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열병 (3/24)

3. 열병

마차를 타고 가면서 카이젠은 창밖을 내다봤다.

출발하기 전부터 내리던 비는 새벽이 오기 전에 잦아들었다. 비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연한 은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확실히 더는 비가 올 것 같지 않았다.

일행은 다급하게 덴츠 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좀 더 머물다가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아스텔의 외할아버지인 후작 때문이었다. 그 늙은이가 갑자기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스텔이 빨리 가고 싶어 하는 바람에 예정보다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카이젠은 창밖을 응시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눈물 흘리던 아스텔을 생각할수록 후작이 짜증 났다.

그 늙은이는 평소에도 아스텔을 부려먹더니 이제 아프기까지 하단다.

‘그 늙은이 곁에서 보모 겸 시녀로 살더니 이젠 간병인 노릇까지 하게 생겼군.’

노인네 병 수발을 들고 있는 아스텔의 모습을 상상하니까 분통이 터졌다.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지 본인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그래도 아스텔에게 화를 낼 수는 없기에 카이젠은 분노의 화살을 원인 제공자에게 돌렸다.

“그 정도 살았으면…….”

카이젠은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주 앉은 벨리안은 그게 누구에게 하는 얘기인지 알아들 수 있었다.

‘그 후작님을 욕하시는 거겠지.’

다른 사람 얘기가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은 그 후작님 때문이었으니까.

벨리안은 뒤에 이어지는 말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정도 살았으면 살 만큼 살았으니 죽어도 될 텐데.

뭐, 대충 이런 소리겠다.

“……그래도 이제부터 연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죽으면 안 되지요.”

후작이 죽으면 또 연금이 끊긴다. 그럼 아스텔과 새 후작님이 될 그 어린애는 또다시 곤궁해질 것이다.

“연금을 상속시켜 주면 되잖아. 말 나온 김에 그 아이한테 연금이 상속되게 만들어놔.”

카이젠은 창문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

전공에 대한 연금을 후계자에게 상속시켜 주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심지어 그 후계자가 다섯 살짜리 어린애라면 더더욱 그렇다.

분명 지나친 편애라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벨리안은 반박하지 않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뭔가를 더 말하기에는 황제 폐하의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아 보였다.

벨리안은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출발하기 직전에 아스텔이 이 마차에 동승하자는 카이젠의 제안을 차갑게 거절했던 것이다.

‘영광입니다만 저는 아이를 돌봐야 해서 폐하의 마차에 탈 수 없습니다.’

‘아이와 함께 타면 되는…….’

아스텔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카이젠의 말을 잘랐다.

‘아이가 너무 어리고 예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렇게 오랜 시간 폐하 곁에 둘 수가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

카이젠이 짜증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가운데, 아스텔은 아이 손을 잡고 다른 마차로 가버렸다.

폐하께서는 그렇게 냉혹하게 거절당한 뒤부터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별수 없이 카이젠과 같은 마차에 탄 벨리안은 이틀 내내 주군의 눈치를 보면서 숨죽이고 있었다.

벨리안은 자신이 나름대로 충신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경우라면 언제나 황제 폐하에게 충언할 마음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 ‘그치만 연금을 그렇게 상속시켜 주시면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다시 생각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이제는 황제 폐하께 반대할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없고.’

그나저나 정말 많이 빠지셨구나 싶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당사자인 아스텔 님이 절대 폐하를 받아주지 않으실 것 같다는 점이다만.’

받아주기는커녕 황제 폐하의 마음을 눈치채면 수도에도 안 가려고 할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빗속을 달려가던 아스텔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당황하던 그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정말 병이라도 있는 건가.’

단순히 말 못 할 지병이라면 상관없지만 전염되는 병이라면 문제가 있다. 황제 폐하와 계속 함께 다니고 있는데 수상쩍은 병에 걸린 아이를 곁에 둘 수는 없는 법이다.

‘뭔지 몰라도 숨기고 있다는 것부터 수상하고.’

벨리안은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 기회를 잡아서 제대로 알아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 * *

유리창 밖으로 평화로운 숲의 정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일행은 숲길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성에서 출발한 지 이틀째였다. 예정보다 조금 늦어졌지만 이제 사흘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했다.

아스텔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긴장하고 지내서인지 피곤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그래도 이제 다 됐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제 며칠만 있으면 이 고생도 끝이 난다. 피곤한 가운데서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스텔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바닥에 누워 있던 개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구슬 같은 맑은 눈이 이쪽을 올려다본다.

그 귀여운 모습에 아스텔은 쓴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를 이용해서 출발 허락을 받아낸 것까지는 좋았다. 

카이젠을 비롯해 모든 일행이 함께 가게 된 건 계획에서 조금 어긋난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 함께 빗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쨌든 덴츠에 도착하기만 하면 테오르를 돌려보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출발 준비를 시작하자마자 소소한 장애물이 생겨났다.

출발 직전, 아스텔은 울먹이며 입을 다물고 있는 테오르를 조심스럽게 달랬다.

“우리는 먼 길을 가야 하는데 개한테는 힘들지 않을까? 그리고 이 개는 여기가 고향이잖니.”

“…….”

테오르의 푸른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폐하가 선물이라고 그랬는데…….”

테오르는 고집스러운 아이는 아니었다. 평소에는 조용히 타이르면 말을 잘 들었다. 고집을 부리다가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세심하게 설명해 주면 언제나 납득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테오르는 울먹이면서 두 팔로 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개는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테오르가 끌어안자 좋아서 꼬리를 흔들었다.

복실복실한 개를 끌어안고 있는 조그만 아이의 모습은 제법 귀여웠다. 둘 다 인형 같았다.

출발을 준비하던 시종들과 기사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고 쓴웃음을 흘리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걸 어쩐다……?’

아스텔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성 밖으로 나오던 카이젠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개한테 매달려 있는 테오르를 보고 쉽게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카이젠은 거리낌 없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지? 이 개는 내가 선물로 준 거야.”

뭐가 문제냐는 듯이 물어보는 카이젠의 모습에 아스텔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녀는 카이젠에게 사냥개를 키우기 어려운 사정을 설명했다.

“아이가 어려서 실수로라도 개를 함부로 대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러면 양쪽 다 위험할 수도 있고…….”

하지만 카이젠은 다 듣지도 않고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훈련을 잘 받은 개니까 괜찮을 거야. 데려가서 키우게 해. 다섯 살이면 사냥개 한 마리 정도는 키워도 괜찮아.”

“…….”

아스텔은 카이젠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사냥개를 선물로 주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에게 어린아이와 대형견을 단둘이 둘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봤자 납득할 리 없었다.

그래도 아스텔은 더 반박하려고 했다. 카이젠이 덧붙인 자조적인 말만 아니었다면.

아스텔이 계속 반대하자 카이젠은 씁쓸한 조소를 띤 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어린애한테 준 선물도 거절하려는 건가?”

“…….”

그동안 그가 주는 선물을 끝없이 거절해 온 아스텔은 순간적으로 반박할 틈을 놓치고 말았다.

카이젠은 돌아서서 테오르의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괜찮다. 데려가서 키워도 돼.”

“폐하, 감사합니다!”

테오르는 기뻐하며 활짝 웃다가 다시 아스텔을 돌아보았다.

아스텔도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에 착하게 잘 대해줘야 한다. 절대 함부로 대하거나 괴롭히면 안 돼.”

“응! 내가 잘 돌봐줄 거야!”

테오르는 기뻐하며 개를 끌어안았다. 그새 친해진 건지 개도 복실복실한 꼬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허락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래, 뭐 이제 연금도 나올 테니 개 한 마리 정도는 키울 수 있겠지. 최대한 눈을 안 떼고 잘 가르치면 괜찮을 거야.

당분간은 한시도 눈을 못 떼고 지켜봐야 할 것 같지만. 어차피 돌이킬 수 없게 됐으니 아스텔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도 있고.’

아스텔은 품 안에서 약병을 꺼냈다. 조그만 유리병 안에 푸른 물약이 반의반 정도 차 있었다. 손톱만큼 남은 물약을 보자 한숨부터 나왔다.

처음 카이젠을 따라나설 때만 해도 가득 차 있었는데.

‘전에 들렀던 성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지.’

눈치를 봐서 숲에 산책을 간다고 하고 약초를 좀 구해 올 계획이었는데, 첫날부터 온갖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숲에 놀러 간다고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

그다음엔 연이어 비가 와서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비가 좀 그치나 싶었더니 카이젠이 느닷없이 사냥 별장으로 테오르를 데려가서는…….’

아스텔은 한숨을 삼키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을 더 넣어줘야 할지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해 봤다.

‘이거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은데.’

남은 시간은 사흘. 

적어도 여섯, 일곱 번은 약을 넣어줘야 한다는 뜻인데, 이 정도 양이면 아슬아슬하거나 조금 모자랄 것 같다.

‘재료만 있으면 약은 쉽게 만들 수 있지만.’

문제는 재료였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는 약 상자 안에 전부 담겨 있다. 하지만 반대로 구하기 쉬운 재료는 없다.

부족한 재료들은 숲이든 약재상이든 어딜 가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들이었지만, 지금 아스텔은 황제의 일행과 함께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편찮으신 할아버님을 만나러 가는 상황이다.

이 시점에 약초를 구하러 약재상에 가겠다고 할 방법은 없었다. 약초를 구한다고 해도 마차 안에서 약을 만들 수도 없을 테고.

아스텔은 약 상자를 뒤져서 재료를 확인한 뒤 유리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맑은 유리 너머로 평평한 숲길이 보였다. 평탄한 길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검푸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다음 숙소에 도착하면…….’

그때 기회를 봐서 잠시 숲에 나갔다 오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오늘 저녁 머물 곳은 숲속에 있는 고성이었다. 작은 마을도 딸려 있는 곳이라고 들었다.

어젯밤에 들렀던 숙소는 좁은 수도원인 데다 해가 뜨자마자 바로 출발해서 빠져나갈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마을이 딸린 성이라면 잠시 나갔다 올 수 있을 것이다. 테오르에게 마을을 구경시켜 준다고 하고 나갈 수도 있고.

테오르는 아스텔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유리창을 바라보던 아스텔은 테오르의 어깨에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 올렸다.

외조부가 있는 덴츠까지는 아직도 사흘이 남아 있었다.

* * *

일행은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목적지인 마을에 도착했다.

저물어가는 하늘과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회색 돌로 지어진 성이 우뚝 서 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드러나는 낡고 허름한 고성이었다.

늙은 성주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황제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이 나와서 일행의 도착을 도왔다. 좁은 앞마당은 짐을 옮기는 시종들과 기사들로 분주해졌다.

마차에서 내린 아스텔은 아이의 손을 잡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확인한 벨리안은 늙은 성주를 붙잡고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약제사나…… 약초를 잘 아는 여자가 있나?”

* * *

아스텔은 테오르의 손을 잡고 구불구불한 층계를 올라갔다. 계단을 한참 올라간 뒤에야 좁은 복도가 나오고, 그 끝에 침실로 통하는 방문이 있었다.

“이쪽입니다, 레이디.”

방을 안내해 준 시종이 나무 문을 열었다. 천장이 높은 커다란 방이 나왔다. 사방에 진회색 돌로 쌓아 올린 벽이 있었고, 한쪽엔 오래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손님에게 내주는 방이라기엔 좀 허름했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침대와 나무로 된 작은 테이블, 의자, 벽에 걸린 거울이 가구의 전부였다.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긴 했지만 전부 백 년쯤 전에 유행했을 만한 가구들이었다. 

‘영주가 사는 성이었지만 워낙 시골구석의 조그만 마을이라 형편이 좋지 않은 모양이지.’

아스텔이 짐가방을 내려놓는 사이에 테오르는 한쪽 벽에 있는 화살촉 모양의 창문으로 달려갔다.

“아스텔 고모, 저기 봐! 마을이 보여.”

테오르가 창틀을 붙잡고 소리쳤다.

“테오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해.”

창문 너머로 작은 시골 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네모난 채소밭을 끼고 아담한 집들이 장난감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저 멀리 하얀 구름 너머로 잿빛 산맥도 보였다. 산비탈 위로 안개를 가르며 조용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스텔은 무심코 창문을 내다보다가 특이한 광경을 발견했다.

‘저건……?’

마른 나뭇가지 위에 새카맣게 말라붙은 꽃잎이 보였다.

은매화였다. 비둘기 날개처럼 새하얗게 피어나는 꽃인데, 어찌 된 일인지 솜털 같은 꽃잎이 온통 흑빛으로 시들어 있었다.

‘병이 도는구나.’

창문을 내다보던 아스텔은 정원에 서 있는 은매화 나무를 보고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저 흰 꽃의 죽음은 병의 전조였다. 이 시기에 은매화가 이유 없이 시들면 그때마다 마을에는 몹쓸 전염병이 생겨났다.

