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화
아내를 뺏어간 놈과 만나다. (1)
"후아. 좀 살 거 같네."
재판장에서 드디어 지긋지긋한 족쇄와 수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단테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내려놓고 있던 리버레이터를 번쩍 집어 들어 바로 자신의 등 뒤에 붙였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매가 아닌 단테가 어마어마한 크기 거검을 별도의 서번트의 보정조차 받지 않은 채로 들어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성검에 적용된 특수한 마법과도 같은 기술력 덕이었지만.
이를 모르는 디바이너의 추기경들이나 홀리의 기사들에게 있어 단테가 거검을 들어 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성검의 선택을 받아, 용사로서의 권능을 행사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동시에 디바이너 교단의 높으신 분들. 추기경들과 교황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렇게나 자신들이 신봉하던 용사 전설의 후계자가 그들이 그렇게 멸시하는 악마, 서큐버스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 모를 딸배 새끼였으니까.
단테가 자신 있게 리버레이터의 검 끝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을 때, 그들의 표정이란. 평생의 술안주 거리로 삼아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고소하고, 달콤했다.
하지만 용사로 정식으로 추기경들에게 인정받았으며, 구속에서도 풀려날 수 있었던 단테였지만 디바이너에 어느 정도 타격을 준 단테를 추기경들은 그저 용사란 이유만으로 풀어줄 생각은 없던 모양이었다.
마소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물, 마그놀리아 내부에 설치된 정화조로부터 뽑아낸 생수를 벌컥벌컥 걸신들린 것처럼 마시고 있던 단테의 옆에는, 까마귀의 마녀 베아트리체가 있었다.
"어떻게든 네가 용사라는 걸 제시해서 추기경들을 설득하는 건 성공했지만. 계약 조건은 알고 있겠지?"
"응. 알고 있어."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마시던 수통을 베아트리체에게 슬쩍 넘겨주며 입을 소매로 닦았다.
"홀리의 기술부 측에 협력할 것. 유니온에게 빼앗긴 데이터 칩을 회수해올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레이븐을 관두고 홀리 밑으로 들어와 일할 것. 이 세 가지잖아."
"한 가지 빼먹었어."
베아트리체는 검지를 치켜세우며 단테에게 말했다.
"네가 용사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 것. 알겠어? 내가 보기에는 데이터 칩의 회수보다, 이게 훨씬 더 중요해.
순혈 인간에 의한 황무지 재건을 목표로 삼는 디바이너에게 있어서, 그 선두에 올라서 악마를 몰아내야 할 프로파간다나 다름없는 용사가 반인반마라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다. 라는 그들의 이념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돼. 이게 무슨 의미를 뜻하는 건지는 너도 알겠지?"
"물론. 잘 알고 있지."
단테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베아체는 단테가 건네준 수통을 자신의 허리춤에 묶어 고정시켰다.
몇 가지 사소한 절차가 재판장 안에서 끝나자, 단테의 소지품을 죄다 뺏어갔던 디바이너는 홀리의 기사를 보내 그의 물건들을 다시 도로 돌려주었다.
전술 방독면, 그의 소중한 권총 M1911, 열차의 기관사에게서 뺏어온 펌프 액션 샷건 하나. 마탄을 비롯한 탄약들. 그리고 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흑색의 방탄 코트까지.
자신의 모든 소지품들이 돌아온 걸 확인한 단테는 홀스터에 총들을 끼워넣곤 베아트리체에게 물었다.
"에리스는. 풀려날 수 있는 거겠지?"
"문제 없어. 내가 용사의 페어리라고 말했으니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금방 풀려날 거야. 그 아이는 마법 능력자니까. 특별히 다른 곳에 감금되어있거든."
"그러냐."
단테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서는, 에리스가 올 때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다는 베아트리체의 말을 듣고 지금이 아니면 물어볼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베아체. 너 용사의 전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했었지? 그 요정에 대한 것도 그럼. 잘 아는 거야?"
"네가 원하는 대답은 해줄 수 있을 정도는 알고 있어."
언제나 베아트리체는 말을 시인처럼 빙빙 돌려서 하는 경향이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딱 끊어서 하는 단테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럼 하나 물을게. 에리스에 대한 거야."
"뭔데?"
"... 에리스 말이야. 그 요정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뭔가 위화감이 들어.
"위화감이라고 한다면? 정확히 어떤 거야?"
"에리스의 기억 말인데, 자꾸 왔다갔다 해. 에리스는 본인이... 용사 원정대와 함께 했었던 요정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이전 용사 파티의 멤버들의 얼굴과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그녀는 어째서인지 마지-테크 연구소의 지하 깊은 곳에 냉동 포드에 냉각된 채로 갇혀있었어.
