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폐황후
10년이었다.
아스텔이 그를 위해 죽도록 노력한 시간이.
제국의 공녀로 태어난 아스텔 폰 레스턴은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혹독하게 교육을 받았다.
정치와 역사, 군사학은 물론 온갖 기예와 문학 등의 교양 수업. 그리고 수학 공식보다 더 어렵고 난해한 궁정 예법까지.
어린 아스텔은 다른 아이들처럼 놀거나 쉴 수도 없었다. 오직 공부만 했다.
가혹할 만큼 힘겨웠지만 아스텔은 모든 걸 참으며 죽도록 노력했다.
10살 생일에 처음 만난 작은 소년을 위해서.
새카만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진 소년, 라스티엘 제국의 황태자 카이젠.
아스텔은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사랑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에도 아스텔의 마음은 오직 그를 향하고 있었다.
10살 생일날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푸른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다. 라스티엘 제국의 황후가 받는 황가의 보물, ‘푸른 달빛’이었다.
그것은 황가의 약혼을 의미하는 증표였다. 그날 아스텔은 정식으로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었다.
그 순간엔 얼마나 행복했던가.
푸른 보석을 목에 건 순간, 아스텔은 삶의 목적을 얻었다.
그렇게 또 10년.
아스텔은 예비 황태자비로서 황후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일찍이 황후가 승하하였기에 공부하는 틈틈이 황후가 없는 황궁을 드나들며 예비 황후로서의 책임도 다했다. 매번 황태후 전하를 찾아뵙고, 황궁의 일도 도왔다.
그때까지는 모든 게 좋았는데.
서재 유리창 너머의 계절이 수없이 바뀌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언젠가부터 차가운 바람이 화사한 봄의 전경을 쓸어내듯 불길한 소문들이 저택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아스텔과의 파혼을 바란다는 이야기가 축축한 물안개처럼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아스텔의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두 사람의 결혼을 앞당겼다. 황제의 최측근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공작의 요청으로 마침내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 * *
결혼식을 끝내고 한 침상에 들었던 첫날밤.
황태자는 당장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양해를 구했다.
“우리는 아직 젊고 황제 폐하가 계시니 시간은 얼마든지 있잖아. 당신이 황궁에 적응한 뒤에 천천히 아이를 갖고 싶어.”
아스텔은 오히려 카이젠에게 고마웠다. 황태자비가 되자마자 아이까지 생기면 더 힘들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결혼식이 이루어진 이상 첫날밤을 치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럼 당분간 제가 약을 먹을게요.”
첫날밤을 보내지 않으면 사람들이 오해할 것이다.
그러니 아스텔은 자신이 피임약을 먹겠다고 카이젠을 설득했다. 카이젠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니야. 당신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카이젠은 아스텔에게 동의를 구한 뒤 자기가 직접 피임약을 복용했다. 아스텔에겐 그것마저 다정한 배려로 느껴졌다.
카이젠은 긴장감에 떠는 아스텔을 소중하게 대해주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하게 배려해 주었다.
아스텔은 행복했다. 비록 정략결혼에 불과했지만 우리는 이대로 서로를 존중하며 한평생 부부로 살게 되겠지. 아스텔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꿈 같아야 했던 신혼 첫날 아침 비보가 날아들었다.
황제 폐하가 급사했다는 믿지 못할 소식이.
* * *
“이혼해 줘.”
그날 오후, 황제가 된 카이젠은 황후가 된 아스텔에게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이 결혼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원한 거였지. 나는 단 한 순간도 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 그러니 더 시간 끌지 않고 정리하는 게 좋겠지.”
죽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처럼 지극히 간결하고 무관심한 눈빛이었다.
“어차피 당신도 나를 사랑한 적 없잖아?”
“…….”
아스텔은 그 순간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떠올렸다.
10살 때 처음 카이젠을 만난 뒤 그가 준 목걸이를 한시도 몸에서 떼놓지 않았다.
전쟁에 나간 그를 기다리면서 주고받았던 형식적인 편지도, 무도회와 연회에서 가볍게 주고받은 말 한마디, 한마디도 전부 기억한다.
서글픈 현실을 깨달을 시간이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추억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아스텔은 어젯밤 그녀를 배려하듯이 아이를 천천히 갖고 싶다던 카이젠의 의도도 이제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아스텔을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10년간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한 점의 애정도 깃들지 않은, 차가운 붉은 눈을 보며 아스텔은 그가 원하는 대로 거짓을 말하기로 했다.
20살이 될 때까지 삶의 이유였던 남자, 그래도 하루 동안 남편이었던 남자를 위해.
“예, 그래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역사상 최단기 황후라는 기록을 세운, 아스텔의 단 하루뿐이었던 황후 생활이 끝났다.
* * *
새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황후가 쫓겨났다.
제국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킬 만한 일이었다.
원래 황족은 쉽게 이혼하지 못한다. 한쪽에서 이혼에 반대하면 대신전에서 재판을 받으며 오랜 시간 법정 다툼을 벌여야 했다. 그렇게 하고도 대부분은 이혼이 성사되지 않는다.
한 번 결혼 서약을 주고받은 이상 두 사람 모두의 동의가 없으면 황제라고 해도 신성한 결혼을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스텔의 이혼은 의외로 간단하게 끝이 났다. 당사자인 아스텔이 순순히 이혼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예, 저도 이혼을 원합니다.”
새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이혼을 원했지만 황후도 동의했으니 반대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한 대귀족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스텔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황후의 보관(寶冠)을 벗어놓았다.
폐황후가 된 뒤엔 모든 게 쉬웠다.
황후가 되기 위해 그렇게 오랜 시간을 노력하고, 연습하고, 준비했는데.
정작 황후 자리를 벗어나자 남은 것은 편안함과 안도감뿐이었다.
“싸워보지도 않고 황후 자리를 내팽개치다니, 너 같은 건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거라.”
이혼을 쉽게 허락했다는 이유로 가문에서 의절당했다. 생활할 돈을 보내주겠다고 황궁에서 시종이 찾아왔지만 아스텔은 전부 거절했다.
그리고 그녀는 수도를 떠났다. 모아뒀던 돈과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보석을 팔아 동부 숲 근처의 작은 집을 구했다. 그곳에서 조용히 남은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자수를 놓아서 팔거나 그림을 그려서 팔면 생활비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조용하고 평온하게 흘러갔다.
며칠 후, 근처의 약제사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듣기 전까지.
“저…… 임신하신 것 같은데요?”
* * *
계단 밑에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돌바닥을 밟는 불길한 소리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스텔은 황급히 벽장으로 달려갔다.
눅눅한 돌벽에 대충 붙여놓은 나무 벽장이 있었다. 침대를 제외하면 방 안에 있는 유일한 가구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대충 챙겨놓은 짐꾸러미를 뒤져서 작은 약병을 찾았다.
이런 도피 생활이 벌써 두 달째였다. 지난 일주일간 아스텔은 이 작은 베이커리의 2층에서 지냈다. 낮에는 아래층의 가게에서 빵을 만들거나 허드렛일을 돕고, 밤에는 2층의 작은 방에서 아이와 함께 잠을 잤다.
힘겨운 생활이긴 했지만 빠듯한 예산으로 도망 다니려면 이것저것 따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곳은 다른 데에 비하면 나쁘지 않았다. 가게주인도 선량했고 워낙 작은 시골 마을이라 사람도 많지 않았으니까. 그래 봤자 이 생활도 오늘로써 끝인 것 같지만.
아스텔은 침대로 가서 낡은 이불에 파묻힌 아이를 흔들어 깨웠다.
“테오르.”
침대에 누워 있던 검은 머리의 아이가 천천히 일어나서 눈을 떴다. 섬세한 눈매 안에서 진한 붉은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제발 이 눈만이라도 안 닮기를 기도했건만.’
아이는 제 아버지의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을 빼닮아 태어났다. 그래도 테오르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작은 얼굴은 인형같이 귀여웠다.
“엄마…?”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조그만 손으로 눈을 비볐다. 아스텔은 아이의 보드라운 하얀 뺨을 양손으로 다정하게 감싸 쥐고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테오르, 엄마가 말한 거 기억하지?”
아이가 잠기운이 가득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웅…… 연극?”
“그래.”
다행히도 아스텔이 낳은 아이, 테오르는 나이에 비해 영리했고 말도 잘 알아들었다.
아이가 말을 배우면서부터, 정확히는 연극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아스텔은 이런 일을 대비해서 아이와 연습을 해왔다.
아스텔은 아이의 고개를 들게 하고 옷장에서 찾은 약병을 열었다. 그러곤 얌전히 얼굴을 들어주는 아이의 눈에 한 방울씩 흘려 넣었다.
테오르가 눈을 깜빡이자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물감이 퍼지는 것처럼 푸른색으로 변했다.
“잘 참았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를 보다 아스텔은 아이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는 피부에서는 아이 특유의 보드라운 우유 냄새가 풍겼다.
쾅쾅!
그 순간 밖에서 문을 부숴 버릴 것처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스텔은 황급히 약병을 품 안에 숨겼다. 그녀가 나가서 열어주기도 전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뜯겼다. 너덜거리는 문틈으로 제국군의 군복을 입은 기사들이 들어왔다.
“레이디 아스텔?”
기사 중 제일 높은 지위를 가진 듯한 남자가 아스텔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이를 끌어안고 침대 곁에 서 있는 아스텔에게 간결한 말투로 전했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 * *
6년 전, 아스텔이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극심한 두려움이었다.
“임신이라고요?”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분명히 카이젠이 피임약을 복용했는데.
“그런 약은 실패할 확률도 있거든요.”
약제사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둘 다 약을 먹어도 임신하는 경우도 있다고.
아스텔은 넋을 잃고 그녀의 설명을 들었다.
그때는 이혼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조용한 곳에 새 거처를 마련하고 혼자 지냈지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부 차단할 순 없었다.
아스텔은 선황제의 죽음과 함께 제국의 평화도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질고 선량한 선황제는 대귀족들의 세력을 억압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럴 만한 야심도, 능력도 없는 분이었다.
하지만 카이젠은 달랐다.
그가 황제가 된 뒤에야 이 젊은 황제가 선황제와는 다르다는 걸 모든 이가 알게 됐다.
카이젠은 황제가 된 지 한 달 만에 대귀족 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밀슈태드 공작의 비리를 밝혀내서 그의 가문을 몰락시켰다.
그 후에도 차례차례 강력한 대귀족들을 숙청해 나갔다.
카이젠은 황제를 위협하는 대귀족을 모두 없애고 강력한 지배자가 되길 원했다.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도 입증해 보였다.
궁지에 몰린 북부의 대영주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황제의 군대에 의해 진압당하고 가문 전체가 몰살당했다.
숨죽이고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전 황제와 몇 명의 강력한 대영주가 힘의 균형을 이루던, 그래서 큰 문제 없이 평화로웠던 시절은 끝이 났다는 것을.
그때를 기점으로 제국 정계는 황제를 지지하는 신진 관료들로 이루어진 황제파와 대귀족들의 귀족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아스텔의 아버지, 레스턴 공작은 당연히 대귀족들의 수장이 되었다.
‘지금 임신 사실을 알리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자신은 더 이상 황후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는 황제의 아이였고, 현재까지 유일한 후계자였다.
아스텔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면 아버지는 이 아이를 황제로 만들고 섭정이 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는 걸 알면 카이젠은 이 아이를 없애려 할 것이다.
아이를 생각해 준다거나 지켜주려는 마음은 양쪽 모두에게서 눈곱만큼도 기대할 수 없었다.
아스텔은 자신의 아이가 정쟁에 이용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권력에 미친 남자들에게 아이의 목숨을 맡겨두고 전전긍긍하며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황제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았다.
그녀에게 남은 건 이 아이뿐이었다.
‘황제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야. 이 아이는 내가 지키고 내 손으로 키우겠어.’
임신한 걸 알게 된 그녀는 곰곰이 생각을 거듭한 끝에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아이를 숨겨서 혼자 기르겠다고.
* * *
아스텔은 테오르를 끌어안은 채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마른 흙과 돌 부스러기가 밟혔다. 발바닥이 쓰리고 아팠다. 신발을 갈아 신을 새도 없이 얇은 실내화를 신은 채 방에서 끌려온 탓이었다.
살갗에 스며드는 냉기 덕분에 걸음을 뗄 때마다 정신이 맑아졌다. 아스텔은 어깨에 걸친 낡은 외투 자락으로 테오르를 감싸 안았다. 돌담에 핀 장미 덤불이 싸늘한 새벽 공기를 연붉은 꽃향기로 물들였다.
대륙의 동북부는 4월까지도 새벽마다 메마른 땅 위에 서리가 내리는 곳이었다.
이제 5월에 접어들었건만, 이 근방은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산맥 너머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몇 걸음 앞에 파르스름한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영주관으로 쓰이는 고성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안으로 끌려갔다.
기사들이 안내한 곳은 성의 중심에 있는 응접실이었다. 방 안에는 장작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아스텔은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20살 때 마지막으로 헤어진 뒤 6년 만이었다. 카이젠은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밤하늘 같은 새카만 머리카락과 진한 붉은색의 눈동자.
대신전을 장식하는 성화보다 근사한 외모는 언제나 귀족 영애들의 찬사를 받아왔다.
외모는 그대로였지만 지금의 카이젠은 20살 때에 비해 더 당당하고 강인해 보이는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지난 6년간 황제로 살아온 남자답게, 아직 20대 후반인 젊은 나이임에도 전신에 자연스러운 위엄과 품격이 스며 있었다.
‘못 본 사이에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진 남자가 됐네.’
씁쓸한 상념이 가슴 밑바닥을 채웠다.
한때는 저 모습에 가슴 설레는 애정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따뜻한 감정은 전부 시들어 버렸다.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른 가지처럼 메마르고 황량한 빈자리만 남았다.
아스텔은 쓰라린 감정을 억누르고 아이와 함께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제 이 남자는 ‘제국의 주인’이라는 호칭에 가장 걸맞은 황제가 되었다.
황제와 대귀족 간의 정쟁은 황제의 승리로 끝이 났다. 지난 6년간 황제에게 대항했던 대귀족은 거의 다 사라졌다. 카이젠은 제국을 완벽하게 소유한, 가장 강력한 황제가 되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자기 멋대로 죽여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권력을 가진 진짜 전제군주가 된 것이다.
“6년 만이군.”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텔은 일어서서 그와 마주했다. 익숙한 붉은 눈동자가 아스텔을 찬찬히 훑었다.
그의 시선이 아스텔이 입은 아무런 무늬도, 장식도 없는 단조로운 회색 목면 드레스와 그 위에 대충 걸친 검은색 펠레린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천을 엮어 만든 낡은 실내화에 시선이 닿자 모양 좋은 미간에 잠시 주름이 졌다.
카이젠의 얼굴엔 놀라움과 불쾌감이 감돌았다. 아스텔이 이런 형편없는 차림새로 나타난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나 보군.”
날이 새기도 전에 끌고 와놓고 뭘 기대한 걸까.
하긴, 아스텔은 언제나 이 남자 앞에서 최고의 모습만 보였다.
몇 분간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인데도 몇 시간씩 화장하고, 머리를 손질했다. 그리고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최고로 아름다운 드레스와 보석을 골라서 치장했다.
피곤하고 힘들고 때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했지만, 잠시나마 이 남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었다.
어리석은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지나갔다. 아스텔은 이제 이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요.”
뭐, 갈아입는다고 해서 이것보다 나을 것도 없지만.
아스텔은 동부 끝자락에 있는 외조부의 낡은 저택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테오르를 기르며 살고 있었다.
하인 한 명 없는 궁핍한 살림이라 아스텔이 직접 정원에 채소를 심고, 가꾸고, 음식을 만들어서 먹었다. 이제는 귀족 영애가 아니라 평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름답고 화려한 드레스는 오래전에 전부 처분해 버렸다.
