벨리안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황제를 복잡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카이젠이 담담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란베르크 기사단장을 북부로 보내.”
“예?”
“기사단 일부를 데리고 북부로 가라고 해. 북부의 치안 유지를 위해.”
벨리안은 카이젠이 무슨 생각인지 깨달았다.
란베르크 기사단은 수도의 가장 유용한 전력이었다.
그 기사단의 일부와 기사단장이 수도에서 빠져나가면 공작은 이것을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할 것이다.
공작이 기회를 잡고 반란을 앞당기게 하려는 거로군.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벨리안은 카이젠의 말에 숨은 뜻도 파악했다.
“가는 척만 하고 근처에 머물러 있게 하겠습니다.”
카이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벨리안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다른 소식을 전했다.
“이 성을 관리하는 로더릭 경이 연회와 무도회 준비를 해놨다고 합니다.”
“연회라고?”
“황제 폐하께서 오셨으니 축하연 겸 무도회를 계획해 둔 모양입니다.”
숲속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던 마에른 성과 달리 이곳은 번화한 도시라서 관리인인 귀족도 있고 주변에도 몇몇 귀족이 살고 있다.
황제가 방문했으니 나름대로 환영 행사를 준비해 놓은 것이리라. 이럴 때가 아니면 지방 도시에 사는 귀족들은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으니까.
하지만 카이젠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쓸데없는 행사는 필요 없어.”
연회고 만찬이고 그런 건 필요 없다. 놀러 다니느라 순행을 나온 게 아니니까.
카이젠은 대수롭지 않게 서류를 넘기다가 멈칫했다.
“무도회는 괜찮을 것도 같군.”
“예……?”
벨리안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이런 걸 싫어하시는 분이 어쩐 일이지? 분위기 전환용으로 전했을 뿐 벨리안은 카이젠이 무도회를 취소시킬 줄 알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무도회만 계획대로 진행하고 연회나 다른 환영 행사는 취소하는 것으로…….”
카이젠은 복잡한 글자가 가득한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스텔을 떠올렸다.
숲속에서 함께 약초를 찾았던 날 이후로 아스텔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아스텔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와 함께 별채 쪽으로 갔다.
생각해 보니 아스텔이 무도회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가 황태자로 있을 때, 아스텔은 황태자의 약혼녀로서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를 주관했었다.
자기 저택에서도 죽은 공작 부인을 대신해서 무도회를 자주 열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떠들썩한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즐겁게 웃던 아스텔이 생각난다. 밝고 정신없는 무도회장의 기억이 어렴풋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속에 있던 아스텔도 흐릿한 잔상처럼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카이젠은 요즘 들어 자신이 왜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지 종종 후회할 때가 있었다. 아스텔의 행복한 미소를 기억 속에 더 분명히 새겨뒀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화가 났다.
“폐하.”
시종의 목소리가 카이젠의 상념을 방해했다.
“레이디 플로린께서 폐하께 알현을 청해 왔습니다.”
“플로린이 왔다고?”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젠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고개를 들자 벨리안이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온 건지 정말 모르시냐는 눈빛이었다.
“그…… 아마 마리안 님 때문일 겁니다.”
“아, 그랬지.”
아스텔을 모함하려다 발각된 마리안은 아직도 마에른 성에 갇혀 있었다.
카이젠은 그곳을 떠난 뒤부터 마리안의 일을 잊고 있었다.
“모친인 후작 부인도 함께 왔다는데 후작 부인은 몸이 좋지 않아서 방에서 쉬고 있다고 합니다.”
벨리안은 그 말을 전하면서 후작 부인을 방에 놔두고 온 건 아주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이 자매의 어머니인 후작 부인은 마리안과 성격이 비슷했다. 안목이 없고 생각이 짧았다. 황제 앞에 나서봤자 도움이 되긴커녕 방해만 될 것이다.
“플로린 님은 어찌할까요?”
“들어오라고 해.”
카이젠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잠시 뒤에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조그만 숙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플로린은 새카만 검은 머리에 자색 눈을 가진 소녀였다. 얼마 전에 성년이 됐으니 소녀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지만 우윳빛 뺨과 동그란 눈엔 여전히 소녀티가 남아 있었다.
마리안과 겨우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화려한 미녀인 언니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플로린은 연분홍색과 흰색을 섞어 진줏빛 작약을 수놓은 드레스를 입고,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늘어뜨리고 있었다.
귀여운 도자기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정식으로 약혼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귀족은 이 플로린이 카이젠의 새 황후가 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 아버지인 크로이첸 후작이 국무 대신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는 데다 대귀족들이 거의 다 몰락한 상황이라 황후가 될 만한 마땅한 공녀도 없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예를 갖춘 플로린이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방문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아버지를 대신해서 폐하께 사죄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네 아비가 뭐라고 했느냐?”
카이젠의 차가운 물음에 플로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딸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것을 사죄드리며, 부디 폐하께서 언니를 엄하게 처벌하시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하.”
딸을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카이젠은 대놓고 비웃음을 보냈다.
크로이첸 후작은 레스턴 공작을 비롯한 대귀족들이 힘을 잃으면서 새롭게 대신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다. 충성스럽고 그럭저럭 유능했기에 신임하고 중책을 맡겨왔지만 이런 냉혹한 면을 보면 레스턴 공작과 다를 바가 없었다.
“폐하.”
플로린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언니를 대신해서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플로린은 울먹이면서 바닥에 두 손을 대고 머리를 조아렸다. 하얀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희 언니는 아직 어리고 미숙해서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 겁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부디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마리안보다 더 어린 플로린이 언니는 어리니까 너그럽게 봐달라면서 울고 있었다.
어린애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우습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이 눈물로 얼룩졌다.
안타까운 모습이었지만 카이젠은 별로 감명받지 못했다. 귀찮을 뿐이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누구나 다른 사람을 모함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짓을 하는 건 아니지.”
“폐하…….”
“마리안의 처분은 나중에 생각해 볼 테니 그만 나가라.”
벨리안은 얼른 시종에게 눈짓했다.
플로린은 시종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저녁에 마무리할 테니 정리해 놔라.”
잠시 후 카이젠은 서류장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 * *
한나가 테오르를 봐주는 동안 아스텔은 별궁에 있는 방에 가서 짐을 풀었다.
아스텔에게 주어진 방은 별채의 중심에 있는 커다란 거처였다. 아름다운 나무 문양이 세공된 문을 열자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잠시 후 넓은 방 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아치형의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웅장한 응접실이 제일 먼저 나타났다. 그 옆으로 휴식실과 침실이 딸려 있었다.
별궁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방이었다. 바닥은 아름다운 연녹색 대리석이었고 벽은 섬세한 양각 세공을 한 흰색과 크림색 석재였다.
방 안에 자리한 호사스러운 가구들도 하나같이 최고급품이었다. 이곳에 오면서 거쳤던 고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전에 머물렀던 마에른 성보다도 화려한 거처였다.
‘역시 동부의 황궁이라고 불릴 만 하네.’
아스텔이 간단하게 짐을 풀어놓고 나오려는데 한나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스텔 님. 차와 디저트를 준비했습니다. 테오르 도련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지금 갈게.”
정원이 내다보이는 화려한 휴식실로 향했다.
창밖에는 밝은 햇살이 비치는 정원이 보였다. 정원에 피어난 풀잎들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밝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창가에 놓인 둥근 테이블 위에 티 세트가 차려져 있었다.
“도련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쿠키와 밀푀유를 가져왔습니다.”
“고마워, 한나.”
아스텔은 테오르와 함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긋한 얼그레이와 하얀 접시에 담긴 밀푀유가 있었다. 아름다운 접시에 쌓인 밀푀유는 보기만 해도 달콤한 향이 날 것처럼 생겼다.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접시와 포크를 밀어줬다.
“테오르. 자, 하나 먹어보렴.”
테오르는 밀푀유의 모양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이거 신기하게 생겼어.”
“잘라서 드셔 보세요. 아주 맛있어요.”
테오르는 한나의 말을 듣고 포크를 잡았다.
모양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조심 한 조각을 잘라서 입에 넣었다.
“우와! 맛있어!”
“마음에 드세요?”
“응! 달고 맛나.”
아스텔도 포크를 들고 밀푀유를 한입 먹었다.
한입 먹자마자 달콤한 바닐라 향이 입안에 퍼졌다. 고소하고 바삭한 페이스트리가 바닐라 향이 듬뿍 풍기는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과 어우러졌다.
오랜만에 이런 음식을 먹으니 옛날 생각이 난다. 그 시절에는 황궁에 드나들면서 매일 이런 걸 먹었다.
새하얀 찻잔에 담긴 밀크티도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차와 부드러운 우유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맛이었다. 쌉싸름한 맛과 향이 어우러져 밀푀유와 잘 어울렸다.
달달한 밀푀유와 따뜻한 밀크티에 이곳으로 오는 동안 쌓인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나는 아스텔의 빈 찻잔에 차를 채워주며 웃었다.
“아스텔 님께서도 이 디저트를 좋아하시는데 도련님도 좋아하시네요.”
아스텔은 미미하게 웃으며 포크로 한 조각을 더 집었다. 마지막 남은 조각을 다 먹고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한나가 질문을 건넸다.
“다시 후작님의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응. 나는 외조부님과 함께 돌아가야지. 한나는? 다시 수도의 황궁으로 발령받을 수 있는 거야?”
아스텔은 모처럼 만났는데 또 헤어지는 건가 싶어서 섭섭했다.
다시 황궁으로 발령받아 갈 수 있는 것인지 걱정도 되었다. 똑같이 황궁에 소속된 시녀라도 이런 동부의 별궁에 있는 것보다는 수도의 황궁에 있는 게 훨씬 좋다. 봉급부터 차이가 날 것이다.
