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화
Jingle Jangle Jingle. (2)
그 다음날 아침.
"출발하기로 했던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왜."
어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었을 때 정해놓았던 출발 시간이 되었음에도 아직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에리스는 슬쩍 그 둘이 묶고 있던 방에 노크를 하며 물었다.
"주인님? 베아트리체님? 무슨 일 있어요? 출발하기로 했던 시간. 한참 지난 거 같은데."
노크를 해도, 말을 걸어도, 대답 하나 돌아오지 않자 에리스는 하는 수 없이 문을 열고 안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시간이 지연되는 걸까. 순수한 호기심에 문을 연 그녀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언가였다.
에리스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곧장 아무것도 못 본 체하곤 문을 쾅! 하고 닫았다.
그제야 에리스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지, 단테는 머리를 긁적이며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했던 사실이 괜히 미안해졌는지, 사죄하며 대답했다.
"아. 미안, 에리스. 잠깐... 다른 일로 바빠서. 노크 소리를 못 들었어."
"아. 아뇨아뇨. 괘. 괜찮아요. 두 분 하시던 거 마저 하시면 될 거 같아요. 저. 저는 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네!"
"뭐야? 에리스야?"
그리고 들려오는 베아트리체의 목소리. 평소 전투 시에 보여줬던 냉정 침착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신음과 교성이 반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낄래? 출발 시간이야, 뭐 늦어도 되잖아. 중요한 클라이언트랑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구... 괜찮아. 난 이런 거에는 꽤 개방적이라..."
"돼... 됐거든요! 저. 저는... 그. 그런 플레이는. 너. 너무 허들이 높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튼. 두. 두 분 좋은 시간 보내다 오세요. 그럼 이만 전 가볼게요!"
그야, '부부' 사이니까. 그렇고 그런 걸 하는 게 전혀 이상할 건 없었지만. 갑작스럽게 눈 앞에 그런 광경이 들이밀어지니, 아무래도 관련 경험이 없었던 에리스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굴을 완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방금 본 광경을 잊어버리려는 듯, 에리스는 냅다 호텔의 계단을 내려가 엘리자베스가 있는 주차장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조수석에 틀어박혀 1시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그때서야,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각자 짐을 챙겨서, 엘리자베스를 대놓은 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올라탄 단테는 주머니에서 트럭의 키를 꺼내 시동을 걸고 뒤에 베아트리체가 타자마자,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느긋하게 후진 기어를 박곤 차를 빼기 시작했다.
"이제 네오 쿄토에 볼 일도 없으니까. 후딱 뉴 디에이고 쪽으로 가자. 아, 에리스. 잠깐 내려서 차 잘 빠지고 있는지 확인 좀 해줄래?"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단테를 보고, 에리스는 아직까지 발그레하게 달궈진 열이 올라와있던 뺨의 열기를 빼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방금 본 광경을 잊기 위해, 강아지처럼 고개를 좌우로 마구 젓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에서 뛰어내렸다.
"아... 알겠어요."
"고맙다."
* * *
뉴 디에이고로 가는 길은 상당히 복잡스러웠다. 200년 전, 핵폭탄이 떨어지기 전 시대 기준으로 고속도로만 따라간다는 가정 하에 4시간 정도를 달리면 도착할 수 있었겠지만.
아직까지 핵폭격의 상흔이 도로에 선명하게 남아있던 탓에, 무턱대고 고속도로만 따라 운전대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로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도로에 지뢰가 수십 개가 깔려있는가 하면, 몇몇 고가 도로는 핵폭격에 휘말려버린 나머지, 도저히 트럭으로는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테는 고속도로와 일반 국도를 넘나들며, 상당히 빙 돌아가는 루트로 차를 몰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필요한 방향 지시 같은 경우는, 베아트리체의 사역마인 '까마귀'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도로를 달리며, 단테는 거의 논스톱으로 몇 시간 동안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뉴 디에이고는 어떤 곳인가요?"
네오 쿄토 때에도 그렇듯이, 에리스는 지치지도 않고 운전을 계속하고 있던 단테의 따분함을 덜어주기 위해, 슬쩍 그에게 말을 걸었다.
"뉴 디에이고라... 말로 하긴 어려운 곳인데.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중립 도시라는 점일까."
"중립 도시요?"
"중립 도시라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어. 무법 지대라는 말이 더 어울릴 거 같은데."
뒤에서 발을 쉬게 하기 위함인지, 부츠를 벗고 맨발로 누워있던 베아트리체가 덧붙였다.
"에리스. 현재 황무지를 양분하는 세력은 뭐가 있지?"
"에... 그러니까. 네오 쿄토랑 디바이너. 그리고 유니온이 있겠네요."
"네오 쿄토는 거의 디바이너 아래에 있는 조직이니까. 크게 보자면 디바이너랑 유니온이지. 그리고 뭐... 길 잃은 로그들 정도려나.
