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냥
창가에 앉은 아스텔은 이슬비가 내리는 정원을 바라봤다.
유리창 바로 옆에는 라일락 잎사귀가 창문의 한편에 조용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연보라색 꽃잎이 비바람에 잔잔히 흔들렸다. 유리창은 물안개가 낀 하늘을 배경으로 그려진 한 폭의 잿빛 수채화 같았다.
아스텔은 그 고요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며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했다.
대체 이 지긋지긋한 비는 언제까지 내릴까?
저 멀리 보이는 잿빛 하늘은 농담으로라도 맑다고 못 할 만큼 어두웠다. 이 성에 와서 며칠 새에 너무 많은 일이 생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쯤 여길 떠날 수 있을까. 할아버님은 내 편지를 받아보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방 안에서 놀던 테오르가 울상을 지으며 곰 인형을 들고 왔다.
“레빈이 다쳤어…….”
곰 인형의 어깨 부분이 터져 있었다. 뜯어진 천 사이로 새하얀 솜이 튀어나와 너덜거렸다. 세탁하느라 물에 담갔다가 말리고 했더니 또 이렇게 된 모양이었다.
“괜찮아. 금방 고쳐줄게.”
아스텔은 시녀들에게 갈색 실과 바늘을 얻어다가 인형을 수선했다. 테오르는 아스텔이 인형을 고치는 걸 유심히 보며 온실에 나가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저런. 인형이 망가졌군요.”
하필이면 황제의 보좌관인 벨리안이 담소를 나누자며 찾아왔다.
아스텔은 티 테이블에 그와 마주 앉아 찻잔을 앞에 놓고 바느질을 했다. 차를 마시던 벨리안이 열심히 바느질하는 아스텔을 물끄러미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시녀들에게 시키시죠.”
“이 인형은 너무 낡아서 저 말고는 아무도 못 고쳐요.”
아스텔은 인형을 뒤집어서 몸 여기저기에 기운 흔적을 보여줬다.
인형 자체는 그리 오래된 게 아닌데, 애초에 인형을 만든 천이 낡은 커튼 천이라서 이렇게 계속 너덜거리고 뜯어졌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좋은 천으로 만들어 줄걸 그랬지.
아스텔은 천 사이에 바늘을 끼우다가 슬쩍 벨리안을 살폈다.
평소라면 이 사람이 여기 있든 말든 상관이 없지만, 오늘은 테오르가 온실에 나가지 않고 같이 방 안에 있으니까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불안해.’
이 남자는 황제의 최측근 심복이었다.
어째서인지 이 남자는 계속 아스텔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주 찾아와서 말을 걸고 아스텔을 관찰했다. 몇 번 대화를 나누면서 아스텔은 이 남자가 겉모습은 순하고 사람 좋게 생겼지만, 절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순진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사람은 황제를 제일 가까이서 보필하는 사람이니까 카이젠에 대해 잘 알겠지.
이 사람이 테오르가 그를 닮았다는 걸 눈치챌 수도 있을까?
테오르는 여전히 자기 인형이 조금씩 고쳐지는 모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인형을 고쳐주기 전에는 온실에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갈 분위기였다.
아스텔은 벨리안이 찻잔을 놓자마자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쁘실 텐데 제가 백작님을 너무 오래 잡아두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당신은 바쁘지도 않나. 이제 그만 좀 나가라는 소리였지만, 벨리안은 다 알아들으면서도 웃기만 했다.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는 사냥을 나간다고 하시고요. 전처럼 레이디 마리안의 온갖 불평을 들어드릴 수도 없으니까요. 아주 한가해졌죠.”
“폐하께서 사냥을 나가신다고요?”
“예. 지금 준비하고 출발하셨을걸요. 오늘은 비가 좀 덜 오니까요. 답답하신 거겠지요.”
아스텔 자신은 이 성에 갇혀서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황제라는 사람은 사냥을 하러 나간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좋은 생각이 들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테오르. 레빈을 고칠 동안 성안을 구경하러 갈래?”
“진짜? 성을 봐도 돼?”
테오르는 천진하게 좋아했다.
그동안은 정원이나 온실에서만 주로 놀게 하고 성안은 많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돌아다니는 성안에 어린아이를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뭔 사고를 치라고.
그리고 아스텔은 카이젠이 테오르와 만나는 걸 최대한 막고 싶었다.
“그래. 대신 시녀와 함께 다녀야 해.”
하지만 오늘은 카이젠이 밖에 나간다니 괜찮을 것이다.
지금은 다른 목적도 있었다. 아스텔은 방 안에 죽치고 앉아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벨리안에게서도 아이를 떼어놓고 싶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시녀에게 맡기면서 신신당부를 했다.
“한 바퀴만 돌아보고 반드시 아이를 씻길 시간이 되기 전에 데려와 줘.”
눈 색을 바꾸는 약은 매일 새벽과 저녁 식사 전에 넣어야 했다. 한 침대에서 아이를 데리고 자니까 새벽에 약을 넣는 건 쉬웠지만 문제는 저녁이었다. 이 시간엔 시녀들이 항상 방에 함께 있었다.
그래서 아스텔은 매일 그 직전에 아이를 씻겼다. 다 씻긴 뒤에 옷을 갈아입힌다며 혼자서 아이를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약을 넣어주었다.
그러니 반드시 그 시간 전에는 돌아와야 했다.
아스텔은 시녀에게 다짐을 받고 아이를 내보냈다.
* * *
테오르는 시녀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구경했다. 성의 내실과 서고에도 가봤다. 황궁이나 다른 거대한 별궁에 비하면 구식 성인 이곳은 규모가 작았다. 하지만 어린 테오르의 눈에는 엄청나게 커 보였다.
층마다 회색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이 끝도 없이 길게 기어졌다. 창가의 난간도 아름답게 세공된 석조 기둥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치형의 창문 너머로 축축하게 젖은 성의 중앙 정원이 보였다. 천천히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성문으로 통하는 회랑 근처에 다다르자 회랑의 끝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테오르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기사들을 거느리고 밖으로 나가는 카이젠을 발견했다.
시녀가 붙잡기도 전에 테오르는 그에게 달려갔다. 테오르가 재빨리 회랑으로 들어서자 황제를 수행하는 기사들이 슬쩍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앞서가는 카이젠은 테오르 따위에겐 관심도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아이 앞을 지나쳐 갔다. 테오르는 그를 쫓아가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황제 폐하.”
황제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어린아이에게 향했다. 카이젠도 천천히 테오르에게 몸을 돌렸다.
‘아아, 아스텔이 데리고 다니는 어린애로군.’
