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화
도-모. 단테 상. (2)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그림자 속에서 기계의 닌자가 나타나자, 곧바로 에리스는 손에 마력을 머금고 닌자에게 바로 달려 나갔다.
[에리스 : 새벽의 속검.]
단도보다는 길되, 장검보다는 짧다. 푸른 새벽의 위광을 두른 검을 순식간에 손에 만들어낸 에리스는 가차 없이 한베를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한베는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에서 와키자시를 꺼내 그녀의 검을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각종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를 통해 거의 인간이 아닌 경지의 이른 그 신체 능력. 거기에 서번트를 통해 얻은 스탯 보정까지. 몸에 임플란트 하나 박혀있지 않은 데다, 소환기도 없고, 의지할 거라곤 체내에 있는 대천사 미카에리스의 힘뿐이었던 에리스가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의 힘에는 보통 마법으로 대항하기 마련인데, 이 전제부터 박살내는 한베의 힘에 밀렸던 에리스는 심하게 기침을 거듭하며 맹독에 중독된 단테를 바라보았다.
"단테... 씨!"
"소생은 여자를 베는 취미는 없소이다. 원하는 건 오로지 저 카라스의 목. 그리고 저기 박혀있는 성검뿐... 그러니 지금 당장 길을 비키는 게 좋을 거요. 그건 그렇고."
키잉!
와키자시를 한 번 크게 휘둘러 에리스의 새벽의 속검을 튕겨낸 한베는 거칠게 그녀의 복부에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인외의 힘으로 걷어 차인 에리스의 몸뚱아리는 그대로 성검에 한 차례 부딪히고,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커흐... 아흑...!"
"주로 단독행동을 하는 카라스가 어째서 동료를 들였나 싶었는데, 이 정도 힘을 지닌 마법 사용자를 들였을 줄이야. 녀석도 사람을 보는 안목은 있는 건가. 후후. 이건 예상외의 수확물이군. 시장에 내놓으면 비싸게 팔리겠어."
"시. 시장에 내놓는다고?"
"마법을 쓸 줄 아는 첩은 여러모로 수요가 많으니 말이오. 보아하니 얼굴도 반반하니, 비싼 값에 팔 수 있겠어."
한베는 소환기를 통해 바닥에 쓰러진 에리스의 바이탈을 순식간에 체크. 손상된 것은 오로지 그녀의 몸 안에 있는 영체 뿐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곧바로 등 뒤의 태도를 꺼내 들었다.
"이건 의외군. 사이커인 줄 알았는데. 인위적으로 영체를 제 몸에 박아넣었을 줄이야. 확실하게 영체를 손상시켜놓지 않으면 안 되겠어."
[에리스 : 새벽의 화살.]
[한베 : 그림자 베기.]
순식간에 마법궁을 활성화했던 에리스였지만, 한베는 에리스가 쏜 화살을 별로 어렵지 않게 피해내곤 검은 그림자에 검신을 숨기고, 눈 깜짝할 사이에 깔끔한 올려 베기로 그녀의 몸을 베어냈다.
"꺄아... 아악!?"
참격 한 번으로 에리스가 활성화해두었던 영체를 파괴한 데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의 옷과 살까지 통째로 베어냈다. 피가 한베의 닌자 장속에 낭자하게 튀며, 그녀는 저항 하나 하지 못 한 채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단테가 깨어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오로치의 독은 서번트 뿐만이 아니라, 서머너 본체에도 영향을 주니.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오. 유감이지만."
입에 게거품을 문 채 쓰러진 단테를 방해된다는 듯이 걷어찬 한베는 땅에 굳게 박힌 성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는 힘껏 위로 뽑아냈다.
"당신... 은."
에리스는 성검을 뽑기 직전의 한베를 향해, 단테가 자신에게 호신용으로 건네줬었던 더블 배럴 샷건을 꺼내 조준했다.
"당신은 못 뽑아. 성검은... 사람은 가려. 당신 같은... 괴짜가 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신에겐. 불가능해."
하지만 에리스의 앞에서 보란듯이 그림자의 닌자, 한베는 별 어려움 없이 땅에 틀어박힌 성검을 너무나도 간단하고, 쉽게 뽑아 들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 때문에 여기저기 잔뜩 녹이 슨 데다, 고대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기계 장치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이 이상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거대한 성검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뽑아내어 등에 들쳐멨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유감스럽겠군. 용사의 전설이라면 소생도 들어본 적이 있지. 악마의 왕을 죽이기 위해, 여행을 떠난 용사와 그 동료들의 영웅담. 그 이야기가 어째서 지금 와서 이렇게 화두에 오르는지는 전혀 알 수 없으나. 뭐, 이런 거요."
그는 그 무거운 성검을 너무나도 가볍게 휙휙 휘두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볼 일은 끝났으니... 그럼 이만 실례해보도록 하지."
쓸데없이 피를 많이 흘릴 필요는 없겠지. 한베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의 질질 끌다시피 용사의 성검을 회수해갔다.
