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화
웰컴 투 네오 쿄토. (2)
자리에 앉아, 무거운 코트를 벗어두고 데모닉 사무라이 같은 것이 아닌, 쿄토의 진짜 특산물 중 하나인 '사케'를 마시며 안줏거리로 시킨 닭꼬치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그때.
이자카야의 문을 열고 네오 쿄토의 극동풍 옷이 아닌, 하얀 체크무늬의 옷을 입은 후덕한 남자 한 명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레이븐은 한 눈에 그가 입고 있는 정장의 안주머니에 상당한 대구경의 권총을 숨겨놓고 있음을 바로 간파했다. 임플란트를 통해 강화된 그의 눈에는 가벼운 옷 정도는 투과해 볼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어쩐지. 쿄토가 시끌시끌하더구먼. 드디어 까마귀가 이쪽 마을에 납셨구먼 그래."
레이븐은 코를 훌쩍이며 테이블 위에 꺼내놓은 송장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어. 그러니까... 어디보자. 맥킨지씨?"
맥킨지라고 불린 정장의 남자가 거만하게 고개만 흔들어 인사하자, 레이븐은 이자카야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바리바리 싸들고 있었던 가방에서 데스 스토커의 잔해물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자. 여기요. 배달시키신 품목입니다."
"... 뭐야 이건?"
맥킨지는 자리에 앉아서 기묘하게 생긴 데스 스토커의 부품들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도끼눈을 하곤 일방적으로 레이븐을 꼬나보았다.
"뭐긴요. 의뢰대로 마지-테크 유적에서 가져온 건데. 갔더니 지하에는 뭐 아무것도 없고. 대신 지하에 '있던' 물건을 지키는 무지막지하게 큰 고대 기계가 잔뜩 있길래. 그거 부수고 왔수다.
이건 그 잔해물. 진짜 뒤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기계 주제에 마법을 쓰던데. 분해 광선이었나. 뭐였나. 아무튼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갔으면 못 돌아왔을 걸요? 데스 스토커라는 기계인데. 이게 또..."
"아. 아니... 아니 잠깐. 잠깐만 기다려보게나 레이븐. 정말로 이것밖에 없었나? 정말로?"
맥킨지가 묻자, 레이븐은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좋아. 그럼 솔직하게 말하지."
역시 자신에겐 존댓말은 안 어울린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술술 지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이미 갔을 때, 마지-테크 연구소 안에는 개같은 로그 새끼들이 마소 폭풍 피해서 왔는지, 해충마냥 존나 우글거렸다고. 지하에 무슨 물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뭐 없었어.
그 새끼들이 이미 안에 있는 물건을 팔거나 가져갔거나 했겠지. 대체 그 안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유난인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난 모르는 일이야."
단테는 그렇게 말하곤 송장을 내밀었다.
"돈 내놔. 돈. 죽는 줄 알았다니까 글쎄. 안에 있는 로그들 정리하는데 총알도 꽤 많이 썼어. 데스 스토커 처리하는데 아까운 펄스 수류탄도 쓰고."
뻔뻔하게 레이븐이 말하자, 얼굴을 찌푸리며 맥킨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로 안에 아무것도 없었나? 그 안에는 이딴 고철덩이가 아니라. 진짜 고대 병기가 있었을 터. 전설에 따르면, 한 때 마계에 재앙을 가져온 '용사'의 무기가 그곳에..."
"없었다니까. 그런 거..."
[거짓말, 매력 굴림.]
"음..."
맥킨지는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레이븐을 바라보았지만, 이런 일에 능숙했던 그는 한 치의 흔들림없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사케를 홀짝였다.
"알았다. 그럼. 보수를 주도록 하지. 원래 약속했던 보수가 3만이었나?"
[성공.]
"5만이었던 거 같은데?"
[보수 협상, 매력 굴림.]
"레이븐, 장난칠 시간 없네. 자네는 물론... 제대로 배달을 해주긴 했지만. 자네가 갖고 온 물건은 내가 원하던 물건이 아니었어. 원래 그 안에는 '요정'이나 '성검'이 있었어야 했단 말이네. 솔직히 3만도 자네에게 주기 아깝네만..."
[실패.]
"총알값이랑 폭탄 값을 주셔야지. 그리고 내 약값이랑."
"하는 수 없군. 자 여기."