만찬 때 이후로 그는 이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벨리안을 통해 아스텔이 이 애를 굉장히 애지중지한다는 것만 들었다.
“왜 아이가 여기 있지?”
시녀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스텔 님께서 도련님께 성안을 구경시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테오르는 같이 저녁도 먹고 해서 카이젠에게 나름대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테오르는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못하고 살아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 신기했다. 전에 봤던 예쁜 금발의 레이디도 신기했다. 만찬 이후로는 한 번도 못 봤지만.
아스텔이 황제 폐하는 아주 대단히 높은 분이라고 말해서 특별히 더 호기심이 생겼다. 테오르는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황제 폐하. 어디 가세요?”
“사냥하러 숲에 가는 중이다.”
숲이라는 말에 테오르는 깜짝 놀랐다.
테오르는 만찬석에서 들은 벨리안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숲에 가면 진짜 곰이 있다는 이야기를.
“숲에…… 곰을 볼 수 있어요?”
미간을 찌푸리던 카이젠도 만찬석에서 이 애가 곰이라는 말에 소리를 지르던 걸 기억해 냈다.
“곰을 보고 싶으냐?”
“진짜 곰이 있어요?”
“그래.”
카이젠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사냥 별장에 있지.”
이 근처의 숲 지대는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광활했다.
숲속으로 한참을 들어가면 사냥 중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사냥용 별장이 따로 있었다. 역대 황제들은 이 숲에서 온종일 사냥을 즐기다가 시간이 늦으면 별장에서 자고 돌아오기도 했다.
카이젠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조그만 아이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벨리안의 말에 따르면 이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고, 갓난아기 때는 어머니까지 떠나보냈다고 했다.
이 꼬마를 안고 있던 아스텔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스텔은 이 어린애를 친자식처럼 챙겼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엄마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기 때 부모를 잃었다고.
‘그래서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건가.’
아스텔도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아스텔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카이젠은 문득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 속의 그날은 어머니인 황후의 장례식날이었다.
* * *
카이젠의 어머니인 선대 황후는 원래부터 몸이 약했다.
그분은 하나뿐인 아들을 낳은 뒤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어린 카이젠은 뻣뻣하게 긴장한 채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인 그는 귀족들 앞에서 어린애처럼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장례식을 끝내고 피로해진 몸을 이끌고 황태자 궁으로 돌아온 뒤, 텅 빈 정원을 마주하자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의 기억에 고통스러울 만큼 슬픔이 느껴졌다.
카이젠은 정원의 한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아 혼자 울었다. 머리 위엔 하늘 높이 자라난 라일락 나무가 연보라색 꽃을 지붕처럼 늘어뜨리고 있었다.
정원 한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뭐야?”
놀라서 소리쳤더니 풀숲에서 작은 소녀가 나왔다. 연한 백금발을 늘어트린 아스텔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생각해 보니 그때는 약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오늘은 아스텔도 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아스텔이 입은 상복은 상복인데도 고급스럽고 자수 장식이 많았다. 색만 다르지 평소에 입고 다니는 답답해 보일 만큼 화려하고 무거운 드레스들과 똑같았다.
상복도 저렇게 치렁치렁한 걸로 골라 입다니.
카이젠은 얼른 눈물을 닦았다. 하필이면 이 애한테 들킨 게 화가 났다.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 마.”
아스텔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말 안 할게요. 절대 말 안 해요.”
아스텔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카이젠이 앉은 벤치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카이젠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스텔이 조심조심 카이젠의 손 위에 자기 손을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전하.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왜 갑자기 손을 잡는 건지 짜증이 났지만 약혼녀의 손을 뿌리칠 수 없어서 그냥 놔뒀다.
무심코 돌아봤다가 아스텔의 연두색 눈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새싹 같은 연녹색 눈동자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 시절의 카이젠은 아스텔이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스텔의 조그만 손은 따뜻했다. 그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에 슬픔이 잦아들었다. 천천히 눈물이 그쳤다.
어린 카이젠은 아스텔의 작고 연약한 손을 잡은 채 생각했다.
이 순간만큼은 아스텔이 싫지 않다고.
* * *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카이젠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무심코 물었다.
“데려가서 보여줄까?”
“정말요?”
테오르는 진짜 곰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너무 기뻤다. 그러다 잠시 멈칫했다.
“어…… 아스텔 고모한테 말해야 하는데…….”
너무 좋아서 무심코 엄마라고 말할 뻔했지만 테오르는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아스텔 고모’라고 말했다.
맞아. 아직도 연극 중인 거였지.
아이의 뒤에 서 있던 시녀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스텔 님께서는 저녁 시간 전에 도련님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카이젠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잿빛 하늘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
“그 전에 올 수 있을 거야.”
그는 시종들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아이를 태울 마차를 준비해라.”
시녀는 당황스러웠지만 황제의 명령인데 어쩔 수 없었다. 별수 없이 테오르의 손을 잡고 황제를 따라갔다.
* * *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아스텔은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벨리안도 쫓아 보냈고 인형도 다 고쳐놓았지만 테오르는 돌아오지 않았다.
창밖에는 이미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스텔은 약의 효과가 떨어질 시간을 초조하게 재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넉넉하게 시간을 갖고 약을 넣어줘야 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췄다가 누군가 아이의 눈 색이 다른 걸 보면 안 되니까.
아스텔은 품 안에 언제나 상비하고 다니는 약을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 불안으로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복도를 달려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방 안에 남아 있던 시녀는 위층으로 보냈다.
“반대편으로 가서 아이를 찾아봐.”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여기저기 찾아 다녔지만 아이도 시녀도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사냥을 하러 가면서 기사들도 많이 자리를 비워서인지 성안은 조용했다.
성의 회랑으로 나가던 아스텔은 복도 끝에서 예전에 드레스를 가져왔던 중년의 시종을 만났다.
“아스텔 님? 다급하게 어딜 가십니까?”
“저기. 테오르를 못 봤나요?”
아스텔의 물음에 시종이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폐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아스텔 님께서 도련님을 찾으시면 말씀드리라고요.”
“예?”
이 상황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오자 당혹스러웠다.
왜 황제가 그런 명령을 내렸지……? 테오르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중년의 시종은 아스텔의 심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테오르 님을 사냥 별장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일순간 숨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 * *
계단을 내려오던 벨리안은 복도 끝에 서 있는 아스텔을 발견했다.
아스텔은 황제의 시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 있어서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침착하고 단아한 얼굴이 소름 끼칠 만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벨리안은 놀라서 다가갔다.
“아스텔 님?”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다가가서 불렀더니 아스텔이 한 호흡 정도 늦게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스텔은 벨리안을 향해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아, 백작님. 또 뵙네요.”