‘이네스 열병’.

대륙의 동북부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풍토병이었다.

동부에서 살아온 지난 6년간, 아스텔은 저 꽃이 저렇게 시드는 걸 수차례 목격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을엔 하얀 히스꽃으로 뒤덮인 새 무덤들이, 마치 병마가 훑고 지나간 발자국처럼 이곳저곳에 쓸쓸히 남았다.

‘병이 발병했을 때 제한 시간 안에 약을 먹으면 나아지는데.’

이네스 열병은 원래 약만 있으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다.

그러나 가난한 농민들은 약을 먹지 못해서 병마에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약초가 주변에 널려 있어도 약제사가 없는 낙후된 시골에서는 약을 만들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은 별일 없나 보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으면 황제의 순행 길에 숙소로 정해질 리가 없다. 황제를 맞이했다는 건 이 주변은 아직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레이디,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늙은 시녀가 트레이에 찻잔과 쿠키를 가져왔다. 창틀에 매달려 있던 테오르가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트레이 위에는 달달한 초콜릿 향이 나는 따끈따끈한 코코아가 있었다.

“먹어도 돼요?”

“그럼요, 도련님.”

시녀가 테오르에게 작은 코코아 잔을 건네줬다.

“감사합니다.”

테오르가 코코아 잔을 받아 들고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자 시녀의 주름진 눈가에도 미소가 서렸다.

그녀는 아스텔에게도 찻잔을 건넸다.

“몸을 따뜻하게 하는 차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긋한 약차였다.

“고마워요.”

시녀에게서 찻잔을 받아 드는 순간, 찻잔을 잡은 주름진 손가락이 아스텔의 손을 살짝 스쳐 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아스텔은 그 손가락을 유심히 살폈다.

시녀가 트레이를 내려놓고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저, 레이디. 성안에 일손이 부족해서 오늘은 저 혼자 레이디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잘 부탁해요. 아이는 제가 돌볼 테니까. 간단한 시중만 들어주면 돼요.”

황제의 일행은 기사단과 병사들까지 엄청난 규모였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일손이 부족할 만도 했다.

“저, 그리고 이 층에는 욕실이 방마다 딸려 있지 않아서요. 아래층에 있는 욕탕을 쓰셔야 합니다.”

“그렇군요.”

요즘 저택에는 침실마다 작은 욕실이 딸려 있지만, 이런 구식 성에는 개인 욕실이 많지 않았다. 욕실이 있는 침실을 쓸 수 있는 건 성주의 가족들이나 귀한 손님들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공용으로 쓰는 욕탕에서 목욕을 했다.

“성주님께서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하셨습니다.”

시녀는 몹시 송구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대신 이 층에 머무는 분은 레이디와 도련님뿐이니 욕탕은 언제든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조금 전에 욕탕에 두 분의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래요? 그럼 물이 식기 전에 욕탕에 가야겠네요.”

아스텔은 짐가방을 열고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테오르. 오늘은 고모하고 같이 목욕해야겠다.”

“응.”

아스텔은 일부러 가방 깊숙이 있는 옷을 꺼냈다.

맨 아래에 있는 옷을 꺼내려고 층층이 쌓인 옷을 뒤집었더니 가방 안에 넣어뒀던 곰 인형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레빈!”

테오르는 짐가방에서 떨어진 곰 인형을 얼른 주워서 끌어안았다.

아스텔은 갈아입을 옷을 들고 테오르와 함께 욕탕으로 향했다. 욕탕을 안내해 준 시녀가 작은 문을 열고 안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목욕 가운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드레스를 벗어주시면 깨끗하게 세탁해 놓겠습니다.”

시녀가 가리킨 곳은 옷을 담을 수 있는 바구니와 수건 등이 놓인 작은 방이었다.

‘욕탕에 딸린 탈의실인 건가.’

이런 공용 욕탕을 써본 적이 없어서 생소했다.

아스텔이 자란 수도의 공작저에는 시종들의 방에도 개인 욕실이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외조부의 낡은 별장도 비록 폐허처럼 변하긴 했지만 욕실이 없는 침실은 없었다.

“자, 같이 옷 벗고 목욕 준비하자.”

테오르의 옷을 벗기고 작은 목욕용 가운을 입혔다.

아스텔 자신도 옷을 벗고 한쪽에 있는 얇은 목욕 가운을 입었다. 하늘하늘한 얇은 목면으로 된 무릎을 덮는 하얀 가운이었다. 몸매의 굴곡이 그대로 비칠 정도였다. 다행히 속살이 비치진 않았다만.

아스텔은 옷을 다 갈아입은 뒤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테오르에게 부탁했다.

“테오르. 잠시 레빈을 빌려줄래?”

“응? 왜?”

아스텔은 테오르의 호기심 어린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연극을 할 거야.”

* * *

잠시 후, 바구니에 벗은 옷을 전부 담아서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시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바구니를 받아 드는 찰나에 시녀의 시선이 아스텔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얇은 가운만 입은 아스텔은 가녀린 몸매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뭔가를 감출 만한 곳은 전혀 없었다.

바구니를 들고 나가려던 시녀가 뒤늦게 테오르의 손에 들린 인형을 발견하고 시선을 주었다.

테오르는 시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레빈을 꼭 끌어안았다.

“레빈도 데려갈래. 같이 목욕하고 싶어.”

“테오르. 인형은 놓고 가야지.”

“싫어!”

테오르는 인형을 두 팔로 감싸 안고 뒤로 물러났다.

시녀는 테오르의 손에 들린 인형을 힐끔 살폈다. 갈색 천으로 만든 낡은 곰 인형이었다. 몸통엔 누더기처럼 기운 자국이 있었고, 목덜미에 작은 리본이 하나 달려 있었다. 솜으로 만든 어린애들 인형일 뿐이었다.

뭔가를 숨길 만한 곳은 전혀 없어 보였지만……. 그녀의 시선이 일순간 통통하게 솜을 넣은 인형의 몸통으로 향했다.

시녀는 친절한 웃음을 가장하며 말했다.

“욕탕에 인형을 가져가시면 물에 다 젖을 텐데요. 아시다시피 공용으로 쓰는 곳이라…… 불편하게 해드려서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아스텔은 조금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테오르를 달랬다.

“레빈은 전에 목욕했으니까. 물에 들어가기 싫을 거야. 여기서 블린하고 같이 기다려 달라고 하자. 응?”

테오르는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쭈뼛거리며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 쿠키를 줄 거야?”

“그래. 목욕을 다 하고 방에 가서 줄게.”

그 말에 테오르는 천천히 인형을 내밀었다. 아스텔은 건네받은 곰 인형을 욕탕 안에 있는 작은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시녀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옷이 든 바구니만 집어 들었다.

“목욕하시는 동안 의복을 깨끗하게 세탁해 놓겠습니다.”

아스텔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부탁해요. 자, 들어가자.”

“응. 맞다, 블린. 여기서 레빈을 지켜줘.”

테오르가 자기 옆에 붙어 있는 블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목욕 가운을 입은 아스텔은 테오르의 손을 잡아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꼬리를 흔들며 서성이던 사냥개는 테오르가 안으로 들어가자 욕탕 문 앞에 가만히 웅크리고 누웠다.

잠시 뒤에 안에서 물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시녀는 물소리가 들리자마자 바구니를 내려놓고 협탁 위에 있는 곰 인형을 집어 들었다.

폭신폭신한 몸통을 여기저기 눌러보고 통통한 팔다리도 빠짐없이 만졌다. 하지만 폭신한 솜만 만져질 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형을 내려놓고 아스텔의 드레스를 뒤졌다. 평범한 드레스와 속옷, 아이의 옷까지 전부 샅샅이 살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시녀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아스텔에게 배정된 방으로 갔다. 방에 들어가서 침대 곁에 놓인 짐가방을 열고 그 안에 든 상자들도 하나하나 열어봤다.

미리 지시를 받은 대로 약 상자도 살폈다. 상자에 담긴 약초를 유심히 만져보고, 약병을 전부 열어서 냄새를 맡고 살짝 맛도 봤다.

그다음엔 방 안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가구가 얼마 없다 보니 뭘 숨길 만한 곳도 없었다. 침대 아래와 화장대 뒤까지 손을 넣어서 만져봤지만 역시 별다른 건 나오지 않았다.

늙은 시녀는 결국 짐가방을 다시 원상태로 정리해 놓고, 바구니를 들고 복도로 빠져나갔다.

복도에는 문 앞을 지키는 병사가 있었다. 시녀는 그 남자에게 가서 조용히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다 살펴봤습니다만 특별한 약은 없었습니다. 위험한 병이나 고질병에 쓰는 약은 없고 전부 평범한 감기약이나 두통약 같은 것들뿐입니다. 약초가 조금 있긴 한데…….”

시녀는 잠시 주름진 미간을 찌푸렸다.

병에 담긴 약들은 특별할 게 없었지만 약초는 조금 특이했다. 평범한 치료 약에 쓰이는 흔한 풀이 아니고 전부 구하기 어려운 약초였다. 하지만 약초만 봐서는 뭐에 쓰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어차피 독 성분이 있는 것만 아니면 귀한 분들은 신경 쓰지 않겠지.’

시녀로 변장한 늙은 약제사는 그렇게 단순히 생각했다.

“그것도 사람을 해치는 독초나 위험한 종류의 약초는 없습니다.”

느닷없이 황제의 일행이 가지고 있는 약을 살펴보라고 해서 무슨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는 일인가 하고 긴장했었다. 

황제를 독살하려는 반역자라도 있는 걸까 싶었는데, 상대는 아이를 돌보고 있는 침착해 보이는 젊은 숙녀였다. 차분하고 기품 있는 행동거지가 아주 고귀한 신분 같았다. 어린애를 보살피는 모습도 상냥하고 다정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약을 숨기고 다닐 만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성주님께 그렇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제 임무는 다했으니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늙은 약제사는 보고를 끝내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 * *

나무로 된 욕조 안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습기로 가득 찬 욕실 안은 따뜻하고 훈훈했다.

회백색 석조로 만들어진 욕탕엔 커다란 욕조 안에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온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따뜻한 물에서는 은은한 약초 향기가 풍겼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약초를 넣고 달인 물이었다.

테오르는 수건을 풀고 물을 끼얹자마자 욕조로 들어가 참방참방 물장구를 치며 혼자 놀았다.

“목욕하는 게 좋아?”

“응. 따뜻해.”

아스텔은 욕조에서 놀고 있는 테오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약을 넣을 시간이야. 약부터 넣고 목욕하자.”

아스텔은 손을 들어 틀어 올린 머리카락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나비 모양 머리핀으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머리카락 속에 매끄러운 유리병이 잡혔다. 천천히 잡아 꺼내자 연한 백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 물약이 담긴 조그만 유리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텔은 손 안에 든 유리병을 매만졌다.

‘빨리 눈치채지 못했으면 물약을 들켰을지도 모르지.’

찻잔을 건네받을 때 시녀의 손끝을 볼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아스텔은 시녀의 주름진 손가락을 분명히 봤다. 새하얀 찻잔에 머물다 떨어지는 손톱 끝에 검푸른 흙물이 들어 있었다.

아스텔은 그렇게 물든 손톱을 여러 번 봤다. 아스텔을 도와준 약제사 그레텔도 언제나 손톱 끝에 풀물이 들어 있었다.

‘매일 약초를 캐고 다듬고 하니까 약초 즙이 손톱에 스며들어서 잘 지워지지 않는 거라고 했지.’

성안에서 일하는 나이 든 시녀가 손끝에 풀물이 들 정도로 흙과 풀을 만질 리가 없다.

일손이 부족해서 마을 사람을 잠시 고용한 거라고 해도, 밭을 일구고 채소를 만지는 농가의 아낙을 성주가 사는 곳에 하녀로 들이지는 않는다.

‘또 한 가지 힌트가 있지.’

은매화였다.

새카맣게 말라 죽은 정원의 은매화를 보면 이 근방에 열병이 도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 마을엔 아직까지 열병 환자가 없다. 병이 도는 기간에 이렇게 낙후된 시골 마을에 환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이 마을에는 약제사가 있다는 뜻이지.’

아마 아까 그 여자가 이 마을의 약제사일 것이다.

하녀로 변장하고 들어온 건, 아스텔의 짐가방과 약 상자를 살펴보라는 명령을 받아서겠지.

하필 공용 욕실이 딸린 서쪽 탑에 침실을 배정해 주고 나이 든 시녀 한 명만 보내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개인 욕실이라면 시녀들에게 부탁해서 아무 때나 목욕할 수도 있고 아이를 먼저 씻기고 아스텔 자신은 나중에 목욕할 수도 있다. 전에 머물던 성에서도 언제나 테오르를 먼저 씻겨놓은 다음에 목욕했으니까. 

