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화
열차 강도하는 용사님. (7)
"이거겠군."
단테는 코볼트들이 파고 들어간 땅굴 끝에 무성한 전선의 다발들이 여기저기 뻗어져 나온 걸 보고 확신했다. 강대한 전류가 전선에서 흐르고 있단 사실을 소환기로 확인한 단테는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자신의 서번트를 바로 '잭 오 랜턴'으로 교체한 그는 신속하게 행동했다.
전선 여기저기에 손수 '폭발의 룬'을 새겨놓는 것으로 언제든지 자신이 원할 때, 폭발의 룬을 단순히 격발시키는 것으로 이제 보호막 동력을 완전히 차단해놓을 수 있게 말이다.
"이걸로 하나 해결했고. 남은 건 레일로드 주둔군에게 돌아가서 보수를 받는 것 뿐이네."
"정말로 이게 옳은 일인지는 의문이 드네요..."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이야."
단테는 에리스의 의문에 시니컬하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 터널 시설 바깥으로 나가 자신의 트럭인 엘리자베스로 복귀했다.
이제 다시 레일로드 주둔군으로부터 보급품을 받기 위해, 로닌 '미카즈키'로 돌아갈 때다. 단테는 짐칸 안에 실려있던 생수를 조금 천에 묻혀 전신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에리스에게 건네주었다.
"몸 좀 닦아. 산성액이나 독액이 묻어있을 수도 있으니까. 제대로 된 샤워는 주둔군에 도착하고 나서 하자고. 그때 동안은 좀 참아."
"네. 감사합니다."
슬슬 깨끗한 생수도 부족해질 참이다. 근처에 마소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하천이 흐르는 곳을 한 두 곳 정도 알고는 있지만, 만에 하나 수통에 채워 넣을 물조차 부족해지는 상황이 오는 건 피하고 싶었다.
에리스는 말없이 단테 앞에서 옷을 벗고, 천천히 몸에 늘러붙은 바실리스크의 체액과 피를 닦아냈다.
전쟁 전이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위생적인 삶이긴 했지만, 어느샌가 그러한 척박한 생활에 적응해낸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던 에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속옷 차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일로드 주둔군에 도착하면 쿄토 사람 연기 제대로 해? 알았지? 자, 조수석에 올라 타. 출발하자."
아, 그전에.
단테는 운전석에 훌쩍 올라타선 에어컨 바로 밑에 있던 라디오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가는 동안 듣고 싶은 노래 있어?"
"아니오... 특별히는 없는데요."
"거 참 로망 없는 여자로구만."
그 말에 에리스는 싱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주인님의 센스에 맡길게요."
"그 말이 제일 어려운 거 알지? 그래. 오늘은 이걸로 할까? 기껏 내본 네오 쿄토 분위기니까. 네오 쿄토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틀어줄게. 시티팝이란 장르는 알아? 그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노래지."
단테는 운전석 근처 보관함에 넣어둔 음반을 꺼내 라디오 안에 밀어 넣었다. 어딘가 서정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음색. 우중충한 먹구름 아래, 차츰차츰 비가 내리는 네온사인의 거리에 어울리는 노래였다.
200년이 넘은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그 멜로디는 지금까지도 먹힐 정도로 매끄럽고 부드럽다. 에리스는 어느샌가, 노래의 멜로디에 맞춰 어깨를 흔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突然のキスや熱いまなざしで
갑작스런 키스나 뜨거운 눈길로
恋のプログラムを狂わせないでね
사랑의 프로그램을 망치지 말아 줘.]
극동의 언어는 잘 알 수 없었기에, 단테는 멜로디만 그저 흥얼거리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종말의 끝에서 울려 퍼지는 고전의 노래의 감성에 젖으며, 운전대를 능숙하게 돌렸던 단테는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출발했다.
"이거. 제목이 뭐예요?"
에리스의 물음에 단테는 쿨하게 대답했다.
"플라스틱 러브(가짜 사랑)."
* * *
"더는 코볼트들이 주둔군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요."
단테는 삿갓을 푹 눌러쓴 채 그들에게 보고했다. 코볼트와 바실리스크를 토벌했다는 증거를 대기 위해, 그는 소환기에 입력된 전투 로그를 그들에게 제시했다.
요즘 같은 척박한 세상에선 입만 산 거짓말쟁이도 허다하니, 의뢰를 받고 수행했음에도 증거가 없을 시에는 보수를 줄 수 없다고 나오는 의뢰인들도 많기 때문이었다.