느리게 돌아보는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창백하지도 않고 새하얗게 굳어져 있지도 않았다.
‘잘못 봤나?’
시종에게 눈을 돌리자 중년의 시종이 눈치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폐하께서 테오르 님을 사냥 별장에 데려가셨습니다. 지금 아스텔 님께 그 일을 말씀드리던 중이었습니다.”
“뭐?”
‘그 어린애를? 아니, 왜?’
사냥 별장은 숲의 한가운데에 있는 외진 곳이었다. 숲이 워낙 넓다 보니 사냥을 하다가 성으로 돌아오지 못할까 봐 지어놓은 게 그 별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사방을 둘러봐도 숲밖에 안 보인다. 대충 생각해도 어린애를 데려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카이젠은 특별히 어린애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짓을 하셨지?’
의문을 느끼던 벨리안은 얌전히 서 있는 아스텔을 보며 답을 찾았다.
‘설마, 이분 때문인가.’
잠자코 서 있던 아스텔이 평이한 말투로 벨리안에게 물었다.
“백작님. 사냥 별장이 여기서 얼마나 걸리나요?”
“말을 타고 최대한 빨리 가면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한 시간.
지금 당장 출발하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최대한 빨리 가도 약효가 떨어지기 전까지 아슬아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아스텔은 떨리는 손가락을 긴 소맷자락 안으로 숨기고 다시 벨리안을 향했다.
절대 이 남자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아스텔은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황하면 안 돼. 아직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아이가 얼마 전에 독감을 앓아서…….”
아스텔은 흔들리지 않는 미소와 함께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시간 맞춰서 약을 먹이고 있어요. 그래서 약 상자를 가져왔던 거고요.”
“아, 예. 전에 말씀하셨죠.”
어린아이들이 병을 앓은 경우에는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계속 체력 보충제나 영양제를 먹일 때가 있다.
약 상자 안에 아이를 위해 만들어둔 영양제가 있었다는 걸 떠올리고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변명이었다.
궁색한 변명이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갑자기 아이를 찾으러 가겠다고 우겨볼 만한 이유가 없었다.
“급한 건 아니지만 제가 따라가서 약을 먹이고 와도 될까요?”
벨리안은 조금 놀란 눈으로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바깥에는 당장에라도 비가 내릴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 굳이 사냥 별장까지 따라가서 애한테 약을 먹이겠다니.
정말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었다.
친엄마라도 이렇게까지 극성맞게 애를 돌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폐하를 못 믿어서 그러나? 애를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카이젠이 나라를 훌륭하게 통치하는 유능한 황제이긴 했지만, 어린애를 믿고 맡길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물론 아니었다. 어린애를 맡아본 적도 없으실 테고.
그래도 사냥 별장에는 기사들도 있고 시종들도 있을 텐데 좀 유난스러운 짓이었다.
‘뭐, 굳이 안 된다고 거부할 필요는 없겠지.’
벨리안은 이 기품 있는 전 황후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가 보기에 젊은 황제 폐하께서는 이분에게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았으니.
“그러시죠. 마침 비도 그쳤으니까요. 이참에 사냥 별장도 구경하시고요. 당장 마차를 준비해서…….”
“아뇨. 괜찮으시면 마차보다는 오랜만에 말을 타보고 싶네요. 이런 숲에서 승마를 해본 것도 아주 오래전이라서요.”
아스텔은 시종에게 명령하려는 벨리안을 가로막고 웃으며 부탁했다.
딱히 이상한 부탁은 아니었지만 벨리안은 약간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 전 황후님을 오랫동안 알아온 건 아니지만, 그간 관찰해 본 바로는 아스텔은 이런 상황에 승마를 하고 싶다고 나설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그렇게 다급하게 아이에게 가야 하는 건가?
그는 아스텔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아스텔의 미소 띤 얼굴엔 어떤 수상한 기색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다급한 기색도 초조하게 떨리는 분위기도 없었다.
벨리안은 짧은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을 대로 하시죠. 저도 말이 더 편하니까요.”
* * *
차가운 빗줄기가 유리창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별장에 도착할 때까지는 좋았는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하늘이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졌다. 카이젠 일행은 도착과 동시에 별장 안에 틀어박혀야 했다.
“또 비 온다…….”
테오르는 유리창에 매달려서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어린아이의 조그만 손이 하얗게 성에가 낀 유리 위에 말간 손자국을 남겼다.
별장의 서재에 앉아 창문을 내다보던 카이젠은 기운 없이 축 처진 테오르를 보며 웃었다.
“여기 있는 곰을 보여줄까?”
“여기 있어요?”
그 말에 테오르는 곧바로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카이젠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한 마리 있지.”
그렇게 신이 나서 황제 폐하를 따라나선 것까지는 좋았다. 테오르는 깡충깡충 뛸 것 같은 기분으로 카이젠을 따라서 만찬장으로 쓰이는 홀로 갔다.
별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연회 홀에는 여러 가지 장식품이 가득했다. 카이젠은 아이를 한쪽 벽에 서 있는 커다란 장식품 앞으로 데려갔다. 석궁과 사냥총 등으로 장식된 벽 아래에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커다란 곰이 서 있었다.
정확히는 북실북실한 갈색 털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2m도 넘는 곰 박제가.
“곰……?”
테오르는 멍하니 곰을 관찰했다.
곰은 접시만큼 커다란 손바닥을 내밀고 서 있었다. 큼지막한 입 안에는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테오르가 생각한 곰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좀 더 폭신폭신하고 동글동글하고 귀엽게 웃는…… 곰 인형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이건 폭신폭신하기는커녕 무섭고 위협적인 야수 같았다.
테오르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카이젠을 돌아보았다.
“이게 곰이에요?”
“그래. 진짜 곰을 처음 보는 거냐?”
이게 진짜 곰이구나.
상상한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테오르는 조심조심 곰에게 다가갔다. 곰이 얼마나 큰지 테오르가 손을 뻗어도 곰의 허리에 겨우 손끝이 닿을 정도였다.
테오르는 두 손으로 곰의 다리를 잡았다. 뻣뻣한 갈색 털이 손에 닿았다. 조심스레 곰의 다리를 밀었지만 털 사이로 잡히는 다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낑낑대며 두 손으로 밀었지만 곰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양팔을 내밀고 입을 벌린 채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테오르는 곰에게서 손을 떼고 다시 카이젠에게 물었다.
“곰은 안 움직여요?”
“당연히 안 움직이지.”
“왜요?”
테오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파란 눈을 깜빡였다.
카이젠은 자기가 한 말이 이 어린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야 죽었으니까.”
그 말이 이끌어낸 반응은 굉장했다.