“왜 계속 도망 다녔지?”
카이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아스텔을 쳐다봤다.
그는 지난 두 달간 아스텔을 찾으려고 했다. 아스텔이 최대한 조심해서 도망 다니지 않았으면 진작에 붙잡혔을 것이다. 두 달을 버티다가 결국 이렇게 잡혀 오고 말았지만.
하긴 어차피 영원히 도망 다닐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대륙은 전부 제국의 땅이었고, 모두 이 남자의 것이었다.
아스텔이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조소를 보냈다.
“내가 당신을 잡아서 죽이기라도 할 줄 알았나?”
“…….”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아스텔은 도망 다니지 않았다.
외조부의 집에서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스텔을 찾는 황제의 기사들이 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도망쳤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우선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아이와 관련된 일인지 아닌지 분명히 알기 전까지는 이 남자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난 두 달간 도망 다니면서 아이와 관련된 일은 아니라는 건 알아냈다.
숨겨놓은 황자를 찾는 일이었으면 더 난리가 났을 테니까.
그러나 여전히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왜 이제 와서 나를 찾는 걸까?’
아스텔은 불안으로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카이젠에게 물었다.
“왜 저를 찾으셨나요?”
“두 달 동안 당신을 찾게 만들어놓고 빨리도 물어보는군.”
카이젠이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의 날카로운 눈빛에 테오르가 놀라며 작은 손으로 아스텔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 순간 카이젠의 시선이 아이에게 향했다.
“그 애는 뭐지?”
아스텔은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라도 이런 순간이 올까 봐 수없이 상상하고 대비했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닥치니 마음의 준비 같은 건 별로 도움되지 않았다.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아스텔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카이젠을 직시했다. 익숙한 붉은 눈에 의문이 감도는 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떠났던 때가 기억났다.
아스텔은 지금도 그 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거짓말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제 조카예요.”
“조카라고?”
카이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만도 했다.
아스텔의 친오빠인 프리츠는 몇 년 전까지 근위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카이젠의 근처에 있었으니까.
“친오빠가 아니고 지그문트 오빠…… 제 외사촌 오라버니가 남긴 아이예요.”
지그문트는 외삼촌의 하나뿐인 자식이었는데, 불행히도 테오르가 태어나기 6개월 전에 북부의 내전에서 전사했다.
아스텔은 후계자를 잃은 외할아버지, 칼렌베르크 후작에게 부탁해서 테오르를 지그문트의 아들로 만들었다.
지그문트와 연인이었던 하녀가 낳은 유복자로.
외가에서 평생을 일한 하녀는 죽을 때까지 지그문트의 전사자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공식 기록에 아이의 어머니로 등록해 주고 떠났다. 지금은 부유한 상인과 결혼해서 잘살고 있다고 들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스텔은 태연한 표정으로 카이젠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외할아버님께서 이 아이를 칼렌베르크 가문의 후계자로 승인받기 위해 서류를 보내 허가받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출생증명서와 혈연 검사 결과도 첨부해서요.”
물론 그 서류를 보낸 사람은 아스텔이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지그문트의 아이로 만들기 위해 모든 걸 완벽하게 처리했다. 정말로 죽은 외사촌 오빠가 하녀에게서 사생아를 얻은 것처럼 신전에 의뢰해서 외할아버지와 혈연 검사도 했다.
결과는 당연히 혈연관계 일치.
외조부에게 지그문트는 친손자고 아스텔은 외손녀로, 둘은 호칭만 다를 뿐 똑같은 손주다.
지그문트의 아들이든 아스텔의 아들이든 외조부에겐 다 같은 증손자인 것이다. 검사 결과에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손을 잡는 척하면서 아이의 조그만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이건 미리 정해놓은 둘만의 암호였다. 약속대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테오르가 아스텔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아스텔 고모……?”
“그래, 테오르.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아스텔은 테오르를 달래주는 척하며 감싸 안고 등을 토닥였다.
테오르는 여러 번 연습한 대로 잘 따라주고 있었다.
아스텔이 학습시킨 ‘연극’의 규칙은 아이의 수준에 맞게 단순했다.
엄마라고 부르는 대신 아스텔 고모라고 부르고, 누가 물어보기 전에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새끼손가락을 잡으면 그때마다 아스텔 고모라고 말하기.
아스텔은 아이가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게 차근차근, 침착하게 몇 번이나 연습을 시켰다. 긴장해서 역효과가 나지 않게 실수해도 혼내지 않고 잘할 때마다 상으로 간식을 줬다.
그걸 지켜보던 외할아버지는 ‘무슨 비상 대피 훈련을 하는 것 같구나’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쫓겨난 폐황후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이를 맡아서 키운다면 모두가 의심하겠지만, 외조부 곁에 머물면서 죽은 사촌 오빠의 아이를 돌봐준다고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카이젠도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의심을 거두었다.
“아, 그래. 죽기 전에 아이를 남겼다고 했나. 뭐, 그런 비슷한 얘기를 들은 것도 같군. 그런데 왜 당신이 데리고 있지?”
“외할아버님을 제외하고는 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연로하신 할아버님께 맡겨두고 올 수는 없었어요.”
도망칠 때 외할아버님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기로 했었다. 그때 헤어지고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는데 무사하신지 걱정스러웠다.
만에 하나라도 잡히게 되면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외손녀의 행방을 털어놓으시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외할아버지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젠은 감탄하는 투로 내뱉었다.
“당신 외조부는 당신이 어디 있는지 말하느니 차라리 고문을 받다가 죽겠다고 하던데. 그 나이에도 굉장한 기백이더군.”
“할아버님을 찾으셨어요? 할아버님께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아스텔이 놀라서 소리치자 카이젠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 외조부는 무사해. 당신 소재를 물어봤을 뿐이야. 내가 늙은 전쟁 영웅을 고문하고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고작 이런 일로?”
역시 큰일은 아닌 모양이다. 아스텔은 내심 안도했다.
“할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덴츠 성에 있어. 걱정하지 마. 예의를 갖춰서 대접해 주라고 했으니까.”
덴츠라면 여기서 수도로 가는 길목이다.
“나는 동부를 순행 중이었어. 중간에 당신의 소재를 파악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온 거야. 아무래도 내가 직접 만나러 오는 게 좋을 것 같았거든.”
설명을 끝낸 카이젠은 여전히 신기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테오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괜찮으면 이제 단둘이 얘기하지?”
카이젠이 문 옆에 선 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낯선 기사가 가까이 다가오자 테오르는 겁을 먹고 아스텔의 치마 뒤로 숨었다. 아스텔은 테오르의 손을 잡고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괜찮아. 잠시 옆방에 가 있으렴.”
그러면서 아이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았다.
아스텔은 아이가 긴장하고 무서워하지 않게 이 ‘연극’을 놀이처럼 연습시켰다. 덕분에 테오르는 연습할 때마다 재미있어했다.
지금도 테오르는 아스텔이 손가락을 감싸 쥐자 초롱초롱한 파란 눈으로 웃음 지었다.
“응, 아스텔 고모.”
아스텔은 테오르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기사가 테오르를 데려가고 그 뒤로, 문이 닫혔다.
“앉아.”
카이젠은 창가에 있는 티 테이블을 가리켰다.
아스텔은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그와 마주 앉았다. 다시 이렇게 이 남자와 마주 앉을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결혼한 지 하루 만에 이혼하고 황궁을 떠나면서 아스텔은 다시는 카이젠과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만나더라도 죄인이 되어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든가,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처형장에 끌려가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카이젠도 비슷한 감상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진지한 눈으로 아스텔을 바라보다가 본론을 꺼냈다.
“내가 당신을 찾은 건 돌아가신 할머님의 일 때문이야.”
“태황태후님이요?”
카이젠은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인 태황태후의 손에서 자랐다.
나이 든 태황태후 전하는 아스텔에게도 인자하고 다정했다. 아스텔이 황후 자리에서 쫓겨날 때 제일 많이 슬퍼한 분이기도 했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많이 상심하셨겠군요.”
아무리 동부의 시골구석에 살아도 태황태후가 죽었다는 소식 정도는 들었다. 그 얘기를 접했을 땐 아스텔도 마음이 아팠다.
‘좋은 분이었는데.’
카이젠은 별로 슬퍼 보이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할머님은 남부 대영주인 마일렌 공작가의 상속녀였지.”
카이젠의 할머니는 원래 남부의 대영지를 상속받은 어린 상속녀였다.
카이젠의 조부인 전전대 황제는 그분을 강탈하다시피 데려다가 황후로 삼고 남부 영지 전체를 황가에 귀속시켰다.
그 후 남부 영지는 황가의 소유가 되었지만, 어쨌든 태황태후가 살아 있는 한 법적으로는 태황태후의 소유였다. 그분이 돌아가시면 영지는 합법적으로 황가의 소유가 된다.
아스텔이 황궁을 떠날 때도 태황태후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하루의 대부분을 방 안에 누워 계셨다.
“그분의 죽음과 동시에 남부 영지는 고스란히 황가로 흡수될 예정이었어. 그런데 정작 할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언장이 나왔는데 이상한 조건이 달려 있더군.”
“조건이요?”
“당신의 허락 없이는 유언을 공개할 수 없다는 거야. 그게 할머님이 정하신 조건이었어.”
“…….”
왜 그런 조건을 붙였을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아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늙은 대신관이 태황태후님의 마지막 소원이라며 절대 공개할 수 없다고 우겼지. 결코 못 내놓는다고 고집을 부려서 강제로 끌어내고 빼앗았는데, 그 안에 적힌 내용은 더 웃기더군. ‘남부 영지에 관한 일은 전 황후인 아스텔 폰 레스턴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왜 저를…….”
카이젠은 당황하는 아스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할머님은 내가 당신을 찾아서 돌봐주길 바라신 모양이야. 돌아가시기 전에도 몇 번이나 그런 부탁을 하셨지. 아무리 말해도 내가 들어주질 않으니까 유언장을 이용해서라도 강요하고 싶으셨나 봐.”
“…….”
아스텔은 태황태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해했다.
태황태후께서는 저런 조건을 달아놓으면 카이젠이 아스텔을 찾아서 유언에 동의를 얻는 조건으로 영지라도 좀 쥐여 줄 거라고 생각하셨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가엾은 손자며느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유언장에 아스텔에게 재산을 나눠 준다고 써봤자, 카이젠이 아스텔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며 무시하면 한 푼도 받지 못할 거라는 걸 예상하시고.
태황태후께서는 상냥한 마음으로 생각해 내신 일이지만 아스텔에겐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의 아스텔에겐 영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의 아이를 숨겨서 키우고 있는 이상 최대한 이 남자와 마주치지 말고 수도의 다른 사람들도 피해야 했다.
물론 태황태후께서는 아스텔이 아이를 숨겼다는 걸 까맣게 모르셨으니 아스텔을 위해 저런 유언을 작성하신 거겠지만.
“그것 때문에 저를 찾으신 건가요? 유언장을 강제로 열어 보셨듯이 그냥 마음대로 처리하시지 그러셨어요.”
유언장도 아스텔의 허락 없이 강제로 열어 봤으면서 왜 상속 과정은 유언을 지키려고 하냐는 비난이었다.
아스텔의 뼈 있는 말에 카이젠은 조소로 응답했다.
“못할 건 없지. 관료와 법관 중 상속법에 어긋난다고 반대하는 놈들이 좀 있겠지만 없애 버리면 되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당신을 데려와서 공개적으로 동의를 얻는 게 더 간단하겠더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태황태후의 영지는 남부 전체를 아우르는 엄청난 대영지였다. 미래의 황제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도록 상속 문제를 깨끗하게 처리하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당신을 찾은 것뿐인데, 당신은 내가 사람을 보내자마자 도망쳐 버렸지. 덕분에 두 달 동안 북부와 동부를 전부 뒤져야 했어.”
그런 용건이었구나.
특별히 큰일은 아니었다. 수도에 가서 법관과 신관들 앞에서 동의서에 서명이나 해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 정도면 괜찮다. 테오르는 중간에 할아버님을 만나서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혼자서만 다녀오면 된다.
아스텔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고 미안한 얼굴을 가장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버지의 일인 줄 알고 무서웠어요.”
“당신 아버지 일에 왜 당신을 찾겠어? 이제 제국의 유일한 공작이 된 당신 아버지는 자기 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카이젠이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지난 6년간 대귀족인 공작은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죽거나 몰락해서 작위를 잃었다. 이제 제국에 남은 공작은 그녀의 아버지, 레스턴 공작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도 실각한 상태나 다름없었지만.
아스텔은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작위를 잃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아버지는 원래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황제를 구슬려서 신뢰를 얻고 대귀족 중 가장 큰 권력을 누렸었다.
“저는 6년간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희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겨서 저도 처벌받는 줄 알고 겁이 났어요.”
카이젠은 자비로운 황제가 아니었다. 반역죄로 낙인찍힌 가문은 여자들도 수도원에 유폐되거나 가족들과 함께 목이 잘렸다.
그렇게 망해 버린 몇몇 가문을 생각할 때마다 아스텔은 소름이 끼쳤다.
만일 아버지가 테오르의 존재를 알았으면.
그래서 테오르를 내세워서 반란이라도 일으켰으면 아스텔은 물론이고 테오르까지 죽었을 거다.
하지만 카이젠은 아스텔의 말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당신을 처벌할 리가 없잖아. 당신 아버지가 어떻게 되든 당신은…….”
카이젠은 말끝을 흐렸다.
딱히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우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닌데.’
잠시 뒤 아스텔이 침묵을 깼다.
“폐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직접 찾으러 왔는데 무슨 힘이 있어서 거절하겠나.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카이젠은 충분히 이런 말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뭐지?”
“저희 외할아버님의 연금을 돌려주세요.”
그녀의 외조부인 칼렌베르트 후작은 카이젠의 할아버지인 전전대 황제 시절 모함을 받아 영지를 잃고 낙향했는데, 카이젠이 황제가 된 뒤엔 연금까지 박탈당했다.
반란을 일으켰던 북부의 대영주와 친척 간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덕분에 외조부는 동부 끝자락의 낡은 저택에 은거해서 궁핍하게 살고 있었다. 아스텔은 자수를 놓거나 약초를 키워서 팔아다가 번 돈으로 외조부를 부양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당장 처리해 줄게.”
“그리고 태황태후 전하의 유언장 문제가 해결되면 저와 제 조카를 보내주세요.”
“그러지 말고 수도에 거처를 마련해 주지. 영지라도 조금 줄 테니 그 수입으로 수도에서 생활을…….”
“아뇨. 필요 없습니다. 그냥 저희를 보내주세요.”
영지를 받게 되면 이 남자와 계속 만나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특히 수도에 머무는 건 꿈에서도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래서 필요 없다고 한 것뿐인데, 아스텔의 거절에 카이젠의 잘생긴 얼굴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영지를 준다는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해서 화가 난 모양이다.
하지만 아스텔은 그의 기분까지 고려해 줄 겨를이 없었다.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는 건가?”
카이젠은 모양 좋은 눈매를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이혼에 동의했잖아.”
“…….”
상대의 입에서 나온 예전 얘기에 오래된 기억들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지금은 당당하고 강인한 황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스텔은 저 잘생긴 얼굴에서 먼 옛날 그녀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던 검은 머리 소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스텔과 함께 있을 때, 카이젠은 언제나 다정하고 정중한 약혼자였다.
성년이 될 무렵엔 카이젠이 몇 번 다른 여자들을 만난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적어도 카이젠은 아스텔 앞에서는 충실한 약혼자였으니까.
가끔 제멋대로 행동하긴 해도 카이젠은 부친인 황제에게 순종하는 성실한 황태자기도 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약속한 결혼을 깨뜨릴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부 연극이었던 거지.’