맥킨지는 레이븐에게 동전이 가득 들은 자루를 던져주며 혀를 찼다. 보수를 받자마자, 곧바로 안에 든 동전을 바닥에 흩뿌리며 바로 계산에 들어간 레이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2만밖에 안 들어있잖아. 지금 사람 갖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진정하게나. 자네에게 한 가지 맡기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 건을 무사히 해결해준다면, 내가 이번에 지불해주지 못한 보수 1만에. 다음 거 성공 보수에 보너스까지 얹어주지. 어떤가? 자네에게 있어서도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
"..."
레이븐은 동전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엄지로 이를 튕기며 물었다.
"뭔데. 말해봐. 해충 처리? 영체 사냥? 단순 귀중품 배달?"
"자네는 용사의 전설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지?"
"또 시작이군..."
레이븐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그 용사인지 뭔지. 핵 떨어지기 전에 활약했던 전쟁 영웅에 왜 다들 그렇게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건 단순한 농담이 아니네. 마계의 왕을 죽인 용사는 실존했고. 이 세상 어딘가에는 그 용사가 사용했던 고대 병기들이 곳곳에 묻혀있지. 그리고 내가 듣기로는... '용사'는 한 명이 아니었다고 하더군.
마지 테크의 연구소 깊은 곳에는 용사가 사용했던, 혹은 사용할 예정이었던 오버 테크놀로지의 고대 마법 병기들이. '성스러운 무기'가 묻혀있을 거다. 가장 대표적인 건 역시 '성검'이지.
그 성검을 내 앞으로 배달해주면. 값을 톡톡하게 쳐주지."
"성검이 있는 위치는 알고 있고?"
레이븐이 묻자, 맥킨지는 레이븐이 찬 소환기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소환기에 입력해주지."
"하하. 일이 쉽게 풀리니 좋군. 좋아."
순순하게 위치 좌표를 알려주려는 맥킨지에게, 레이븐은 털털하게 웃으며 느닷없이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아 들어 그의 가슴팍을 조준했다.
웃는 얼굴로,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총을 꺼내들자 순간 정장 안 쪽 주머니에 숨겨진 권총을 뽑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맥킨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가 이런 일로 통수를 존나 많이 맞아봐서, 일하기 전에 몇 가지만 좀 묻자. 그 성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거면, 왜 아직까지 가져간 사람이 없는 거야?"
"자...잠깐. 단테. 말로. 말로 하자."
"함정은. 아니겠지? 언제 한 번, 날 사지로 내몬 다음에 용병을 따로 고용해서 내 통수를 씨게 친 고용인이 몇 명 있어서 말이야. 어디 한 번 진심을 들어보자고."
"근처를 방황하는 길 잃은 영체들이 많아서. 일반적인 스크래퍼들은 엄두를 못 내! 그래서... 그래서 아직 건드린 사람이 없는 거라고. 그리고 보안 시스템이 아직 활성화되어있는 데다가, 마소로 오염된 지역이라 제대로 된 설비 없이는... 들어가기 힘들어. 그래서 그런 거다! 응!"
"흠..."
눈에 임플란트를 박아넣은데다, 오랜 지역에서 황무지에서 레이븐으로서 활동해온 그가, 이 지근거리에서 총을 빗맞출 일은 없다.
정말로 목숨을 걸고 이실직고 이번 건수가 왜 함정이 아닌 지에 대해서 그가 설명하자,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이며 총구를 살짝 돌렸다.
"좋아. 그럼... 믿어주지. 성검을 가져오면 얼마 줄 건데."
"10만을 주지."
척 듣기에는 괜찮은 액수의 보수였지만 레이븐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
"10만이면 충분하지 않나."
"가는 길에 위험수당. 마소가 퍼진 지역에 들어가니까. 제독 및 방독 물자 필요하지. 총알값이랑 폭발물 값 필요하지. 길 잃은 영체들 상대하는 값이랑, 보안 시스템 상대하는 값까지. 다 합하면 어머 이게 얼마야? 12만은 챙겨줘야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하하! 그럴 바엔 다른 레이븐을 알아보지."
그렇게 맥킨지가 말하자, 레이븐은 자신의 군번줄을 벗어 테이블 위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나 말이야. '은 등급'이거든? 이 정도 위험 수당이 있는 일 정도면 금 등급 정도에는 시켜야 할 텐데, 걔네들은 보수를 받는 자릿수가 달라요. 자릿수가. 이해하셨나?"
[보수 협상, 매력 굴림.]
"알았네 그럼. 12만. 일주일만 기다려주게. 내일 바로 현금을 준비해서 가져다주지."
[협상 성공.]
"좋아 그럼."
레이븐은 웃으며 거래의 성사를 겸한 악수를 나누고 바닥에 흩어진 동전을 싸그리 자루에 집어넣고 방탄 가죽 코트의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날 실망시키는 일은 없도록 해."