하지만 공용 욕탕이라 물을 준비하기 어렵다고 하면 아이와 함께 씻을 수밖에 없다. 늙은 하녀에게 목욕물을 두 번씩 준비해 달라고 할 수는 없을 노릇이니.

아스텔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같이 들어가게 하려고 정성을 다했군.’

하긴 둘이 같이 욕탕에 들어가야 짐을 검사하기 쉬울 테지. 욕탕에 들어가려면 옷을 전부 벗어야 하니까. 목욕하는 동안 짐가방은 물론이고 두 사람의 옷까지 전부 세세하게 검사할 수 있다.

‘그 부분에서는 전에 어린 아가씨보다 치밀하네. 어떤 면에선 훨씬 더 불쾌하지만.’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졌다.

누구 짓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전에 아스텔의 약 상자를 뒤졌던 마리안은 아직도 그 성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지금 황제 일행 중에서 이런 일을 지시할 사람은 황제의 비서관인 벨리안밖에 없었다.

‘이런 뻔히 보이는 짓을 하다니.’

하긴 그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남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면서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아스텔을 속이려고 했었다.

사람을 얼마나 단순하게 보는 건지.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야.’

그가 왜 이런 짓을 꾸몄는지는 이해가 갔다.

비 오는 날 사냥 별장으로 급히 달려가는 아스텔을 보고 뭔가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는 걸 눈치챈 거겠지. 분명 아이와 약에 관련된 일일 테니 이런 기회를 만들어서 확인해 보고 싶었으리라.

이래서 눈치 빠르고 의심 많은 사람은 불편하다니까.

아스텔은 시녀의 정체를 눈치채고 일부러 곰 인형을 가지고 나오게 했다.

폭신폭신한 솜인형 안에는 물건을 숨기기 쉬우니까. 인형을 들고 가면 그쪽으로 시선이 쏠릴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예상대로 늙은 시녀는 곰 인형에 관심을 두느라 아스텔의 머리카락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겠어.’

아스텔은 손 안에 든 약병을 움켜쥐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병 안에 푸른 약이 파도치듯 서서히 흔들린다.

‘만일 약제사에게 이 약을 들켰다면…….’

정확히 무슨 약인지는 알아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경험 많은 약제사라면 이 약에 색을 바꾸는 성분이 들어 있다는 걸 눈치챌지도 모른다.

상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어.’

하지만 다음번에도 이렇게 운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아스텔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남은 시간을 잘 보내야 해.’

그런 다짐을 한 뒤 테오르를 불렀다.

“테오르. 약 먼저 넣고 목욕하자.”

테오르는 얌전히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눈에 약을 넣어줬다.

“잘 참았어.”

눈약을 넣어준 뒤에 약병은 깨지지 않게 선반 위에 올려뒀다.

약을 넣는 동안 얌전히 고개를 들고 있던 테오르는 아스텔이 들고 가는 약병을 유심히 보면서 물었다.

“약 안 넣으면 눈 다시 빨간색 돼?”

“그래.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지?”

가만히 듣기만 하던 테오르가 뜬금없이 물었다.

“왜 말하면 안 돼? 빨간색이면 나빠?”

“……뭐?”

아스텔은 놀란 눈으로 테오르를 바라보았다.

테오르는 욕조의 테두리에 매달려서 아스텔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석 같은 푸른 눈이 천진하게 반짝였다. 그 순진무구한 눈빛에 아스텔은 대답할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말없이 서 있는 아스텔을 향해 테오르는 순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황제 폐하도 눈이 빨간색이던데. 왜 나는 빨간색 눈이면 안 돼?”

“…….”

아스텔은 말문이 막혔다.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테오르는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남들 앞에서는 눈 색을 바꿔야 한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게 해왔으니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순순히 따랐다. 이유를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

‘성장해 가는 거겠지.’

아이는 커가면서 자연히 주변 일에 의문을 느낀다. 어릴 때는 쉽게 말을 듣던 것도 왜냐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언제까지나 얌전히 말을 듣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스텔은 언젠가 테오르가 나이가 들어서 왜 눈 색을 감춰야 하는지, 왜 죽은 당숙이 아버지로 되어 있는지 물어보는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 왔을 때를 대비해서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아이에게 해줄 말을 연습했었지만, 그럼에도 막상 현실로 닥치자 씁쓸하고 착잡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은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아스텔이 대답 없이 보기만 하자 테오르는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욕조의 물을 휘저었다.

“나는 알면 안 되는 거야?”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더욱 마음이 쓰렸다.

“테오르.”

아스텔은 착잡한 기분을 감추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테오르가 티 없이 맑은 푸른 눈으로 아스텔을 올려다봤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보드라운 뺨을 두 손으로 다정하게 감쌌다.

“예전에 마법의 구슬이 나오는 동화를 읽어준 적이 있지? 농부가 구슬을 얻었는데 너무 귀한 거라서 비밀로 했잖아. 기억나?”

외조부의 별장 구석에 꽂혀 있던 오래된 동화였다.

왕자와 공주, 마녀가 등장하는 평범한 동화책이었다. 어떤 농부가 마법의 구슬을 얻으면서 그 구슬에 얽힌 비밀을 따라 모험이 펼쳐지는 내용이었다.

테오르는 그 책을 좋아했다.

예상대로 동화 얘기가 나오자 테오르는 즐거워하며 아스텔 쪽으로 다가왔다.

“응! 다른 사람들이 알면 사라져 버린댔어.”

“그래. 아주 특별하고 귀한 거라서 몰래 꼭꼭 숨겨놔야 했잖아. 그것처럼 네 붉은 눈도.”

이쪽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엔 순수한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아스텔은 아이의 귀여운 얼굴을 다정하게 응시하며 설명을 이었다.

“붉은색 눈도 아주 특별한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말하면 안 돼.”

“황제 폐하는 괜찮은 거야?”

“그래. 황제 폐하는 황제 폐하니까 괜찮지만 우리는 꼭 비밀로 해야 하는 거야.”

동화로 예시를 들자 어느 정도 납득한 모양이었다.

테오르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비밀이구나.”

아스텔은 이 기회에 확실하게 당부했다. 또다시 사냥 별장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이참에 분명하게 알려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네 눈에 대해서는 황제 폐하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알겠지?”

“응. 절대 말 안 할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아스텔은 웃으며 테오르의 뺨에 입술을 댔다. 보드라운 우윳빛 뺨이 온탕의 열기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더 자라면 언젠가는 자세한 사정을 말해줘야겠지.’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

모든 사정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커야 말해줄 수 있다.

그때가 되면 테오르를 앉혀놓고 차분하게 모든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줄 것이다. 이런 처지로 낳아줘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과 함께.

“할아버님을 만나면 같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집에 가면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되고 연극도 안 해도 돼.”

이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조금만 견디면 된다. 조금만 견디면 다 괜찮아질 테니까.

테오르는 집 얘기에 신이 나서 대답했다.

“응. 빨리 가고 싶어. 나 집에 가면 블린이랑 내 침대에서 같이 자도 돼?”

아스텔은 테오르의 천진한 물음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대신 둘 다 깨끗하게 씻어야 해.”

“응!”

테오르는 기운을 되찾고 다시 욕조 안에서 놀았다.

테오르의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에 살짝 열기가 감돌았다. 머리카락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수증기 안에서 어느새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아스텔은 라벤더 향이 나는 비누를 가져다 놓고 테오르를 불렀다.

“자, 이제 머리를 감겨줄게. 밖으로 나오렴.”

“응.”

물장구를 치며 놀던 테오르가 아스텔에게 손을 뻗었다. 아스텔도 테오르를 안전하게 욕조 밖으로 꺼내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소매가 당겨지면서 팔목 안쪽에 생긴 불그스름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아…….”

목욕 가운으로 가려져 있던 팔목 안에 이상한 붉은 반점이 있었다.

아스텔은 황급히 가운의 소매를 걷고 조금 전까지 보지 못했던 팔목 안쪽을 살폈다.

‘이건…….’

아스텔 자신의 팔목 안쪽, 깨끗하던 피부 위에 불길한 붉은 반점이 점점이 피어나 있었다.

아스텔은 팔목에 있는 반점을 유심히 살폈다. 오른쪽 팔 안쪽에 손톱만 한 반점들이 서너 개 정도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연한 선홍색이라 얼핏 보면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옷을 갈아입을 때는 분명히 없었다. 따뜻한 욕탕에 들어와 있는 동안 생긴 모양이다.

아마도 욕탕 안의 열기 때문이겠지.

동부의 열병은 원래 이랬다. 열로 몸이 뜨거워지면 반점이 더 빨리 드러난다. 

반점의 모양부터 형태까지 열병의 증상이 확실했다. 다행인 점은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열병이라는 점이었다.

치명적인 이네스 열병은 아니었다. 이네스 열병은 초기부터 흑적색의 반점이 나타난다. 아스텔의 팔에 난 반점은 연한 선홍색이었다.

‘심한 병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네.’

어쩐지 어제부터 계속 몸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했지.

‘비를 맞아서 그런가…….’

이틀 전, 테오르를 쫓아가느라 폭풍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사냥 별장까지 달려갔었다.

안 그래도 도피 생활로 피로가 겹쳐 있었는데, 며칠간 전전긍긍하다가 비까지 맞았으니 병이 날 만도 했다.

이마를 손으로 짚어봤지만 다행히 열은 전혀 없었다. 손목에 난 반점에도 열감은 없다. 가느다란 손목에 연한 선홍색의 반점이 얼룩처럼 번져 있을 뿐이었다.

열만 없으면 괜찮다. 열이 시작되기 전에는 전염성도 없으니까.

발열 증상이 나타나면 이 반점도 온몸으로 퍼지는데, 점점 더 증상이 심해지면 환자는 고열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것도 그때부터였다.

‘얼른 약을 만들어서 먹는 게 중요해.’

열병의 치료 약은 전에도 몇 번 만들어본 적이 있었다.

재료도 별로 특별하지 않았다. 재료 중 몇 가지는 아스텔의 약 상자에도 있었다. 부족한 건 숲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약초 중에 몇 가지는 그 약제사한테도 있을 테고.’

“엄마?”

근심 어린 눈빛으로 반점을 살피던 아스텔은 테오르의 놀란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테오르는 욕조의 테두리를 붙잡고 아스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테오르는 아스텔의 손목에 난 반점을 유심히 보더니 아스텔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 아파? 병난 거야?”

“뭐?”

아스텔이 놀라는 걸 보고 조그만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 찼다. 테오르의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엄마, 아프지 마…….”

‘이런.’

반점을 보고 심한 병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고모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도 잊은 듯했다.

아스텔은 얼른 심각한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심한 병은 아니야. 빨리 발견했으니까 얼른 약을 먹고 치료하면 금방 나을 거야.”

“흑……. 정말?”

“응. 나는 괜찮아.”

아스텔은 테오르의 희고 보들보들한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손가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직 전염성은 없을 테니 만져도 괜찮겠지.

“혹시 테오르는 어디 아프거나 불편하지 않지?”

“응. 난 안 아파.”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는 조그만 얼굴에는 아픈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다행이네.’

카이젠을 닮아서인지 테오르는 건강한 체질을 타고났다.

그래도 당분간은 좀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이다. 열이 나기 시작하면 테오르에게 병을 옮길 수도 있으니까. 조금 전에 눈약을 넣어줬으니 내일 새벽까지는 약을 넣지 않아도 된다.

아스텔은 일단 테오르를 안심시켰다.

“심하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야. 약 먹고 밖에 나가지 말고 푹 쉬면 돼. 그동안 테오르는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얌전히 블린과 놀아야 해. 그럴 수 있지?”

“응!”

테오르는 제법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전에 비 맞아서 아픈 거야?”

테오르는 아스텔이 자기 때문에 비를 맞으며 말을 타고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굳이 말해주고 싶지 않았는데 사냥 별장에서 저녁을 먹을 때 벨리안이 그 얘기를 꺼냈다.

‘어린애한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지.’

아스텔은 테오르가 괜히 죄책감을 가질까 봐 얼른 달래줬다.

“그럴 수도 있지만 병에 걸리는 건 몸이 약해져서 그런 거니까 테오르의 잘못이 아니야. 테오르도 그날 비 맞아서 추웠지만 아프지 않잖니?”

그날 테오르도 사냥 별장에서 개를 데리고 놀다가 비를 맞았다고 했다. 아스텔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테오르는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벽난로 앞에 잠들어 있었다.