테오르는 경악한 나머지 숨도 못 쉬고 카이젠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조금 벌린 채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졌다. 아이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조그만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이쯤 되자 카이젠도 조금 당황했다.
테오르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카이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충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곰…… 왜 죽었어요?”
“…….”
카이젠은 스무 살의 나이에 전쟁을 지휘하면서도 단 한 번도 당황하지 않고 승리를 이끌어낸 냉철한 군주였다. 아버지뻘이었던 공작들을 비롯해 여러 대귀족 앞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을 만큼의 위엄을 갖고 있는 강력한 황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라 잃은 얼굴로 충격받아 떨고 있는 어린아이를 마주하자, 도저히 카이젠은 ‘내가 곰을 잡았으니까’라고 사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 아, 그래. 여기 조부님께서 쓰시던 사냥총이 있군.”
당황한 카이젠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곰의 뒤에 걸려 있는 기다란 사냥총을 가리켰다.
“구식 화승총이지. 오래전에 고장 나서 안쪽에 있는 뇌관을 제거하고 겉모양만 남겨뒀단다.”
어린애를 다뤄본 적은 없지만 남자애니까 무기 같은 걸 좋아하겠지 싶었다. 아이가 관심을 돌리게 하려고 최대한 열심히 설명했다.
“내려줄 테니 한번 만져보겠느냐? 어차피 이제 안에 탄환을 넣을 수도 없으니까.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아도 된다.”
카이젠은 사냥총을 내려주겠다며 아이를 구슬렸다. 장식용으로 겉모양만 남겨둔 것이니 어린애가 가지고 놀아도 위험할 일은 없었다.
“…….”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벽에 걸린 총을 가리키며 이것저것 열심히 설명을 해줘도 테오르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카이젠을 쳐다보기만 했다.
카이젠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 어린애는 사냥총이든 탄환이든 뭐든 그게 뭔 소리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는 단 한 가지 사실만을 곱씹으며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었다.
이 놀랄 만큼 커다란 곰이 죽었다는 것을.
덕분에 카이젠이 귀한 사냥총을 보여주겠다고 말해도 기뻐하기는커녕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넋 나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푸른 눈에 희미하게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행히 아이가 울기 전에 구원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린든이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구원하기 위해 끼어들었다.
“폐하, 이 별장에는 사냥개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카이젠은 그 말뜻을 알아듣고 얼른 아이에게 제안했다.
“그래. 개를 보여줄까?”
“강아지……? 여기 강아지도 있어요?”
다행히 그 말에는 아이가 반응을 보였다.
카이젠은 아이를 곰 박제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얼른 서재로 데려갔다. 그리고 시종에게 사냥개를 데려오게 했다.
시종이 부드러운 연갈색 털을 가진 순해 보이는 개를 골라 왔다.
“제일 온순한 녀석입니다.”
순해 보이긴 해도 사냥개라 방 안에서 키우는 개들보다는 덩치가 컸지만 아이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개에게 다가갔다.
테오르가 손을 내밀자 개는 아이에게 다가와서 손에 코를 댔다. 냄새를 맡으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테오르의 뺨을 핥으며 복실복실한 꼬리를 흔들었다.
테오르는 피하지 않고 개를 쓰다듬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앗…… 간지러워.”
테오르는 금방 개와 친해져서 즐거워했다.
“아이가 데리고 있어도 안전하겠지?”
“예, 폐하. 저 개는 훈련을 잘 받아서 괜찮을 겁니다.”
테오르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한 손을 내밀었다. 사냥개가 앞발을 테오르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자기 손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폭신폭신한 앞발을 잡고 테오르는 다른 한 손으로 개의 목덜미를 살살 쓰다듬었다.
“강아지 착해.”
어린애인데도 개를 다루는 게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다.
테오르는 금방 개와 친해져서 즐거워했다.
“개를 기른 적이 있느냐?”
“아뇨. 강아지 없어요.”
개가 없다는 게 슬픈지 테오르는 조금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다시 카이젠을 올려다보며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백작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강아지 데려왔어요. 커다란 회색 강아지예요. 어…… 아스텔 고모가 강아지하고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말해줬어요.”
아는 사람이 개를 데려왔었다는 소리인 것 같았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태생적으로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부터 동물을 무서워하는 아이도 있다. 이 아이는 전자인 모양이다.
‘하긴 나도 어릴 때는 아버지의 사냥개들을 좋아했지.’
자신도 개나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었다. 아버지의 사냥개들을 쫓아다니고 할머니인 황태후의 고양이를 데리고 놀곤 했었다.
카이젠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테오르에게 제안했다.
“이 개를 선물로 줄까?”
“정말요? 우리 집에 데려가도 돼요?”
“그래.”
아이는 좋아라 하며 개를 끌어안았다.
지켜보던 린든은 아스텔 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어린 도련님이 저렇게 좋아하고 황제 폐하도 좋아하는 눈치라서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테오르는 한없이 기뻐하다가 카이젠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폐하, 감사합니다.”
카이젠은 조그만 아이가 자기 앞에서 진지하게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작게 웃었다. 테오르는 개와 함께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도련님. 뛰어다니시면 안 됩니다.”
테오르가 개를 쫓아서 뛰어다니는 걸 보고 시종이 주의를 주었다. 테오르는 흠칫 놀라며 순식간에 멈춰 섰다.
의자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젠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아스텔은 자기가 배운 것처럼 아이를 엄격하게 교육하는 모양이었다.
말을 잘 들어서 좋긴 하지만 그래도 어린애를 너무 기죽여서 키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 망한 집안이긴 했지만 어쨌든 후작가의 후계자인데.
“놀고 싶으면 복도에 나가서 놀아도 된다.”
카이젠이 허락해 주자 테오르는 좋아라 하며 개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카이젠은 뛰어가는 테오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종에게 명령했다.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
* * *
사냥 별장은 작은 저택이었지만 황제의 별장답게 화려했다.
특히 본관과 뒤쪽으로 있는 별관은 양쪽 끝에 있는 긴 회랑으로 연결되는데, 이 회랑 사이에는 천장이 뚫린 주랑식 정원이 있었다.
테오르는 회랑을 뛰어다니며 작은 공을 던졌다. 금색 개가 테오르를 앞질러 달려가서 공을 물고 다시 돌아왔다.
테오르는 기분이 좋았다. 곰을 본 건 조금 무서웠지만 황제 폐하가 강아지를 줬다. 금색 털을 가진 커다랗고 귀여운 강아지였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강아지와 노는 게 너무 즐거워서 쉬고 싶지 않았다.