황제가 된 뒤에 아스텔을 내치고 아스텔의 아버지인 레스턴 공작을 비롯해 대귀족을 전부 숙청하기 위해 평범한 황태자를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모든 계획에서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었다.
평생을 카이젠의 약혼녀로 살아왔지만 아스텔은 그의 인생에서 먼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언제든 손쉽게 털어버릴 하찮은 존재.
카이젠이 황제가 되자마자 이혼을 원했을 때 아스텔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혼에 동의했다.
무슨 소리를 해도 자신은 카이젠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한때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시간 끌지 않고 깨끗하게 사라져 주고 싶었다.
아스텔은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그냥 약속해 주세요. 일이 해결되면 할아버님의 연금만 돌려주시고 저희를 보내주신다고요.”
아스텔이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듯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테오르도 카이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황제의 자식을 황궁 밖에서 자라게 한 전례는 없다. 아이가 황자인 걸 들키면 어쩔 수 없이 황궁으로 보내야만 한다.
카이젠은 얼마 못 가 다른 귀족 가문 딸 중에서 새 황후를 들이거나, 아니면 후궁에게서라도 아이를 낳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황자라는 이유로 아이를 뺏어 가겠지만 나중에 다른 여자가 아이를 낳아주면, 카이젠은 테오르를 지켜주지도 않고 방치하겠지.
폐황후의 자식인 데다 이제 뒷받침이 되어줄 외가도 없는 어린 황자는 황궁 안에서 한 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아스텔은 보이지 않게 손을 움켜쥐었다.
‘절대 아이의 정체를 들키면 안 돼.’
아버지가 힘을 잃으면서 그쪽의 위험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아이를 숨겨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걸 약속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수도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카이젠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텔을 바라보는 붉은 눈에 얼핏 분노가 감돌았다.
“좋아. 약속하지.”
몇 분 뒤에야 카이젠은 대답을 내뱉었다.
“대신 당신도 약속해. 일이 끝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가지 않겠다고.”
어차피 이제는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도망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아스텔은 가슴 밑바닥에 차오르는 불안함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 * *
출발할 때만 해도 주변은 희미한 물안개에 잠겨 있었는데, 길을 가는 동안 촉촉하게 젖은 나무 잎사귀 위로 하얗게 날이 밝아왔다.
덜컹거리는 마차가 숲의 어귀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아스텔은 자작나무 숲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테오르는 아스텔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스텔은 따뜻한 담요를 아이의 어깨까지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수도로 가겠다고 수락하자마자 카이젠은 당장 출발할 것을 명했다.
아스텔은 머물던 가게에 들러 간신히 주인 내외에게 사과하고 짐을 챙겨왔다. 짐이라고 해봤자 옷 몇 벌과 약상자가 전부였지만.
마차의 창문 밖으로 황제의 기사들이 보였다. 기사들의 정복과 깃발에 새겨진 황실의 문양을 볼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빨리 해결하고 끝내는 길밖에 없었다.
아스텔은 품속에 숨겨두었던 작은 약병을 꺼냈다. 작은 유리병 안에 반짝이는 빛을 머금은 푸른 액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카이젠은 황가 특유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아스텔은 연한 연둣빛 눈동자를 타고났다. 반면 외사촌인 지그문트 오빠는 푸른 눈을 갖고 있었다.
이혼하고 나서 동부의 숲 지대에 작은 집을 구한 건 천운이었다.
아스텔은 그곳에서 숲속에 살던 약제사와 친해졌다.
그레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약제사는 인적 없는 곳에 이사 온 아스텔을 신기하게 여겼고, 그녀가 귀족이라는 사실을 알자 더 신기해했다.
조상 대대로 약제사였다는 그레텔은 수도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신기한 물약의 조제법을 많이 알고 있었다.
테오르를 낳고 난 뒤 아스텔은 그레텔에게 아이를 위해 약을 만들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혹시 눈 색을 바꿀 수 있는 약이 있나요?”
“글쎄요. 우리 어머니의 조제법 중에 그런 게 있긴 한데…….”
그레텔은 자신 없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아스텔이 초조하게 되물었다.
“그런데요?”
“어머니가 연구하다가 그만두신 거라서 지금 만들려면 연구하고 실험해 볼 시간이 필요해요.”
아스텔은 즉시 그 약을 개발해 달라고 요청했다.
드레스와 남은 보석을 다 팔아 연구에 쓸 돈을 대주고 직접 물약의 실험체가 되었다. 몇 번이나 그레텔이 만든 약을 눈에 넣어서 제대로 되는지, 통증이나 부작용은 없는지 시험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인가 봐요. 귀족 영애님이 이렇게까지 하시고.”
아스텔이 자기 눈으로 약을 시험하는 걸 보고 그레텔은 안쓰럽다는 듯이 감탄을 흘렸다.
아스텔은 담담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이 아버지가 테오르의 눈을 보면 빼앗아 갈 거예요.”
그레텔은 그 말을 듣고 뒤늦게 결의를 다졌다.
“우리 테오를 뺏기면 안 되죠!”
함께 지내면서 흠뻑 정든 아이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말에 그레텔도 열심히 약을 연구해 줬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이 약이었다.
눈동자를 파란색으로 바꿔주는 약.
아스텔이 지난 수년간 매일매일 본인의 눈으로 시험해 봤지만 이 약은 통증도 부작용도 없고 안전했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지속 시간이 너무 짧다는 점이었다. 반나절 정도면 약효가 끝이 났다.
아스텔은 병을 흔들어보면서 양을 가늠했다.
‘수도에 갈 때까지는 괜찮을 것 같은데.’
그다음에는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그레텔을 도와주면서 어깨너머로 약초 다루는 법을 배우고, 여러 가지 약을 만드는 법도 어설프게나마 익혀뒀다.
이 눈 색을 바꾸는 약은 특별히 완벽하게 조제법을 배웠다. 약초만 구하면 아스텔도 만들 수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중간에 외조부님을 만나서 카이젠에게 허락을 구하고 아이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는 거겠지만.
갑자기 덜컹거리며 마차가 멈춰 섰다.
아스텔은 물약을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무슨 일인가요?”
“잠시 쉬어가려고 합니다. 레이디, 마차 밖으로 나오셔도 됩니다.”
말소리를 듣고 테오르가 눈을 뜨고 부스스 일어났다. 졸음을 가득 담고 아스텔을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아직 푸른색이었다.
“배고프니? 밖에 나가볼까?”
“밖에 나갈래!”
마차 안에 갇혀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몹시 지루한 모양이었다. 테오르는 나가자는 말에 당장 신발을 신으려고 바닥에 내려서려 했다.
“그래. 나가서 주변에 뭐가 있나 구경하자. 간식도 줄게.”
“응!”
아스텔은 아이의 조그만 발에 신발을 신겨주었다. 미리 준비한 작은 바구니를 들고 마차 문을 열었다.
길가엔 기사와 병사가 모여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물병을 꺼내 마시며 쉬고 있었다.
머물던 마을에서 얼마나 온 건지 모르겠다.
이 주변에는 새벽에 비가 지나간 듯했다. 아스텔은 아이를 데리고 숲길 근처의 오솔길 쪽으로 걸어갔다. 테오르는 아스텔의 손을 잡고 풀잎이 돋아난 길을 아장아장 걸었다.
밤새 빗물을 머금은 풀잎이 햇살을 받아 싱그럽게 빛을 발했다. 작은 들꽃이 피어난 숲길엔 비 온 뒤의 상쾌한 새벽 공기와 향긋한 풀 냄새가 감돌았다.
뒤늦게 두 사람을 발견한 갈색 머리의 기사가 뒤따라오며 진지한 낯으로 충고했다.
“레이디, 너무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뒤따라온 남자는 기사단장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에 비해 아직 청년의 모습이 남은 30살쯤 되어 보이는 기사였다. 부드러운 연갈색 머리카락만으로도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아스텔은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린든 경? 린든 경이시죠?”
“아……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린든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아스텔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부터 폐하의 곁을 지키셨잖아요. 어떻게 잊겠어요.”
린든은 내심 감탄했다.
지금의 황제가 황태자였던 시절, 린든은 이름 없는 하급 기사였다. 실력을 입증받아 황태자의 근위대에 들긴 했지만 출신이 좋지 않아서 빛을 보지 못했다. 카이젠이 황제가 되고 나서야 전공을 세우고 황제의 측근이 될 수 있었다.
린든은 아스텔이 자신을 기억할 줄은 몰랐다. 당시 아스텔은 황태자의 약혼녀이자 귀한 공녀님이었으니까.
하긴 그때도 레스턴 공작은 싫었지만 아스텔에 대해서는 딱히 나쁜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직접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멀리서만 봐도 굉장히 조용하고 예의 바른 아가씨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스텔은 귀한 공녀님이었지만 하급 기사에게도 시종에게도 무례하게 대하는 법이 없었다.
도로와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어간 아스텔은 자작나무 옆에 있는 바위에 담요를 깔고 아이를 앉혔다.
“아이에게 간식을 주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면 린든 경도 드시겠어요?”
“예?”
아스텔이 들고 온 바구니를 내려놓고 작은 물병과 종이로 포장한 음식을 꺼냈다.
“오늘 팔려고 어젯밤에 만든 건데…… 주인 아주머님이 가져가라고 하셔서 몇 개 얻어 왔어요.”
종이를 풀자 안에 담겨 있던 타르트가 나왔다. 아스텔이 꺼낸 것은 딸기와 생크림을 넣은 평범한 딸기 타르트였다.
아스텔은 종이를 풀어서 먹을 수 있게 꺼내놓았다. 바구니에서 꺼내자마자 바삭하게 구워진 딸기 타르트의 달콤한 향기가 가득 풍겼다.
“이걸 직접…… 만드셨다고요?”
린든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스텔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예. 잠시 그 가게에서 일했거든요.”
저택에서도 하녀가 없어서 아스텔이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사실 처음 몇 달간은 음식을 만드는 것도, 집 안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것도 엄청나게 힘들었다. 그릇을 깨기도 하고 부엌을 태워 먹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시간이 지나니까 결국 모든 게 익숙해졌다.
작은 타르트를 하나 잘라서 건네주자 테오르는 한입 가득 물고 오물오물 먹었다.
아스텔은 린든에게도 작은 타르트를 하나 건넸다. 금빛 타르트 위엔 윤기가 감도는 딸기가 가득했다.
“드셔보세요. 못 먹을 정도는 아닐 거예요.”
“예, 예. 감사합니다.”
린든은 아스텔이 건네주는 타르트를 받았다. 사실 오랜 시간 달려온 탓에 배도 고팠다. 어쨌든 이 타르트는 겉으로 보기엔 무척 맛있을 것 같았다.
린든은 반신반의하며 한 입 베어 먹었다. 싱싱한 딸기가 달콤한 크림과 섞이고 바삭바삭한 타르트지가 씹혔다.
“세상에, 정말 맛있군요!”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이에요.”
금세 한 개를 다 먹어치우는 린든의 모습에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물병에 담긴 우유를 건네주며 웃었다.
* * *
카이젠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스텔을 발견했다.
아스텔은 길에서 떨어진 오솔길 쪽에서 기사단장인 린든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이 아는 사이였나?’
아스텔은 여전히 칙칙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행복도 없는 건가. 그냥 평상복이든 외출복이든 갈아입을 옷이 없는 것 같긴 했다.
‘저런 꼴이 되다니…….’
그가 기억하는 아스텔은 저렇지 않았다.
궁정에서 제일 세련되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긴 해도 천박해 보이지 않는 기품 있는 보석들로 치장하고. 아침 햇살 같은 연한 금발을 우아하게 늘어뜨리고 다녔다.
아스텔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런 모습만 기억이 났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얌전히 앉아서 그가 묻는 말에 조곤조곤 대답하던 아스텔.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열심히 관찰한 적이 없어서겠지.’
아스텔이 훌륭한 황후감이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적이고 우아한 데다 여러모로 재능도 많고. 화려한 미인은 아니어도 충분히 단정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신중하고 겸손한 성격까지 갖췄으니까.
하지만 어린 카이젠은 그런 아스텔을 단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스텔은 카이젠에게 헌신적이었지만 카이젠은 별로 애정이 생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아스텔은 황후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었으니까.
레스턴 공작은 아스텔을 완벽한 인형으로 키웠다.
최고의 숙녀가 되도록 밤낮없이 공부를 시키고, 언제나 아버지인 공작에게 절대복종하도록 가르쳤다. 아스텔을 황후로 만들어서 미래의 황제를 낳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가당치도 않은 야심이라니.
선황제가 조금만 더 일찍 죽었으면 결혼도 하지 않고 파혼했을 텐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을 하고 억지로 첫날밤을 보내야 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약을 쓰기는 했지만, 연기하기 위해 아스텔과 마음에도 없는 관계를 가진 건 아직까지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래도 어차피 끝낼 결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황제가 되자마자 이혼을 요구했다.
아스텔이 한마디로 이혼을 승낙했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뭐 이혼해도 알아서 잘 살겠거니 싶었다. 사실 그때는 아스텔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황제가 되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으니까.
가문에서 절연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돈이라도 보내주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후엔 아스텔을 거의 잊고 살았다.
6년 만에 다시 아스텔을 찾았을 땐, 수도의 귀족 중에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사람을 다 추적해서 조사한 끝에, 오래전 은거한 늙은 후작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칼렌베르크 후작은 오래전에 실각하고 영지를 잃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높은 지위의 귀족이었으니 어느 정도 귀족다운 생활을 유지하고 있을 줄 알았다.
사실 카이젠은 반역자의 친척이라 연금을 박탈당한 사람들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6년 만에 다시 만난 아스텔이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 내심 충격을 받았다.
아스텔이 입은 칙칙한 드레스엔 보석은커녕 흔한 레이스 장식 하나 없었다. 평민들이 입는 옷보다도 못했다. 황궁의 시녀들도 지금의 아스텔보다는 화려했다.
저 꼴을 보니 외조부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비참하게 살아온 듯했다.
다 늙은 노인네와 어린애를 뒷바라지하면서.
카이젠은 아스텔의 외조부가 몹시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가난했으면 후작은 차라리 아스텔에게 새 혼처를 알아봐 줬어야 했다. 손바닥만 한 영지라도 있는 남자와 재혼했으면 저 정도로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을 테니까.
젊은 손녀를 데리고 살면서 혼처를 알아봐 주지도 않고 하녀처럼 부려먹다니.
심지어 그 늙은이는 유모를 쓸 돈도 없어서 자기 집안 후계자인 어린애도 아스텔에게 맡겨놓고 있었다. 도망칠 때도 애를 아스텔에게 던져주고 혼자 가버렸다.
‘그 노친네를 그냥 고문하고 죽일 걸 그랬지.’
카이젠은 새삼 그런 후회를 곱씹으면서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아스텔은 그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여전히 차분하고 조용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고개를 똑바로 들고 할 말을 다 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왜일까.
저 여자가 보기 싫은 건 아니었다. 비참할 만큼 초라한 차림새였지만 아스텔 자체는 보기 싫지 않았다. 지금도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섬세한 연두색 눈과 연분홍빛 입술은 아름다웠고 자연스러운 기품이 서려 있었다.
‘저런 모습이었나.’
아주 어릴 때부터 약혼녀였고 결혼까지 했던 여자인데. 자신은 단 한 번도 아스텔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린든에게 뭔가를 말하던 아스텔이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린든을 올려다보는 연둣빛 눈에 잔잔한 웃음기가 스쳐 갔다. 연홍색 입술이 살짝 곡선을 그리면서 단아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걸 보던 카이젠은 빠르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폐하……!”
갑자기 황제가 다가오자 린든이 놀라서 황급히 예의를 갖췄다.
자리에 앉아 있던 아스텔도 일어섰다.
