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전쟁 이후 용사 파티-21화 (22/49)

제 21화

열차 강도하는 용사님. (2)

의뢰 계약서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리스크와 리턴을 따져보고 있던 단테 옆에서 에리스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속을 떠볼 겸 슬쩍 물었다.

"평소에 주로 이런 의뢰를 하시는 건가요?"

"응."

의외로 숨길 생각이 없었는지, 그가 흔쾌하게 대답하자 에리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막부 사람은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지만. 이건 결국 열차를 강도질하겠다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은 거 같은데요. 제 귀에는... 적어도 그렇게 들려요."

"맞아. 난 지금 막부의 의뢰를 받아서 열차를 강도질할지 어떨지를 지금 고민하고 있어. 그게 뭐 문제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건... 그건. 범죄가 아닌가요?"

성향이 질서 선 쪽에 치우쳐져 있는 에리스가 작게나마 자신의 주인님인 용사에게 딴지를 걸자, 단테는 그런 에리스의 견해에 의외로 크게 부정하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범죄겠지. 보통 생각해보면?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범죄를 벌해줄 정부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 범죄라는 건 법을 넘어서는 범법행위를 칭하는 말이잖아?

200년 전, 인간들 사이에는 세계를 다스리는 중앙 정부도 있었을 테고?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법도 있었겠지만. 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범죄라는 게 과연 성립이 되는 걸까?"

낮은 지능을 지닌 단테답지 않게, 철학적으로 질문을 던져온 단테의 말에 에리스는 조금이나마 그의 사상에 동의할 수 있었다.

(매력 판정 성공.)

이번 레이븐의 의뢰에서, 따지고 보면 선악의 개념은 거의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레드 그레이브 황무지를 두고 패권을 다투는 두 세력 사이의 알력 다툼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뿐.

용사에게 있어 악마는 쓰러뜨려야할 주적.

용사에게 있어 인간은 지켜야 할 우군.

200년 전에는 선과 악, 아군과 적군이라는 개념이 이분법적으로 확실하게 나누어져 있었지만 이젠 그런 게 아예 없어져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따져볼 건 잘잘못이 아니야. 리스크와 리턴이지."

단테는 레이븐즈 로지스틱스에서 받은 레드 그레이브 지도를 엘리자베스 바닥에 펼쳐놓았다. 거기에는 핵폭탄이 떨어진 이후, 거의 리셋이나 다름없게 된 작은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세력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번 의뢰는 네오 쿄토의 막부. 그리고 디바이너 교단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이야. 이번 의뢰를 해결 시, 디바이너 교단을 적대하게 되겠지? 아무래도. 디바이너는 레드 그레이브 안에서도 상당한 패권을 가진 세력이야."

지도에 그려진 '디바이너'의 문양을 보고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던 에리스는 금방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문양인 건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문양... 200년 전에 인간과 악마 사이에 전쟁이 있었을 때, 인간 측 군에서 사용했던 앰블럼이에요."

"디바이너 교단은 현재 핵 때문에 박살 난 인간계를 인간의 기술로 다시 복원하고자 하는 세력이야. 강력한 고대 인간들의 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그리고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패권을 쥐고 있지.

디바이너는 '순수한 인간의 힘'을 통한 지상의 정화를 목표로 하고 있어.

막부가 다루는 사이버네틱 임플란트 같은 기술은 주로 배척되는 편이야. 인간의 신체 부위를 기계로 바꾸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이번 의뢰에서 디바이너는 사이버네틱 기술력을 발굴해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가능성은 크게 세 가지. 그들의 교리가 바뀌었거나, 아니면 비밀리에서 쓰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사이버네틱 기술에 대한 대항법을 찾아내기 위해서거나."

단테는 짧게 압축해 말하곤 디바이너 교단 본부로 향하는 철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이게 '레일로드'야. 현재는 디바이너 교단이 점유하고 있고. 레드 그레이브 구석구석을 다니는 철도야. 디바이너는 이걸 이용해 열차로 물자를 실어 나르고 있어.

이 열차를 습격한다는 건, 디바이너를 적으로 돌린다는 셈이고 운 나쁘면 디바이너에게 이교도 취급받아갖고 말살당할지도 몰라.

레이븐은 기본적으로 중립이고, 어느 세력의 의뢰든 전부 받아들이지만. 그건 레이븐이라는 황무지의 유일무이한 자유인으로서 가지는 입장 상의 문제고.

