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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이후 용사 파티-20화 (21/49)

제 20화

열차 강도하는 용사님. (1)

[우리가 서로 그날, 헤어진 이래로 벌써 3년이란 시간이 지났어. 네가 알려줬던 편지 예절대로, 존댓말로 최대한 작성해보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스타일은 나랑은 너무 안 어울려서 쓰다가 중간에 때려치웠어.

네가 곁에 있었더라면, 지극히 너답다며 내 머리를 쥐어 박았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멍청한 내 머리를 쥐어박아줄 사람도 딱히 곁에 없으니, 내 스타일대로 적어나갈게.

레이븐즈 로지스틱스에서 남은 나는 지금도 여러 황무지의 여러 세력들로부터 의뢰를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가장 최근에는 홀리 소속의 간부에게 의뢰를 받았었어.

맞아, 네가 속해 있는 디바이너 교단의 홀리. 하지만 애석하게도 녀석이 먼저 내 뒤통수를 후리는 바람에, 나도 그냥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겠다 싶어서 나도 통수를 후려줬지.

최근 홀리랑 디바이너 교단은 용사 전설에 흥미를 갖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쪽 의뢰를 해결하다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몇 개 얻었어.

하나는 고대 유적에 잠들어 있던 요정이야.

요정이라고 해서 픽시 같은 걸 상상하면 실망할 수도 있겠는데, 마법을 쓸 수 있는 인간이더라고. 꽤나 쓸만한 거 같아서, 지금은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여행하고 있어.

또 하나는 고대 유적에 있던 '성검'이야.

리버레이터라는 이름의 거대한 기계 대검인데. 이게 물건이야. 마탄을 소모해서 서머너도 서번트 급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해주더라고. 요정의 말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내가 용사래.

반인반마에게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고 있어. 그 희대의 제노사이드를 일으킨 사람의 칭호를 갑자기 이어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미안. 너무 내 얘기만 했지? 최근은 좀 어때? 잘 지내고 있어? 교단에서의 생활은 어때? 몸 아픈 데는 없고? 이제는 완전히 남남이고, 헤어진 사이니까. 안부를 묻는 게 정말 이기적일 수는 있지만.

버질이랑은... 잘 지내고 있어?

아니... 이건 너무 오지랖이었나. 아무튼, 로지스틱스를 나와 교단에 들어간 만큼, 네가 거기서 너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없더라도 잘 지낼 수 있다고. 그 날 내게 말했었으니까. 그치?

그럼... 슬슬 여기서 끊을게.

언제나 널 사랑하는 단테가.

까마귀의 마녀, 베아트리체에게.]

* * *

"주인님. 뭐에요? 그거."

편지 작성에 집중하고 있던 단테는 옆에서 에리스가 느닷없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어보자 황급히 거의 구기듯이 편지지를 접어 허겁지겁 코트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이번 의뢰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거뿐이야."

"기록이라면 소환기에 남기지 않으셨나요?"

에리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단테는 고개를 애써 저으며 부정했다.

"글로도 남겨놓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아 그렇게 감추시면 괜히 궁금하잖아요. 의뢰 내용이야 제가 읽어도 뭐 딱히 상관없지 않나요? 이리 줘보세요."

에리스가 단테의 꾸깃꾸깃 접힌 편지에 손을 뻗자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단테는 몸을 배배 꼬다가, 결국 저항 끝에 편지를 입 안에 그대로 쑤셔 넣었다.

"아므허도아히아이가(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격하게 저항하는 단테를 보고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 에리스는 괜히 물어봤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저는 또 무슨 연인한테 편지라도 쓰는 줄 알았거든요. 뭔가 얼굴이... 되게 주인님 답지 않게 엄청 진중해서."

"... 꿀꺽."

에리스의 말이 정확히 단테의 가슴을 후벼파오자, 당황한 역전의 배달부는 자신도 모르게 입 안에 머금고 있던 편지를 무심코 삼켜 먹어버렸다.

"콜록. 콜록콜록. 으에! 퉤퉤... 맛없어."

"머. 먹을 거까지는 없잖아요. 더 이상 안 캐물을 생각이었는데..."

"나도 먹을 생각까지는 없었거든."

정말로...

이딴 게 용사?

에리스가 경멸 섞인 표정으로 단테를 바라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짐칸 안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던 생수병을 하나 집어 들어 콸콸콸 입 안에 쏟아부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떡하실 거예요?"