거의 대부분의 정착지는 둘 중 하나야. 디바이너 소속이거나, 유니온 소속이거나. 하지만 뉴 디에이고는 조금 달라. 뉴 디에이고는 정치적으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중립'을 유지하고 있어."
"그건 신기하네요. 중립이라는 입장은 그리 오래 살아남기 힘든데 말이죠."
"레이븐즈 로지스틱스의 본사가 거기 있다고 했잖아."
단테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부분 거기 사는 사람들은 보통 두 갈래로 나뉘어. 황무지를 둘러싸고 치고받고 싸우는 디바이너, 유니온. 그 둘 중 어디에도 얽히고 싶지 않은 평화주의자, 혹은 그 두 세력에게 버림받은 자유인들.
네오 쿄토의 로닌들도 그쪽에 많이 거주하고 있어. 달리 갈 곳이 없거든. 이렇게만 보면 좋아 보이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이라는 입장이라는 건 그만큼 불한당들이 많이 꼬이기 마련이야.
다른 도시에 비해서 크고 작은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편이야. 살짝 과격하기는 해도, 유니온과 디바이너는 각각 '와일드 헌트'와 '홀리'라는 정식 군대가 있는 반면. 뉴 디에이고는 그런 건 없거든."
"그럼... 치안은 어떻게 지켜지나요?"
"미닛맨, 이라는 민병대가 있어. 자신들의 땅은 자신들이 지킨다. 디바이너와 유니온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민중의 안전은 곧, 민중의 손으로 지킨다. 그런 거지."
"단테, 근처에 작은 마을을 하나 발견했어. '로도스'라고 하는 거 같은데. 잠깐 쉬었다 가자. 너 너무 오랫동안 운전했어. 다음에는 내가 할게. 여기서 좌회전. 도로가 조금 울퉁불퉁하니까. 조심해."
"응. 잠깐 쉴까."
* * *
"뭔가."
에리스가 로도스에 도착하고 난 뒤 가장 처음으로 받은 인상은 심플했다.
까끌까끌한 모래로 이루어진 땅,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회전초, 200년 전이 아닌, 거의 한 300~400년은 된 듯한 디자인의 가게들, 게시판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현상 수배 공고.
에리스는 순간, 자신이 200년 후의 미래가 아니라 400년 전의 서부 개척 시대의 역사책 안에 빨려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한 분위기를 더한 건, 바로 그녀가 살던 시대 기준으로 거의 쓰이지도 않는 SHERIFF라고 쓰여진 목조 간판의 건물이었다. 경찰도 아니고 '보안관'이라니, 서부 개척 시대의 느낌이 물씬 나는 간판을 보고 에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야, 단테의 말에 따르면 핵이 떨어진 이후로 중앙 행정 기구가 멸망하게 되면서 치안이 개판이 되고 곳곳에 샷건이나 급조된 총기를 들고 정착지를 약탈하는 불한당들이 생기게 되면서. 옛 서부 개척 시대와 같은 환경이 조성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도 모르지만.
설마, '미래 시대'에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에리스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잡화점에서 담배를 사오겠다며 베아트리체가 자리를 떠난 사이에, 단테는 현상 수배지가 붙어있던 보안관 사무소 앞에 다가가 공고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돈벌이가 될 만한 일이 있으려나."
우리 보안관으로서도 손 대기 어려운 흉악한 범죄자를 잡아오면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주겠다.
세계를 주도하는 세력이 하나의 집권 정부가 아닌 디바이너와 유니온, 두 세력으로 나뉜 데다, 그에 따라 치안도 시궁창으로 떨어진 만큼, 이러한 현상 수배가 나타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걸 지도 모른다.
단테가 손가락으로 현상 수배지를 읽어 내려가며 살펴보고 있을 무렵, 이제 막 밥을 먹으려는 지 살롱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두 보안관이 단테를 힐끔 보았다.
로도스 마을 자체가 레이븐즈 로지스틱스의 본사가 있는 뉴 디에이고랑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었던 만큼, 세계를 방랑하며 배달일을 하거나, 용병일을 하는 레이븐과의 접촉 기회가 많았던 덕이었을까.
다른 곳이라면 레이븐에 대해서 흉조니 뭐니 딴지를 걸고 넘어졌겠지만, 로도스의 보안관은 달랐다. 그들은 서로 잠깐 눈빛을 교환하더니 현상 수배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던 단테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당신."
"네. 네엣!"
에리스는 순간 보안관이 자신을 가리키는 줄 알고 바짝 긴장하여 대답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보안관의 관심은 에리스가 아닌 단테 쪽에 쏠려 있었다.
"아니. 그쪽 여자 말고. 거기 당신. 레이븐이지?"
"주소 잘 찾아왔네. 맞아."
"등급이 어느 정도 되지? 적어도 동 등급 이상은 되는 인력을 찾고 있어서 말이야."
"은. 실버야. 백금이랑 금 바로 아래."
네오 쿄토에서도 그렇고, 디바이너나 유니온에서도 그랬듯, 대부분 '세력'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레이븐을 그리 좋은 눈빛으로 보지 않는다.