"누가 누구를 실망시킨다는 거야? 그쪽이 내 뒤통수를 먼저 후려치지 않는 한은 그럴 일은 없을 걸."
레이븐은 단숨에 사케를 쭉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달에 대한 값도 제대로 받았고, 새로운 의뢰도 받았으니, 이제 이 이자카야에선 볼 일이 없다.
이제 슬슬 요정이 걱정되니까. 상황을 보러 가볼까. 레이븐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가 번쩍번쩍한 간판과 사인으로 가득한 네오 쿄토의 정경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발신기의 위치를 추적했습니다.]
에리스와 헤어지기 직전에 건네주었던 발신기의 위치를 소환기로 추적하자, 붉은 점으로 주변의 지리 데이터와 함께 표시되었다.
이전에 말해준 대로, 쿄토 타워 근처에 마련된 마켓 플레이스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새로운 의뢰 때문에 의약품과 식량, 그리고 탄약을 보급해야 했던 만큼 레이븐은 그쪽으로 슬슬 걸어갔다.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걷는 여인들.
몸의 절반 이상이 기계로 대체된 채로, 허리춤에 서슬 퍼런 칼날을 차고 다니는 기괴한 사무라이들.
핵전쟁이 벌어지기 전 유물들을 파는 스크래퍼들의 가게.
거의 헐벗은 알몸으로 도박장과 창녀촌을 홍보하는 매춘부들.
대놓고 의약품들 사이에 마약을 팔아젖히는 야매 의사들.
마소에 찌들어 마소병에 걸려버린 환자들.
여기저기 으슥한 뒷골목에서 보이는 실체화된 악마들.
황무지에서 일평생을 살아온 단테에게 있어선 익숙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만, 글쎄. 200년 동안 얼려진 채로 역으로 일평생을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에리스에게 있어서는 다소 허들이 높을 수도 있겠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핵전쟁 이후의 문명의 민낯을 하나둘씩 지나쳐가며, 레이븐은 사람들을 지나쳐 에리스를 찾았다.
그녀를 찾는 일은 소환기와 발신기의 보조가 딱히 없어도 매우 쉬웠다.
"잠깐! 이거 놔주세요!"
에리스가 새된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 중심으로 몰려든 칼을 찬 무사들이 경박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어딘가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아가씨. 얌전히 따라오면 좋잖아? 척 보니까. 쿄토는 처음인 거 같은데. 어때? 같이 좋게 좋게 지내보자고. 응?"
그들이 입은 옷에서 쿄토의 문장이 붙어있는 걸 본 레이븐은 그들이 막부 소속의 무사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 저렇게 경박해 보여도 나름 이 도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들이란 거다.
레이븐은 소란이 벌어지는 인파들 사이로 척척 걸어들어가 에리스의 어깨를 잡고 끌고 가려는 무사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뭐야?"
수염이 덥수룩한 데다, 치열이 여기저기 덧 나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막부 특유의 근친혼의 산물인 모양이다. 레이븐은 에리스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 일행이야. 비켜."
"뭔가 했더니. 네가 이번에 그 새로 마을에 들어온 흉조 새낀가 보구만."
레이븐의 목에 건 군번줄을 땡기며 그가 미소 지었다. 바로 가까이에서, 방금 이자카야에서 한 잔 들이켰던 사케의 냄새가 이 남자의 전신에서 구리구리하게 풍겼다.
"내가 누군지 알아? 응?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까마귀 같은 놈이 알 턱이 없겠지. 이 몸은 말이야!"
장황하게 자기 소개를 늘어놓으려는 무사의 말을 씹어버리고, 레이븐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그의 미간에 총구를 가져다 대곤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 꺄아아아아악!!!!! 살인이야! 살인!!!"
곁에 있던 무사들이 총성을 듣고 뒤늦게 칼을 뽑아 들었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레이븐에게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 했다.
"그 있잖아? 사람이 총을 갖고 있으면. 그걸 언제든지 잡아서 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좀 대가리에 채워 넣는 게 어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로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을 거 같아. 그치?"
태연하게 그 상황에서 총을 쏠 생각을 한 레이븐을 바라보며, 냉큼 그의 등 뒤에 숨은 에리스는 눈 앞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린 깡패를 보고 이건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공권력이라는 개념이 희미한 이 세계에선.
어쩌면 이게 맞을 지도 모른다.
"데... 메에..."
"빨리 꺼져. 어떻게든 여자 한 명 낚아채서 해보려고 발정 난 개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