“잠시 할 얘기가 있으니 아이를 데려가.”
황제의 명령을 들은 린든이 조심스레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가 당황해서 피하려 하자 아스텔이 뭐라고 속삭이면서 아이를 안심시키곤 린든에게 안겨주었다. 애를 달래는 모습이 굉장히 능숙했다. 애 엄마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저 어린애를 키워온 걸까?
평민들도 돈이 있으면 유모를 고용해서 아이를 맡기는데, 공녀라는 여자가 저렇게 어린애를 직접 키우고 있다니. 그것도 친조카도 아니고 사촌이 남긴 애를.
아스텔은 가난한 할아비 밑에서 착취를 당하며 하녀 겸 보모로 살아온 게 분명했다.
* * *
아스텔은 카이젠이 갑자기 다가와서 몹시 놀랐다.
숨기는 게 있다 보니 이렇게 느닷없이 마주하면 가슴이 철렁했다. 수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말을 안 섞고 싶은데…….
그런 마음을 숨기고 억지로 평온한 얼굴을 가장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왜 재혼하지 않았지?”
아스텔은 잠시 말없이 카이젠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이 남자가 왜 갑자기 이런 걸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보다는 재혼하는 게 나았을 텐데?”
“…….”
정말 그게 궁금한 건가.
무신경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조금 놀라웠다.
왜 재혼하지 않았냐고?
물론 재혼을 고려하지 않은 첫 번째 이유는 테오르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더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런 일을 겪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으니까요.”
‘그런 일’이라는 말에 카이젠의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스텔이 솔직하게 말한 게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럼 뭐라고 말하길 바란 걸까. 행복했던 하루 동안의 결혼 생활이라고 말해주길 바라나.
아스텔은 똑같은 질문을 돌려주었다.
“폐하께서는 왜 재혼하지 않으셨나요?”
“제 아비의 첩자 노릇이나 하면서 날 귀찮게 할 아내는 필요 없었으니까.”
아스텔을 비꼬는 소리인 것 같았다.
아스텔은 시선을 내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제 폐하를 위협할 만한 대가문은 전부 사라졌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되겠네요. 안심하고 새 황후 폐하를 고르실 수 있겠어요.”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지만 내용은 고작 그런 게 겁이 나서 황후를 들이지 못했냐는 비아냥이었다.
아스텔은 이런 식으로 그의 신경을 긁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화가 나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당신 정말 많이 변했군.”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변하긴 변했지. 이 남자를 보면서도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
아스텔은 대화를 지속하고 싶지 않아서 카이젠에게 양해를 구했다.
“괜찮으시면 마차로 돌아가 봐도 될까요? 아이가 기다릴 것 같아서요.”
“……그래.”
아스텔은 그에게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카이젠은 아스텔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여자는 정말 짜증이 날 만큼 신경에 거슬렸다.
* * *
일행은 오후가 되어서야 마에른 성에 도착했다.
마에른 성은 동부의 숲 지대에 자리 잡은 고성으로 황가의 소유였다.
황제가 수도 근처에 소유한 다른 성들에 비하면 굉장히 작았지만,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겉모습과 달리 내부는 몹시 화려하고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 이틀 정도 쉬고 수도로 출발할 예정이라고 했다.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성에서 대기하던 기사들과 시종들이 성문 앞에 나와 있었다. 붉은 머리의 젊은 남자가 카이젠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다가가서 뭔가를 말하는 게 보였다.
아스텔이 마차에서 내리자 그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아스텔. 전하의 비서관인 클로드 백작 벨리안입니다.”
벨리안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남자는 부드러운 빨간 곱슬머리에 살짝 끝이 처진 녹색 눈을 가진, 순해 보이는 외모였다.
나름대로 잘생긴 얼굴이긴 했는데 미남이라기보단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아스텔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카이젠이 발탁해서 궁정에 들인 신진 관료인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처음 뵙네요.”
그 순간 성 안쪽에서 맑고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드디어 도착하셨군요.”
아스텔에게 뭔가를 말하려던 벨리안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스쳐 갔다.
금발의 귀족 영애가 성에서 나오고 있었다.
카이젠을 바라보던 영애의 시선이 벨리안과 함께 있는 아스텔에게 향했다.
“어머나, 저분은 누구시죠?”
* * *
앞으로 나선 여자는 굉장히 어려 보였다. 많아 봐야 스물두 살쯤 되었을까. 앳된 얼굴이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결 좋은 벌꿀색 금발을 반 정도 간단하게 고정하고 나머지는 길게 풀어 늘어뜨린 걸 보면 아직 미혼의 레이디인 게 분명했다.
금발의 레이디가 살짝 경계심 어린 눈으로 아스텔을 살피며 물었다.
“이분은 누구시죠?”
아스텔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이 아가씨가 누구였는지 뒤늦게 기억이 났다.
“레이디 마리안이군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분명히 이 아가씨는 크로이첸 후작의 장녀였다. 아스텔이 사교계에 있을 땐 14살, 15살 정도밖에 안 된 귀여운 사춘기 소녀였는데.
하긴 그게 벌써 6년 전이니…….
“저를 아시나요?”
마리안이 어리둥절하자 곁에 있던 벨리안이 얼른 끼어들었다.
“레이디 마리안, 이분은 예전에 황후 폐하셨습니다.”
“황후 폐하라고요?”
전 황후라는 말에 마리안은 샐쭉한 표정으로 아스텔을 관찰했다.
살짝 경계심을 담은 눈이 아스텔의 아무렇게나 풀어진 백금발과 무늬 하나 없는 칙칙한 드레스를 스쳐 갔다.
마리안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아, 그 하루 만에 쫓겨나신…….”
“레, 레이디……!”
마리안의 무례한 말에 벨리안은 당황해서 그녀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아스텔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살포시 웃음 지었다.
“예. 하루 만에 쫓겨난 황후가 바로 저랍니다. 이제 기억나셨나 보네요.”
아마도 이 어린 아가씨는 황제의 연인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크로이첸 가문은 신흥 가문으로 예전엔 세력이 미미했지만 대귀족들이 몰락한 지금은 카이젠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세력가의 딸이 아니라도 아스텔은 6살이나 어린 애와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그게 황제의 여자라면 더더욱.
속을 긁었는데도 상대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받아치자 마리안은 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아스텔의 뒤에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 아이는 누군가요?”
“죽은 사촌 오빠의 아이예요. 지금은 제가 돌보고 있어서 데려왔어요.”
사촌의 애라는 말에 마리안은 테오르에게도 금세 흥미를 잃었다.
반면 테오르는 마리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화려하게 치장한 여성을 본 적이 없어서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마리안을 올려다보던 테오르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아스텔은 아이를 말릴까 하다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구시대의 귀족으로 살아온 외할아버지는 가끔 테오르한테 숙녀를 대하는 예법 같은 걸 가르치곤 했다. 그런 걸 배울 나이가 아니라고 해도 자기는 저만할 때부터 신사가 되는 예절을 배웠다는 믿을 수 없는 주장을 하며 우겼다.
뭐, 나쁜 걸 가르치는 건 아니니까 놔뒀더니만…….
마리안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지만 벨리안은 아이를 보며 감탄했다.
“와, 작은 도련님이 예의 바르네.”
그러고 보면 벨리안은 아까 마차에서 내리는 아이를 보고도 누군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미 일행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전 황후와 전 황후가 데려온 아이에 관해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괜찮으시면 머무실 거처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벨리안은 지극히 친절하고 공손한 태도로 아스텔을 안내했다. 뒤에 남은 마리안은 왜 전 황후가 황제와 함께 왔는지 궁금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스텔은 아이를 데리고 벨리안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벨리안이 아스텔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마리안 님은 아직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시거든요. 제가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폐하의 총애를 받는 분께 불쾌감을 드린 것 같아서 오히려 죄송하네요.”
예의상 한 말일 뿐인데 벨리안이 걸음을 멈추고 아스텔을 멍하니 쳐다봤다.
“예? 아뇨. 저분은 그런 게 아니라…….”
벨리안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사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건 비서관인 그에겐 금기였으니까.
“아무튼 그런 분은 아닙니다.”
“그래요?”
왜지?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인데. 하긴……카이젠의 짝이 되기엔 좀 어린가.
벨리안은 해맑게 웃으며 부탁을 해왔다.
“저…… 괜찮으시면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예. 테오르, 잠시 여기 있어.”
테오르가 복도에 장식된 조각상들을 구경하는 동안 아스텔은 벨리안을 따라서 복도 구석으로 갔다.
“태황태후 전하의 유언장 얘기는 일단 세간에 알려지지 않게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벨리안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아스텔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돌아가신 지 석 달 가까이 되는데 아직도 상속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게 알려지면 남부의 영주들이 동요할 것 같아서요. 그러다가 북부처럼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큰일이지요. 그러니 아스텔 님께서도 수도에 가실 때까지는 이 일을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스텔은 잠시 말없이 벨리안의 귀여운 얼굴을 응시했다.
황제의 비서관이라는 남자가 순진해 보일 만큼 호감 가는 미소를 짓고 이렇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게 신기해서였다.
이미 제국 황제가 3대째 다스린 남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이 남자는 아스텔이 그 정도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요? 황제 폐하를 향한 비난이 생길까 봐 그러시는 게 아니고요?”
제국인은 전 황후인 아스텔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결혼하자마자 이혼당하고 종적을 감췄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태황태후의 유언장 얘기가 소문나면 갑자기 전 황후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황제의 이미지가 실추될 것이다.
‘황제가 아내를 얼마나 매정하게 내쳤으면 태황태후가 죽어가면서 그런 유언을 했을까’ 하고 사람들이 떠들어댈 게 분명했다.
아스텔이 정곡을 찌르자 벨리안의 순한 얼굴이 일순간 굳었다.
그는 민망한 듯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똑똑한 분을 속이는 건 어렵네요.”
별로 속이려고 노력한 것 같지도 않은데.
이 남자는 아스텔이 너무 순진해서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상할 만큼 친절했던 것도 이걸 부탁하려고 그랬던 거겠지.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예. 아무래도 말이 새어 나가면 이런저런 뒷소문이 많아질 것 같아서요.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려고 합니다.”
“어차피 전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낼 생각도 없어요. 이 일만 끝나면 곧바로 돌아갈 거고요.”
사실 아스텔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테오르의 출생 관련 증거는 완벽하게 처리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건 위험했다.
“말이 통하는 분이라 좋군요.”
벨리안은 만족스러워하며 아스텔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정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수도에 가실 때까지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벨리안은 시종을 불러서 아스텔과 테오르를 방으로 안내해 주라고 명령했다. 아스텔은 벨리안과 헤어지고 테오르를 데리고 시종을 따라갔다.
배정받은 방에 도착하자 시종이 문을 열어줬다.
문이 열리자 넓고 화려한 방 안이 나타났다. 바닥에 백합 문양을 넣은 대리석이 깔린 방은 고급스러운 목조 가구와 금은 장식이 가득했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침대엔 캐노피 아래로 화려한 다마스크 천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었고, 연한 장밋빛 커튼으로 반쯤 가려진 창문에도 빠짐없이 정교한 금제 장식이 보였다.
놀랄 만큼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방이었다. 어디로 보나 평범한 손님에게 줄 만한 거처는 아니었다.
“우와…….”
이렇게 화려한 곳을 본 적이 없는 테오르는 신기한 듯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반짝이는 금장식에 손가락을 대보기도 했다.
방 안에는 시중을 들 시녀도 세 명이나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아스텔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도에 갈 때까지 레이디를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스텔은 시녀들에게 짐을 맡기고 테오르와 함께 테라스와 연결된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유리로 된 온실이 있었다.
햇살이 반사된 흐릿한 빛이 온실로 스며들었다. 모자는 따스한 빛이 감도는 유리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단에 피어난 수레국화와 이슬을 머금은 풀잎이 신선한 향내를 풍겼다.
테오르는 화단에 비치는 햇빛을 따라 깡충 뛰어다녔다.
‘즐거워 보이네.’
비록 강제적으로 시작한 여행인 데다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테오르는 못 보던 곳에 온 걸 즐거워하고 있었다.
여태껏 숲속 오두막이나 낡은 저택에서만 살아왔으니 어찌 보면 아이가 신난 게 당연했다.
외조부의 저택은 실시간으로 폐허로 변하는 중이라서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은커녕 뛰어놀 만한 잔디밭도 없었다. 쓸 만한 땅은 아스텔이 전부 채소나 약초밭으로 갈아버린 지 오래였고.
“테오르, 그건 만지면 안 돼.”
테오르가 화단 구석에 피어난 작은 풀에 손을 대려 하자 아스텔이 황급히 붙잡았다.
“라게닌이야.”
목숨이 위험한 풀은 아니었지만 이 풀의 즙이 손에 닿으면 발갛게 발진이 일어난다.
황제의 성이긴 했지만 몇 년에 한 번 방문하는 곳이다 보니 관리가 잘되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숲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희귀한 풀도 있고.
테오르가 갑자기 아스텔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 그 아저씨는 황제야?”
“응?”
“화난 아저씨.”
그 설명에 떠오르는 사람은 카이젠밖에 없었다.
아스텔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새삼 햇살 아래 보이는 아이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테오르는 어린 시절의 카이젠을 많이 닮았다. 아직 그걸 알아챈 사람은 없어서 다행인 것 같다만…….
물론 이곳에서 만난 마리안이나 벨리안 같은 사람은 어린 시절의 카이젠을 못 봤으니까 알아보지 못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도에 가서 카이젠을 어릴 때부터 봐온 사람을 만나면…….
아스텔은 마음속에 솟아나는 불길함을 억지로 눌러 없앴다. 수도에 가기 전에 할아버님을 만나서 돌려보내면 된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래, 그분이 황제 폐하셔. 예전에 말해준 적 있잖니. 제국의 주인이지.”
“그렇구나.”
쉽게 납득하는 아이의 천진한 모습에 아스텔은 가슴이 조금 쓰렸다.
테오르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했다.
“황제는 나쁜 사람이야?”
“그게 무슨 소리니?”
아스텔은 놀라서 미간을 찌푸렸지만 테오르는 천진난만하게 조잘거렸다.
“황제가 할아버지의 땅을 가져갔대.”
“누가 그런 소리를 했어?”
“백작 할아버지가.”
‘아아.’
늙은 멜포드 백작은 외조부의 오랜 친구로, 외조부의 저택을 방문하는 거의 유일한 손님이었다. 비슷한 몰락 귀족 신세기도 했고.
그분은 왜 어린애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하시나 몰라.
“아니야. 그건 다른 황제 폐하야. 그리고 그런 얘기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 절대로 안 돼. 황제 폐하는 제일 높은 사람이니까. 폐하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면 안 되고, 무슨 일이든 폐하의 말에 복종해야 하는 거야. 알겠지?”
“으응.”
테오르는 아스텔이 하는 말을 열심히 듣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테오르, 아직은 엄마라고 부르면 안 돼.”
“아직도?”
“응. 우리 집에 돌아갈 때까지는 안 돼. 계속 연극을 하는 거야. 잘할 수 있지?”
테오르는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방긋 웃었다.
“응! 잘할 수 있어!”
아스텔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아이가 가끔 실수로 엄마라고 해도 괜찮다.
외조부님의 친구인 그 늙은 멜포드 백작이 처음 저택에 방문했을 때도, 테오르가 실수로 아스텔을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아스텔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놀라는 노백작에게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테오르는 친엄마를 본 적이 없어서 저렇게 가끔씩 저를 엄마라고 불러요.’
‘저런…… 가엾은 것…….’
멜포드 백작은 안쓰러운 눈길로 아이를 보며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늘 곁에서 돌봐주는 사람이니까 아이에게는 친엄마나 다름없겠지.’