갈아입힐 옷이 없으면 어른의 셔츠나 잠옷이라도 갈아입혀 놓고 몸을 말리게 했으면 좋았으련만. 대대로 황제와 기사들만 머물던 사냥 별장이라 아이를 돌볼 줄 아는 시종이 한 명도 없었던 모양이다.

황제가 아이를 씻기고 제대로 돌봐주라고 명령했으면 달랐겠지만, 카이젠에게 그런 세심한 면이 있을 리 없었다.

테오르가 건강해서 다행이지.

“블린은 괜찮을까? 나하고 같이 비 맞았는데.”

테오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강아지를 걱정했다.

아스텔은 웃음이 나는 걸 참았다.

“개들이 걸리는 병은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아스텔은 테오르를 마저 씻기고 욕실을 나섰다.

“일단 의사를 불러봐야겠다.”

약제사는 아니지만 황제의 일행에는 황제의 시의 중 한 명이 동행했다. 어쨌든 전염병이니 우선은 그 사람에게 보여야 했다. 황제에게도 보고해야 할 테고.

아스텔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졌다.

‘덴츠에 도착할 때까지 될 수 있으면 안 만나고 싶었는데…….’

* * *

“전염병이라는 건가?”

성의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던 카이젠은 예상치 못한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습니다.”

린든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대답하며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가리켰다.

“다음 목적지인 이쪽 마을에 전염병이 돌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무래도 이 길로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행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시 길을 떠날 예정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서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성이었다. 이곳처럼 성이 있고 주변엔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미리 알아보니 그 마을에 전염병이 돌고 있었다.

“이네스 열병이라고 합니다. 전염성이 강해서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는 병이라고…….”

“그래, 알고 있다. 동부의 풍토병이지.”

동부에는 열병이 흔했다.

이네스 열병은 그중 제일 위험한 전염병으로 수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는 없는 동부의 풍토병이다.

치명적인 전염병은 아니지만 초기에 약을 먹지 못하면 사망률이 높다고 들었다.

어쨌든 간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경로를 찾아야만 했다.

“다른 길은 어느 쪽이지?”

카이젠이 책상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남쪽으로 돌아서 가는 길입니다. 사흘 정도는 더 걸릴 겁니다.”

사흘 정도는 늦어도 어쩔 수 없었다. 병이 도는 곳으로 일행을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쪽으로 가야겠군. 숙소로 정할 곳을 알아봐.”

카이젠이 눈짓하자 벨리안은 그곳 성주에게 연락하고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나갔다.

카이젠은 다시 린든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있는 건가?”

“약이 별로 없어서…… 아직 치료받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마을은 임시로 폐쇄해 놨다고 합니다.”

치료도 안 해주면서 마을을 가둬놓고 있다는 뜻이었다.

매정한 짓이긴 했지만 이해가 가긴 했다. 이런 시골에는 치료제를 파는 곳도 별로 없을 텐데, 전염병이 수습되기 전에 다른 마을로 퍼지면 큰일이니까.

카이젠은 짧게 한숨 끝에 명령했다.

“그쪽 성에 병사들과 지원금을 보내서 마을을 관리하고 환자들을 치료하게 해. 근처 다른 성에도 연락해서 의사와 약제사들을 보내라고 하고.”

“예, 폐하.”

린든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카이젠은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수도와 몇 군데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너무 낙후되어 있어. 이런 시골에는 환자들을 치료할 약도 제대로 없으니.’

지난 수십 년간 나라를 제대로 다스린 사람이 없어서였다.

전전대 황제인 조부는 평생 권력과 영토 확장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고, 부친인 전대 황제는 평생 레스턴 공작을 비롯한 대귀족들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카이젠 자신도 황제가 된 뒤엔 반란을 진압하고 대영주들을 숙청하느라 6년을 허비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카이젠은 제국 전체를 완벽하게 손에 넣었다. 더는 거리낄 게 없으니 이제부터는 내정에 치중할 생각이었다.

수도의 상황이 안정되자마자 순행을 나선 것도 그래서였다. 순행이라는 것은 황제가 직접 제국 땅을 돌아보면서 각 지역을 시찰하고 점검하는 일이었다.

제국을 제대로 다스리고 번영시키려면 자신이 직접 영토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아스텔은 지금 어디 있지?”

지도를 살펴보던 카이젠은 찻잔을 들고 온 시종을 향해 물었다.

“서쪽 별채에 계십니다.”

아스텔에게 상황을 설명해 줘야 했다.

예정보다 빨리 덴츠 쪽으로 이동하게 된 건 아스텔 때문인데, 갑자기 일정이 늦어지게 생겼으니 자신이 직접 말해주고 양해를 구해야겠다.

카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이 안내해 주는 서쪽 별채로 향했다.

이곳은 워낙 구식 성인 데다 크기도 작아서 몹시 불편했다. 복도에는 햇빛도 잘 들지 않아서 어둡기까지 했다. 하룻밤 들렀다 가는 곳이니 불편해도 참을 수밖에 없겠다만.

본채를 떠나 서쪽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빠져나오자 본채보다 더 허름하고 불편해 보이는 별채가 나왔다.

“여기가 아스텔이 머무는 곳이라고?”

“예.”

카이젠은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비좁은 복도를 둘러봤다.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아무리 침실이 부족해도 이런 곳을 배정하다니. 

당장 방을 바꿔줘야겠다. 이곳 성주는 아내도 없는 모양인데 성주 부인이 쓰는 방을 내주면 될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좁은 복도를 지나 맨 끝에 붙어 있는 문으로 걸어갔다.

시종이 문을 열기 전에 노크부터 하려는데, 문을 한 번 두드리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폐하……!”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아스텔이었다. 무심코 말을 꺼내려던 카이젠은 아스텔의 차림새를 보고 멈춰 섰다.

아스텔은 새하얀 슈미즈 가운을 입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순백의 천이 바닥까지 늘어지는 실내용 가운이었다. 넉넉하게 늘어지는 실내용 가운이라 몸매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금방 목욕을 하고 나온 건지 금실 같은 금발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아스텔은 카이젠의 놀란 얼굴을 보고 급히 정신을 차렸다. 가운을 더 잡아당겨서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가렸다.

“안 그래도 찾아뵙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아스텔의 연녹색 눈에 근심 어린 기색이 서렸다.

“제가 열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 * *

아스텔은 당황했다.

손목에 난 반점을 발견하자마자 얼른 목욕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테오르를 말려주고 옷을 입히고 아스텔 자신도 옷을 갈아입으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길래 문을 열었더니 문 앞에 카이젠이 서 있었다.

‘하녀인 줄 알았는데.’

당연히 하녀라고 생각하고 실내용 가운 차림이라는 것도 잊고 문을 열었다.

카이젠은 조금 놀란 듯이 아스텔의 몸을 건너다봤다. 흰 가운은 목욕 가운처럼 얇진 않았지만 몸매를 완전히 가릴 만큼 충분히 두껍지도 않았다.

아스텔은 당황한 손길로 얼른 가운을 여미고 외투를 꺼내서 걸쳤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용건부터 꺼냈다.

“제가 열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뭐라고?”

열병이라는 말에 카이젠은 놀라서 소리쳤다.

그의 눈빛이 충격으로 떨렸다.

“당신이 열병에…… 아니, 얼마나 심한데?”

카이젠이 너무 경악하는 바람에 아스텔도 덩달아서 같이 놀랐다.

이게 저렇게 놀랄 일인가?

하긴 열병이라고만 말했으니 전염성이 강하고 치명적인 이네스 열병인 줄 알았나 보다. 아스텔은 얼른 설명을 보충했다.

“심한 열병은 아닙니다. 평범한 열병이에요. 아직 초기라서 열도 없고 반점만 생겼습니다.”

아스텔은 손목을 걷어서 카이젠이 볼 수 있게 했다.

“여기에 반점이 생겼습니다.”

카이젠은 입을 굳게 다물고 아스텔의 팔에 나타난 붉은 반점을 살폈다. 아스텔은 그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려고 했다.

“동부의 열병은 초기에는 이렇게 반점이 생깁니다. 이때 치료하지 못하면 점차 열이…….”

“동부의 열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나도 알아.”

카이젠이 답답하다는 듯이 아스텔의 설명을 끊었다.

“열병에 걸린 사람을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이렇게 반점이 생긴다는 건 알고 있어.”

카이젠은 조금 심란해 보였다. 전염성이 강한 병이 아니라는 설명을 듣고도 안심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왜 저러지? 설마 내가 비를 맞아서 병이 났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자기가 비 오는 날 애를 사냥 별장에 데려가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고 자책이라도 하는 건가.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은 아니지만.’

아스텔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알고 계신다니 다행입니다.”

그 말이 비위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카이젠은 분노한 눈빛으로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아스텔이 순간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날 만큼 험악한 기세였다.

“당신은 대체……!”

그가 분노를 터뜨리면서 아스텔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다. 해맑은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황제 폐하.”

가구가 얼마 없는 휑한 방 안의 중앙에는 침대가 있었다.

테오르는 침대 위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가 카이젠을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왔다.

테오르는 맑은 푸른 눈으로 카이젠을 올려다보며 인사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카이젠은 테오르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멈춰 섰다. 아이의 천진한 눈빛에 이성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위협적으로 번뜩였던 붉은 눈이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폐하, 아스텔 고모가 아파요.”

테오르는 말없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카이젠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네 고모는 괜찮을 거다.”

테오르를 내려다보던 카이젠은 테오르의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기가 막히다는 눈길로 아스텔을 돌아봤다.

“병이 났는데 여기서 어린애하고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당장 의사를 불렀어야지.”

“지금 옷을 갈아입고 의사에게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욕탕에서 방금 전에 돌아왔다. 아직 옷도 못 입고 있는 걸 보면 모르나.

카이젠은 시종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의사를 불러와라.”

잠시 후 일행에 따라온 궁정의가 도착했다. 의사를 데려온 사람은 벨리안이었다. 거기에 뭔가를 보고하기 위해 황제를 찾아온 린든까지.

세 사람이 모두 아스텔의 방에 모였다.

* * *

벨리안은 아스텔이 아프다는 소리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아스텔이 그에게 유심히 시선을 주자 벨리안은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의심할 바 없는 동부의 열병입니다.”

아스텔을 진찰한 의사가 보고했다.

“다행히 전염성도 별로 없고 심각한 병은 아닙니다. 빨리 발견했으니 약을 드시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금세 회복할 겁니다.”

예상했던 진단 결과였다.

아스텔은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카이젠은 의사의 확인을 듣고 깊이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가 벨리안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이곳 성주에게 알리고 시중들 하녀를 더 보내라고 해라. 우선 침실부터 본관으로 옮기고…….”

“폐하.”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카이젠을 불렀다. 순간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아스텔에게 향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이곳에서 지내면서 병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외부로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게 치료제도 제 손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뭐라고?”

카이젠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근처에 전염병이 퍼져 있지 않습니까? 분명 이네스 열병일 테고요.”

이번에는 멀거니 서서 구경하던 벨리안과 린든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랬구나.’

그렇지 않을까. 짐작만 해본 건데 맞았나 보다. 카이젠이 의심 어린 눈초리로 질문했다.

“당신은 그걸 어디에서 들었지?”

“누군가에게 들은 건 아닙니다.”

그냥 짐작만 했을 뿐이지.

은매화가 시들어 죽을 정도면 이 근방에 이네스 열병이 많이 퍼져 있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이 마을은 하녀로 변장하고 들어왔던 그 약제사 덕분에 환자가 생기지 않고 무사한 것 같지만, 주변의 다른 마을도 그렇게 운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근방의 어딘가엔 전염병에 잠식된 마을도 있으리라.

방금 전, 열병이라는 말에 유독 당황하던 카이젠의 반응도 아스텔의 짐작에 확신을 가져다줬다. 이네스 열병에 대해 듣지 않았다면, 카이젠처럼 무심한 사람이 그렇게 과민반응을 할 리가 없으니.

아스텔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전염병이 퍼져 있다는 걸 짐작하게 됐는지 차근차근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카이젠에 관한 내용은 빼고 은매화에 대한 것만.

이야기를 끝내자 린든과 의사는 물론 벨리안까지 다들 놀란 눈치였다.

카이젠만 빼고.

“그게 당신 병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카이젠은 어이없다는 듯이 따져 물었다. 아스텔은 다시 침착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 황제 폐하의 일행에도 열병 환자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동요할 겁니다.”

치명적인 이네스 열병이 아니라 평범한 열병이라고 아무리 설명해 봤자, 질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농민들은 ‘황제의 일행에 열병 환자가 있다’는 부분에만 집중할 것이다. 오히려 이네스 열병이라는 걸 감추기 위해 평범한 병이라고 속이는 게 아니냐며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저희가 떠난 뒤에 이 마을은 전염병 환자가 머물던 곳이라고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평민들은 그런 소문이 퍼져도 하늘 같은 황제를 비난하지 못한다. 