그리고 본인은... 마왕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사는 세계가 구원받지 못했고, 핵폭격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앞뒤가 안 맞잖아.
마왕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에 참여하지 못한 채로 지하에 봉인되었다면, 용사 파티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아는 일도 없었을 거야... 그리고."
"그리고?"
베아체는 조용히 단테의 말을 들어주며 그가 다음 이야기를 꺼내게끔 유도했다.
"성검을 가지러 용사 길드를 찾아갔었을 때. 나는... 마녀의 연구소에서. 보고 말았어. '수많은 에리스'가 냉동 포드에 얼려진 채 죽어있었어. 에리스가 한 명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거기까지 알아냈다면. 거의 정답에 근접했네."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답했다.
"에리스는 단 한 번도 '인간'으로 취급된 적이 없어. 그녀는 왜 '요정'이라고 불리는 걸까. 마법 능력자. 나 같은 사이커도 '인간'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용사 전설에 대해 기록한 그 어떠한 데이터베이스 상에서도 요정은 '인간'으로 묘사되지 않아."
"인간이 아니라고? 에리스가?"
그러자 베아트리체는 한 가지 수수께끼를 단테에게 제시했다.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 따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지. 그렇다면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본 따 만든 것은 뭐라고 하면 될까?"
"..."
그녀는 전쟁 전에 쓰였던 작은 단말을 하나 꺼내 어떤 데이터 하나를 단테의 소환기에 전송했다. 아마 스마트-보이였던가. 아마 그런 이름이었을 거다.
"이건?"
"어떤 마지-테크 연구소의 위치 좌표야. 그 곳에 가면 너가 알고 싶은 정보를 찾아볼 수 있을 거야. 성검에 의해 선택받은 용사니까. 네게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본인 입으로는 알려주시지 않으시겠다?"
"시련 없이 찾아온 보상은 의미를 가지지 않으니까. 알고 싶으면 네 자신의 힘으로 직접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진실을 얘기해준다고 해도, 넌 내 말을 믿지 않을 게 뻔하거든."
"..."
단테가 얌전히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베아체는 살짝 감정이 메마른 어색한 미소를 선보이며 검지를 들어 가리켰다.
"저기 봐. 기다렸던 네 요정이 드디어 풀려난 모양이야."
"주인님!!"
드디어 지하 깊은 종교 재판소의 어두침침한 곳으로부터 풀려나 빛을 보게 된 에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손을 흔들며 단테에게 달려온 그녀는 바로 단테의 몸을 살피며, 어디 다친 데가 없는지, 다친 곳이 있다면 [새벽의 축복]으로 치료해주기 위해 다가왔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죠?"
"다행히도? 이 망할 교단 놈들. 내가 지네들이 섬기는 용사 그 자체인 것도 몰라보고 가둬놓더라. 성검을 집어 들었을 때, 표정이 일그러지는 그 꼴 진짜 보기 좋았다고."
단테는 방금 베아트리체에게서 요정에 관한 진실을 들었음에도 에리스를 웃는 얼굴로 반겨주며, 농담까지 던졌다.
그 모습을 팔짱을 끼고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베아트리체는 아주 조금은, 그가 어째서 '리버레이터'에게 선택받을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단테. 에리스. 너희들은 이제 나랑 함께 당분간은 홀리 아래에서 일하게 될 거야. 단테가 자세히 설명해주겠지만, 너희들의 죄를 사해주는 대신 추기경들은 네 가지의 조건을 걸었고, 그중 하나는 데이터 칩의 무사 회수야.
자유를 얻은 몸이지만, 데이터 칩을 회수하기 전까지는 디바이너의 감시 하에 있다는 것만 일단 알아줘. 알았지?"
원래라면 이런 '소속'에 얽매이는 걸 세상 그 누구보다 싫어하는 단테였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운 나쁘게 조직에, 그것도 악마를 배척하는 디바이너 교단에 잡혀갔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나온 게 기적인 이상 '죗값'을 보수 삼아 잠깐 일할 수밖에.
"알았어. 그때까지만 협력하면 될 거 아니야."
"협력 고마워... 그럼 홀리 본부로 안내해줄게."
* * *
"서번트 소환 시스템, 활성화하겠습니다."
"소환자 반응 확인! 마나 투입합니다!"
"소환의 관으로부터 데이터 로드 성공. 에테리얼 고정화. 들어갑니다."