노백작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일주일 동안 외조부의 저택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내 손녀지만 정말 대단하다.’
외조부는 아스텔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며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테오르는 아직 5살이었다. 어지간한 일은 아이의 실수나 장난으로 넘길 수 있었다. 아스텔만 당황하지 않으면.
애초에 테오르가 카이젠의 자식일 거라고 의심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이 부부로 지낸 건 단 하룻밤뿐이었고 다음 날 곧장 이혼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둘이 첫날밤도 치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오죽하면 아스텔이 임신한 몸으로 외할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당황하며 그렇게 물으셨을까.
황제의 아이라고 하자 엄청나게 분노하셨지…….
아스텔은 테오르가 엄마 소리를 해도 의심받지 않고 넘어갈 자신이 있었다. 눈 색만 들키지 않는다면.
아스텔은 품 안에 숨겨놓은 약병에 손을 댔다. 들키지 않으려면 시간 맞춰서 하루에 두 번씩 꼭 이 약을 넣어줘야만 했다. 한 번은 새벽에, 그다음은 저녁 무렵에.
이 갑작스러운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 * *
저녁이 되기 전 정원을 둘러보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 앞에 당도해서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안에서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렸다.
“진짜 전 황후야?”
“그렇대. 공작 딸이라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초라하지? 짐 가져온 거 봤어? 제대로 된 옷 한 벌 없던데?”
낮에 배정받은 시녀들의 목소리였다.
“왜 다시 나타난 걸까? 설마 이제 와서 폐하를 꼬드겨 보려고……?”
“설마. 저렇게 차리고 와서?”
문안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시 멈칫했던 아스텔은 그대로 손잡이를 돌려서 문을 열었다.
달칵.
문이 열리자 방 안에서 떠들던 시녀들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레, 레이디.”
시녀들은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로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옆에서 테오르가 시녀들과 아스텔을 번갈아 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테오르는 방금 들은 게 무슨 말이며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몰라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스텔은 하얗게 질린 시녀들을 향해 담담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할 얘기 다 했으면 아이를 씻길 준비를 해주겠어?”
시녀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더니 황급히 사라졌다. 그녀들이 부산하게 움직이자 욕실엔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온수가 준비되었다.
아스텔은 따뜻한 물에 테오르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왜 그러니?”
테오르가 불안함을 감지하고 아스텔의 눈치를 살피길래 아스텔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아이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테오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스텔 고모, 화났어?”
“아니.”
아스텔은 테오르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5살은 참 애매한 나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모를 만큼 순진한 나이는 아닌데, 그렇다고 세상의 나쁜 면까지 일일이 알려주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으니.
아스텔은 테오르의 작은 코를 톡 치며 아이의 관심을 돌렸다.
“다 씻고 나면 레빈을 꺼내줄게.”
“응!”
레빈은 테오르가 제일 좋아하는 곰 인형이었다.
아스텔이 직접 낡은 갈색 벨벳 커튼을 뜯어서 만들어준 것이었다. 너무 오래돼서 너덜거리긴 했지만 테오르는 여전히 그 인형을 제일 좋아했다.
레빈을 준다는 말에 테오르는 천진난만하게 기뻐했다. 그 모습에 시녀들도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아스텔은 침실로 아이를 데려가 짐 꾸러미에서 곰 인형을 꺼내 안겨주었다.
그리고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테오르를 침대에 남겨두고 침실에서 연결된 응접실로 돌아왔다.
나란히 모여 선 시녀들을 보며 아스텔은 침착하지만 단호하게 명령했다.
“시녀장에게 가서 너희가 한 말을 그대로 말해주고 내게 새 시녀를 보내달라고 해.”
얼빠진 낯으로 이야기를 듣던 시녀들이 새파랗게 질려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레, 레이디…… 저, 저희는 그게…….”
시녀들은 뒤늦게 질겁해서 바들바들 떨었다.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니까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던 모양이지.
“내가 너희를 곧바로 처벌하지 않은 건 어린아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야.”
아스텔은 무심한 말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당연히 아이가 보는 앞에서 시녀들에게 화를 내거나 그녀들을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5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험담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해 주는 것도 좋을 게 없었다.
사실 시녀들의 험담 정도야. 혼자만 들은 거였으면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넘어갈 수 없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너희가 다른 데선 무슨 소리를 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아이가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내 험담을 하는 시녀들은 곁에 둘 수 없어. 당장 나가서 시녀장에게 내 말을 전해. 제대로 말했는지 확인해 볼 테니까.”
시녀들은 훌쩍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이런 일을 보고하면 최소한 감봉과 강등을 당하고, 심하면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침실에서는 테오르가 계속 폭신폭신한 곰 인형을 안고 놀고 있었다.
“테오르, 약을 넣을 시간이야.”
아이는 얌전히 얼굴을 들었다. 아스텔은 안주머니에 담아뒀던 약을 꺼내 아이의 눈에 넣어줬다.
“잘했으니 상을 줄게.”
짐 가방에 있는 작은 상자에서 달짝지근한 버터 향을 가득 풍기는 쿠키를 꺼냈다.
동그란 쿠키는 연한 버터색에 끝부분만 살짝 오렌지빛이 돌았다. 마찬가지로 전에 만들어놓았던 건데 아이에게 주려고 가져왔다.
테오르가 인형을 들고 달려왔다.
“쿠키다!”
“저녁 먹기 전이니까 두 개만 먹어.”
“응.”
테오르는 작은 손으로 쿠키를 집어 들고 조금씩 잘라 먹었다.
아스텔도 테오르가 먹는 쿠키를 하나 집었다.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맛이 한가득 느껴졌다. 단맛이 긴장을 조금 풀어주었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스텔은 얼른 응접실 쪽으로 나갔다.
“들어와요.”
벌써 새 시녀들이 온 건가 싶어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중년의 시종이었다.
“아스텔 님이시지요?”
“예. 무슨 일인지…….”
“아, 이쪽으로 가져와라.”
시종의 손짓에 다른 시종들이 커다란 상자를 줄줄이 들고 왔다.
커다란 상자들이 바닥에 놓이고 하나씩 뚜껑이 열렸다.
제일 먼저 나온 건 고급스러운 광택의 화려한 남청색 야회복이었다. 가슴 부분에 장식된 깨알 같은 다이아몬드들이 눈이 부실 정도였다. 회녹색 벨벳으로 된 외출복도 있었다. 그냥 짙은 녹색이 아니라 가을 안개에 가려진 숲처럼 잿빛이 섞인 은은한 회녹색이었다.
제일 화려한 건 하늘색 실크 드레스였다. 가볍고 부드러운 실크였는데, 맑게 갠 하늘을 연상케 하는 밝은 푸른색이었다. 가슴 부분의 보디스에는 진줏빛 실로 꽃문양이 수놓아져 있었고, 풍성한 치마엔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흰색 속치마가 있었다.
전부 수도의 사교계에 입고 나가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것뿐이었다.
그다음부터 열리는 상자엔 보석이 있었다.
깨알같이 작은 다이아몬드가 이어진 목걸이와 물결 모양의 에메랄드 귀걸이. 꽃송이 같은 분홍색 연수정을 줄줄이 늘어뜨린 목걸이에, 커팅된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가 조화된 귀걸이까지.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가득했지만 아스텔은 감동하는 대신 얼굴을 찌푸렸다.
‘새 시녀들인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드레스와 보석을 가져온 시종이 활짝 웃으며 아스텔에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레이디 아스텔 님께 보내신 선물입니다.”
물론 이런 걸 보낼 사람은 황제밖에 없겠지.
그건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저는 필요 없습니다. 다시 가져가세요.”
“……예?”
아스텔은 당황하는 시종에게 다시 한번 거절의 말을 되풀이했다.
“감사하지만 이런 건 받을 수 없다고 전해주세요.”
“저…… 폐하께서 아스텔 님을 저녁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이 옷 중에 한 벌로 갈아입으시고 만찬에 참석하시라는 폐하의 명령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기 싫은 초대로군.’
아스텔은 공손하게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만 아이를 돌봐줘야 해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참석할 수 없으니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일어서서 시종을 똑바로 보며 말을 끝맺었다.
“이렇게 말씀드려 주세요.”
시종은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거절을 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 아이를 돌봐주신다는 말씀은…….”
“아이가 어려서 식사하는 걸 봐줘야 합니다.”
“그, 그냥 시녀들에게 맡기시면…….”
“이곳에 온 지 아직 하루도 안 됐는데요. 그리고 방금 시녀들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는데 새 시녀들은 아직 오지도 않았어요. 지금 당장 시녀들이 온다고 해도 처음 만난 그들에게 그렇게 힘든 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아이의 식성이나 습관을 설명해 줄 시간도 없고요.”
아스텔이 또박또박 나열하는 이유를 들으며 시종은 할 말을 잃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버버거리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시종 앞에서 아스텔은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아이가 아직 어려서 감히 폐하의 만찬석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전해 드리세요. 이 옷들도 다시 가져가시고요.”
* * *
“좋은 소식입니다.”
벨리안의 목소리에 서류를 들여다보던 카이젠이 고개를 들었다.
“레스턴 공작이 드디어 뭔가 수상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얌전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는 거겠지요.”
대귀족들이 정쟁에서 패하고 대부분 사라진 뒤부터 레스턴 공작은 숨 쉬는 것도 조심하면서 살고 있었다.
얼마나 빈틈없이 조심하는지 아무리 찾아도 트집 잡을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다른 공작들은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서 몰락시켰는데, 아직까지도 레스턴 공작만은 없애지 못했다.
적이긴 해도 그 조심스러움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뭐, 그래도 상관없긴 했다.
어차피 공작은 세력을 잃었고, 제국에서 제일 유서 깊은 그의 가문은 서서히 말라죽을 운명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레스턴 공작이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이대로 천천히 몰락해 가느니 뭐라도 해서 상황을 반전시키기로 마음을 바꿨나 보다.
벨리안이 받은 보고서에는 공작의 수상쩍은 움직임이 몇 가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카이젠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시간을 벌어줘야겠군.”
“예,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수도를 오래 비우실수록 그가 열심히 자기 무덤을 파겠죠.”
이참에 마지막으로 남은 공작가도 없애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시종이 돌아와서 벨리안에게 결과를 전했다.
시종의 보고를 받은 벨리안은 복잡하고도 미묘한 표정을 하고 다시 집무실 안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안 좋은 소식입니다.”
카이젠은 여전히 책상에서 서류를 읽고 있었다.
벨리안은 약간 기묘한 감정으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봤다. 사실 벨리안은 이때까지 전 황후를 신경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유언장과 관련된 일은 어쨌든 처리를 해야 하긴 하지만.
뭐, 그렇게 시급하거나 다급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남부 영지가 황실의 소유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두 달씩이나 행방을 알 수 없는 전 황후를 소문나지 않게 천천히 찾은 것도 그래서였다. 다급한 일이었다면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겠지.
벨리안이 알기로 카이젠도 전 황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분명 직접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드레스와 보석을 보냈다니…….’
카이젠을 수년간 지켜본 벨리안으로서는 충격적인 얘기였다.
지난 6년간 카이젠은 특별히 연인을 두지 않았다. 그에겐 측실도 정부도 없었다. 황제의 시선을 끌려는 여자는 많았지만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특히나 여성에게 선물 같은 걸 보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동안은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왜 전 황후한테 선물을 보내고 만찬에 부르신 걸까.
이혼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
벨리안이 생각에 잠긴 채 아무 말도 안 하고 서 있었더니, 가만히 서류를 들여다보던 카이젠이 그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한마디 했다.
“말을 못 할 정도로 안 좋은 소식인 건가?”
“아뇨,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벨리안은 조용히 헛기침을 내뱉고 보고했다.
“아스텔 님께서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돌려보내셨답니다. 그리고 아이를 돌봐야 해서 만찬에도 못 오신다고 하셨답니다.”
서류를 넘기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카이젠은 성에 도착했을 때 아스텔이 마리안과 뭔가를 얘기하는 걸 얼핏 봤다.
아스텔의 행색은 처음에도 경악스러웠지만 마리안과 마주 서자 더 심각해 보였다.
사교계의 귀부인은 일상용 드레스와 무도회 드레스, 외출용 드레스, 여행용 드레스, 그리고 사냥용 드레스를 전부 따로 가지고 있었고, 종류별로 유행도 전혀 달랐다.
그런 귀부인들만 보면서 살아온 카이젠에게 아스텔의 옷은 거지의 행색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수도에 가려면 제대로 된 옷이 필요할 것 같아서 당장 구할 수 있는 것들만 보내주라고 했었다. 설마하니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선물을 가져간 시종을 불러와.”
선물을 들고 갔던 중년의 시종이 방 안으로 들어와서 아스텔이 한 말을 전해주었다.
“예. 아이가 어려서 식사하는 걸 봐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녀들에게 맡기시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처음 만난 시녀들에게 그렇게 힘든 일을 맡길 수는 없으시다며……. 아이의 식성이나 습관을 설명해 줄 시간도 없으시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한쪽에서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이 상황을 관찰하던 벨리안은 전 황후의 말에 수긍했다.
아이는 대여섯 살쯤 된 것 같았는데 그런 애를 혼자 방 안에 놔두고 오는 건 좀 그랬다.
오래전부터 곁에서 아이를 돌보던 유모나 시녀가 있으면 괜찮겠지만, 처음 본 시녀들에게 애를 맡겨두는 건 무리한 일이었다. 평범한 귀족들도 고용한 지 한 시간도 안 된 시녀에게 아이를 맡기고 외출하진 않는다.
지극히 상식적인 소리였지만 불행히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 그래서 아스텔 님께서는 참석하실 수 없어 죄송하다며 폐하께 양해를 구하셨…….”
거기까지 말했을 때, 시종은 황제의 붉은 눈 안에 진정한 분노가 감도는 걸 볼 수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없이 서류를 노려보는 황제 앞에서 시종은 초조한 기분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거운 정적 속에 몇 초가 부질없이 지나간 뒤에야, 카이젠이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내뱉었다.
“그럼 애를 데려오라고 해라.”
* * *
마에른 성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만찬장은 나름대로 화려했다.
바닥엔 우아한 카펫이 깔렸고 화려한 식탁보가 덮인 테이블엔 은제 식기와 촛대, 그리고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화병이 놓여 있었다.
아스텔의 옆자리에 앉은 테오르가 꼼지락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찬장에 오기 전까지 계속 신신당부를 했더니 얌전히 앉아 있긴 했지만 지켜보는 그녀는 불안했다.
테오르는 원래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에 참석할 나이는 절대 아니었다. 대귀족 자제들도 7, 8살은 넘어야 손님들 앞에 나온다.
아이를 위해 높은 의자까지 마련해 주었지만 아스텔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이해할 수가 없네…….’
* * *
선물이라고 옷과 보석을 보냈을 때도 놀랐지만 다시 돌아온 명령은 더 가관이었다.
“반드시 참석하시라는 폐하의 명령입니다.”
아니, 대체 왜?
그냥 방 안에서 애한테 저녁을 먹이고 아스텔 자신도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싶을 뿐인데, 왜 강제로 만찬에 나오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이제는 아이까지 데리고?
하지만 이번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하면 강제로 끌고 오라는 명령이 있었다며 기사단장인 린든 경이 난처한 표정으로 사정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에 린든 경을 보내셨죠?”
“그건…….”
린든 경이 멍한 얼굴로 말끝을 흘렸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길에서 같이 얘기 좀 했다고 친하다 생각한 건가 싶었다.
이럴 때는 친한 사람을 보내서 설득하는 게 좋은데 이곳에 아스텔과 친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강제로 불러내는 걸까? 선물을 거절했다고 앙갚음하는 건가?
그답지 않은 치졸한 짓이었다.
아스텔은 어쩔 수 없이 가진 것 중에서 제일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만찬에 나갔다.