그 피해는 온전히 이 마을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열병 환자가 머물렀다, 는 소문만 돌아도 순식간에 인적이 끊기고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기피 대상이 될 테니까.

이런 숲 지대의 시골 마을은 채소나 가축을 기르며 다른 마을과의 물물교환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외부로부터 고립당하면 농민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게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조용히 치료하고 싶습니다. 폐하의 시의가 이곳에 들락거리는 걸 보면 사람들의 의심할 테니, 치료제도 제가 만들겠습니다. 열병의 치료제는 예전에 여러 번 만들어본 적이 있어서 재료만 있으면 쉽게 조제할 수 있습니다.”

동부에는 열병이 흔해서 그레텔이 약을 만드는 걸 가르쳐 줄 때 열심히 배워뒀다. 희귀한 재료가 필요한 약도 아니었다. 대부분 주변 숲에서 구할 수 있었다. 개량하고 정확히 만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그리고…… 눈 색을 바꾸는 약도 만들어야 해.’

사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거였다.

원래는 내일 아침쯤에 테오르와 함께 마을과 숲을 구경하겠다고 잠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스텔 자신이 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갔다 올 기회가 사라졌다.

남은 약은 사흘분 정도.

그때까지 자신이 다 회복하지 못하면 일행은 계속 이 성안에 머물겠지. 지금이 아니면 약초를 구하고 약을 만들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치료 약을 만든다고 하면서 그 틈에 테오르의 눈약도 같이 만들어야 한다.

아스텔은 차분하게 설명을 끝내고 카이젠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런데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다들 말없이 아스텔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왜 저러지?’

아스텔이 의문을 느낄 무렵 린든이 멍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스텔 님께서는 정말로 생각이 깊으시군요.”

“……예?”

린든은 아스텔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진심으로 감동하는 표정이었다.

“이곳 농민들의 사정을 생각해 주고 저희의 사정까지 배려해 주시는 마음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

‘아니, 뭐 감동까지야…….’

사실은 이참에 조용히 눈 색을 바꾸는 약까지 만들고 싶어서 말을 끼워 맞춘 것뿐인데.

돌아보니 오늘 처음 만난 중년의 의사도 감탄 섞인 눈빛으로 아스텔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벨리안마저 조금 놀랐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별로 감명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잠자코 듣던 카이젠이 갑자기 따지듯이 물었다.

“그래서 여기 머물겠다고?”

“예.”

“아이는 어쩌려고?”

그 말에 침대 위에서 블린과 놀고 있는 테오르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스텔은 의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테오르는 복도 건너편 방에 따로 재우면 괜찮을까요?”

“그 정도만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증상이 심해져서 열이 나지 않는 한 전염성도 없는 병이니까요.”

아스텔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의사에게 확인을 받으니 더 안심이 됐다.

“테오르. 들었지? 오늘은 저 옆방에서 자야 해. 그럴 수 있겠어?”

혹시 겁을 먹지 않을까 했는데 테오르는 오히려 둘이서 방을 두 개나 쓴다는 걸 재미있어했다.

“응! 그럼 난 새 방에서 블린이랑 잘래!”

다른 방으로 가기 싫다고 떼를 쓰면 어쩌나 했는데, 테오르는 의외로 쉽게 동의했다. 하긴, 테오르는 집에 있을 때도 가끔 외조부님의 방에 가서 옛날이야기를 듣다가 잠들 때가 있었지.

이쯤 되자 카이젠도 허락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는 불쾌한 낯으로 한참 아스텔을 쏘아보다가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그래. 당신 뜻대로 해.”

“감사합니다, 폐하.”

아스텔은 슬쩍 벨리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벨리안은 한쪽에서 아스텔이 말하는 걸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아스텔은 그를 돌아보며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제안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이곳에 약제사가 왔었는데 그 사람에게 가서 약초를 조금 얻어 와도 될까요?”

그 한마디에 일순간 벨리안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약제사가 여기 왔었다고?”

사정을 전혀 모르는 카이젠이 의아한 눈초리로 아스텔을 향했다.

“예.”

아스텔은 벨리안의 순해 보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벨리안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카이젠에겐 말하지 말라는 건가. 많이 당황하는 걸 보니 역시 황제의 허락도 없이 혼자서 벌인 짓이었나 보다.

카이젠이 알면 자기가 있는 곳에서 허락도 없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화를 내겠지.

‘별로 동정심은 안 드네.’

벨리안은 예전부터 아스텔을 흥미롭게 관찰하며 눈치를 살피곤 했다. 마리안과 싸우는 것도 재미있는 연극을 관람하듯 구경했었지.

사람을 인형극의 인형처럼 취급하는 느낌이었다. 언제나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지금은 창백하게 질린 채 아스텔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당황한 얼굴이네. 마치 재미있는 무대를 구경하다가 갑자기 연극 무대로 굴러떨어진 불쌍한 관객처럼.

아스텔은 담담하게 말했다.

“일손이 부족해서 시중을 들러 왔다고 했습니다. 목욕물에도 좋은 약초를 넣어줬고요. 그 사람이 약초를 키우고 있을 테니 그곳에 가서 약초를 조금 얻어 오고 싶습니다.”

“그래, 마음대로 해.”

카이젠은 별로 의심하지 않고 허락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하지만 당신 혼자 보낼 수는 없어. 안내자 겸 호위로 기사를 데려가.”

“감사합니다, 폐하. 저 그럼…….”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감사를 표한 뒤 눈길을 돌렸다. 긴장한 낯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벨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다면 벨리안 님께 안내를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카이젠은 의아한 표정으로 벨리안을 돌아봤다.

“왜?”

“따로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저 녀석에게 무슨 할 얘기가 있는데?”

“개인적인 일입니다. 벨리안 님. 괜찮으신가요?”

“아, 예. 예.”

멍하니 서 있던 벨리안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스텔은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빨리 준비해 주세요.”

* * *

잠시 후 아스텔은 작은 바구니를 들고 성의 뒷문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아스텔은 바구니에 든 도구를 점검했다. 바구니 안에는 작은 모종삽과 가지를 자르기 위한 조그만 전지가위가 들어 있었다. 약초를 채집하기 위한 도구들이었다.

벨리안이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뒤따라오고 있었다.

“……왜 제게 안내를 원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스텔은 바구니 속을 뒤지면서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약제사를 하녀로 위장시켜서 제 짐과 약 상자를 살펴보셨잖아요. 일부러 공용 욕탕에 보내서 옷까지 뒤져보셨고요.”

“그…….”

“호기심을 충족하셨으면 이제 저를 도와주실 차례가 아닌가요?”

벨리안은 멍하니 버벅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라고 변명을 해볼까 하다가 포기한 듯했다.

“어떻게 아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 하녀는 누가 봐도 약제사던데요.”

손에 닿은 것들을 확인한 뒤, 아스텔은 하녀의 손톱에 풀물이 들었던 걸 말했다. 말라 죽은 은매화 꽃은 이미 모두의 앞에서 말했으니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벨리안은 질렸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하긴 예전에 레이디 마리안이 약 상자를 열어봤을 때는 약병의 위치가 조금 달라진 걸 눈치채셨죠. 그때도 느꼈지만 아스텔 님은 눈썰미가 정말 좋으시네요. 조금, 무서울 정도로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아스텔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벨리안은 아스텔의 눈치를 살피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만 아무래도 전에 일이 마음에 걸려서요. 그…… 혹시 아이에게 무슨 병이라도 있나 해서 확인하는 차원에서 살펴본 겁니다. 절대 나쁜 뜻이 있었던 게 아니고…….”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이 기회에 아스텔이 가진 약들을 살펴보고 의혹을 해소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런 낡은 성이 아니면 입고 있는 옷까지 전부 뒤져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설마 그걸 들킬 줄은 몰랐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테오르에게 병 같은 건 없었어요.”

아스텔은 미소 띤 얼굴로 차갑게 말을 끊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이가 몸이 약해서 시간 맞춰서 영양제를 먹이고 있어요. 그런 아이를 그 폭우 속에 말도 없이 사냥 별장에 데려가 버리셨으니 제가 따라가 볼 수밖에 없잖아요. 그게 이상해 보이셨다니 이해가 안 되네요.”

영양제 얘기는 별장에 쫓아가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한 소리였지만, 이제 짐을 실컷 뒤져봤으니 더 이상은 의심하지 않겠지.

“예, 이제는 분명히 알겠습니다. 전부 제 오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벨리안은 고개를 수그리며 사죄했다. 별로 미안한 것 같지는 않고, 기운이 빠져서 꽁지를 내린 느낌이었다만.

“저, 그런데 왜 폐하께는 말씀드리지 않으신 겁니까?”

“폐하께서 아시면 벨리안 님이 곤란하실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습니다.”

벨리안은 솔직하게 수긍했다.

황제 폐하는 아스텔을 몹시 신경 쓰고 있었다. 자신이 그 아스텔의 짐을 뒤져보려고 쓸데없는 수작을 벌인 걸 알면 크게 화를 내실 것이다.

그래도 벨리안은 테오르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절반은 황제 폐하의 안전을 위해서였고,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호기심과 찝찝한 기분을 덜어내기 위해서였다.

‘설마 들킬 줄은 몰랐지…….’

벨리안은 아스텔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텔은 그런 벨리안을 마주 보며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벨리안 님이 곤란하지 않게 도와드리고 나중에 저도 벨리안 님께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요컨대 말 안 할 테니 나중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써먹겠다는 뜻이었다.

“그냥 폐하께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럼 지금이라도 말씀드릴까요?”

“……아뇨, 도와드리겠습니다.”

벨리안은 정말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두 사람은 함께 성의 뒷문으로 갔다.

구불구불한 작은 길을 따라서 성의 뒤편으로 돌아갔더니 야트막한 돌담에 둘러싸인 숲이 나왔다. 이 숲은 성주가 소유하고 있는 사냥터라고 했다.

“이 안에 약초를 기르는 밭이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숲의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숲의 입구에서부터 걸음걸음마다 약초가 보였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에 온갖 약초가 가득했다. 조그맣게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알록달록한 꽃과 다채로운 모양의 풀잎이 빼곡하게 자라나 있다.

성주의 숲에 약초를 키우는 걸 보면 그 늙은 약제사는 성주에게 고용된 사람이었나 보다. 하긴 평범한 밭에서는 자라지 못하는 약초도 있으니까. 숲에 따로 구역을 정해놓고 재배하는 게 좋겠지.

“여기 없는 건 약제사가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필요한 약초의 이름을 적어주면 가져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대충 훑어봐도 필요한 약초는 다 있는 것 같았다.

아스텔은 바구니를 들고 약초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축축한 풀과 흙이 밟혔다.

“제가 찾는 약초는 아홉 가지인데 그중 찾기 쉬운 것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짧은 줄기에 피어난 작은 하얀 꽃입니다. 꽃잎 끝에 작은 줄무늬가 있고 끝이 갈라져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찾기 쉬운 것은 가이렌 풀인데…….”

길을 걸어가면서 뒤에 오는 벨리안이 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약초의 특징을 설명했다.

어려운 약초를 알려주면 못 찾을 것 같아서 최대한 쉬운 것만 알려줬는데, 뒤따라오던 벨리안이 충격받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도 찾아야 하는 겁니까?”

아스텔은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럼 구경만 하고 계실 건가요?”

“…….”

아스텔의 물음에 벨리안은 얼빠진 표정으로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흙바닥에 돋아난 풀잎으로 향했다. 말끔한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흙에 난 풀을 만지는 게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다. 어른이 돼서 흙 만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이런 상황엔 숙녀를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게 신사의 덕목일 텐데.

벨리안은 아스텔을 보며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저…… 저는 이런 풀…… 아니, 약초 같은 걸 만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시군요.”

대귀족 가문의 도련님들도 어릴 때는 놀이 삼아 정원의 풀을 뜯어보곤 하는데. 이 백작님은 명문가 출신은 아니지만 아주 귀하게 자란 모양이다.

‘그런 것 같긴 했지.’

친척인 대귀족 중에 명문가의 외동아들로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친척 동생이 있었다.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지 시종이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 옷도 입지 못했다.

그래도 늘 생글거리는 게 귀엽긴 했다. 구김살도 없고 철도 없는 귀여운 애였는데, 이 백작님은 그 애하고 약간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쪽은 눈치가 빠르고 약삭빠른 성격이라 귀염성은 눈곱만큼도 없긴 했다만.

어쨌든 저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안내원으로 벨리안을 지목했다. 린든이나 다른 기사였으면 레이디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고 아스텔은 약초에 손을 대지 못하게 말렸을 테니까.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곤란하지. 열병의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약초를 찾으면서 틈틈이 눈약에 들어가는 약초도 찾아야 하는데.

