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전쟁 이후 용사 파티-15화 (16/49)

제 15화

도-모. 단테 상. (1)

도도. 도도도도. 도돗.

터미널의 키보드와 왼손에 찬 소환기를 번갈아 조작하며 열심히 보안 게이트 단말의 해킹에 몰두했던 단테는 뭐가 잘 되지 않았는지, 고개를 이리 갸웃하고, 저리 갸웃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실제 사람의 '지능 수준'을 단순 숫자로서 판단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소환기에서 정해놓은 스테이터스 시스템 상 단테의 지능은 3이다.

보통 평균적인 인간의 상식 수준이 5고, 해킹에 필요한 상식 수준은 적어도 그 이상을 요구한다. 아무리 서번트의 보조를 받아도 원체 지능이 낮은 단테에게 있어서, 고대 문명의 단말 해킹은 지나치게 어려운 일이었다.

끙끙거리다가 단테는 화딱지가 났는지, 단말기 아래로 삐져나온 키보드를 그대로 손바닥으로 엎어버리곤,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스크린에 총구를 들이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우와아앗!!!"

"안 돼. 안 해. 무리. 안 할래. 역시 난 이런 건 안 맞아."

"그렇다고 해서 부술 거까진 없잖아요! 제가 한 번 시도해볼 수도 있었는데."

단테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너 여기 비밀번호 알아? 아이디카드는 있어?"

"그게 음. 자신 있었으면 제가 먼저 단말을 조작해보겠다고 했겠죠?"

속으로 단테 씨 정도의 지능이면 제가 나서는 편이 훨씬 더 성공률이 높지 않았을까요? 라는 말을 집어삼키며 그녀는 슬쩍 반쯤 고장 난 터미널의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이전 용사 파티의 마법사가 설치해놓은 결계가 아직 작동 중이었기에, 스크린에 바로 권총탄이 박혔음에도 살짝 금만 조금 갔을 뿐, 기계 자체는 무사했다.

"어디 보자... 비밀 번호는 모르지만. 우회로는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라요."

"폭발물로 뚫고 가면 안 되나?"

"핵폭발로부터 살아남은 구조물인데. 단순한 마법이나 폭탄으로 뚫고 갈 수 있을 거 같진 않아요. 외부에서 저희가 침입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외부 결계 상태가 핵폭발로 인해 맛이 갔기 때문이지. 폭발력이 충분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건... 음. 일 리가 있네."

단테는 그렇게 말하며 에리스 옆에서 꿈쩍도 안 하는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일반 권한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항목 중 지하 환풍구 시설이라는 걸 발견했다.

"환풍구 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저기... 영화도 아니고. 보통 이런 거대 지하 시설이라 하더라도, 환풍구를 통해서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만들지 않아요."

"나는 내가 들어간다고 말한 적 없는데?"

단테는 딸깍딸깍 소환기의 다이얼을 조작하더니, 장비하고 있던 서번트를 레인저에서 다른 녀석으로 교체했다. 반짝반짝한 요정의 화려한 가루와 함께 등장한 건, 그가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서번트인 픽시였다.

다른 서머너들은 이러한 약소 서번트는 필요 없다고, 쓸데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엔트리에 거의 넣지 않지만 단테는 달랐다.

실제로 픽시는 다른 쟁쟁한 환수, 영령, 악령, 신령 등에 비하면 약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갖고 있는 서번트 중 전투력으로만 따지면 최강에 속하는 리바이어던과 픽시를 바로 붙여서 비교해보면 답은 바로 나온다.

하지만 그렇기에, 엔트리에 절대 넣을 리 없는 픽시를 채용함으로서 다른 서머너는 생각 못 하는 기상천외한 전술을 만들어내거나, 예상외의 상황을 타파할 수 있기도 한다.

"픽시."

[마이 달링! 불렀어?]

"여기 옆에 있는 환풍구 보여? 여기로 넘어가서, 반대편 문으로 넘어가서 문 좀 열어줄래?"

[오케! 맡겨만 줘.]

체구가 큰 인간이 들어갈 수 없다면, 체구가 작은 요정인 픽시라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거다. 단테가 나사로 고정된 환풍구의 문을 총으로 쏴 열어젖히자, 안으로 쫄래쫄래 들어가 불을 밝히며 나아갔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상황을 해결해오셨군요."

"난 별로 똑똑하지 않으니까. 서번트들의 도움을 최대한 받아야지."

어떻게해서 단테가 이 혹독한 황무지에서 레이븐으로써 활동하고, 거기에 더해 은 등급이라는 높은 등급에 위치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조금 엿본 거 같은 에리스는 픽시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키보드를 바쁘게 조작하는 도도도 거리는 소리가 잠시 울리더니, 금방 문 반대편에서 터미널을 조작한 픽시가 보안 게이트를 열어주었다.