혹시 여기 와서 수도로 못 돌아가는 건 아닐까. 그런 거라면 카이젠에게 부탁을 해서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줘야지.
그런 마음으로 물었는데 한나는 티 포트를 내려놓으며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저는 이제 아스텔 님을 따라가고 싶어요.”
“뭐?”
한나는 옛정이 가득 담긴 차분한 눈길로 아스텔을 마주 보며 말했다.
“6년 전에 아가씨를 혼자 보내 드리고 정말 많이 후회했답니다. 아가씨의 행방을 찾기만 하면 반드시 모시러 가겠다고 맹세했었어요.”
침착한 말투였지만 절절한 진심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한나는 눈물이 아른거리는 간절한 눈으로 아스텔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아가씨, 이번에는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
아스텔은 가슴 한편에 차오르는 감동을 느끼며 현실적인 일들을 생각했다.
하긴 이제 한나에게 월급을 줄 수 있으려나. 외조부님의 연금을 다시 받게 되었으니 하인이나 하녀 한 명 정도는 고용할 생각이었다.
테오르는 점점 커갈 테고, 외조부님도 점차 노쇠해지실 테니 잡일을 도와줄 고용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나 고용할 수는 없다. 테오르를 생각하면 믿을 수 있고 충직한 사람을 뽑아야 했다.
‘한나라면…… 믿을 수 있긴 하지.’
한나는 어릴 때부터 아스텔과 함께 자란 시녀였다.
아스텔로서는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원래는 외조부님의 저택에서 일하던 하인들을 불러올까 했는데.’
하지만 외조부의 저택에 있던 하인들은 이미 몇 년 전에 다 내보냈다. 다시 불러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다른 저택에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도 있을 테고. 다른 일을 시작한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안 그래도 그래서 걱정되던 참인데.’
한나라면 믿을 수 있고.
여차하면 테오르의 출생에 대한 것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나도 이제 황궁에서는 곤란할지도 모른다.
황태후 전하께서도 돌아가셨는데. 얼마 후 새 황후가 들어오면 전 황후의 측근 시녀였던 한나는 미묘한 입장이 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새 황후가 마리안의 여동생이라면 내 시녀였다는 이유로 한나를 괴롭힐지도 몰라.’
아스텔은 자신 때문에 한나가 피해를 입기를 원치 않았다. 그럴 바에는 한나를 고용해서 다시 곁에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스텔은 그런 생각 끝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나,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예,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이번에는 아가씨를 따라가겠다고요.”
한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다시 부탁했다.
“아가씨. 이번에는 꼭 허락해 주세요.”
한나의 간절한 애원에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나. 그럼 이제부터는 다시 예전처럼 내 곁에서 나를 도와줘.”
한나는 감동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예,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아스텔은 한나의 손을 잡았다.
이곳에 오는 동안 온갖 일이 있었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가만히 구경하던 테오르가 마지막 남은 밀푀유 조각을 먹다가 물었다.
“그럼 한나도 우리하고 같이 사는 거야?”
“그래.”
한나는 얼른 눈물을 닦고 웃으면서 테오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려요, 도련님.”
“응. 나도 잘 부탁해, 한나.”
아스텔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감동의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똑똑.
갑자기 문밖에서 짧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시종이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레이디.”
“무슨 일이지?”
시종은 당황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크로이첸 후작 부인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아스텔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시종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어오다니.
아스텔은 어이가 없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소개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국무 대신인 크로이첸 후작의 부인이자 마리안의 어머니였다.
아스텔이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크로이첸 후작 부인이 다짜고짜 물었다.
“레이디 아스텔이신가요?”
아스텔은 미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오랜만에 뵙네요, 후작 부인.”
상대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아스텔은 이 후작 부인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크로이첸 가문은 한미한 집안이라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다만.
‘그때도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
이 후작 부인은 거만하고 생각이 짧았다. 당시에는 중요한 귀부인이 아니라서 인기도 없었다.
“아스텔 고모?”
후작 부인이 뭔가를 더 말하려 하는데, 테이블에 있던 테오르가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테오르가 아스텔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손님이 온 것뿐이야.”
“이 애는 누구죠?”
후작 부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테오르를 꼼꼼히 살폈다.
“아스텔 님과 닮았네요. 친척이신가요?”
닮았다는 말에 가슴 한구석이 싸해졌다.
아스텔은 놀란 걸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제 조카랍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테오르가 후작 부인에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스텔은 얼른 한나에게 눈짓했다.
“한나. 테오르를 방으로 데려가서 장난감을 꺼내주겠어?”
한나도 눈치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예, 아스텔 님. 도련님. 이쪽으로 오세요.”
한나가 테오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휴식실 안에 후작 부인과 단둘이 남게 됐다.
“아스텔 공녀님.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테오르가 나가는 걸 지켜보던 후작 부인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희 마리안 때문입니다.”
“레이디 마리안이요?”
“예, 그래요. 저희 큰애 말입니다.”
큰애라고? 후작 부인이 하는 말이라기엔 좀 지나치게 격의 없는 언사였다.
후작 부인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성의 감옥에 가두셨지요.”
그러고 보니 마리안은 아직도 거기 있겠구나. 아스텔은 잠시 잊고 있던 마리안의 행방을 기억해 냈다. 그 후로는 본 적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마리안까지 신경 쓰기에는 일이 너무 많았고.
후작 부인이 분통을 터뜨렸다.
“우리 마리안은 2주 넘게 그곳에 갇혀 있어요. 그 가엾은 아이가……! 그런 곳에서 얼마나 고통받고 있을지…….”
그녀는 아스텔에게 부탁했다.
“부디 아스텔 님께서 우리 애를 선처해 달라고 폐하께 부탁드려 줬으면 합니다.”
솔직하다 못해 좀 노골적이었다. 말만 부탁이지 강요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자기 딸이 그런 데 갇혀 있다니 부모의 심정은 오죽하겠냐만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실례합니다만 부인, 저는 폐하의 결정에 참견할 처지가 못 됩니다.”
가만히 듣던 아스텔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폐하의 명령으로 순행에 참여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죄인을 어떻게 처벌하시든 조언하거나 참견할 만한 권한은 없어요.”
“죄인이라고요?”
후작 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쳐 물었다.
이 부인은 마리안이 남의 약 상자를 뒤지고 그 안에 수상한 약을 몰래 넣으려다가 덜미가 잡힌 걸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그 정도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무시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스텔은 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을 대부분 그렇게 부르지 않나요?”
“이봐요, 아스텔 공녀님.”
후작 부인은 아스텔을 향한 적의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아시겠지만 우리 후작님은 국무 대신이에요. 우리 플로린은 폐하의 약혼녀로 곧 황후가 될 예정이고요.”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협박으로 응수하려나 보다.
“폐하의 약혼 소식은 이곳에서 처음 듣네요. 훌륭한 부군과 따님을 두셔서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아직 약혼하지 않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약혼녀 운운하는 후작 부인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이제 보니 마리안은 이 부인을 닮은 모양이다.
아스텔의 비꼬는 말에 후작 부인이 울컥해서 소리쳤다.
“이제 곧 약혼을……!”
“후작 부인.”
아스텔은 차가운 말투로 상대의 말을 잘랐다.
“레이디 마리안은 제 약 상자에 독약을 넣으려다가 발각됐어요. 제가 왜 레이디 마리안을 구명해 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상식적으로 제 입장이라면 레이디 마리안을 더 엄하게 처벌해 달라고 부탁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마리안의 생각대로 됐으면 아스텔은 지금의 마리안보다 훨씬 더 곤란한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폐위된 황후가 독약을 숨겨서 황제를 만나러 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독살 시도처럼 보일 테니까.
일이 잘못됐으면 아스텔만이 아니라 테오르와 할아버님까지, 그리고 어쩌면 수도에 있는 아버지와 오빠까지 연루됐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마리안이 아스텔의 물건을 훔쳤거나, 아스텔을 물리적으로 해치려고 시도하다가 들켰으면 본인이 뉘우친다는 전제하에 조금이라도 이해해 볼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일은 도저히 용서해 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 말에 후작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원한에 찬 시선으로 아스텔을 쏘아보기만 했다. 아스텔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서 화를 내는 모양인데 쓸데없는 분노였다.
어차피 여기서 아스텔 자신과 후작 부인이 마리안의 일을 합의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뭐라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테니까.
“폐하께서는 크게 진노하지 않으셨으니 너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순행 중에 그런 일이 생겨서 불쾌하게 생각하셨을 뿐이죠.”
카이젠은 마리안의 일로 분노하지 않았다. 그냥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황태후님의 유언 때문에 자신을 데려왔는데 쓸데없이 문제가 생겨서 귀찮다고 생각했겠지.
아스텔이 아는 카이젠은 그런 사람이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는 전부 쓸데없는 감정싸움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레이디 마리안은 아직 어린 후작 영애고 부친이신 크로이첸 후작님은 폐하께 신임을 받는 분이니 큰 벌을 내리진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따로 도와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어차피 피해를 입은 사람은 아스텔뿐이었다.
카이젠이 아스텔의 일로 어린 귀족 영애를 처형하거나 엄벌을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도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대신의 딸을 죽이지는 않겠지.
“더 이상 용건이 없다면 이제 그만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아스텔은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후작 부인이 아스텔을 붙잡으려 했다.
“저기요. 아스텔 공녀!”
“후작 부인.”
아스텔은 후작 부인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말했다.
“허락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제는 적반하장 식으로 저를 협박하시나요? 말씀하신 대로 저는 공작가의 공녀입니다. 무례가 너무 심하시군요.”
할 말이 없어진 후작 부인이 모욕감에 부들거리며 아스텔을 노려봤다.