에리스가 묻자, 단테는 어깨를 움츠리며 자기도 모른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의뢰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의뢰를 받으러 돌아다니던가. 둘 중 하나지? 당분간은 네오 쿄토에 머무르지 않을까? 아직까지는 이곳을 떠날 이유가 크게 없어 보이거든."

"그래요?"

"보통 이런 대도시에는 일거리가 넘쳐나는 법이니까. 그리고 은 등급 정도 되는 레이븐은 알아서 일이 굴러들어오는 경우도 많아. 반대로, 일 말고 골칫거리가 굴러들어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리고 이전 의뢰 때 두둑하게 벌어놓은 돈이 있으니까. 이제 걱정할 필요 없어."

단테는 호쾌하게 웃으며 짐칸 안에 마련된 야전 침대에 누워 발을 뻗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에리스는 그의 짐칸 한 구석에 있던 동전 주머니를 단테에게 보여주며 외쳤다.

"그렇게 벌어놓은 돈을 전부 탕진하셨잖아요! 쿠이쿠이(네오 쿄토에서 '화투'를 칭하는 말.)랑 포커랑 블랙 잭이랑 슬롯머신이랑 파칭코에, 그리고 여자들 엉덩이에 돈 꽂아준다고도 엄청 낭비하셨으면서!"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어느 정도 남아있었는데. 벌써 별로 안 남았다고?"

"기억 안 나세요? 저희가 왜 여관이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짐칸에서 묵고 있는 지? 저희 숙박비도 못 내서 쫓겨난 거라고요! 조금만 돈을 계획적으로 쓰셨다면 여기서 하룻밤을 지낼 필요는 없었는데!"

"아하하.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아하하. 로 넘어가실 일이에요? 이게?"

대체 경제 관념이 어떻게 된 건지...

"뭐, 엘리자베스의 조수석도 나쁘지 않잖아?"

단테는 야침에 누운 채로, 에리스의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듯이 야한 잡지 하나를 펴서 그대로 눈을 덮었다. 펼친 페이지에 딱 거의 헐벗다시피한 여자가 보이자 흡족한 얼굴로 그는 다리를 꼬며 에리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엘리자베스 주변에 정찰을 보내놓았던 서번트로부터 누군가가 트럭에 다가오고 있다는 정보를 받은 단테는 잽싸게 고개를 돌려 조악한 야침에서 일어났다.

"뭐. 뭐에요?"

단테는 곧장 벽에 걸려있던 총을 허리에 매고, 서번트에게 명령을 내릴 준비를 마치곤 트럭의 짐칸에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저기 알아서 내려오는군."

엘리자베스 근처에 다가온 그들은 짐칸에서 단테가 내려오는 걸 보고 건방지게 손가락질을 하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특별한 무장은 장비하고 있지 않다.

고작 해봤자,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권총 정도가 전부.

그러나 눈썰미가 뛰어난 단테는 그들이 입고 있던 극동풍 옷 안 쪽에 모종의 암기가 숨겨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네오 쿄토에 흔하디 흔한 서민이나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복장을 입고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이들이 풍기는 분위기로 봐선 평범한 배달 업무나 시키려고 이 야심한 밤에 단테를 찾아온 건 아닌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테가 이 정도로 경계 태세를 잡고 있던 이유는 또 따로 있었다. 서번트로부터 특별한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지금 그 앞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저 두 명 말고도 주변에 숨어있는 사람이 한 두 명 더 있었다.

네오 쿄토를 휘감는 얕은 바람을 따라 다른 사람이 내는 사소한 기척이 단테의 귀에 흘러 들어온 덕에 그는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네가 이번에 네오 쿄토에 흙발로 들어왔다는 카라스인가?"

오른쪽에 있던 남자가 말을 걸자, 단테는 두 가지의 가설을 세웠다.

한 가지는 맥킨지와 관련된 세력이 고용한 암살자일 가능성이었다.

쿄토 타워에서 잭 오 랜턴의 '폭발의 룬' 마법을 이용한 암살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증거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흉조라고도 불리는 레이븐이 쿄토에 들어오고 난 뒤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 그리고 타워에 레이븐을 제외한 다른 마법 능력자들이 거의 출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테가 의심을 받는 건 거의 당연한 수순에 가까웠다.

홀리의 지원을 받아 돈도, 나름의 권력도 두둑한 맥킨지라면, 사후에도 자신을 괴롭혀올 가능성이 충분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자신에게 의뢰를 하러 온. 정확히는 '뒤가 구린 류'의 의뢰를 맡기러 온 고용주일 가능성이었다.