회랑의 양쪽 끝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테오르에게 주의를 주거나 노는 걸 가로막지 않았다. 회랑의 기둥 옆에서 강아지를 쓰다듬던 테오르는 무심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아스텔의 당부를 떠올렸다.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오라고 했는데…….”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
한편으로 아스텔은 황제 폐하는 아주 높은 사람이니까. 뭐든 황제 폐하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고 했었다.
‘음…… 그러니까 폐하가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테오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앞에 있던 공이 바람에 날려 주랑 정원 쪽으로 굴러갔다. 개가 공을 따라서 주랑 정원으로 달려갔다.
“앗…… 같이 가!”
테오르는 개를 잡기 위해 뒤따라갔다.
가운데에 있는 주랑에는 지붕이 없었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빗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순식간에 옷이 축축하게 젖었다.
“차가워…….”
테오르는 축축하게 젖은 옷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저쪽에서 지켜보던 시종이 비에 젖은 테오르를 보고 달려왔다. 테오르는 시종의 손에 이끌려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이가 밖으로 나가자 서재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비가 오니 사냥을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거리를 가져온 것도 아니라서 할 일이 없었다. 카이젠은 창가에 앉아 뜻밖의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했다.
창밖에선 여전히 맑은 빗소리가 들렸다. 유리창 너머로 차가운 빗물이 흘러내렸다.
숲은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물안개가 감도는 숲에서 하얀 자작나무가 흔들림 없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그 적막하고 고요한 풍경에 비슷하게 조용한 사람이 떠올랐다.
늘 얌전히 한쪽에 물러서 있으면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아스텔이.
‘예전에는 그렇게 고집스러운 줄 몰랐는데 말이지.’
그래도 그런 아스텔이 싫지는 않았다.
비에 젖은 숲속 풍경이 상쾌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솔직하고 단정한 아스텔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다시 만난 뒤부터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계속 시선이 가고 마음이 쓰였다. 사사건건 신경에 거슬리는데도 자꾸만 아스텔이 생각난다.
잠시 유리창 밖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개를 데리고 나갔던 테오르가 기운 없이 돌아왔다. 가만 보니 아이의 머리카락과 옷이 반쯤 비에 젖어 있었다.
“왜 그렇게 됐지?”
테오르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강아지하고 뛰었는데…… 지붕이 없었어요.”
이곳의 본관과 별관을 연결하는 곳에는 고전적인 주랑 정원이 있다. 주랑은 중간에 지붕이 뚫려 있었다. 그곳에 갔던 모양이다.
“저런. 여기 갈아입힐 옷이 있나?”
“송구합니다만 폐하. 이곳엔 어린 도련님의 옷은 없습니다.”
시종이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하긴 그렇겠지. 선대 황제들도 여기 아이를 데려온 적은 없을 테니.
“옷을 말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테오르는 벽난로 앞에 가서 앉았다. 비슷하게 젖은 사냥개가 그 옆으로 따라갔다. 시종이 수건을 가져다가 아이의 몸을 닦아주었다.
테오르는 손을 들고 얌전히 벽난로의 불을 쬐었다. 카이젠은 아이가 조그만 손을 불가에 대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평생 어린애들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녀석은 꽤 귀여웠다. 생긴 것도 귀엽고 하는 짓도 귀여웠다. 사내애답지 않게 얌전하고 말을 잘 들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이가 말하는 거나 웃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카이젠은 테오르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그 익숙한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래. 아스텔하고 비슷한 것 같군.’
하긴 친척이니 닮을 수밖에 없겠지.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아스텔의 사촌 오빠인 지그문트도 이런 성격이었다. 얌전하고 예의 바르고 조용했다.
특히 저 아이는 아스텔이 혼자서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아스텔의 습관이나 행동을 그대로 배워서 더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스텔은 외가 쪽을 닮은 건가.
예전에는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약혼자로 지낸 10년보다 지난 며칠간 아스텔을 더 많이 본 기분이 들었다. 새삼 가슴속 밑바닥에 씁쓸한 상념이 차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후회해 본 적이 없건만.’
시종은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를 데려가려고 했다.
“도련님.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카이젠은 아이를 데려가려는 시종을 가로막았다.
“그냥 여기 있게 놔둬.”
테오르는 수건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벽난로 앞에 앉아서 불길 속에 타오르는 장작을 구경했다. 함께 놀던 사냥개가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테오르는 머리 위에 덮여있던 수건으로 축축하게 젖은 사냥개를 닦았다.
“춥지? 닦아줄게.”
* * *
출발할 때부터 가느다란 빗줄기가 풀잎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굵은 빗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아스텔은 성에서 빌린 말을 타고 폭우 속을 달렸다.
쉴새 없이 쏟아지는 빗물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진흙탕이 된 흙길에서 흙탕물이 튀었다.
아스텔은 작은 샛길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길의 양옆으로 어두운 숲이 보였다. 서늘한 그늘 속에 차가운 물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아스텔님?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요?”
뒤따라오던 벨리안이 소리쳤다. 출발할 때는 그가 앞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속도를 늦추고 뒤로 제쳐졌다.
아스텔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빗소리 때문에 말이 안 들리는 것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갔다.
한참 동안 달렸지만 별장은커녕 비슷한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진흙탕이 된 길이 수렁처럼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비가 너무 많이 오다 보니 속도를 내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빗줄기에 시야를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얼마나 달렸을까.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비에 흠뻑 젖었다. 빠르게 달려가던 아스텔은 자기도 모르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며 길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진청색 하늘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비에 젖은 자작나무들 위로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스텔은 차가운 빗물을 맞으며 저물어가는 하늘을 허망하게 응시했다.
빗방울보다 더 차가운 현실이 머릿속에 내리꽂혔다.
‘시간이 지났어.’
“…….”
약효가 떨어질 시간이 지나 버렸다. 지금쯤이면 테오르의 눈은 원래 색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아스텔은 멍하니 길 위에 멈춰 있었다.
저만치 앞질러 갔던 벨리안이 말을 돌려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스텔 님? 왜 그러십니까?”
아스텔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니에요. 잠시 어지러워서요.”
“괜찮으세요? 저 나무 아래서 쉬었다 갈까요?”
벨리안이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를 가리키며 제안했지만 아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별장에 가서 쉬는 게 낫겠어요.”
샛길을 따라서 몇 분간 더 달리자 숲의 중심에 자리 잡은 아담한 저택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높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문을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들여보내 주었다.
아스텔은 말에서 내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젖은 옷자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놀란 시종이 두 사람에게 얼른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아스텔은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처형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처형장으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간을 30분만 되돌릴 수 있다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발 30분만 되돌릴 수 있다면.
아스텔은 벨리안을 따라서 서재처럼 보이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 덕분에 방 안에는 아늑한 온기가 감돌았다.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카이젠이 고개를 들었다.