그녀의 입에서 증오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봤자 쫓겨난 황후 주제에……!”
쫓겨난 황후 주제에 건방지다느니 뭐 그런 소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후작 부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문이 기척도 없이 벌컥 열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카이젠이었다. 후작 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스텔도 놀랐다.
‘언제 왔지?’
언제부터 대화를 엿듣고 있었을까?
조금 전에 후작 부인에게 폐하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떠들었던 것 같은데.
아스텔이 당혹스럽게 보는 가운데 카이젠은 비웃음 섞인 붉은 눈동자로 후작 부인을 직시했다.
“언제부터 일개 후작 부인이 내 궁전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댈 수 있었던 거지?”
잘생긴 얼굴에 노골적으로 조소가 서렸다.
후작 부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폐, 폐하. 죄, 죄송합니다. 공녀님과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송구합니다.”
카이젠은 그런 후작 부인에게 냉엄한 눈빛을 보냈다.
가만 보니 문밖에서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아스텔은 내 손님인데 허락도 없이 와서 협박을 하다니.”
“폐, 폐하…… 그게 아니라…….”
후작 부인은 하얗게 질려서 더듬거렸다.
카이젠은 차갑게 명령했다.
“당장 물러가라. 그리고 내 허락 없이 다시는 여기 오지 마라.”
“예,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후작 부인은 깊이 허리를 숙인 뒤 아스텔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후작 부인이 황급히 인사를 건네고 도망쳐 버리자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쓸데없이 귀찮은 걸 상대하게 해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폐하.”
이런 일이 있었으니 후작 부인은 더욱 아스텔을 미워하게 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마리안의 일로 원한은 충분히 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말도 없이 방문하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다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카이젠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당신 외할아버지인 후작의 병문안을 왔어.”
“……예?”
순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아스텔은 멍하니 되물었다.
카이젠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뭐 문제라도 있나?”
“아뇨, 아닙니다.”
갑자기 병문안이라니…….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과 카이젠은 아무런 친분도 없었다.
친분은커녕 사적으로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병문안을 온 거지? 자기 때문에 병이 났다고 생각해서 신경을 써주는 건가?
카이젠에게 그런 세심한 면이 있을 리가 없지만.
아스텔은 황당한 기분을 감추고 감사 인사를 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할아버님께서도 고마워하실 겁니다.”
“당신 몸은 좀 괜찮은 건가? 환자 곁에 있을 게 아니라 당신도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보시다시피 저는 아주 멀쩡합니다. 저보다는 편찮으신 할아버님이 걱정이지요.”
사실은 할아버님도 멀쩡하긴 하지만.
그래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아지셨다고 할 수는 없었다. 며칠 지난 뒤에 서서히 회복한다고 하면 되겠지.
아스텔은 근심 어린 낯을 가장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할아버님께서는 테오르를 보고 많이 회복하셨습니다. 전부 폐하 덕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
카이젠은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입을 다물었다.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두 사람은 말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 * *
아스텔은 카이젠을 후작의 침실로 안내했다.
아스텔이 머무는 곳은 서쪽에 있는 별채였다. 카이젠은 환한 빛이 스며들어 오는 복도를 걸어갔다.
덴츠 성은 호화로운 궁전이었다. 서쪽에 동떨어져 있는 별채도 복도 구석까지 섬세한 장식으로 가득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따라가면서 방금 전 시종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시종은 아스텔이 후작을 시중들던 사람을 내보냈다고 말했다.
“시종을 내보냈다고? 왜?”
“아스텔 님께서 직접 후작님을 돌봐 드리겠다고 하셨답니다.”
“아니, 왜 자기가 그런 일을 해? 멀쩡한 시종을 놔두고?”
시종의 설명이 이어졌다.
“후작님께서 낯선 시종을 곁에 두는 걸 싫어하신다고 합니다.”
설명을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그 노인네는 시종을 부릴 돈도 없으면서 뭐가 그렇게 까탈스럽단 말인가. 낯선 시종이 싫다고 공녀인 아스텔을 시녀처럼 부려먹는다니…….
카이젠은 앞서가는 아스텔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스텔은 후작의 침실 문 앞에 멈춰 섰다.
“할아버님, 들어가겠습니다.”
아스텔은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던 후작이 카이젠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니 누워 있게.”
카이젠은 예의상 만류했다. 그 말에 후작은 다시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았다.
“제국의 주인이신 폐하를 뵙습니다.”
아스텔의 외조부는 점잖은 노신사 같은 인상이었다.
단정한 외모는 집안 내력인지 이 늙은이도 군인이라기보다는 학자 같았다. 안색은 차분하고 노인네 주제에 눈도 맑다. 아무리 봐도 환자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노인네 때문에 일정을 앞당겨서 이곳으로 빨리 이동해 왔는데.
생각보다 훨씬 멀쩡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카이젠은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스텔은 유리창 쪽으로 열려 있던 창문을 닫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창가 옆에 있는 테이블에는 빈 약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 꼴을 보니 아스텔이 직접 병 수발을 들고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카이젠이 말없이 서 있기만 하자 후작은 조금 당황한 듯이 물었다.
“폐하, 무슨 일로 갑자기 오셨는지…….”
“병문안을 왔네.”
후작이 놀란 눈으로 아스텔을 힐끔거렸다. 아스텔은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할아버님. 폐하께선 할아버님의 병세가 어떤지 살피려고 오셨답니다.”
침대에 앉아서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던 후작이 뒤늦게 잔잔한 미소를 내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폐하께서 방문해 주시다니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그래. 몸은 좀 어떤가?”
“염려해 주신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늙은 후작은 점잖고 기품 있는 태도로 감사 인사를 했다.
전에 만났을 때는 완고하고 거만한 태도로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며 으름장을 놓더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이젠은 아스텔의 외조부를 잘 알지 못했다. 한 20년 전에 황궁에서 본 적이 있다는데, 너무 어릴 때라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탈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은 적이 있었다. 별로 관심도 없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다.
그런데 직접 만나보니 소탈하기는 무슨. 아주 거만하고 뻔뻔한 늙은이였다.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괜히 엄살을 피워서 모두를 귀찮게 했군.’
아스텔은 외조부가 아프다는 말에 눈물까지 흘렸다. 카이젠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도저히 좋은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형식적인 말을 주고받고 나자 할 말이 없었다. 후작은 몹시 감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은 없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던 카이젠은 아스텔을 돌아보며 물었다.
“테오르는?”
“자기 방에서 개와 놀고 있습니다.”
화젯거리를 찾은 카이젠은 후작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테오르는 정말 착하고 예의 바르더군. 그렇게 얌전한 애는 처음 봤어.”
그 말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칼렌베르크 후작은 카이젠을 유심히 살폈다.
후작은 지난 6년 동안 단 한 번도 황제에게 호감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호감은커녕 이 젊은 황제는 그에게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차분하게 예의를 지키고 있던 후작은 증오스러운 황제의 입에서 테오르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폭발하고 말았다.
하면 안 되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사람은 누구나 잠시 이성이 끊기는 순간이 있었다. 칼렌베르크 후작에겐 지금 이 순간이 그랬다. 갈등하던 후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황제를 6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부터 반드시 하고 싶었던 말을.
“예, 폐하. 테오르는 저희 애를 닮아서 참으로 순하고 예의 바르지요. 저희 애를 닮지 않았으면 예의도 모르고 버릇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우리 애를 닮았다’는 걸 한 번 더 강조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애를 닮아서요.”
할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에 아스텔은 흠칫 놀라며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후작은 슬그머니 손녀의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카이젠은 아스텔 쪽을 보지 못했다.
“……그런가.”
면전에서 욕을 먹고도 카이젠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의 말은 ‘못돼 먹고 예의 없는 너 같은 놈을 안 닮고 우리 아스텔을 닮아서 다행이다’라는 솔직한 욕이었다. 하지만 정작 욕을 먹은 당사자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니 화를 내지도 못했다.
카이젠은 화를 내는 대신 자기도 속으로 늙은 후작을 욕했다.
‘정말 쓰레기 같은 늙은이로군.’
이 노인은 자기 집 하녀가 손자의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로 갓난아기를 빼앗고 애 엄마를 내쫓은 장본인이었다. 그러고는 유모를 고용할 돈도 없어서 외손녀인 아스텔에게 애를 던져 주고 5년 동안 육아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딴 식으로 모두에게 민폐만 끼쳐놓고서는. 어린애가 생모인 하녀를 닮지 않고 자기 손자의 귀한 핏줄을 닮아서 착하고 예의 바르다고 자화자찬하는 인간이었다.
이쯤 되면 쓰레기라는 욕도 부족해 보였다.
‘과연, 레스턴 공작의 장인답군.’
아스텔은 이딴 늙은이가 뭐가 좋다고 직접 병 수발을 들고 있는 걸까.
시종까지 물리고 자기가 직접 약을 갖다 먹이는 게 아주 궁상이 따로 없었다.
분명 집에서도 이랬겠지. 하녀처럼 시중을 들며 늙은이 뒤치다꺼리를 해줬을 거야.
그 비참한 꼴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카이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스텔을 제대로 살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제대로 된 저택을 구해주고 영지도 주고 넉넉하고 부유하게 살게 해줄 것이다.
* * *
카이젠은 병문안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아스텔이 예의상 따라 나와서 감사를 표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할아버님께서도 영광으로 생각하실 겁니다.”
“…….”
카이젠은 아스텔의 외조부인 후작에게 별다른 악감정이 없었다.
아스텔을 찾다가 만났을 때, 늙은 후작은 황제인 자신 앞에서도 기세등등한 태도로 손녀의 행방을 말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완고하게 대답했다.
