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화
용사의 성검에 달라붙은 까마귀들. (4)
마지막 말을 내뱉어놓고, 단테는 아차 싶었다.
거대한 폭발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면 연기와 흙먼지에 적이 둘러 싸여있을 때, 그 순간 외치는 '해치웠나'라는 말은 부활의 주문을 뜻하며, 레이븐 업계에서는 절대로 금기시되는 말 중 하나다.
물론 반쯤은 농담이고.
상대가 완전히 죽기 전에는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뭐 그런 뉘앙스의 격언이다. 실제로 제대로 적을 확인 사살하지 않아 방심하다가 예상외의 기습을 받은 탓에 의뢰를 실패하거나, 위기에 빠지는 레이븐은 적지 않다.
단테는 그런 우를 범할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는 흙먼지가 천천히 걷혀나갈 때까지, 바닥에 내려놓았던 총을 다시 집어들고 총구를 좀비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방독면의 강화 유리의 바이저 너머로 완전히 몸이 불타 시커먼 재가 된 좀비의 모습과 무력화된 영체의 모습을 보고서 안심했다.
"성가신 녀석. 스카아크를 벌써부터 소모시킬 줄이야."
그의 서번트 엔트리 중에서 스카아크는 뛰어난 민첩을 기반으로 높은 회피율과 물리 기술에 대한 명중률을 자랑하기에 나름 주력 서번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스카아크를 이딴 망령 영체 따위에게 초장부터 무력화당할 줄이야. 그는 혀를 차면서 껴안고 있던 에리스를 놓아주며 먼지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에리스. 괜찮아?"
마소에 지나치게 노출된 에리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지만, 그 팔에는 힘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마소의 피폭 정도가 조금 심했는지 제대로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의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코에서 질질 피가 새어 나와 흐르고 있다. 이따금씩 이어지는 심한 기침은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방독면은 왜 벗은 거야."
단테는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의 벨트에서 작은 주사기를 꺼내 에리스의 팔에 꽂아 주었다.
체내에 쌓인 마소를 이뇨 작용을 통해 바깥으로 빼주는 약물로, 조금 시간이 지나 오줌을 싸거나 땀을 어느 정도 흘리면 괜찮아질 거다.
"알아볼 줄 알았어요. 근데... 이렇게까지 강하게 부정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단테는 200년 전의 지인을 좀비가 되어버린 지금 와서 기억할 수 있을 리 없지 않냐며 그녀를 위로해주려다가, 금방 그것이 위로에는 그다지 적합한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시 도로 삼켰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0년지기 친구를 못 알아보냐 어떻게. 얄궂은 녀석 같으니라고."
단테는 에리스의 등을 잠시 토닥이다가, 완전히 무력화되어 뻗어버린 야생 영체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단테의 '내구' 스탯 상, 최대로 다룰 수 있는 서번트는 총 4기.
그 이상을 소환기로 다운로드 받아버리는 순간 지나치게 체내 마소가 많아지면서 방금 에리스와 같은 꼴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스카아크가 완전 무력화되어 사라진 지금은 딱 아슬아슬하게 서번트 한 기만큼의 자리가 남는다. 스카아크를 잃은 이상, 그 빈자리를 메워줄 서번트가 필요했던 그는 자신이 쓰러뜨린 영체를 곧장 바로 그 자리에서 '사역'했다.
[당신은 인간형 : 레인저를 서번트화 시켰습니다.]
"인간형이라."
모든 영체가 전설 속이나, 사람들의 통념으로 자리잡은 괴물이나 영웅이나, 신, 혹은 정령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영체가 선보이는 마법의 힘은 사람들의 은연 중에 깔린 대중 의식에 마력이 결집되면서 만들어진 것. 평범한 인간이라 할 지어도 인간을 뛰어넘은 위대한 업적을 세워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이들의 경우, '영체'로 보존될 가능성이 높다.
상대가 '인간형'의 영체라는 걸 확인하자 씁쓸하게 단테는 과거 200년 전 활약했던 용사의 전설의 어디가 어디까지 허구인지, 진실인지 알 순 없어도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간들이라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악마를 몰살한 잔혹한 학살자로서 한 획을 그었는지.
혹은 인간을 구해낸 위대한 구원자로서 한 획을 그었는지.
거기까지는 알 순 없지만 말이다.