"정말 고생 많았네. 자네 덕에 한숨 돌릴 수 있겠어. 방금 보급품 몇 개가 도착했는데, 나눠주도록 하지. 이쪽에 있는 박스들은 자네랑 자네 부인 거야. 맘대로 쓰게나."
"코볼트 녀석들만 숨어 있었는 줄 알았는데. 바실리스크도 안에 숨어 있었소. 그 독사의 목을 베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 정도 보급품이라면 목숨을 걸 만한 가치는 있었군. 고맙소."
깨끗한 생수가 든 수통 몇 개. 디바이너 교단에서 야생 동물의 고기를 가공해 만든 쥐포들. 그리고 탄약들과 수류탄들이 있었다.
그리고 단테가 마법 사용자라는 걸 감안했기 때문인지, 안에는 무려 '마탄'도 함께 들어있었다. 어지간히 구하기 힘든 물품인 만큼, 그는 속으로 땡잡았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아. 그렇군.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네만."
"뭐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도와주지."
"마일즈 병장. 혹시 요 근처에 스크래퍼가 운영하는 정크샵이 있소? 못 쓰게 된 사이버네틱 임플란트가 몇 개 있는데. 갖고 있어 봤자 짐만 돼서 빨리 처분해야 하오."
보호막 동력을 끊을 방법은 찾았으니 이제 선로를 틀어막을 장애물만 찾으면 된다. 적합한 장애물로는 역시 핵엔진을 탑재한 자동차 정도가 있을 텐데, 이런 물건은 정크샵에서 흔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정크샵이라. 레일로드 근처 정크샵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생각나는 게 없네. 그나마 있는 게 있다면, 로그들이 운영하는 정크샵인데. 녀석들과 거래하는 건 지나치게 위험하네. 자네도 알지 않나. 그 불한당들이 어떤 존재인지."
"로그들이 정크샵을?"
"그렇네. 요즘 스크래퍼들 사이에서 좀 시끄럽다고 하더군. 그 폐공장은 정크로 넘쳐나는. 스크래퍼들의 광산과도 같은 장소였는데, 로그가 점령했다고 해서 골치를 썩히고 있더구먼."
"흠. 위치가 어떻게 되지? 도보로 얼마 정도 걸리나?"
"도보로는 약 40분 정도는 걸어야 할 걸세. 뭘 구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보로 40분이라면, 네오 쿄토보다는 훨씬 가깝다. 차로 가면 아마 20분에서 10분 내로도 잘하면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 '정크샵'이라는 걸 표방하고 있다면 어느 정도는 정상적인 거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단테는 일단은 생수 몇 병만 챙겨가고 주둔군에게 일러두었지.
"한 번 갔다 와보지. 한 사흘 정도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 행동하고 싶소만. 괜찮소?"
"문제 될 거 없네. 자네는 코볼트 사건에 더불어 주둔군을 위협하는 좀비 호드도 처리한 영웅이야. 얼마든지 여기 머물러도 상관없네."
마일즈 병장의 굳은 신뢰를 방금 말을 통해 느낀 단테는 삿갓을 살짝 손 끝으로 내리며 인사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맙기 그지없군. 그럼 한 번 갔다 와보겠소."
* * *
"여기가... 그 마일즈 병장이 말해줬던 폐공장이군요."
걸어서 40분 정도 되는 거리라고 해서 직접 에리스와 함께 걸으며 시간을 맞춰본 결과, 다소 빠른 걸음으로 가자 30분 안에 끊을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있었던 만큼, 리스크도 그만큼 컸다. 네오 쿄토 같은 대도시 안에 속한 정크샵이 아닌, 불한당들이 멋대로 스크래퍼 짓거리를 하다가 근처 폐공장을 점거해 만든 정크샵이니 말이다.
쌍안경을 통해 주변을 살펴본 결과, 단순히 겉에 보이는 기관총 자동 터렛만 해도 7기는 되고, 그 밖에도 잘 무장된 로그들이 근처를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서번트의 힘을 사용하면 돌파할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많은 로그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면 방금 보급품을 통해 보충한 탄환을 그냥 날려버리는 꼴이 될 거고, 귀중한 마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어쩌실 거예요? 정면에서 돌파하실 건가요?"
"아니? 난 어디까지나 거래하러 온 거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쌍안경을 옷 안에 넣어 보관한 단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자신의 서번트를 재빨리 '픽시'로 교체했다.
그가 서번트를 '픽시'로 교체했다는 건, 힘으로 뚫고 나가겠다는 것이 아닌, 적절한 화술, 협상과 농담. 그리고 재치로 이 상황을 극복해내겠다는 걸 의미했다.