좋게 봐줘봤자, '용병'. 나쁘게는 단순 배달업을 넘어, 사람 죽이고 다니는 데 돈을 받는 피비린내 내는 총잡이 내지는 '흉조' 취급을 하곤 했으며, 이런 태도에 대해 언제나 단테는 엿이나 까잡수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 로도스는 달랐다.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으며, 오히려 레이븐이라고 하자 대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단테의 태도 또한, 평소 내비치는 태도보다 한층 더 부드러웠다.
자신의 군번줄을 보여줘 은 등급임을 확인시켜주자, 보안관들은 서에서 보자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러던 와중, 잡화점에서 담배 몇 갑을 사온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갸웃하며 단테를 바라보았다.
"또 성가신 일에 휘말린 건 아니지?"
단테가 이상한 일에 연루되는 게 정말 하루이틀이 아니었는지, 베아트리체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반대야. 반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돈이 될 만한 일이야. 보안관 나리들이 일을 주실 생각이신 거 같은데. 일단 뭔지 얘기나 들어보자고."
* * *
"은 등급의 레이븐이 마침 지나가는 길이라서 정말 다행이구만. 긴 말 할 거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질구레한 사정 같은 건 필요 없을 테니."
"이야기가 빨라서 좋은 걸?"
보안관이 단테에게 내민 건 한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현상 수배지였다.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 모히칸 스타일로 바짝 깎은 머리.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동시에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는 굳은 심지를 품은 눈이다.
이름은 케인 캐시디.
목에 걸린 현상금의 액수는 꽤 상당했다. 거기다가 DEAD OR ALIVE라고 적혀있는 걸 보면. 상당한 흉악범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단테는 알 수 있었다.
"최근 로도스 동부 지역에 지하철 선로가 있는 건 알고 있나?"
"모른다. 여기 온 지 별로 안 되서. 애초에 오래 체류할 생각이 없었거든."
"아무튼. 요 근처에는 예전에 지하철 역과 핵 방공호 시설로 쓰였던 쉘터가 있네. 원래는 그쪽에 뉴 디에이고의 시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로그들에게 그 시설을 점령당했네. 지금은 그 녀석들이 멋대로 쓰고 있는 중이야."
"뉴 디에이고의 시민이 있는 곳을 건드렸다고요? 미닛맨은 뭘 하고 있었죠?"
베아트리체가 묻자, 보안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미닛맨이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어. 녀석들은 이, '케인 캐서디'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인 일종의 갱이야. 아무래도 서부에 있는 광산 지역에서 온 얼간이들 같은데. 다이너마이트를 무시무시하게 많이 가지고 있더군."
"다이너마이트를 많이 갖고 있는 게 뭐 대순가. 미닛맨, 꽤 크다고 알고 있는데."
"규모는 크지만. 그들 대부분은 일반 시민이야. 자네와 같이 서번트를 다룰 수 있는 능력자도 아니거니와, 명사수도 드물지. 무엇보다 문제는 그들의 '장비'야. 광산 지역에서 왔다고 했었지?
그 녀석들. 광산에서 가져온 건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여러 중장비들을 보유하고 있네. 불도저를 마치 전차처럼 개조해서 싸돌아다니더군. 그리고 중장비만 있는 게 아니야.
이들의 조직 리더, 케인 캐서디를 비롯한 몇몇 로그들은 무려, '마도 아머'를 운영하고 있었네. 아마 전쟁 전 시절, 채굴 용도로 쓰였던 물건인 듯 하지만. 마도 아머의 성능은 내가 아니라 자네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마도 아머를 운용한다라. 확실히 그거라면. 상대가 안 될 만도 하네. 민병대의 힘으로는 무리가 있겠어. 마도 아머에 물리 방어 매트릭스 같은 게 탑재되어있다면, 마법 공격으로만 뚫을 수 있으니까. 마법 능력자가 부족한 미닛맨이 밀릴 수밖에 없었던 건가."
베아트리체가 혼잣말을 하며 상황을 정리하자, 단테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갱단 멤버 중에서 마법 능력자는 있었나? 서번트를 다룬다든가."
"그런 낌새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네. 미닛맨에서 기록을 받아본 결과, 4기 정도 되는 마도 아머가 미니건, 화염방사기, 로켓 런처를 비롯한 중화기로 자신들에게 반항하는 정착민들을 무력으로 찍어 눌렀다는군."
"상대측에 마법 능력자가 없으면. 마법 능력자를 셋이나 보유하고 있는 저희 쪽이 훨씬 유리해요. 무엇보다, 어쩌면 우리 쪽에서도 운용 가능한 마도 아머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라요."
에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테를 바라보자, 이에 동감한다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도 아머... 하나 있으면 좋지. 장기적인 운용이 힘들어서 그렇지."
"어떻게 할 건가. 만약 케인 캐서디를 잡아오고, 로도스 동부의 갱단을 싹 쓸어주기만 한다면, 여기 적혀있는 현상금의 1.5배를 주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