그때는 늙은 후작이 손녀를 아껴서 그런다고 생각해서 어느 정도 존중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손녀를 위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늘 같은 자존심 때문에 굴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역시 저 늙은이를 그냥 실수인 척 죽여 버릴 걸 그랬지.
“후작은 이제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키우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
카이젠은 늙은 후작에 대한 짜증을 억누르고 아스텔에게 조용히 제안했다.
“후작은 시골에서 요양하라고 하고 당신과 아이는 수도에서 사는 게 낫지 않나? 아이를 교육시키고 사교계에 내보내려면 수도에 있어야 하잖아.”
그러나 아스텔은 일말의 감정도 없는 차갑고 담담한 말투로 거절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수도에서 살 마음이 없습니다. 테오르도 칼렌베르크 가문의 후계자니까 할아버님 곁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할아버님께서 테오르를 기르는 걸 얼마나 많이 도와주셨는데요.”
솔직히 아스텔 혼자였다면 테오르를 어떻게 키울지 막막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스텔이 임신 중에 숨어 지낼 거처도 마련해 주고, 곁에서 아스텔을 돌봐줬다.
출산일이 다가왔을 때 몰래 입이 무거운 산파를 구해 온 사람도 할아버지였다. 갓난아기를 낳아 기르느라 육아에 허덕일 때도 할아버지는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테오르가 태어난 지 석 달쯤 되었을 때 밤새도록 잠도 안 자고 울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 아픈 것도 아닌데 아무리 달래줘도 밤새 잠을 자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아스텔이 잠도 못 자고 테오르를 달랠 때 곁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며 아이를 달랬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 본 광경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했다.
혹시라도 졸다가 아기를 떨어뜨릴까 봐 주변에 온통 베개와 쿠션을 쌓아놓고 테오르를 끌어안고 밤을 새우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그러나 카이젠은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기에 이해하지 못했다. 공감도 하지 못했다.
“…….”
그래,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을 꺼내본 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침착하게 거절당했다.
카이젠은 짜증이 솟아나는 걸 참고 생각을 전환했다.
‘저 늙은이를 떼놓을 수 없으면 어쩔 수 없지. 차라리 저 늙은이를 이용해서 아스텔을 수도에 묶어놓자.’
아스텔은 저택과 영지를 준다는 그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늙은 후작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 때문에 몇 번 거절하더라도 어린 후계자가 있는데 연금에만 의존해서 빈털터리로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겠지.
후작이 테오르와 함께 수도에 살겠다고 하면 아스텔도 어쩔 수 없이 수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래. 후작은 예전부터 몸이 안 좋다고 했었지. 이참에 수도에 가서 실력 좋은 의사에게 보이는 것도 좋을 거야. 아이에게도 수도를 구경시켜 주고.”
“할아버님께선 몸이 좋지 않아서 수도까지 함께 가실 수 있을지…….”
“한동안 이곳에 머물 테니 회복할 시간은 충분할 거야. 이곳은 전에 있던 성과 달리 편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필요하면 수도에 연락해서 의사를 더 불러주지.”
카이젠은 아스텔이 필요 없다고 하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 그렇지. 조만간 이곳에서 무도회가 열릴 거야.”
“무도회요?”
“그래.”
카이젠은 한 호흡 정도 간격을 두고 이어서 말했다.
“괜찮다면 당신도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
제안을 꺼내면서도 카이젠은 아스텔이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스텔은 단 한 번도 그가 시키는 대로 한 적이 없었다.
6년 전에는 언제나 시키는 대로 했지만, 재회한 뒤에는 일부러 성격을 긁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당연히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래, 거절당해도 말이나 해보자’ 싶은 기분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아스텔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자기도 모르게 짜증부터 났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그냥 그러겠다고 대답을…….”
화를 내던 카이젠은 아스텔을 보며 멈칫했다.
“뭐라고?”
아스텔은 황당한 눈길로 그를 보면서 다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폐하께서 명령하신 대로 무도회에 참석하겠습니다.”
“무도회에 참석하겠다고?”
“예, 폐하.”
카이젠은 눈가를 찌푸리며 아스텔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의심이 가득 서린 시선이었다.
“정말 무도회에 오겠다는 말인가?”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이쯤 되자 아스텔도 어이가 없었다.
‘누가 보면 참석하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가겠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이겠네.’
오라고 해서 가겠다고 했을 뿐인데. 왜 저런 반응인지 알 수가 없다.
“왜 그러시나요, 폐하? 방금 참석하라고 하셨잖아요?”
“아…… 그래, 그랬지.”
카이젠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어째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열 살 무렵부터 함께 어울려 자랐지만 저 남자가 저렇게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았다.
자신이 무도회에 가겠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 걸까.
자기가 먼저 참석하라고 해놓고.
아스텔은 당혹스러워하는 카이젠을 묵묵히 올려다봤다.
“제가 참석하지 않기를 바라고 예의상 하신 말씀이라면 송구합니다.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냐.”
그제야 조각 같은 얼굴에서 당황한 기색이 사라진다.
대신 익숙한 짜증과 분노가 드러났다.
“내가 당신한테 그딴 겉치레를 할 것 같나? 당신이 오지 않기를 바랐으면 오지 말라고 하지. 쓸데없이 돌려가며 말하는 취미 따위…….”
화를 내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잃고 끊어졌다. 선혈처럼 붉은 눈에 파도가 이는 것처럼 당혹스러운 감정이 일렁거렸다.
아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혼 관계로 지낸 10여 년간, 아스텔은 모든 무도회와 만찬, 야회에 카이젠의 파트너로 참석했다.
수많은 연회장과 무도회장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그의 곁에 나란히 서 있었다.
카이젠은 언제나 사교계의 관습을 지켰다. 무도회가 있는 날은 먼저 손을 내밀고 아스텔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청했다.
아스텔은 다정한 미소와 정중한 요청에 취해 매번 행복한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단 한 번만이라도 진심이 있었을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다정함은 그저 연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웃으며 손을 내밀 때마다 그는 아스텔이 자신의 손을 거부하길 바라며 불쾌감을 숨겼으리라.
카이젠도 지금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잘생긴 얼굴에 씁쓸한 회한이 드러났다. 붓으로 그린 것 같은 입술이 몇 번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다.
하긴, 이제 와서 무슨 할 말이 있으려고.
복도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청객처럼 찾아온 옛 시절의 추억이 두 사람을 침묵으로 갈라놨다. 그 간격을 먼저 뛰어넘은 건 아스텔이었다.
“괜찮으시다면 무도회에 참석하겠습니다.”
놀란 눈이 아스텔을 향했다. 그녀는 무도회 같은 행사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무도회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왔다는 걸 깨달았다.
‘무도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
무도회라면 주변에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람이 많다는 건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아스텔은 황제가 하루 만에 내친 불쌍한 전 황후였다.
그런 자신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편찮으신 할아버님과 어린 조카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어요’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면, 카이젠은 체면 때문에라도 빨리 허락해 줄 것이다.
‘사실 거절할 이유도 없지만…… 그래도 또 이상한 반응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래서 확실하게 허락을 받기 위해 최대한 사람이 많은 무도회장을 골랐다. 그런 의도를 알지 못하는 카이젠은 참석하겠다는 말에 또다시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아스텔을 직시하다가 눈을 돌렸다.
“……그래, 참석해 줘서 고맙군.”
“…….”
무도회에 참석한 손님을 보고 집주인이 하는 인사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지금 여기가 마치 무도회장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스텔은 무릎을 살짝 굽히며 답례를 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놀리지 마.”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불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매번 거절만 하다가 갑자기 수락하니까 이상해서 그랬던 것뿐이야.”
대놓고 비꼬는 말투였다.
‘누구는 거절하고 싶어서 거절했는지 아나.’
자기가 항상 쓸데없는 것만 요구했으니까 그렇지.
아스텔은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대신 조용히 대답했다.
“저도 언제나 거절만 하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수락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면 수락했겠지요.”
“그럼 내 제안에 문제가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순간 ‘정말 몰라서 물으시나요?’ 하고 물을 뻔했다. 그러나 아스텔의 대답은 어린아이의 해맑은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아스텔 고모!”
복도 저편에서 곰 인형을 끌어안은 테오르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커다란 사냥개 블린이 테오르를 뒤따르고 있었다.
“테오르, 복도에서 뛰어다니면 안 돼. 위험해.”
조용히 타일렀더니 테오르는 아스텔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면서 히잉 하고 우는소리를 했다.
“이제 안 그럴게.”
“그래.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뒤이어 도착한 블린이 카이젠과 아스텔을 돌아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아스텔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던 테오르도 카이젠에게 인사를 건넸다.
“폐하, 안녕하세요.”
“그래.”
카이젠이 강아지를 어르듯이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테오르는 눈을 감으며 까르르 웃었다. 그의 손이 사라지자 고개를 들고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폐하, 왜 여기 계세요?”
카이젠이 이쪽을 한 번 돌아봤다.
“네 고모에게 무도회에 와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간청이라니. 그렇게 말할 만큼 간절한 부탁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도회라는 소리에 테오르가 흥미를 보였다.
“고모, 무도회에 가는 거야?”
“응.”
테오르가 귀엽게 미소를 지었다.
젖살이 남은 하얀 뺨에 보조개가 패었다.
“나도 같이 가도 돼?”
“뭐?”
“나도 무도회에 가고 싶어.”
당황한 아스텔 대신 카이젠이 웃으며 물었다.
“무도회가 뭔지 아느냐?”
“네. 동화책에서 봤어요. 예쁜 옷을 입고 춤추는 거예요.”
“그래. 잘 아는군.”
하긴 동화책에 무도회 얘기가 많이 나오긴 하지. 어린 테오르가 관심을 가질 만도 했다. 테오르는 한 번도 무도회를 구경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스텔은 카이젠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재빨리 테오르를 달랬다.