그래 봤자 평범한 녹색 목면 드레스였다. 테오르에게도 최대한 깔끔한 옷을 입히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이런 데 데려올 만한 정식 예복은 아니었다.
물론 어린아이를 위한 정식 예복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만.
테오르는 폭신폭신한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아스텔을 올려다봤다.
“레빈을 데려가도 돼?”
“그래. 대신 식사 때는 옆에 놔야 해.”
아이가 긴장하고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곰 인형을 들고 오게 해줬다. 낡은 헝겊으로 만든 인형은 아이의 옆에 있는 빈 의자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렇게 강제로 불러놓을 땐 언제고 황제는 정작 특별한 말 한마디 없었다.
자리에 앉은 네 명의 어른, 황제와 아스텔, 벨리안과 마리안은 그저 순서대로 나오는 음식만 먹었다. 테이블에는 예의상 몇 마디 대화가 오갔지만 아스텔은 참여하지 않았다.
“정말 맛있어요.”
맞은편에 앉은 마리안이 음식 맛에 감탄했다.
메인 디시로 나온 사슴 고기는 굉장히 담백했다. 기름기가 전혀 없는데도 부드러웠다. 잘 구워진 고기 위에 뿌린 달고 향긋한 라즈베리 소스가 풍미를 더했다. 담백한 고기 맛에 감칠맛 나는 달콤한 소스가 어우러졌다. 한 입 먹을 때마다 맛있는 사슴 고기가 고소한 육즙과 함께 혀끝에 감겼다.
아스텔은 테오르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다행히 테오르는 얌전하게 앉아서 자기 몫의 음식을 조용히 먹었다.
“재작년의 사냥 대회가 생각나네요. 역대 최고의 사냥 대회였죠. 사슴을 백 마리도 넘게 잡았으니까요. 그때 제가 가을의 여왕으로 뽑혔고요.”
가을마다 하는 사냥 대회에서는 마지막 행사로 미혼의 레이디 중에서 가을의 여왕을 뽑는다.
가을철의 가장 큰 사교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자랑을 늘어놓던 마리안이 아스텔을 힐끔거렸다.
“아스텔 님은 수도에 안 계셔서 모르시겠네요. 동부의 시골에 계셨다면서요?”
“예. 동쪽 끝에 있었죠.”
“사냥 대회를 못 보셔서 아쉽네요. 그런 대단한 축제는 보기 힘드실 텐데. 저는 언제나 사냥 대회가 좋았어요. 정말 즐겁잖아요.”
아스텔은 성년이 될 때까지 매년 사냥 대회의 주빈 자리를 차지했다. 거의 7, 8살 때부터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8살 때 코르셋을 착용하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주빈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너무 숨이 막히고 답답해서 제발 행사가 끝나기만을 빌다가 울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나중에 공작가로 돌아가 공적인 자리에서 징징거렸다며 매를 맞았다.
이쪽은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데 저 아가씨에게는 즐거운 기억만 있다니.
‘사람의 취향은 정말 다르구나.’
아스텔은 신기해서 마리안을 잠시 뻔히 쳐다봤다.
그때 상석에 앉은 카이젠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17살 때는 사냥 대회가 더 성대했지.”
순식간에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별생각 없이 음식을 먹던 벨리안까지 멈칫하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자기한테 직접 물어보기 전에는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경고를 들은 테오르만 잘게 잘린 사슴 고기를 하나씩 오물오물 먹었다.
카이젠은 아스텔과 시선을 마주하며 담담하게 물었다.
“기억 안 나는 건가?”
“글쎄요.”
당연히 기억했다.
그해의 사냥 대회는 정말 성대했었다. 카이젠은 훌륭한 황태자답게 뛰어난 사냥 실력을 뽐냈다.
아스텔은 주빈석에 앉아 하루 종일 카이젠을 기다렸다. 그가 돌아와서 아스텔에게 가을의 여왕을 상징하는 화관을 씌워줄 때까지.
그때의 아스텔은 더 이상 8살짜리 어린애가 아니었다. 코르셋 때문에 숨이 차고 꼼짝없이 앉아 있느라 몸이 쑤셔도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전부 참을 수 있었다. 행복한 약혼녀의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는 귀족들과 담소를 나눴다.
카이젠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곧장 황궁으로 돌아가려는 카이젠에게 황제가 화관의 주인을 정해야 한다는 걸 일깨워 주었다. 그는 화관을 집어 바로 옆에 앉은 아스텔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피곤하다며 단상을 내려가더니 황궁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스텔은 그가 사냥하느라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민망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한껏 행복한 듯 웃으며 화관을 머리에 썼다. 행복에 겨운 가을의 여왕으로서 힘들고 피곤한 것도 참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밤에는 혼자 무도회를 주관했다.
다음 날, 카이젠은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그랬다며 아스텔에게 용서를 구했다.
아스텔은 기꺼이 그를 용서했다. 오히려 잠시나마 그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것을 깊이 후회했다.
이제는 먼지만도 못한 기억들이었다.
아스텔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저는 하루 종일 앉아서 대회가 끝나길 기다리느라 지루하고 힘들었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네요.”
아스텔의 무덤덤한 대응에 카이젠은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식탁 위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짧은 침묵 속에 마리안이 토라진 듯 무뚝뚝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저는 그때 일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요.”
아스텔은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당연히 기억 못 하시겠죠. 레이디 마리안께서는 그때 아직 11살 소녀였으니까요.”
딱히 무시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마리안은 모멸감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망해갔다. 상석에 앉은 카이젠도 불쾌한 눈치였고 마리안은 원한 가득한 눈빛으로 아스텔을 쏘아보았다.
벨리안이 처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는 곰이 많았죠. 사냥은 위험해서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숲 쪽으로 한참 들어가면 사냥 별장이 있습니다. 가끔 폐하께서…….”
“곰이 있어요?”
어른들이 말하는 걸 듣기만 하던 테오르가 곰이라는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스텔이 말리기도 전에 벨리안이 흥미로운 눈길을 주며 대답했다.
“그래. 이 근처에 꽤 있어.”
“보고 싶다.”
“테오르.”
아스텔이 가만히 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이가 귀여운지 벨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보여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네가 직접 보기엔 너무 위험해서.”
그때 시종 한 명이 만찬장으로 들어와 카이젠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카이젠은 시종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실례하지.”
그는 양해를 구하고 나가 버렸다.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건가.
얼른 식사를 끝내고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황제가 사라지자마자 마리안이 아스텔에게 화살을 겨눴다.
“아이가 이렇게 귀여운데 제대로 예의를 배우지 못해서 안타깝네요.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원래 부모님이 엄하게 훈육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다 버릇없이 자라거든요. 친척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죠.”
마리안의 가시 돋친 말에 벨리안이 황급히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끼어들었다.
“저 나이에 저 정도면 굉장히 잘 배웠는데요? 제 유모의 증언에 따르면 저는 저 나이에 손으로 막 집어 먹고…….”
“이 애는 부모님이 둘 다 없으니 어쩔 수 없겠죠. 원래 부모가 하나라도 없으면 애들은 티가 나서-”
마리안은 벨리안의 말을 자르며 조롱을 이어갔다.
그녀는 테오르가 아니라 아스텔을 공격하고 있었다. 아스텔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편부 슬하에서 자랐으니까.
하지만 아스텔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럽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레이디 마리안의 부모님은 굉장히 보기 드물게 관대한 분들이셨나 봐요. 그렇게 다정하신 부모님을 두셨다니 부럽습니다.”
“쿨럭-”
아스텔의 말에 맞은편에서 물을 마시던 벨리안이 황급히 입을 가리고 사레들린 듯 기침을 했다.
그녀의 말은 그러는 너희 부모님은 아이를 너무 혼내지 않고 오냐오냐하셔서 네가 그렇게 버릇이 없냐는, 아주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벨리안은 입을 가리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조롱당했다는 걸 깨달은 마리안의 하얀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내가 버릇없다는 건가요?”
“설마요. 후작님 내외분을 칭찬한 건데요.”
여전히 몹시 예의 바르고 정중한 말투였지만, 누가 들어도 확실한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아스텔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와인 잔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잊으셨나요? 폐하께서도 어린 시절에 모후를 잃으셨답니다.”
카이젠도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다. 카이젠의 어머니인 선대 황후는 몸이 약해서 몇 년간 병석에 누워 있다가 죽었다.
이 어린 아가씨는 그걸 잠시 잊은 모양이지만.
카이젠과 마찬가지로 어머니 없이 자란 어린 아스텔은 그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비슷한 처지기에 그의 슬픔에 깊이 공감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마리안은 아연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아…… 나, 나는 그게 아니라…….”
벨리안이 끼어들어 상황을 수습했다.
“폐하께서는 늦으시는 것 같은데, 그냥 디저트를 들이라고 할까요? 작은 도련님은 어때? 디저트를 먹고 싶니?”
“먹고 싶어요!”
곧이어 디저트로 준비된 멜론 셔벗이 들어왔다.
아스텔은 아이가 셔벗을 떠먹는 걸 지켜본 뒤 가볍게 스푼을 들었다. 별로 좋아하는 디저트는 아니라서 몇 번 맛보다가 스푼을 내려놓고, 함께 나온 셰리주를 조금 마셨다.
반대편에 앉은 벨리안은 내심 감탄하며 아스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텔의 자세부터 손짓 하나하나까지 차분하고 우아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시녀만도 못했지만 그런 평범한 드레스를 입고서도 저분은 충분히 황후 같았다.
공작의 교육 덕분인가. 굉장히 엄격하게 교육받았다는 말은 들었다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스텔에겐 어느 정도 타고난 기품이 있었다.
벨리안이 보기에 황제는 전 황후님을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아버지가 반역을 꾀하고 있고, 황제는 그를 죽이려 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기묘한 상황이었다.
“자, 이제 그만 침실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군요. 폐하께서는 돌아오실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황제가 돌아오지 않자 벨리안은 만찬을 끝내고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마리안은 인사도 없이 가버렸고 아스텔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테오르를 안고 침실로 돌아왔다.
눈이 반쯤 감긴 채 아스텔에게 안겨 있던 테오르가 황급히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앗…… 레빈을 두고 왔어.”
“이런.”
옆자리에 놓은 걸 깜빡했다.
아스텔은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다시 만찬장으로 돌아왔다.
자리를 정리하던 시종에게서 인형을 건네받아 복도로 나왔다.
불이 꺼진 성의 복도는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낮에는 화려하게 빛나던 금장식과 조각상들이 조용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한쪽 벽을 차지한 유리창이 복도 안에 신비로운 은빛을 뿌렸다.
아스텔은 석상의 그림자를 밟으며 침실을 향해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반대쪽에서 촛대를 든 시종이 나타났다. 아스텔은 그 뒤에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카이젠이 시종을 앞세운 채 걸어오고 있었다.
“침실로 돌아가는 건가?”
“예. 아이가 장난감을 놓고 와서요. 다시 내려갔다가 왔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는 황제는 낮에 본 모습과 달랐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낮에 만난 황제가 기품 있고 위엄 있는 군주였다면, 한밤중에 만난 그는 그늘 속에 몸을 숨긴 맹수 같았다. 당당하고 위압적이면서도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카이젠은 아스텔이 입은 특징 없는 녹색 드레스를 보고 있었다. 모양 좋은 미간에 잠시 주름이 지는 게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내가 주는 건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은 건가?”
아스텔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필요 없어서 거절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 생각이 비약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럴 리가요. 방금 전까지 폐하께서 내주신 음식을 먹었는데요.”
“말장난을 하자는 게 아냐.”
짙은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화를 내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 내가 원망스럽겠지.”
이혼하고 처음 1, 2년간은 그런 마음도 있었다. 이 남자를 원망하는 마음이.
어차피 이혼할 생각이었으면서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까지 보낸 남자에게 그럼 어떤 감정을 가질 줄 알았던 걸까.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런 마음도 사그라들었다. 그냥 이 남자에 대한 감정이 다 말라 버린 기분이었다. 이제는 사랑이든 미움이든 다 시들어서 먼지가 되었다.
아스텔은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아뇨. 저는 이제 폐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폐하께는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 폐하께서도 제게 따로 신경 써주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이 남자가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그냥 더 이상 가깝게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뿐이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이 갑작스러운 일을 마무리하고 최대한 빨리 이 남자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선물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제 그런 화려한 옷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폐하께 부탁드린 건 할아버님의 연금을 돌려주시는 것과 저희를 보내 달라는 것뿐이었어요. 그 두 가지를 제외한 다른 선물은 필요 없습니다.”
아스텔은 빈틈없이 우아한 커트시(무릎을 살짝 굽히고 허리를 숙이는 여성의 절)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이만 물러갑니다.”
카이젠은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아스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잠시 뒤 황제를 찾기 위해 복도로 나온 벨리안이 그에게 다가왔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카이젠은 손짓으로 시종을 물리고 벨리안에게 말했다.
“레스턴 공작이 시에테 백작에게 접근했다는군. 백작이 직접 내게 사람을 보내 알려왔다.”
“이런, 본격적이군요.”
서부에 비옥한 땅을 가진 시에테 백작은 대귀족파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황제 쪽으로 넘어와 있었다.
‘일이 잘되고 있군.’
태평하게 생각하던 벨리안은 카이젠의 붉은 눈에 스친 복잡한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사라졌지만, 장담컨대 그건 단 한 번도 이 젊은 황제에게서 발견된 적 없는 감정이었다.
벨리안은 망연히 눈을 깜빡였다.
‘이거 참, 상황이 정말 기묘하게 돌아가는군.’
* * *
금은으로 장식된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마리안은 머리를 빗기는 시녀를 내보냈다.
“필요 없어. 나가.”
주인의 불쾌함을 눈치챈 시녀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손질하던 벌꿀색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길게 쏟아졌다. 마리안은 모양 좋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거울을 들여다봤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진청색 눈, 붉은 입술, 진주보다 맑고 깨끗한 피부.
벌꿀색 금발은 황금을 녹여서 만든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냈다.
마리안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수도 안에서 손꼽히는 미녀였다. 하지만 황제는 마리안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먼저 말을 걸어주지도 않았다.
그래도 마리안은 나름대로 만족했다. 황제는 다른 귀족 영애들을 아예 대놓고 귀찮아했으니까. 적어도 황제는 마리안이 말을 걸면 받아주긴 했다. 순행에 따라오는 것도 다른 영애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는 왜 그렇게 관심을 보이시는 걸까.’
황제는 쫓겨난 전 황후에게 이상할 만큼 관심을 보였다. 만찬에 직접 초대하질 않나. 시종에게 드레스와 보석을 들려 보내질 않나. 그나마도 그 여자가 거절하는 걸 억지로 만찬에 불러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크로이첸 후작은 순행하는 동안 황제 폐하의 마음을 잡아놓으라고 마리안을 이곳에 보냈다.
폐하가 처음 보는 시골 귀족의 딸에게 신선함을 느끼고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 수도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마음을 잡아둬야 한다.
그게 아버지의 당부였다.
그런데 정작 황제의 관심을 끈 건 낯선 시골 여자가 아니라 행방이 묘연하던 전 황후였다.
처음에는 태황태후의 유언장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안심했다. 그런 이유라면 황제가 직접 데려올 만도 했으니까. 하지만 선물을 잔뜩 보내고 강제로 만찬 자리에 끌어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답지 않았다.
유언 때문에 그 여자의 호감을 살 필요가 있다고 해도 황제는 그렇게 환심을 사려고 뭔가를 보내고 할 성격이 아니었다. 반항하면 차라리 협박하시겠지.
게다가 만찬에서 그 여자를 바라보는 폐하의 시선은…… 정말 놀라웠다.
마리안은 철들기 전부터 사교계에서 연인 간에 오가는 눈빛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녀가 보기에 이건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마리안은 줄을 당겨서 시녀를 불렀다.
