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화
용사 각성. (1)
한베의 행동은 신속했다.
자신의 사이버네틱 의수에 부담이 가게 될 것이란 건 자기 자신이, 상대인 단테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거다.
방금 에리스 앞에서는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보였지만 이는 순수히 그가 가진 서번트의 스탯 보정에 더해, 사이버네틱 임플란트의 힘 덕이었을 뿐,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저 검을 들어 올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지금 완벽하게 궁지에 몰린 지금, 한베가 걸어볼 수 있는 건 용사의 성검이 자신을 선택하기 바라며, 그 진정한 기능이 지금 깨어나길 바라며, 그는 무겁디 무거운 희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로키 : 변신술=뎁스 바이트.]
그 순간, 단테의 서번트인 로키의 마법이 작렬했다.
미라지 블레이드에 가려져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마법인 '변신술'은 전투 상황에서 사용 시, 서머너가 보유한 서번트의 기술 하나를 그대로 흉내내어 쓸 수 있다.
방금 변신술을 통해 '흉내낸' 기술은 바로 그의 주력 서번트 중 하나인 '환수형 리바이어던'의 물리 기술, '뎁스 바이트'. 심연 깊은 곳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괴수의 턱이 한베의 몸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직전.
한베는 아슬아슬하게 성검을 바로 잡아내어 이를 휘두르는 데 성공했다. 아슬아슬하게 뎁스 바이트를 성검으로 막아낸 한베.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암살자, 닌자라고 한들 서번트의 마법 공격으로부터 무사하긴 힘들다.
단 하나의 변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한베가 검을 쥐고 휘두르는 그 순간, 녹슬어 움직이지 않고 있던 성검의 복잡한 기계 장치가 일순 붉은빛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고철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볼품없이 녹 슨 검신은 눈 깜짝할 사이에 200년 전의 모습, 원형을 되찾았다.
그뿐이라면 모를까.
다시 정상적으로 기동을 시작한 '성검'으로부터 방금 로키를 소환할 때 단테의 소환기에서 방출되었던 마소와 비슷한, 어쩌면 그 이상의 마소가 주변 대기를 가득 메울 정도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단테도, 에리스도,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베를 노려보았다. 물론 에리스의 경악과 단테의 경악의 의미는 조금씩은 달랐다.
단테의 경우 설마 저 200년 되어 녹슬 대로 녹슬어버린 고철덩이에 불과한, 그냥 전설로만 내려져오는 용사의 전설이 진짜일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나온 반응이었으며.
에리스의 경우,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을 암살하러 온 극동풍의 닌자가 별 어려움도 없이 성검을 각성시킨 부분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키기기- 기긱!
성검과 로키의 '뎁스 바이트'가 맹렬하게 부딪히며 상쇄되었다.
그 순간, 한베는 어쩌면 이것이 자신이 쥘 수 있는 마지막 역전의 기회라고 생각하곤 단테가 다음 마법을 쓰기 전에,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새로운 서번트를 소환하기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성검의 검 끝으로 단테를 매섭게 찔렀다.
뒤늦게 단테는 자신이 애용하는 다용도 나이프인 마체테를 꺼내 방어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거대한 대검을 단검 하나로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듯이, 서로의 검신은 중간에 맞부딪혔지만 체급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단테의 마체테는 뒤로 멀리 날아갔고 용사의 성검은 얄궂게도 단테의 가슴팍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커흑...!"
서번트인 로키를 소환해놓았기 때문에 데미지를 받아도 로키가 대신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검이 단테의 가슴팍을 꿰뚫기 바로 직전, 그가 소환해두었던 로키의 소환이 느닷없이 '취소'되었다.
"뭐...!?"
푸욱.
"단테 씨!! 왜...!!"
그 순간 대체 어째서, 단테는 서번트의 소환을 취소한 걸까. 어째서 강력한 서번트인 로키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는 단테의 배때지에 성검의 칼빵이 들어간 뒤에야 소환기에서 흘러나왔다.
[주의 : 당신의 '신령형 로키'의 강제 소환으로 인해, 체내 마소 수치가 정상 수치에서 189% 벗어났습니다. 사용자의 바이탈 보존을 위해, 소환을 강제로 취소합니다.]
"... 씨..... 발."
배에 성검이 꿰뚫린 채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단테는 그대로 성검이 몸에 박힌 채 다리가 풀려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쓰러질 수는 없었다.