아스텔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 기회에 경험해 보시는 것도 좋지요. 흔치 않은 경험이 되실 테니까요.”

“…….”

“여기 가이렌 풀이 있네요. 뿌리째 뽑으면 되니까 채취하기 쉽습니다. 한번 해보세요.”

벨리안은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한숨을 내쉬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스텔 님의 기분이 풀리신다면야…….”

아스텔이 앙심을 품고 자기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부러 괴롭히려는 건 아닌데.’

괜한 의심을 피하려면 벨리안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아스텔은 다른 쪽으로 가는 척하며 벨리안을 살폈다. 

벨리안은 한 손으로 간신히 약초를 잡아 뽑다가 손끝에 눅눅한 흙이 묻자 진저리를 치며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흙을 털어내는 데 집중하느라 아스텔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저쪽은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네.’

아스텔은 풀숲을 헤치며 약초를 찾았다. 그중 필요한 약초만을 골라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어느새 해 질 무렵이 되었다.

노을이 지는 숲길엔 선선한 저녁 공기가 감돌았다. 목덜미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열에 들뜬 살갗을 식혀주었다. 숨을 쉴 때마다 축축한 풀 향기와 시큼한 흙내음이 났다.

커다란 자작나무 근처를 지나가던 아스텔은 흠칫 놀랐다. 입구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서 풀밭을 뒤지고 있던 벨리안이 황급히 일어섰다.

“폐하!”

놀라서 몸을 돌리자 저 멀리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아스텔.”

카이젠이었다.

그가 아스텔의 놀란 얼굴을 보며 약간 불쾌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지? 내가 방해가 된 건가?”

“……아닙니다, 폐하.”

당연히 엄청나게 방해됐지만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순간 한 손에 들고 있는 약초 바구니로 온 신경이 쏠렸다. 그 안에는 열병의 치료제에 넣을 약초 외에도 눈 색을 바꾸는 약을 위한 약초들도 있었다.

아스텔은 솟아오르는 불안감을 억눌렀다.

‘괜찮겠지. 어차피 카이젠도 약초에 대해선 문외한이니까.’

아스텔은 약초 바구니를 갈무리하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폐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본관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병에 걸린 걸 보고하고 어떻게 치료할지도 정했다. 더는 카이젠과 할 얘기가 없었다. 용건은 끝났는데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걸까.

카이젠은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투로 대답했다.

“당신을 도와주러 왔지. 숲은 위험해.”

“이곳은 성에서 몇 분만 걸으면 도착하는 곳인데요.”

이곳은 성과 가까운 곳이라 보이지 않지만, 마을의 경계에서부터 이 숲 근처까지 황제의 병사들이 교대로 둘러보며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위험한 일이 생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도 혼자 있는 건 위험해.”

“벨리안 님도 함께 있는데요.”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저 녀석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주군의 가차 없는 평가에 벨리안이 서글픈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지만 카이젠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뭐…… 강도나 들짐승을 만난다고 가정하면 벨리안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만.

아스텔에게 그 정도는 큰 위험이 아니었다. 가장 위험한 건 카이젠에게 테오르의 정체를 들키는 것이었다.

‘지금은 폐하의 곁에 있는 게 제일 위험합니다.’

마음 같아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속마음도 모르고 카이젠은 이어서 말했다.

“당신 방을 정돈해 놓고 테오르의 방도 준비하라고 했어. 금방 돌아올 줄 알고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서 찾으러 온 거야.”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았으니 그만 가줬으면 했는데, 카이젠은 아스텔이 들고 있는 약초 바구니를 보면서 말했다.

“나도 도와주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감사합니다만 폐하. 저 혼자 찾아도 충분합니다. 벨리안 님도 도와주고 계시고…….”

“한 사람이라도 더 도와주면 그만큼 더 빨리 찾을 것 아닌가?”

카이젠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떤 걸 찾는 거지?”

아스텔은 괜찮다고 거절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좋은 방법이었다. 셋이서 찾으면 더 빨리 찾을 테니까. 약초를 다 찾으면 얼른 성탑으로 돌아가서 카이젠과 떨어질 수 있었다.

아스텔은 바구니를 확인한 뒤 카이젠에게 찾아야 하는 약초를 몇 가지 설명해 줬다.

“남은 약초는 네 가지입니다. 제일 찾기 쉬운 것은 흰 꽃인데…….”

벨리안에게 해줬던 것과 똑같은 설명을 되풀이했다.

벨리안은 아직도 아스텔이 집어준 가이렌 풀만 찾아다니고 있었다. 카이젠에겐 흰 꽃을 찾게 할 생각이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설명을 유심히 듣더니 제법 진지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약초를 찾았다.

‘괜찮겠지.’

아스텔은 카이젠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숲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찾았다. 최대한 빨리 필요한 걸 다 찾아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나뭇가지들 사이로 석양빛이 스며들었다. 잠시 허리라도 펼 겸 고개를 들었더니 주홍빛 하늘을 반쯤 가리고 있는 검푸른 잎사귀들이 보였다.

“아스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잡초들을 내려다보던 카이젠이 아스텔을 불렀다.

“당신이 말한 꽃이 이건가?”

“찾으셨나요?”

기대감을 안고 다가갔던 아스텔은 카이젠의 손에 들린 약초를 보고 실망했다.

“아닙니다. 이것보다는 꽃잎이 작아요.”

“그렇군.”

두 사람은 다시 각자 떨어져서 약초를 찾았다.

한참 약초를 찾아다니는데 카이젠이 다시 아스텔을 불렀다.

“여기 찾은 것 같은데.”

아스텔은 약초를 뽑으려다 말고 다시 카이젠에게 달려갔다.

카이젠이 들고 있는 건 작은 하얀 꽃이었다. 아스텔이 찾는 꽃과 흡사했지만 줄기가 좀 더 길었고 꽃잎은 너무 작았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연녹색 눈에 실망감이 감도는 걸 보고 손을 내렸다.

“……이번에도 아닌 건가.”

“예.”

카이젠의 얼굴에 실망과 민망함이 감돌았다. 아스텔은 그런 카이젠을 위로했다.

“비슷한 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양손 가득 가이렌 풀을 들고 온 벨리안이 묵묵히 서 있는 카이젠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저, 폐하, 제가 도와드릴…….”

“필요 없다.”

서리가 일 것 같은 냉정한 목소리였다. 벨리안도 자기 몫의 약초를 찾아내는데, 자기만 계속 잘못 찾고 있으니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하긴, 숲에 들어온 적은 많겠지만 약초 같은 걸 찾아본 건 처음일 테니. 

의외로 벨리안은 눈썰미가 있어 곧잘 약초를 찾았다.

연달아 실패하자 카이젠은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그의 주변에만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벨리안은 가져온 약초를 아스텔의 바구니에 건네주고 얼른 저 멀리로 도망쳤다. 

한참 동안 풀숲을 뒤지던 카이젠은 낮은 한숨과 함께 푸념하듯 물었다.

“당신은 대체 언제 이런 걸 배웠지?”

“할아버님의 저택 근처에 약제사가 살아서요. 어쩌다 보니 친해져서 약 만드는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열심히 배워뒀습니다.”

“당신이 왜 그런 걸 배웠는데?”

아스텔은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저희 저택에 어린 테오르와 연로한 할아버님이 계시니까요.”

당연히 질병에 가장 취약한 사람은 노약자다. 단순한 감기도 어린아이와 노인에겐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

테오르와 외할아버지는 둘 다 무척 건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스텔은 두 사람이 절대 병에 걸리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주변에 병이 돌 때마다 그레텔이 약 만드는 걸 돕고, 저택 내부의 위생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틈틈이 그레텔에게서 약초와 물약 제조도 열심히 배웠다. 눈약도 만들어야 했지만, 그레텔이 자리를 비웠을 때 누군가가 병에 걸리면 치료제를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레텔은 아스텔이 약을 만드는 걸 보더니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다.

‘꼼꼼한 성격이라 그런지 빨리 배우시네요. 확실히 소질도 있으신 것 같고요.’

그레텔은 그렇게 칭찬하면서 원하면 제자로 받아줄 수 있다고 했지만 아스텔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테오르를 돌보고 저택의 살림을 챙기려면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대신 약초를 키우는 법을 배워서 정원에 텃밭을 일구고 약초를 심었다. 매년 그걸 팔아서 생활비를 벌었다.

아스텔은 별 뜻 없이 대답한 말이었지만 카이젠은 그 소리를 듣자 또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렇게 생계가 어려웠던가.’

카이젠은 풀잎을 밟으며 걸었다. 숲에 와본 적은 많아도 이렇게 풀숲을 헤치고 다닌 건 처음이었다. 가는 곳마다 축축한 흙냄새와 싱싱한 풀 냄새가 났다.

카이젠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석양 위로 자색 구름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연보라색으로 수놓고 있었다.

서너 걸음 앞에 아스텔이 있었다. 무늬 없는 단조로운 드레스를 입은 아스텔은 바구니를 들고 뭔지 알 수 없는 약초를 뜯는 중이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렇게 아스텔과 함께 숲속에 있었지.’

아스텔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아름답게 치장한 인형 같은 모습뿐이었다. 배경이 되는 곳은 황궁이나 화려한 저택의 연회장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단 한 번 아스텔과 함께 숲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먼지 쌓인 책의 한 페이지처럼 오래된 기억이었다. 카이젠은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잊고 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담담한 목소리에 아스텔이 고개를 돌렸다.

카이젠은 그녀를 직시하며 이야기했다.

“내 생일에 사냥하러 함께 숲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지. 기억하고 있나?”

잊어버렸을까 했는데, 아스텔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폐하를 구하려다가 물에 빠졌던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담담한 말투였지만 뼈가 있는 소리였다.

“……그래. 그 일 말이야.”

“예, 그런 적이 있었죠.”

아스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조한 목소리엔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긴,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

카이젠은 묵묵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 * *

그때는 겨울이었다.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숲으로 사냥을 나왔을 때였다.

카이젠 자신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기념해서 사냥을 나왔던 것 같다. 평소에는 여성들을 사냥터에 데려오지 않았지만, 그날은 황제의 명령에 의해 약혼녀인 아스텔도 동행했다.

즐거워야 할 생일 기념 사냥은 아스텔 때문에 시작부터 삐그덕거렸다.

‘귀찮군.’

그러나 아버지인 황제가 딸려 보냈으니 쫓아버릴 수도 없었다. 

당시 카이젠은 무심하지만 예의 바른 약혼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 황제의 당부가 없었다고 해도 아스텔을 함부로 내쫓지는 못했으리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짜증이 났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성에서 하루 정도 머물며 사냥을 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두 번째 불행이 덮쳤다.

저녁 무렵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둘씩 내리던 눈송이에 새벽이 오기도 전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카이젠은 날이 밝자마자 코트를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성의 뒷마당은 넓은 숲과 이어져 있었다. 그는 일행과 함께 군마를 타고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파르스름한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새카맣게 그늘진 숲이 설원 위에 펼쳐져 있었다. 

중간에 누군가가 이 숲의 연못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했다. 이 숲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가서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빌면 숲의 정령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이었다.

“헛소리군.”

숲의 전설에 대해 설명하던 사람은 카이젠의 목소리에 말을 멈췄다.

카이젠은 눈 덮인 숲길을 둘러보며 코웃음 치고 있었다.

“연못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니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카이젠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전설을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을 비웃었다. 반면 설명을 듣던 아스텔은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래도 아름다운 이야기인데요.”

고급스러운 남색 사냥복을 입고 털외투를 걸치고 말에 탄 아스텔은 숲의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사냥복이라고 해도 치맛단이 넓은 드레스라 옆으로 앉은 채 말을 타고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승마를 하니까 위태로우면서도 우아해 보였다.

하지만 아스텔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당시의 카이젠에겐 근처에 지나다니는 돌멩이나 마찬가지였다.

카이젠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내 약혼녀가 이렇게 미신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

아스텔은 민망한 마음을 무릅쓰고 다시 카이젠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도 이 숲은 아주 아름답잖아요. 아침이라 공기도 상쾌하고요. 수도 가까이에도 이런 숲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그래. 괜찮긴 하군. 사람이 많이 드나들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어디든 사람이 자주 다니면 경치를 훼손하게 되거든.”

카이젠은 말머리를 옆으로 돌리며 툭 내뱉었다.

“특히 사냥을 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드나들면 사냥터도 망치게 돼.”

사냥을 하지 못하면서 자신을 따라온 아스텔을 저격하는 듯한 말이었다. 아스텔의 침착한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감돌았다.