"좋아."

안으로 들어가자 눈에 보인 건 각종 마법 실험에 쓰였던 널브러진 자재들. 그리고 사람 몇 명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대한 시험관들이었다.

그리고.

단테의 시야 한 구석에 처참하게 깨진 시험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척 봐도 평범한 실험용 용액이나, 아니면 단순한 물건을 넣어두기 위한 용도는 아닌 거 같은데.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예상이 적중하듯, 단테의 시야 한 구석에서 꿈틀거리는 괴물 한 마리가 느닷없이 나타나 단테의 목을 향해 크게 도약했다.

아슬아슬하게 인간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좀비는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에서 마체테를 꺼내 자신의 목을 괴물이 물어뜯기 직전에 칼을 대신 물린 단테는 발로 녀석을 걷어차고 M4로 정확하게 녀석의 머리를 사격해 처치했다.

[끄... 루으... 웨에에...]

"히익...!!"

느닷없이 튀어나온 괴물에 에리스는 그대로 겁을 먹고 뒤로 넘어졌다.

[미. 미안해 단테.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어...]

"괜찮아."

픽시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단테는 자신이 방금 쓰러뜨린 괴물의 목을 붙잡고, 혹시나 모를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마체테로 공들여 목을 베어 분리해냈다.

그리고.

"이. 이게 뭐. 뭐죠?"

추악한 괴물이 마법사의 실험실에서 나올 줄이야. 설마, 그 고상하고 아름다웠던 그 마법사가 지하에서 이런 비인도적인 실험을 벌였다는 걸 믿지 못했던 에리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소환기의 가이거 카운터가 갑자기 미친듯이 올라갔는데... 아하. 알겠다."

단테는 눈 앞에 있던 인간형의 끔찍한 괴물을 보곤 얼굴을 찡그렸다. 이 시설이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 그는 굳이 다른 누군가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용사 파티라고 해서 고결한 건 아니었던 모양인데."

단테는 자기가 썰어재낀 괴물의 얼굴을 잘 살펴보았다. 원형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골격이 일그러지고, 살이 녹아내려 심하게 변질되어 있었지만.

"이건 악마잖아. 아무래도 네가 말하는 그 용사 파티의 마법사는. 이 지하 시설에서 악마를 이용한 모종의 인체실험을 했던 모양이야."

"인체실험이라니. 그. 그러언. 말도 안 되는 말씀 하지 마세요."

"저기 있는 시험관 보여? 아무래도 200년 전 인간은 마나를 방사능에 노출시키면 마소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 같은데. 저 시험관에서 마계에 룰루랄라 행복하게 살고 있던 주민을 가둬놓고. 지속적으로 마소에 노출시킨 거야. 마소가 인체에 주는 영향을 조사했던 거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만약 그런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면. 왜 저는 몰랐죠? 저는 마소라는 개념에 대해서, 잠에서 깨어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고요."

"그건..."

거기까지는 설명할 수 없었던 단테였지만 이는 그가 알고 있는 한 가지 지식에 기반한 추측이었다.

"그건 나도 어떻게 설명할 순 없는데. 너, 마소에 노출되면 인간이든 악마든 어떻게 되는지 알아?"

"... 좀비가 되는 거 아니에요?"

"맞아. 보통 '마소병'을 앓다가... 나이트워커가 되거나. 아니면 거기서 마소를 더 쬐게 되면 나이트워커가 선녀처럼 보일 정도의 끔찍한 괴물이 돼. 하지만 가끔 그 정도 강도의 마소를 견뎌내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사람들은. 간혹 소환기나, 별도의 영체를 몸에 품지 않더라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어. 사이커라고 하는데. 그런 사이커 연구를 진행한 게 아닌가 싶은데."

"....."

단테의 말에 에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방금 튀어나온 마소로 인해 변이된 악마. 그리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실험 시설들. 단테의 소환기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가이거 카운터의 눈금 소리.

그녀의 마음 속에선 점차 의구심이 자라났다. 과연 자신이 믿고 따라야 할 존재인 용사라는 건... 인간계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구원자가 아니라. 애꿎은 마계를 침략한 학살자였던 걸까.

"빨리 성검을 가지러 가죠."

여러 만감이 교차했던 에리스가 말하던 도중, 단테는 실험실 안에서 챙길 만한 물건이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러한 고대 유적에선 여러모로 경매장에서 비싸게 팔리는 것들이 많으니, 이왕 목숨 걸고 여기까지 온 거, 이것저것 주워갈 심산이었다.

추측에 불과했지만, 용사 파티가 갖고 있던 어두운 이면을 알게 되어 시무룩해진 에리스를 뒤로 한 단테는 소환기를 통해 근처에 숨겨진 방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손으로 벽을 훑으며 단말의 스위치를 찾았다.