단테가 대놓고 그들 앞에 나타나자, 순간 경계를 서고 있던 로그들은 총구를 그쪽으로 겨눴지만. 금방 그 총을 내렸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그가 한가득 팔아재낄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들을 등 뒤에 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눈에 손님이라는 걸 알아차린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단테와 에리스를 반겼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네오 쿄토에서 오신 손님들이잖아!"
"최근 손에 넣은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들을 조금 처분하고 싶어서 왔소. 소인은 추방된 몸. 로닌. 이런 꼴로는 네오 쿄토 안에 발도 못 들이밀지. 근처에 적당한 정크샵이 없나 싶어서 살펴봤네만. 여기가 그렇게 값을 잘 쳐준다고 들었소."
"잘 찾아왔수다. 여기만큼 정크를 제값에 파는 스크래퍼도 얼마 없지. 빨리. 어여 들어오이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암시장 같은 분위기가 공장 안에 만들어져 있었다.
전쟁 전에 사용되었던 각종 로봇들부터 시작해, 기묘한 모습의 무기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예전에 사용되었던 '마도 아머'의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
"호오. 마도 아머라. 저건 조금 탐나는데."
'미카즈키'로서의 연기를 계속해야 했지만, 순간 '레이븐'으로서의 일면이 나와버린 단테는 뒤늦게 두 어번 헛기침을 하며 의외로 가질 건 다 갖고 있던 로그의 정크샵을 보곤 감탄했다.
"의외로 상품들이 충실하군. 아무튼 값 좀 쳐주쇼."
"아아. 그렇지 그렇지."
단테의 가방을 뒤집어 그가 갖고 있던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들을 전부 바닥에 흘려놓은 스크래퍼는 찬찬히 상품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피고, 그에 이어 단테의 안색을 살폈다.
상품의 상태보다 단테의 얼굴을 더 오래 지켜본 걸 보면, 아마 상품이 품고 있는 진짜 가치보다는 과연 단테가 등쳐먹을 만한 인간인가를 먼저 판단한 다음, 값을 매길 심산인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자네. 돈은 뭘로 받을 건가? 교단 주화? 쿄토 엔화? 마계 보석?"
"마계 보석으로 주면 고맙겠군."
"총 합해서 120 파운드에 쳐주지."
"흐음."
한베가 사용했던 사이버네틱 임플란트. 상태도 거의 멀쩡하고, 약간의 유지 보수만 거치면 얼마든지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사이버네틱 임플란트가 가진 가치를 따져봤을 때, 120 파운드는 헐 값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단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네오 쿄토에서 온 사무라이를 속이려 하다니. 너무 속이 보이는군. 이 정도 품질의 임플란트를 고작 120파운드에 팔아재낄 수는 없소. 그럴 바에는 다른 스크래퍼를 알아보지."
"하지만 댁은 로닌이지 않소? 어차피 거래할 구석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어디까지나 쫓겨난 건 쿄토지. 디바이너 쪽에 붙으면 문제없소. 이 근처에 레일로드가 다닌다는 건 알고 있겠지? 자네들이 이걸 헐값에 사간다고 한다면. 난 그냥 레일로드나 잡아타서 교단 사람들이랑 편하게 거래할 거요. 이 정도 품질, 성능의 임플란트가 어디 흔한 줄 아시오?"
"느윽."
단테의 거센 말발에 휘둘린 스크래퍼는 작게 말했다.
"... 200에 드리지."
"400. 그 이하로는 안 내려가오."
"400에 이미 반쯤 박살난 임플란트를 사가란 건가? 미친 거 아니야?"
그러자 단테는 자신의 소환기의 데이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거기에는 바로 자신과 격렬하게 맞서 싸웠던 한베의 제원이 있었다.
"이 정도 성능을 자랑하는 임플란트. 직접 신품을 구하려면 네오 쿄토에서 800파운드는 주고 사야할 거요. 중고라고는 하나, 성능에 있어선 저하가 하나도 없으니. 원래 500 정도가 적정값인데, 거기에서 100이나 깎아서 돈을 받겠다는 거요.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요. 소생의 눈이 보이오? 이것 또한 임플란트요. 네오 쿄토에서 직접 임플란트를 심어보고 써본 사람이 말하겠는데, 바로 이 임플란트를 100에 사는 거면 정말 거저로 사는 거요."
"알았어! 알았어! 350!"
"380."
"360!"
"375."
"오케이! 375!"
"오케이! 땡큐! 오케이!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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