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화
용사의 요정은 200년의 낮잠에서 깨어난다. (6)
레이븐이 깊은 잠에 빠지고 나자,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와 베개에 머리를 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얕게 코를 고는 소리만이 울렸다.
레이븐의 말에 따르면, 야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야생 동물도, 좀비도, 영체도 아닌 바로 어둠이 드리우면 찾아오는 섀도라는 존재인 모양이었다.
한창 현역 때, 용사의 요정으로서 활동했었을 때, 마계 그 어느 곳에서도 그가 설명했던 '섀도'라는 걸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세상 전역에 핵폭발과 함께 드리운 '마소'라는 정체불명의 새로운 방사능... 그로 인해 튀어나온 수많은 이상 현상들과 돌연변이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영체들.
예전에 질서 잡힌 문명 따위, 찾아볼 수 없는 현실.
그런 세계에서 용사의 요정으로서 활동했던 지금의 에리스가 할 수 있는 건, 모닥불과 랜턴의 불빛 근처에서 벌벌 떨며 무겁디 무거운 권총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는 것 뿐이었다.
"하아."
지금부터 어떻게 움직여야할까.
세상은 망했다. 아무래도 좆돼버렸다. 그 사실만큼은 에리스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망해버린 세상의 시간을 돌릴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지금부터의 이야기이다.
용사의 요정, 그것이 에리스의 존재 의의다.
용사의 요정이라 함은, 모험을 떠나는 용사의 곁에서 그의 모험을 보좌하며 함께 용사의 적을 같이 처치하는 것.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 망해버린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울 '용사'를 찾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총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멀리서 인기척이 들린 에리스는 곧장 총구를 소리가 난 쪽으로 겨누었다.
"누구?"
에리스의 시선이 꽂힌 바로 그 곳에는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뭔가'가 있었다.
레이븐의 조언에 따르면, 뭐가 나타나던 일단 쏘고 보라고 했었지만 이런 척박한 세상.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오고 있는 걸 지도 모른다.
"누구야? 당신."
소리에 이끌린 건지, 그것은 차츰 에리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것'이 무엇인지 에리스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일단, 야생 동물은 아니다. 레이븐이 그토록 주의했던 섀도도 아니다. 일단은 사람의 형상을 띄고 있었으나, 두꺼운 방호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어딜 다쳤는지 걸음걸이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일단은 인간형을 취하고 있으니, 가능성은 크게 세 가지.
좀비.
길 잃은 영체.
아니면...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
"거기서 가만히 서서 두 손을 올려요."
에리스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점점 에리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오면 쏠 거예요."
두 손으로 권총을 잡고 침착하게 경고했지만 방호복의 남자는 계속해서 에리스 쪽으로 다가왔다. 결국, 랜턴 바로 앞까지 그가 다가왔을 때, 에리스는 하는 수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사격 실력이 미숙한 에리스였던 만큼, 처음 들어본 권총으로 머리를 정확히 쏴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그녀는 맞추기 쉬운 몸통 쪽을 겨누고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비록 처음 쏜 총이었다고는 하나, 총탄은 방랑자의 가슴에 정확히 꽂혔다.
총을 맞고 그대로 뒤로 넘어간 방랑자, 그리고 에리스는 처음으로 총으로 괴물이 아닌 인간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 죄책감이 그리 오래 가는 일은 없었는데.
총을 맞은 그 방랑자는 갑자기 목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 에리스를 노려보더니, 미친 듯이 네 발로 그녀를 향해 발발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한 거다.
"꺄... 꺄아아아악?!"
죽은 사람이 기괴한 형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보고 그대로 패닉에 빠진 에리스가 당황하며 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열이 짧은 권총의 특성상, 순수 지향 사격으로 움직이는 표적물을 맞추는 건 초심자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뒤늦게 바로 이게 레이븐이 그렇게 경고했던 좀비라는 알아차린 에리스는 그가 어째서 되도록 머리를 노리는 게 좋은 건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반쯤 부서져 내린 방독면 너머로 반쯤 악마화된 인간의 썩어 문드러진 얼굴과 이빨이 드러난 바로 그때, 에리스는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뒤에서 잔잔히 들리던 코골이 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는 것.
"이 좆같은 나이트워커 새끼."
레이븐은 겁도 없이 텐트에서 뛰쳐나와선 손으로 좀비의 뒷목을 붙잡고 멀리 던져버렸다. 아무리 소환기의 힘으로 강화되었다고는 해도, 엄청난 괴력이었다.