"엇차."

문이 버벅이면서 열리자, 방 내부에서 그가 보았던 건...

지금 이 자리에 와서 보았던 용사 파티의 진실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것이었다. 연구실 구석에 숨겨져 있던 그 방 안에는 그가 처음으로 에리스를 만났었던 '마지-테크' 연구소에서 보았던 '냉동 포드'가 수십 개가 보관되어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안에는...

"... 씨... 바. 뭐... 뭐뭐... 뭐야. 이건..."

수십 개의 냉동 포드.

그 안에는...

'수십 명의 에리스'가 꽁꽁 얼어붙은 채, 그대로 냉동 포드에 '보관'되어 있었다.

아니, '보관되어 있었다.'는 틀린 말이다. 냉각 시스템이 모종의 영향으로 맛이 간 모양인지, 그들은 냉동 포드 안에서 완전히 꽁꽁 얼려진 채, 죽어 있었다.

언제나 냉정, 침착을 유지하는 단테의 등 뒤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들여다보면 안 되는, 비극의 커튼콜의 뒤편을 봐 버린 듯한 충격을 받은 채, 그는 천천히 에리스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용사의 가이드.'

'요정.'

'체내에 영체를 이식한 마법 능력자.'

단테의 머리에 빠르게 몇 가지의 키워드가 스쳐 지나갔다. 그 뒤에 단테는 바로 에리스가 이 광경을 보고, 완전히 무너져 내릴까봐 일부러 큰 소리를 내지 않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리고 그는 안에서 작동되는 터미널에 자신의 소환기를 연결해 해당 연구실에 있던 자료들을 일괄적으로 다운로드받은 다음, 데이터를 일괄 삭제했다.

방에서 도망쳐 나오듯 빠져나온 단테는 침을 꿀꺽 삼키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단테씨?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괜찮으... 신가요?"

"응? 아아아. 응! 응. 괜찮아. 가자."

망할 용사 새끼가 휘둘렀던 성검을 빨리 얻고 여기서 튀는 게 좋겠어. 생각을 고쳐먹은 단테는 에리스의 앞에 있던 게이트를 열어 통로로 바로 지하 통로로 가는 길을 열었다.

"성검의 위치는 알 거 같아?"

단테가 묻자, 잠시 눈을 질끈 감았던 에리스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조금 위로 올라가야할 거 같아요. 여긴 너무 깊어요."

"알았어."

에리스의 말대로 마법사의 지하 연구실에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겨우 찾아 올라간 단테는 주변에 영체나 괴물의 반응, 혹은 골렘의 반응이 없는 걸 재차 확인하고 용사가 다뤘던 성검의 행방을 쫓았다.

그리고 마침내, 단테는 용사의 성검을 찾아낼 수 있었다. 보안 장치가 다수 걸려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잔해가 가득 쌓인, 레드 그레이브 황무지 그 어디에나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건물 바닥에, 거대한 기계 장치 하나가 땅에 박혀있었다.

그건 도저히 평범한 사람이 휘두를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검신의 크기가 거의 사람 한 명의 크기와 맞먹는, 클레이모어를 뛰어넘은 특대 사이즈의 대검이었다. 200년이나 방치되어있던 탓에 여기저기에 먼지가 엄청 끼어있던 데다가, 날은 당연히 나가 있었으며, 미약하게 검신 쪽에 달려있던 기계 장치에 희미하게 불만 들어와 있었다.

"이게 성검이야?"

"... 이상하다. 이런...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용사님이 사용하셨던 성검은. 딱 허리에 찰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모습이었어요."

"맥킨지에게 들었어. 용사가 한 두 명이 아니었다는데. 그에 따라서 성스러운 무기도 곳곳에 묻혀있다고 말이야. 아무튼, 이걸 가져가면 되겠지?"

단테는 자신의 등 뒤를 힐끔 바라보더니, 장비하고 있던 서번트를 교체했다. 무엇으로 교체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마 거대한 쇳덩이나 다름없는 특대 사이즈의 성검을 들기 위해, 힘 스탯이 높은 서번트로 교체한 것이라고 에리스는 판단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보안 장치가 작동할 지도 몰라요."

"그건 직접 해봐야 아는 일이지."

단테가 짧게 말하며 성검에 손을 가져다댄 바로 그때였다.

휘릭!!

통로 끝에서 매섭게 바람을 가른 수리검이 그대로 단테의 목에 틀어박혔다.

"커......"

에리스가 손 쓸 틈도 없이, 그대로 수리검에 맞은 단테는 뒤늦게 뒤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곳에는...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천천히 부상하고 있던, 까마귀의 닌자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도-모. 단테 상. 그림자 닌자. 한베올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