[인간형 : 레인저
힘 : 3 마력 : 5 민첩 : 8
내구 : 3 지능 : 3 매력 : 5
질풍 속성, 빛 속성에 내성.
어둠 속성에 취약.
플레이버 텍스트 : 전설의 용사와 함께 마왕을 살해하는 것으로 세계를 구원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총잡이. 마법을 통해 다양한 중화기와 화살을 다룬다. 그러나 그는 그가 구한 세계의 말로를 보고, 용사와 함께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주요 기술 : 터보 파이어, 인챈트 애로우, 리로드, 사냥의 시간.]
"서번트로 만드신 건가요?"
"..."
에리스 입장에서는... 그래. 고인에 대한 능멸과 모욕으로도 볼 수 있었던 행위였기 때문에 단테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는 것보다는 낫잖아."
영체는 무력화 상태로 방치하면 언젠가는 다시 주변의 마나를 흡수해서 부활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소환사가 사역하기 전까지는 야생 상태로 방치되어, 눈에 뵈는 모든 걸 공격하는 고삐 풀린 광견이랑 별 다를 바 없어지기에 단테에게 있어서 선택지는 레인저를 죽이거나, 아니면 사역해 서번트로 만드는 것 외에는 없었다.
"미안. 죽이는 편이 더 나았다면."
"아뇨. 신경쓰지 말아 주세요. 소환사가 서번트를 잃어버린 상황이니. 서번트를 다시 보급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죠. 이해해요."
에리스는 어딘가 슬픈 얼굴로 단테의 서번트가 되어 에테리얼 상태로 그의 옆에 서 있던 레인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기억해주지 못 하는 야속함, 자신이 구해내려 했던 세계의 말로를 봐 버리고 이성을 잃어버린 그의 최후를 보고, 목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깊은 삶의 쓴맛을 제대로 느꼈던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서두르죠."
"조금 쉬었다 가도 돼. 그... 마소가 몸에서 빠지려면 시간이 좀 걸려서."
"괜찮아요. 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던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용사의 저택이었던 곳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뒤를 바라보며, 단테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코트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탄약을 소모한 총을 재장전하고 들쳐 메었다.
"마소 농도가 높은 곳에 오래 있어봤자 좋을 거 없지. 후딱 끝내자."
소환기를 통해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를 검색해보며 단테가 소환기의 기판을 조작하고 있었을 때,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멀리서 노려보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에리스의 물음에 단테는 짧게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
아무것도 아닐 리가 있겠냐?
이런 일을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해결해온 단테로서는 이런 사소한 직감이 곧 자신의 목숨으로 이어지는 일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방금 느껴진 시선. 틀림없이 그 녀석이 쫓아온 거다.
한베, 전 레이븐즈 로지스틱스의 레이븐으로 일했던 닌자이자 서머너. 얼핏 들여다본 그의 경력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주로 단순한 배달 업무보다는 경호와 암살 업무의 비중이 더 많았기에, 단순히 얕볼 만한 상대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슬슬 함정을 준비해놓지 않으면 안 되겠군.
단테는 자신의 뒤통수를 쿡쿡 찌르는 듯한 살기를 뒤로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으로 지하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가리켰다.
"이쪽 잔해에 출입구가 묻혀있는 모양인데. 폭발물로 뚫을 수 있을 거 같아. 엘리자베스에서 화약 좀 가져올 테니까. 주변 경계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누구 보이면 바로 소리치거나 마법을 쓰고. 알았지?"
"네."
* * *
"호오."
멀리서 단테가 야생 영체와 교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의 닌자, 한베는 사이버네틱 기술로 극한까지 강화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턱을 매만졌다.
지금 한베에게는 레이븐즈 로지스틱스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없었다.
접속하기 위한 기기라면 그의 왼팔에 장착된 소환기가 있었지만, 레이븐의 권한을 전부 빼앗겨버린 지라 현재 교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단테의 등급이 어느 정도까지 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진정한 강자라면 상대를 보기만 해도 대충 그 역량이 어느 정도 되는 지 알 수 있는 법. 저 레이븐의 경우, 최소 은 이상의 등급을 가졌을 게 분명했다.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나 꽤 들뜬 한베는 미소를 지으며 수리검을 매만졌다. 2:1은 역시 조금 버거울지도 모르지만, 숫자가 많을 경우 그에 맞는 전략전술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척 보기에, 전투에 여러모로 숙련된 레이븐에 비해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전투 중에 쓸데없는 행동을 지나치게 많이 했다. 느닷없이 마소 농도가 높은 지역에서 방독면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여자 쪽을 인질로 잡은 다음, 강제로 단테의 서번트의 소환을 해제시키고 그를 맹독 수리검으로 처리하면 될 것이다.