한베가 내지른 성검은 그대로 단테의 몸을 관통해, 그의 바로 등 뒤에 있는 벽 너머까지 굳게 처박혔기 때문이었다. 마치 해부대에 고정된 개구리처럼 벽에 고정된 단테는 그대로 눈에서 빛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은 등급의 레이븐, 무려 신령인 로키를 사역해 서번트로 다루는 일류급 서머너치고는 허무한 최후였다. 전투의 승기를 자신의 전술로 기울이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최후의 순간, 자신의 몸이 버티지 못 한 나머지 어이없이 실수를 하다니.
결국, 그는 영웅도 뭣도 아닌.
그냥 평범한 용병이었다.
"후. 하하..."
한베는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역전을 해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마른 웃음을 내뱉곤 에리스를 노려보았다.
"설마 이것조차 녀석이 보여준 환영은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며 한베는 단테의 몸에 박힌 성검을 회수하기 위해 손잡이를 뒤로 잡아 끌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단테의 피를 머금고 더욱 붉게 빛나기 시작했던 성검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 이게 무슨."
계속해서 검을 끌어당겨 확실하게 단테를 끝내려 했지만, 모종의 힘으로 인해 고정이라도 된 것처럼. 사이버네틱 기술력의 힘을 빌려도 성검은 그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대신...
철컥. 찰칵... 찰칵.
검신에 피가 흡수되기 시작한 그때, 성검 내부에 있는 장치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명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은 단테의 빛을 잃은 눈동자에, 다시금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더. 럽게 아... 프네. 씨발... 거...!"
설마, 에리스는 그 경악했다.
성검은 '한베'를 선택했기에 가동된 것이 아니었다.
성검이 원했던 진정한 사용자는... 따로 존재했다. 그건 바로, 성검 그 자체가 현재 '찌르고 있던' 반인반마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용병 나부랭이인... 단테였던 거다.
턱.
단테는 살의와 복수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몸에 꽂힌 성검의 손잡이를 도로 잡았다. 그리곤 사이보그 닌자가 무슨 수를 써도 뽑을 수가 없었던 성검을 서번트의 보정조차 받지 못 한 반인반마의 힘으로 뽑아냈다.
쑤욱, 하고 검신이 몸에서 뽑혀져 나오자 그의 몸에서 피가 철철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테는 마치 성검의 힘에 강제로 이끌리듯, 그 거대한 검을 가볍게 어깨에 들쳐 매고, 쓰러뜨려야 할 자신의 적을 꿋꿋하게 그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소환기 반응 * * * 확인.
적합자 인증 * * * 확인.
요정 반응 * * * 확인.
바이탈 체크 * * * 위험.
체내에 '악마 감염' 확인.
정상 가동 판단 중 * * * 확인.
* * *
성검 : S-24 리버레이터. 가동.
당신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용사님.]
"잠...!"
[단테 : 버스트 스팅거.]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자세를 잡은 단테는 그대로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한베의 복부에 칼날을 가차없이 꽂아버렸다.
"크... 허으어억!!!"
콰직!!
분명 '인간'의 몸에 칼날을 쑤셔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칼날이 박혔을 때의 소리는 기계가 박살 나는 소리였다. 한베는 몸에 거대한 검신이 박힌 채로, 거의 인간의 부분이 남아있지 않은 그 눈동자로 똑똑히 자신을 쓰러뜨린 레이븐을 노려보며 외쳤다.
"전설의 용사라는 게 진짜... 진짜 실존할 리가 없잖아...!!!"
"맞아. 난 전설 같은 건 안 믿어."
단테는 거칠게 발로 한베를 걷어차 리버레이터를 뽑아내고, 그대로 성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하지만... 진실은 믿지."
촤악!
단테가 휘두른 대검의 검격이 한베의 목에 틀어박히자, 그대로 그의 목이 공처럼 바닥을 나뒹굴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나 그의 목 아래에서 인간의 붉은 피가 솟구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복잡한 전선과, 미친 듯이 튀는 스파크만이 있을 뿐. 그가 얼마나 인간이길 포기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아... 하아... 허윽."
그대로 성검 : 리버레이터를 떨어뜨린 단테는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선, 입에서 거칠게 피를 내뱉었다. 복부에 대검으로 칼빵이 놓아진 거다. 그 상태에서 움직일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단테 씨!"