“너는 아직 어려서 안 돼. 나중에 더 크면 데려가 줄게.”
그 말에 테오르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테오르는 곰 인형의 팔을 흔들며 풀죽은 목소리를 냈다.
“나도 무도회에 가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달래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데 카이젠이 먼저 선수를 쳤다. 카이젠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테오르와 눈높이를 맞추고 웃으며 말했다.
“무도회엔 데려가 줄 수가 없구나. 대신 이곳 정원을 구경시켜 줄까?”
“정말요? 정원 담장 밖에 나갈 수 있어요?”
“담장? 누가 못 나간다고 했느냐?”
카이젠은 의아한 듯이 묻다가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스텔은 그의 눈을 피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아스텔은 테오르를 이 별채 안에만 머물게 했다. 지난번 사냥 별장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걱정돼서였다. 별채의 정원에서만 놀고 절대 별채의 담벼락을 넘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아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이젠은 알 만하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찼다.
“이곳 정원은 규모도 크고 화려하지. 내가 안내해 줄 테니 같이 나가자.”
테오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스텔을 돌아봤다.
“나가도 돼?”
“…….”
기운 없이 풀 죽어 있는 것보다는 잠시 데리고 나갔다 오는 게 좋겠지.
별채 근처라면 위험할 것도 없다. 어차피 누굴 만나든 카이젠이 함께 간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테고. 물론 테오르를 카이젠과 단둘이 내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스텔은 웃으며 테오르의 손을 잡았다.
“그래. 같이 구경하러 가자.”
순간 카이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스쳐 가는 것 같았다.
아스텔은 다시 그를 돌아봤다. 하지만 잘못 본 건지 무심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 * *
서쪽 별채에서 궁전의 중심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밋밋하게 뻗은 회랑으로 연결된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원을 지나서 가는 정원 길이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데리고 정원 길을 따라 걸었다. 사냥개 블린도 테오르 옆에 붙어서 함께 걸었다. 한 걸음 떨어진 옆에는 카이젠이 있었다.
밝은 햇살이 비치는 정원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정원길에는 중간중간 작은 샛길이 몇 개 있었는데, 샛길로 들어가면 화원이나 온실 등이 나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심심해져서 중간에 있는 샛길로 들어갔다. 거기엔 작은 다실이 있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야?”
“다실이야. 차를 마시는 곳이야.”
여덟 개의 연청색 기둥이 지붕을 받친 팔각형 모양의 다실이었다. 연녹색 벽옥으로 된 바닥이 정원의 햇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반짝인다.
다실 옆에는 커다란 아카시아가 있었다. 하늘 높이 뻗은 가지가 다실의 푸른 지붕 위에 순백의 꽃잎을 드리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따스한 햇살 속에 산뜻한 아카시아향이 스며들었다.
“와…… 예쁘다.”
테오르는 층층이 늘어진 아카시아 꽃송이를 붙잡으려고 발꿈치를 들고 양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하얀 꽃송이는 아슬아슬하게 테오르의 손에 닿지 않았다.
테오르는 두 손을 번쩍 들고 꽃을 잡으려고 깡총깡총 뛰었다. 귀여우면서도 웃기는 모습이었다.
곁에 있던 카이젠이 낮게 웃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들어서 아카시아 꽃을 만질 수 있게 해줬다.
“가시가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다실을 구경하고 다시 중앙의 정원 길로 빠져나가서 한참을 더 걸어갔다. 작은 연못가를 지나갈 무렵 테오르가 손가락으로 연못 옆에 있는 녹색 건물을 가리켰다.
“저쪽에 이상한 집이 있어.”
“집이 아니라 파빌리온이야.”
“파빌리온은 뭐 하는 곳이야?”
파빌리온은 정원에 있는 커다란 정자였다. 대부분 휴식실이나 다실로 쓰였는데 여기는 유리창을 달아서 전시실처럼 만들어놓았다고 들었다.
“음. 연못을 구경하려고 만든 거지. 저 안에 동쪽 산맥 너머에서 온 도자기가 있다는데 가볼까?”
“응. 가보고 싶어.”
전시실로 쓰이는 곳이니 문이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열렸다.
자세히 보니 청소 중인 모양이었다. 빗자루와 걸레가 있었는데 청소하는 시녀는 보이지 않았다.
전시실 안에는 온통 도자기가 가득했다. 새하얀 바탕에 화초가 양각된 도자기부터 흰 새가 그려진 연녹색 화병, 다채로운 꽃무늬로 휘감긴 청색 도자기.
그중에 가장 화려한 건 중앙의 둥근 협탁에 놓여 있는 푸른 도자기였다. 청옥처럼 새파란 남색 바탕에 금으로 화려한 꽃이 그려져 있다. 탐스러운 꽃송이와 꽃에서 돋아난 잎사귀까지 전부 금이었다.
이 도자기들은 산맥 너머 먼 이국에서 수입된 것들이라 하나하나가 엄청난 가격을 자랑했다. 이런 호사스러운 취미는 카이젠의 조부인 길베르트 황제의 취향이었다.
아스텔은 도자기에 그려진 정교한 무늬를 구경하며 감탄했다.
“정말 화려하네요.”
“쓸데없는 사치지.”
카이젠은 별로 감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런 건 수도의 황궁에도 많이 남아 있어. 다 팔아버릴까 했는데 신하들이 말려서 남겨뒀지만.”
실용적인 성격의 카이젠은 과거에도 이런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황궁에도 그의 조부가 수집한 수많은 보물과 그 보물들을 보관하는 화려하고 세련된 건물이 잔뜩 있었다. 새 주인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니 귀한 장식품들은 먼지만 쌓이다가 잊혀지겠구나.
“테오르, 만지면 안 돼.”
호사스러운 도자기들을 보고 반한 테오르는 중앙에 놓인 푸른 도자기에 손을 대려다가 아스텔이 만류하자 얼른 손을 거뒀다.
테오르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그릇은 뭐 하는 거야?”
“그냥 예쁘게 장식해 놓고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거야. 잘못하다 떨어뜨리면 깨져 버리니까 함부로 만지면 안 돼. 알겠지?”
“응. 정말 예쁘다.”
세 사람은 파빌리온을 떠나 계속해서 정원을 구경했다. 한참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 걷다 보니 본궁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저쪽에는 뭐가 있는지 가보면 안 돼?”
본궁 근처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테오르가 중앙 길에서 이어지는 작은 샛길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한번 가보자.”
별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빼놓고 안 갔으면 후회했을 만큼 아름다운 경치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화원이 있었다. 수많은 꽃이 여러 개의 화단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름도 다 못 댈 만큼 온갖 종류의 꽃이 다 있었다.
“우와…….”
테오르는 화단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블린도 화단 근처를 돌아다니며 킁킁 꽃냄새를 맡았다. 아스텔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었다.
“집에 돌아가면 우리 정원에도 이런 화단을 만들어줄게. 얕은 연못도 만들고 물고기도 키우자.”
“정말?”
“응. 꼭 만들어줄게.”
이제 연금도 받게 됐으니 몇 달만 조금 아끼면 작은 화단과 연못을 만들 비용 정도는 충분히 댈 수 있으리라.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저택도 수리하고 예쁜 정원도 만들어줄 것이다. 테오르는 작은 정원 안에서 개와 뛰어놀며 자라겠지. 상상만 해도 행복한 미래였다.
‘그러려면 반드시 테오르와 할아버지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야 해.’
카이젠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 집에는 화단도 없는 건가?”
“정원이 있습니다만 화단을 가꿀 여유는 없었습니다.”
꽃을 심고 가꾸는 것도 시간과 정성과 돈이 필요한 일이었다. 불행히도 아스텔은 어린 테오르를 기르는 동안에는 세 가지 모두 여유롭게 쓸 수가 없었다.
정원에 피어난 화초에 쏟을 정성이 있으면 그 시간에 약초라도 하나 더 심어야 했다. 그래야 약초를 팔아서 아이에게 먹일 계란이나 생선을 살 수 있었으니까.
카이젠은 말없이 아스텔을 바라보기만 했다. 뭔가 불만스러운 눈빛이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텔은 그런 카이젠을 힐끔 돌아봤다.
‘무도회 날 반드시 허락을 받아내야지.’
수많은 사람 앞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밀어붙이면서 간청하면 카이젠은 체면 때문에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으리라.
집으로 돌아가서 매달 나오는 연금으로 풍족하고 여유롭게 살면 된다. 아스텔이 그런 계산을 하면서 화단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반대편 화단 근처를 돌아다니던 테오르가 보이지 않았다.
“테오르?”
아스텔은 테오르를 부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 높이 피어오른 수많은 꽃송이만 화단을 수놓고 있었다. 테오르는 물론이고 같이 왔던 블린도 없다.
아스텔은 놀라서 외쳤다.
“테오르? 어디 있니?”
카이젠도 주변을 둘러보며 테오르를 찾았다.
“테오르!”
아스텔은 화단 주변을 서성이며 테오르를 불렀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높이 자라난 노란 꽃들이 잔바람에 물결치듯 흔들렸다. 살랑살랑 일렁이는 연노란 물결이 화단 반대편으로 길게 이어졌다.
아스텔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촘촘히 붙은 꽃줄기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더니, 흔들리는 꽃잎 사이로 조그만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테오르였다.
“테오르!”
테오르가 야트막한 화단을 뛰어넘어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는 밖이 안 보였어.”
토카르 꽃들은 테오르의 키보다 더 컸다.
그 안에 들어갔다 나온 테오르는 온통 노란 꽃가루투성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노란 꽃가루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마치 꽃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가 꺼낸 것 같았다.
노란 가루가 들러붙은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금발처럼 보일 정도였다.
“화단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잖니?”
아스텔이 나무라자 테오르가 블린을 가리키며 항변했다.
