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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이후 용사 파티-18화 (19/49)

제 18화

용사 각성. (2)

"주인님. 지금 바로 움직이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단테는 총과 탄약을 챙겨 서둘러 엘리자베스의 짐칸에서 내려왔다.

방탄 코트를 제외한 상의는 전부 벗고, 붕대를 훤히 드러낸 채 전장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위태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방탄 코트 아래 드러난 붕대에선 아직까지도 붉은 피가 선하게 배어나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테는 이 정도 상처는 별 거 아니라면서 신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메마른 미소를 흘렸다.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움직이는 편이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성검을 회수하려드는 단테를 막으려고 했던 에리스는 그제야 단테가 어째서 이렇게 서두르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네오 쿄토처럼 네온사인의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가 아니라, 그저 핵폭탄이 떨어진 탓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고대 유적에 불과하다.

어둠이 내리앉으면, 분명히 그것들이 나타난다.

섀도.

인간 내면 깊숙히 존재하는 공포심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존재.

별명으로는 레드 그레이브 황무지의 부기맨. 사이보그 닌자도, 야생 영체도, 성검에게 꿰뚫리는 것조차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단테조차 두려워하는. 안 좋은 의미에서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섀도가 튀어나오게 된다면 단테가 할 수 있는 일은 섀도가 얌전히 물러나길 바라며 손전등이나 랜턴으로 빛을 비추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어두워지기 전에 성검을 회수한다는 생각 자체는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알았어요 그럼. 저도 함께 갈게요."

"아니. 너는 엘리자베스를 지켜줘."

단테는 소환기를 통해 현재 시간과 지금 소환 가능한 서번트를 살펴보았다. 픽시... 는 미카에리스의 복구를 위해 희생했는지 사용이 불가능했으며, 잭 오 랜턴 역시 사용 불가능.

남은 건 인간형 레인저와 신령형 로키 뿐이었다. 민첩 기반 서번트가 하나, 매력 기반 서번트가 하나. 이 정도면 한 번 이미 정리가 끝난 고대 유적 정도야 충분히 돌파할 수 있다.

현 시각 오후 4시 50분.

날이 어두워지기까지 거의 남지 않았다. 빨리 성검을 회수하고, 캠프 파이어를 세워서 오늘 하루를 나지 않으면 섀도에게 습격당할 확률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캠프 파이어 준비 해놔. 랜턴이란 랜턴에는 불 다 켜놓고. 알았지?"

"그래도... 걱정이 되는데."

단테는 왼손에 차고 있던 소환기를 흔들며 대답했다.

"로키랑 레인저가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야. 갔다 올게."

이미 대부분의 터렛은 제거해놨으니, 공격당할 걱정은 없다. 그래도 순간적인 기습에 대응하기 위해, 단테는 장비한 서번트를 '로키'에서 '레인저'로 바꿔 민첩 스탯을 조금 올렸다.

처음 들어갔을 때 길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폭발물로 잔해물을 제거해 뚫은 지하 통로 안으로 들어가, 기분 나쁜 마법사의 연구소를 지나 쭉 걷자, 바로 한베와 싸웠었던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아직까지도 옅게 붉은빛은 은은하게 내뿜은 성검이 떨어져 있었으며, 그 옆에는 어설프게 기습을 시도했다가 역으로 당해버린 미숙한 사이보그의 그림자 닌자가 있었다.

단테가 서두른 이유는 성검의 회수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로 이 닌자 때문이기도 했다.

섀도의 특성상, 무기물보다는 유기물. 그중에서도 '인간'과 '악마'를 주로 습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밤 중에 이 닌자의 시체를 방치해뒀다가는 섀도의 먹잇감이 되어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단테는 성검의 회수보다 한베의 시체에 더 관심을 가진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이유는 단순한데 먼저 가장 첫 번째 목적은 그가 원래 갖고 있던 장비를 회수하기 위함이다.

황무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러한 사소한 자원의 회수가 매우 중요하다.

길바닥을 나돌아 다니는 로그 새끼들이야 갖고 있는 자원이 별 거 없기 때문에 가끔 주머니 두둑하게 가진 탄약 정도를 제외하면 주머니를 잘 털지 않지만, 한베는 다르다.

단테의 손에 어이없이 처단당하긴 했지만, 나름 이 녀석은 레이븐즈 로지스틱스에서 일했던 '전' 까마귀다. 그만큼 지닌 장비나 물자의 가치는 높다.