에리스는 자신도 크게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기어서 단테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단테는 입에서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 에리스. 나 지금 좀 피곤하거든? 그... 러. 니까. 조금만 잘게. 그동안 경계나 좀 잘 서봐... 알았냐?"
거의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을 내뱉으며 단테는 감겨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200년 전의 성검을 자력으로 각성시켜, 다시 탄생한 용사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에리스는 필사적으로 방법을 강구했다.
"단테... 씨! 단..... ㅌ..."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서 희박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단테는 자신의 위장이 타오르는 듯한 격한 고통, 그리고 현기증과 함께 헛구역질을 하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우웨에에엑!!! 콜록... 콜록..."
"다... 다행이다..."
단테가 눈을 뜬 곳은... 그의 트럭, 엘리자베스의 짐칸 안이었다. 어디서 찾아왔는 지, 바닥에 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이 느껴졌다.
"정신이 드셨나요?"
"기분이 역겨워... 뭘 먹인 거야?"
"뭐 먹인 건 없어요. 그래도 살아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잠... 깐. 어떻게 살아난 거야?"
"단테 씨의 소환기를 조금 써서... 다른 서번트를 희생시키는 대신 제 미카에리스를 복구시켰어요. 미카에리스의 마법 중에는 치유와 회복의 마법이 존재해요. 어떻게든 성검에 의해 꿰뚫린 내장이랑 부러진 뼈를 원래대로 돌려놓은 덕에... 어떻게든."
"그런 좋은 게 있었으면 처음데 다쳤을 때, 진작 너 자신에게 쓰지 그랬어."
지옥에서 살아돌아온 게 다행이라는 듯이, 그는 트럭 짐칸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저는 요정. 용사님의 가이드예요. 제 치유의 축복은 저 자신에겐 쓸 수 없고. 성검에게 인정받은 용사님에게만 쓸 수 있어요."
즉 단테가 성검 : 리버레이터에게 인정받은 그 시점에서 에리스는 처음으로 단테에게 축복을 쓸 수 있었다는 거다. 문제가 있다면, 그 중요하디 중요한 성검이 지금 바로 단테 옆에 없었다는 거지만.
"성검은 어디 있어?"
"못 가져왔어요. 그거 들 수 있는 건 오로지 용사님 뿐이라서. 성검으로서 기동하기 시작한 지금 시점에선... 제 힘으로는 옮길 수가 없어요.
어차피 이미 적합자 인증이 끝난 시점에서 성검이 다른 사람을 선정할 일도 없고, 강탈당할 일도 없으니까. 일단은 여기서 천천히 회복하다가 몸이 안정되시는 대로 안으로 들어가시면 될 거 같아요."
그리고 에리스는 조금 쭈뼛쭈뼛 거리다가... 작게 칭호를 붙였다.
"주인님."
"뭐?"
단테는 끝에 작게 에리스가 붙인 '주인님'이라는 칭호에 웃음을 참지 못 하고 터뜨려버렸다.
"푸하핫! 주인님이래 주인님. 무슨 노예야? 그런 말 쓰게? 됐어 됐어. 아 배... 배 아파."
웃느라 상처가 벌어져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하자 단테는 웃음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리다가 트럭 짐칸에 몸을 기댔다.
"그건 그렇고. 저는 예상도 못 했어요. 주인... 님은. 악마의 피를 이어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용사와 그 성검은 악마를 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잖아요. 대체 어떻게... 성검을 뽑을 수 있었던 건가요?
설마 성검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을 정도로, 이어받은 악마의 피가 엄청나게 강력한 악마라든가. 그런 건가요? 아니면...?"
에리스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단테를 바라보자, 단테는 이 정도 친해졌다면 그냥 말해도 되겠다 싶어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 대단한 악마의 혈통이라도 물려받은 줄 알았다면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태어난 곳은 사창가 구석의 슬럼이야."
단테의 말에 에리스는 물어보면 안 되는 걸 물어봤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하게 매력 스탯이 높다고 생각 안 했어? 내 어머니는... '서큐버스'야. 아버지는 사창가에서 몸을 팔던 서큐버스 어머니와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름 모를 불한당이겠지 뭐."
"아... 어... 음."
에리스는 뭐라고 대답해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 한 채로, 자신이 섬겨야 할 주인 앞에서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숙였다.
"신경 쓰지 마. 왜 다들 이 얘기만 하면 침울해지는 건지 모르겠네. 따뜻한 것좀 먹고. 쉬다가, 성검이나 회수하러 가자."
"... 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