에리스는 그 자리에서 결국은, 절망하고 말았다.
자신이 믿고 있던 고결한 용사는 없다.
전쟁이 끝나고 200년 전, 그녀 앞에 드러난 건 오로지 인간중심적으로 부풀려지고, 덧붙여진 쓸데없는 이야기들 뿐. 용사의 요정이라는 자신의 존재 의의조차도 부정당해버린 지금, 그녀의 마음 한 구석이 완전히 박살 났다.
"실례하긴 뭘 실례해.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등신 새끼야."
"?!"
성검을 끌고 돌아가는 한베의 바로 등 뒤에, 언제 나타난 건지 흑색의 코트를 두른 방독면의 남자가, 분명 오로치의 독에 중독되어 바닥에 거품을 문 채 쓰러져 있어야할 터인 단테가 서 있었다.
왼손에 권총을 들고 있던 그는 한베가 기습을 눈치채고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끄허윽?!"
머리를 제대로 총탄에 꿰뚫렸어야... 했지만.
한베가 소환해두고 있던 서번트 덕에 대가리에 구멍이 나는 꼴까지는 보지 못 했다.
하지만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급소에 정확하게 총탄이 들어간 탓에, 이 데미지를 대신 이전받게 된 영체가 마법도, 폭발물도 아닌, 단순한 .45 ACP탄 한 발에 파괴되어 소환이 해제된 것이다.
서머너와의 전투는 먼저 상대의 서번트를 소진시키거나, 상대의 서번트가 소환해제되어, 새로운 서번트를 소환하기 전, 혹은 소환기의 마탄이 바닥 나 장전해야 할 타이밍을 노려 유효타를 먹이는 것이 있다.
먼저 서번트 하나를 마탄 하나 쓰지 않고 총탄 한 발로 무력화한 지금, 전투의 상황은 압도적으로 단테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뭐. 뭐야? 어. 어떻게. 어떻게 오로치의 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지?"
한베는 경악하며 한 발 늦게 검을 휘둘렀지만, 단테는 뒤로 백스탭을 밟으며 오른손에 M4를 들고는 탄창이 바닥날 때까지 탄환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크윽?!"
쏟아지는 총탄을 기계의 몸으로 받아내면서 힘겹게 새로운 서번트를 불러냈지만, 날카로운 관통탄은 아무리 기계로 이루어졌다고 한 들, 한베의 몸을 반쯤 고철덩이로 만들어내기엔 충분했다.
서번트가 교체되기 바로 직전, 단테는 깔깔거리며 한 번 크게 웃어젖히곤 자신의 서번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로치의 독에서 빠져나왔다고? 착각도 좀 정도껏 하지 그러냐? 난 애초에 네 녀석의 수리검에 맞은 적이 없어. 야, 내가 이 바닥에서 지금까지 얼마나 굴렀는데, 내 목 따려는 암살자 한 명을 눈치 못 챘을 거 같냐? 벼어엉신! 보여주지.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그 순간.
에리스는 주변의 마소의 농도가 갑자기 짙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갑자기 마소의 농도가 짙어졌는가, 그녀는 재빨리 단테 쪽을 돌아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높은 농도의 마소는... 그의 소환기 쪽에서 나오고 있었던 거다. 반영구적 핵 에너지와 마나. 이 둘을 연료 삼아 돌아가는 소환기는 강력한 서번트를 소환하면 소환할 수록, 과부하가 걸린다.
그리고 그 과부하는... 핵 에너지 발전으로 인해 새어나오는 방사능과 마나가 결합되어 탄생한 '마소'의 폭발적인 방출로 이어진다.
거의 인간이 버틸 수 없을 정도의 진한 마소 속에서 한베는 극동의 언어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코이츠...!"
"내 적을 섬멸해라. 기만과 장난. 환영과 변신의 트릭스터여!"
그 순간, 단테의 바로 옆에서 한베를 비웃듯 킬킬거리며 환영의 장막을 찢고, 기묘한 가면을 뒤집어쓴 마법사의 모습을 한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악령도, 정령도, 영령도, 환수도 아니거니와, 인간도 아니다. 그 자리에서 단테가 불러낸 것은 '신' 그 자체였다.
"로키!"
[로키 : 미라지 블레이드.]
로키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한베의 머리 위에 푸른 빛으로 불타는 환영검을 다수 생성해내, 장댓비처럼 그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끄억?!"
한베는 로키가 소환한 환영검을 애써 피하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오히려 방어에 전념하는 것이 더 나았을 정도로, 쏟아져내린 환영검에 전신에 꿰뚫린 한베는 혀를 차며 서번트의 내구를 확인했다.
총 한 발에, 턴 소모나 행동 소모 없이 자신의 주력 서번트인 '오로치'를 잃어버린 시점에서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났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래도 어딘가엔 분명 승산이 남아있을 거다. 한베는 소환기를 이용해 빠르게 로키의 스테이터스를 분석하고 약점을 찾으려 했다.