한베의 몸에서 적어도 무사히 회수가 가능한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들을 분리해서 챙기고, 녀석이 보유하고 있던 소환기 기판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소환사 본인의 바이탈 신호가 끊기게 되면서 자동적으로 기능이 정지됨과 동시에 서번트에게 명령을 내리고, 사역하는 기능은 맛이 간 듯 보였다.

그 외에 일반적인 '단말기'로서의 기능은 무사했기 때문에, 단테는 기판을 이리저리 조작해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했다.

그리고 여기에 단테가 한베의 시체를 뒤적인 두 번째 이유가 존재했다.

그건 바로... 한베의 '의뢰주'를 찾는 것이었다. 그야 지금까지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구린 일을 많이 해온 단테긴 했지만, 이번 네오 쿄토와 관련된 한 차례의 의뢰에서 뒤가 구릴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물론 맥킨지 녀석에게 에리스를 넘겨주지 않고, 데스 스토커의 정크 파츠를 넘겨준 게 그나마 뒤가 구린 건데 그거야 맥킨지가 정확하게 '요정'을 회수하라고 언급을 안 했으니, 자업자득인 거고.

아무튼 간 단테는 의뢰주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자신이 언제부터 노려졌는지, 왜 노려졌는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어디 보자... 가장 최근 장부가... 이거네."

2293년에 받은 의뢰를 쭉 돌아보다가, 가장 최근에 받은 의뢰 파일에 접근한 단테는 '의뢰주'의 이름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이거 어이가 없네."

거기 적혀있었던 건... 바로 '맥킨지'.

자신에게 성검을 회수해오라고 의뢰를 내줬던 바로 그 맥킨지였다.

의뢰의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마지-테크 유적의 배달 의뢰에서 원래 배달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여자'를 배달하지 않고 데스 스토커의 폐품을 떠넘기는 것으로 의뢰주를 배신한 단테를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데모닉 사무라이로 암살을 시도했으나, 소환사인 단테를 상대로는 역부족.

따라서 맥킨지는 같은 소환사인 한베를 고용.

만일 한베가 단테를 처리해오고, 그와 함께 다녔던 여자와 회수해오기로 했던 성검까지 함께 회수해올 시 단테가 받기로 했던 보수를 그대로 한베가 받게 된다는 터무니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심 어이가 없던 단테는 뚜둑, 뚜둑하고 고개를 두 어번 정도 꺾고 손가락을 꺾었다. 의뢰주는 알았다. 누가 자신에게 데모닉 사무라이 무리를 보냈는 지도 알았다.

단테가 해야 할 일은 그렇다면 단순했다. 이 거친 황무지를 살아가면서 하나 배운 점이 있다면 살면서 빚을 지게 된다면, 그 빚이 좋든 나쁘든 배로 갚아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감히 그 누구도 아닌 내 통수를 후려?

부글부글 화가 끓었던 단테는 한베의 시체를 걷어차며 바닥의 성검을 들어 올렸다. 대체 무슨 기술력이 들어간 건지,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쇳덩어리나 다름없는 성검의 무게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단테는 그렇게 조용히 읊조리며 더 이상 어두워지기 전에 성검을 어깨에 살짝 비스듬히 걸친 채로 용사의 길드 본부를 빠져나갔다.

* * *

"수동 기어도 그리 어렵지 않다니까?"

네오 쿄토로 다시 돌아오는 길의 엘리자베스 안.

날이 밝자마자 보수를 받기 위해서, 그리고 빚을 갚기 위해서 일찍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한 단테는 오늘 어째서인지 운전석이 아니라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제가 살던 시대... 에서는. 전부 차는 자동 기어였다고요."

"자동은 로망이 없잖아 로망이. 자자. 스무스하게 출발해봐. 시동 안 꺼지게 조심하고."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넣어가며 출발했던 에리스는 거의 간 200년 만에 해보는 자동차 운전에 잔뜩 긴장해 단테의 말에 대꾸조차 못 하고 딱딱하게 굳은 채 앞만 보고 있었다.

에리스가 단테 대신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는 현재 크게 부상을 입은 단테가 운전대를 잡도록 놔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환자에게 안정을 취하게 하지는 못할 망정, 운전대까지 잡으라고 하는 건 지나치게 염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짐칸 한 구석에 실려있던 '성검'과 관련이 있었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용사의 성검, 모델명 S-24 리버레이터는 단테를 적합자로서 골랐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단테는 '용사'의 신분에 있으며, '요정' 신분인 에리스의 역할은 이 용사를 보좌하고 이끌어주는 것. 즉, 현재 에리스와 단테는 완벽한 '주종 관계'로, 에리스는 단테를 섬기는 '종'인 것이다.

