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화
열차 강도하는 용사님. (3)
"정말이지. 레일로드를 좀비 호드로부터 지켜줘서 고맙단 말을 전하고 싶군."
막사 안으로 단테를 불러들인 마일즈 병장은 고개 숙여 로닌의 복장을 하고 있던 단테에게 꾸벅 인사했다.
자신이 레이븐이라는 게 아직까지는 들키지 않았다는 걸 재차 확인한 단테는 마찬가지로 삿갓의 끝을 살짝 잡고 아래로 내리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감사를 할 필요는 없소이다. 소생은 로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방랑 검객일 뿐이니."
"그 복장. 격식. 네오 쿄토 사람인가?"
막사에서 좀비에게 물어뜯긴 상처를 치유받고 있던 카를로스 일병이 묻자, 단테는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으며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
"카를로스."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헤클러 상병은 눈치 없는 일병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턱짓으로 단테를 가리켰다. 네오 쿄토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에 대해 무지한 나머지 결례를 범해버린 일병을 꾸짖으며 헤클러는 짧게 설명했다.
"이 등신아! 로닌이라는 말을 모르는 거냐?"
"로닌이 뭐죠? 저는 네오 쿄토의 문화는 잘 몰라서."
"신경 쓸 거 없소."
단테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비운의 호위 무사 연기를 착실하게 해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레이븐즈 로지스틱스에 들어가기 전, 이런 식으로 수많은 난관들을 헤쳐나가 온 만큼, 단테는 누군가를 연기와 거짓으로 속이는 일에는 도가 틀 대로 텄다.
"... 소생은. 원래 네오 쿄토의 귀족을 섬기는 호위무사였소. 하지만... 그림자를 섬기는 닌자들의 비겁한 수작으로 인해 소중한 주군을 잃고 말았지.
로닌이라는 건. 주군을 잃어 네오 쿄토에서 추방당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 검객을 뜻하는 말이오. 소생처럼 말이오..."
단테의 감쪽같은 연기에 속아 넘어간 레일로드 주둔군은 그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그들 또한 디바이너 교단 아래에서 누군가를 섬기는 '기사'. 주군을 잃은 추방된 호위무사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카를로스 일병은 자신의 부족한 눈치를 탓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단테는 낮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삿갓 아래에서 애써 미소를 짓는 척하며 먼저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래 전 지나버린 일. 이 몸. 이 영혼과 의지. 그리고 이 검은 이미 네오 쿄토의 것. 방랑에 후회는 없소이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이 있다면..."
단테는 이마를 쓸어넘기며 하소연하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소생은 가정이 있는 몸이오. 아내와 함께 붉은 무덤(레드 그레이브를 뜻하는 말.)을 떠돌아다니는 신세네만. 소생이 할 줄 재주라곤 검을 휘두르는 것뿐. 슬슬 쿄토에서 떠나왔을 때 챙겨 온 돈도 거의 바닥이 나기 시작했소. 어딘가 일거리가 있다면 참 좋겠네만.
"음..."
마일즈 병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단테의 속사정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먼저 나서서 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거라면 걱정 마시오. 레일로드는 자네의 검이 없었다면 무사하지 못 했을 거니. 당분간 이 막사에서 지내도 좋소. 조금 남는 보급품을 나눠주도록 하지. 우리 주둔군의 입장 상, 현금을 제공해주긴 어려우니. 이런 식으로라도 돕겠소."
"감사하기 그지 없군. 하지만 여기서 보급품을 얻어간다고 해도. 앞으로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막막하구려. 혹시 근처에 소생이 할 만한 일거리는 없소? 이래 봬도 소생은 서번트를 다룰 수 있는 소환사. 골칫거리라면 얼마든지 없애줄 수 있소."
"그거라면..."
눈치 없는 카를로스 일병은 소환사씩이나 되는 정예 병력이 도와준다는 말에 바로 손을 들어 의견을 제시했다.
"요 근처에 야생 영체들 때문에 골을 썩히고 있는데. 그걸 의뢰하죠."
"그건 우리 레일로드 주둔군이 해결해야할 일이지. 지금 막 처음 뵌 검객님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맡길 순 없잖냐! 눈치 좀 챙기도록! 카를로스 일병! 그. 혹시 로닌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
단테는 잠깐 멈칫하고 고민하다가, 건너건너 들은 네오 쿄토의 인명을 아무렇게나 대었다.
"성은 미카즈키라고 하오. 이름은 말해줄 수 없소이다."