“블린이 안으로 들어가 버려서 어쩔 수 없었어.”
테오르가 가리킨 곳에서 금빛 털이 튀어나왔다. 블린이었다. 테오르와 마찬가지로 블린도 온통 노란 꽃가루투성이였다. 까만 코에도 얼룩처럼 노란 가루가 묻어 있다.
“블린이 갑자기 화단에 들어가서 잡으려고 따라갔어.”
블린은 화단 밖으로 나와서도 계속 꽃잎에 코를 대고 킁킁대며 꽃향기를 맡았다.
그 모습을 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그래. 맞아. 개들이 이 꽃을 좋아했어.”
그래서 애완견이나 사냥개를 기르는 황궁에는 이 꽃을 심지 않았다. 열심히 가꾸어봤자 개들이 와서 짓밟아버리니 화초로 키울 수가 없었지.
“앞으로는 이 근처에선 놀지 말아야겠다. 꽃가루가 묻어서 안 되겠네.”
테오르는 코끝에 묻어 있던 꽃가루 때문에 재채기를 했다.
“엣취!”
곁에 있던 블린도 꽃가루가 잔뜩 묻은 몸을 부르르 털었다.
노란 꽃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아스텔은 손수건으로 테오르의 얼굴을 닦아줬다. 노랗게 물든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얼른 가서 둘 다 씻어야겠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데리고 별채로 되돌아갔다. 정원의 출구에 다다르자 카이젠은 떠나기 전에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만 가볼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내게 말해.”
아스텔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예,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무도회 날 뵙겠습니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약간은 아쉬운 듯한 시선이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 * *
와장창!
테이블 위의 꽃병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옆에 있던 시녀가 깨진 꽃병을 치우려고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후작 부인은 그 시녀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아악!’ 시녀는 비명을 지르며 화병 조각 위로 엎어졌다.
“당장 나가!”
바닥에 엎어진 시녀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치맛단이 흠뻑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
플로린은 저택의 응접실에서 소리치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후작 부인은 딸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너는 대체 뭘 한 거니? 너 혼자 폐하를 만나러 가더니 왜 네 언니를 구해내지 못했어?”
“폐하께서 안 된다고 하시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플로린은 차분한 물처럼 조용하게 응수했다. 사실 플로린은 마리안을 진심으로 구해내고 싶지 않았다. 멍청해서 사고만 치는 언니는 어떤 면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황제가 용서해 주지 않겠다는데 플로린으로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멍청한 것 같으니, 그래도 마리안을 풀어달라고 폐하께 빌었어야지!”
후작 부인은 머리끝까지 분노했다.
아스텔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하니 아직도 치가 떨렸다.
‘이 내가 그깟 것에게 모욕을 당하다니……!’
아스텔이 화려한 별궁에서 지내는 걸 보니 더욱 속이 터졌다. 가엾은 마리안은 지금도 감옥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 멍청한 폐황후는 손님 대접을 받으며 호사스럽게 지내고 있다니.
후작 부인은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그 계집에게 그런 좋은 거처를 주다니!”
플로린은 더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후작 부인은 원래 분별력이 떨어졌다. 괜한 소리를 하다가 얻어맞을 수도 있었다. 생각이 짧고 인내심이 없는 후작 부인은 플로린에게 절대 다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다정한 어머니는커녕 플로린이 어릴 때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에잇!”
후작 부인이 장식장 위에 있는 도자기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화려한 금세공이 된 도자기가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응접실 안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화병도 도자기도 깨지고 카펫은 다 젖고 가구도 부서졌다.
플로린은 한참 이것저것 집어 던지면서 화풀이를 하는 어머니를 구경하다가 말했다.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잠시 정원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세요. 그러다가 몸 상하시겠어요.”
하나도 걱정스럽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계속 화를 내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래. 그래야겠다.”
실컷 화풀이하느라 지친 후작 부인은 딸의 말에 동의했다.
후작 부인은 정원 길을 걸었다. 아스텔 때문에 화가 치밀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머리를 좀 식히고 싶었다.
오후의 정원은 조용했다. 맑은 햇살이 정원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화단에 가득 피어난 하얀 은방울꽃이 햇살을 머금고 싱그러운 향내를 풍겼다.
정원을 둘러보던 후작 부인은 저 멀리 노란색 꽃들 사이에 숨어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조금 전에 아스텔의 별채에서 만났던 남자아이가 화단 안에서 놀고 있었다.
‘저것들은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별채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본궁 근처에 오다니 정말 염치도 없지.
아이는 화단을 가득 채운 노란 꽃을 헤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버릇없는 것 같으니.’
한참 화단을 헤집고 다니던 아이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커다란 금빛 털 뭉치를 쓰다듬었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금빛 털을 가진 큰 개인 것 같았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아스텔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황제 폐하가 서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폐하를 현혹시키다니 저 교활한…….’
후작 부인은 잠시 두 사람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와 노닥거리던 아스텔은 화단에 있는 아이를 불렀다. 아이가 달려오자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조카라고 했던가?’
잘 모르겠지만 외가 쪽 친척이라고 들었다.
아스텔이 아기 때부터 직접 키웠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아스텔은 저 애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있는 것 같았다.
풀밭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와 그런 아이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아스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슬그머니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후작 부인이 생각하기에는 충분히 기발하고 좋은 아이디어였다.
“너.”
후작 부인은 뒤따라오는 시녀를 불렀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가까운 시녀였다.
그녀는 부채 끝으로 저 멀리 화단 근처에서 놀고 있는 테오르를 가리켰다.
“저 애를 몰래 붙잡아 와라.”
“예?”
시녀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저분은 폐하께서 초대하신…….”
“걱정 말고 데려오기나 해. 저 애를 해치려는 게 아냐. 잠시 붙잡아두기만 하면 되니까.”
후작 부인은 저 어린아이를 이용해서 아스텔에게 보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건방진 것, 어디 두고 봐.’
반드시 제대로 되갚아줄 테다. 그 계집이 눈물을 흘리며 비는 걸 보고 말겠다.
막강한 힘을 가진 황제는 건드릴 수 없으니 만만한 아스텔에게라도 분풀이하려는 것이었다.
* * *
아스텔은 테오르를 씻기고 침실에 데려다준 뒤 외조부의 침실로 돌아왔다.
“왜 폐하께 이상한 말씀을 하셨어요?”
방으로 돌아온 아스텔은 후작에게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님을 오해하잖아요.”
후작은 환자 연기를 끝내고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봤자 늙은 속물이라고 오해하겠지. 마음대로 오해하라고 해라.”
후작은 손녀의 질책을 무시한 채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그러다 아스텔의 화난 얼굴을 보고 다시 변명을 했다.
“그렇게 오해하는 편이 더 좋은 거 아니냐? 그래야 애 엄마가 곁에 없는 게 더 자연스러워질 테니.”
뭐……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할아버님이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다정하고 마음 넓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기면, 테오르의 출생에 대한 거짓말에 설정 오류가 난다.
일단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애 엄마를 내보낸 것부터 설명하기 어려워질 테니.
아스텔은 한숨을 쉬며 외조부의 맞은편에 앉았다.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이런 오해나 받으시고.”
아스텔은 언제나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고 찾아갔을 때부터 계속 도움을 받고 신세만 진 데다가 이제는 아스텔 때문에 이렇게 고생까지 하고 있었다.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이 일의 공범이 돼서 아스텔과 함께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
“너와 테오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한 오해를 받아도 상관없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는 오후의 햇살이 가득했다. 화단을 장식한 꽃잎들이 햇빛을 받아 다채로운 빛깔을 뽐냈다.
후작은 그 평온한 풍경을 내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게 자식은 둘밖에 없었는데 모두 죽었지. 손자인 지그문트도 죽었으니 이제는 너와 테오르밖에 없어.”
가만히 듣던 아스텔이 반박했다.
“프리츠 오빠도 있는데요.”
“그 녀석은 내게 연락도 하지 않는데 무슨…….”
외할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쫓겨났을 때, 아버지는 아내가 죽고 처가와는 인연이 끊겼다며 재빨리 후작가와 선을 그었다.
그 일로 두 사람은 원수 관계가 되었고, 아스텔 남매는 외할아버지를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아스텔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외가에 편지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오빠인 프리츠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외가와 연락을 끊었다.
‘그러고 보니 떠난 뒤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
두 남매는 사이가 좋았다. 하나뿐인 남매간이다 보니 친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츠는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는 밤낮없이 공부에 매달리고 성장해서는 쉼 없이 일에 매달렸다.
6년 전, 이혼당하고 수도를 떠날 때 프리츠는 저택의 문 앞까지 쫓아 나와서 아스텔을 붙잡았다.
‘어디로 가려는 거야? 괜한 짓 하지 말고 아버지께 용서를 빌어.’
그 순간 아스텔은 하나뿐인 오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애정도 접었다.
결혼한 지 하루 만에 이혼당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여동생에게 위로 한마디 건네지 않고 질책하는 오빠에게 애정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더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빠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 후 6년간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가 실각하면서 프리츠도 기사단에서 물러났다고 들었는데, 그 후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듣지 못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지도 않다만.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수도에 가도 굳이 가족들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될 수 있으면 우연찮게 마주치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할아버지가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런데 황제는 왜 갑자기 병문안을 한다며 찾아왔을까? 그렇게 예의를 갖추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게…….”
아스텔은 카이젠이 한 말을 외할아버지에게 전해줬다.
“무도회에 참석하라고 했다고?”
“별일 아니에요. 가까이 있으니 챙겨주고 싶은가 봐요. 아마도 제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카이젠은 이제 와서 아스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뭐든 챙겨주려고 하고 자꾸 귀찮게 불러대곤 했다.