카이젠은 더 이상 아스텔과 쓸데없는 소리를 나누기 싫어서 말을 달려서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십 대 시절의 카이젠은 사냥을 무척 좋아했다.

사냥 자체보다도 황궁 밖으로 나가서 숲을 달리는 게 좋았다. 그때만큼은 가식을 벗어던지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젠은 한참 동안 숲속을 돌아다니며 사냥감을 쫓았다. 몇 시간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아스텔을 만나지 못했다. 어디 있는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스텔이 사냥을 좋아하는지 사냥을 해본 적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마 사냥을 해본 적이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처음 보는 숲의 중심까지 들어왔을 때였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눈 덮인 들판이 보였다. 카이젠은 방향을 틀고 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눈밭을 밟고 달려나가던 순간, 갑자기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발을 내딛자마자 바닥이 무너지듯이 내려앉은 것이다.

얼음이 깨지면서 차가운 물이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 시커먼 물이 깊은 수렁처럼 그를 집어삼켰다.

히이이잉!

놀란 말의 울음소리가 날카로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물에 빠진 카이젠은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얼어붙은 물이 싸늘한 칼날처럼 온몸을 찔렀다.

카이젠은 얼음 조각을 붙잡으려고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두툼한 털옷이 온몸에 무겁게 달라붙어서 몸이 점점 가라앉았다. 깨진 얼음이 눈앞에 있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그때 위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누군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이젠은 가까스로 그 손을 잡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그를 힘껏 붙잡고 끌어당겼다.

카이젠이 얼음을 붙잡고 간신히 수면 위로 올라갔을 때였다. 옆에 있던 얼음이 갈라지더니 이번엔 카이젠을 잡아준 사람이 물에 빠졌다.

“……아스텔?”

간신히 얼음 위로 기어올랐던 카이젠은 그제야 자신을 끌어 올린 사람이 아스텔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엔 반대로 그가 아스텔에게 손을 뻗었다. 한참을 허우적거리던 아스텔이 카이젠의 손을 잡았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단번에 물 위로 끌어 올렸다.

“콜록콜록…….”

아스텔은 콜록이며 물을 뱉어냈다.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흩어지면서 하얀 얼음이 보였다. 멀리서 봤을 땐 눈 덮인 들판처럼 보였지만, 이곳은 들판이 아니라 호수였다. 얼어붙은 호수 위에 눈이 쌓인 것이었다.

물에 푹 젖은 아스텔이 바들바들 떨면서 그를 보고 있었다. 카이젠은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예…… 예, 전하. 감사합니다.”

아스텔은 그의 손을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물을 먹은 드레스가 축 늘어졌다. 카이젠은 두 손으로 그녀를 잡아당겨 일어서게 도와주었다.

“당신이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군. 고마워.”

아스텔은 그냥 웃어 보였다.

물에 푹 젖은 카이젠과 달리 아스텔의 상태는 좀 더 심각했다. 드레스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단단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서 산발이 되어 있었다. 찢어진 드레스 사이로 보이는 무릎은 상처가 나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빨리 오려다가 넘어져서 다친 모양이다.

“당신 많이 다쳤군.”

호숫가를 서성이던 말 두 마리가 카이젠에게 다가왔다. 한 마리는 아스텔이 타고 있던 백마였고, 다른 한 마리는 카이젠의 군마였다.

카이젠은 자신이 타고 온 군마를 붙잡았다. 함께 물에 빠진 덕에 갈기가 차갑게 젖어 있었다. 그는 말의 등을 토닥이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옆에는 아스텔이 타고 온 흰색 말이 있었다. 

카이젠은 그 말도 끌고 왔다. 그는 고삐를 잡고 아스텔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 상태로는 말에 오르기도 힘들 것 같았다.

“잡아.”

“감사합니다, 전하.”

카이젠은 아스텔을 들어서 말 위에 앉혔다. 그리고 두 마리 말을 끌고 호숫가 밖으로 나갔다.

자기 말에 오르기 전에 카이젠은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아스텔은 그냥 미미하게 웃기만 했다. 물 아래로 스며드는 것 같은 희미한 미소였다.

“그냥……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숲의 중심이었다.

혼자서 경치를 구경하러 오기엔 너무 먼 곳이었다.

거짓말 같았지만 카이젠은 더 이상 깊이 캐묻지 않고 말에 올랐다. 아스텔이 뭘 하든 크게 관심이 없어서였다.

성으로 돌아오는 동안 두 사람은 추위에 몸을 떨었다. 얼음물에 빠지고 젖은 채로 숲을 건너왔다. 손끝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웠다.

카이젠은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덜했지만 아스텔은 불쌍할 만큼 추워 보였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손이라도 잡아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픈 사람을 괜히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관뒀다.

젖은 옷을 입고 칼바람이 부는 숲속을 가로질러 온 뒤 아스텔은 열이 나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열병이었다. 밤새도록 열에 시달리느라 죽 한 그릇 먹지 못했다고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스텔은 멀쩡한 모습으로 병문안을 온 카이젠에게 사과했다.

고열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송구합니다, 전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다른 분들과 사냥을 즐기고 오세요.”

밤새 열을 앓아서일까. 

아스텔은 흰 눈처럼 창백하고 가녀린 모습이었다. 

길게 풀어 늘어뜨린 백금발과 혈색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 이불 위로 나와 있는 팔과 손목도 버들가지처럼 가녀리다.

새하얀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아스텔은 눈의 정령 같았다.

군살 하나 없이 가느다란 손가락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필사적으로 카이젠을 붙잡고 끌어당기느라 골절됐다고 들었다.

‘…….’

순간 아스텔과 같이 있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아스텔이 마음에 들거나 불쌍해서가 아니라 아픈 약혼녀를 두고 사냥에 나갔다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걱정이 돼서였다.

그것도 자신을 구하다가 다치고 병이 났다는데.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그래. 그럼 몸조리 잘해.”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의무적인 인사를 건네고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날이 저물 때까지 아스텔에게 찾아가지 않았다.

* * *

옛 기억을 되새기던 카이젠은 걸음을 멈췄다.

먼 곳에서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고요한 숲을 잔잔히 뒤흔들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태양이 마지막 남은 빛을 푸른 숲에 뿌렸다. 그는 고개를 들고 아스텔을 향했다. 풀밭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는 아스텔의 머리 위에도 노을빛이 비쳤다. 

느슨하게 틀어 올린 머리채 아래로 하얀 목덜미가 보인다. 어깨와 등은 예전처럼 우아한 선을 그려내고 있었지만, 그 시절보다 훨씬 더 가녀리고 연약해 보였다.

아스텔은 버들가지처럼 가녀린 손으로 스스럼없이 약초를 캐내고 있었다.

과거의 아스텔은 황태자의 약혼녀로 제국에서 제일 높은 귀족 영애였다. 밭을 일구고 약초를 키우기는커녕 정원에 난 화초도 직접 가꾸지 않았다. 화병에 두는 꽃도 직접 꺾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아스텔이 아무렇지도 않게 흙을 만지고 약초를 골라내는 모습이 놀랍다 못해 애처롭게 느껴졌다. 힘들게 살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간 아스텔의 환경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카이젠은 새삼 이혼 후에 아스텔에게 무관심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강제로라도 돈과 영지를, 하다못해 연금이라도 보내줬어야 했다. 아스텔이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외조부인 후작에게라도 돈과 저택을 줄 걸 그랬다. 그랬으면 비록 외가에 얹혀사는 처지라도 고생은 덜하고 살았을 텐데.

옛 기억을 돌이켜 보니 아스텔은 자신에게 약혼녀로서 정성을 다했다. 언제나 곁에서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애썼고 손을 다쳐가면서 자신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아무리 사랑 없는 약혼이었다고 해도 아스텔의 노력에 일말의 보답이라도 해줄 것을.

그랬다면 이제 와서 이렇게 미안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으련만.

하지만 후회해 봤자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약초를 캐던 아스텔은 뒤에서 들려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카이젠이 어느새 바싹 다가와 있었다. 아스텔은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폐하……?”

아스텔의 시선을 제일 먼저 잡아끈 건 카이젠의 붉은 눈동자였다.

핏빛처럼 검붉은 색을 내는 진한 적색의 눈. 언제나 오만한 자신감으로 가득하던 그 붉은 눈에 쓸쓸하고 괴로운 감정이 스쳐 갔다.

카이젠은 말없이 외투를 벗어서 아스텔의 어깨에 걸쳐줬다. 검은색의 긴 외투가 마른 어깨를 덮고 발목까지 늘어졌다.

“폐하?”

이건 뭐지?

“입고 있어. 당신 몸도 안 좋잖아.”

아스텔은 얇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많이 춥지는 않았지만 해가 저물어서 조금 쌀쌀하긴 했다. 그래도 외투를 얻어 입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흙투성이가 된 벨리안도 놀란 눈길로 이쪽을 살폈다.

황제의 옷이라서인지 가볍고 고급스러운 옷감인데도 무척 따뜻했다. 아스텔은 침착한 손길로 외투를 걷어서 다시 카이젠에게 내밀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춥지 않습니다.”

“굳이 외투까지 벗어주는데 내팽개칠 필요는 없잖아? 몸도 안 좋으면서.”

“내팽개치지 않았습니다.”

내팽개치기는커녕 아스텔은 공손하게 외투를 정리해서 카이젠에게 다시 가져가 주십사 내밀고 있었다.

카이젠은 이를 악물고 외투를 받아들었다.

“하…… 그래. 당신 마음대로 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아스텔은 카이젠의 변덕에 어울려 주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걷던 아스텔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 피어난 작은 하얀 꽃을 발견했다. 그녀는 풀잎 사이에 박힌 조그만 꽃을 잡아 뽑았다.

“폐하, 꽃을 찾았습니다.”

아스텔은 앞서가는 카이젠을 불러 세웠다.

“필요한 약초는 다 찾았습니다. 이제 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갔던 카이젠이 뒤돌아서 다가왔다. 카이젠의 붉은 눈이 아스텔의 손에 들린 꽃을 세세히 살폈다. 그리고 담담한 시선으로 아스텔을 바라봤다.

“조금 더 넉넉하게 찾아놓는 게 낫지 않나?”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열병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약초는 넉넉히 찾았다.

눈약을 만드는 약초는 몰래몰래 찾아서 바구니 안에 넘칠 만큼 넣어뒀다. 더 많이 찾아봤자 보관하기 어려울 것이다.

“테오르가 기다릴 테니 이제 그만 성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 애한테 정말 지극정성이군.”

비꼬는 건가 싶었지만 카이젠은 그냥 무덤덤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씁쓸해 보이는 눈빛엔 자조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카이젠이 말했던 숲속에서의 기억이.

눈 덮인 숲. 칼날처럼 차가웠던 얼음물.

얼음물에 빠진 후유증으로 아스텔은 밤새 열병을 앓았다. 온몸이 덜덜 떨릴 만큼 심한 열이었다. 아스텔은 고열에 시달리면서 하루 종일 카이젠을 기다렸다.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카이젠이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보러 와주기를.

그러나 해가 저물 때까지 창밖을 내다보며 기다렸음에도 카이젠은 끝내 아스텔을 보러 오지 않았다.

아스텔은 쓸데없는 옛 기억을 털어버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테오르에겐 제가 필요하니까요.”

“…….”

“이제 그만 성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한 호흡이 지나간 뒤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성으로 돌아가지.”

* * *

성으로 돌아온 뒤 카이젠은 씻고 옷을 갈아입겠다며 벨리안과 함께 본관으로 돌아갔다.

아스텔은 혼자서 성탑으로 돌아왔다. 성탑에는 못 보던 젊은 하녀가 있었다.

“도련님의 시중을 들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테오르와 방을 따로 쓰기로 했으니 테오르를 돌봐줄 하녀가 필요하겠지.

어차피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것이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옆방에 재우는 것뿐이니까.

“그래, 잘 부탁해.”

하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레이디. 욕탕에 목욕물을 새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잘됐다. 안 그래도 아까는 테오르만 대충 씻기고 아스텔 자신은 제대로 씻지 못했다. 드레스에 흙이 잔뜩 묻었으니 옷도 갈아입고 목욕도 하고 싶었다.

“그럼 목욕하는 동안 잠시 테오르를 방 안에서 개와 놀게 해줘.”

“예, 레이디.”

아스텔은 하녀에게 몇 가지 간단한 지시 사항을 알려준 뒤 방문을 열었다.

‘응?’

무심코 문을 열던 아스텔은 문고리를 잡은 채 놀라서 멈춰 섰다.

순간 방을 잘못 찾아왔나 싶었다.