[KRU... A.. A.A.A.....!!]
내팽개쳐진 좀비가 다시 에리스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자, 레이븐은 모닥불 안에 넣어둔 불타는 장작 하나를 냅다 빼선 곤봉처럼 좀비의 머리를 그대로 후려쳤다.
파삭.
나무 장작은 비록 부서지긴 했지만, 불이 방호복에 옮겨 붙은 좀비는 그대로 고통스러워하며 그 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좀비 한 마리면 총알을 버릴 필요도 없다는 듯, 레이븐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좀비의 두개골을 있는 힘껏 두세 번 짓밟자 으깨진 머리 사이로 뇌수와 피가 터져 나왔다.
그대로 좀비의 움직임이 멎자, 그는 시체를 제대로 치울 생각도 없었는지 구석에 축구를 하듯 시체를 걷어 차놓고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잘했어. 조준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초심자에게 머리를 쏴 맞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레이븐은 하루이틀 일어난 일도 아니라는 듯, 별 대수롭지도 않게 몸에 묻은 피만 훌훌 닦아내곤 그대로 텐트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
아무래도 이 세상은 단단히 미쳐있다.
이번 기회에 에리스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쓰러진 좀비를 뒤로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때, 에리스는 안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총을 내려놓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바로 그때, 순간 등줄기를 차갑게 훑는 듯한 스산한 한기가 어깨너머로 올라오며, 주변 온도가 적어도 10도 정도는 낮아진 것 같은 느낌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 갔다.
에리스 자신만의 기분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그 자리에 있던 레이븐 또한 눈을 게슴츠레 뜨곤, 방금 좀비가 나타났던 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부터,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검은 핏빛의 웅덩이와 함께, '무언가'가 지면에서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무엇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지는 알 수 없다. 레이븐이 장난 삼아 말했듯, 그냥 마소 때문에 돌연변이가 일어나 버린 거대 두더지가 친 장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감각, 이 영혼을 조여드는 차가운 한기가 과연 단순한 돌연변이 두더지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에리스가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에 몸을 떨고 있던 그때, 레이븐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근처에 놓여 있었던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손전등을 들고 핏빛이 감도는 웅덩이를 비추었다.
레이븐이 비추는 빛을 두려워 하듯, 그것은 계속해서 꾸물거리면서 나올 타이밍을 엿보다가, 결국 강한 빛을 이겨내지 못하고 땅 속으로 파묻혔다.
"방금 그거... 뭐였던 거죠? 서번트가 아니야. 악마도 아니고. 인간... 아니. 생물이 아니었는데."
에리스가 크게 숨을 헐떡이며 묻자, 레이븐은 이런 것 쯤은 일상적인 일이라는 듯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저게 레드 그레이브의 부기맨(도깨비를 일컫는 말.), 섀도야. 안심해. 녀석들은 밝은 곳에는 못 튀어나와. 내쫓아냈으니까, 당분간은 안 나타날 거야."
* * *
다음 날.
에리스는 언제 자신이 잠이 들었는 지도 모른 채 모닥불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어제 보았던 섀도의 웅덩이에서 새어 나왔던, 정체 모를 괴물의 붉은 안광이었다.
"헉... 헉... 허억..."
"경계 수고했어. 덕분에 어중간하게 경계를 선 너도, 어중간하게 경계를 안 선 나도, 한숨도 못 잤구먼."
경계를 맡겨놨건만, 잠에 빠져들고만 에리스를 능숙하게 돌려 깐 레이븐은 모닥불 위에 발로 흙을 덮어 끄며 유령 도시의 빌딩 숲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 죄송해요. 정말요. 잠들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알아. 처음 섀도를 만난 사람들은 다 그래. 나도 너랑 만난 첫 날에 바로 섀도가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저 섀도 말인데요.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도 튀어나오나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은 주로 전기가 들어오고? 전기가 들어오는 곳은 섀도의 출현을 대비해서 도시 안을 밝혀놓지. 그래서 도시 안에선 녀석들은 안 나와. 다행스럽게도.
그래서 사실 상 섀도를 만나는 사람은 밤 중에 겁 없이 불 피워놓고 외딴 황무지에서 야영하는 나 같은 놈들 뿐이야. 내가 왜 섀도를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좀 알 거 같아?"