알게 모르게 쌓여가는 사적 감정은 어쩔 수가 없는 법이니까. 무엇보다, 이번 일에서 네오 쿄토의 도움은 거의 받을 수가 없어.

그들이 원하는 건 디바이너와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이 발굴한 사이버네틱 기술력을 빼돌리는 것이니까.

만약 디바이너의 추적을 내가 받게 되었을 때, 쿄토 측에서 나를 고용했다는 사실이 디바이너에게 알려지면 안 되니, 대외적으로 날 도와줄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지게 돼. 이게 좀 걸려."

보수는 지금까지 맥킨지와 나눴던 돈을 까마득히 상회할 정도의 액수다. 암암리에서긴 하지만, 뒤가 구린 녀석들도 아닌 막부의 지도자로부터 직접 의뢰를 받은 셈이니 말이다.

"으음... 여러모로 복잡하네요. 이건. 단테씨는 그래서 어쩔 생각이신가요?"

이번 일을 받게 된다면 어쩌면 오랫동안 얼굴조차 보지 못 했던 베아트리체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군이 아니라 '적'의 형태가 되겠지만.

한 때 레이븐즈 로지스틱스에 몸 담고 있는 그녀라면 자신이 하고 싶어서가 아닌, 의뢰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유로운 용병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악감정을 가지게 될 일도 없을 것이다.

'전' 아내를 보기 위해 교단을 적으로 돌리는 의뢰를 냉큼 받아버린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결정이 아닐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좋아. 받자."

표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단테가 결정하자, 에리스는 그 나름의 생각이 있겠거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강도짓이나 다름없는 열차 강도 의뢰에 군 소리를 하지 않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끼워 넣었다.

"알았어요. 저도 협력할게요.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뭔데?"

"민간인의 희생은 절대로. 저얼대로 내면 안 돼요. 알겠죠?"

"평소에도 민간인까지 휘말리게 하는 편은 아니야.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말이지."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열차 강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 무엇이 있는지, 철저히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먼저 레일로드 주변을 교단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을 거야. 그 녀석들을 사전에 어떻게 해놓지 않으면 막상 사건이 터졌을 때, 일이 곤란해져. 먼저 녀석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어."

두 번째로 단테는 레일로드의 선로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두 번째로 열차는 가만히 있지 않아. 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외진 곳. 그중에서도 경비가 가장 약한 곳을 노려서 그 자리에 정차시킬 필요가 있어. 열차의 운행을 강제적으로 멈추게 할 만한 수단이 필요하겠어."

데이터 칩의 위치 같은 건 막부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다고 쳤을 때, 현재 중요한 건 크게 이 두 가지인가. 단테는 머릿속에서 작전을 준비하다가, 먼저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였다.

"열차의 동력을 자체를 차단하는 건 어려울 거야. 하지만 열차를 보호하는 보호막의 동력을 해제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할 거야.

보호막의 동력을 차단한 다음, 선로 한가운데에 핵엔진으로 돌아가는 차 몇 개를 배치해놓으면 핵폭발로 열차가 날아가는 걸 경계해 멈출 수밖에 없겠지."

구해야 하는 정보는 그렇다면 보호막 동력을 차단할 수단이랑 핵엔진 고철 차량 몇 개 정도가 되겠네. 후자는 그냥 대충 스캐빈저들에게서 구하면 될 거고. 전자가 문제가 되는데."

"잠입을 시도해보는 건 어떤가요? 단테씨는 현재 잠입에 유리한 서번트를 다수 보유하고 계시잖아요. 픽시의 요정의 가루는 은신을 제공해주고. 뭣하면 로키도 쓸 수 있고요."

"응. 잠입도 좋은 선택지긴 하지만. 보호막 동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까. 이를 해제하기 위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단순 잠입으로는 아무래도 어려워. 이거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단테는 씩 웃으며 짐칸 구석에 놓인 캐비넷에서 옷장을 갑자기 뒤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그가 꺼내 보인 건... 네오 쿄토의 데모닉 사무라이를 비롯한 주민들이 곧잘 입고 다니는 극동풍의 하늘하늘한 의상이었다.

"내가 레이븐이라는 걸 속이고 접근하면 돼. 일단은 오다라는 그. 쇼군의 책사인가 뭔가 하는 작자에게 연락을 해놔야겠어. 의뢰를 받아들이겠다고. 그럼 슬슬 밑준비에 들어가 볼까?"