네오 쿄토에선 어째서인지 친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할 때는 이름을 숨기고 성으로만 부르는 기묘한 문화가 존재한다. 처음 뵌 사람이랑 대화할 때, 미스터 혹은 미스 뒤에 성씨를 붙여 높여 부르는 것의 연장선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단테는 고지식한 사무라이를 연기하기 위해 성만 말해주고,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 나름대로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카즈키 씨. 얼른 아내를 데리고 오시죠. 여독으로 인해 많이 지치셨을 텐데. 저희가 바로 쉴 수 있도록 추가 야전침대를 마련해놓겠습니다."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단테는 삿갓을 살짝 손으로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 안에는 두 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아내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드디어 마련할 수 있었기에 지어보인 '미카즈키'로서의 안도의 미소.
또 하나는 단테 자신의 연기가 제대로 이 멍청한 레일로드 주둔군에게 먹혀들어가준 덕에 모든 게 계획대로 움직여줬기에 지어 보인 성공의 미소.
단순한 은신과 기만을 이용한 잠입으로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된다. 하지만 적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스펙트럼은 단순 잠입보다 훨씬 넓어지게 된다.
처음부터 좀비 호드를 끌어들인 것이 단테라는 걸, '미카즈키'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그들은 호쾌하게, 동시에 멍청하게 껄껄 웃으며 단테를 반겼다.
그들이 '흉조'를 막사 안에 들였는지도 모른 채로.
* * *
"소개하지. 소생의 아내되는 여자요."
자신의 아내를 데려온다는 핑계를 대고 트럭으로 돌아온 단테는 자신의 애마인 엘리자베스 위에 위장용 시트를 덮어 철저하게 숨겨놓았다.
"아, 주인님!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그래. 주둔군의 신뢰는 얻었어. 그건 그렇고, 이제 네 도움이 필요해."
"제 도움이요?"
"레일로드 주둔군에게는 내가 아내와 함께 세계를 방랑하는 검객이라고 뻥을 쳐놨거든. 아내 역할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서 말야. 됐으니까 따라와."
"자. 잠깐만요."
엘리자베스의 조수석에서 얌전히 대기하고 있던 에리스에게 네오 쿄토에서 화류계 여자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입힌 단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에 레일로드 주둔군 막사 안에 들여 소개했다.
오는 길에 속성으로 네오 쿄토의 간단한 인사말과 어휘. 말투를 가르쳐준 단테는 주둔군 막사 앞에서 키모노 차림의 에리스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소생의 아내되는 여자요. 정말이지 고맙다는 말 밖에 못 하겠군. 뭐 하는 거야? 빨리 인사 안 하고."
200년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용사에게 등을 떠밀려 이런 짓을 벌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에리스는 끼긱거리며 목을 돌려 단테를 바라보았다.
진짜로 해요?
진짜로?
진심으로?
그런 표정으로 단테를 바라보며 말없는 애원을 계속했던 에리스였지만, 단테는 가차없었다.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면모는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했다.
'신령' 타입의 서번트는 대단히 사역하기 어렵고 발견하는 것조차 힘든데, 어째서 그가 고대 북유럽 전설에서 손꼽힐 정도로 유명한 '신' 그 자체인 신령형 로키를 사역하고 다룰 수 있는가, 에리스는 조금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그의 이런 '트릭스터' 같은 면모가 너무나도 전설로 내려져오는 로키와 닮아 있었던 거다.
주로 서번트와 서머너는 일종의 '파장'이 잘 맞아야 잘 다룰 수 있는데, 어쩌면 그가 로키를 다룰 수 있는 건 이러한 면모 때문이 아닐까. 에리스는 생각하며 어색하게 쿄토 식의 인사를 그들에게 전했다.
"도... 도우모오... 그. 저는 미카즈키=에리코. 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에리스는 본인에게 거의 어울리지도 않는 극동풍의 옷. 흔히들 쿄토인들이 키모노라고 부르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참한 아내를 두었구만. 자네. 부러워지는 걸?
마일즈 병장은 단테 본인과 에리스를 동시에 칭찬하며 손가락으로 잠깐 단테가 엘리자베스에 갔다 오는 동안 새로 세운 텐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는 텐트에서 묵으면 되네. 저녁 식사 준비가 되는 대로 알려주도록 하지. 우리 카를로스 일병이 눈치는 없어도 밥 하나는 잘하니까. 그리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쿄토 사람이라고 하니, 특별히 쿄토에서 재배되는 쌀로 밥을 하도록 지시했네. 괜찮겠나?"
"괜찮소이다. 그건 그렇고."