“폐하.”
“벨리안? 무슨 일이지?”
벨리안은 그에게 허리를 굽혔지만 아스텔은 예를 갖추는 것도 잊고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앞에 누워 있는 조그만 아이를.
아늑한 불꽃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테오르가 눈을 감고 가만히 잠들어 있었다.
* * *
아스텔은 방문 앞에 서서 테오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폭신한 러그가 깔린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서 부드러운 담요를 덮고 곤히 자는 중이었다. 그 옆에는 못 보던 개 한 마리가 아이를 지키듯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벽난로 앞에 잠든 테오르를 발견했다.
“사냥개하고 놀다가 비에 젖었어. 벽난로 앞에서 몸을 말리다가 잠든 것 같군.”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스텔은 긴장이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스텔은 정신을 차리고 테오르에게 다가갔다. 덮여 있던 담요로 아이의 몸을 감싸서 눈을 뜨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폐하.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서 재워도 될까요?”
“……그래.”
카이젠은 조금 놀란 눈으로 아스텔을 바라보면서 허락했다.
시종이 도와주겠다고 나섰지만 아스텔은 직접 테오르를 감싸 안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테오르는 곤히 잠들어서 깨어나지 않았다.
시종이 아스텔을 가까운 침실로 안내했다. 아스텔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아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하아…….’
온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꼼짝없이 들키는 줄 알았는데.
아스텔은 테오르의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눈꺼풀 사이로 진홍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이가 잠들지 않았으면 들켰겠지.’
정말 천운이었다.
아스텔은 얼른 품 안에 숨겨두었던 약병을 꺼내 아이의 잠든 눈 안에 흘려 넣었다. 곤히 잠들어 있던 테오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서서히 눈을 떴다. 맑은 푸른 눈이 아스텔을 올려다보며 웅얼거렸다.
“웅……. 엄마…….”
“응. 그래. 괜찮아. 다 괜찮아.”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고 달래주었다. 어쨌든 운 좋게 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테오르를 맡겼던 시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시녀는 아스텔에게 사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여기로 끌려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설명은 자세했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그냥 황제가 갑자기 애를 데려간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였다.
아스텔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지.”
황제가 데려간다는데 어쩌겠나. 애가 가기 싫다고 울었다고 해도 시녀로서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끌고 가야 했을 것이다.
카이젠은 왜 갑자기 테오르를 이런 데로 데려온 걸까. 물론 아이는 여기 오고 싶어 했겠지만 카이젠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다. 동생도 없고 나이 어린 친척도 없어서 더욱 그랬다.
‘설마, 뭔가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스텔은 침대에 누운 테오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테오르는 다시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곰…… 죽었어……. 강아지…… 좋아…….”
멀리 온 데다가 개하고 놀기까지 해서 피곤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제 약을 넣었으니 내일 새벽까지는 안심해도 된다.
“아이는 조금 더 자게 놔둬.”
“예.”
시녀는 아스텔이 화를 내지 않자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아스텔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목욕물과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 * *
“그래서 아이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고?”
카이젠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원수같이 내리던 비는 아스텔과 벨리안이 별장에 도착하니 다시 잦아들었다.
조금만 더 늦게 출발할 걸 타이밍이 안 좋았지.
덕분에 흠뻑 젖은 벨리안은 시종이 준비해 준 물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여기 시종이 가져온 옷을 대충 골라 입었는데 누구 옷인지 사이즈가 좀 커서 체구가 작은 벨리안이 입으니까 헐렁하게 늘어졌다. 형의 옷을 물려 입은 어리숙한 동생이 된 기분이었다.
“예, 아스텔 님께서 아이에게 약을 먹여야 한다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아이가 몸이 약해서 영양제를 먹여야 하나 봅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벨리안은 아스텔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가 눈치챈 걸 카이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카이젠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했다.
“혹시 아이가 어디 많이 아픈 건가?”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에게 정말 무슨 큰 병이라도 있는 걸까?
뭔가 말 못 할 지병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영양제를 먹이려고 비를 맞으며 달려올 리가 있나.
벨리안은 이곳에 오던 도중에 아스텔이 놀라서 멈춰 섰던 것도 분명히 봤다. 분명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당황하는 느낌이었지.
시간 맞춰서 약을 먹이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이라도 있는 건가?
아이는 겉보기엔 무척 건강해 보였다.하지만 병이라는 건 원래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속으로는 고질병을 앓는 경우가 있으니까.
아니, 근데 무슨 병이길래 숨기는 거지? 평범한 지병이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텐데?
벨리안은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옮는 병은 아니겠지……?’
마리안이 아스텔의 약 상자를 살펴봤다고 했지만 단순한 치료제는 수상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쪽은 독약만 열심히 찾았겠지.’
수상한 재료가 든 게 아니면 정확히 무슨 치료제인지 신경 쓰지도 않았을 테고.
‘기회가 되면 그 약상자를 한번 살펴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내 손으로 열어보지는 말아야지.
벨리안은 아스텔이 약상자에 약초즙을 묻혀놓았던 일을 떠올리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분 물건을 만질 땐 꼭 다른 사람을 시키자고.
“아스텔 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종이 들어와서 아스텔의 도착을 알렸다.
문이 열리고 아스텔이 두 사람이 있는 서재로 들어왔다. 무심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카이젠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아스텔을 보고 멈칫했다.
열어젖힌 문 앞에 아스텔이 있었다. 카이젠은 처음에 아스텔을 못 알아볼 뻔했다.
아스텔은 평소에 입고 다니던 거적데기 같은 목면 드레스 대신 녹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지금 유행과는 다른 구식 드레스였지만 구시대 특유의 청초한 디자인이 아스텔의 단정한 외모에 맞춘 듯이 어울렸다.
연한 금발도 대충 풀어놓거나 하나로 묶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간단하게 한 묶음으로 틀어 올려 나비 모양의 빗핀으로 고정한 채였다. 물기가 살짝 감도는 백금색 머리카락 위에 살며시 내려앉은 연녹색 나비가 우아하면서도 단아해 보였다.
기품 있고 아름다운 미인의 모습이었다. 옛 초상화에 그려진 미인 같았다.
물론 아스텔은 원래부터 곱상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선이 가늘고 이목구비도 단정했다. 하지만 이렇게 압도적인 미인으로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과거의 아스텔은 이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차린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카이젠은 아스텔을 단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이런 모습이었나…….’
벨리안도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아스텔을 맞이했다.
“아스텔 님.”