* * *

레일로드 주둔군.

현재 디바이너 교단이 점거하고 있는 철도를 다른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배치된 이 교단 직속 기사들은 오늘도 주변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기사'라는 계급답게, 그들은 하나같이 고대 서양의 봉건제 시대 때 흔히 있었던 기사 계급의 무겁고, 두꺼운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손에 다연장 유탄 발사기부터 시작해서 무거운 미니건. 화염방사기와 같은 중화기로 무장한 그들의 화력이 어떨지는 직접 그들의 무기에 맞아보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단테는 엘리자베스의 짐칸 위에서 쌍안경으로 레일로드의 상황을 확인하곤 허리춤의 칼을 고쳐 찼다.

"사무라이를 흉내 내는 일은 어렵네."

평소 잘 입고 다니는 레이븐의 복장에서 극동풍의 사무라이 복장으로 갈아입은 단테는 툴툴거리며 자신의 복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변장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고는 해도, '까마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기는 싫었던 그의 복식은 대체로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얼굴을 최대한 가리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삿갓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거기에 허리춤에는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타치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평소 다양한 총기를 쓰는 걸 선호하는 단테였지만, 검에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서번트를 통해 보정을 받으면, 일반적인 인간 정도는 뛰어넘는 힘과 민첩을 갖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잠시 단테의 곁을 떠나 있었던 픽시가 단테 곁으로 날아들어선 날개를 파닥이며 보고했다.

[달링! 부탁한 대로 주변에 있었던 좀비들을 매혹의 날갯짓으로 끌어들여 왔어. 이제 곧 있으면 레일로드에 주둔해 있는 군대랑 부딪히게 될 거야.]

"수고했어. 그럼 픽시, 잠깐 들어가 있어. 다른 서번트로 교체할게."

[응.]

[소환 : 영령형 스카아크.]

단테는 장비한 서번트를 픽시에서 민첩과 근력에 특화된 스카아크로 교체하고 트럭의 짐칸에서 뛰어내렸다.

쌍안경으로 멀리 주둔군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 무지막지하게 불어날 대로 불어난 좀비의 '호드' 한 무리가 레일로드 주둔군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해왔다.

"시작해볼까."

* * *

"저... 저게 뭐야아아앗!!!!"

무시무시한 기세로 쳐들어오기 시작한 좀비 떼를 보고 기겁한 레일로드의 주둔군들은 각자 장비한 무기의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미니건의 총탄과 화염방사기의 화염이 순식간에 좀비 호드를 집어삼키나... 싶었지만. 한 번에 처리하기에는 그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았다.

"여기는 레일로드 7구획의 마일즈 병장이다! 대규모의 좀비 호드와 현재 교전 중! 지원! 지원이 필요하다! 빨리!!"

레일로드 주둔군이 순식간에 창궐한 좀비 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스카아크의 민첩 보정을 받아 나타난 단테는 허리춤에서 폼 나게 타치를 뽑아 들어 닥쳐오는 좀비의 목을 일격에 베어냈다.

"참...!"

좀비의 목이 날아가자마자, 단테는 스카아크에게 자신의 스탯을 올리는 '랭크 업' 기술을 사용해 후속을 철저하게 대비했다.

[스카아크 : 창술사의 발놀림.]

'회피' 행동 시에 추가 민첩 스탯 보정을 받을 수 있는 마법을 발동하자, 단테에게 있어, 그의 살과 뼈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오는 좀비의 움직임은 굼벵이보다도 느려 보였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칼춤을 추듯 아름답게 검을 휘둘러 좀비들을 정리하자, 레일로드를 필사적으로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순간 단테에게 집중되었다.

삿갓을 쓰고, 기다란 쿄토의 칼날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그들에게 있어선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창술사의 발놀림'을 제외한 마법의 사용 없이 타치 한 자루와 제 몸뚱이 하나로 레일로드를 급습한 좀비 무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정리해버린 단테는 주변에 고요가 찾아오자, 주머니에서 작은 천을 꺼내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어, 칼집에 타치를 집어넣었다.

"가. 감사합니다! 다. 당신은?"

단테는 삿갓을 더욱 깊게 눌러쓰며 짧게 답했다.

"도-모. 그저 길을 지나가는 로닌이었을 뿐. 신경 쓰지 마시게나.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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