이 경우는 오히려 환영할 만하다. 안 그래도 지난번 의뢰로 벌어들인 돈은 거의 다 탕진해버렸고, 슬슬 새로운 일거리를 받아도 별 문제가 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테는 상대가 먼저 총을 뽑지 않는 걸 확인하고,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물었다.

"그래. 내가 당신들이 찾던 레이븐이올시다.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

단테가 묻자, 그를 찾아온 두 명의 사내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를 하나 하려고 하는 데 괜찮겠나?"

"언제나 환영이지. 그래서. 뭘 어디까지 배달해주면 되나?"

"단순 배달 의뢰가 아니네. 소문에 의하면 자네는 '은 등급'. 백금. 금 바로 아래 등급의 최상위권 실력을 갖춘 용병이라더군. 맞나?"

"그런 셈이지."

"다소 위험 부담이 있는 일이네만... 괜찮겠나?"

"이야기에 따라서? 괜찮아. 사업 상 의뢰인에 대한 건 절대 비밀로 부치고 있으니까. 자자.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어여 들어와. 어서."

단테가 말하자,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리스는 그에게 물었다.

"이 타이밍에 의뢰라니 고맙긴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요?"

"무슨 분위기?"

단테가 묻자, 에리스는 끙끙거리더니 대답했다.

"뭔가. 떳떳하지 않을 일을 시킬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그건 이야기를 들어봐야지."

* * *

"본격적으로 소개를 하도록 하지."

엘리자베스의 좁은 컨테이너 안에 앉은 그는 두 의뢰인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현 네오 쿄토를 이끄는 막부. 그 쇼군의 책사. 오다라고 하네."

"막부의 책사님께서 직접 의뢰를 하사하실 줄이야."

레이븐은 담배 하나를 입에 꼬나물고 불을 붙였다.

"그것도 이런 야밤 중에 의뢰를 한다는 건. 뭔가 뒤가 구린 일일 거 같은데."

"자네 말이 맞네. 이 일은 외부에 알려져서는 꽤 곤란한 일이야."

"뭐길래 그러는 거야?"

"현재 네오 쿄토는 종교 도시 국가, 디바이너 교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나름대로 구축 중이지.

그런데 최근 뒷 정보망에 의하면, 디바이너 교단 측에서 독자적인 사이버네틱 기술을 구축하기 위해서 구세대의 유물을 여기저기에서 파헤치고 있다는군.

현재 디바이너가 쿄토와 협력하고 있는 이유는, 데모닉 사무라이 기술 및 사이버네틱 관련 기술이라도 해도 무방해.

만약 디바이너 교단이 독자적인 사이버네틱 기술을 구축하게 된다면, 디바이너와 쿄토 사이의 우호 관계는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르게 되는 셈이 된다.

그래서 한 가지 네게 의뢰하고 싶은 것이 있다. 현재 디바이너는 전쟁 전 세대 때 사용하던 철도에 자기네들이 나름대로 개발한 열차를 이용해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운반 및 수송하고 있네만.

최근 녀석들이 발굴해낸 유적 중에서 사이버네틱 관련된 기술력이 응집된 '데이터 칩'을 손에 넣은 모양이야. 이게 디바이너의 손에 넘어가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네.

그래서 하나 제안하겠네만, 녀석들의 열차를 습격해 정지시키고, 사이버네틱 기술력이 담긴 그 데이터 칩을 우리 막부 쪽에 넘겨줬으면 해."

"막부 쪽에서 직접 공격을 가하면 안 되는 건가?"

"그렇게 되면 현재 쿄토와 디바이너의 우호적 관계가 깨져버리게 되네. 여기서 중요한 건, 우호적 관계는 이전처럼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일세.

자네는 제3세력. 자네 자신이 고용주를 밝히지 않는 이상은 그 누구도 자네 뒤에 누가 있는 지 모르지. 그 신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면 쿄토는 디바이너와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로, 사이버네틱 기술력만을 독점할 수 있어."

"흐음."

교단과 직접 적대하게 된다면... 교단 기사들과 싸우게 된다는 말이 되나.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잘못하게 되면 현재 교단 소속이라고 할 수 있는 베아트리체와도 적대 관계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알겠어. 대충 의뢰 내용은 이해했어. 디바이너를 상대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너희들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리스크 리턴을 조금 따져볼 테니까. 하루 정도 기다려줄 수 있겠어?"

"해당 열차가 지나가는 건 지금으로부터 나흘 뒤. 적어도 그 안에는 결정해주길 바라네. 흉조여, 부디 현명한 선택을 내리길 바라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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