단테는 에리스에게 돌아오는 길만큼은 에리스가 운전할 것을 부탁했다. 단테는 물론, '부탁'의 어조였으며 이걸 강제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 '부탁'은 용사의 종이나 다름없는 에리스에게 있어선' 명령'과 같았다.

"주인님."

"응? 왜?"

"S-24 리버레이터는 주인님을 자신의 적합자로서 선택했어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 이번 의뢰, 맥킨지인가. 하는 의뢰주에게 정말 성검을 넘겨주실 생각이신가요?"

"왜?"

딱히 성검 따위, 어찌 돼도 좋다는 태도로 단테가 되묻자 에리스는 걱정 섞인 얼굴, 익숙지 않은 운전 실력 때문에 나온 경직된 얼굴이 반반 섞인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그. 맥킨지 씨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요. 주인님이 성검을 갖고 계신 편이... 저는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내가 용사의 재목에 알맞은 사람이라고 넌 생각하는 거야?"

에리스의 속을 떠보기 위해 슬쩍 단테가 묻자, 에리스는 이번에는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제가 생각하는 용사의 모습이랑은 조금 괴리가 있지만요. 그건... 200년 전 실제 존재했던 용사도 그리 다르지 않았던 거 같아요. 이번 길드 본부를 들르게 되고. 이런저런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서... 정말로 제가 섬기고 싶었던 용사라는 존재는 어떤 것일까.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네가 내린 결론은 뭐야? 내가 용사의 재목에 알맞는 사람이 아니라면, 왜 내가 성검을 갖고 있는 편이 더 나은 거지?"

"적어도 리버레이터는 주인님을 택했고. 한 번 적합자가 등록된 성검은 그 주인인 용사가 사망하지 않는 이상은 오로지 자신이 적합자로서 선택한 주인 외에는 다른 사용자는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냥 고철에 불과한 거죠.

그리고 주인님이 용사의 재목에 알맞은 사람이 아니라면, 제가 변화시킬 수 있어요. 그것이... 용사의 가이드인. 요정의 역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요. 저는요."

에리스의 힘 찬 대답에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그럼 원래 맥킨지에게 건네주기로 했던 성검을 계약 따위 좇까 버리고 내가 가져버리는 것부터가 이미 네가 상상하는 완벽한 '용사 상'에서 벗어나는 거 아니냐?"

"그. 그거언..."

허점 투성이의 에리스의 논리에서 단테가 의표를 찌르자, 에리스는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에리스의 모습을 보고, 단테는 호쾌하게 웃어 보이더니 말했다.

"뭐 됐어. 성검은 내가 가질 거야. 어차피 성검이 나를 적합자로서 택한 이상, 맥킨지 녀석에게 건네주고 몇 푼 안 되는 돈 받을 바에는 내가 쓰는 편이 더 낫겠지. 다른 곳에서 고철 덩이가 되는 것보단. 그리고."

단테는 짧게 배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며 트럭의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며 담배를 입에 꼬나물었다.

"그리고. 맥킨지 그 씨발 새끼한테는 갚아야 할 빚이 있어."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요?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한베를 고용한 고용주. 그 사이보그 닌자의 시체를 뒤져가지고 알아냈어. 맥킨지야."

"맥킨지가요? 왜요?"

"왜냐니. 반은 너 때문이야. 녀석은 최초의 배달 의뢰에서 데스 스토커의 정크 파츠가 아니라 '널' 갖고 싶어 했던 거지. 난 그걸 숨기고 대신 정크 파츠를 녀석에게 떠넘겼고.

그 건이 마음에 안 든 맥킨지는 성검 회수 의뢰를 하러 떠난 내 통수를 쳐서. 운이 좋으면 성검이랑 요정. 둘 다 자신 아래에 두고 싶었던 거야. 새로운 암살자를 고용해서 말이야."

"그... 그렇군요. 그래서... 어떡하실 생각이시죠?"

"그건 네오 쿄토에 돌아간 다음 천천히 생각해봐야지. 야 앞에 봐 앞에. 도로 박살 나 있잖아! 브레이크!"

"아! 으아앗!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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