아스텔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담담하게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가 준비해 준 목욕물로 빗물에 젖은 몸을 씻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것이었다. 젖은 옷을 다시 입을 수도 없고. 성으로 사람을 보내서 옷을 가져오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사냥 별장이라 기사나 귀족들을 위한 여벌 옷은 많았지만 여성복은 거의 없었다. 워낙 외진 곳이라 시녀를 고용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시종들과 하인들뿐이었다.
‘숙녀분의 옷은 이게 전부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녀가 가져다준 옷은 세 벌의 드레스였다.
아스텔은 그 옷들을 받아 들고 난색을 표했다.
한 벌은 붉은 벨벳으로 된 야회복이었는데 가슴이 훤히 드러날 만큼 깊이 파인 데다가 보디스에는 금실로 자수가 놓여 있었다. 말 그대로 무도회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옷이었다.
다른 한 벌은 그보다 더했다. 연한 진주색 모슬린 드레스였는데 안쪽이 비칠 정도로 옷감이 얇았다.
전부 몇십 년 전에 유행했던 디자인인 걸 보니 전대 황제께서 이곳에 오셨을 때 데려온 정부들의 옷인 것 같았다.
카이젠의 부친인 선대 폐하께서는 점잖으신 분이라 정부나 애인을 두지 않았지만, 카이젠의 조부인 전전대 길베르트 황제 폐하는 여색을 몹시 밝히는 분이었다.
‘그분의 정부들이 이곳에 왔다가 버려놓고 간 옷들이겠지.’
그래도 그나마 세 번째 옷이 좀 입을 만했다.
색부터 제일 평범했다. 드레스의 옷감은 전부 고급스러운 광택을 내는 가볍고 부드러운 실크였다. 진한 녹색에 테두리와 소맷단 끝에 금색이 살짝 가미된 단정한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입어보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치수도 비슷하게 맞았다.
이런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놓는 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화장대에 있던 핀으로 머리도 간단하게 고정했다.
갑자기 이런 걸 입고 나타났더니 벨리안은 대놓고 놀란 표정으로 아스텔을 관찰했다. 카이젠까지 이쪽을 유심히 보는 게 느껴졌다.
아스텔은 그에게 살짝 무릎을 굽히고 자리에 앉았다. 카이젠이 먼저 그녀에게 사과했다.
“말없이 아이를 데려와서 미안하군. 금방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시간이 지체됐어.”
“괜찮습니다, 폐하. 아이도 성에서 지루해하고 있었는걸요.”
“약을 먹이러 왔다고 하던데 아이가 어디 아픈 건가?”
아스텔은 카이젠이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테오르에게 무슨 큰 병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아이에게 약을 먹인다고 갑자기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다.
아스텔은 부정하지 않고 일부러 조심스레 대답했다.
“특별한 병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외조부님 말씀으로는 저희 외가인 칼렌베르크 가문에는 가끔 연약한 아이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처럼요.”
“그렇군.”
아스텔의 어머니는 원래부터 몸이 약한 분이었다. 결국 아스텔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
그분 얘기를 꺼내자 카이젠은 그럭저럭 납득하는 눈치였다.
“착한 아이던데 그렇게 몸이 약하다니 안됐군.”
아스텔은 카이젠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뭔가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야.’
어떻게든 고비를 넘겼으니 됐다.
잠시 동안이라도 테오르를 이 남자에게서 좀 떨어뜨려 놓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스텔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성에서 온 시종이었다.
시종이 안으로 들어와서 소식을 전했다.
“폐하, 덴츠 성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드디어.’
아스텔은 안도했다. 무슨 소식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 한마디에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의문이 담긴 표정을 가장하며 천천히 시종을 돌아보았다.
벨리안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시종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벨리안은 수도의 일과 관련된 소식일 거라고 짐작했다.
레스턴 공작의 일이겠지. 아니면 국정 운영에 관한 긴급 사안일 것이다. 어떤 소식이든 간에 아스텔이 있는 자리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그는 복도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지?”
그러나 시종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가 짐작한 내용과는 전혀 달랐다.
“덴츠 성에서 연락이 왔는데 칼렌베르크 후작님께서 편찮으시다고 합니다.”
“뭐?”
시종의 설명은 간단했다.
덴츠 성에 머물고 있는 아스텔의 외조부, 칼렌베르크 후작이 병에 걸려서 며칠째 병석에 누워 있다는 소리였다.
그 늙은 후작은 아스텔보다 열흘 정도 먼저 붙잡혔는데 간단한 심문을 받은 뒤에 줄곧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후작은 외손녀의 행방을 말하지 않겠다며 처음부터 계속 비협조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뭐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을 받은 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했겠지만 이 일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카이젠은 자기 할아버지에게 충성을 바쳤던 그 노귀족을 함부로 대하지 말고 손님으로 예우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그 후작이 두통과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며칠째 누워 있다고 한다. 의사 말로는 큰 병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냥 쇠약해져서 그런 것 같다고.
‘가만 보니 정말 몸이 약한 건 그 집 내력인 것 같군.’
하긴 뭐 예순도 훨씬 넘은 사람이 도피 생활을 하다가 낯선 곳에 잡혀 와 강제로 머물고 있으니 병이 날 만도 했다. 아무리 손님으로 대접받아도 어쨌든 그곳에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젊었을 때는 전쟁에 나가서 공적을 세우고 했다지만 이제는 늙고 쇠약해진 분이니까.
시종의 말을 열심히 듣던 벨리안은 다 듣고 나서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고작 그걸 전하러 여기까지 왔나?”
이 비를 뚫고 소식을 전하러 왔길래 뭐 엄청 대단한 일인 줄 알았다.
나이 드신 후작님이 좀 아플 수도 있는 거 아냐? 물론 그 가족들에게는 중요한 일이겠지만, 황제에게 전하러 달려올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종은 감정 없는 시선으로 묵묵히 대답했다.
“그 후작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알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명령을 했다고?”
아니, 내가 언제 그런 명령을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었다.
벨리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소식을 전하러 온 시종은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폐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
알고는 있었지만 폐하께서 저기 계신 전 황후님께 정말 많이 빠지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에도 폐하는 제대로 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아스텔 님을 홀린 듯이 쳐다봤었다.
벨리안은 시종을 물리고 돌아섰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하는 건 난감한 일이었다.
‘아스텔 님 충격받으실 것 같은데.’
아스텔은 그 외할아버지를 애틋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하긴 이제 가족이라고는 그 후작님과 어린아이밖에 안 남았으니 당연한 일이겠다만.
벨리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천천히 문을 열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아스텔이 근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 저……. 그게.”
벨리안이 아스텔의 얼굴을 보며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어물어물하고 있는데, 한쪽에 있는 카이젠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말하라고 재촉했다.
벨리안은 한숨을 삼키며 말을 꺼냈다.