아직 적은 자신에 대해 눈치채지 못 했다. 오랜 시간 암살자로서 일해왔던 그의 감이 틀리지 않다면, 녀석은 지금 멀리서 자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걸 넘어서 누군가가 자신을 추적해온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하로 가기 위한 길을 뚫기 위함인지, 단테는 자신의 트럭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두둑하게 챙겨선 잔해로 뒤덮인 유적 위에 올려두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한베가 있는 곳까지 폭발의 진동이 오진 않았지만, 폭발은 유적 지하로 들어가는 길을 뚫는 데는 충분한 화력을 보여주었다.
그 직후, 단테는 바로 옆에 있는 여자랑 무슨 말을 주고받다가, 그는 자신의 서번트를 '픽시'로 교체. 비행 효과를 받으며 안전하게 유적 아래로 내려갔다.
"슬슬 따라가도록 할까."
눈의 배율을 원래대로 바꾼 한베는 근처에 세워놓은 바이크의 시동을 걸고 바로 그의 꼬리에 매섭게 따라붙었다. 잘만 하면 레이븐을 족칠 겸, 전설로만 내려져 오는 용사의 검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다. 과연 용사의 검에는 어떠한 힘이 서려있을까. 그걸 가진 자는 무엇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성검에 대한 안전 장치나 보안 장치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었던 한베는 자신이야말로, 용사의 성검에 어울리는 인재라고 생각하며 바이크를 몰았다.
* * *
"엇... 차. 좀 깊네."
픽시의 도움을 받아 지하의 어느 통로 안에 들어온 단테는 앞으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소환기를 재장전하고 위에서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리는 에리스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받아주었다.
"고마워요..."
"소환기가 길을 파악하는 데 조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거 같은데. 혹시 뭐 기억 나는 거 있어?"
에리스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200년 가까이 묵은 자신의 오랜 기억을 되살려냈다.
"여기는... 마법 연구실이에요."
"연구실?"
"용사의 파티는... 5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거든요. 한 명은 성검을 들고 인간을 구원할 운명에 놓인 전설의 용사. 다른 한 명은 방금 단테 씨가 상대했었던 총잡이인 레인저.
육중한 갑옷을 걸치고 눈 앞의 적을 화염으로서 정화한 전사인 워리어. 용사의 가이드 역할을 맡은 요정... 저랑. 마지막으로 용사의 마법 서비스 및 후방 지원을 도맡은 마법사. 이렇게 5명이었어요.
이 장소는 그 중에서도 마법사가 주로 애용했던 공간이에요. 마법사가 했던 연구 중에서는 그다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는 것들도 조금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지하에 시설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뭘 만들었는 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단테는 좁은 통로에 난 보안 게이트를 똑똑 두드리다가, 옆에 설치된 터미널의 전원을 켜기 위해 스위치를 눌렀다.
정문 게이트를 수호하는 터렛에 전력이 정상적으로 돌고 있었기 때문에, 터미널 또한 작동되지 않을까 싶어 반쯤 될 대로 돼라 식으로 눌러보았는데, 다소 스크린에 묵은 먼지가 쌓이고 화면 여기저기의 폴리곤이 심하게 깨져있긴 했지만 글씨를 200년 전 물건 치고는 매우 정상적으로 기동하고 있었다
역시 200년 전 기술은 대단해.
그렇게 생각하며 단테는 아래 삐져나온 키보드를 두드리며 보안 게이트를 열기 위한 암호 스크린 앞에서 머리를 싸맸다.
"아 나 씨. 난 머리 나빠서 이런 거 잘 못 하는데."
고대 마법 문명 단말의 해킹을 시도하다가 오히려 화만 더 입었던 기억이 많았던 단테는 머리를 쥐어싸매다가, 에리스에게 슬쩍 물었다.
"너 혹시 여기 비밀번호 알아?"
"아뇨... 다른 시설은 알지만. 여기는 잘."
"그럼 한 번 해보지 뭐."
소환기를 터미널에 연결한 다음, 해킹을 시도하며 단테는 입을 삐죽였다.
"오랜만에 해서 잘 안 될 지도 모르는데. 어디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