섀도가 무서운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레나 파충류에 대한 막연한 공포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존재는 하지만, 극소수니 제외한다고 쳤을 경우, 흔히 쉽게 볼 수 있는 독 없는 벌레나 파충류를 보았을 때, 인간은 그것들이 자신보다 한참 작은 미물임에도 불구하고 징그럽다거나, 혐오감을 느끼거나, 혹은 심할 경우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섀도로부터 느껴지는 공포감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완전한 미지의 영역에 있는 생물. 아니, 생물조차 아닌 '무언가'이다. 그러나 그 섀도에 대한 공포가 마치 유전자에 새겨져 있듯 보자마자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에리스가 어제의 일을 회상하며 잠시 떨고 있을 때, 레이븐은 어디서 가져온 건지 종이에 싼 작은 가루를 에리스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뭐죠?"
입자가 매우 고운 하얀 가루.
설마...
마약?
그런 의혹이 들었던 바로 그때, 레이븐은 천막을 혼자서 걷어내, 트럭 엘리자베스의 짐칸에 실으며 대답했다.
"설탕이야. 섀도를 만났을 때 먹으면 좋대."
"에. 설. 설탕?"
"왜? 코카인이라도 기대했냐? 좀 갖고 있는 게 있긴 한데. 줄까?"
"필요 없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레이븐의 말을 흘리며 설탕을 조금 입에 흘려 넣자, 순수한 단 맛이 입 안을 짭짤하게 감돌았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꼭 갚을게요."
"뭘 나중에 갚아. 통조림에다가, 얻기 어려운 설탕까지 갖다 바쳤는데. 설마 먹을 거 다 먹고,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쌩 깔 생각은 아니었겠지? 너."
레이븐은 그럴 시엔 용서 못 한다고 단단히 못을 박곤 그녀가 어제까지만 해도 들고 있던 M1911 권총으로 그녀의 미간을 겨누었다.
"레이븐은 이해타산이 맞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
"..."
그렇겠지. 그럼 그렇고 말고.
모든 것이 멸망하고 남은 이 지옥 같은 황무지에서 순수하게 선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각오한 바였던 에리스는 자신의 처지가 길바닥을 나뒹구는 노예나 다를 바 없다는 걸 깨닫고, 이 상황에 순응했다.
"뭘 원해요?"
"용사의 요정이라고 했었나?"
레이븐은 트럭의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말했다.
"네. 그렇죠."
"이 세상에 용사 같은 건 이제 없어. 그건 알고 있겠지?"
"... 네."
당연하지만 용사도 없고, 마왕도 없는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용사의 요정이 그녀의 정체성인데, 그 중요한 용사라는 게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자 레이븐은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제안했다.
"그럼 네가 섬겨야할 주인은 이제 없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는 내 요정이야."
무슨 자신감인지, 그는 호기롭게 그렇게 말하며 조수석 시트를 손바닥으로 팡팡 내리쳤다.
"용사의 모험을 인도해주는 존재라고 했었지? 그럼, 이제부터 내 모험을 인도해줘. 고대 문명에서 만들어낸 아이스캔디 요정이 얼마나 고성능인지, 한 번 봐 보자고."
"..."
에리스는 고민했다.
인간계와 마계의 전쟁.
광기에 휩싸인 상호확증파괴로, 양측 진영 모두 핵폭탄이 떨어지면서 끝나버린 200년 전의 전쟁에 용사와 함께 전쟁에 참여하지 못 한 채, 연구소의 샘플로 남겨진 지금.
그녀의 앞에 오랜 동면 끝에 모험의 동반자로 제시된 건, 자신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악마'의 아들, 반인반마의 알 수 없는 배달부.
과연 이 배달부의 손을 잡는 것이 옳은 선택인 걸까.
아니, 에리스는 생각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여기서 죽든가. 아니면 그의 요정이 되어주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운명에 순응하며 고개를 올려다본 순간, 에리스는 자신만만한 레이븐의 얼굴을 보고 어째서인지 옛날에 알고 있던 사람을 오랜만에 본 것만도 같은 향수와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본 거 같은 그의 얼굴.
쓸쓸하게 성검을 쥔 채, 인간의 운명을 그 등 뒤에 짊어지고 있던.
고독한 용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았어요. 당신의 요정이 될게요."
에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트럭 엘리자베스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러자 뜬금없이, 그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군번줄을 흔들며 말했다.
"단테."
"네?"
"단테, 내 이름이야. 잘 부탁해. 안전벨트 꽉 매. 도로가 울퉁불퉁하니까. 그럼, 가자. 의뢰인이 기다리겠다."{