‘정작 꼭 필요한 부탁은 다 거절하면서 말이지.’
할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것도 테오르만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카이젠이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다 함께 왔다.
아스텔이 바라던 대로 테오르와 단둘이 왔으면 굳이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간단하게 편지로 허락을 구했을 텐데.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소용없겠지.’
어쨌든 무도회는 좋은 기회였다.
‘빨리 허락을 받으려면 정신없을 때 말을 꺼내는 게 좋아.’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길게 대화를 나눌 시간을 주지 않고 빨리 결정하게 만드는 게 좋다.
그래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허락을 받기 위해 일부러 무도회장을 골랐다.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니까.’
더 시간을 끌지 않게 그날 분명히 허락을 받을 것이다.
아스텔은 그렇게 다짐했다.
“괜찮겠느냐……?”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아스텔은 할아버지가 뭘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현재 아스텔은 폐위된 전 황후였다. 게다가 아스텔의 가문은 힘을 잃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면 불편한 수군거림을 듣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걸 걱정하고 있었다.
“그럼요. 저는 괜찮아요.”
테오르와 할아버지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후작은 아스텔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닮았어.”
아스텔은 할아버지의 착잡한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누구를 말하는 건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외조부의 푸른 눈에 씁쓸한 감상이 스며들었다.
“여기 와서 황제를 보고 나니까 알겠더구나. 확실히 닮았어.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게 놀라울 정도야.”
그건 그랬다.
제발 카이젠을 안 닮기만을 바랐는데. 배 속의 아이는 부모의 바람과 반대로 생긴다고 하던가.
아스텔은 씁쓸한 상념을 미뤄두고 웃었다.
“본인도 못 알아보는데요.”
“네 아비는 알아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후작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스며 있었다.
“네 아비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교활하고 영악해. 눈썰미도 좋고 눈치도 빠르지. 그 녀석이 테오르를 보면…….”
아스텔도 그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카이젠이 갓난아기일 때부터 곁에서 성장하는 걸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테오르를 보면 어떻게 될까?
카이젠의 어린 시절을 닮은 테오르.
그리고 테오르 옆에 있는 아스텔.
눈치 빠른 아버지는 보자마자 모든 상황을 눈치챌 수도 있다. 아버지가 눈치챈다면 상황은 더 최악이 된다. 카이젠에게 들키는 것보다 훨씬 더 불길한 일이었다.
아스텔은 그 불길한 상상을 털어버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다. 테오르는 절대 수도에 데려가지 않을 테니까.
자신이 절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아스텔은 확신 어린 어조로 장담했다.
“절대 테오르를 수도에 데려가지 않을 거예요.”
무도회 날 반드시 허락을 얻어서 테오르와 할아버지를 돌려보낼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잠시 동안 무도회에 나가서 비웃음거리가 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똑똑.
그때 짧은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시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저…… 아스텔 님.”
“무슨 일이지?”
젊은 시종이 놀란 낯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그 순간 방안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 * *
아스텔은 황급히 별채의 응접실로 향했다.
“조심해!”
문 앞에서부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펼쳐진 풍경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황제가 보낸 시종들과 하인들이 커다란 상자들을 별채 안으로 가져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상자가 안으로 옮겨졌다.
첫 번째 상자부터 드레스가 쏟아져 나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드레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보석과 장신구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것들뿐이었다. 예전에 만찬에 입고 나오라고 보냈던 것들보다 더 고급품으로 보였다.
멍하니 구경하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상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스텔은 시종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시종은 아스텔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폐하께서 아스텔 공녀님께 보내신 선물입니다.”
그건 아까도 들었다. 대체 왜 또 이런 걸 잔뜩 보냈는지 물으려던 것인데.
아스텔이 물어보기 전에 시종이 먼저 답을 했다.
“아스텔 공녀님께서 무도회에 참석하실 때 의상과 장신구가 필요할 테니 최대한 많이 가져다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무도회에 가겠다고 말한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참 쓸데없이 빠른 일 처리였다. 뭐 무도회에 가려면 입고 갈 만한 드레스가 필요하긴 했지만.
지금 카이젠의 기분을 언짢게 만드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무도회 당일까지는 카이젠의 기분을 맞춰줘야만 했다. 그래야 테오르의 일을 허락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아스텔은 차분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 드리게.”
카이젠이 보낸 건 물건만이 아니었다.
네 명의 시녀도 있었다. 곱상하게 생긴 네 명의 시녀가 아스텔에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시중을 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 잘 부탁해.”
안 그래도 시녀들이 좀 필요하긴 했다. 이 많은 걸 혼자 치우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다 들어갈 데나 있을지 모르겠다만.
아스텔은 줄줄이 늘어선 상자들을 가리키며 부탁했다.
“우선 이것들을 좀 정리해 줘.”
시끌벅적한 소리에 테오르가 아스텔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아스텔 고모?”
테오르는 상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드레스와 보석을 구경하다가 아스텔에게 물었다.
“아스텔 고모, 이건 뭐야?”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이야.”
아스텔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뒤따라온 한나에게 부탁했다.
“한나. 무도회용 드레스를 한 벌 골라서 준비해 줘.”
“예, 아스텔 님.”
선물 받은 드레스들은 전부 가봉된 드레스였다.
아스텔의 몸에 맞춘 게 아니라서 무도회에 입고 가려면 그동안 입어보고 치수를 재서 다시 수선해야만 했다.
테오르는 줄줄이 걸린 드레스 사이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아스텔에게 달려왔다.
“폐하는 고모를 좋아해?”
“뭐?”
아스텔은 상자를 치우다가 멈칫했다.
“테오르. 그게 무슨 말이니?”
“좋아하는 레이디에게 선물을 보내는 거 아냐?”
이런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걸까? 동화책은 아닌 것 같은데. 할아버님의 예절 교육인가?
테오르의 순진한 물음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아스텔은 상자를 내려놓고 아이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런거 아니야. 무도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드레스가 없으니까 보내주신 거야.”
“그런거야?”
“그래. 그리고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느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그건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말이야. 알았지?”
“응.”
아스텔은 테오르의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자, 심심하면 여기 앞마당에 나가서 놀아도 돼.”
테오르는 별채에 딸린 정원으로 나갔다.
상자 뒤로 드레스를 고르던 한나와 눈이 마주쳤다. 테오르와 달리 한나는 조금 복잡한 눈빛이었다. 복잡한 건 아스텔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황제의 이런 호의가 낯설었다.
카이젠은 왜 자꾸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아스텔에 대한 그의 호의는 지난 세월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리라. 그 정도는 아스텔도 이해하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카이젠처럼 영리한 사람이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아스텔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난번에도 이런 일 때문에 괜한 시비를 겪었는데.’
그때도 카이젠이 선물을 보내고 만찬에 강제로 불러들이는 바람에 마리안에게 원한을 샀다.
지금 이곳에는 그 마리안의 어머니가 와 있다. 아스텔이 카이젠의 선물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그녀도 좋게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냥 다 돌려보낼 수도 없고…….’
문젯거리를 피하기 위해 선물을 돌려보내면 반대로 카이젠이 화를 내겠지. 카이젠은 화만 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호의를 받으라고 강요할지도 모른다. 린든을 보내서 만찬에 오라고 강요했던 것처럼.
그에게는 자신의 죄책감을 없애는 것만이 중요했다. 자신의 행동 때문에 상대방이 입는 피해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아스텔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상자에 있는 드레스를 꺼내서 정리했다. 드레스에 박힌 보석이 햇살을 받아 시릴 만큼 눈부시게 반짝였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의 일이 마무리되길 바라는 수밖에.
* * *
그 후 며칠간 아스텔은 계속 바빴다.
별채를 관리하고 할아버지와 테오르를 살피고 틈나는 시간에는 무도회를 준비했다. 한나도 무도회용 드레스를 골라서 아스텔의 몸에 맞게 수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루해진 테오르는 정원에 나가서 놀기 일쑤였다. 오늘도 테오르는 아스텔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아스텔 고모. 블린하고 정원에 나가서 놀아도 돼?”
“그래. 그러렴.”
아스텔은 테오르를 돌봐주는 시녀에게 명령했다.
“테오르를 돌봐줘. 이 근처에서만 놀게 해.”
“예, 레이디.”
테오르는 시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드레스에 옷핀을 꽂던 한나가 그런 테오르를 돌아보며 웃었다.
“테오르 도련님은 활발하시네요. 지그문트 님은 정말로 얌전하셨는데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던 아스텔은 잠시 멈칫했다. 한나의 말대로였다. 테오르는 타고난 천성부터 지그문트와 달랐다. 성격도 외모도 나이가 들수록 차이가 극명해지고 있었다.
그 반응을 오해한 한나가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스텔 님……. 제가 괜한 소리를…….”
“아냐, 괜찮아.”
한나는 테오르가 지그문트의 아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줘야겠지.’
함께 살면서도 계속 눈 색을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 * *
테오르는 별채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아스텔이 장난감으로 작은 공을 만들어줬는데 그걸 가지고 블린하고 놀았다. 테오르가 공을 던지면 블린이 가서 받아 오는 놀이였다.
한참을 그렇게 놀고 나자 블린은 지쳤는지 화단 근처에 배를 깔고 누웠다. 테오르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쳐드는 화단을 돌아다니며 혼자 공차기를 했다.
“응?”
얼마만큼 시간이 지난 뒤 테오르는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시녀와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시녀가 없어졌다.
“블린. 여기 있는 시녀 누나는 어디 갔어?”
누워 있던 블린이 고개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답 없이 꼬리만 살랑살랑 흔드는 블린을 보고 테오르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녀 누나랑 같이 있으라고 했는데.”
반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못 보던 빨간 머리 시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련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응?”