“여기 시녀장을 불러와.”
* * *
오후에 접어들자 파르스름한 하늘이 물안개가 낀 것처럼 연한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선선한 바람이 정원의 푸른 잎사귀를 스쳐 갔다. 아스텔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유리창 너머로 하늘을 바라봤다.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돌담 뒤로 흐릿한 하늘이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와 맞닿아 있었다.
당장에라도 비가 쏟아질 분위기였다.
아스텔은 화장대 앞에 앉아 서랍 속에 넣어둔 상자를 꺼냈다.
테두리를 금빛 꽃 덤불로 장식한 작은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안에는 크고 작은 약병이 가득했다. 언뜻 보기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유일하게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경첩에 붙여놨던 실의 한쪽이 떨어져 있었다.
“…….”
아스텔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약상자의 경첩에 투명해 보일 정도로 가는 실을 붙여놓았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열어보는지 감시하는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누가 열어봤군.’
누구일까. 새 시녀 중 한 명인 건 분명한데.
아스텔이 원한 대로 어제 아침, 새로 온 시녀들이 찾아와서 인사를 했다. 지난번 일로 시녀장이 신경을 써줬는지 예전보다 차분하고 침착해 보이는 시녀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감시자가 딸려온 모양이네.’
뭐, 열어봐도 큰 상관은 없었다. 눈 색을 바꾸는 약은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으니까.
약상자 안에는 간단한 상비약과 말린 약초가 조금 들어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수상한 약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열어보기만 한다면…… 말이지.
최악은 이 안에서 뭘 훔쳐가는 게 아니고 안에다 뭔가를 슬쩍 넣어놓는 것이다.
“음…….”
이 상자는 아스텔이 공녀로 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으로, 그리 값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뚜껑을 여는 부분의 잠금쇠가 나비 모양으로 무척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비의 날개 부분에 걸리는 고리는 맨손으로 열지 않으면 쉽게 열 수 없을 만큼 작고 세밀했다.
아스텔은 그 철사 같은 고리를 한참 눈여겨보다가 상자를 닫고 다시 서랍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서랍을 아주 조금 열어두었다.
* * *
“날씨가 좋지 않아서요.”
벨리안은 아스텔에게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물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보시다시피 비가 잔뜩 올 것 같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말로는 날씨가 이러면 얼마 안 가서 폭풍우가 온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안전을 위해서는 당분간 기다리는 게 좋겠죠. 그리고…… 레이디 마리안께서도 격심한 두통이 생기셔서 날씨가 좋아도 출발할 수가 없으시다는군요.”
벨리안은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서 부탁했다.
“그래서 날이 개고 레이디 마리안께서 다 나으실 때까지 이곳에 머물 예정입니다. 답답하시더라도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원래는 이곳에서 하루 정도만 머물고 곧바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어제 아침에는 아무 얘기도 없이 대기하라고만 하더니 이제야 이유를 설명해 준다.
아스텔은 다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사실은 하나도 안 괜찮다.
왜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건지 짜증 나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외조부님이 계신 성까지만이라도 가고 싶었는데. 그래야 테오르를 할아버님께 들려서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데.
모르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겨서 집으로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로 할아버님을 불러달라고 우길 수도 없다.
할아버님이 계신 곳은 여기서 며칠 거리밖에 안 되는 거리.
며칠만 가면 만날 수 있을 테니 기다리라고 하면 무슨 이유를 대야 하지?
아스텔은 침착한 미소를 지은 채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했다. 짧은 고민 끝에 생각을 정리한 아스텔이 벨리안에게 부탁했다.
“저…… 괜찮으시다면 덴츠 성에 계신 외할아버님께 편지를 써도 될까요? 저희를 많이 걱정하고 계실 것 같아서요.”
“아, 물론입니다. 편지를 주시면 당장 보내 드리겠습니다.”
* * *
그렇게 다짐을 받은 게 오늘 아침이었다.
아스텔은 온실에 나와 테오르를 화단 근처에서 놀게 하고 편지를 썼다. 밖에는 어느새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소리가 온실의 유리를 두드렸다. 유리 벽 너머로 물총새의 날개를 닮은 부드러운 자색 꽃잎 위에 물방울이 내려앉았다. 정원에 깔린 잔디가 빗물에 촉촉이 젖어 들었다.
테오르는 유리 벽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구경하며 놀고 있었다.
잠시 뒤에 벨리안이 아스텔을 만나러 왔다.
“편지를 다 쓰셨나요?”
“예. 방금 다 썼어요.”
아스텔이 다 쓴 편지지를 접어서 봉투에 넣는 걸 보고 벨리안은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지만 읽어봐도 될까요?”
“예?”
“아, 죄송합니다. 아스텔 님을 못 믿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 폐하께서 이곳에 계시니까요. 폐하께서 계신 곳에선 주고받는 편지를 확인하는 게 관례라서요.”
아스텔이 깜짝 놀라는 걸 보고 벨리안은 송구스러워하며 사과했다.
‘관례는 무슨. 내가 이상한 소리를 썼나 확인하려는 거겠지.’
도망갔다가 잡혀 온 데다, 빈말로라도 황제한테 감정이 좋을 만한 위치가 아니니까. 그리고 아스텔은 어쨌든 황제와 적대하고 있는 가문의 딸이었다. 믿음이 가지 않을 만도 했다.
아스텔은 속마음을 숨기고 다 이해한다는 듯이 편지를 건네주었다.
“괜찮아요. 읽어보셔도 돼요.”
누가 읽어보든 상관없다. 어차피 누군가가 읽어봐도 의심하지 않게 써놨으니까.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벨리안은 두 손으로 공손히 편지를 받아서 찬찬히 읽었다.
편지는 한 장뿐이었다.
짤막한 글에는 황제와 만나서 사정을 들었다는 것과 지금 그쪽으로 가는 중인데 날씨가 좋지 않아서 지체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다음에는 아이는 잘 있다는 말과 함께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얼마 전에도 두통으로 많이 힘들어하셨는데 낯선 곳에 계시느라 병이 악화되셨을까 봐 걱정이 들어요.
저희는 잘 지내고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시고 건강을 조심하세요.]
“저런, 후작님께서 편찮으십니까?”
“가끔 몸이 안 좋으세요. 아무래도 연세가 많으시니까요.”
편지를 끝까지 다 읽은 벨리안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
“특별한 얘기는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당장 보내 드리겠습니다.”
“예. 부탁드릴게요.”
아스텔은 할아버지가 편지에 적힌 속뜻을 알아들을 거라고 믿었다.
이곳의 상황을 설명해 주면 아스텔이 뭘 걱정하고 있는지 이해할 것이다.
화단 근처를 돌아다니던 테오르가 벨리안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테오르는 곰 인형을 끌어안은 채 벨리안에게 얌전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작은 도련님이네. 여기서 노는 거 좋아?”
테오르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드는지 하루 이틀 만에 꽤 친해졌다. 젊은 백작님의 하얗고 순진해 보이는 외모 때문인 것 같았다.
벨리안은 다시 인형을 안고 뛰어가는 테오르를 지켜보며 아스텔에게 물었다.
“아이가 어린데 예의가 바르네요. 계속 아스텔 님이 혼자서 돌봐주신 건가요?”
“5년 전 저택에 하인이 없어진 뒤로는 제가 돌봤죠. 할아버님께서 많이 도와주셨고요.”
“두 분께서 아이를 잘 키우셨네요. 훌륭하게 자라겠어요.”
벨리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한평생 고위 귀족으로 살아온 노인과 황후였던 20살짜리 귀족 영애가 돈 한 푼 없이 갓난아기를 키웠다는 얘기였다.
아이를 굶겨 죽이지 않고 저만큼 키운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 와중에 나름대로 가정 교육까지 한 걸 보면 정말 대단했다.
“실례지만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떠났어요. 다른 곳에서 살고 있어요.”
벨리안은 납득했다.
원래 귀족 가문에서 미천한 여자가 낳은 아이를 후계자로 삼을 땐 친모를 떼어놓는다.
그런 경우 대부분 친모는 하녀나 매춘부였으니까.
후계자가 될 아이인데 그런 여자를 곁에 두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이 간다며 돈을 주고 멀리 보내는 것이다.
매정한 일이었지만 이런 경우엔 어느 집안이나 그런 식으로 친모를 처리했다.
아마도 늙은 후작님은 그런 부분에선 아주 완고했겠지. 나이 든 귀족들은 원래 보수적인 법이니까. 덕분에 이 불쌍한 손녀분만 엄청나게 고생을 하시는 것 같네.
벨리안도 카이젠처럼 아스텔의 외조부인 칼렌베르크 후작을 악의 축으로 단정 짓고 속으로 혀를 찼다.
“아, 맞다. 폐하께서 후작님의 연금을 돌려드리라고 명령하셔서 제가 수도에 연락해 놨습니다. 이번 달부터 정상적으로 지급될 겁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아스텔은 진심으로 기뻤다.
처음에 외조부의 저택에 갔을 때는 외할아버지도 나름대로 부유했다.
외조부는 아스텔이 아주 어릴 때 이미 영지를 잃었지만 전공에 대한 연금은 잃지 않았었다. 영지 수입에 비하면 적은 돈이었지만 동부의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아담한 저택에서 하인을 두고 편안하게 살 만큼은 됐다.
그러나 북부에서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외조부의 연금이 끊어지자 할아버지의 생활은 순식간에 곤궁해졌다. 게다가 임신한 아스텔을 숨겨서 돌봐주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더욱 사정이 어려워지기만 했다.
테오르가 태어났을 무렵엔, 결국 세 식구가 동부의 끝자락에 있는 낡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후작님의 연금이 박탈된 건 잘못된 일이었죠. 손자분께서 그 내전에서 폐하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는데요. 행정처에서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사실 그것보다는 그 노인이 레스턴 공작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황제의 행정 관료에게 불이익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벨리안은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어 그냥 실수로 치부했다.
“예. 지금이라도 돌려받게 돼서 다행이에요.”
영지는 무리지만 연금이라도 돌려받으면 생활이 훨씬 나아지겠지. 아스텔은 화단 근처에 있는 테오르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물론 우리 모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 * *
비는 오후가 될 무렵까지 계속 내렸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온실에 잠시 놔두고 방으로 돌아가 화장대를 확인했다. 그리고 린든 경을 찾아갔다.
“린든 경, 잠시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무슨 일이신가요, 레이디?”
아스텔은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함께 방으로 왔다.
그리고 새로 온 시녀 세 명을 불러 모았다.
“다들 잠시 이쪽으로 와주겠어?”
시녀들은 의아한 낯으로 나란히 모여 섰다.
아스텔은 화장대에 있던 약상자를 꺼내놓았다.
“혹시 오늘 이 상자를 열어본 사람이 있어?”
시녀들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중 한 명이 대표로 말했다.
“아뇨, 레이디. 저희는 시중드는 분의 물건을 함부로 열어볼 수 없습니다.”
“그래. 원래는 그렇지.”
청소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게 아니면 시녀는 주인이 서랍 안에 넣어둔 물건을 열어보면 안 된다. 당연한 규칙이었다.
아스텔은 약상자의 금장식을 매만지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누가 이걸 열어본 것 같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던 시녀들이 그 말에 움찔 놀랐다.
시녀들은 한쪽에 서 있는 린든을 힐끔거렸다. 이제야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사실 어제부터 누군가가 이걸 열어봤던데, 범인이 누군지 알 수가 없어서 오늘은 서랍을 조금 열어뒀어. 내가 이걸 꺼내봤다는 걸 범인이 알았으면 했거든. 그러면 뭐가 달라졌나 궁금해서 다시 열어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생각대로 온실에 나가 있는 동안 누군가가 상자를 열어봤다. 서랍은 나가기 전과 똑같았지만, 이번에도 상자의 경첩에 붙여놓은 실이 떨어져 있었다.
석상같이 굳어진 시녀들은 잠자코 아스텔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스텔은 그들의 표정을 주시하며 물었다.
“혹시 내가 없을 때 누가 방문한 적이 있어?”
“아뇨. 없습니다.”
“그럼 너희 중에 짐작 가는 사람은?”
“레이디…… 저희는 오늘 모두 그 방에 들어갔어요.”
이 방은 화려한 데다 침실과 응접실, 사실과 욕실까지 여러 개의 방이 이어진 구조였다.
시녀들은 각자 여기저기 다니면서 청소하고 정리를 하니까 누구 짓인지 특정 짓기 어려웠다.
아스텔은 상자의 나비 모양 잠금쇠로 시선을 내렸다. 작은 고리가 양쪽으로 걸려 있는 잠금쇠는 장갑을 끼고는 어지간해서는 열 수 없을 만큼 아주 가늘고 정교했다.
그리고 시녀는 장갑을 낄 수 없다. 장갑 속에 뭔가를 숨길 수도 있으니까.
“혹시나 해서…….”
아스텔은 손수건을 꺼내 잠금쇠를 닦았다. 반질반질한 금속에서 나비의 색과 구별되지 않는 가루가 묻어 나왔다.
“여기에 라게닌의 즙을 발라놨어.”
아스텔은 누군가가 상자를 열어본다는 걸 깨달은 순간, 온실의 구석에서 발견한 라게닌을 뜯어다가 즙을 내서 잠금쇠에 잔뜩 발라놓았다.
“라게닌은 숲에 나는 희귀한 잡초에 불과하지만 이 즙이 피부에 닿으면 붉은 발진이 생기지. 특히 손가락처럼 민감한 부분은 발진이 금방 생겨. 대단한 건 아니라서 치료할 정도는 아니지만 쉽게 사라지지도 않거든. 가렵기도 할 거고. 그러니까.”
아스텔은 굳어진 얼굴로 나란히 서 있는 시녀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명령했다.
“다들 손을 내놔봐.”
아스텔의 명령에 방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쪽에 서 있는 린든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얗게 질려 있던 시녀들이 천천히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첫 번째 시녀의 손은 이상이 없었다. 두 번째 시녀의 손도 구석구석 하얗고 말끔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스스럼없이 손을 보여준 반면, 마지막 남은 시녀는 쉽게 손을 보여주지 못했다. 세 번째 시녀는 자신의 두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바들바들 떨었다.
“아…… 저, 저는…….”
모두의 시선이 그 시녀의 손에 집중되었다.
작고 하얀 손바닥의 가운데 부분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검지와 이어진 부분에 붉은 가루를 뿌린 것처럼 점점이 새빨간 발진이 돋아 있었다. 그 위로 이어진 검지 끝과 엄지의 안쪽은 완전히 붉은색이었다.
잠금쇠를 열 때는 엄지와 검지를 사용했을 테지. 그리고 손을 씻기 전에 주먹을 쥐어서 손가락 끝이 닿는 부분에도 발진이 생겨났으리라.
자기 손을 들여다보던 시녀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스텔을 쳐다봤다.
“레, 레이디, 저는…….”
“누가 시켰는지 말해.”
아스텔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시녀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굳었다.
시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지만 쉽게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하긴 이런 일을 시키려면 협박도 하고 회유도 했겠지.
아스텔은 시녀를 똑바로 주시하며 담담하게 선언했다.
“누가 시켰는지 말하지 않으면 네가 도둑질을 하려고 했거나 심한 경우엔 날 독살하려고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
“아, 아니에요…… 저는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아스텔이 내민 담담한 협박에 시녀는 사색이 되어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요즘은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황궁에서 도둑질을 하다 잡히면 손목을 잘랐다. 여기가 황궁은 아니지만 황제가 머무는 곳이니 비슷한 처벌이 적용될 수도 있었다.
독살 미수는 어디서나 당연히 사형감이었고.
아스텔은 새파랗게 질려서 떨고 있는 시녀를 보다가 린든에게 짤막하게 부탁했다.