이곳은 원래 넓은 마룻바닥 위에 단조로운 가구만 몇 개 놓인 썰렁한 침실이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휑하니 비어 있던 마룻바닥에는 따뜻한 모피로 된 융단이 깔리고, 군데군데 거미줄처럼 금이 간 벽에는 다채로운 무늬로 짜인 태피스트리가 걸렸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고급스러운 테이블이 창가에 놓였고, 침대 옆에는 푹신한 안락의자도 생겼다. 둥근 테이블에는 자수로 장식된 테이블보가 깔렸고, 의자 위에는 매끄러운 빌로드로 만든 폭신폭신한 쿠션까지 놓여 있었다.

침대도 달라졌다. 뻣뻣한 기둥만 네 개 남아 있는 단조로운 침대였는데, 지금은 네 개의 기둥 위에 캐노피가 걸린 고급스러운 침대로 바뀌었다. 침대에 덮여 있던 낡은 이불도 사라지고, 깨끗하고 푹신한 실크 이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완전히 다른 방이 됐네.’

살풍경하던 방 안이 잠깐 사이에 못 알아볼 만큼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벽난로에 넘칠 만큼 장작을 넣어서 불을 붙여 놓은 덕에 방 안은 따뜻하고 훈훈한 공기로 가득했다.

“왜 이렇게 변한 거지?”

방 한쪽에 가만히 서 있던 하녀가 긴장된 낯으로 다가왔다.

“폐하께서 침실을 새로 단장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건 새로 단장한 게 아니라 아예 방을 통째로 바꾼 느낌인데. 

분명 카이젠이 방을 정돈해 놓으라고 명령했다고 했었지. 그냥 정돈이라고 했는데……. 설마하니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꾸며놓을 줄은 몰랐다.

옷장 앞에서 놀고 있던 테오르가 아스텔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스텔 고모, 내 방도 바뀌었어!”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끌려서 문밖으로 나갔다. 

테오르의 방은 복도를 따라 몇 걸음만 걸어가면 나오는 곳에 있었다. 

그곳도 아스텔의 방과 비슷했다. 폭신폭신한 쿠션과 카펫과 태피스트리로 가득 찬 아늑한 침실이었다. 아이의 방이라고 나름 신경을 쓴 것인지 아스텔의 방보다 밝고 아기자기한 분위기였다. 커튼과 침구는 노란색이었고, 테이블과 선반 위에는 조그만 동물 인형들도 있었다.

“블린의 침대도 있어!”

테오르가 침대 옆에 놓인 동그란 쿠션을 가리켰다. 푹신푹신한 테두리가 둘러진 넓은 방석이었다.

‘정말로 강아지용인가 보네.’

블린은 그 쿠션이 마음에 드는지 쿡쿡 냄새를 맡다가 그 위에 배를 깔고 누웠다.

“새 침실이 마음에 들어?”

“응!”

“그래. 나는 씻고 올 테니까. 방 안에서 블린과 놀고 있으렴.”

아스텔은 테오르를 남겨놓고 욕탕에 가서 다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우선 열병 치료제를 만들었다.

아스텔은 하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약초를 골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준비되어 있는 재료들을 꺼내고 숲에서 뜯어 온 간단한 약초들을 다듬었다. 줄기와 꽃잎을 깨끗하게 씻어서 큰 솥에 끓여냈다. 솥 안에서 붉은 액체가 보글보글 끓었다.

그러면서 반대편에는 따로 빼놓았던 약초들을 다듬어서 작은 솥에 넣고 끓였다. 일정한 비율로 몇 가지 약초를 잘라서 첨가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약물은 투명한 색에서 초록색으로, 다시 맑은 파란색으로 변했다. 눈 색을 바꾸는 약이었다. 

반면 큰 솥에는 불그스름한 오렌지빛 액체가 만들어졌다. 이건 열병의 치료제였다.

다 만들고 나자 양쪽 다 유리병에 가득 채울 만큼 넉넉한 양이 나왔다. 아스텔은 약그릇에 열병의 치료제를 담고 푸른 약물은 미리 준비해 놓았던 세 개의 유리병에 넣고 마개를 닫았다.

이 정도면 한 달 동안 써도 넉넉할 것이다.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는걸.’

아스텔은 안도하며 그릇에 담아둔 치료제를 마셨다. 씁쓰름한 물약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손목에는 여전히 희미한 붉은 반점이 드러나 있었지만 열도 없고 몸이 나른하지도 않다.

‘약을 먹었으니 괜찮아지겠지.’

반점이 사라지면 완치된 걸로 본다. 어차피 초기였으니 오늘내일 안에 반점이 사라질 것 같았다.

어느새 완전히 해가 져서 부엌 안도 어두워져 있었다.

아스텔은 부엌에 있던 낡은 촛대에 불을 밝혔다. 눈 색을 바꾸는 물약은 옷 속에 숨기고 침실로 돌아왔다.

“블린!”

‘응?’

침실이 있는 층의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테오르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자, 이쪽으로 던져라.”

그리고 익숙한 중저음이 뒤따랐다. 침실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카이젠이 와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몸은 좀 괜찮나?”

“예, 약을 먹었더니 더 나아졌습니다.”

카이젠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근데 여긴 또 왜 왔지?’

본관에서 성주하고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 아닌가?

황제를 극진히 접대하기 위해 이곳 성주가 밤낮없이 고심해서 최고로 화려한 만찬을 준비했을 텐데.

테오르가 아스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스텔 고모! 폐하랑 같이 맛있는 걸 먹기로 했어!”

‘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카이젠을 돌아보자 그가 웃으며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테오르가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더군. 함께 식사하고 싶다고 하길래 이곳으로 저녁을 가져오라고 했지.”

“…….”

장담하건대 테오르가 먼저 황제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을 리가 없다. 노는 데 정신이 팔리면 저녁 먹을 시간인 것도 늘 잊어버리는데.

“폐하, 송구합니다만.”

마음 같아서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내쫓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약을 먹고 나아졌다고 했는데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열이 나지 않으니 전염된다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아스텔은 무슨 이유를 대서 카이젠을 내보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길게 고민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폐하. 식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예?”

“그래, 이쪽으로 가져와라.”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온 시종을 시작으로 하인들이 그릇을 들고 방 안으로 줄줄이 걸어 들어왔다.

하인들이 창가의 테이블에 그릇과 식기를 내려놓고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저녁상이 차려졌다.

고소한 버터 향이 감도는 빵과 수프. 향긋한 허브를 뿌리고 구운 소고기. 아스파라거스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채소 구이. 상큼한 레몬 소스를 입힌 농어구이도 있었다. 달달한 소스를 발라서 구운 닭고기엔 먹음직스러운 금빛 육즙이 감돌았다.

예상은 했지만 이곳 성주가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정성을 다한 모양이다.

“우와…….”

테오르는 다채로운 음식들을 구경했다.

“이것도 먹어봐도 돼요?”

테오르가 달콤한 향을 풍기는 닭고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카이젠은 웃으며 대답했다.

“먹고 싶은 건 다 먹어도 된다.”

“감사합니다, 폐하.”

테오르는 곰 인형을 끌어안은 채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당신도 앉지.”

“…….”

아스텔은 뻔뻔하게 웃고 있는 카이젠이 얄미웠지만 별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옆에 앉은 테오르에게 닭고기를 잘라줬다. 테오르는 얌전히 아스텔이 잘라준 닭고기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먹었다. 겉은 달달한 소스로 덮여 있고 안쪽은 간이 배서 짭조름한 맛이 났다.

“맛있니?”

“응! 맛있어요.”

아스텔은 입맛이 별로 없어서 수프만 떠먹었다. 부드러운 크림 향이 나는 따끈따끈한 감자 수프였다.

잔을 들던 카이젠이 테오르의 옆에 놓인 인형을 보며 물었다.

“그 곰 인형은 뭐지?”

“얘는 레빈이에요!”

테오르가 조그만 두 손으로 곰의 양팔을 잡고 흔들었다.

“제 친구예요.”

“흐음.”

카이젠의 시선이 슬쩍 아스텔에게 향했다.

“좀 더 크면 또래 친구를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는 충고하듯 말하면서 덧붙였다.

“수도에는 이만한 나이 대의 어린애들이 많지.”

또 수도에 살라는 얘기인가.

수프를 떠먹던 아스텔은 스푼을 내려놓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근처 마을에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과 놀면 됩니다.”

아스텔이 워낙 쌀쌀맞게 얘기해서인지 카이젠은 더 이상 그 화제는 꺼내지 않았다.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었다. 시종들이 음식 접시를 내가고 향긋한 차가 담긴 찻잔과 따뜻한 코코아가 담긴 머그컵을 내왔다.

테오르는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기댄 채 옆에 누운 사냥개를 쓰다듬고 있었다. 먼 길을 와서 몸을 씻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나니 노곤함이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테오르. 졸리면 그만 자야지.”

“우웅…… 자기 싫어…….”

테오르는 조그만 손으로 눈을 비비며 칭얼거렸다.

카이젠이 낮게 웃으며 테오르를 달랬다.

“졸리면 조금만 자고 다시 일어나면 된다.”

그 말이 효과가 있었다.

“그럼 조금만 잘게요. 깨워주세요.”

“그래.”

카이젠은 테오르에게 약속해 줬다.

테오르는 안락의자에 누워서 푹신한 쿠션에 얼굴을 댔다. 잠기운이 밀려오는지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 

테오르는 눈을 감은 채 칭얼거렸다.

“레빈…….”

“레빈을 줄까?”

아스텔은 침대 근처에 떨어진 곰 인형을 집어 들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완전히 잠에 빠져든 테오르는 쿠션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은 채 웅얼거렸다.

“응…… 엄마…….”

인형을 집어 들던 아스텔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 * *

남아 있는 와인을 마시고 일어서려던 카이젠은 테오르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음?”

아이가 지금 엄마라고 한 건가?

테오르는 어느새 눈을 감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잠든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아이가 엄마를 찾는군.”

카이젠은 아스텔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아스텔은 침대 근처에 굴러다니던 낡은 곰 인형을 집었다.

“예, 아무리 어려도 엄마 아빠가 뭔지는 아니까요.”

아스텔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젠은 곤히 잠든 테오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애의 엄마는 하녀라고 들었다. 죽은 지그문트와 연인 사이여서 그의 유복자를 낳았는데, 신분이 낮아서 아이만 낳아주고 멀리 떠나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전부 벨리안에게서 전해 들은 정보였다.

‘가엾게도…….’

카이젠은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지만 고귀한 피를 받은 귀족들의 그런 관습이 싫었다.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를 친모와 떨어뜨려 놓는 그런 비인간적인 행태가.

그는 손을 들어서 곤히 잠든 테오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안쓰러운 아이였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그리울 수밖에 없다. 아스텔이 매일 곁에 붙어서 친엄마처럼 돌봐줘도 부족한 게 있겠지. 카이젠은 테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타깝다는 듯이 물었다.

“아이가 제 부모를 많이 그리워하나?”

카이젠은 순간 아스텔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아스텔은 낡은 곰 인형을 의자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가끔 궁금해합니다. 테오르는 친부모를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아스텔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장작을 집어삼킨 불꽃이 어두운 벽 위에 그림자를 그렸다. 어두운 그림자가 불길에 맞춰 춤추듯이 너울거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불빛에 아스텔의 모습이 비쳤다. 석상처럼 무표정한 얼굴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왜 저런 표정을 하는 거지?’

카이젠은 아스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가 가엾어서 그러는 걸까.

생각해보면 아스텔도 이 아이와 비슷한 처지였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없이 외딴 시골에서 쓸슬하게 살고 있었다. 아스텔이 이 아이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은 이제 아끼고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두운 방 안에 서 있는 아스텔이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 카이젠은 쓸쓸해 보이는 아스텔의 모습에 가슴이 쓰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오르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내가 방으로 데려가지. 당신은 여기서 쉬어.”

카이젠은 테오르를 안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안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 * *

새벽 무렵, 아스텔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초에 불을 붙이고 손목에 난 반점을 살폈지만, 새하얀 손목 위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아스텔은 머리맡에 숨겨뒀던 약병을 꺼내 들었다. 

약병을 움켜쥐고 촛대를 든 채 복도로 나갔다. 어두운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그대로 복도를 지나 문을 열고 테오르의 방으로 들어갔다.

둥그런 쿠션 위에서 잠들어 있던 블린이 아스텔을 발견하고 꼬리를 흔들었다.

“쉿.”

아스텔은 개를 조용히 시키고 침대 위에 잠든 테오르에게 다가갔다. 테오르는 이불 속에 파묻힌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스텔은 약병을 꺼내 테오르의 잠든 눈 안에 흘려 넣었다.

테오르가 칭얼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으음…….”

“테오르. 괜찮아.”

곤히 잠들어 있던 테오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서서히 눈을 떴다가, 아스텔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눈꺼풀 사이로 잠시 드러났던 눈은 분명한 푸른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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