뭐 어차피 숨길 수도 없는 일이긴 하지.
“칼렌베르크 후작님께서 좀 편찮으시다고 합니다.”
“할아버님께서요?”
아스텔은 충격받은 눈빛으로 되물었다.
벨리안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며칠째 두통이 심해서 방 안에 누워 계시다고 합니다.”
“세상에…….”
예상대로 그 소식에 아스텔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순식간에 연녹색 눈동자가 비에 젖은 숲처럼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아스텔은 눈물 젖은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치맛자락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제대로 됐어. 다행이야.’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스텔은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이걸 부탁하려고 예전에 외할아버님께 편지를 쓴 거였다. 외조부님은 그 나이에도 무척 건강하셔서 어지간하면 병을 앓지 않았다. 전쟁 영웅답게 젊은 아스텔보다도 건강했다.
외조부의 친구인 멜포드 백작이 저 인간은 연금도 못 받으면서 왜 저렇게 오래 살아서 손녀딸을 고생시키냐고 농담 삼아 핀잔을 줄 정도였다.
아스텔은 지난번 외조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할아버지의 두통에 대해 걱정하는 내용을 적었다. 외조부는 아스텔이 뭘 가장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편지에 ‘두통을 앓으셨는데 걱정된다’라고 쓰면 아스텔이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아픈 척 연기를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됐다.
아스텔은 깊이 안도하며 거짓 눈물을 찍어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는 두 사람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벨리안은 자기 주군을 힐끗 돌아보면서 또 한 번 놀랐다. 카이젠은 무척 심란한 얼굴로 아스텔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스텔은 손수건을 꺼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너무 오랫동안 집을 떠나 계셔서…… 평소에도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
“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많이 심하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벨리안이 나름대로 위로하려고 했지만 아스텔은 서글픈 얼굴로 손수건을 다시 눈가에 가져다 댔다.
손수건을 든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연세도 많으신데…… 저 때문에…… 객지에서 고생만 하시고…….”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노인을 객지에서 고생하게 만든 장본인의 얼굴에도 난감한 기색이 스쳐 갔다.
카이젠은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아스텔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냥 사람을 보내서 사정을 말하고 부탁할 걸 그랬지.’
그랬으면 아스텔은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시종이나 관리를 보내서 사정을 설명하고 와달라고 요청했으면 수월하게 해결됐으련만. 자신은 예고도 없이 기사들과 병사들을 보내서 아스텔과 늙은 후작이 오해하고 도망치게 만들었다.
덕분에 아스텔은 다섯 살짜리 어린애를 데리고 두 달이나 도망 다녀야 했다. 그 후유증으로 늙은 후작은 병까지 났단다.
사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순순히 자신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귀찮게 굴까 봐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그냥 잡아 오려고 했던 거였다.
아스텔이 자신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예상해 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무조건 강제로 데려다 놓고 사정을 말하려고 했었다.
뒤늦게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 달리 저렇게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아스텔의 모습을 마주하자 착잡한 기분만 들었다.
카이젠은 흔치 않게 후회를 곱씹고 있었다. 그리고 아스텔도 그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폐하, 제가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아스텔은 눈물 젖은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행운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최대한 빨리 이 남자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아이를 숨겨야 했다.
아스텔은 카이젠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조부가 있는 덴츠 성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카이젠에게 편지를 보내 허락을 구한 뒤 할아버지와 테오르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면 된다.
먼 길을 가다가 할아버님의 병이 심해지면 안 된다고 간곡하게 부탁하면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카이젠이 수도로 데려가야 할 사람은 아스텔뿐이니까.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테오르와 몸이 안 좋다고 하는 할아버님까지 굳이 데려가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을 테고 말이지.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테오르를 데리고 할아버님이 계신 덴츠 성으로 먼저 가봐도 될까요?”
아스텔은 눈물을 닦으면서 카이젠을 간절하게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직접 할아버님을 곁에서 돌봐 드리고 싶습니다. 할아버님께서도 테오르를 보면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실 테고요.”
벨리안은 아스텔의 부탁을 들으며 카이젠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허락해 줄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덴츠는 어차피 수도로 가는 길목이다. 얼마 후에는 황제 일행도 수도로 가는 도중에 그곳을 거쳐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 황후님은 여기 죄수로 잡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황제 폐하를 도와주려고 함께 수도로 가는 중이다. 이쪽에서는 미안해서라도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줘야 했다. 늙은 후작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손녀분과 아이를 먼저 그리로 보내주는 건 크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아스텔 님이 이제 와서 도망칠 리도 없고 말이지.’
먼저 보내준다고 해도 아스텔과 아이만 단둘이 보내는 게 아니라 병사들을 딸려 보낼 테니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다.
어떤 면으로 봐도 거절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벨리안은 당연히 카이젠이 아스텔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대답이 나왔을 때 그도 아스텔만큼이나 당황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카이젠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놀라서 바라보는 두 사람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다 같이 이동하지. 당신 말대로 최대한 빨리 가면 3, 4일 이내에 갈 수 있을 거야.”
‘이게 무슨…….’
친절한 제안이었지만 아스텔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스텔은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침착하게 거절했다.
“모처럼 사냥을 나오셨는데 제가 방해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마차만 내주시면 제가 아이를 데리고 먼저…….”
“그럴 것 없어. 어차피 그곳으로 가려고 했으니 함께 가는 게 좋아.”
“폐하를 번거롭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빨리 가면 여기서 3, 4일밖에 안 걸릴 테니 당장 마차를 타고 먼저 떠나겠습니다.”
“아니. 같이 가. 당신과 어린애만 보낼 수는 없어.”
“…….”
카이젠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아스텔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여기 며칠 더 머물려던 게 아니었나? 왜 갑자기 같이 가겠다는 거야?’
아스텔은 카이젠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곳에서 머무는 기간을 연장하고 있다고 짐작했다. 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있지만 아스텔이 아는 카이젠은 고작 그런 이유로 며칠씩 이런 외진 성에 머물 리가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더 있어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하지만 카이젠이 같이 이동하겠다는데 계속 혼자 가겠다고 우길 수도 없었다. 혼자 가는 걸 계속 고집하면 아무래도 수상해 보일 테니까.
아스텔은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한 뒤, 어쩔 수 없이 카이젠에게 차분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예, 폐하. 감사합니다.”
생각한 것과 달리 황제 일행과 함께 가게 되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할아버님이 계신 성으로 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할아버님이 계신 곳에 가면 테오르를 돌려보낼 수 있을 테니까. 함께 가는 3, 4일간 더 조심해야겠지만.
여태껏 며칠 동안 숨겨왔는데 3, 4일 정도는 더 견딜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