“아스텔 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저쪽에 맛있는 간식이 있답니다. 같이 먹으러 갈까요?”
시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테오르에게 다가왔다. 테오르는 간식이라는 말에 반가워하며 달려가려고 했다.
“그르릉…….”
화단에 누워 있던 블린이 고개를 들고 으르렁거렸다. 테오르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도련님?”
“웅……. 모르는 사람이야. 안 돼.”
엄마는 항상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다.
별채에는 한나를 제외하고도 시녀가 네 명 있었다. 테오르는 네 명의 얼굴을 다 알고 있었다. 엄마가 누군가를 보냈으면 그 네 명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도련님. 괜찮다니까요.”
시녀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자 누워 있던 블린이 일어나며 컹컹 짖었다. 시녀는 사냥개의 날카로운 이빨을 보고 멈춰 섰다.
‘역시 블린도 싫어하잖아.’
테오르는 뒷걸음질 쳤다. 테오르가 도망치려는 걸 보고 시녀가 다급하게 앞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이쪽으로 오세요.”
“싫어……!”
시녀가 테오르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였다.
컹컹!
“캬악!”
블린이 비호같이 덤벼들어서 날카로운 이빨로 시녀의 옷소매를 물고 늘어졌다.
“블린!”
블린이 시녀의 옷소매를 놓고 테오르를 따라 뛰었다.
테오르는 도망쳤다. 뒤에서 시녀가 뭐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구불구불한 정원의 돌길을 따라 정신없이 뛰어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디든 도망가서 숨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테오르는 한참을 달렸다. 처음엔 자기가 앞에 있고 블린이 뒤따라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블린이 앞서 뛰고 테오르 자신은 블린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한참을 달린 끝에 블린이 멈춰 섰다. 테오르도 잠시 멈췄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블린…… 헉. 헉……. 꽃을 찾아 온 거야?”
블린이 멈춘 곳은 노란 꽃이 높이 자라난 화단이었다.
높다랗게 치솟은 노란 꽃잎이 물결처럼 늘어선 곳.
토카르 꽃 화단이었다.
블린은 또다시 꽃을 킁킁거리며 화단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블린, 안 돼.”
테오르는 블린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고 화단에 들어가는 걸 막았다.
“테오르?”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화단으로 들어오는 길의 입구에 카이젠이 서 있었다.
“폐하!”
테오르는 달려가서 카이젠의 다리에 매달렸다.
“테오르?”
카이젠은 아스텔을 만나러 별채로 가는 중이었다.
지난 병문안 이후 며칠간 아스텔을 보지 못했다. 안 그래도 한번 찾아가 볼까 고민하던 중에 아스텔에게서 연락이 왔다. 드레스와 보석 등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아스텔은 보내준 것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감사 인사를 늦게 하게 됐다며 용서를 빌었다. 카이젠은 그 편지를 받고 용기를 내서 아스텔을 만나기 위해 별채로 향했다.
아스텔을 만날 생각으로 별채를 향해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아이가 뛰어오는 걸 발견했다. 이곳에 저렇게 뛰어다닐 아이는 테오르밖에 없었다.
한참 뛰어오던 테오르는 화단 쪽으로 길을 꺾었다. 그래서 카이젠도 화단으로 온 거였다.
카이젠은 테오르의 겁먹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여기 혼자 있는 거냐?”
아스텔은 이 애를 혼자 두지 않았다. 언제나 시녀를 곁에 붙여서 감시하게 했다.
어린애가 사고를 치거나 잘못될까 봐 돌봐주라고 하는 거였지만 카이젠이 보기엔 감시나 다름이 없을 만큼 철저하게 애를 보호했다.
카이젠의 다리를 끌어안고 울먹이던 테오르가 고개를 들었다. 조그만 얼굴이 땀과 눈물로 젖어 있었다.
“정원에 있었는데 시녀가 잡으려고 했어요!”
“잡아? 뭘?”
“저를 잡아가려고 했어요!”
테오르는 카이젠에게 방금 전의 일을 설명했다.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의 말이라 조금 두서가 없긴 했지만, 테오르는 나이에 비해 설명을 잘했다. 핵심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자세히 전했다.
카이젠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정원에서 놀고 있었는데 돌봐주던 시녀가 사라졌고, 그다음에 이상한 시녀가 자기를 잡으려고 나타나서 도망쳐 왔다는 소리였다.
“정말 못 보던 시녀였느냐?”
혹시라도 아스텔이 애를 데려오라고 보낸 시녀였는데 테오르가 오해하고 도망친 게 아닌가 싶어서 다시 한번 확인 차 물었다.
테오르는 진심을 다해서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정말 처음 봤어요.”
“…….”
이게 진짜라면 심각한 일이었다. 감히 황제가 머무는 궁에서 아이를 납치하려고 하다니.
‘왜 이 어린애를 데려가려고 한 거지?’
카이젠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테오르를 내려다보고 놀랐다.
테오르는 겁에 질려서 가늘게 떨고 있었다. 생기로 가득하던 푸른 눈에는 물기가 고여 있었다.
“테오르.”
카이젠은 훌쩍이는 어린아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이제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테오르는 울먹이면서 카이젠을 올려다보다가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의 몸은 작고 연약했다. 카이젠은 서툰 손길로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품 안에서 작게 훌쩍대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젠은 아이의 등을 토닥이면서 다정하게 위로했다.
“괜찮아. 무서워할 것 없다. 나와 함께 있으면 어느 누구도 너를 잡아가지 못해.”
가늘게 떨리던 몸이 점차 안정을 찾았다. 카이젠은 아이가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수도에 가면 동물원에 가서 진짜 살아 있는 곰을 보여주마.”
“진짜요?”
곰이라는 말에 테오르가 빼꼼히 얼굴을 들었다.
“그래. 광장에 있는 공원에도 가고 상점가에 데려가서 장난감도 사주마.”
아이를 길러본 적은 없지만 열심히 어린애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생각해 냈다. 뭐든 관심을 돌리게 해줘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테니.
“과자를 파는 곳에 가서 사탕 과자도 사고 극장에서 연극도…….”
테오르는 놀라서 물었다.
“수도에도 연극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극장이 여러 군데 있는걸. 연극을 좋아하는 거냐?”
테오르는 몇 달 전에 아스텔과 함께 본 연극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사는 시골 마을에 유랑 극단이 찾아왔을 때, 아스텔은 테오르를 데리고 매일 연극을 보러 갔다.
테오르는 난생처음 보는 연극에 홀딱 반했다.
연극이 끝난 뒤 아스텔은 극단장에게 부탁해서 테오르를 무대 뒤편으로 데리고 갔다. 간이 천막을 치고 만든 준비실 안에 들어가자 배우들이 분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무대에서 본 왕자님과 공주님이 사실은 배우들이 분장한 가짜라는 걸 알고 테오르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엄마의 설명을 듣고 테오르는 연극이 뭔지 금방 이해했다.
두 사람은 그 후에도 몇 번 더 연극을 보러 갔다.
테오르는 연극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네, 연극 좋아요. 재미있어요.”
“네가 원한다면 대극장의 공연을 보여주마.”
“대극장이 뭔데요?”
“수도에 있는 커다란 극장이지.”
테오르는 카이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연극을 구경한 뒤엔 집에서 엄마와 함께 연극 놀이를 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동화나 역할극을 하다가 나중에는 다른 연극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스텔 고모가 되는 연극이었다.
테오르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엄마는 이 모든 게 전부 연극일 뿐이라고 했지만, 이런 연극을 하는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 테오르는 너무 영특하구나.’
그런 생각을 말하자 할아버지는 어딘지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란다. 그러니까 네 엄마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응. 할아버지.’
테오르는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고 열심히 연극을 연습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엄마를 아스텔 고모라고 불렀다.
“자, 다 온 것 같구나.”
저만큼 앞에 별채가 보였다.
카이젠은 테오르를 내려줬다.
“나와 한 얘기는 아스텔에게 말하지 마라.”
바닥에 내려주면서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부탁했다. 아스텔은 수도에 길게 머무는 걸 원치 않았다. 이 아이를 수도에서 키우라고 조언해도 단호하게 거절했을 정도였다. 수도에 가서 뭘 할 건지 잔뜩 말해줬다고 하면 아스텔은 불쾌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럼 비밀이에요?”
“비밀이 뭔지 아는 거냐?”
“네, 알아요.”
“뭔데?”
테오르는 똘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밀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테오르는 예전에 할아버지가 비밀에 대해 설명해 주던 기억을 떠올렸다.
‘비밀이라는 건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 되는 거다. 누군가가 비밀이라고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면 안 돼. 알겠지?’
‘네. 할아버지.’
테오르는 그다음부터 아스텔이 비밀이라고 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비밀은 꼭 숨겨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눈 색을 숨겨야 하는 것처럼.
카이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테오르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귀여운 녀석.”
* * *
아스텔은 드레스 작업을 끝내고 한나와 함께 방 안을 정리했다. 옷 상자를 다 정리해 놓고 청소까지 끝냈는데도 테오르는 돌아오지 않았다.
“테오르가 늦네.”
아스텔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를 보내서 도련님을 모셔 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그때 시녀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 테오르를 돌봐주라고 함께 딸려 보냈던 시녀였다.
“레이디!”
시녀는 안으로 들어와서 아스텔에게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이 사라지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테오르가 사라졌다고?”
시녀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저를 부르는 소리가 나서 그쪽으로 잠시 갔었는데…… 그사이에 도련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셔서 놓쳤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레이디.”
“누가 너를 불렀는데?”
시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쫓아갔더니 아무도 없어서…….”
“…….”
아이를 돌봐주던 시녀는 이상한 목소리를 듣고 자리를 비웠는데 그사이에 아이가 사라졌다. 뭔가 평범하지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아스텔은 한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