단테는 허리춤에 맨 검을 막사의 구석에 세워놓고 본론을 꺼냈다.
"그 카를로스 군이 꺼낸 말 말입니다만. 이 근처에 야생 영체가 나타난다는 게 진짜요? 소생, 검 하나에 몸과 영혼을 바친 남자요. 어쩌면 그대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오."
"... 카를로스 녀석. 쓸데없는 소리를 꺼내서."
마일즈는 한숨을 내쉬며 지휘관 막사 벽에 걸린 레일로드 제7구획의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실은 여기 블랙 마운틴을 지나는 터널에 자꾸만 야생 영체들이 출몰하고 있네. 그렇게까지 강한 영체는 아니야. 좀비보다 조금 성가신 정도지.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숫자, 그리고 게릴라 전법이지."
"소생이 알기로. 레일로드를 지나가는 디바이너 교단의 열차와 철도에는 강력한 보호의 마법이 서려있다고 들었소. 야생 영체가 한 둘 나타난다고 한들. 문제될 게 있소?"
결정적으로 단테가 주둔군의 속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지자, 마일즈는 꽤 중요한 군 기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싸운 단테를 위해서 있는 정보 없는 정보를 다 불기 시작했다.
"맞는 말일세. 역시 전 네오 쿄토의 사무라이답게 이쪽의 사정에 밝군.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땅 속에 파고 들어가서 보호막의 동력을 공급하는 전선을 갉아먹는다는 점이지.
현재, 디바이너 교단이 점거하고 있는 레일로드지만 원래 이 레일로드는 교단의 물건이 아니었소. 그대도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원래 레일로드를 점거하고 있던 집단은 '메트로 상회'였지.
원래도 200년도 훨씬 넘는 세월 전에 만들어진 철도. 여러 시설이 노후화된 상태네만. 철도의 보수와 관련된 기술은 메트로 상회가 독점하고 있었네.
그래서 강제로 '성전(성스러운 전쟁, 혹은 전투.)'의 형식으로 보호막 동력을 공급하는 전선을 수리할 재료도, 방도도 현재 레일로드 주둔군은 갖추지 못한 셈이지.
메트로 상회는 이러한 영체들이나 좀비의 습격으로부터 전선을 안전하게 지키고, 이러한 전선을 보수할 방법을 갖고 있었던 거 같지만... 아무튼 그 탓에 현재 곤란을 겪고 있네.
전선을 수리할 방도가 없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영체로부터 안전하게 열차를 지키는 것뿐이네만. 앞서 말했듯 숫자가 너무 많아.
영체 하나하나가 강하진 않네만... 치고 빠지는 지능적인 게릴라 작전 때문에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네. 영체의 본거지를 없애면 될 거 같지만. 주둔군 특성상 여길 함부로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원해줄 병력도 교단에서 내려주지 않으니. 여러모로 문제야."
"그렇다면 간단하군."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웃으며 답했다.
"내 직접 영체들을 토벌하도록 하지. 본거지를 통째로 없애면 더는 전선을 갉아먹지 못할 거요."
"하지만 아무리 그대로 혼자서 그 많은 영체들을 상대하는 건."
"소생은 소환사요. 위기와 그에 따르는 이득은 정도는 혼자서 잴 수 있지. 소생이 이 일을 해결해줄 테니, 상부에 보고를 잘 해주면 감사하겠소.
소생은 지금 절실하게 돈과 물자가 필요한 상황이요.
디바이너는 큰 세력이고, 레일로드는 그들에게 있어 중요 거점이니, 이번 일이 교단 상부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분명 뭔가 보상이 있을 거요. 그 보상의 절반 정도를 나눠눴으면 하네만... 괜찮겠소?"
"절반은 무슨."
마일즈 병장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전부를 주지. 자네가 없으면 영체의 둥지를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 했을 거네. 정말 그대에게 맡겨도 되겠나?"
"물론이요. 소생, 검을 휘두르는 것 외에는 재능이 없소. 이런 일에라도 써야하지 않겠소?"
"고맙네. 정말 고맙네. 이 일은 지금 당장 상부에 보고하도록 하지."
"감사하오. 오늘은 날이 어두우니, 섀도가 배회하고 다닐 거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즉시 출발하도록 하지."
'전선을 갉아먹는 영체'가 있다라.
그 전선을 아예 끊어버리면 레일로드를 보호하는 결계를 어느 정도 무력화할 수 있을 거다.
단테는 마일즈 몰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계획을 천천히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모든 게 계획 대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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