[신령형 로키.
힘 : 3 마력 : 8 민첩 : 3
내구 : 2 지능 : 7 매력 : 8
약점 속성 불명.
플레이버 텍스트 : 북쪽의 사람들의 신화에서 언급되는 3신. 오딘, 토르, 로키 중 한 명. 장난과 기만, 환술과 변신의 귀재로 유명하며, 동시에 '가장 자유로운 신', 트릭스터이기도 하다.
'화신'으로서 소환되어, 서번트화 되었기 때문에, 신격을 잃었다. 따라서 진짜 '신의 권능'을 보여주는 원본에 비해선 약해졌지만, 신조차 속였던 환영술을 비롯한 로키의 마법은 건재하다.
주요 기술 : 미라지 블레이드, 환술, ???, ???]
한베는 그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수리검으로 맞혔다고 생각했던 단테의 모습은, 그저 단테의 서번트인 로키가 만들어낸 '환영'이었다는 걸 말이다.
단테는 성검을 들기 전, 성검이 '무거울까봐' 일부러 힘 보정을 추가로 받기 위해 서번트를 교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뒤를 밟은 암살자를 '속이기 위해' 서번트를 '정령형 픽시'에서 '신령형 로키'로 바꾸고, 환영술을 사용했다.
모든 건 그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로키가 만들어낸 자신과 똑닮은 분신은 성검을 드는 시늉을 시켜놓고, 단테 본체는 투명화 상태로 숨어, 한베의 기습을 여유롭게 기다린다.
성검을 뽑느라 단테의 정신이 팔렸다. 그렇게 판단한 한베는 지금 성검 앞에 있는 것이 단테 본체가 아니라 단순히 로키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 한 채 성급하게 수리검을 던졌다.
'독'을 발동시키기 위해 자신의 주력 서번트, '환수형 오로치'를 장비한 채로 말이다.
완벽하게 한베를 속이기 위해, 단테는 자신의 동료인 에리스가 피떡이 되어 바닥을 구르는 것조차 방관한 채 숨을 죽이고 있다가 그대로 닌자가 성검을 회수하고 밖으로 걸어 나갈 때를 노려 권총탄을 뒤통수에 박았다.
즉... 그는, 한베를 비롯한 이 자리에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단테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거였다.'
괜히 황무지에서 오랜 시간 동안 구르고, 단련된 용병이 아니었다.
단순히 모든 걸 총탄으로 해결하는 트리거 해피의 용병인 줄 알았지만, 그에게는 황무지에서의 경험을 통해 쌓아올린 지식과, 그 지식을 살릴 정도의 능구렁이 같은 교활함이 있었던 거다.
"당했... 다!"
서번트의 교체로 인해 한 턴을 버린 한베는 뒤늦게 소환기를 조작해 명령을 내렸다.
[로닌 : 거합베기.]
[로키 : 환영술.]
민첩 스탯이 우수했던 한베의 서번트, '인간형 로닌'의 스킬이 로키에 닿는 것이 훨씬 빨랐지만, 로닌의 검이 닿기 바로 직전에 로키의 몸이 순간 아지랑이처럼 흐려졌다.
"미안하지만 로키의 환영술은 선공기거든. 민첩 스탯이 부족해도, 무조건적으로 네놈보다는 빨리 발동된다 이 말이야!"
환영술에 로닌이 속아 넘어가자, 그대로 그로기에 빠진 것처럼 순간 서번트가 무력화되었다. 설마 1턴 이상 붙들어놓는 효과라도 있는 건가. 순간 한베는 스킬의 효과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환영술 : (선공기), 환영을 만들어 마법 공격을 받아넘깁니다.(매력 판정.) 다음 턴, 로키는 환영에 속아 넘어간 상대보다 빨리 행동합니다.]
즉, 로키는 타 서번트에 비해 평균에 못 미치는 민첩 스탯을 이 '환영술'과 강력한 공격 마법인 '미라지 블레이드'를 이용한 이지선다와 심리전을 이용해 상대를 말려버리는 전술을 이용하는 서번트다.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았었더라면 대응할 수 있었을 터지만, 처음부터 서번트를 전부 공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탓에 그에 따른 대응책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의 엔트리에 있는 건, '악령형 잭 오 랜턴, 환수형 리바이어던 그리고 영령형 스카아크'를 카운터 치기 위한 서번트뿐이지, 로키에 대항할 만한 마력/매력 기반의 서번트가 없었던 거다.
"말도 안 돼...!!"
낭패다.
다음 서번트가 격파당하고, 서번트를 교체하기까지 걸리는 그 짧은 시간.
그 시간 안에 단테는 자신이 가진 모든 탄환과, 폭발물을 쏟아부을 게 틀림없다.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완벽한 외통수 그 자체.
그 순간, 한베의 눈에 마지막 희망과도 같이 들어왔던 건...
바로 바닥에 널브러진 성검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저 성검이라면. 용사가 사용했던 전설의 무기라면... 지금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역전의 한 수가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