“린든 경, 이 시녀를 끌어내 주세요.”
린든이 기사를 부르기 위해 문을 열자 시녀는 기절할 것처럼 놀라며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아, 아니에요……. 말씀드릴게요, 말씀드릴게요……!”
무릎 꿇고 빌던 시녀가 뒤늦게 고개를 들고 자백했다.
시녀의 입에서 이미 충분히 짐작했던 이름이 나왔다.
“……레이디 마리안께서 시키셨어요.”
아스텔이 할 일은 거기까지였다.
린든은 기사를 불러서 범인인 시녀를 끌고 갔다. 자세한 정황은 그들이 알아서 밝혀낼 것이다.
아스텔은 온실에 남겨두었던 테오르를 데려다가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기 전에 테오르가 곰 인형을 들고 왔다.
“레빈도 목욕시켜도 돼?”
그러면 안 된다고 하려고 했지만, 아스텔은 꼬질꼬질하게 때가 탄 갈색 곰 인형을 보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참에 좀…… 빨아놓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테오르는 욕조 안에서 낡은 곰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목욕을 끝내고 아이를 침실에 데려가서 눈에 약을 넣어주고 난 다음이었다. 황제의 시종이 아스텔을 데리러 왔다.
“아스텔 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스텔은 테오르를 남은 시녀들에게 맡겨놓고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방문을 닫고 복도로 나오자 늦은 오후의 싸늘한 한기가 와 닿았다.
이 성은 구식 성이었지만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복도엔 회색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이 길게 이어졌고 군데군데 금사를 엮어 짠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아스텔은 황제의 집무실로 향하는 성의 복도를 걸어갔다. 아치형의 창문 너머로 아직도 연한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비는 대체 언제쯤 끝나는 걸까.
암담한 기분을 느끼며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문 앞을 지키던 기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모함이에요!”
집무실의 중심에 서 있던 마리안은 아스텔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소리쳤다.
“저분이 저를 모함하는 거예요! 틀림없어요! 자기 시녀를 시켜서 제게 누명을 씌우는 거라고요!”
아스텔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카이젠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 예의 바르게 절을 했다.
카이젠은 책상 너머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벨리안이 서 있었다. 벨리안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굉장히 흥미진진한 눈빛이었다.
카이젠이 린든에게 눈길을 줬다.
린든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알아낸 것을 보고했다.
“범인으로 잡힌 시녀가 마리안 님께 돈을 받았다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마리안 님의 시녀도 돈을 가져다준 걸 자백했습니다.”
거기까지 밝혀졌으면 끝났다고 봐야 했다.
상황이 이쯤 되면 발뺌해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위기를 넘길 방법이 있다고 해도 이 어린 아가씨에겐 상황을 모면할 만한 지혜도 없는 것 같고.
아스텔이 말없이 바라보는 가운데 카이젠은 마리안을 향해 단호하게 물었다.
“이래도 부정할 건가?”
“저, 저는…… 그게…… 흐흑…….”
궁지에 몰린 마리안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섬세한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마리안은 요정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 모습에 동정을 표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불쌍하게 봐주지 않자 울먹이던 마리안이 다시 아스텔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빛이 쏟아졌다.
“저분이 상자 가득 수상쩍은 약병과 풀을 가져왔다고요! 누가 그렇게 많은 약을 가지고 다녀요?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독약일 수도 있잖아요!”
상자를 뒤졌다는 걸 부정할 수 없게 되자, 반대로 아스텔에게 책임을 돌리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카이젠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질책했다.
“그래서 남의 짐을 뒤져봤다는 건가? 네가 언제부터 이 성의 안전 책임자가 됐지?”
“폐하, 저는 단지 걱정이 돼서…….”
이 변명도 통하지 않자 마리안은 힘없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아스텔을 가리키며 다시 소리쳤다.
“폐하를 수행하려고 찾아온 사람이 약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다니, 어느 모로 봐도 수상하잖아요!”
아스텔은 절대 황제를 수행하러 찾아오지 않았다. 새벽에 아이와 함께 끌려 나온 게 겨우 사나흘 전이었다. 마리안은 진짜 몰라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거였지만.
마리안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스텔에게 향했다. 약이 왜 그렇게 많은지 설명해 보라는 표정들이었다.
“레이디 마리안.”
아스텔은 담담한 눈빛으로 마리안을 직시했다.
“레이디 마리안께선 동생분들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제 말이 맞지요?”
“……예?”
뜬금없는 물음에 마리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저택에 고용된 유모가 레이디 마리안과 어린 동생분들을 위해 항상 서랍장에 약을 준비해 놓고 있지 않던가요? 단순한 감기약이나 배탈약, 상처의 종류에 따라 바르는 여러 가지 연고와 아이가 많이 놀랐을 때 먹이는 안정제도 준비해 놓고 있었을 텐데요.”
아이를 돌보는 유모는 당연히 그 정도 약은 준비해 놓고 일을 한다. 아이들이란 언제나 자주 아프고 다치는 법이니까. 밤이고 낮이고 약이 필요했다.
마리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 마리안은 동생이 두 명이나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유모는 언제나 약이 많았다.
“테오르는 이제 겨우 5살이에요. 자주 감기에 걸려서 감기약도 필요하고. 해열제나 기침약, 두통약, 배탈약도 필요하죠. 혹시 아이가 다치면 상처에 발라줄 연고도 종류별로 필요하고요.”
아스텔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테오르는 얼마 전에도 심한 독감을 앓았습니다. 약제사가 독감의 후유증으로 아이의 체력이 약해졌다며 처방해 준 영양제도 시간 맞춰서 먹이고 있죠. 그 영양제만 해도 세 병이에요.”
뭐,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테오르는 아주 건강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가끔 감기나 몸살을 앓을 때가 있었다.
도피 생활 첫 주에는 낯선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랬는지 테오르는 심한 감기를 앓았다. 아스텔은 그레텔에게 배워놓은 아이를 위한 영양제를 만들어서 가끔 아이에게 먹였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아이가 피곤해질까 봐 걱정스러워서였다.
‘단지 그런 약만 있는 건 아니지만.’
아스텔이 가지고 다니는 약상자에는 그런 상비약만 있는 건 아니었다. 평범한 약이나 약초처럼 보여도 눈 색을 바꾸는 약의 원료가 되는 것들도 섞여 있었다.
물론 하나하나 떼놓고 보면 특별할 게 없는 것들이었다. 눈 색을 바꾸는 약은 독초를 넣는 독한 약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필수 재료들을 담아서 가지고 다니다 보니 상자 안에 담긴 약병의 숫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 때문에 온갖 종류의 약이 필요하다는 아스텔의 주장은 충분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저희 유모도 그랬던 것 같네요. 아이들은 원래 자주 아프죠.”
가만히 듣기만 하던 벨리안이 조용히 아스텔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잠시 말을 멈췄던 아스텔이 담담하면서도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마리안은 그 냉엄한 연녹색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움찔 놀랐다.
“마리안 님은 이미 제 약상자를 살펴보셨으면서, 왜 계속 약상자를 열어보라고 시키신 건가요?”
아스텔이 던진 한마디에 집무실 안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마리안이 창백한 낯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스텔은 마리안을 차분히 주시했다.
이 어린 아가씨와 원수가 돼서 신흥 권세인 크로이첸 가문을 적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자꾸 이것저것 열어 보고 뒤지는 사람을 곁에 둘 수는 없다.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을 숨기고 있는 처지에선 사람을 감시하려 드는 인간이 제일 위험했다.
“약상자를 열어봤을 정도면 제 다른 짐도 다 확인하셨겠지요. 제가 가져온 물건 중에 별로 수상한 게 없다는 걸 충분히 아셨을 텐데 왜 계속 약상자를 열어보고 감시하라고 시키셨나요?”
“그, 그건…….”
마리안은 아스텔의 질문에 더듬거리다가 변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마리안은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함으로써 아스텔의 짐에 수상한 게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본인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하는 모양이었지만.
“레이디 마리안께선 제 약상자에 수상한 게 있나 확인하시려던 게 아니라 기회를 봐서 수상한 약을 그 안에 섞어 넣으려고 하신 게 아닌가요?”
아스텔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약을 많이 쓰고, 어떤 약을 제일 안 쓰는지 유심히 관찰하라고 시키셨겠죠. 제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장 손대지 않는 약에 문제가 될 만한 걸 섞어놓으려고요.”
흔하게 쓰이는 수법이었다.
상대의 물건 중 제일 안 쓰는 물건에 독이나 가짜 밀서를 슬쩍 넣어놓는 것.
자주 쓰는 물건에 넣어놓으면 금세 들킬 수밖에 없으니, 상대가 손대지 않는 소지품이나 서랍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 안에 문제가 될 만한 수상쩍은 물건을 넣어놓고 상대를 고발해서 누명을 씌우면 끝이다.
아스텔은 황제에게 하루 만에 버림받은 폐황후였다.
황제와 함께 오면서 챙긴 약상자에서 독약이라도 나온다면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억울함을 호소해 봤자 이곳에서 아스텔을 편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아가씨는 그게 얼마나 흔한 수법인지 잘 몰랐던 모양이다.
황궁에서는 그런 계략을 방지하기 위해 약상자 같은 민감한 물건을 간직할 땐, 누가 몰래 열지 않는지 감시할 수 있는 자기만의 표식을 붙인다.
“나, 난……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완전히 정곡을 찔린 마리안이 백지처럼 하얗게 질려서 더듬더듬 소리쳤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카이젠에게 매달리려 했다.
“폐, 폐하……! 저를 믿어주세요…….”
카이젠은 마리안을 무시하고 곁에 있는 벨리안에게 물었다.
“이 성의 서쪽엔 감옥이 있었지?”
“예, 그렇습니다. 아주…… 오래된 곳이지만요.”
이 성 자체가 황제가 오지 않는 한 시종 몇 명이서 관리만 하는 곳이다 보니 감옥 같은 곳은 쓰일 일이 별로 없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오랫동안 방치되어 낡고 더러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 수는 있겠지.
카이젠은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마리안을 보며 차갑게 명령했다.
“처분이 결정될 때까지 마리안을 서쪽 감옥에 감금한다.”
“폐하!”
마리안이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애원하려는데 린든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레이디,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한 사과와 달리 그가 손짓하자 기사들이 마리안의 두 팔을 붙잡고 사정없이 거칠게 끌어냈다.
마리안은 패닉에 빠져서 소리를 지르며 질질 끌려갔다. 문이 닫히고서도 마리안의 고함과 비명이 들렸지만 서서히 멀어졌다.
방 안이 조용해지자 카이젠이 아스텔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군. 사과하지.”
카이젠은 몹시 착잡한 모습이었지만 아스텔은 이번 일이 별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에 황태자비로 살 때도 이런 일은 많았다. 10살밖에 안 된 황태자비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귀족은 수없이 많았다.
어린 아가씨들의 질투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아스텔을 함정에 빠뜨려서 황태자비 자리를 빼앗으려고 진지하게 덤비는 대귀족들은 정말로 힘겨웠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단순한 질투는 귀여운 수준이었지.
대부분은 아버지인 공작이 알아서 막아주었지만 가끔은 아스텔 혼자서 힘겹게 함정에서 벗어났었다. 그렇게 몇 번 안 좋은 경험을 한 뒤에는 언제 어디서나 행동을 조심하고 항시 주변을 살피며 살았다.
돌이켜 보니 정말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아슬아슬한 삶이었다.
“괜찮습니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아스텔은 지금이라도 그런 삶에서 벗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하면 다시 테오르와 함께 외할아버지의 저택에서 지내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카이젠이 그답지 않게 미안한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을 거야. 기사들을 보내서 당신을 보호하라고 해두지.”
“아뇨, 폐하. 괜찮습니다. 저는…….”
“쓸데없이 고집부리지 마. 위험한 일이 있었잖아.”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아스텔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린 사람이 누군데.’
아스텔은 짜증을 억누르며 침착하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기사들이 전 황후인 저를 호위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괜히 이목이 집중되는 건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 더 큰 위험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스텔은 이 남자가 제발 아무것도 안 해주길 바랐다.
지금 아스텔에게 제일 위험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카이젠이었다. 사실상 이번 일도 카이젠이 괜히 드레스 같은 걸 보내고 만찬에 불러대서 생긴 일이었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마리안이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덤볐을 리 없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아스텔은 지금 카이젠에게 그 사실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보호는 무슨 보호야.
카이젠도 그걸 못 알아들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하지만 알아듣고 이해한다고 해도, 화가 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 뭐든 당신 마음대로 해.”
고개를 들자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는 진홍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조소와 짜증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아스텔은 카이젠의 불쾌감을 무시한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인사를 건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 * *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가려 했는데 집무실 안에 있던 벨리안이 뒤따라 나왔다.
별 신경 안 쓰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그가 줄레줄레 따라오면서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크로이첸 후작에겐 딸이 세 명 있습니다. 첫째 따님은…… 보시다시피 저 모양입니다만, 둘째 분은 저렇지 않습니다.”
“둘째 분이라면…….”
그게 누구였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크로이첸 가문은 예전엔 별로 대단한 가문이 아니어서 유력한 귀족이 모이는 자리에는 자주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 집안 딸들을 눈여겨볼 기회가 없었다. 어린 딸이 여러 명 있다는 건 기억나는데 이름까지는 외우지 못했다.
아스텔이 기억을 못 하는 걸 보고 벨리안이 이름을 말했다.
“레이디 플로린입니다. 얼마 전에 성년이 되셨죠. 그분이 현재 제일 유력한 황후 후보입니다.”
이름을 들어도 여전히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대충 그런 이름을 가진 조용하고 어린 아가씨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벨리안은 아스텔을 유심히 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크로이첸 후작은 둘째 딸이 성년이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 아가씨를 황후로 만들려고 예전부터 공을 많이 들였다죠.”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스텔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어디나 똑같네요.”
집안의 권력을 위해 딸을 맞춤형 인형으로 키우고 도박 패를 던지듯이 황궁에 던진다. 그렇게 해서 이득을 얻으면 가족 모두가 기뻐하지만, 실패하면 쓸모없어진 딸은 가차 없이 버려진다.
어느 집안이나 똑같구나.
제국의 세력 판도가 바뀌어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저 권력을 가진 가문의 이름이 달라졌을 뿐.
“아무튼, 조심하셨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절대 저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거든요.”
‘뭐, 아스텔 님도 호락호락하게 당할 분인 것 같지는 않지만요.’
벨리안은 뒷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사적으로 만나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전 황후님은 여러모로 만만치 않은 분이었다.
나가라는 말 한마디에 황후가 된 지 하루 만에 짐을 싸서 나간 걸 듣고 겁 많고 소극적인 성격일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쉽게 황후 자리에서 물러났을까?
‘이분도 황제 폐하께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건가.’
하긴 감정이 있었어도 지금은 다 사라졌을 것이다. 첫날밤만 치르고 다음 날 바로 쫓겨났는데. 이건 뭐, 전남편이 아니라 원수나 다를 게 없겠지.
하지만 그건 예정된 일이었다. 벨리안이 아는 한, 카이젠은 오래전부터 황제가 되자마자 레스턴 공작을 숙청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곱씹고 있는데 말없이 서 있던 아스텔이 살짝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크로이첸 가문의 둘째 따님은 언니를 몹시 사랑하시나 보네요.”
“예……?”
“레이디 플로린이 언니분의 일로 앙심을 품을 거라는 뜻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왜 조심해야 하나요?”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들었지만 아스텔은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처럼 딴소리하며 웃었다. 그리고 벙한 표정의 벨리안에게 조곤조곤한 말투로 확고하게 말했다.
“저는 태황태후 전하의 유언장 문제만 해결되면 곧바로 수도를 떠날 겁니다. 새 황후가 되실 분과 저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요. 관련되고 싶지도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