디바이너 교단의 '무력'을 담당하는 홀리 기사단의 연구 부서.
과거 전쟁 전 기록이 담긴 데이터베이스를 끌어모은 교단은 이러한 막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악마들과 싸우기 위한 각종 병기들을 만들었으며, 세계 각지에 묻힌 유물들을 발굴해내었다.
그중에서 홀리의 가장 큰 자랑거리라고 한다면, 바로 이 '서번트 소환 고정기'라고 할 수 있었다.
영체는 자연적으로, 그리고 무작위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이 기본이지만, 이 서번트 소환 고정기는 일정 변수를 통제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원하는 '영체'를 즉각 불러오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불러낸 '영체'를 곧바로 '소환기'를 통해 사역하는 것으로 '서번트'로 만들 수 있으니, 소환사에게 있어 이 시설은 그야말로 원하는 무기를 마음대로 뽑아낼 수 있는 만능의 무기고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령형 : 아서]의 소환 성공! 버질님! 지금 바로 소환기를 사용해주세요!"
"성향 일치 확인. 스테이터스 일치 확인. 오차율 0.7퍼센트. 영령형 아서, 단장님에게 사역... 으앗?!"
퍼어엉!!!
소환 고정기를 통해 소환된 '성검을 든 기사'는 잠시 불안정한 홀로그램처럼 일렁이더니, 그대로 '고정'이 풀린 나머지 몸을 이루고 있던 마나가 폭발, 그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영령형 아서'를 사역하기 위해 소환기를 바쁘게 조작하고 있던 홀리의 기사단장, 버질은 바로 코 앞에서 실패한 프로젝트를 눈앞에 두고 실망을 금치 못 했다.
"실패했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눈이 부실 정도의 금발과 녹안을 지닌 청년, 상당히 젊은 나이에 홀리의 기사단장이라는 위치까지 올라간 소환 고정기의 조작을 담당하고 있던 연구원에게 담담히 물었다. 이미 몇 번이고 실패를 겪여 온 그는 차분히 실패의 이유를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차율, 성향, 스테이터스. 전부 일치시켰습니다만... 대체 어째서 사역되지 않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 번에도 똑같은 말을 들은 거 같은데. 이것 참 곤란하군. 당분간 소환 고정 작업은 취소하고, 아서가 어째서 소환기에 의해 사역되지 않는 것인지 이유의 분석 작업에 들어가는 게 낫겠군."
"그 저기. 한 가지 의견을 내도 되겠습니까?"
"뭐지?"
"이 '소환 고정기'로는 '신령급'의 서번트의 소환 및 고정은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영령형 아서'의 격이 신령급일 수도..."
연구원이 얼버무리며 실패의 원인을 급히 버질에게 보고하려 했던 그때, 연구실의 문이 열리며 밖에서 베아트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트릭시. 왔구나."
"부탁이니까, 그 칭호로 날 부를 수 있는 건 세상에 단 두 명 있어. 그중 한 명은 죽었고, 그중 한 명은 네가 아니야. 알겠어?"
베아트리체는 '애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버질을 쌀쌀맞게 내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손으로 홀리의 기사단 본부를 찾아온 두 명의 손님을 차례차례 소개해주었다.
그중 한 명은, 소개해줄 필요성 자체가 없었지만 말이다.
"추기경들로부터 보고는 받았지? 이쪽은 에리스. 현재 단테랑 함께 행동 중인 전 용사의 페어리야. 그리고 이쪽은 단테. 굳이... 네게 설명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 유감스러운 보고라면... 확실히 받았지."
"거 참 퍽이나 유감스러우시겠습니다. 홀리의 기사단장, 버질님."
단테는 등 뒤에 보란 듯이 성검 리버레이터를 들쳐 메고 능글맞게 '버질' 앞에서 그를 약 올리듯 말했다.
단테의 도발에, 버질은 말없이 그의 앞에 서, 그의 '마족눈'을 노려보았다. 단테 역시 버질의 녹안을 있는 힘껏 째려보며 기싸움에 친히 응해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기를 수 초.
지금 당장이라도 서로가 서로의 안면을 주먹으로 후려쳐도 이상하지 않을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할 무렵, 그 둘을 뜯어말린 건 베아트리체였다.
"같은 동업자잖아. 단테, 버질. 부탁이니까. 데이터 칩을 찾기까지만이라도 좋으니까. 날 봐서라도 조금만 참아줘... 응?"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베아트리체가 이번 화에 건네준 마지-테크 연구소 이야기는 추후에 서브 퀘스트 형식으로 풀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